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맨 밑에 있는 결제창은 소장용 입니다.



네오한 빌런 사무소



 


  마크는 웃었다. 그러니까 김정우가 자리에 주저앉아 자기의 바짓가랑이를 잡기 전까지는. 마크의 한쪽 다리를 야무지게 감싼 김정우는 마크의 허벅지 위로 하얀 볼따구를 올리며 애원했다.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 게임기를 사주기 전까지 집에 가지 않겠다고 떼쓰는 아이의 꼴처럼. 어, 나 저번에 쇼핑 갔다가 저런 애 본 거 같아. 마크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래에 김정우를 한 번, 그리고 나를 한 번, 자기가 든 가방을 한 번 쳐다보다가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웨잇… 아이 그니까,




"I'm serious?"




 쟤 꼴을 봐라, 한 점 거짓이 있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거짓이 없어. 나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리어스'하고 단호히 답했다. 마크가 이마를 짚는다. 동혁이가 마크 쟤 때문에 관자놀이를 짚는 경우는 봤어도 마크가 짚는 건 처음 봤다. 하긴 지도 얼마나 억울할까. 그냥 가방 받으러 왔는데…. 나였으면 아까 진작에 튀었어. 마크의 살벌한 침묵이 길어지니 김정우가 나에게 고갯짓 한다. 너도 얼른 반대 다리에 매달리라는 뜻 같았다. 나는 차마 그 지경까지는 이를 수 없어서 그냥 푹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는… 나는…!"

"…."

"이런 거 안 나간다고 그랬는데…!"




 진짜루 억울해. 저번에 지하 주차장 터진 뒤로 주차장에 못 가는 트라우마만 얻고… 이래가지고 나중에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어. 김정우가 새삼 황당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인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를 한다는 듯 나를 업신여기는 그 표정이 가히 장관이었다.




"뭐래, 너 아까 전에 잘만 갔잖아."




 니는 뭔데. 나랑 같은 연합 아니냐고.




"아니, 그니까."

"…."

"아니, 그니까."

"…응."

"아니, 그니까."




 그니까 말을 해. 마크가 돌림노래처럼 한 구절을 반복하고 있을 때, 그와 영혼의 단짝으로 볼 수 있는 동혁이가 마이크를 쥐고 대신 입을 열었다. 아니, 형 뭔데. 형 지금 거기서 뭐 할 건데. 마크는 지금 아무 것도 안 가지고 있는데. 역시 마음의 단짝은 블루투스로 소통을 할 수 있음이 틀림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니까."

"혹시 영어로 해줄 수 있어? 내가 번역기 돌려볼게."

"아니, 그니까!"

"후우…."




 말을 잃은 마크와는 다르게 동혁이의 한 번 터진 말문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러니까 뭔 상황인 건데. 누가 말 좀 해 봐. 아아- 뭐야. 야 제노야 이거 지금 안되는 거냐? 엉, 바쁘다고 엉. 형! 형! 누나! 끝없는 부름에 잠자코 듣고 있던 김정우가 삑- 하고 가슴께에 달린 마이크를 눌렀다. 그건 더이상 마크의 아니, 그니까 돌림노래를 듣지 않겠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그래서 너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 건데. 나야, 마크야."

-"아- 형 깜짝 놀랐잖아요."



"우리 어떡해? 그냥 너 오면 안돼?"

-"아, 넵. 안되죠."




 동혁이는 딱 잘라 답했다. 누가보면 칼로 자른 줄 알겠다. 김정우가 힝 소리를 내면서 마이크를 껐다. 공중에 휘날리는 메아리처럼 동혁이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형형, 아 형. 아- 혀어어엉. 하지만 그 소리는 그 어떤 대답도 받지 못하겠지. 불쌍한 동혁이. 한편, 그쯤에서 생각을 끝 마친 건지 마크가 꽤나 작정한 얼굴로 우리의 주의를 끌었다.




"아니, 그니까."

"나 그 소리에 노이로제 걸릴 거 같아."




 동혁이가 마크랑 얘기하다가 경기를 일으키는 게 한 두 번이 아니라더니. 그 이유가 뭔지도 알 것 같다. 한 번만 더 '아니, 그니까' 소리를 듣는다면 나도 모르게 입에서 비명부터 새어나갈 것 같다. 내 대답에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은 마크는 서두가 그렇게 길었던 것 치고는 간결한 답을 내놓았다.




