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고 이걸 들고 있으라고? 어이가 없네. 내가 이걸 왜 들어? 장난해? 그러나 재현의 반항은 망붕러들의 호응에 힘입어 그대로 묵살. 도형은 어려운 것도 아닌데 묻고 따지지도 말고 들고 있으라고 냅다 판넬을 재현의 품에 안겼다. 다들 과학실에서 곧 시작될 고백파티 준비에 본인들이 신나서 난리라 팔자에도 없는 이주연 사랑 고백에 도우미1이 된 재현의 똥씹은 표정 같은 건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이미 프롬킹의 고백으로 드디어 프롬킹과 프롬퀸이 공식 커플이 된다는 것뿐.


여기엔 한 가지 어폐가 있다. 프롬퀸은 김나은이 맞지만 진짜 프롬킹은 이재현이고, 이주연은 차기 프롬킹으로 예약된 인재라는 거다. 어차피 내년 프롬킹인데 대충 프롬킹으로 퉁치자는 건가. 프롬킹-퀸 커플 탄생이 눈앞인데 저런 사소한 건 하나도 안 중요하다. 


불만 있으신 분? 응~ 이재현 너만~ 


어쨌거나 재현의 불만은 아무도 관심조차 주지 않았으므로 이재현조차도 포기하고 언짢은 표정으로 판넬을 손에 들었다. Will you be my sunshine? 적힌 문구를 저도 모르게 읊다 헛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주연이 이렇게 로맨틱했던가. 재현은 슬쩍 주연을 쳐다본다. 우승도 하고, 사랑도 얻고. 좋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반어법으로 뱉은 재현은 그냥 입을 다무는 쪽을 택한다. 이제 와서 깽판을 칠 수도 없고, 깽판을 친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주연이 김나은을 좋아한다는 건 이미 옛날 옛적부터 알고 있었다. 훈련하느라 바쁜 주연이 나은을 볼일이 아니면 재현의 교실에 놀러 오는 일도 없었을 거다. 선배, 뭐 하세요? 그렇게 배시시 웃는 낯으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찾아오는 건 다 김나은 때문이라는 것도. 내 핑계 좀 그만 대. 재현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주연은 선배 보러온 거 맞는데, 라고 했지만 비단 이 사랑의 작대기를 눈치 빠른 이재현만 아는 건 아니었다. 이주연이 김나은을, 김나은이 이주연을 좋아한다는 건 전교생이 다 알았다. 그런데도 아직 사귀는 사이가 아닌 건 다 이주연의 몹쓸 FM적 성격과 과도한 낭만의 결합 때문이었다. 축구 경기에서 이긴 날 짝사랑하던 이에게 고백하면 이뤄지지만 진 날 사랑을 고백하면 성사는커녕 따귀만 얻어 맞는다는 이탈리아 사람도 아니면서 굳이 경기에서 승리하면 고백하겠다고 못 박아둔 터였고, 주연은 드디어 보란 듯이 고교아이스하키리그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실시간으로 볼 필요까진 없었다. 재현은 저를 끌고 온 도형을 흘겨본다. 경기장에서 굳이 집으로 간다는 재현을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응원 버스에 밀어 넣은 게 도형이다. 거기서 다시 과학실로 끌고 온 눈치 빻은 최도형을 어떻게 죽일까 생각하는 재현을 본 도형은 제대로 좀 하라는 입 모양으로 타박한다. 늬예늬예 알겠습니다. 재현은 얼결에 건네받은 판넬을 들다 못해 그냥 얼굴을 가리는 쪽을 택한다. 그래도 내심 주연이 어떻게 고백하는지가 궁금해서 슬금슬금 판넬이 내려간다. 판넬 너머로 눈만 빼꼼 내놓고 꽃다발을 들고 있는 주연을 보곤 다시 꼴 보기 싫어서 얼굴을 올리길 반복하는 동안 호응이 커진다.


온다, 온다! 그 소리와 함께 다들 약속한 듯 핸드폰을 꺼낸다. 뭐야? 얼타는 이재현을 팔꿈치로 툭툭 치면서 얼른 따라 하라고 보채는 도형의 성화에 재현도 핸드폰을 꺼내 플래시를 켰다. 한꺼번에 흔들어대는 빛이 쏟아지자 눈을 뜨기가 어렵다. 봐서 뭐해. 재현은 눈을 감고 대충 장단에 맞춰 휘적휘적 팔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흔든다. 난 누구..여긴 어디... 


