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혹시 내가 말이오...”

“예?”

 

“내가 혹시 술 취해서 실수한 건... 없는지”

“...........어... 없습니다!”

 

“정말..입니까?”

“진짜 없습니다. 그게 마음에 걸리셨습니까?”

 

“사실은 좀....”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후.....내가 뭐 헛소릴 했다거나 막 그런 거... 없는 거지....요?”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정말 저는 괜찮습니다. 그리고 헛소리라니요. 어디 형님이 헛소리를 하게 생기신 분입니까?”

 

“하하하하, 아우님이 사람 보실 줄 아는구만?”

 

멋쩍고 부끄러워서 공연히 웃음으로 무마시켜 본다. 주막집으로 가는 조용한 숲길. 나뭇잎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구름이 끼어 다른 날보다는 어둡다. 그러나 아침을 맞이하는 새들의 청신한 울음소리는 듣기 좋다. 그 중 가장 좋은 건 태형과 마주 보고 걷는 일이다. 석진과 태형은 제 스스로도 모르게 환하게 웃고 있다.

 

“그런데 이 시각에는 어쩐 일로. 어디 다녀 오시는 길입니까?”

“아. 응. 좀 볼일이 있어서... 하 배가 고파 죽겠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좀만 참으시지요”

“그 주막집 고기국밥 맛은 정말... 죽어도 못 잊을 걸세”

 

“그렇지요? 귀한 음식 많이 드셔 보셨을 텐데 그런 분의 입맛에 맞는 거라면 정말 맛있는 게 맞을 겁니다”

“귀한 음식을.. 많이 먹어 봤을 거라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으십니까?”

“그래 뭐 그렇기야 하지. 음식은 귀한 것을 많이 먹어 봤지만 귀한 대접을 못 받아 봐서”

 

“....................”

 

 

석진의 말에 뼈가 있다. 어쩐지 석진에게 마음이 끌렸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그의 그늘 때문이었을 것이다. 왜 석진이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고백하는지는 알 만하다. 태형이 짐작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돈이 없다고 해서, 혹은 보통의 사람과 지향하는 바가 조금 다르다고 해서 멸시를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태형이다. 자신이 바로 그러한 편견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많이.. 힘드십니까?”

“아니 뭐.. 좀 심란한 일이 있어서”

 

“무슨 일이요?”

“그런 게 좀... 있어”

 

“아아 네”

 

차마 태형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을 용기는 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 집안에서 살고 계십니까? 태형이 반문할까봐 무섭다. 제 낯에 침 뱉는 격이다. 하지만 태형에게라도 털어 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아무도 곱게 들어 주지 않을 고민이지만 태형은 순순히 귀를 기울여 줄 것도 같다.

 

“어릴 때 혼인을 했어”

“진짜요....?”

 

“어차피 부인이랑은...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지. 그저 좋은 친구일 뿐이고”

“아아....”

 

“그러니 부모님은 압박이 심하시고. 뭐 그런 상태야”

“대강 알겠습니다”

 

 

정말 대강의 줄거리만 요약해서 전달하는데도 불구하고 입이 쓰다. 태형은 자세히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만 묵묵히 끄덕인다.

 

 

“그런데 아우님은... 장가를 안 가셨나?”

“저요? 저는 아직 안 갔습니다”

 

“이렇게 좋은 인물을 두고?!”

“저야 워낙 가난해서요. 누가 시집을 오려고나 합니까”

 

 

 

태형 역시 자신이 짊어진 고민의 핵심을 간단히, 그러나 명료하게 말한다. 석진에게 이미 자신이 사는 모든 꼴을 내보였다. 그러니 새삼 나는 가난뱅이가 아니라고 부인할 필요도 없다. 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 솔직히 털어 놓고 나니 오히려 마음은 가벼워진다.

 

“인물이 보배인데 뭐!”

“제 얼굴 뜯어 먹고 살 순 없지 않습니까”

 

“쳇.. 나 같으면....”

“예?”

