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보다 말이 더 가관이었다.

 

‘저거 완전 미친 새끼 아니야?’

 

믿을 수 없는 말본새에 수한이 눈을 깜빡였다. 진짜 내가 들은 게 맞아? 수한과 같은 생각을 하는지 웅성거리던 소음마저 뚝 끊기고 온전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런 신입생은 선배들도 경험해보지 못했는지 그 누구도 수습하지 못했다.

 

허율을 꼴을 가만두고 볼 수 없는 수한은 제 탓이 아닌데도 기꺼이 나섰다. 싸늘하다 못해 영하로 뚫고 들어간 분위기에 수한이 크게 확장 시켰던 눈과 입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앞에 멍청히 선 허율을 향해 거의 달려가며 외쳤다.

 

“제가 대신할게요!”

 

순식간에 허율의 곁으로 날아온 수한이 허율의 손에서 마이크를 빼앗아 들었다.

 

“저희 율이가 숫기가 없어서 이런 걸 좀 어려워하더라고요.”

 

원수처럼 멸시하던 허율을 친근한 척 율이라고 칭하며 괜히 허율의 어깨를 제 어깨로 툭 쳤다.

 

“친구를 위해서 대신 장기자랑을 하겠다는 건가요?”

 

사회를 보던 민이도 정신을 차리고 수한을 거들고 나섰다.

 

“네. 제가 좀 끼가 많아서,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셔요. 하나 더 자랑하고 싶은 것도 있으니까 겸사겸사해서요.”

“하나 더요?”

“허율이를 위해서 하나 남겨놓은 비장의 무기입니다.”

“아까는 웨이브를 하셨는데 이번에는 뭔가요?”

“말보다 몸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수한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이크를 민이에게 건넸다. 민이는 수한이 건넨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양손이 자유로워진 수한은 허율의 앞에 가서 마주 보고 섰다. 테이블에서는 수한의 뒷모습만 보였고, 수한을 바라보는 허율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수한은 눈을 꾹 감고 숨을 내쉬었다. 이것만은 안 하려고 했는데.

 

수한은 허율의 몸에 대충 손을 얹고는 엉거주춤 뒤로 엉덩이를 뺐다. 그리고 트월킹을 가장한 몸부림을 쳤다. 웨이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몸짓이었는데 엉덩이를 뒤로 뺀 모습이 트월킹을 연상하여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수한도 사람이라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한 십 초 정도 엉덩이를 흔들다가 몸을 세우고 정중하게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앞에 서 있고 싶지도 않아 곧바로 자리로 돌아갔다. 수한의 뒤를 따라 허율도 함께 자리로 돌아왔다.

 

수한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진한 현타를 느꼈다. 씨발, 그냥 놔둘걸….

 

그래도 수한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두 번이나 원치 않는 장기자랑을 보여준 탓에 당당히 1등을 했다. 1등 상품인 양주를 제 테이블에 받아오기 위해 앙코르를 한답시고 한 번 더 몸부림을 쳐야 했지만, 손에 양주를 들고 나니 그다지 창피하지 않았다.

 

“수한아, 너 진짜 대단하다.”

“한수한, 웃겨서 죽는 줄 알았어.”

 

수한이 양주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자 여선과 미나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건넸다. 수한은 얼굴이 살짝 빨개진 채로 손을 내둘렀다.

 

“이정도야 뭐, 한수한의 백 한 가지 매력 중 하나지.”

 

수한의 너스레에 여선과 미나가 깔깔대며 웃었고 수한이 앉은 16번 테이블은 유독 웃음소리가 넘쳤다.

 

장기자랑이 끝나고 난 뒤 민이도 자리로 돌아와 빈자리가 채워지자 오티 때처럼 술 게임이 벌어졌다. 그래도 한 살 많은 선배가 끼어있다고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면 벌주는 마시는 진실 게임을 했다.

 

“첫 번째 질문은 내가 한다.”

 

수일이 거드름을 피우며 목소리를 깔았다. 수한은 수일을 보며 어떤 질문을 던질지 기다렸다.

 

“첫 키스는 언제인지?”

 

수일이 제 앞의 민이를 향해 손가락을 짚었다. 민이는 잠깐 눈동자를 위로 올리곤 곧바로 대답했다.

 

“19살.”

 

그리고는 옆에 앉은 한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받은 한나가 잠시 우물쭈물 망설였다.

 

“아, 저, 저는….”

“대답 못하면 벌주!”