이윽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도 모르게 소리에 반응해 돌아간 시선. 그런데 시선 끝에 걸린 실루엣이 좀 이상하다. 비정상적으로 꺾여 있는 고개와 이상한 걸음걸이. 다리에 납덩이가 달린 것도 아닌데 질질 끌며 절름거리는 몸짓은 제가 아는 나은의 걸음과는 사뭇 다르다. 얼굴의 반을 가린 엉킨 머리카락. 그러니까 마치 좀비라도 된 것처럼.

 

...된 것처럼? 재현의 머리 위로 경고등이 깜빡인다. 재현은 감이 좋다. 마치 불운을 피해 가는 카드를 여럿 갖고 있는 것처럼 불운 감지기가 울린다. 상황도 모르고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고 꽃을 들어 올린 주연을 확인하는 순간 비명이 들린다. 아 시발 좆됐다.


좀비가 된 김나은의 뒤로 쏟아지는 몇 무리의 좀비들에 과학실은 대번에 아수라장이 됐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미친 듯이 울려대는 소음. 눈앞에 뿌려지는 피와 위압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좀비 떼. 살겠다고 과학실을 도망치는 몇 명과 이미 좀비에게 물리고, 내장을 파먹히는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재현은 본능적으로 주연을 쳐다본다. 주연은 손에 들고 있는 꽃다발을 그대로 쥔 채로 사지가 이상하게 꺾인 채로 불안정하게 걸어오는 나은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보고만 있다. 보고만 있을 때야? 본능적으로 재현은 손에 들고 있던 판넬로 나은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주연의 얼굴에 붉은 액체가 튄다. 피에 반응하는지 다른 좀비들이 재현과 주연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린다. 인간은 절대 돌아가지 않는, 거의 180도에 가까운 비정상적인 각도다. 재현은 놀라 굳어버린 주연을 끌어 그대로 눈앞에 보이는 캐비닛 문을 열고 밀어 넣었다. 안에 걸려 있는 실험복들 사이로 둘이 빠듯이 숨어들고 문이 닫혔다. 캐비닛 문 너머로 물고 뜯는 기이한 소리와 까무러칠듯한 비명이 울려댄다. 굳이 붙을 것도 없이 좁아터진 캐비닛은 재현이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주연과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다. 제 몸에 닿은 주연의 손이 덜덜 떨고 있다.


“이게... 이게... 무..슨...”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부스러지는 말들. 쉿. 재현의 목소리가 빠듯이 남은 공간에 낮게 흩어진다. 재현은 한 손으로 주연의 입을 막고 조심스럽게 문 위쪽에 난 몇 줄의 틈 사이에 눈을 가져다 댄다. 영화에서만 보던 장면, 그러니까 인간의 위에 올라타 살점을 물어뜯는 좀비들이 재현의 눈에 들어온다. 틈 사이로 보이는 믿을 수 없는 풍경에 저도 모르게 휘청 다리가 풀린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안쪽 문고리를 잡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간다. 버틸 수 있을까. 천천히 그러나 끈덕지게 들러붙어 온갖 내장을 다 파헤칠 때까지 집요하게 들러붙어 있던 좀비들은 다행히 캐비닛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듯 뾰족한 손톱과 날카로운 이빨을 거두고 하나둘씩 과학실 밖으로 빠져나간다. 몰려들었던 속도보다 훨씬 더 느적한 걸음걸이로 좀비들이 모습을 감춘 뒤에도 재현은 여전히 주연의 입을 틀어막은 채로 버틴다. 아직 긴장을 늦출 순 없다. 괴성이 울릴 때부터 놀라 눈을 감아버린 주연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다. 어느새 적요해져 주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제는 괜찮을까? 재현은 천천히 캐비닛 문을 연다. 어떤 반응도 없음에 긴장이 풀린 재현이 캐비닛에 털썩, 등을 기댄다. 드디어 참고 있던 숨을 토해낸 재현이 천천히 캐비닛 안에서 빠져나온다. 주연은 여전히 그 안에 구겨진 채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공포에 질린 것과는 다른 표정. 주연의 시선이 엉망으로 헤집어진 시체들을 훑다 헛구역질을 해댄다. 그런 주연을 두고 재현은 시체들을 밟지 않으려 애쓰며 실험대 위로 향한다. 그 위에 올려진 주연과 다른 하키부원의 하키 헬멧과 스틱을 쥔 재현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 하는 주연에게 하키 헬멧을 씌우고, 재현은 스틱을 쥐여준다. 살고 싶으면 죽여.