 

“아, 아니야”

 

나 같으면 맨발 벗고 달려가겠구만 - 석진은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중얼거리려다가 얼른 깨닫고 입을 틀어 막는다. 하마터면 곤란한 이야기를 할 뻔했다. 새들의 울음이 시끄럽기까지 하다. 구성진 새들의 노랫소리에 풀벌레들도 일제히 음을 맞추어 화답한다. 이른 아침은 고요한 시간인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다. 밤에는 어둠에 눌려 숨죽이고 있던 것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 요란을 떤다.

그러나 이들의 요란은 지난 밤의 어둠이 없었다면 새삼스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밤이 어두웠기에 아침의 밝음과 소란스러움은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둠이 마냥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영원한 어둠은 없을 것이다. 긴 겨울밤도 언젠가는 아침이 되지 않던가.

그동안 이런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어려웠는데, 태형은 석진과 함께만 있으면 이렇게 머릿속이 밝고 맑아지는 걸 느낀다. 신기한 일이다.

 

 

“어... 비 냄새다”

“무슨 냄새?”

 

“비 냄새요. 잘 맡아 보세요”

“아... 이 냄새? 이 냄새가 비 냄새야?”

 

“예. 비 오기 전에 딱 이런 냄새가 납니다. 비가 오려나....”

“헉, 소나기?”

 

 

쌉싸름한 흙냄새가 물씬 풍긴다. 태형은 곧 소나기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뿌연 하늘을 올려다 본다. 과연 그의 말대로 아까보다 조금 더 날이 어두워진 것 같다. 아침이 되다가 만 것처럼 하늘이 잿빛이다.

 


“얼른 주막에 가서 우장이라도 하나 얻어야겠습니다. 지금 빈손이시지 않습니까?”

“어어 그러게. 비가 온다는 생각은 못 했어서”

 

 

하늘의 변화는 참으로 순식간이다. 태형이 비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말한 지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머리 위가 꾸물꾸물 검게 변하더니 갑자기 습기 실은 바람이 분다. 그러더니 이윽고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참 변덕스러운 날씨다.

 

 

“헉, 벌써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앗 그러네... 뛸까?”

 

“예. 뛰실 수 있겠습니까?”

“어허 이 사람이 날 뭘로 보고.....”

 

“제 손 잡으십시오. 길에 돌이 많습니다”

“어어....?”

 

“어서요!”

 

 

생각보다 비는 성미가 급한 것 같다. 사나운 기세로 잎사귀들을 두들기기 시작하는 빗방울 사이로 태형이 내미는 손. 석진은 얼떨결에 그의 성화에 못 이겨 손을 잡는다. 차가운 빗물이 젖지만 분명히 느껴지는 것이 있다. 지금까지 쥐어 본 그 어떤 손보다 따뜻하다. 너무도 따뜻하고 안락해서 뜻밖에도 잠이 쏟아질 것 같다. 태형은 석진의 손을 쥐고 달리기 시작한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을 피하지 못하고 두 사람은 흠뻑 젖어 간다. 비를 피하려고 힘껏 달리면 달릴수록 오히려 반대로 더 깊이 젖는 빗물.

얼마나 달렸을까. 그때 태형의 눈에 문득 낯익은 빈 집이 하나 보인다. 이곳은 마을의 변두리고 지금 태형의 눈에 띈 집은 주인이 잠깐 타관에 나가 비어 있는 집이다. 태형은 망설이지 않고 석진을 그리로 이끈다. 석진은 방향을 틀어 딴 곳으로 내달리는 태형에게 이유도 묻지 못하고 끌려 간다. 태형과 석진이 다다른 곳은 낯선 빈 집의 처마 밑. 태형의 집과 비슷한 초가집이라 대문 같은 것은 없다. 사립문을 힘껏 밀치면 누구든 들어설 수 있게 되어 있다.

 

“빈 집입니다. 잠깐 비나 피하고 가시죠”

“어? 응....”

