“유하 학생,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가사 도우미 아주머니가 빨래를 개다가 화장실을 갔다 온 유하에게 말했다.

“네, 무슨 일인데요?”

유하는 웃으면서 물었다.

아주머니는 무릎이 아픈 듯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요 며칠 사이에 무릎 관절이 너무 안 좋아져서 말이야. 용하다는 한의원에서 침을 맞아도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소용이 없네.”

잔뜩 미안해하며 유하의 눈치를 살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한결의 옷가지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이거 한결 도련님 옷인데…. 두 번째 옷장 서랍에 넣어 주지 않을래?”

유하는 한결의 옷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잇, 별 어렵지도 않은 부탁을 어렵게 하고 계세요. 이리 주세요. 지금 바로 갖다 놓을게요.”

“그게…. 유하 학생 일 시키지 말라고 해서 말이야.”

“크큭. 저희 둘만의 비밀로 해요. 크큭.”

유하는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고마워.”

아주머니가 한시름 놨다는 듯 활짝 웃었다. 여전히 아픈 무릎을 주물렀다.

아주머니가 요즘 나이가 있으셔서 몸 여기저기가 안 좋으신 것 같아서 유하는 걱정되었다. 

유하는 한결의 옷을 들고 2층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한결이 방 들어가 보는 건 예전에 이사 올 때 한번 밖에 없었네. 워낙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녀석이라서…. 그때 참 결벽증 환자처럼 깔끔했는데 여전히 그렇겠지.

유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한결의 방문을 열었다.

여전히 흠잡을 데 없이 깔끔했다. 방향제를 좋은 것을 쓰는지 몰라도 방 안에서 희미하게 좋은 냄새가 났다. 침대 위에는 이불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책상 위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유하는 마구 어지럽혀져 있는 자신의 방이 생각났다. 화구 욕심이 많은 유하의 방은 붓과 물감, 스케치북으로 늘 어지럽혀져 있었다. 

게다가 한결이 불쑥 들어와서 민망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결도 처음에는 엉망진창인 유하의 방을 보고 놀랐지만 곧 익숙해졌다. 요즘은 방에 들어오면 유하가 어지럽힌 물건을 주섬주섬 주워서 대충 치워주고 갔다.

나도 한결이처럼 이렇게 깔끔하게 살고 싶다. 분명히 내방도 처음에는 이 방처럼 깨끗했는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어휴…. 한결이라서 나를 데리고 사는 거지 다른 곳이라면 어쩌면 지저분하다고 쫓겨났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하는 가져온 한결의 옷을 두 번째 서랍장에 넣었다. 명품 옷들이 보기 좋게 정리되어 있었다. 대충 넣어서 서럽장을 닫았다.

두리번거리다가 한결이 모은 피규어에 시선이 갔다. 아이언맨, 스파이던맨, 등등 유하도 좋아하는 캐릭터가 많았다. 다 고가의 피규어들이었다. 홀린 듯이 잠시 피규어를 구경했다.

부럽다. 돈이 많아서 이런 피규어도 사고. 나도 어렸을 때 무척 갖고 싶었지만 형편이 안 돼서 어머니께 사달라고 차마 말할 수조차 없었는데…. 부럽네. 

유하는 가장 좋아하는 아이언맨 피규어를 만지작거리다가 놓았다.

문득 책장 아래에 한가득 쌓여있는 뭔가에 시선이 갔다. 

유하는 호기심에 다리를 쭈그리고 앉았다.

무심코 손을 뻗어서 하나를 들어서 보았다.

곧 화들짝 놀라서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뭐야? 이게 다. 이게 다 뭐냐고!”

너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쩍 벌렸다.

유하는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동공이 지진이 난 듯 떨렸다.


*


유하는 휴게실에서 동훈, 소현과 함께 캔 커피를 마셨다. 셋이 만나서 공강 시간에 수다를 떠는 건 이제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그때 나머지 멤버인 한결이 유하를 쳐다보며 웃으며 다가왔다.