 

신이 난 수일이 한나의 앞에 잔을 내밀었다. 말보다 술이 나은지 한나가 수일이 건넨 잔을 들고 쭉 들이켰다. 그리고 그다음 여선의 차례가 되자 여선은 태평하게 대답했다.

 

“저 스무 살요.”

“스무 살?”

 

스무 살이면 얼마 전이라는 소리라 허율을 뺀 나머지의 눈에 흥미진진한 빛이 떠올랐다. 여선은 여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음 차례인 남자들로 순서가 넘어왔는데 셋 중에서 제일 선배인 수일이 먼저 나섰다.

 

“나도 마실게.”

 

자신만만하게 질문을 던질 때는 언제고 한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아무도 권하지 않은 벌주를 들이켰다. 수한은 내심 그냥 술이 먹고 싶었던 거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수한이는?”

“저요? 저는,”

 

수한은 잠깐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들 해봤는데 해본 적 없다고 사실을 말하려니 창피하고, 그렇다고 지어서 말하기도, 아니지, 어차피 모르는데 지어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괜히 벌주를 마시기 싫었던 수한은 대충 지어냈다. 1학년은 너무 어리니까, 2학년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연애를 했어?”

 

뜻밖이라는 듯 수한을 흘기며 수일이 비아냥댔다. 수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제 거짓말을 사실로 포장했다.

 

“혈기 왕성할 때라 그만.”


뻔뻔하게 받아치자 “오”하고 탄성이 터졌다. 수한의 너스레에 분위기는 한층 물이 올랐고, 과대 민이는 마지막 차례인 허율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럼 허율이는?”

 

수한에게 꽂혔던 화살이 이번에는 허율에게로 돌아갔다. 수한도 내심 허율의 첫 키스 여부가 궁금했다. 볼만한 외모 때문에 인기는 좀 있던데 저 쓰레기 같은 성격을 이기고 사귀어줄 사람이 있나?

 

“전 안 할건데요.”

 

그러나 허율의 대답은 있다, 없다가 아닌 안 한다는 대답이었다. 장기자랑을 할 때처럼 싸가지라고는 한 방울도 없는 대답에 수한과 다른 사람들이 풀어놓은 분위기가 또다시 꽝꽝 얼어붙었다.

 

수한은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술을 마시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두 번은 없을 신입생 환영회인데 개 싸가지 허율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야, 그럼 네가 벌주 마셔야겠네.”

 

앞에 놓인 잔을 툭 밀며 권하자 다행히 거부하지 않고 잔을 들었다. 그나마 마신 벌주 때문인지 조심스럽게 분위기가 풀어졌고 처음보다는 약한 질문이 오고 갔다.

 

두 번째부터는 수한이 상으로 받은 양주가 벌주로 주어졌다. 수한은 대답이 약하다는 이유로 연달아 세 번을 마셨고 순식간에 온몸이 흐늘흐늘하게 늘어졌다.

 

“저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눈이 더 감기기 전에 수한이 손을 들고 외쳤다. 겉으로 보기에도 잔뜩 취한 티가 팍팍 나서 쉽게 수한을 놓아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따로 자리를 지정한 것이 무색하게 다들 섞어 앉게 되어 인원이 많아진 탓에 수한의 빈자리는 쉽게 잊혔다.

 

수한은 빙빙 도는 머리를 짚으며 화장실이 아닌 출입문을 나섰다. 빨리 마신 게 문제인지, 아니면 섞어 마신 게 문제인지 좀처럼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속도 울렁거리고, 머리도 빙빙 돌고 팔다리도 제대로 감각이 올라오지 않았다.

 

“후우….”

 

찬 공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열에 달아오른 얼굴에 찬기가 닿으니 그나마 정신이 좀 돌아오는 듯했다. 수한은 고개를 살짝 흔들며 술집 옆 골목으로 들어갔다.

 

건물 사이에 좁게 난 골목은 더럽고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어 그냥 벽에 몸을 기대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뺨뿐만 아니라 폐에도 시원한 공기가 들어가니 열이 가시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키던 수한은 번쩍 눈을 뜨고 뺨을 짝짝 때렸다. 감으면 안 돼. 여기서 잠들면 안 돼. 가까스로 정신을 잡고 좁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그때였다. 수한의 눈에 권허율의 뒷모습이 걸린 것은. 안 그래도 눈엣가시 같은 커다란 뒷모습이 고까웠는데 마침 잘됐다. 수한은 원래 남에게 시비를 터는 시건방진 권허율 같은 사람이 아닌데 술기운이 돌아 감정이 앞섰다.