 

빗발은 점점 거칠어진다. 이제는 빗방울을 때려 맞은 자리가 욱신거리기까지 한다. 이대로 빗속을 뚫고 달리는 것은 더는 무리다. 석진과 태형은 빈 집의 마루에 걸터 앉아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래도 아주 흠뻑 젖어버린 상태는 아니다. 드디어 비를 피할 곳을 찾아 앉았는데, 갑자기 실없이 웃음이 난다. 석진은 그래서 밑도 끝도 없이 키득거리며 웃고 만다. 그런 석진을 의아한 듯 쳐다보는 태형.

 

“왜 그러십니까?”

“아니, 몰라. 웃음이 나네”

 

“...................?”

“나도 모르겠어. 기분이 왜 이렇게 좋지?”

 

“정말이요?”

“응. 희한하다. 아니 나만 이래?”

 

“저는 그런 형님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나는데요?”

“아니 진짜 이상하네... 왜 이렇게 자꾸 웃음이 나지”

 

“웃으시니 참 보기 좋습니다”

“어?”

 

“웃으시니 보기 좋다구요”

 

 

이상하다. 모든 것이 다 이상하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는 것도, 태형을 보고 실없이 웃음이 나는 것도. 또 이렇게 별 것 아닌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도. 태형의 눈동자에 자신이 가득 차 담긴 것도 모두가 이상하다. 석진은 문득 자신이 엉덩이를 붙인 빈 집의 마루가 크게 흔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상해, 나만 흔들린 건가. 태형은 고요하다. 그렇다면 자신만 흔들린 게 틀림없다. 이건 대체 무슨 계시일까. 석진은 일순간 이상한 회오리에 휘말린 것 같은 기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비에 젖어 나른한 태형의 눈동자는 더더욱 그렇다.

 

나는 사내를 좋아해 -

 

태형의 귓전을 다시 한번 천둥처럼 거세게 치는 소리가 있다. 태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니 그게 어때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런데 그 소리는 생각보다 끈질기다. 고장 난 자명종처럼 간단없이 계속 태형의 귀에 울린다.

 

나는 사내를 좋아해 -

 

그래서 대체 뭘 어쩌라는 건데. 이것은 분명 지금의 석진이 제게 하는 말은 아니다. 석진은 힘껏 달리느라 거칠어진 숨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는 중이므로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너도 사내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

 

이번에는 그 의문의 목소리가 전혀 다른 말을 지껄인다. 아니, 방금 뭐라고? 내가 뭘 어쨌다고? 태형은 도저히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반문한다.

 

정 궁금하면 입술이라도 맞춰 봐 -

 

콰광쾅- 하늘을 깨뜨릴 듯 무섭게 울부짖는 천둥 사이에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는 목소리. 태형은 그 이상야릇한 유혹에 점점 빨려 들어간다. 추녀에서 하염없이 빗방울이 줄기를 이뤄 떨어진다. 날은 어둡다.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는 비밀을 만들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다.

 

 

“형님”

“응?”

 

“저만... 자꾸 이상한 소리가 들립니까?”

“무슨 소리....?”

 

“형님은... 괜찮으십니까?”

“왜 그래?”

 

 

갑자기 달라진 태형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석진은, 곧 자신의 눈앞이 완전히 암흑으로 덮이는 것을 지켜 보아야만 했다. 왜 갑자기 눈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까? 그런 의문이 든 순간 따뜻하고 촉촉한 무언가가 자신의 마른 입술을 가르는 걸 느꼈다. 이게 뭐지? 석진은 눈이 가려진 채로 촉각과 후각으로만 그 정체를 알아 맞혀야 했다. 말캉말캉하다. 달다. 비 냄새가 난다. 이 쌉싸름하고도 달콤한 것의 정체는 무엇일까?

석진은 그것의 신비로운 맛을 확실히 느끼기 위해 자신의 혀를 내민다. 그 달콤 쌉싸름한 부드럽고 따뜻한 것을 제 혀 위에 올려 놔 본다. 이것은 살아 있는 것 같다. 꿈틀거린다. 꿈틀거리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제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듯하다. 희한한 물건이네 - 석진은 조금 더 신경을 기울여 그것의 크기와 촉감, 그리고 온도와 맛 등 다양한 정보들을 종합해 본다.

 

그리고 얼마 후 석진은 답을 얻었다.

 

 

“하......”

