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정재현의 필살기는 묵묵함이다. 어떠한 야망이나 간절함 없이 고학력 글래머 존잘남, 이른 바 알파메일의 3조건을 모조리 섭렵할 수 있었던 그만의 비법이기도 했다. 쉽게 말해 「근성」. 만약 정재현에게 이 근성이 없었더라면 고학력은 무슨 배달의민족 천생연분을 인생 최대 업적으로 여겨가며 근성장 대신 메이플 스토리 만렙에 사활을 걸고 있지 않았을까. 왜냐면 그래도 되는 인생이니까. 지금 당장 그렇게 산다 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재현은 오늘도 뼛속에 아로새긴다. 하고 싶은 것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세상에 근성만큼 값진 재능은 없다. 뭐든 닥치고 하다 보면 손해는 결코 없나니 계속 여물고 나아가라. 존버는 마침내 승리할 것이며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 근데 그 복이 언제 오는지는 모르겠다…


"어어. 저기 구석 한 번 더 닦아야겠다. 여기서 보니까 색이 좀 다르네."

"……."

"근데 창틀은 닦은 거 맞아요? 먼지 보이는 거 같은데."


끼기긱. 가열차게 비벼지던 대걸레 대가리가 정지했다. 참을 인 자를 마법 천자문처럼 되뇌던 재현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홀 방향을 향해 놓여있는 간이의자 위, 삐딱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전 애인 김도영이 있었다. 시선은 줄곧 틱틱 튕기는 손톱 끝에 가 있으면서 구석이고 창틀은 언제 봤다는 건지. 재현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창틀은 아까 세 번이나 닦았어요.


"그래? 그럼 또 닦아요."

"… 또?"

"응. 내가 먼지에 좀 예민해요. 비염 있어서."

"……."


예이 알겠습니다. 재현은 근성 있게 테이블 위 걸레를 집어 들었다. 모서리를 들어 정성스레 각을 잡으려는데, 어어 잠깐. 발끝을 까딱이던 도영이 턱 끝을 추켜올렸다. 방금 전 '색이 다르다'고 말했던 구석 바닥을 향해서였다.


"저기 한 번 더 닦으라니까. 꼭 말을 두 번 해야 하나…"


쯧. 도영이 짧게 혀를 찼다. 재현은 불뚝이는 저작근을 눌러 참으며 라마즈 호흡을 개시했다.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갑을병정 중에 나는 정이다. 그래서 이름도 정재현이다… 철퍽. 안 그래도 번떡이던 바닥에 수분감이 더해졌다. 성실히 마대질을 하는 그의 등 뒤로 오전 일곱 시의 태양이 잔잔히 빛을 발했다.

그렇다. 그는 현재 전 애인 김도영을 대신하여 오픈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오늘로 벌써 연속 오 일째. 그에게 허용된 매달림의 기간도 이제 겨우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 한 일이라곤 청소뿐인 것 같다. 이게 전 애인한테 매달리는 놈인지, 전 애인이 고용한 알바생인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여섯 번의 대걸레질을 끝낸 재현은 창틀을 향해 걸었다.


"도영 씨."

"왜요."

"도영 씨는 취미가 뭐예요?"


그래도 목적은 이루고 간다. 재현은 창틀 새로 걸레를 밀어 넣으며 은근슬쩍 운을 뗐다. 등 뒤로 전 애인의 코웃음 소리가 났다. 어디까지 깝치나 보자. 하는 듯한 소리였다.


"남자 만나는 거요."

"… 장래희망은?"

"존나 잘생기고 고추도 존나 큰데 살면서 남자만 만나 본 순혈 씹게이랑 결혼,"

"요즘 관심사가 뭐예요?"

"전 남친 영업방해죄로 고소하는 법이요."


창과 방패의 싸움이다. 재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평온한 얼굴의 김 사장이 휴대폰을 뿅뿅 두들기고 있었다. 확 빼앗아 버릴라. 걸레를 쥔 손등 위로 핏줄이 섰다.


"근데, 도영 씨."

"아, 왜요."

"왜 샌드위치는 안 먹어요? 좀 있다 손님 오면 먹을 시간도 없,"

"버렸어요."

"뭐???"


털썩. 갑을병정재현의 손에 들린 걸레가 추락했다. 그는 오늘 무려 네 시에 기상했다. 전 애인 김도영 님의 아침 도시락을 싸기 위함이었다. 첫 끼에 쌀은 잘 안 먹힌다시기에 원하시는 대로 잠봉에 루꼴라를 끼운 치아바타 샌드위치를 준비해 드렸건만,


"버, 버렸다고?"

"네. 왜요?"


도영이 오른 눈썹을 까딱였다. 재현은 허리 위에 양손을 짚은 채로 기함을 터뜨렸다.


"그걸 왜 버려요? 먹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좋아한다고 했지."

"그렇다고 그걸 그냥 버려요?"

"저기요. 내가 맨날천날 싸는 게 샌드위치예요. 너는 샌드위치 파는 사람한테 샌드위치를 먹이고 싶어요?"

"아침에 밥은 안 먹는다며. 이럴 거면 어제 주먹밥은 왜 버렸는데?"

"네가 지금 말한 대로 밥은 안 먹으니까요. 알면서 뭘 물어봐."


후. 열 오른 한숨에 앞머리가 펄럭거렸다. 재현은 바닥에 떨어진 걸레를 묵묵히 주워올렸다. 손톱을 깨작이던 도영이 은근슬쩍 그의 눈치를 봤다. 열심히 창문을 문지르는 재현에겐 보이지 않았다.


"그럼 뭐가 먹고 싶은데요."