 

 

 

 

 

 

 

More Love, Less Panic

 

 

 

 

 

 

 

이재현은 이주연에게 차였다. 고백할 생각도 없었는데 얼결에 고백을 갈기고, 차이는 데까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선배,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세요? 내가 잘해줘? 네. 매번 이렇게 경기도 보러 오시고. 너 보고 싶으니까. ...네? 이재현의 즉답은 0.01초의 빠른 반사로 나온 것에 비해 주연의 답은 정적만 흘렀다. 그게 답이었다. 그런 주제에 모든 것에 진지한 이주연은 ‘선배, 선배가 말한 보고 싶다는 게...’ 하고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접근을 시도했다. 어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 제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면... 거기까지 해. 너 보고 싶어서 간다고 했지, 사귀자 나랑 키스하자 그런 소리한 거 아니잖아. 형 저는... 알아, 아니까, 그래. 다 안다니까? 그냥 좋아한다는 거잖아. 그건 내 마음이잖아. 당황스러움이 역력했지만 주연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을 접으며 웃었다. 그게 이주연식의 거절이었다.


한번 내뱉은 고백, 두 번 못 뱉을 건 없었다. 어쩌다 고백해버린 뒤로 재현은 덤덤히 하고 싶은 말들을 했다. 잘하더라. 너밖에 안 보이던데. 안 그래도 잘생겼는데 하키복 입고 있으면 더 잘생겨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내가 유니폼에 약한가? 근데 너도 거울 볼 때마다 솔직히 나 좀 먹어준다 그런 생각하지? 하도 들어 이제는 능숙하게 고백을 넘길 때도 되지 않았나 싶을 때조차도 주연은 농담 반 진담 반 재현의 고백을 들을 때마다 머뭇거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고백도 많이 받으면서 뭘 그렇게 받을 때마다 그래? 그런 재현의 말에도 주연은 풋풋하게 웃었다. 너 그렇게 웃지 마. 그렇게 웃으니까 자꾸 다 너 좋다고 난리지. 재현은 그러니까 저도 별수 없는 거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제 애정을 다른 애정과 동급으로 놓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걸로 주연이 부담스럽지 않게 받아들인다면 그걸로도 좋았다. 딱 그 정도의 첫사랑이어도 재현은 만족했다.


“어차피 곧 졸업이잖아. 내가 이러는 것도 얼마 안 남았다?”

“선배. 그거 그만하면 안 돼요?”

“그거? 뭐? 너 좋다고 말하는 거?”

“....넿.”

“왜? 불편해?”

“...죄송해서요.”

“뭐가 죄송해? 넌 나 안 좋아해서?”


주연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와, 아까까진 괜찮았는데 방금껀 좀 크리티컬했어.”


재현이 마상을 입은 표정을 짓자 주연의 얼굴이 미안함으로 번진다. 그런 주연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재현이 마구 웃음을 터뜨린다. 장난이야, 장난. 여전히 주연의 얼굴이 펴지지 않는다.


“야박하게 굴지 마. 너도 좋아하는 애 있다면서. 나도 그런 거지 뭐.”