 

그것은 태형의 입술이었다.

 

 

 

 

 

 

 

 

 

맞닿은 것은 입술과 입술이었다. 그러나 입술이 화끈거리기보다는 마음이 얼얼하다. 어쩌면 정말로 맞닿은 건 입술이 아니라 마음과 마음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손은 자꾸 가슴에 가 있다. 얼얼한 마음을 달래느라고 손으로 아무리 만져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일렁거리는 이상한 감정을 잠재울 수가 없다. 정말 그 아이도 내게 마음이 있는 것일까. 바깥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다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다른 모든 사람들을 의심한다 하더라도 지금 석진은 태형 하나만은 믿고 싶다. 마음을 제 뜻대로 끌고 나가는 일은 언제나 힘들고 괴롭다.

이번에도 석진의 심장은 그 주인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것 같다. 귀를 닫고 제멋대로 뛰쳐 나가려고 발버둥 친다. 안이 답답하다고 발을 구르는 심장은, 지금 손을 치우고 길을 열어 주면 달려 가 순식간에 태형의 집 앞에 닿을 것 같다. 지금쯤 그 아이도 내 생각을 하고 있겠지 - 태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돌려 보낸 걸 원망하지는 않는다. 충분히 이해한다. 그도 혼란스럽고 놀랐을 것이다. 어쩌면 반은 충동적인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절반이라도 그의 진심이 섞인 행동이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복잡한 설렘과는 별개로 석진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석진은 오늘 중요한 실마리를 하나 잡을 것이다. 그를 위해서 최 서방을 몰래 불러 냈다.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어. 자네 왔는가”

 

집 밖의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최 서방을 불러 낸 석진. 그는 이곳에서 최 서방에게 알아내고 당부를 받아야 할 것이 있다. 뜻밖의 장소로 석진이 자신을 부른 걸 알고 최 서방은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역력하다.

 

“예”

“이리 좀 와 보시게”

 

“...................... 헉!”

“아는 얼굴이지?”

 

“.........................”

 

빈 헛간의 문은 닫힌다. 최 서방은 독 안에 든 쥐다. 최 서방은 이곳에 미리 와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경악하듯 놀란다. 최 서방보다 먼저 석진의 부름을 받고 와 있는 사람은 바로 무당이다.

 

“내가 자네들에게 은밀히 부탁할 일이 있어 불렀네”

“............... 도련님. 대감 마님께서 아시는 일입니까?”

 

“왜 아버지께서 아셔야 하지? 나는 내 마음대로 아무 것도 못 하는 사람인가?”

“송구합니다”

 

최 서방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김 대감의 심복이기 때문에 석진이 멋대로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걸 좋아하지 않는 눈치다. 그러나 석진은 석진대로 그를 강하게 밀어 붙일 핑계가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약점이 있고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보게 당골네”

“예 도련님....”


“지금 아버지께서 벌이시는 일. 자네들은 뭔지 알지”

“...................”

 

“그래. 대답은 하지 않아도 좋네. 어차피 다 알고 자네들을 부른 거니까”

 

과연 자신의 전략이 유효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석진은 사실 대단히 자신감이 넘치는 상황은 아니다. 이들은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람이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 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회유책이, 자신의 진심을 담은 간청이 먹힐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들은 석진의 계획을 먼저 김 대감이나 그 부인에게 쫓아 가 알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석진은 자신의 진짜 속내는 숨길 작정이다.

 

“나도 그 일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좀 있어서 말이야. 아버지께서는 자네들도 아시다시피 나랑은 얘길 잘 안 하셔. 그러니 궁금해서 살 수가 있어야지”

 "도련님 그 일이라면 대감 마님이나 마님께 직접 여쭤 보시는 것이...."


"아 물론 그렇게 할 건데. 자네들도 아시다시피 내가 그 분들께 직접 대화를 걸면 집안이 시끄러워지지 않겠는가 말이야. 워낙 내가 하는 말이라면 고깝게들 들으시는 분들이니"

"......................"


"해서 말인데. 내가 궁금한 것들을 좀... 알아내 줄 수 있겠나 자네들이?"


