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형이 안에 있느냐.”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얼굴을 한 태형이 드르륵, 소반을 저만치 밀고는 벌떡 일어났다. 소리가 난 미닫이문 쪽을 보던 윤기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보료 위에서 동동거리는 태형을 올려다봤다. 어, 어떻게 해요. 우, 우리 할아버지예요! 할아버지가 나, 나 불렀어요! 당황하면 아무 말이나 먼저 뱉고 보는 편이라는 건 처음 소개팅을 했을 때부터 알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너무 귀여운걸. 윤기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절대로 태형을 당황하게 만들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이 귀여운 모습을 다른 누군가가 본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으니까. 그는 말없이 제 시선 끝에 걸린 태형의 손을 잡아당겼다. 중심을 잡지 못한 태형이 보료 위에 다시 철퍼덕 주저앉았다.

버둥거리지 못하게 팔짱을 끼고 제게 몸을 꽉 밀착시킨 윤기가 태형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소곤댔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떨어. 응? 그러자 침을 꿀꺽 삼킨 태형이 이번엔 윤기의 귀에 입술을 갖다 대고는 역시나 작게 재잘댔다. 위급한 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구는 것이 귀여워 윤기는 하마터면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제가 머리에 빵구난다고 했던 말이요. 그거 진짜 거짓말 아니거든요. 우리 할아버지 지팡이 얼마나 잘 휘두르는지 아세요?”
“이렇게 예쁜 손자 채가는데. 나 같아도 머리에 빵구 내지.”
“저 지금 정말 진지하거든요.”
“…나도 진지하거든 서방님.”
“서방…! 그런 말, 혹여나 우리 할아버지 앞에서는 절대로 하면 안 돼요!”

손을 휘휘 저어대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짓는 태형의 얼굴을 본 윤기가 참지 못하고 입을 맞추려고 할 때였다. 큼큼! 보다 우렁차게 목을 끄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괄괄한 도선의 목소리가 터졌다. 거, 태형이 안에 있냐고 물었다. 이햐, 소리꾼은 목을 가다듬는 소리마저도 다르구나.

“네… 예, 할부지, 태, 태형이 여기 있어요….”
“손주며느리 될 아가도 안에 있고?”

대들보 앞에 뒷짐을 지고 서 있는 도선이 안에서 제대로 대답이 터지지 않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떼잇.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 식사를 함께 드는 것을 그랬다. 골이 깨질 것 같지만 않았어도 아침 식사 자리에서 손주며느리 인사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지난밤, 잘 마시던 막걸리를 박가(家)네가 다른 주종으로 바꾸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머리가 아플 일은 없었다. 이래서 사람은 한 우물만 진득하니 파야 하는 법이거늘. 집안에 경사가 난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 우를 범하고 말았다.

“……윤기 씨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기는. 인사 드려야지.”
“하아….”
“나만 믿어. 적어도 우리 서방님 이마 빵구나게 만들지는 않을 테니까.”

입술에다 맞추려던 것을 가볍게 뺨에 쪽, 맞추고는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한복 입어도 돼? 그럴 마음은 없었지만 어떤 반응을 할까 싶어 뱉은 말에 태형이 윤기가 생각한 대로 곧장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 혈압약 드신다고 내가 말 안 했구나 그쵸?

“나 불효자는 맞는데, 패륜아는 되기 싫어요 윤기 씨.”
“아니, 서방님 너는 말을 무슨 또 그렇게 해?”
“한복은 다음에요. 다음에 나랑 있을 때 입어요.”
“진짜…? 나 진짜 또 입는다? 나 입으라면 진짜 입는 사람이야.”
“……끄응.”

태형은 지난밤이 떠올랐다. 뭐든 생각한 것을 뛰어 넘어버리는 윤기의 행동력과 다른 이들과는 넘사로 도드라지는 취향을 몸으로 직접 깨닫지 않았던가. 다음에 입으라고 했으니 윤기는 아마 모친이 준 한복을 서울로 가져갈 것이고… 가져가서 또 입을 것이다. 밖이 됐든 아니면 침대가 됐든. 입고 또 막…. 또 저고리 풀어 달라고 그러고, 다 벗고 속곳만 입고는 또…!