"그니까 그냥 같이 내려가달라고?"

"…?"




 우리가 엘리베이터 보이가 필요해서 널 잡았겠니.




"아니-"

"아닛, 표정ㅎ"




 김정우가 똥 씹은 얼굴로 마크를 바라본다. 나나를 구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겁대가리를 상실한 건지 취미가 복싱이라는 마크를 향해서 가감없이 불쾌감을 들어낸다. 솔직히 마크가 기분이 상해도 엄청 상해버려서 손에 들고 있는 가방으로 김정우의 머리를 깡- 하고 내려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마크는 웃었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흐흐흐 하고 웃었다. 김정우의 썽난 눈썹이 웃긴 건지, 아니면 살짝 벌어진 입이 웃긴 건지 모르겠지만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써, 알써 하고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장장 5분 간의 긴 결투였다.




"봤지, 내 카리스마."

"어디…?"

"아까 내 카리스마에 마크 쪼는 거 봤지."




 김정우는 자기의 기세에 마크가 눌린 거라고 했다. 꿈도 야무지다. 그래도 차마 그 반짝이는 눈을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알겠다 하고 말았다. 김정우는 작게 나에게 말을 거는 척하며 은근슬쩍 마크를 앞세웠다. 무전기도 마이크도 없는 마크가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가고 나서야 힐끔 눈치를 살피며 발을 내디뎠다. 불쌍한 마크. 마크는 그것도 모르고 당당한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잡은 뒤 몇 층? 하고 엘리베이터 보이의 역할까지 자처했다.




-"아 안구건조증… 내 인공눈물은 언제 오나…."




 나나는 우리가 내려가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눈이 건조하다를 외쳐댔다. 이따금씩 속삭이는 투로 어디에요? 언제 와요? 빨리 와요. 아직도 엘리베이터에요? 아니 언제 와요. 저 진짜 힘들어요. 하면서 답지않게 재촉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럴 때마다 나나에게 출발했어!! 얼른 우리가 갈게! 우리가 구해줄게! 라고 대답하고 나서 마크의 어깻죽지를 툭툭 치는 것으로 모든 행동을 대신했다. 마크야, 나나가 많이 급한가 봐. 어떡해. 마크가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제노는 뭐래?"

"제노는 그냥 별일 아닐 거라구 하던데…."




 그래도 현장에서 뛰었던 사람은 뭔가 달라도 달랐다. 마크는 김정우와 내가 호들갑을 떨 동안 침착하게 시간을 확인하고, 나나의 위치를 확인하며 비상구는 어디인지, 나나를 구한 뒤로 어떻게 탈출할 건지 제노에게 물었다. 나는 무전기와 마이크를 차지 않은 마크를 대신해 질문하고, 제노가 말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했다. 때때로 잊어버린 내용은 김정우가 대신 말해주기도 했다. 이거지 이게 집단 지성이지. 뭔가 이제서야 팀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 이 상황은 영 달갑지 않지만….




-"바로 주차장이랑 이어져 있는데, 여기가 전부 발렛으로 움직여서요. 직접 가기가 좀 그래요."

"여기 발렛이래."

-"그냥 들어가는 길에 차 열쇠 먼저 맡겨요. 빼는 시간은 5분? 그쯤 안되니까 원활히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후문은 주방 뒤라 가기 좀 그래요."

"들어가는 길에 차를 빼달라고 하래. 후문 없어."



"있긴 있댔어. 주방 뒤에."




 잠자코 고개를 주억거리며 우리의 얘기를 듣던 마크가 아니, 그럼… 하고 말문을 열었다가 우리를 살핀다. 그리고는 안 되겠는지 내 코앞까지 와서 입을 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자칫 엘리베이터가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코든, 입이든, 볼이든 어딘가가 맞붙을지도 모르는 정말 코앞의 거리였다. First, talk about his situation. 쏼라쏼라. 내가 알아들은 건 저것 뿐이라 입을 헙- 하고 다물고 숨을 참았다. 왠지 내 숨소리가 방해될 것 같기도 한 그런 기분이라. 김정우가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왠지 그게 무슨 일인데? 하는 얼굴이라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모르지 그건.




-"그렇게 걱정은 안 해도 될 거 같아요."




 한참이나 영어로 쏟아내던 마크는 곧 제노의 대답을 들으려는 듯 내 귓가 가까이로 바짝 붙었다. 그런다고 안 들릴 것 같은데…. 말하려고 했는데 그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그냥 합죽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제노의 목소리가 울리고, 마크의 향수 향인지 무슨 향인지 모를 냄새가 났다. 향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확실히 달달한 향은 아니었다.