"……."

"알려 줘야 내가, 원하는 걸 가져다주지."


뽁. 뽁. 투명하게 닦이는 유리창이 제발 그만하라며 소리를 질렀다. 이 정도면 됐겠지. 재현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됐어요. 원래 아침 잘 안 먹,"

"그러지 마요. 점심도 대충 먹으면서."

"……."

"뭐가 먹고 싶어. 아니다. 도영 씨는 뭐를 제일 좋아해요?"


도영이 도르륵 눈을 굴렸다. 제가 물어놓고도 제가 뜨끔한 재현은 유리창을 벅벅 비벼 닦았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 십 개월을 함께한 애인의 음식 취향도 모르고 있었다니. 저작근에 다른 의미의 힘이 들어갔다. 한참의 정적 끝에 도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햄버거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재현은 둥그렇게 뒤를 돌아보았다.


"… 햄버거?"

"네."

"도영 씨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햄버거예요?"

"… 왜요. 그러면 안 돼?"


도영이 뾰루퉁하게 입술을 오므렸다. 재현은 몇 초간 그를 빤히 응시했다. 왜. 뭘 쳐다봐. 결국 또 타박을 얻고 말았다. 전혀 살가운 말투가 아니었는데도, 이상하지. 가슴께가 간지러웠다. 재현은 가볍게 헛기침했다.


"아뇨. 그러면 안 되는 게 아니라…"

"근데. 뭐가."

"생각도 못 했어요. 도영 씨가 햄버거…"

"뭐.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귀여워요. 엄청."


아. 그렇구나. 이건 귀여움이구나. 김도영 씨가 너무 귀엽다 보니까, 그 귀여움이 주체할 수없이 드글대느라 가슴팍이 간지러운 거구나. 재현은 저릿해지는 손바닥을 등 뒤로 와글거렸다. 이 손으로 뚱하니 앉아있는 김도영 씨를 마구잡이로 뭉쳐두고 싶었다. 뽀뽀도 해주고 싶다. 꼭 안아서 얼굴을 부비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들이 너무 많았다. 다 지나버린 게 문제지만. 


와글대던 손바닥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재현은 그림의 떡 같은 전 애인을 연신 힐끔거렸다. 도영은 오늘도 그놈의 돌체 앤 가바나 셋업을 입고 있었다. 최근 재현이 돌려준 뒤로 연속 삼 일째 같은 옷이다. 빤한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도영이 후드를 뒤집어썼다. 자리에서 발딱 기립하더니 의자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회색 토끼 한 마리가 카운터 안으로 사라졌다. 이내 돌돌돌돌.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아마 정재현 몫의 커피일 것이다. 재현은 각 잡은 걸레를 양손에 고이 들고 카운터 앞으로 다가섰다. 요즘 재현은 매일 아침 똑땅이 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검은 밤 아이스에 투 샷 추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렇게 만들어 주었다.

이것만으로 됐다. 매일 이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새벽 네 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다. 사실 조금(많이) 아무 일이긴 했는데, 그래도 이보다 더 대단한 일은 없었다. 김도영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를 먹게 되는 일.


"이제 가요."


토끼가 검은 밤 아이스 투 샷 추가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후드에 가려진 양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방금 들었던 '귀엽다'는 말이 쑥스러운 듯했다. 그게 또 완전 귀엽게 느껴지는 정재현은 주접을 참지 못했다.


"도영 씨."

"왜."

"그러고 있으니까 토끼 같아요. 회색 토끼."

"뭐래. 꺼져요."

"진짜로.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건데 도영 씨는 후드티가 참 잘 어울,"

"그래요? 전 남친이 준 건데."


빨대를 타고 오르던 검은 밤 아이스가 쭉 내려갔다. 재현의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김 사장은 암시롱 않게 앞치마를 둘러멨다.


"… 전 남친이 줬다고?"

"네."

"친구한테 선물 받았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전 남자 친구."


도영이 땡그란 눈을 끔뻑거렸다. 탕. 재현은 들고 있던 컵을 아래로 내리꽂았다. 물론 예상은 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확신을 받고 안 받고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라.

주제넘게 열이 받는다. 회색 토끼는 무슨. 이제 보니 꼴 사나운 포대자루 같았다.


"그런 물건을 왜 아직까지 갖고 있어요? 당연히 버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럼 저것도 버릴까요?"

"……."


도영이 고갯짓으로 뒤편을 가리켰다. 시선의 끝에는 익숙한 가방이 놓여있었다. 정재현이 도영에게 주었던 삼백 일 기념 선물이었다. 그를 향한 마지막 선물이기도 했다.

할 말이 쏙 들어갔다. 부쩍 고요해진 재현 앞에서 도영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쓰레기통을 향해 다가간다. 재현은 양팔을 다급하게 내질렀다.


"아니, 아니요. 그러지 마. 버리지 말아요."

"왜요. 이것도 전 남친이 준 건데."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미안해요."


양손을 하늘 높이 추켜들고 있던 도영이 옆을 돌아보았다. 재현은 대역 죄를 지은 죄인마냥 고개를 푹 수그렸다. 제발. 제발 버리지 말아요. 버리지 말아 주세요. 간절함에 젖은 목소리가 발발거렸다. 제가 봐도 구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저것마저 버려진다면. 김도영에게 남아있는 정재현의 흔적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재현은 진심으로 두려웠다. 그 어떤 공포영화보다도 끔찍한 상황이었다.

흠. 도영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가방은 다시 작업대 구석으로 돌아갔다.


"그래요 그럼."

"……."

"가세요."