태형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는데 손가락으로 턱을 치켜 올린 그가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네?”
“나 가야금 쳐줘.”





*






대답이 없는 방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음이 터져 나왔다. 인사를 하러 나오기 위해 준비를 하는 모양으로 생각한 도선이 몸을 돌려 춘미당을 훑었다.

“날씨가 참으로 좋구나….”

쾌청한 하늘을 바라보며 도선이 길게 자란 제 턱수염을 손등으로 훔쳤다. 차려입은 쾌자의 끄트머리가 청량한 바람에 하늘거렸다. 파란 하늘과 초록의 잔디가 시야 전체를 덮고 있어 싱그러움을 자아냈다. 세상이 만들어 낸 조화 속에 그림처럼 지어진 집.

마당 가운데에는 다른 고택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작은 정원 하나가 있었다. 고아하게 뻗은 적송 세 그루와 그 아래를 둥그렇게 꾸미고 있는 갖가지 정원목들. 멀리서 보면 나무와 꽃밖에 없는 정원쯤으로 보이지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그 사이로 아담하게 만들어진 연못 하나를 볼 수가 있다.

연못은 원래 춘미당을 처음 지을 때 발견한 우물 자리였다. 다른 가옥 같으면 시야에 걸림이 없이 툭 트인 마당을 위해 우물을 덮었겠지만 효중은 그러지 않았다. 본디 강물은 흐르고 샘은 솟아야 하는 것이니까. 순리를 거스르면서까지 집을 지어 올리고 싶지 않아 효중은 결국 다른 가옥들과는 달리 정원을 본채 뒤에서 앞으로 뺐다. 우물을 다져 연못으로 만들고 그 주변에 나무를 심어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이 아름다운 정원을 누리게 했다.

마당의 정원은 도선이 춘미당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춘미당이 뜻하는 바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거스르지 않는 순리. 대를 이어 지켜나가야 하는 것. 반드시 물려줘야 하는. 나는 반드시 이 집을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다. 조상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암, 그렇고말고. 그런 다짐을 하던 때였다. 드르륵. 도선의 뒤에서 미닫이문이 열렸다.

“할부지….”

뒷짐을 진 채로 몸을 돌렸다. 경거망동하지 않는 도선의 자태는 태어나고 자라며 학습한 것이었다. 아주 천천히 뒤로 다 돌아섰을 때였다. 대청마루 끄트머리까지 걸어 나온 태형이 별안간 무릎을 꿇어앉았다. 난데없는 행동에 태형의 정수리를 의아하게 보던 도선이 이번에는 그 옆으로 똑같이 무릎을 꿇어앉는 사내에게 눈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사내는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생경한 얼굴이었다. 대체, 누구기에 태형의 뒤를 따라 나와 제게 인사를 하는 것인지. 그건 그렇고 어째서 손주며느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지.

열린 방 안으로 시선을 돌린 도선을 부른 건 처음 보는 사내였다. 어르신. 처음 뵙겠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낮은 목소리와 몸에 밴 예절에 도선이 가만히 물었다.

“자네는 나를 아는가…?”
“…인사드리겠습니다.”
“…….”
“태형이 남자친구, 민윤기라고 합니다.”





*







와장창! 쨍그랑! 에구머니나!

태형이 예상했던 대로 춘미당은 난리가 났다. 도선의 방 안에서 집기들이 박살 나고 깨지는 소리에 일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와 본채를 기웃댔다. 한참을 우당탕거리는 소음이 터지던 방의 문이 드르륵 거칠게 열리며 그 사이로 종민이 튀어나왔다. 청심환, 청심환 가져오너라!!!! 열린 문밖으로 도선의 커다란 목소리가 우레처럼 울렸다.