누가 좋아해달랬나. 두 달만 참아. 두 달이면 졸업이잖아. 그 뒤엔 너 듣고 싶어도 못 듣는다? 누가 알아. 안 보이면 허전해서 그리울지. 마음 약한 주연은 알면서도 속아 넘어가줬고, 그런 이주연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자기도 안다고 재현에게 말했으니까. 재현을 야멸차게 끊어내지 못하는 건 우유부단한 주연의 성정에 현재진행형인 제 사랑이 더해져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주연이 다른 누군가에게 고백을 하는 걸 보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고백에 자기가 도우미1이 되는 건 더더욱 원치도 않았다. 차라리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다. 아니, 사라지긴 내가 왜 사라져. 혼자 있고 싶으니까 다 사라져주세요, 안 미안합니다. 딱 그 생각을 한 게 10분 전이었다. 그러니까 ‘다 사라져달라’는 원인 로그를 제대로 입력하지 않은 탓인가? 인간은 사라지고 좀비를 달라고 한 건 아니었는데 어째서 좀비가 나타난 걸까. 재현은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한쪽 얼굴을 구긴다. 골치 아픈 한숨이 주연의 머리 위로 가라앉는다.

 

“정신 차려. 죽고 싶어?”

 

재현의 말에도 주연의 3/4쯤 나간 정신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재현은 그런 주연의 옷 뒷덜미를 잡아 일으킨다. 무거워죽겠네. 일어나봐 좀. 기껏 일으킨 주연은 그대로 다시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뭐 그렇게 앉아 있다가 물려 뜯겨서 죽을 거야? 그 말에도 주연은 여전히 초점 없는 눈동자로 멍하기만 하다. 아오씨. 재현이 낮게 욕지거리를 해도 주연은 마치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져 있다. 다 살고 싶다고 난리 쳐도 다 죽는 게 좀비 영화 속 인물들인데 이대로라면 다음 희생양 0순위다.


불행히도 주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좀비에게 물려 피범벅이 된 교복들이 움찔거렸다. 좋지 않은 신호다. 재현은 머릿속에서 제가 봤던 유치한 좀비 영화들을 돌려본다. 곧 좀비가 되어 살아날 게 뻔하다. 재현은 재빨리 진열장을 살핀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재현의 말에도 주연은 반응이 없다. 젠장. 재현은 좀비에게 물려 쓰러진 이들 사이에서 에코백을 찾아낸다. 가방을 탈탈 털고 소지품을 비운 에코백 안에 질산과 염산을 비롯해 쓸 법한 것들을 쓸어 담는다. 침착하려고 애쓰는 표정과 달리 덜덜 떨리는 손에 놓쳐버린 비커가 바닥으로 추락해 깨진다. 잡을 수 있었는데. 놓쳐버린 손이 허무하게 멈춰있다. 그 뒤로 더듬더듬 기어가는 주연이 보인다. 겨우 뻗은 손이 닿고 싶어 하는 곳. 신파 영화는 딱 질색이다. 차라리 보지를 말자 싶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기괴한 소리와 함께 꺾인 팔로 바닥을 밀고 시체 하나가 일어나려고 한다. 미친. 재현은 스틱으로 머리를 날린다. 하키퍽을 날리는 것보다 훨씬 더 둔탁한 소리가 과학실에 울린다.

 

“정신 차리라고 했지?”


비릿한 피비린내가 올라오자 주연은 여러 감정이 구토하듯 떨어져 나온다. 공포와 두려움, 괴로움과 죄책감이 엉망으로 뒤섞인다. 주연의 눈에 피범벅이 된 채 쓰러져 있는 나은이 보인다. 좀비 떼들이 과학실을 빠져나갈 때 같이 나간 줄만 알았는데 좀비가 된 게 아니라 물리기만 했던 걸까? 그게 아니면 완전히 죽은 건가? 미동도 없는 나은을 깔고 엎어진, 피로 뒤덮여 누구인지도 모르는 교복 팔꿈치가 빠득 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나은을 뜯어 먹으려는 행동을 보고 주연의 눈썹이 5시 40분이 된다. 주연은 제 눈앞에서 펼쳐진 악몽에 차라리 눈을 감는다. 감은 눈꺼풀 위로 떨리는 동공이 보이는 것만 같다. 그런 주연을 잡아끈 재현은 과학실 문을 닫기 전 진열장에 놓여 있는 개구리가 담겨 있는 포르말린을 던진다. 포르말린 깨진 냄새에 주연은 다시 표정을 구긴다. 그런 주연을 잡아끌고 재현은 재빨리 과학실을 빠져나온다.