-"별로 심각해 보이지는 않아요."

-"네가 뭘 알아. 완전 심각해 나."




 땡.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와 나나와 제노가 웬일로 다투는 소리를 들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크도 그제야 나에게서 떨어지며 모자를 고쳐 쓰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스르르 문이 열린다. 김정우는 선두로 나와 있는 마크를 힐금거리다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야, 넌 굳이 나 있는데 왜 쟤한테 가서."




 그 소리에 마크가 휙 뒤를 돌았다. 그리고는 아핫핫 하는 소리처럼 웃더니 '아 맞다, 형도 있었지.' 라는 말만 남겨두고 먼저 자리를 떴다. 뒤늦게 그 뒤를 따르면서 김정우는 얼탱이가 없는 건지 꽤나 심통이 난 얼굴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내가 존재감이 없을 인물은 아닌데."

"그치그치."




 네가 나에 비해 존재감이 떨어졌을 뿐. 그의 어깻죽지를 한 번 두드리며 커다란 호텔 로비를 걸어갔다. 조명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이런 건지. 꼭 황금빛이 도는 것 같은 호텔 안은 한적한 것 같으면서도 북적거렸다. 최소 우리 집 화장대 보다는 큰 것 같은 샹들리에 아래 호텔 직원과 투숙객, 그리고 위층에서 파티를 즐기다 내려온 사람이 번잡하게 움직였다. 처음 파티장을 올라갈 때는 로비를 통해 올라간 게 아니라서 그 모습이 마냥 신기했다. 사실 여길 지나갔다고 해도 너무 떨려서 제대로 보지도 못 했을 것 같다. 무튼,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을 흘깃대며 걷다 보니 어느새 김정우와도 꽤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그래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우리 나나가 급하다는데, 이런 걸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급히 걸음을 재촉하다 보니 주위를 신경 쓰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아."

"헐, 죄송해요."




 하필이면 대각선으로 걸어오던 사람을 못 봐서. 크게 부딪히지 않은 게 다행이다. 여기서 넘어지면 꼬리뼈 다 나갈 거 같은데. 남자가 서 있는 걸 보아하니 키 차이가 위험한 게. 하필 내 팔꿈치에 명치라도 맞아서 맛이 갔을까 봐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제가 취업한지 얼마 안돼서 아직 합의금을 물러줄 만큼의 재력은…. 한껏 당황한 얼굴로 남자를 살피는데, 그는 다행히도 나와 부딪힌 곳을 툭툭 털어내더니 곧 얼굴을 들어 올려 웃었다. 하얀 볼 위로 움푹한 보조개가 패여 들어갔다. 와, 진짜 잘생겼다.




"괜찮아요."




 감탄 아닌 감탄을 하면서 보고 있다가 김정우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김, 아니 얘 미뇽아! 김정우를 흘깃 쳐다보고 나서 연이어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건네고 걸어 나갔다. 제가 지금 가야 해서…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해요. 남자는 그저 자비로워 보이는 얼굴로 몇 번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왜 뭔 일인데?"

"아니, 부딪혀서."

"괜찮아?"

"엉, 나는 괜찮지."




 나나가 있다던 바 입구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김정우가 오바쌈바를 떨며 내 손과 팔을 이곳저곳 볼 동안 아까 그 남자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 하얀 얼굴과 대조되게 붉은 입술. 그리고 천사의 실수라고 불려 마땅한 보조개까지. 아니 근데 아까 나랑 부딪힌 사람 진짜 잘생겼었음. 대박. 한 번이라도 더 볼까 싶어서 고개를 돌렸는데, 이미 자리를 뜬 건지 한 눈에 띄는, 그 빛나는 얼굴은 통 보이지 않았다. 완전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까 성은이 망극. 내 호들갑에 김정우가 코웃음을 친다.




"내 얼굴은."

"희극."

"다시 봐."

"비극."

"진짜 웃기다, 너."