신발을 신을 생각도 못하고 대들보 아래까지 내려 온 종민은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집안일을 돕는 도우미의 손을 잡고 다급하게 말했다.

“이모님, 할아버님… 할아버님 청심환이요!”
“어이쿠, 일났네 일났어!”

사색이 된 도우미가 곧장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춘미당에서 오래 일한 도우미는 도선이 청심환을 찾을 때가 흔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청심환을 찾았던 적이 언제였더라.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아들인 도현이 가업을 잇는 것을 포기하고 요리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리고 예뻐 죽는 막내 손자가 게이임을 밝혔을 때였다. 그렇다면 이번엔 대체 무슨 일이기에 청심환을 찾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큰일임은 분명했다.

도우미가 나무쟁반에 청심환 한 알과 사기로 된 대접에 냉수를 함께 받쳐 나오는 것을 본 종민이 기다리지 못하고 앞까지 뛰어가 쟁반을 넘겨받았다. 혹여 도울 일이 더 없을까 생각하던 도우미가 뛰어 올라가던 종민에게 물었다. 혹시, 사장님은 지금 상황 알고 계셔? 도우미가 사장님이라 부르는 이는 태형의 부친, 도현이였다. 갑자기 벌어진 난리 통에 연락 넣는 것을 깜빡한 종민의 얼굴이 더욱 하얗게 질려갔다.

“아버님께는 아직 연락을 못 드렸는데….”
“내가 연락 넣을까?”
“그래 주실래요?”
“그럴게. 어서 가지고 들어가!”
“감사합니다 이모님.”

도선의 방안은 아비규환이었다. 각을 맞춰 정리해두었던 침구들은 모두 흐트러졌고 그 앞으로 놓여 있던 서안(書案)은 옆으로 벌러덩 쓰러져 있었다. 서안 위로 올려 두었던 서책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모두 그 언저리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6칸으로 짜놓은 세 살창(細-窓) 양옆으로 4칸짜리 사방탁자가 놓여 있는데, 그곳에 맞춰 진열되어 있어야 할 물건들은 이미 바닥에 던져져 있거나, 아니면 모두 박살이 나 있었다. 그리고 방 한 가운데에는 태형과 윤기가 목석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할아버님, 제발, 제발 고정하세요.”
“이거 놓거라 태석아.”
“할아버님.”
“좋은 말로 할 때 놓으래두!”

태석이 상박을 끌어안아 도선이 움직이지 못하게 막는 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방안에 놓인 모든 것이 박살이 날 것 같았다. 잡순 나이에 비해 체력은 또 어찌나 좋은지 어지간하면 힘으로 빠지지 않는 태석이 아까부터 땀을 뻘뻘 흘려댔다. 멀찌감치 뒤에 선 채로 말없이 광경을 목도하던 현주가 도선을 붙잡고 애를 쓰는 자신의 큰아들을 보다 못해 입을 열었다.

“아버님 그만 하셔요. 이러다 쓰러지시겠어요.”
“애미, 애미 너는 다 알고 있던게지?”
“…….”
“태형이 이 녀석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걸 다 알아 놓고서. 어떻게 나한테 그동안 말도 없이!”
“이렇게 경을 치시니까 말씀을 못 드린 거죠.”
“뭐, 뭣이!?”

크게 잘못한 게 없다는 듯, 동요가 없는 현주의 목소리에 분노를 참지 못한 도선이 억, 소리를 내며 또 던질 것이 없는지 손을 뻗을 거리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미닫이문이 열리며 종민이 쟁반을 들고 들어섰다.

“여보, 청심환 여기요.”
“고마워요 여보.”