곤란할 것이다. 그들은 석진이 김 대감과 생각이 같지 않을 거라는 점을 충분히 예지하고 있다. 그런데 석진이 자신들을 불러 알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니, 이것은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도 석진이 이들과 접촉을 시도한 건 다 정당한 이유가 있다. 


"자네들. 자네들이 우리 아버님과 같이 할 시간이 많겠는지, 나와 함께 할 앞날이 많겠는지 잘 생각해 봐. 자네들만이 아니라 자네들의 자식들 앞날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나?"


치졸한 협박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상대편이 치졸하고 협잡하게 나오는데 자신만 정공을 고수한다는 건 어리석은일이다. 석진이 이렇게까지 용기를 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입술이 여전히 화끈거린다. 태형의 입술이 남긴 여운은 길고 짙다. 그 여운은 너무도 길어서 그 펼친 길이만으로도 충분히 바다를 건너 갈 수 있을 것 같다. 바다를 건너면 섬이 나온다. 그곳은 석진이 찾아 놓은 낙원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섬에 같이 가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석진에게는 그런 사람이 생겨버렸다. 그 한 번의 짜릿한 입맞춤이 석진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석진의 눈동자는 더욱 단단하고 검게 여물었다.

 



 

 

 

 

 

 

우리는 길 위에서 수많은 존재들과 마주치지만 대부분은 우리도 그 존재들에 무심하고, 그 존재들 또한 우리에게 무심해서 비껴가는 인연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길 위의 그런 존재들을 유심히 기억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바로 꺾어지거나 틀어지는 길목에 섰을 때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어딘가로 향하는 길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어느 곳에서 오른쪽으로, 쭉 길을 걷다가 무엇이 나오면 거기에서 왼쪽으로 등등.

이러한 이치는 꼭 길을 걸어 가는 경우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삶을 살다가 마주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지금까지 왔던 길과는 뭔가 다른 구부러진 길 위에서 만난 사람. 그렇다면 인간은 당연히 그런 자리에서 만난 사람을 더욱 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더 뜻 깊게 생각할 것이다.

태형에게 석진이 그렇다. 태형은 지금 삶의 길 위에서 크게 구부러진 목에 서 있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 석진이다. 무심코 지나치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태형은 어서 구부러진 길을 따라 다른 방향으로 가야하기 때문에 마음이 바쁘다. 눈에, 마음에 아무 것도 담지 않으려 했던 계획이 틀어져버렸다.

 

아무리 넉넉잡아도 세 번의 만남. 단 한 번의 입맞춤. 그저 길 위에서 마주쳤을 뿐인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 주는 데에 걸린 날은 고작 한 달도 못 되는 시간. 석진을 보내고 난 뒤 태형은 불 꺼진 방 안에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보냈다. 석진 역시 태형에게 무언가를 물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너무 놀라서 그런 것인지는 태형도 잘 모른다.

이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도 저 사내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누가 자신의 귀에 대고 그런 이상한 말을 속삭였는지 알 수 없다. 귀신에 홀린 것 같다. 정확히 말하면 석진이 그 귀신인 것도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석진을 보내 놓고 빈 방에 홀로 앉아 더욱 심란한 건 그리움 때문이다.

누군가를 이만큼 애타게 그리워한 적이 태형에게는 없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려 보낸 것에 미련이 남았는지, 마치 마른 짚에 붙은 불처럼 그리움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른다. 다시 만나야 한다. 아니다. 인연은 여기까지여야 한다. 지금 태형의 마음 속에서는 두 가지 자아가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태형이 석진을 향한 이상한 감정을 억누르려고 했던 것은 순전히 자기 처지 때문이다. 태형은 곧 구부러진 길을 따라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석진에게 빼앗긴, 엄밀히 말하면 스스로 가져다 던진 마음을 책임질 수 없다. 돈이 넉넉하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문제들이 해결될 줄만 알았다. 그런데 뜻밖의 새로운 문제가 생겨버렸다. 오히려 그 돈 때문에 더 풀기 힘든 문제다. 김재광 대감 댁에 씨내리로 가겠다는 약속만 하지 않았어도. 그럴 일만 없었어도 태형은 석진에게 과감하게 고백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방 사라질 이슬이 풀잎에 오랜 정을 주지 못하듯, 태형은 석진에게 더는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 해가 뜨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똑똑-