 하나도 웃긴 것 같지 않은 얼굴로 김정우가 말한다. 따가운 눈초리를 마구 뿜어내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있지도 않은 나나 핑계를 대면서 바 안으로 들어섰다. 바는 로비와는 다르게 재즈 음악이 흘렀고, 무엇보다 어두웠다. 흠,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곳이군. 왜 이렇게 호랑이 굴에 스스로 온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 바로 앞에서 계단을 내려가던 마크의 등짝에 찰싹 달라붙어 걸어갔다. 마크도 처음에 누군가 이렇게 가까이 붙은 게 당황스러운 건지, 휙- 뒤를 돌았다가 곧 나임을 확인하고 걸음을 옮겼다. 




"보여?"

"아니-"

"안에 들어가 봐."



"아니, 솔직히 이제 둘이 가야지."




 야, 우리가 너 이러라고 데려온 줄 알아? 너 이거 주먹 이거 놔둬서 어디 쓸라 그래. 웃음기를 싹 지우고 쳐다보니 우웅 소리를 내며 슬쩍 바 안으로 들어간다. 그 와중에 바텐더에게 인사하는 건 잊지 않았다. 인간이란 참 알다가도 모를 인간이지. 마치 무단횡단을 하면서 쓰레기를 주워가는 그 아저씨처럼. 나는 마크를 바라보다 그런 인사 안 해도 돼…. 하고 말해줬다가 괜히 그건 예의 없는 행동이라고 잔소리만 더 들었다.




"야, 솔직히 이 상황에서 인사하는 애가 더 이상한 거 아니냐?"

"안녕하세용~"




 니는 진짜 아까부터 왜 그러냐. 나랑 같은 연합 아니냐고. 연합이 이렇게 손발이 안 맞아서 되겠냐고. 저 진짜 속상해서 얘랑 이제 작전 못하겠어요. 마이크에 대고 우는 소리를 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도영의 목소리가 들린다. 대충 해, 대충. 벌써 예상했던 작전 시간 보다 1시간이나 더 지체된 상황. 그는 더 이상의 퇴근을 미룰 수 없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어, 저기…!"




 주위를 살피던 김정우가 구석을 가리킨다. 김정우의 소리를 들은 건지 나나도 반가운 기색으로 손을 들어 올리다가 곧 그 손으로 자기의 가슴팍을 가리킨다. 가슴팍에는 그러니까. 우리의 타깃. MS증권의 사랑스러운 재벌 2세라 불리던 그녀가 있었다. 나나는 우는 표정으로 '빨리 와, 빨리 와' 하고 작게 속삭이더니 곧 기겁하는 얼굴로 타깃을 밀어냈다. 우웁- 하는 소리가 무전기로 들렸으나, 제발 그 강까지는 건너질 않았길 바랄 뿐이었다.




"허,"




 마크는 그 꼴을 보다가 별안간 헛웃음을 터트렸다. 코를 찡긋거리더니 미간에 힘을 빡 준다. 그리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입술을 우물우물 씹다가 나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아 그걸 뭐래더라.




"저걸 관종?"

"…."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어서 그저 끄덕이기만 했다. 나는 또 목숨이 일각에 달린 아주 위험한 상황인 줄 알았는데. 나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또 한 번 무전기를 타고 이어진다. 오, 제발. 제발 살려줘요. 허엉, 아 뭐야. 뭐야 아니겠지. 제발. 어찌 됐건 여기까지 왔고, 또 누군가에게는 급박해 보이는 상황이라 천천히 그 앞까지 걸어갔다. 이미 정신을 잃은 듯한 그녀와 나나의 앞에는 반쯤 먹다 남긴 위스키가 놓여있었다. 이제 보니 나나의 볼도 붉다. 쟤도 간신히 정신을 잡고 있는 것 같은데.




"휴대폰은?"




 그 소리에 볼빨간 나나가 뒷주머니에서 폰 하나를 꺼내 든다. 화려한 큐빅이 박힌 케이스를 보아하니 타깃의 것이 틀림없다. 근데 그거 진짜 보석이야? 내 물음에 나나가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아마 그렇겠죠. 개쩐다. 우리 떼서 팔자.




"조심조심."




 나나와 나. 우리 둘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김정우와 마크는 조심히 그녀의 팔을 붙잡고 나나에게서 떼어놓는 것에 성공했다. 나나는 세상 가뿐해 보이는 표정으로 제일 먼저 자기가 입고 있는 수트를 꼼꼼히 확인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없었다. 그제야 나나가 예전처럼 밝게 웃었다. 저 진짜 죽는 줄 알았오용…. 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우리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이 사람 어떡해?"

"방이라도 잡아드려야…."