도영이 미련 없이 계산대 앞으로 자리했다. 재현은 물방울 맺힌 검은 밤 아이스를 소중히 들어 올렸다. 어깨가 축 늘어진다. 홧홧했던 눈가가 느리게 가라앉았다.




98.

치사하다 치사해. 어떻게 선물 가지고 갑질을 할 수가 있어. 그게 얼마 짜린데. 얼마나 어렵게 구했던 건데.


재현은 맑게 갠 하늘을 바라보았다. 입사 이래 최초로 올라와 본 회사 건물 옥상이었다. 흡연을 하는 직원이 아니고서는 잘 찾지 않는 공간이었다. 이렇게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더욱 그랬다.


'그래요? 전 남친이 준 건데.'


우드득. 잘게 씹히던 어금니에서 험악한 소리가 났다. 재현은 벤치 위에 퍼질러 있던 몸을 발딱 일으켜 세웠다. 할 수만 있다면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속이 갑갑하다. 그런 말을 듣고도 화를 낼 수도, 질투를 할 자격도 없는 본인 신세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제 돈 주고 산 비싼 선물을 '버려주지 않는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현실도 몹시 배알이 뒤틀렸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있나. 정재현은 철저히 매달리는 입장인걸. 그런데, 이게 잘 매달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정재현이 김도영의 어떠한 구석을 붙들고 있긴 한 걸까.


'재현 씨. 넌 이게 매달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 사실 아무런 생각이 없다. 생각할 새가 없었다. 그저 재현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근성 있게 할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매달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얼마큼의 저자세를 취해야 하며 어디를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 것인지 아무런 감이 오지 않았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앞으로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다.


'이럴 거면 때려치우세요. 아직도 이용해먹는 건 그쪽 같은데.'


정말 그냥 다 때려치울까. 이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기는 할까. 김도영은 대체 뭘 보고 정재현이 저를 이용한다고 생각했을까. 하늘을 찌를 듯하던 자신감이 하루가 다르게 꺾여만 간다. 기세를 앞세워 몰아붙였던 그때와는 달리 태도도 점점 하남자스러워지고 있었다. 좋아해 줄게. 아니, 미칠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테니까 다시 해. 근데 간이랑 쓸개를 어떻게 빼 줘야 하는지만 알려줘.

한심한 새끼. 김도영이 잘도 넘어오겠다. 하지애 너는 이런 나를 어떻게 7년이나…


아 맞다. 나 곧 있으면 미국 가지 참.


땅끝을 향해 꺼져있던 고개가 정면을 번뜩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재현이 예약해 놓은 출국 날짜는 다음 주 목요일 아침이었다. 

이대로라면 김똑땅 씨가 제안했던 2주를 전부 채울 수 없다. 그걸 또 꾸역꾸역 채우고 나서 출국을 한다 해도 샌디의 결혼식은 토요일이었다. 결국 김똑땅 씨와의 오롯한 2주를 선택하느냐, 어쩔 수 없이 13일만 매달렸다가 샌디를 보러 가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인데…

고민할 걸 고민해야지. 일생에 한 번뿐일 행사를 감히 뭐랑 비교를 해. 재현은 간단히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뚜루루 뚜루루. 짧은 연결음 끝에 여보세요. 하는 지애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 지애야."

'어.'

"나 미국 못 갈 것 같아."

'아. 어.'


물론 일생에 한 번뿐일 행사는 김똑땅 씨와의 2주 쪽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매달릴 수 있을지 모르는 거니까. 샌디랑 도미닉은 뭐, 언젠간 이혼할 수도 있는 거고(…). 지애는 오늘도 무감하고도 쿨했다. 재현도 마찬가지로 무감하고도 쿨하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다가,

조금 이상했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보지?


'끊는,'

"저기, 지애야."

'왜.'

"왜 안 물어봐?"

'뭘.'

"나 못 가는 이유."

'물어봐야 돼?'

"그건 아니지."


짧은 정적이 흘렀다. 별안간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린 지애가 긴 폭소를 했다. 머릿발 휘날리는 바람 아래 재현은 아리송해졌다. 지금 상황이 웃긴 상황인가?


'여전하다, 너.'

"뭐가?"

'사실 예상하고 있었어. 못 올 수도 있겠다고.'

"… 왜?"

'만나는 사람 있다며. 그럼 오면 안 되지.'

"왜?"

'내가 있으니까. 나 네 전 여친이잖아.'


뭐야. 정재현은 최근에서야 깨달았던 것을 지애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듯했다. 지애를 탓할 일이 아니란 걸 알고는 있었으나 살짝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재현은 볼멘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럼 카드는 왜 보냈는데."

'곧 차일 것 같길래.'

"……."

'안 차였나 보네. 못 오는 거 보면.'


뭐라고? 기가 차는 소리다. 하지애 네가 우리 사이에 대해서 뭘 안다고. 누구 맘대로 감히 그런 생각을… 이라고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지애가 맞았다. 정재현은 뻥. 차여버렸다.

재현은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아니. 차였어. 그랬더니 지애가 아하. 이랬다. 재현은 애꿎은 휴대폰을 향해 눈을 흘겼다.


"… 지애야."

'응?'

"넌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


그러다 보니 궁금해졌다. 부쩍 똑똑해진 하지애가 그리 사랑해 마지않았던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분명 얘도 정재현처럼 똥멍청이일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저 혼자 사랑을 알게 되었고 확신을 맞이했을까. 

재현의 물음에 지애가 엥? 하는 소릴 냈다. 그러더니 지금 남친? 아님 전 남친? 이러고 있다.