 

이 깊은 밤에 누가 찾아 왔는가. 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던 태형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문 밖에 어른거리는 검은 그림자가 있다. 설마 석진인가? 태형은 석진에게 더는 마음을 내어 줘선 안 된다고 조금 전까지 다짐했었다. 그런데 몸이 먼저 움직인다. 혹시나 석진이 돌아 온 건가 하는 마음에서다.

 

 

“누구.....?”

“대감께서 보내셨습니다”

 

“아........ 이 깊은 밤중에 웬일이십니까?”

 

김 대감이 사람을 보냈다. 그것도 깊은 밤중에. 태형은 정체 불명의 공포로 인해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낀다. 아직 약속한 날짜는 되지 않았다.

 

 

 

 

 

 

 

 

 

대문을 열기 직전이다. 문득 대문 안에 도사리고 있는 커다란 어둠이 자신의 숨통을 틀어 쥘 것 같아 두려워진다. 언제나 이 집은 그랬다. 이 넓고 큰 집 안에 편안히 마음 붙일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라는 말은 석진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이 집보다 태형의 누추하기 짝이 없는 초가집이 더 편안했다.

석진은 대문을 열고 들어 가 불 꺼진 사랑채를 바라본다. 아버지, 편히 잠이 오십니까?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는 두터운 어둠이 벽처럼 가로막고 있다. 비록 아침이 온다 하더라도 이 벽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평생 아버지와 자신 사이는 가까워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슴이 차가워진다. 사랑채를 한참 쳐다 보다가 자신의 거처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내의 방에 불이 켜진 것을 발견한다. 다른 모든 방에 불이 꺼졌는데 아내의 방만 환하다.

석진의 방과 아내 방은 대청 마루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석진은 아내가 혹시 불을 켜 둔 채로 잠이 들었는가 하여 조심스럽게 신을 벗는다. 대청 위에 발을 올려 두자마자 아내의 방문이 열린다. 석진은 깜짝 놀라 모과빛 불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내가 방문을 열고 석진을 바라본다. 자고 있던 사람의 얼굴은 아니다.

 

“아직 안 잤소?”

“이제 오십니까?”

 

“좀 늦었소”

“큰일났습니다. 이리 좀 들어 와 보세요”

 

“큰일? 무슨 큰일?”

 

 

아내는 답답하리만치 감정 표현이 없는 사람이고 무던한 사람이다. 그런 아내가 ‘큰일났다’고 표현하는 것을 들으니 날뛰던 심장이 차갑게 식는다. 석진은 아내를 따라 그녀의 방으로 들어 간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보니 아내의 얼굴에 수심이 한가득이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 석진은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묻는다.

 

 

“안색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이 있었소?”

“아버님께서 일을 서두르실 모양입니다”

 

“뭐요? 대체 왜?”

“그 사람을 당장 내일 데려 오시겠답니다”

 

“뭐어?!”

“서방님, 어찌합니까.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만나 보신 겁니까? 저와 은혜가 도망칠 곳은 마련이 된 겁니까?”

 

“이럴 수가.....”

“서방님이 뒤에서 물밑 작업을 벌이시는 걸 혹시 아버님께서 눈치 채신 건 아닙니까?”

 







“이곳.....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

“저를 따라 들어 오시지요”

 

“..............예”

 