 인간된 도리로써. 아무래도 여기에 놔두기는 조금…. 필요한 것만 빼고 쏙 사라지면 너무하잖아.





"가족한테 연락하는 건…?"

"…."



"그쵸, 아니지 그건."




 결국 나의 의견대로 방을 잡아 편안히 쉬게 해드리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 한쪽 소파 쪽으로 편히 눕혀 드린 다음, 동그랗게 모여 이제 그녀를 누가 데려다줄 것인지를 놓고 실랑이를 했다. 마크는 진작에 손을 뗐다. 자기의 일은 그저 가방을 받아 사무실로 가져다 주는 것이었고, 또 매번 현장을 나가는데 얼굴이 팔리면 안된다는 의견이었다. 그치 아무래도 호텔에는 CCTV도 많으니까. 나나는… 움직일 상태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축 늘어진 팔을 마크에게 기대고 후우- 하고 더운 숨을 쉬었다. 그래, 넌 최선을 다했다.




"가위바위보?"

"근데, 아무래두…."




 네가 낫지…. 김정우가 힘들게 뒷말을 덧붙였다. 혹시 저 분이 당황스러워 하면 어쩌냐는 의견이었다. 나중에 깨셨어. 근데 갑자기 방이야. 아무도 없고 자기만 있어. 그러면 일단 당황스럽겠지? 그럼 어떻게 하겠어. 호텔 측에 CCTV 보여달라고 하겠지? 아무리 제노가 시스템을 해킹했어도, 혹시나 남아있으면. 




"제노가 해킹하는데 왜 남아."



"너는 어떻게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할 수가 있어? 너 안전불감증이지."




 뭐든 만약이 중요해. 만약 하나라도 기록이 남았어봐. 여기 호텔 로비에 사각지대라고는 없는데 분명히 내가 찍히겠지. 그럼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럽겠어. 거기에서 그치겠어? 요즘 화질도 얼마나 좋은데 내 얼굴까지 다 나오겠지? 내가 누군지 알아내겠지? 내가 누군지 알아내면 나한테 연락이 오겠지? 나는 거짓말을 못하는데 그 앞에 서면 뭐라고 말하겠어. 우리 작전은 끝나는 거지. 저 여자가 가진 그림? 전혀 못 가지지. 저 여자가 가진 기밀문서? 택도 없지.




"그래서 내가 가라는 말 아니야."




 내가 가라는 말을 아주 길고도 정성스럽게 늘어놓았구나, 네가. 김정우가 수줍다는 듯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천천히 위아래로 얼굴을 움직인다. 나는 소파 쪽을 한 번 쳐다봤다가 머리를 짚었다. 아까 튀는 건 마크가 아니라 나였어야 하구나. 호랑이 굴에 혼자서 들어온 기분이 기분만은 아니었구나. 여기에 지금 내 편이 어디 있냐고. 이야기를 듣던 본부 측에서도 내가 가는 게 맞다는 답이 나왔다. 제노는 머뭇거리면서 누나가…ㅎ 했고, 김도영은 그 짧은 침묵도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마이크를 가로채 네가 갔다 와. 하고 답을 내놓았다. 진짜 너무한다, 너무해.




"그럼 계단 오르는 건 도와줄 수 있지."

"그건…."

"양심상 그건 해주자."




 마크의 말에 하는 수 없다는 듯이 김정우가 알겠다는 답을 내놓는다. 너 진짜…. 매섭게 김정우를 노려보면서 천천히 뒤를 돌았다. 응챠, 하는 소리와 함께 무게가 실린다. 잠시 휘청했다가 이를 꽉 깨물고 중심을 잡았다. 사장님 보너스 많이 주세요. 진짜 이건 많이 줘야 해. 여자의 팔을 목에 걸고, 허리를 꽉 잡았다. 쌕쌕 거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귀를 울리면서, 함께 숨을 내쉴 때마다 강한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으, 고개를 돌린 다음 어렵사리 숨을 쉬었다. 김정우가 내 뒤를 따르면서 괜찮아? 괜찮아? 도와줘? 하고 병 주고 약을 줬다.




"저기요, 죄송한데 이제 계단이라 움직여주셔야 해요."




 제가 님의 협조가 없으면 좀 힘이 들걸랑요. 마음 같아서는 정신 좀 차리라고 이리저리 흔들고 싶지만, 내가 재벌 집 딸이라서 참는다. 헉헉 대며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마크와 김정우는 내가 뒤로 넘어질 때를 대비해 손을 뻗어 내 어깨를 잡아줬다. 차라리 누가 하나 들어 올려 주는 건 어때? 하고 물었으나 그들은 웃음으로 때웠을 뿐, 그 누구도 놀라울 정도로 나서주지 않았다.