그래봤자 밖도 좀비밭은 마찬가지다. 복도를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계단에서 올라오는 좀비들을 보고 재현은 잠시 고민한다. 좀비보다 빠른 속도로 올라간다? 올라오는 좀비를 일단 처리한다? 후자 당첨. 재현은 주연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스틱을 두 손으로 꽉 쥔다. 앞에서 오는 거 죽이란 소린 안 할 테니까 뒤라도 보고 있어. 난 여기서 뒤지기 싫으니까. 재현이 있는 힘껏 스틱을 잡는다. 좀비들의 걸음걸이가 재현의 예상보다는 느리다. 피라냐 떼처럼 몰려들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어기적대는 좀비의 머리를 스틱으로 휘두르자 좀비가 바닥에 쓰려진다. 뭐야, 이거. 휘어지는 거였어? 생각보다 가볍다 했더니 탄성 있게 휘어지는 스틱의 감각에 재현은 조금 당황한다. 손에 촥촥 감기는 이 맛. 뭐야 이거. 다행히 좀비가 되면 연골도 약해지는지 좀비의 머리가 축구공처럼 복도로 굴러간다. 윽. 비위 상해. 게다가 신경도 느린지 제 대가리가 날아간 줄도 모르고 모가지 없는 귀신 마냥 몇 걸음 더 걷던 좀비가 재현의 방향으로 철퍼덕 뒤늦게 쓰러진다. 악 소리와 함께 재현이 빠르게 뒤로 물러난다. 하마터면 좀비를 받을 뻔했다. 여전히 바닥에서도 꿈틀대는 좀비 탓에 재현의 입꼬리가 경악하듯 내려간다.

 

“뭐해? 진짜 죽을 거야?”


휘두르라니까! 쩌렁쩌렁하게 복도에 울리는 재현의 목소리에 주연은 반사적으로 스틱을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좀비의 머리. 주연은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스틱을 휘둘러댔다. 휘두르는 족족 기다렸다는 듯이 좀비의 분리된 팔과 다리가 경악스럽게 나가떨어진다. 그러나 팔이 날아간 정도로는 좀비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 얻어맞고도 잠깐 주저거리기만 할 뿐, 점차 가까워진다.


“머리.. 머리를 쳐! 머리를 날려야 돼!”


재현의 목소리를 뇌에서 청각 정보로 인식도 하기 전에 본능적으로 주연이 좀비의 머리를 노리며 스틱을 마구 휘두른다. 퍽 퍽 퍽 소리에 재현은 오히려 제가 놀라 움찔댄다. 오히려 정신이 나가 있어서 되는대로 하키채를 휘두르는 걸 수도 있다. 어쨌거나 하키 퍽을 날리듯 좀비 떼의 머리를 퍽퍽 휘두르니까 일단 냅두자 싶다. 사실 재현도 주연의 정신머리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 몰려드는 좀비 떼에 물리고 싶지 않으면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야 했다.


진동하는 피비린내와 함께 한 턴 종료. 복도에 군데군데 널브러진 좀비 사체를 그대로 둬도 되는 건지, 불이라도 질러야 하는지 모르는 채로 재현은 뒤늦게 머리카락이 쭈뼛 선다. 아으으. 화장실에서 저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떠는 것처럼 떤 재현은 등을 돌려 현장을 벗어나기 위해 계단을 오른다.

 

“올라가서 뭘 어쩌게요?”

 

주연의 말에 일리가 있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재현은 뾰족한 수가 있어서 올라가는 거겠냐며 짜증 섞인 답을 내뱉는다. 재현도 사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고 이러는 건 아니다. 그저 일단 움직이고 보는 거다. 살려고. 어떻게든 일단 살자는 본능에.

 

“사방이 뻥 뚫린 운동장보다야 낫겠지.”