 

“야.”


비틀비틀 허율의 뒤를 따라가며 불러도 역시나 제 할 일만 했다. 수한은 다시 목소리를 키워 허율을 불렀다.

 

“야! 권허율!”

 

이제야 귓구멍이 뚫렸는지 거대한 몸이 천천히 돌아갔다. 그리고 뻔뻔하고 재수 없는 낯짝이 수한을 바라보았다.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감정이 더 끓어올랐다.

 

권허율을 수습하기 위해 급하게 뛰쳐나간 것도 떠오르고, 번호를 안 알려줬던 재수 없는 첫 만남도 떠올랐다. 술에 취한 수한은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허율에게 상처가 될 말을 하고 싶어졌다. 무심하고 잔잔한 저 낯짝을 부서뜨릴 말이.


“알파 나부랭이 주제에.”

 

수한은 영민이 알려준 허율의 비밀을 비아냥댔다. 큰 타격을 기대하진 않았는데 수한의 공격이 제대로 명중했다. 묵묵하던 무표정이 깨지며 허율의 입술이 비틀렸다.


“너 뭐라고 했어.”


멱살이라도 잡으려는 듯 성큼성큼 수한에게로 다가왔다. 수한은 허율의 반응이 우스웠다. 남들을 죄다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할 때는 언제고 고작 알파라는 말에 이렇게 화를 낸다고?

 

“못 들었어?”

“뭐라고 했냐고.”

“알파 나부랭이.”


지지 않고 받아쳤다. 험악하게 인상 쓰고 다가오면 쫄 줄 알았냐? 보란 듯이 고개를 쳐들고 허율을 노려보았다. 지척까지 다가온 허율이 저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수한을 내려다봤다. 키만 더럽게 커서는. 수한은 더욱 눈을 치켜떴다.


“그럼 넌 베타 나부랭이냐?”

 

무슨 독설이 날아올지 기다리는데 생각보다 수위가 한참 낮았다. 고작 한다는 게 베타 나부랭이?

 

“어. 난 베타 나부랭이다. 왜, 뭐?”


수한에게 베타라는 형질은 아무런 약점이 되지 않았다. 기분 나쁠 이유도 없을뿐더러 실제로 베타이기 때문에 ‘어쩌라고?’라는 마음부터 들었다.


“난 베타 나부랭이고 넌 알파 나부랭이고. 알파가 뭐 별건가! 첫 키스도 안 해본 게.”

 

수한이 깐족대며 약을 올렸다. 이거 생각보다 재밌잖아? 사실 수한도 키스해본 적이 없었지만 묘한 우월감에 도취하여 계속해서 물고 늘어졌다.


“이 나이 먹도록 첫 키스도 안 해봤다는 게 말이 돼?”


한껏 기가 살아난 수한이 몸을 바짝 붙여 코앞에서 허율을 비웃었다.


“반반하기만 하면 뭐해. 성격은 개차반에, 어? 알파 나부랭이 주제에.”


허율의 가슴께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밀쳤다.

 

“하, 씨발.”

 

결국 수한의 손가락에 폭발한 허율이 수한의 멱살을 잡고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아! 씨발, 놔!”

 

붙잡힌 수한은 허율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지만, 힘이 어찌나 센지 잡힌 멱살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허율은 거칠고 우악스럽게 수한을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갔다. 수한이 기대고 있던 골목길로. 그리고는 쿵 소리가 나게 벽에 수한을 힘껏 밀쳤다.


“아!”

 

쿵 소리까지 나며 부딪힌 등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수한은 통증이 올라오는 등을 돌볼 수도 없었다. 여전히 멱살이 틀어 잡힌 채라 허율을 노려보는 게 전부였다.

 

“내가 알파 나부랭이인지 뭔지 어떻게 알아?”

 

잔뜩 열이 받았는지 희번덕하게 뜬 눈에 수한은 또 입술을 뒤틀며 빈정댔다.

 

“딱 보면 모르냐?”

“베타 주제에.”


허율은 또 수한에게 베타라고 했다. 아무 타격이 없는 공격이란 걸 모르나? 수한은 대꾸도 하지 않고 허율이 잡은 멱살에서 벗어나려 허율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 순간,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잡힌 멱살이 당겨지더니 수한의 입술에 무언가 뭉클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 미!”


당황한 수한이 한바탕 욕을 하려 입을 열자 수한의 목소리 대신 허율의 혀가 쑥 들어오고야 말았다.

 

 

BL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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