"힘내, 여주야. 약 3개 남았어."

"에바다, 진짜."




 이상하다. 분명히 내려올 때는 안 이랬는데. 진짜 안 이랬는데. 혹시 여기 입구가 두 개? 묻고 싶어도 물을 힘이 없었다. 한층 올라올 때마다 이를 악 깨물고 올라왔다. 내가 지금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나만한 짐을 지고 있으려니. 계단이 2칸 남았을 때는 쓸데없이 불편하기만 한 신발을 벗어던졌다. 이제 사회적 체면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대충 내가 벗어던진 신발을 하나하나 손에 쥔 마크는 내가 입구 앞에 이르자 내 신발을 든 손으로 손을 흔들었다. 이제부터는 진짜 나 혼자 하라는 말 같아서 눈물이 나올 뻔했다.




"계속 무전기 들어."




 김정우는 로비로 향하는 내게 작게 속삭이고는 뒤돌아서 바 안으로 돌아갔다. 진짜 세상과 나, 이 둘만 남겨진 기분. 가뜩이나 계단을 오르느라 힘을 다 써서 더 힘든 거 같았다. 오죽하면 입에서 단내가 났다. 혀로 입술을 쓸어내고 발을 끌다시피 해서 대리석으로 된 로비를 가로질렀다. 발바닥 아래로 대리석의 찬 기운이 올라왔다. 아오, 진짜. 내가 다시는 이런 거 하나 봐라. 옷이고 머리고 거추장스러운 거 천지였다. 바닥을 친 내 기분을 눈치챈 건지 연신 조용하던 본부에서 작게 화이팅, 화이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범인은 이동혁인 것 같았다.




"저기요."

"도와드릴까요?"

"방 좀 주세요."

"방 말씀이세요?"

"네, 방이요."

"혹시 예약하셨나요?"

"예약은 안 했는데, 비싼 거 주세요."

"스위트룸 말씀이세요?"

"아무거나 주세요, 제발."




 데스크에 와서는 거의 애원했다. 제발 제발 더 묻지 마시고 아무거나 주세요. 진짜로. 제가 지금 뒤질 거 같아서 그래요. 다급한 내 모습에 따라서 다급해진 것 같은 직원은 어… 하는 소리와 함께 자판을 몇 번 두드렸다. 방을 찾고 있는 것 같아 최대한 참으려고 했으나 여자의 허리를 단단히 싸고 있는 쪽의 어깨가 떨어질 것 같았다.




"없어요?"

"하나 남았어요. 혹시 신분증…."

"아, 신분증."




 진짜 사장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도대체 몇 수를 내다보신 건지. 힘겹게 들고 있던 클러치를 앞으로 내밀었다.




"죄송한데, 꺼내주실 수 있나요?"




 진짜 제가 갑질하거나, 진상은 아닌데. 진짜 못 꺼낼 것 같아서 그래요. 굳이굳이 직원분을 앞으로 부르고 사장이 마련해준 지갑을 꺼냈다. 이거 맞으실까요? 물어보는데 정말 이제는 참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고 알아서 결제해달라고 했다. 어차피 사장한테서 나갈 건데.




"할부는 어떻게…."

"일시불이요, 일시불."




 영수증과 카드는 다시 지갑에 넣어두겠습니다- 말씀하시는 직원분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은 마음 같아서 가슴께에 꽂아버리고 싶었는데 차마 다 들어가지 않아서 원래 있던 왼손에 그러쥐었다. 입에 방 키를 물고 스위트룸은 27층, 방은 2705호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 당장 워킹데드 오디션을 봐도 단방에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은 걸음으로 힘겹게 끌고 있으니, 제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오늘 형이 맛있는 거 사주신대요."




 보고 있으니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사실 눈물이 날 뻔했는데 참았다. 왜 눈물이 나오려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힘들어서, 힘든 와중에 나의 노고를 알아주는 것 같아서. 뭐 그런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제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입에 물고 있던 카드를 빼내어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아직도 정신이 안 드세요? 제발 정신 좀 차려보세요.




"어엉."

"어엉은 무슨 어엉이에요."




