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피폐함주의








내가 네 몫의 눈물과 피까지 다 흘려줄게.

나는 그걸로도 만족해. 희망의 등불이 다 무어니. 정작 이제사 희망을 갖고 나아가는 이들을 지킬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이니.

나는 빛이 아니라 스치는 바람이야. 머물지 못하고 쉽게 사라지는 흐름이야. 내가 겨우내 갖게 된 빛은 나 같은 바람이 모여서 된 거야.

이제 네가 나 대신 간직해줘. 네 몫의 분노와 슬픔을 모두 내가 지고 갈 테니.


너를 위해서라면 죽어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가도 아쉽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그리 믿는다. 네가 나 대신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 보아줄 테니. 그건 나보다 네가 훨씬 잘 할 테니까. 지금만 이겨내면. 이 전장을 딛고 네가 날아오를 수 있어.


내 피와 살과 뼈가 흔적조차 남지 않아 땅에 묻히지 못할지라도.


그러니 혹시라도 나 같은 사람의 죽음으로 너무 슬퍼하지 마. 나는 우리 미래를 가리던 검은 장막을 거두고 갈 수 있어 기쁘다.

아주 찰나의 순간. 그 순간은 루즈하게 늘어지는 축음기의 음악과도 같았다. 오랜 시간동안 네 얼굴을 시야에 가득 담았다. 너의 맑은 웃음까진 바라지 않아. 지금의 너는 웃기엔 지치고 괴롭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고통으로 일그러졌음에도 사랑스러웠다.








생명이 살기 위해서 다른 생명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동물이든 괴물이든 간에 망설임 없이 벨 수 있게 되던데.

그런데 그런 순간이 있어. 아주 털이 아름다운 영양을 쓰러뜨리고 나서, 주위에 잠깐이지만 피가 흩뿌려지고 나서, 생기로 반짝이던 눈동자가 점차 빛바래지는 그 짧은 시간.

미끈한 거대 도마뱀이 숨을 다하고 나서, 얕은 개울가에 쓰러지고 나서, 촉촉했던 피부가 건조해지고 바스라지는 어느 찰나.


가끔은 이 모든 게 옳은지 모르겠더라. 검과 활을 접고, 그냥 유유자적하게 여행이나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어차피 모험가가 된 것도 어디까지나 내 안전을 위해서였는데.


나에게 정말 이 일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나는 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전투에 들어갔을 때 나를 주체 못해서 날뛸 때도 있긴 하지만… 그게 곧 내 천직이라는 뜻은 아니잖아.


섭섭하군. 그렇다고 지금 무기를 놓지는 말아. 나는 그대들 생각처럼 홀로 싸울 수 없어서 말이야. 우리에게는 서로 동료가 필요하다네.








"애정도 없는데 이런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그녀는 물음 아닌 물음을 던지고서 전장으로 달려 나간다. 목에서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진다.

네가, 너희가 너무 필요했어.


"널 보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 병에 걸렸어. 앞으로 어디 잡혀가지 말고 나랑 있어.“


이미 그녀의 눈에는 그들을 향한 애정과 세계를 향해 변질되고만 증오가 가득하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과 재, 피의 냄새가 아리다. 비록 자신이 화염 속에서 스러져갈지언정 곁에서 죽기위해 그녀는 싸운다.


글쎄, 그들은 그녀를 위해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려줄까?








그녀가 멀어져간다. 그녀의 옆에 수많은 이들도 함께 멀어진다. 따라잡고 싶어도 따라잡지 못하고 본인은 제자리걸음만 반복할 뿐이었다. 다들 나아가는데 빛을 향해 나아가는데 본인만 나아가지 못했다. 빛속으로 사라져가는 그녀를 향해 닿지 않는 손을 뻗었다. 

알피노는 꿈속에서 울었다. 오래도록. 





원더메어와 보탈리아에 상시거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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