“어서 와.”

동훈이 한결에게 친절하게 말하며 캔 커피를 하나 건네주었다.

“고맙습니다.”

한결이 당연하다는 듯 유하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았다. 유하는 그런 한결을 유심히 관찰했다. 캔 커피를 마시며 안 보는 척 힐끔 보았다.

“선배, 오늘 날씨 좀 덥죠?”

한결이 손으로 부채를 만들어서 유하의 얼굴 앞에서 흔들었다. 소현과 동훈은 이제 아무렇지 않은 듯 신경 쓰지도 않고 커피를 마시며 최근에 본 영화 얘기를 했다.

뭐야, 이 녀석 자기도 더워서 얼굴에 저렇게 땀이 많이 나면서 왜 나한테 부채질을 해. 

유하는 괜히 얼굴이 빨개졌다. 

정말…. 나를….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유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커피 시원하네요. 오늘은 일찍 들어와요. 많이 더울 거래요.”

“어?”

“집에서 에어콘 빵빵하게 틀어놓고 작업해요. 전기세 걱정하지 말고.”

유하는 한결이 지그시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이상하게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시선을 못 맞추고 바닥으로 떨궜다.

“그…그럴까?”

한결이 휴지로 유하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언제부터 이 녀석이 나를 이렇게 챙겼는지 기억이 안 나네. 의식하고 보니 한 두 가지가 아니잖아. 유하는 한결의 손길에 멍하니 가만히 있었다.

한결은 유하가 너무 말이 없자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빤히 유하를 쳐다보았다.

“왜? 뭐 이상해?”

“그냥…. 말이 없어서 아픈가 해서요. 무리하지 마요. 공부 못 해도 되니깐 건강하게만 자라줘요.”

“뭐야? 그게.”

유하가 피식 웃었다.

소현과 동훈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는 듯 팔뚝에 난 닭살을 손으로 마구 문지르고 있었다.

“어휴…. 여기 좀 추운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닭살이 돋지.”

소현이 한결에게 그만하라 듯이 눈치를 주었다.

한결이 그런 소현을 보며 신경꺼라는 듯한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유하는 너무나도 확실해 보이는 한결의 반응에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강한결이 나를 좋아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찰싹 붙어서 유하를 챙기기 시작한 지는 꽤 됐다. 유하는 너무 익숙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도저히 안 믿겨. 한결아, 미안하지만…. 내가 원래 의심이 많아서 말이야.

유하는 갑자기 소현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한결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엇.”

유하의 손길에 놀란 소현이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여기… 속눈썹이 떨어져서. 확실히 여자애라서 속눈썹이 기네.”

유하가 소현의 뺨에 붙은 속눈썹을 손으로 떼서 흔들었다.

“아…. 아까워요. 속눈썹 하나하나가 다 귀한데. 여자의 자존심인데.”

소현은 유하가 건네준 속눈썹을 속상해하며 만지작거렸다.

유하는 은근슬쩍 한결을 보았다. 순간 일그러졌던 표정은 분명한 질투다. 그것도 그냥 질투가 아닌 개빡쳐보였다. 

한결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머리를 마구 쓸어올렸다. 한결이 화가 났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턱이 딱딱하게 굳었다. 소현을 눈에 가시라는 듯 쏘아보았다.

화…확실해. 나 좋아하나 봐. 미쳤어. 

유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째서 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한결의 눈이 이렇게 낮을 수가….

유하는 자신과 한결을 비교해보았다. 가난하고 평범하게 생겼지. 아니 어쩔 땐 솔직히 말해서 못생겼다. 게다가…. 성격까지 더럽고 이기적이었다. 그런 자신을 한결이 저렇게 과하게 질투할 정도로 좋아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좀 전에 다정하게 말을 걸고 챙겨주던 한결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있었다. 다 마신 커피 캔을 손으로 꽉 잡고 우그러뜨리며 마구 못살게 굴었다.