"뭐야. 그때 만났던 사람이랑 계속 만나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때 만났던 사람? 누구?'

"우리 헤어졌을 때 만났던 사람. 네가 진짜 사랑이라고,"

'아아. 만났던 사람 아닌데?'

"그럼?"

'아이돌인데. 그때 처음으로 입덕했었지.'

"뭐???"


완만했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재현은 휴대폰을 잠시 떼어 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전 여친에 구 약혼녀 하지애와의 통화가 맞았다. 그럼 방금 들은 말도 지애가 뱉은 말이 맞을 텐데…


"야. 너는 그럼, 그럼 겨우 그런 것 때문에 나랑 헤어진 거야?"


믿기지 않았다. 우리의 파혼 사유가 고작 입덕이라고???


'어. 우리 결혼 날짜가 콘서트 날이었어서.'

"미쳤다. 고작 그런 이유로?"

'그러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흔들릴 결혼을 뭐 하러 해.'

"……."


맞는 말이긴 하다. 재현은 까무룩 입을 다물었다.


'왜. 아쉬워? 지금이라도 할래?'

"? 아니."

'거 봐.'


지애가 실소를 터뜨렸다. 재현도 덩달아 실소를 터뜨렸다. 


"그래도, 내가 너한테 못하긴 했나 보다. 설마 그런 것 때문이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아니야. 너 나한테 잘했어.'

"… 그래?"

'어. 그래서 할 말 없게 만들었지.'

"할 말이 없었다니?"


흐음. 지애가 고민의 신음을 냈다. 왠지 모르게 긴장되는 소리였다.


'넌 좀, 애가 미지근하잖아. 다정은 한데 어떻게 보면 무심하고. 해줄 건 다 해주면서 한 방이 부족하달까.'

"내가?"

'음… 뭐랄까. 넌 항상 확신을 안 줬어. 얘가 날 좋아하는구나까지는 알겠는데 사랑까지는 모르겠는 거?'

"… 어떤 걸 보고 그런 생각을 했어?"

'그냥… 너는 절대 망가지지 않으니까? 밑바닥을 보여주지 않았어. 나도 마찬가지긴 했지만.'


밑바닥이라고? 사랑이 꼭 망가져야 하는 건가? 재현은 조금 의아했다. '재현 씨. 넌 이게 매달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왜 여기서 그 말이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다.


"왜 한 번도 말 안 했어?"

'너도 사랑이 뭔지 모르는 것 같아서. 나도 몰랐고.'


그랬구나.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지금도 알 수 없는 사랑을 그때라면 오죽했을까.


"그래서, 이제는 알아?"

'알지.'

"… 설마 그,"

'맞아. 티비 보다가 첫눈에 반했어. 너무 내 이상형이라.'

"그렇다고 바로 알게 돼?"

'응. 딱 보자마자 느낌이 왔어. 아. 이게 사랑이구나.'


확실히 하지애는 정재현보다 낫다. 그게 어떻게 딱 느낌이 올 수가 있어? 재현의 질문에 지애가 목을 가다듬었다. 할 말이 아주 많은 것 같았다.


'있잖아, 사랑은 감정이 아니래.'

"… 그럼?"

'사랑은 행동이야. 당연히 느끼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았어. 감정은 둘째 치고 행동이 변하더라고.'

"어떻게?"

'나는 내가 그렇게 구질구질한 사람인 줄 몰랐거든. 툭하면 걔 생각이 나고 인터뷰 하나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몇 초 잠깐 스쳐 지나간 표정 갖다가 분석하고 짐작하고… 나중엔 걔 땜에 밤까지 새고 있더라. 너 만날 때는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는데.'

"……."

'힘들었어. 그래도 후회는 없어.'


지애가 잔잔히 웃는 소리를 냈다. 재현은 웬일인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힘든 것. 사랑은 힘든 것이고,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구나. 꼭 아름답고 좋은 것만이 사랑은 아니구나. 구질구질하고,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그래서 가끔은 나도 내가 싫어지는 것. 망가져야 하는 게 아니라 망가질 수밖에 없는 것. 내가 나를 놓게 되는 것.


"그래. 알았어. 얘기해 줘서 고마워."

'고맙긴.'

"아, 맞다. 내가 오늘 중으로 입금할 테니까 샌디 선물 좀 대신 사줘. 갖고 싶어 하는 거 있으면 알려주고. 맞춰서 입금할게."

'… 무슨 또 그렇게까지 해?'

"해야지. 애들한테 못 가서 미안하다고 전해주고. 여름 되면 휴가 맞춰서 갈 테니까,"

'아니. 오지 마.'


지애가 별안간 엄중한 목소리를 냈다. 정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듣는 입장에서는 살짝 서운할 말투였다. 

말미를 잃은 재현은 천천히 눈을 굴렸다. 아랫입술이 비죽 나오려 들었다.


"… 알았어. 그럼 연락할,"

'하지 마.'

"……."

'재현아. 정신 차려.'


갈 곳을 잃은 눈동자가 어느 지점에서 멈추었다. 재현은 잠시 멍했다. 정신 차려. 그 안에 들어있던 지애의 진심이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을 꾸짖는 듯했다. 지애가 보기엔 정재현이 정신 나간 놈 같았나 보다. 

그런데… 그게 맞아.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도 고민 상담이랍시고 붙들고 있는 게 전 약혼녀라니. 붙들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응. 그래."

'빠이.'

"잘 지,"


내라고 하려고 했는데 끊겨버렸다. 재현은 숨을 거둔 휴대폰을 묵묵히 내려다봤다. 그 위로 오전의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꽤 예쁜 모습의 하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대한 정성껏 카메라 속에 담았다. [도영씨 하늘이 너무 예뻐요 보고 힘내요] 그 메시지를 보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일 분이었다. 아니, 일 년 만에 보내 보는 첫 하늘.