가깝게 다가온 종민이 태석에게 쟁반을 건네주고 뒤로 물러섰다. 할아버님, 청심환, 청심환 가져왔어요. 도선이 청심환을 받아 그대로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한참을 씹어 꿀꺽 삼키고 대접까지 받아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야 심신의 안정이 좀 되었는지 몸에서 힘을 풀었다. 태석이 부축하며 보료 위에 도선을 앉혔다. 뒤로 물러나며 쓰러져 있던 서안을 원래 있던 자리에 놓자 도선이 들고 있던 사기대접을 그 위에 놓았다.

“태형이 네 이놈!”
“……할부지.”

네 이놈! 하고 외치는 목소리에 태형이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어찌나 목이 좋은지 꼭 호랑이가 포효하는 기개 같았다. 어릴 적에도 이렇게 부를 때마다 놀라 뒤로 자빠지거나 도현의 등 뒤로 숨곤 했는데 이제는 다 커서 뒤로 자빠질 수도, 그렇다고 부친의 등에 숨을 수도 없었다.

별 채 앞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도선은 윤기의 소개말에 그대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 태형은 도선이 뒤로 넘어가려는 것을 딱 두 번 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유치원을 다닐 때였다. 아버지가 더 이상 판소리를 하지 않을 거라고 선언했을 때였고, 다른 한 번은 제가 커밍아웃을 했을 때였다. 인생에 딱 두 번 봤던 그 순간이 이제는 세 번이 되었다.

빠른 순발력을 가진 윤기가 벌떡 일어나 뒤로 넘어가려는 도선을 붙들었고, 태형은 빠른 스피드로 태석과 종민, 그리고 모친 현주를 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방에 죄인처럼 꿇어앉게 됐다.

태형의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옆에 있는 윤기도 신경이 쓰일뿐더러, 간밤의 섹스도 떠올랐다. 차라리 춘미당에 데려오지 말 걸 그랬다. 아니 그냥… 내가 가족들한테 커밍아웃을 하지 말걸. 그냥 평생 나만 괴로울 걸….

짓누르는 무거운 감정은 여전히 태형을 좀먹었다. 숱하게 보낸 과거의 밤처럼. 그걸 알 리 없는 도선은 여전히 호통을 칠 뿐이었다. 

“어떻게 집 안에 사내 녀석을 데리고 올 수가 있어!”
“…할부지, 내가 말 했잖아. 나… 나 남자 좋아한다고.”
“아니, 그래도 이놈이!”
“나… 여자랑 결혼하기 싫어… 아니, 결혼 못 해요.”

다시금 성이 나는 도선의 표정에 태형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할아버지…. 나도 얼마나 노력 했는데. 노력해봤다는 말끝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후드득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윤기는 태형이 가진 괴로움과 죄책감을 보았다.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성 정체성이 혹여 춘미당에 누가 될까 수없이 고민하며 홀로 앓던 숱한 밤들까지도.

얼마나 아팠을까. 또 얼마나 괴로워했을까. 애처롭게 떨며 말하는 태형을 그는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다. 자신을 낳아 준 모친께서 한 말이었다. 그녀는 이보다 더한 순간도 겪었고 이겨냈다. 물론 많은 이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응당 그러는 것이 맞다고 그는 역시나 그녀에게 배웠다. 윤기에게는 지금 이 순간 태형이 절실했다. 그리고 제가 절실한 만큼 태형이 가진 죄책감을 벗게 해 주고 싶다. 나와 태형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도 없다. 못했던 적도 없거니와.

머리에 빡, 힘을 준 윤기가 입을 열었다. 저, 할아버님. 보다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에 도선이 펄쩍 뛰었다.

“누가 네 할애비야! 누가!”
“그럼 어르신,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
“제가 사내라서 싫으신 거라면 죄송합니다.”
“그럼 썩 꺼지게.”
“죄송하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뭣이?!”

도선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하는 윤기의 목소리에 태형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뒤로 물러나 있던 태석과 종민, 그리고 현주까지 놀란 얼굴을 했다. 제일 기막혀 하는 건 당연히 도선이었다.