하하…. 

유하는 그런 한결의 모습에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뭐야. 게다가 난 남자인데. 남자라고. 저렇게 질투하는 티를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던 유하는 자신을 탓했다. 아싸에다가 쑥맥이라고. 언제부터 한결이 저랬는지도 몰랐다. 

주변에 그 수많은 미인을 놔두고 저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유하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한결은 멍하니 휴게실 창문 밖에 바람에 흔들리는 푸른 소나무 잎사귀를 보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같이 살다 보니 정이 들어서 저런 게 아닐까? 나도 동훈이 다른 사람이랑 친한 걸 보면 질투가 났으니깐. 물론 절대로 한결처럼 저렇게 티를 내진 않았지만.

유하는 답답한 마음에 남은 커피 캔을 한 번에 꿀꺽 마셨다. 

한결은 섭섭하다는 듯 유하를 쳐다보았다.

아… 이런 생각을 하니 왜 이렇게 한결의 행동이 부담스럽지. 거참 취향 한번 특이한 녀석이다. 아무리 커피를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목도 타고 속도 탔다.


*


유하는 오늘 수업이 일찍 끝나는 날이라서 한결보다 일찍 들어왔다. 자꾸만 하루 종일 한결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그동안 있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등골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몸이 떨렸다. 모든 게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유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도….

한결이 회사원 사귄다고 들었는데. 미인이라며. 과 애들은 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그럼 도대체 나는 뭐지? 애완동물 같은 건가.

유하는 갑자기 시무룩해졌다. 핸드폰으로 SNS에 올려진 사진을 찾아보았다. 최근에도 만난 듯 새로운 사진이 올라와져 있었다. 또 신나게 둘이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뭐야! 얼마 전에도 데이트했네.

어쩌면 한결은 한나의 말대로 애정결핍이라서 애정을 쏟고 집착할 대상이 필요한 건지도 몰랐다. 그게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말이다. 

“아니야…. 그러기엔…. 너무 지나쳐. 어제 방에서 본 것들은….”

유하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물증과 심증 모두 필요했다.

한 번 더 확인해 볼까? 자꾸만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런데…. 한결이 자신을 좋아하는 게 사실이라면 그 이후에 어떻게 할지 몰랐다.

몰라…. 

일단 확인이 먼저였다. 같이 안 살면 모르겠는데 일단 확인부터 하고 싶었다. 유하는 그동안 같이 살면서 아찔했던 순간들이 파바박 떠올랐다. 키스 미수사건, 한결의 의미심장한 발언들, 과한 스킨십 등등… 그 장면을 한꺼번에 떠올리자 한결에게 미안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두려웠다. 

유하는 냉장고로 가서 맥주캔을 하나 꺼냈다. 시원한 감촉에 저절로 한 모금 마시고 싶었다.

맥주캔을 한 모금 마시자 정신이 흐릿해졌다. 맥주의 탄산이 식도를 긁는 청량감이 좋았다.

“크악. 이 맛에 맥주 마시는 거지.”

유하는 멍하니 거실 소파에 앉았다. 하루종일 답도 없는 고민을 하다 보니 피곤했다. 소파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조명이 환하게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빡거렸다 떴다. 조명이 흐릿해졌다.

“하암. 졸리네.”

유하는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아…. 이렇게 잠들면 맥주가 너무 아까운데. 아…졸려. 너무 졸리다.

잠깐 눈 좀 붙이다가 금방 일어나서 나머지 마셔야지.  

알코올이 들어가자 몸에 긴장이 풀렸다. 유하는 온몸에 힘이 쫙 빠졌다. 

곧 잠에 빠졌다.

철컥.

문이 열리고 한결이 들어왔다.

한결은 술에 취해 잠든 유하를 발견하고 화색을 뛰었다.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눈빛이 먹잇감을 발견한 듯 야릇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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