₁ 좋아해요-


재현은 휴대폰을 숨기듯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메시지 하나 보내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저 혼자 목덜미가 시뻘게져서는 계단을 뛰쳐 내려갔다. 찬 바람 부는 옥상 위였다. 흡연자가 아니고서는 잘 찾지 않는 공간. 바꿔 말하면 흡연자들은 주구장창 들리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 헐."


양손에 커피를 쥔 채 달달대던 오 과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 월의 차가운 하늘 아래, 같은 팀 직원의 통화를 엿듣느라 식어버린 커피의 온도는…




이토록 미지근




99.

꼬르륵. 뱃속에서 토르 급 천둥이 쳤다. 설마 누가 듣지는 않았겠지. 개수대 물기를 닦던 김 사장은 알싸하게 뒤를 돌았다. 슬슬 한적해지기 시작한 점심시간 막바지였다. 다행히 다들 와글대는 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요 며칠 하도 긴장 상태에 놓여있다 보니 에너지 고갈 속도가 가히 청소년기 수준이었다. 도영은 살금살금 주변을 둘러보다 카운터 아래로 몸을 숨겼다. 우유통을 넣어두는 냉장고를 열어 보니,


있다. 오늘 아침 전 남친이 싸다 준 잠봉 샌드위치.


이걸 그냥 먹어 말아. 도영은 무릎에 양손을 얹어두고 고민했다. 내용물이 실하고 두툼한 게 딱 김도영 취향이었다. 그렇다고 얌얌 먹어주자니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았고, 쓰레기통에 처박자니 좀 아까웠다. 정재현의 정성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잠봉과 루꼴라의 물가를 고려한 선택이었다.

물론 신기하긴 했다. 천하의 정재현이 도시락을, 그것도 헤어진 전 애인을 위해 손수 만들었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끝이다. 아무런 의미도 감동도 재미도 없는. 그러면서 먹음직스럽긴 한.


'귀여워요. 엄청.'


으악. 온몸에 소름이 쭉 끼쳤다. 그래서 그랬는지 오른손이 멋대로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말았다. 아이구. 실수로 포장을 깠다. 입이 미끄러져서 한 입을 깨물어 버렸다.


맛있긴 하네.


도영은 세로로 튀어나온 루꼴라를 토끼마냥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혹시 미친 복숭아가 카페에 들이닥칠 수도 있는 거니까 최대한 몸을 숨겨가면서. 그 순간 스스슥. 자동문이 열렸다. 시발 정재현인가? 도영은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등 뒤로 감춰냈다. 빼꼼 쳐든 시야 앞으로 재빠른 인영이 지나갔다.


"대박. 대박이에요. 제가 아까 뭘 들었는지 아세요?"


음? 입안 음식을 한 번에 삼켜낸 김 사장이 천천히 기립했다. 카운터 바로 앞자리, 언제나 그랬듯 모여 있는 가십걸들의 좌석 앞으로 오 과장이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오늘따라 안 보이신다 했더니 어디를 다녀오신 모양이었다. 도영은 일단 행주를 손에 쥐었다. 작업대를 북북 닦는 척하면서 귀를 쫑긋 세웠다.


"네? 뭔데요?"

"아니, 아까 밥 먹고 옥상에 담배 피우러 갔었거든요? 근데 정 팀장님이 통화를 하고 있는 거예요."


또 정재현이야? 이제는 듣기만 해도 지치는 이름이다. 아 그냥 듣지 말까. 도영은 열심히 문대던 행주와 손에 쥔 샌드위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위장이 꽉 굳는 느낌이었다.


"통화? 무슨 통화요?"

"딱 보니까, 전 와이프더라고."

"헐 대박. 진짜?"

"네. 애들이랑 미국에 사는 거 같던데. 다음 주에 정 팀장 또 휴가 냈거든요? 근데 그게 미국 가려고 그랬던 건가 봐요."


아. 짜증 나.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도영은 행주를 개수대로 처박았다. 그대로 자리에 쭈그려앉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사람들은 뭔데 남의 사생활을 자꾸 떠들고 다니는 걸까. 그러면서도 귀는 틀어막지 못했다. 대신 입을 틀어막았다. 방금 전 먹었던 샌드위치가 금방이라도 역류할 것 같았다.


"미국? 세상에… 기러기였구나."

"들어보니까 와이프가 바람 나서 이혼을 한 것 같더라고요. 그러면서 뭐라 했더라. 애들 사고 싶은 거 다 사주라고 돈 부친 댔나?"

"아빠는 어쩔 수 없이 아빠네. 그 와중에 애들 챙기는 것 봐."

"참 애비죠. 맨날 그렇게 똑땅아 똑땅아 하면서 우시더니… 근데, 그 똑땅이가 딸인 것 같더라고요. 이름이 샌디랬나…"

"근데 애들이면 하나가 아닌 거 아니,"


우욱. 결국엔 구역질이 튀어나왔다. 난데없이 새어 나온 역한 소리에 직원들이 동시에 입을 닫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도영은 고개를 꾸벅이며 자동문을 통과했다. 이제 막 입장하려던 손님 하나가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도영은 좁은 보폭으로 잘게 걸었다. 틀어막은 입에서 쓴 숨이 쏟아져 나왔다. 코너를 돌면 바로 화장실이 있다. 입장과 동시에 샌드위치부터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들어보니까 와이프가 바람 나서 이혼을 한 것 같더라고요.'