아무리 보아도 대문은 아닌 문. 이들이 벌이려는 일이, 자신이 동참하기로 한 일이 떳떳하지 못하다는 증거인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지금 태형은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의 뒤를 무턱대고 따라 왔다. 어디로 자신을 데려 가는지도 모른 채 뚜벅뚜벅 걷다 보니 어느 집 후원인 것 같다.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는데 대숲을 헤치고 내려다 보이는 커다란 기와집이 한 채 있다. 태형은 이곳이 김재광 대감의 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번도 와 보진 않았지만 대숲에서 내려다 보이는 규모가 꽤 웅장하니, 김재광 대감 정도는 되는 세도가여야만 이런 집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대숲을 지나면 담이 연달아 마치 성벽처럼 이어지고, 그 담 사이에 작은 문이 하나 나 있다. 태형을 데리러 왔던 사람은 그리로 태형을 인도한다. 지금은 초저녁이다. 태형은 지칠 대로 지쳐 있다. 김 대감 댁에서 태형을 데리러 온 건 늦은 밤이었다. 그러니까 꼬박 하루가 지난 것이다. 사실 태형의 집에서 여기까지 하루가 걸리지는 않는다. 다른 곳에 들러 시간을 보낸 탓이다.

그는 태형을 처음에 작은 암자로 데리고 갔다. 거기에서 낮 동안 시간을 보내고 해가 저물기 시작해서야 내려왔다.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그런다는 것을 대번에 눈치 챘다. 덕분에 여기까지 오는 동안 태형은 다른 그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김 대감과, 자신을 인솔한 이 하인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김 대감이 작정하고 자신을 없애기로 결심한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자신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으리라는 두려움도 엄습한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도 잠시뿐. 여기까지 오는 내내 태형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석진에 대한 생각이 한 시도 태형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태형은 무거운 양심의 가책 때문에 석진을 떨쳐내고 싶었다. 어차피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확신이 굳어졌다. 그래서 석진에 대한 생각이 자신을 덮칠 때마다 심하게 몸부림을 쳐댔다. 허락도 없이 석진을 마음에 담은 건 자신이면서도, 마치 석진이 이 일의 모든 원흉을 제공했다는 듯 원망하며 멀어지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럴수록 석진의 환영과 환청은 태형에게 더욱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급기야는 태형으로서는 손 쓸 방법 없이 강한 힘으로 들러 붙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태형의 환상 속 석진은 계속 태형에게 묻는다. 대체 어딜 가는 거야? 날 만나지 않고 지금 뭘 하러 가는 거야? 그러나 환상 속 석진에게라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러 간다는 그 말로 차마 석진의 진심까지 더럽히기는 싫었다.

이 드넓은 기와집을 덧누르고 있는 포도색 어둠. 점점 짙어져만 가는 그 어둠이 자신의 마음을 반영한 빛깔 같아 착잡하고 우울하다. 하인은 어딘가에서 걸음을 멈춘다. 태형도 덩달아 멈춰 선다.

 

 

"이 안에 들어 가 계시면 됩니다“

“......... 여기가 제가 머물 곳입니까?”

 

“예”

“알겠습니다”

 

“대감 마님께서는 아직 퇴청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마 나중에 오실 겁니다”

“...............”

 

“생활하시는 데 필요한 것들은 모두 제가 가져다 드릴 것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여기에서 계속 머물게 됩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감 마님의 명이 있으시기 전까지는 여기에 모셔 놓으라는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그렇....군요”

 

“절대 저 중문 밖으로는 나가지 마시라는 분부도 있으셨습니다”

“.......... 조심하겠습니다”

 

“그럼 들어 가시지요”

“예”

 

안으로 들어서기 전 다시 한번 주변 경관을 둘러 본다. 이곳은 뒤로는 우거진 대숲이 병풍처럼 가리고 있고,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한적한 후원이다. 집의 본채에서도 제법 거리가 있어 누군가 일부러 문을 열고 들어 오지 않는다면, 밖에서는 안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없을 구조다. 구석지고 음습한 데 있어 다른 곳보다 훨씬 어둠의 지배가 빠르다.

 

다시 한 번 환상 속 석진이 묻는다. 넌 지금 어디야? 날 언제 보러 올 건데?

 

태형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형님. 저는 이제 형님을 보러 갈 수 없어요. 형님과 저는 애초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저는 더러운 놈입니다. 그냥 저를 잊으세요.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해일처럼 죄책감과 자괴감이 쏟아진다. 감당할 수 없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선다.

 


밥-뷔진-잠-뷔진-일-뷔진-밥-뷔진... 뷔진 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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