“태형이는 가족을 정말 많이 사랑합니다.”
“…….”
“남자를 좋아한다고 가족들에게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맞선을 보라고 종용하신 어르신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할 만큼이요.”
“…….”
“여장한 남자라도 데려오라고 하신 어르신의 말씀에 여장을 한 남자를 찾아볼 정도로 어르신의 말씀이라면 태형이는 끔뻑합니다.”

덤덤하게 뱉어 내는 윤기의 목소리를 듣던 태형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볼을 타고 바닥으로 빠르게 떨어졌다. 과거를 모르는 남자가 다 안다는 듯이 해주는 말이 이렇게도 위로가 될 줄이야. 등을 토닥여주며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라고 묻는 것도 아닌데. 마음을 헤집고 들어와 모든 것을 다 본 것처럼 말해주는 게 이렇게 저를 울게 할 줄은. 태형은 몰랐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찰나였다.

“…….”
“저는 그런 태형이를 사랑하고요.”
“…….”
“……!”

뒤이어 터지는 난데없는 고백에 도선을 뺀 방안에 있던 이들이 헉, 소리를 내며 놀랐다. 그 중 가장 놀란 것은 하염없이 눈물을 팡팡 쏟아 내던 태형이었다. 태형은 젖은 눈을 닦을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들어 윤기를 쳐다봤고 그는 진득하니 시선을 맞춰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서 여기에 왔습니다.”
“…….”

태형이는 극구반대를 했지만 사실 제가 오고 싶었습니다. 태형의 조부로 어르신을 뵙고 싶었고요, 사실은… 명창(名唱)으로 조금 더 많이 뵙고 싶었습니다. 기하나 죽지 않고 제가 원했던 것까지 말하는 윤기를 보며 도선은 말문이 막혀 허? 하고 어이없는 소리만 터뜨렸다.

“어르신이 받아 주실 때까지 올 생각이고요.”
“……하?!”
“이렇게 와서 말씀 드렸으니 앞으로 태형이에게 계속 맞선보라 하시면….”
“허면, 허면 어쩔 건데! 허면!”
“어르신처럼 그 맞선 찾아다니며 제가 계속 해코지 할 거예요.”
“허?”
“제가 그런 걸 아주 잘합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크게 타격도 안 받고요, 끄덕도 안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둬 주세요. 태형이가 어르신 사랑하는 만큼, 어르신도 태형이를 위해 그만 해주세요.”

이쯤 말하면 알아듣겠거니, 윤기는 생각했다. 그러나 당치도 않는 생각이었다. 도선이 이 정도로 끝날 위인이었다면 태형이 여장을 한 사람을 찾지도, 또 소개 받지도 않았을 것임을. 애석하게 윤기는 모르고 있었다.

“이놈, 이거… 이거 아주 말하는 본 새가 아주!”
“할부지, 다른 집 아들한테 이놈이 뭐야, 이놈이….”
“태형이 너 조용히 못해?!”
“…….”
“가만? 그러고 보니 그럼 간밤에 처자 하나를 봤는데.”

내 본 건 누구야? 도선의 묻는 말에 태형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일순 멈췄다. 뒤에서 긴장을 풀어가던 식구들도 아차, 하고 표정을 굳혔다. 술에 취해 잊고 있을 줄 알았는데. 도선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날렵한 눈썰미를 가진 도선은 그 처자가 입고 있던 한복이 며느리의 침선방에서 나온 한복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도선이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어? 내가 어젯밤 본 건 누구냐니까!

“아, 그거 접니다. 어르신.”
“……?!”
“이건 조금 나중에 말씀 드리려 했는데….”

어색하게 미소 짓던 윤기가 겁 없이 도선의 앞으로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숙여 도선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이고는 다시 무릎걸음으로 태형에게로 물러 나올 때였다. 제가 들은 말이 사실인지, 도저히 믿기 힘든 얼굴을 한 도선이 형용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덜덜 떨며 서안 위에 두었던 대접을 손에 쥐었다.

“이…, 이…! 이것들이 감히 나를…! 이 할애비를!? 이 춘미당을…능멸해!!!?”