'귀여워요. 엄청.'

'참 애비죠. 맨날 그렇게 똑땅아 똑땅아 하면서 우시더니…'

'그러고 있으니까 토끼 같아요. 회색 토끼.'


곱게 끼워져있던 루꼴라와 햄 등이 와르르 분해되었다. 보기 싫었다. 도영은 휴지를 왕창 쑤셔 넣었다.




100.

₁ (사진)-
₁ 도영씨 하늘이 너무 예뻐요 보고 힘내요-
₁ 좋아해요-


흠. 코끝에서 짧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오 분째 화면 버튼만 딸깍이던 재현은 아랫입술을 비죽였다. 답장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아예 읽지도 않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사람 성의를 봐서 숫자는 좀 지워 주고 씹든가 하지.

재현은 안전벨트를 결합시켰다. 모든 직원이 떠나간 오후 여덟 시. 그는 잠시 근처 번화가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조수석에는 방금 전 사수해 온 갱지 봉투가 놓여있었다. 가운데 인쇄되어 있는 새빨간 로고가 익숙했다.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김도영 씨가 무언가를 맛있게 먹는 모습이 간절히 보고 싶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가장 좋아한다는 햄버거를 사 왔으니까 이번엔 정말 먹어 주지 않을까.

기대감에 부푼 입술이 씰룩였다. 재현은 가볍게 액셀을 밟았다.


"도영 씨."


스스슥. 자동문이 스무스하게 입을 열었다. 늦은 저녁의 카페 안은 꽤 한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재현은 봉투를 뒷짐에 지고 살금살금 입장했다. 둥실대는 걸음을 따라 바스락대는 소리가 났다.

도영은 작업대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솜 주먹 같은 양손에 폰을 쥔 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래를 향하고 있는 앞볼이 볼록했다. 저곳에 입술을 찍으면 어떤 촉감이 느껴지는지 재현은 잘 알고 있었다.


"… 도영 씨?"


콩콩. 재현의 오른 주먹이 카운터를 두들겼다. 사장님. 하고 재차 불러보았지만 도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큼. 재현은 헛기침을 했다. 도영의 시선은 계속 휴대폰 화면 안에 있었다.


"도영 씨. 뭐 봐요?"

"……."

"뭐 좀 먹었어요? 도영 씨 저녁 사 왔는데."


재현은 카운터 위로 노란 봉투를 올려놓았다. 안에 들어있던 햄버거와 감자튀김 등을 차근차근 내려놓자 드디어 도영이 고개를 들어주었다. 카운터 내부로 고소한 냄새가 훅 끼쳤다. 동시에 도영의 동공이 조금씩 커다래졌다.

선물을 발견한 애기 같았다. 재현은 콜라 컵에 빨대를 꽂아 도영에게로 들이밀었다.


"얼른 먹어요. 배고프겠다."

"……."

"어떤 버거를 좋아할지 몰라서 두 개 사 왔어요. 하나는 고기 패티고 하나는 치킨…"


탁. 손이 밀쳐졌다. 조금만 더 세게 쳤으면 콜라를 엉망진창으로 쏟을 뻔했다. 재현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중심을 잡았다. 그동안 도영은 두 개의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한데 모아 들고 있었다. 


"도영 씨. 위험하잖아요."


놀란 마음에 툴툴대는 말투가 튀어나왔다. 여전히 대답 없는 김똑땅 씨는 묵묵히 카운터 내부를 가로질렀다. 품 안에 가득 안긴 봉투에서 감자튀김이 새어 나왔다. 그 위에 얹어진 햄버거도 곧 있으면 탈출 직전이었다.

다른 곳으로 가서 먹으려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가 향한 곳은 쓰레기통 앞이었다.


"… 도영 씨."


와르르. 정재현의 퇴근 후 노고가 백 리터 종량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재현은 허망하게 입을 벌렸다. 곧이어 애써 붙들고 있던 콜라마저 빼앗겼다. 마찬가지로 종량제 봉투 속으로 쑤셔 박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롯데리아는 안 먹어요."

"뭐?"

"안 먹는다고. 싫으니까 나가라고."


도영이 다시 작업대 위로 등을 기댔다. 전 남친 정재현 쪽으로는 어떠한 시선도 주지 않았다. 투명인간보다 못한 취급이었다. 재현은 달달대는 입술을 애써 끌어올렸다.


"에이, 그래도 버리지는 말지 그랬어요. 내가 치우면 되는데,"

"나 준 거잖아요. 그럼 내 맘대로 해도 되는 거 아니야?"

"그래도… 내 성의를 봐서라도,"

"아. 이깟 햄버거가 그렇게 성의 있는 물건이었어요?"

"……."

"몰랐네. 근데 필요 없으니까 이만 가주세요."


이깟 햄버거? 차곡차곡 덜어지던 인내심에 슬슬 한계가 왔다. 그러게, 원하는 게 이깟 햄버거라며. 비싼 레스토랑도 룸서비스도 싫다면서. 네가 진짜 좋아하는 걸 달라고 했잖아. 그래서 이번엔 네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했는데, 그마저도 이깟이라고 표현해버리는 거면.


'재현아. 정신 차려.'


아니야. 정신 차리자. 재현은 안쪽 볼을 강하게 씹었다. 따가움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오히려 좋은 현상이었다.


"… 알았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성의 없게 느껴졌다면 사과,"

"아니?"


도영이 느리게 재현을 바라보았다. 재현은 고개를 숙인 그대로 눈만 추켜올렸다. 똑땅이의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굳다 못해 식어있다. 본 중에 가장 차가운 모습이었다.