 땡. 6개나 되는 엘리베이터 중에서 어쩜 그렇게 일찍 내려오는 게 없는지. 체감상 억겁의 시간은 흐른 것 같은데요. 끙끙대며 여자를 밀어온 다음 27층을 누르고 승강기 벽에 기대어 깊은 숨을 쉬었다. 이제 거의 끝난다고 생각하니 나름의 위로가 됐다. 멍하니 계기판을 보면서 올라가는 숫자들을 보고 있는 그때 품에 안긴 여자가 움찔거렸다.




"정신이 드세요?"




 23, 24. 이제 정말 코앞이었는데.




"우웁."

"헐, 안 돼요. 안 돼요. 삼켜요. 안 돼요."

"우우웁."

"아니야, 당신은 할 수 있어."




 26, 27. '땡' 하는 소리에 맞춰 입에 있는 것들을 토해낸 여자는 힘없이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배부터 시작해서 원피스의 치맛자락에 얼룩진 그것들을 보며 눈을 감았다. 툭툭, 소리와 함께 발등으로 떨어지는 그것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동혁이가 다급히 외친다. 누나, 누나. 누나 괜찮아요? 누나. 




"혼자 있고 싶어."




 그 순간 문이 열렸고,




"…."




 그 앞에 서 있던 남자와 마주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난장판이 난 내 옷자락과 승강기 안을 살피더니, 마지막으로 이 일을 초래한 주범을 보았다. 아, 짧은 탄식을 한 남자가 별안간 헛웃음을 짓는다. 쟤 어디서 데려왔어요?




"네?"

"쟤요."

"많이 취하신 거 같아서…."




 아. 머릿속에서 무언가 울린다. 여자를 한 번, 그리고 남자를 한 번 바라봤다. 닮았나…? 하나하나 뜯어보는데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머릿속에서 대충 훑어봤던 타깃의 정보가 담긴 종이가 넘어간다.




"계속 찾았거든요."

"…."

"실례를 했네요."

 



 이름 정재윤, 나이 22세. MS증권 딸. MS증권이라 함은 가정사가 얽히고설켜 우스갯소리로 콩가루 집안이라 부른다던데. 쌀과자를 씹으면서 내게 털어놓던 사장의 목소리가 따라 울렸다. 여기 원래 본처 자리를 얘네 엄마가 대신 채간 거 거든. 신분상승 제대로 한 거지. 어찌나 그 회장이 예뻐하는지, 그 아들한테는 안 주고 얘한테 별걸 다 줬어. 헐. 입을 꾹 다물고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가 불쾌한 냄새 때문인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정재현입니다."

"…헐."


"아무래도 좀…."

"…."

"씻으셔야겠죠?"




 








네오한 빌런 사무소






 남자는 내 품에 안긴 여자를 안아 들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차마 이 꼴을 하고서 그냥 가도 괜찮다는 소리가 안 나와서 결국은 그 뒤를 따랐다. 순식간에 가뿐해진 몸을 즐길 새도 없이 분위기에 압도 당하는 거 같았다. 왠지 저 사람이 화가 난 거 같았기 때문이다. 입을 꾹 다물고 러그 깔린 푹신한 복도를 지나갔다. 앞만 보고 걸어가던 그는 2704호도 건너뛰고 2705호까지 건너뛰어 걸어 나갔다. 어어, 여기가 우리 룸 맞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큰맘 먹고 입을 열었다. 




"방, 방 여기 잡아뒀는데…."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정재현씨는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보조개가 천천히 깊어졌다.




"환불하세요."




 여기 스위트룸이라 개비싼데. 진짜 돈이 차고 넘치기는 한가보구나. 다시금 걷기 시작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마이크에 대고 속삭였다. 어떡하지, 나 어떡해. 이 상황을 모두 보고 있던 건지 제노는 담담했고, 김정우는 꽤 큰 목소리로 뭔데? 뭔데!! 뭐가!!! 너 혹시 위험해?! 하고 답을 보냈다. 진짜 제대로 욕 한 번 박고 깜빵갈까- 싶어서 목을 다듬는데, 하필이면 동생을 안고 가던 정재현씨의 발걸음이 멈췄다. 2701호. 제일 끝 방이었고, 제일 큰 방 같기도 했다.




"죄송한데."

"네?"

"키가 여기 있어서."




 그가 고갯짓으로 재킷을 가리킨다. 안쪽 주머니에 있다는 말 같아서 서둘러 한 걸음 다가섰다. 두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니 도와주는 게 당연하지.