 

재현은 제 선택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제껏 제가 내린 선택은 대부분 맞았다. 딱히 의문을 품어본 적 없지만 그랬다. 머리도 빨리 돌았고, 운도 좋았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제 선택이 맞을 거였다.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가고 재현은 벽에 기대 숨을 몰아쉰다. 핸드폰. 핸드폰으로 연락을... 재현이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있어야 할 핸드폰이 없다. 정신없이 스틱을 휘두르다 바닥에 떨어뜨린 것도 몰랐나? 기억을 더듬는다. 아니다. 처음부터 과학실에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되지도 않는 플래시 이벤트를 한답시고 그러지만 않았어도. 후회해도 늦었다. 과학실에 지금 다시 가는 건 위험하다. 상황이 좀 진정되면 가서... 그러다 문득 재현은 상황이 언제 어떻게 진정될 거라고 믿을 수 있는지 의심한다. 누가 지금 악몽을 꾸고 있다고 말해줬으면. 재현은 왜 하필 이 악몽에 주연이 함께인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졸업 전에 이주연이 미칠 일은 없으니 오래 짝사랑하느라 불쌍한 선배한테 적선하듯 입이나 한번 맞춰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그런 불경한 생각이 죄였나. 승리에 취해서 붕방 뛰며 보는 사람마다 껴안고 뛰는 자리에 저도 한번 껴보려고 해놓고 아닌 척 굴었던 죄인지도 모른다.


“핸드폰, 핸드폰 줘봐.”


경계하는 주연의 눈. 검색 좀 해보게. 112에 신고라도 하던가. 아닌가, 119에 신고해야 하나? 간첩 신고는 111이고 좀비 신고는... 재현의 얼굴이 반쯤 구겨진다. 111이건 112건 119건 모르겠으니까 일단 좀 봐봐. 핸드폰을 어디다 떨어뜨린 거야. 안 그래도 망했는데 되는 것 하나 없다는 표정으로 재현이 머리를 헝클인다. 주연의 커다란 손이 핸드폰을 꺼내자 쌓여 있는 재난 문자가 보인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알 수 없는 좀비 떼가 출몰 중이라는 기사도 확인한다. 재현은 욕부터 박고 다른 사이트들도 하나하나 확인한다. 이러니저러니 불분명한 억측이 많았지만 공통적인 사실 하나는 좀비가 사람의 피에 반응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캐비닛 안에 숨어 있었을 때 괜찮았던 건가. 재현은 이때다 싶어 선동하는 쓸데없는 글들 대신 국민재난안전포털에 들어간다. 아직 좀비재난현황조차 제대로 업데이트되지 않았으나 태풍, 지진, 폭설, 댐 붕괴 등의 재난에 좀비 예방행동 수칙과 행동요령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좀비가 나타난 건 진짜구나.’


몰래카메라가 아니라 진짜였어. 하긴, 스틱으로 제가 날려버린 좀비 대가리만 벌써 손가락 개수를 넘었다. 몰래카메라였으면 장난에 죽자사자 매달린 살인범으로 은팔찌를 차게 생겼다. 은팔찌가 차라리 나은가. 2021년에 웬 좀비? 재현은 교내 좀비 출현에 대해 이제야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한다. 왜 갑자기 좀비가 나타난 거지? 언제 다들 좀비가 된 거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좀비를 피해 어디로 도망가야 하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물음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은 왜 좀비가 됐는지 생각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좀비가 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게 먼저였다.

 

간단하다. 좀비는 피하고, 피할 수 없다면 죽인다. 이러나저러나 어이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의외로 재현은 빠르게 살길을 찾는 쪽을 택한다. 생각보다 좀비의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할 만하다. 재현은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 듯 중얼거린다. 할만해. 괜찮아. 캐비닛 틈새로 내장을 파먹을 때도 우악스럽게 피라냐 떼들처럼 달려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깨끗하게 뼈를 발골하듯 끈질기게 붙어 있었다. 그 전에 죽이면 돼. 재현은 끔찍한 장면을 떠올리는 대신 좀비의 머리를 날렸던 감각만 기억하려고 애쓴다. 이 스틱으로 좀비를 몇이나 죽일 수 있을까? 재현은 머리를 바쁘게 돌린다. 좀 더 단단한 무기가 될만한 게 교내 어디에 있을지 떠올린다. 야구배트? 스틱이나 배트나. 철로 된 건 없나. 파이프 같은 거. 좀 더 가벼우면서... 스윙도 잘 되는... 그래, 골프채. 재현은 골프채를 떠올린다. 틈만 나면 골프 동작을 연습한답시고 자리 한쪽에 골프채를 놔두던 국사 선생님. 어쩌면 교장실에 가도 골프채가 몇 개 더 있을지도 모른다. 1층 교장실까지 다시 내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밖에 좀비가 얼마나 있을까? 갈 수 있으려나.