"필요 없다고. 성의가 많든 적든, 그냥 네 성의 자체가 나는 이제 필요 없다고요."

"……."

"제발 가요. 손님 있잖아. 화내기 싫어요."


제 할 말만 끝낸 도영이 시선을 거두었다. 허공을 향하려던 재현의 오른팔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화내기 싫다니. 그럼 정재현이 무슨 화낼 짓을 저질렀다는 소린가. 

아. 너무 어렵다. 재현은 혼나는 아이처럼 고개를 숙여뜨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전혀 잡히지 않는다. 드디어 뭔갈 조금 깨달았다고 생각했는데.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정작 김도영이 기회를 주지 않았다. 가장 좋아하는 햄버거를 사다 줬는데도 가라고 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재현때문에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원하는 것만 골라 해주는 게 맞는 거면… 지금은 가야겠구나. 재현은 고개를 숙인 채로 뒤를 돌았다. 

그러다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래도 이 말 하나쯤은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도영 씨."

"……."

"혹시, 무슨 일 있어요?"

"……."

"아니면 내가 잘못한 거라도…"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 물었다. 그동안 계속 냉랭했던 건 사실이었으나 이렇게까지 보는 앞에서 모든 음식을 버려버린 것은 처음이었다. 잔뜩 굳어있는 얼굴도 아침과는 분위기가 썩 달랐다. 정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 수도 있겠다. 아니면… 


"… 도영 씨."

"……."

"도,"

"아… 씨발 진짜."


그 사이에 정재현을 향한 모든 정이 떨어졌을 수도.


"제발 꺼져요."

"……."

"꺼지라고. 내 인생에서 좀 꺼져!"


도영이 카운터를 뻥 뚫고 튀어나왔다. 재현을 노려보는 두 눈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번에도 정재현은 등이 떠밀렸다. 이번에도 김도영 씨를 울리고 말았다.




101.

아. 이게 아닌데.


몸이 어지럽게 휘청인다. 재현은 모든 신체의 말단을 밑으로 늘어뜨린 채로 엄지손가락을 토닥였다. 자꾸 오타가 생겼다. 예상치 못한 권고사직을 당해버린 사회 초년생의 모습으로 재현은 눈을 부릅떴다. 


[도영씨 내가 오늘 기분 상하게 한 게 있다면 미안해요 나는 도영씨가 좋아하는 걸 주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먼저 물어보고 사다줄걸 그랬어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그러지 않을 테니까 도영씨 카페에 가게 해주세요. 괜찮으시면 인생에서 꺼지라는 말만은 취소를…]


입력하는 내용도 그와 비슷한 신세였다. 제가 다 잘못했으니 제발 자르지만 말아주십사. 치졸한 문자를 조합해 내던 휴대폰이 결국 주머니로 들어갔다. 갑의 마음을 흔들기엔 터무니없이 구려 보였다.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


재현은 양팔을 축 늘어뜨린 채 나풀나풀 걸었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 차를 두고 왔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카페를 나온 후 그는 자연스레 근처의 맥줏집으로 들어갔다. 되는대로 술을 비우다 가슴이 갑갑해져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겨우 한 시간 반밖에 지나 있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땐 이렇게나 안 가는 시간이 어쩌다 일주일이나 흘러버리고 만 건지. 김도영 씨가 말했던 이 주가 절반이나 사라졌다. 정재현은 시작도 못 해봤는데.


'꺼지라고. 내 인생에서 좀 꺼져!'


그래도 이번엔 정말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결국 남은 것은 꺼지란 말뿐이었지만. 일주일 간 온갖 애를 쓴 결과가 씨발이랑 꺼져랑… 키스. 그리고 두 번의 눈물. 그 짧은 새 김도영 씨를 두 번이나 울리고 말았다. 이 정도면 이것도 능력이라 할 수 있지 않나.


쿵.


그러던 중 이마가 부딪혔다. 고통에 비해 과하게 커다란 소리와 진동감이 느껴졌다. 재현은 비틀대며 뒤를 밟았다. 새하얀 불빛이 좁아든 시야를 파고들고 있었다.

인형 뽑기 기계였다. 솜뭉치 같은 인형들이 바닥에 널려있는. 위에 매달려있는 집게는 용도가 불분명한 모습으로 꺾여있었다. 

재현은 조종당하는 로봇처럼 주머니를 뒤적였다. 지갑을 열어보니 오만 원 권 지폐가 튀어나왔다. 무작정 안으로 쑤셔 박았다. 자작하게 깔린 인형들 중 딱 하나 있는,


'도영 씨. 도영 씨는 도영 씨가 토끼 닮은 거 알아요?'


토끼 인형. 왠지 쟤를 반드시 뽑아야만 할 것 같았다.

지잉. 재현은 신중을 기해 스틱을 움직였다. 덜커덕. 뻑뻑한 하강 버튼과 동시에 집게가 매가리 없이 내려갔다. 악력이라곤 하나도 없는 몸짓이었다. 결국 토끼가 찔끔 밀려났다. 출구에서는 오히려 멀어져 버렸다.


'뭐… 종종 듣긴 했어요.'


지잉. 덜커덕. 또 밀려났다. 텅. 재현은 애꿎은 기계의 몸체를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토끼의 세상이 좌우로 진동한다. 그래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 재현 씨. 기분 상했어요?'


지잉. 덜커덕. 또또 밀려났다.


'나 너무 힘들어. 나 그만할래…'


지잉. 덜커덕. 또.


'나, 재현 씨 더는 못 만나겠어요.'