대접을 집어 방바닥에 패대기친 것은 찰나였다. 쩍 하고 여러 조각으로 갈라진 사기 조각 중 가장 큰 조각이 태형에게로 향한 것도. 그걸 본 윤기가 태형의 앞으로 몸을 내던진 것도. 그 조각이 하필이면, 윤기의 눈 언저리를 스치고 떨어진 것도.

모두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사기 대접 조각이 뭉툭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툭, 투둑. 태형의 눈물이 떨어지던 곳에 이번에는 눈물과는 정반대의 색이 바닥을 적셨다. 붉은 핏방울이었다.

“유, 윤기 씨!”

윤기의 얼굴보다 바닥의 핏방울을 더 먼저 본 태형이 그를 불렀다. 평소라면 고개를 들고 쳐다봐 줄 사람인데 고개를 들지 않고 그대로 있는 모습에 태형의 심장이 덜컹 내려 앉았다. 윤기 씨, 나 좀 봐요. 응? 네? 푹 숙인 고개 사이로 두 손을 집어넣고는 억지로 들어 올리는자 손가락 한 마디만큼 그어진 상처 사이로 핏물이 빠르게 흘러 이번엔 윤기의 하얀 셔츠 깃에 떨어졌다. 금세 시뻘건 피로 흠뻑 젖는 볼을 보는 순간, 태형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눈앞에 있는 윤기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머, 윤기 씨…! 여보, 윤기 씨 좀….”
“태형아, 나 괜찮아.”
“아버님, 데리고 나가 보겠습니다.”
“…….”

윤기의 얼굴을 본 종민과 태석이 양옆으로 윤기를 부축해 일으켰고, 기어코 일을 만들고 말았다는 사실에 착잡한 얼굴을 한 현주가 꾸벅, 도선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빠져 나갔다. 방안에는 도선과 태형, 단 둘이 남았다.

벌써 엉기기 시작하는 바닥의 핏자국을 태형이 말없이 한참 볼 때였다. 도우미에게 소식을 듣고 허겁지겁 춘미당으로 올라 온 도현이 거친 숨을 내쉬며 도선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리저리 뒹굴고 깨진 집기들과 태형의 앞에 떨어진 핏자국들을 보며 앞서 상황을 짐작한 도현이 구긴 얼굴을 풀지 않고 도선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얇은 유리창 같던 방안의 적요를 깨뜨린 건 태형이었다.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든 태형이 도선을 보며 물었다.

“…할아버지 깡패야?”
“뭐? 뭐 이 녀석아?”
“나 지금 할아버지 깡패냐고 물었어요.”
“…저, 저…!”
“사람이… 사람이 맞았잖아요! 물건을 왜 던져요!? 차라리 나한테 던지지!”
“그렇지않어두 너한테 던진거여! 저놈이 들이대서 맞을 줄, 내 알고 있었는 줄 알어!?”
“몰라, 모르겠고요, 할아버지 지금 엄청 못됐고 별로예요.”
“……!”

이를 꽉 깨물고 말을 내뱉은 태형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도선도, 도현도, 모두 놀랐다. 태형에게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나는 여태 살면서 할부지를 제일 존경하고 할부지를 언제나 자랑스러워했는데.”
“…….”
“지금은 할아버지 안 좋아요.”
“…….”
“창피해.”


















1. 결국 완결내기를 포기하고 하고 싶고 쓰고 싶은 걸 조금 더 써보기로 했습니다. 끝까지 함께 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ㅠ..ㅠ
2. 그렇다고 완결이 먼 건 아니지만... 섹스는 한 번 더 나올 거 같아요.
3. 도선의 연령은 70대 후반입니다. 태어나신 때가 대략 1940년대 초반이겠네요. 많이 고지식할거라 생각하며 썼습니다. 완결까지 보다 더 나은 어르신이 될 수 있도록 쓸게요. 
4.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이나 모레 또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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