"여기요."

"좀 열어주시겠어요?"

"아, 넵."




 키를 도어락에 가져다 대자 금방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음을 알렸다. 문을 대신 열어주고, 정재현씨가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는데, 그가 곧 얼굴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안 들어오실 거에요?"

"아, 저요?"

"씻고 가셔야죠. 그러고 가실 수는 없잖아요."

"그럼 발만…."




 생각해보면 나도 열쇠가 있는데 왜 굳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 얼굴에 홀린 것 같기도 하고. 세상에 그 얼굴에 안 홀릴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마 제노를 이 앞에 가져다놔도 그럴까요? 하고 웃으면서 들어갈 게 분명하다. 귀에서는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이래서 아까 나나가 웃었구나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화를 내지 않은 게 여러모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뭔데!! 뭔데!!"

-"왜 김여주 왜!! 왜!!"

-"어? 형은 왜!"

-"여주 누나 왜에에? 누나 뭐어어?"




 귓가에서 당장이라도 뽑아내고 싶은 것을 참았다. 슬리퍼를 신으라는 남자의 손짓에 더러워진 발이 신경 쓰여 망설이니 그는 간단한 답을 내놓았다. 오히려 그거 하나 치우는 게 낫죠. 방 전체를 치우는 거 보다. 확실히 돈이 많은 사람은 똑똑하구나. 남자가 안내하는 대로 침실을 가로질러 화장실 안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무전기 안은 한층 더 소란스러워졌다.




-"잠깐 이게 무슨 소리지."

-"뭔데! 이거 누구야!!"




 나야, 나. 나 지금 발 씻어. 밖에 있는 정재현씨한테 들릴까 봐 가뜩이나 신경 쓰이는데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더 답답했다. 발발, 발 씻는다고 시발. 3번은 넘게 말하고 나서야 제노가 알아들었다. 누나 지금 발 씻는대.




-"발을 왜 씻어?"

"답변하기 곤란하니까, 나중에 물으르."




 깨끗이 발바닥을 씻고 고개를 드니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난장판이다. 오 마이 갓. 같이 올라올 뻔한 구역질을 참느라 고생 좀 했다. 오웩. 고개를 돌리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 당장이라도 기억 속에서 내 저 모습을 지우고만 싶었다.




"이거 옷이요. 지금은 제 옷 뿐이라."

"아, 감사합니다."

"제가 감사하죠. 제 동생인데."




 그쵸, 좀 닮았….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 지퍼를 끌어내려 얼른 옷을 벗어던졌다. 그 안에 있는 마이크를 대충 속옷에 끼워 넣고 남자가 준 하얀 티셔츠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거울을 보고 있으니 차마 말이 안 나왔다. 아까 남자 명치 맞지 않았을까. 길이를 보아하니 그럴 것 같은데. 고개를 젓고 변기 커버 위에 올려둔 바지를 집어 들었다. 토사물이 섞인 옷보다는 아빠 옷 입은 힙찔이가 낫지 싶었다.




"신발은 꺼내뒀어요."

"아, 감사해요."

"그리고 이거."




 원피스를 동그랗게 구겨 말아쥐고 나서니 입구에 서서 나를 기다린 듯한 남자가 슬리퍼 하나를 가리켰다. 그냥 슬리퍼인 줄 알았는데, H 모양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조금 부담스러워지는데.




"이건 제 명함이에요. 연락주세요. 오늘 옷이랑 다 보상해드릴게요."

"어우 아니에요. 오늘 옷도 빌려주시는데."

"아뇨, 해드려야죠. 아님 그냥 두고 가실래요? 새 걸로 다시 구해드릴게요."

"어우어우, 아닙니다. 세탁하면 되죠!!"




 저 그럼 가볼게요.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는데 곰곰이 무언갈 생각하던 남자가 입을 연다. 그럼 이렇게 할까요?




"전 옷 다시 해드리고."

"…."

"그쪽은 제 옷 다시 돌려주시고."




 그리고 친히 다가와 손을 뻗으며 문을 열어줬다. 내 손에 명함 하나를 쥐여주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연락 기다릴게요, 또 만나요."




 내가 아니라 이제노가 이 앞에 있었어도 넙죽 연락을 드렸을 거다. 김도영이여도 그랬을 거라고. 손안에 종이를 꽉 쥐면서 생각했다.




"넵…."




 난 무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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