지잉… 쿵. 쿵쿵. 쿵. 쿵. 좁아든 시야가 아롱하게 번져갔다. 저 사람 좀 봐 소리를 연속 세 번이나 들은 뒤에야 재현은 제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뽑고 싶은데. 나 저거 너무 뽑고 싶은데. 저 토끼가 너무너무 갖고 싶은데. 너무 품에 안고 싶고 너무 데리고 다니고 싶어. 밤마다 곁에 두고 싶다. 매일매일 쓰다듬어 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게 없다. 헤어짐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자격이 상실되는 것.


'충분히 늦었어요.'


기계 위 숫자가 0을 토해냈다. 재현은 스틱을 손에 쥐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그렇구나. 충분히 늦었구나. 김도영 씨는 진작 끝이 나 있었고, 정재현이 매달리든지 말든지는 딱히 중요한 게 아니었구나.

만회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 길고도 많은 시간을 두 손 놓고 떠나보낸 주제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김도영의 마음이 사라졌다는 걸 믿지 못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 놓고 이제 와서 사랑을 믿어달라 떼를 쓰고 있었다. 2주면 충분하다고, 그 안에 모든 걸 되돌려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만했다. 감히 기회를 얻은 것이라 착각했다.


'왜 울어.'

'…….'

'왜 우냐고.'

'… 네?'


또 울려놓고 제대로 달래주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정재현은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재현아. 정신 차려.'


아니. 지애야. 늦은 것 같아. 생각해 보니까 그래. 매달리는 건 혼자 하는 거지 둘이 하는 게 아니었어. 이미 놓아진 관계를 나 혼자 붙들고 있는 거였어. 그 사람에게 남은 몫은 나를 떨쳐내는 것뿐이야. 당연한 건데, 감히 서운해하고 원망할 자격 따윈 없는 건데도 왜…


아직도 인정이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김도영 씨가 내가 싫대. 나한테 꺼지래. 나 어떡해.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으엉. 추한 울음소리가 꾹 깨물린 입술 새로 빠져나왔다. 세상이 무너진 듯하다. 살면서 무언가가 이렇게 서럽고 간절했던 적이 있었나.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죽고 싶을 만큼 지루해도 좋으니 그 무엇도 가지고 싶지 않았던 옛날로… 아니. 거짓말이다. 그랬으면 김도영 씨를 만나지 못했을 테니까.

구질구질하다. 재현은 쥐고 있던 스틱을 밀어내듯 놓아버렸다.


지이잉.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저음질의 기계소리가 났다. 공중을 팽글거리는 집게가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재현은 젖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손으로 눈가를 비벼 닦고 하강 버튼을 눌렀다. 0으로 깜빡이던 숫자가 아예 빛을 잃었다. 아마 마지막 카운트가 1이 아닌 0이었던 듯했다.

쿠당탕. 무언가가 굴러떨어졌다. 허리를 굽히려는 순간 코끝으로 고소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재현은 눈을 꿈뻑였다.

맥도날드 앞이었다.




102.

뚜루루. 뚜루루. 연결음이 길어진다. 재현은 양팔에 얼싸안은 짐을 고쳐들었다. 어깨 위로 지탱한 휴대폰이 위태롭다. 이러다 곧 떨어질 것 같았다.


'연결이 되지 않아…'


결국엔 또 소리샘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위태로움을 이기지 못한 재현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 반대편 주머니에는 무언가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다. 사선의 틈새로 흰색 귀를 빼꼼 드러내고 있는 채였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 재현은 젖은 코를 들썩이며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웃음이 실실 나왔다. 이런 정재현을 보고 또 꺼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엔 맥도날드인데다 토끼 인형도 있으니까 아까보다는 조금 상황이 낫지 않을까.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재현의 뇌는 정상적으로 굴러가는 법을 잊은지 오래였다.


₁ 도영씨 나 집 앞인데 잠깐만 내려와 줄래요?-
₁ 줄 게 있어요 정말 이것만 주고 갈게-
₁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잠깐이면 돼-
₁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재현은 휘청이는 시야를 몇 번이고 좁혀냈다. 행여 오타가 있을까 수십 번씩 확인해가며 공동 현관문 앞 계단에 주저앉았다. 쿠르릉. 동시에 웬 천둥이 쳤다. 딱히 떨어지는 빗방울은 없었다.


뭐지? 비가 오려는 건가.


재현은 헤롱대는 고개를 위로 추켜올렸다. 번쩍. 마른하늘 위로 새파란 실금이 갔다. 아무래도 자리를 옮겨서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재현은 연신 만지작대던 똑땅이2를 가장 깊숙한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었다. 한 아름 안고 있던 봉투를 한 번 더 고쳐 안은 뒤, 떨어뜨린 게 없나 꼼꼼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공동 현관문 바로 앞으로 가 있으려고 했다. 뒤늦게 발견한 노란색 아우디만 아니었더라면.

익숙한 차였다. 흔치 않은 차종에 흔치 않은 색깔. 재현은 습기가 남아있는 눈가를 팔뚝에 비벼닦았다. 쿠르릉. 또다시 천둥이 쳤다. 이번엔 머리 위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뚝. 뚝. 뚝. 뚝. 뚝뚝뚝뚝. 뚝뚝뚝뚝 솨아.

바짝 올라간 속눈썹 위로 물이 쌓였다. 차갑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아우디의 앞창문을 가려냈다. 재현은 그쪽을 향해 한 발짝씩 천천히 나아갔다. 번개가 쳤다. 하늘이 갈라지고 주변이 밝아졌다. 차 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있었다.


입술을 꼭 맞댄 채로.




-


다음 화 완결입니다(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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