 

재현은 지금 제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인 주연의 상태 확인을 위해 흘깃 눈을 흘긴다. 불행히도 주연은 여전히 초점 나간 눈을 하고 있다. 정신 차리라니까 왜 아직도 저러고 있는 거야. 재현은 조금 골치 아픈 표정이 된다. 저 혼자서 교장실까지 내려가는 건 위험하다. 그보다 주연을 혼자 여기다 두는 것도 위험하다. 재현은 가만히 생각해본다. 주연이 좀비가 되면 다른 좀비들 머리를 서슴없이 날렸던 것처럼 날릴 수 있을까? 재수 없는 가정은 그만. 가정이 현실로 몇 초 만에도 나올 수 있는 시점에서 재수 없는 가정은 안 하는 게 최선이다. 재현은 쓸데없는 생각을 날리기 위해 고개를 젓는다. 그런데도 만약의 덫은 재현을 놔주지 않는다. 만약에 오늘 학교에 오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주연의 고백에 제가 들러리로 서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과학실에서 주연을 버리고 나왔더라면, 만약에 주연도 저를 좋아했더라면, 아니, 애초에 제가 주연을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무수히 많은 ‘만약에’의 그물에 걸린 재현은 아등바등하고 있다. ‘만약에’에는 힘이 없다. 이루어지지도, 되돌릴 수도 없는 일들이다. 되돌린다고 해도 잘될 리 없는 것들을 대책없이 붙잡고 있는 건 재현과는 맞지 않다. 재현은 아무 의미도, 유용하지도 않은 ‘만약에’는 접기로 한다. 지금 필요한 건 ‘만약’이 아니라 당장 어떻게 헤쳐가야 하는가 뿐이다. 재현은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 이주연을 사랑하다 죽는 게 제 인생의 결말이라면 그리 나쁘지 않지만, 이주연의 고백을 돕는답시고 학교에 남았다가 좀비한테 물어 뜯겨 죽는 건 사절이다.


“1층으로 내려가야겠어.”

“아까는 올라가야 된다면서요.”

“그건 맞는데, 교장실에 가서 골프채를 가져와야겠어.”


이거 생각보다 잘 부러지잖아. 경기 중에도 부러진 스틱들이 빙판에 나뒹굴기 일쑤였다. 좀비가 시속 177㎞로 달려 나오진 않지만 어쨌거나.


“일어나. 얼른 가져오게.”


누가 더 살아 있는지 모르지만 일단 둘밖에 없다는 가정하에 너랑 나뿐인데 제발 협조 좀 해. 재현의 말에 멍한 눈을 하고 있던 주연이 처음으로 입을 연다.

 

“차라리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살렸어요?”

 

소리치는 것도 소리 반 공기 반에 힘없이 흩어지는 발성으로.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재현은 이주연을 안다. 잘하면서 성실하기까지 한 이주연이 의미를 찾다니. 좀비가 나타난 것보다 어쩌면 훨씬 더 위험한 신호다. 재현은 부러 콧방귀를 끼고, 그것도 모자라 혀를 찬다. 너무 나약해서 낭만적인 소리를 하네. 누가 열여덟에 삶의 의미를 찾아? 평생 살아도 못 찾는 게 삶의 의민데. 배우자도 아니고 몇 년 사귄 사이도 아니고 고작해야 고백하기 전이라서 그저 좋아만 했던 애가 좀비가 된 게 죽을 일이야? 죽인 좀비보다 죽일 좀비가 더 많은데 힘 빠지는 소리할 거면 닥치고나 있어.


재현은 약해 빠진 주연은 무시하고 칠판에 교무실까지 가는 동선을 그린다. 언제 어디서 좀비가 튀어나올지 예상 구간을 표시해본다. 몇 정도가 나올까. 가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건 사절이다. 이주연이 보는 앞에서 좀비에 물리고, 심지어 좀비가 돼서 이주연을 물기 위해 쫓아가는 걸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차라리 지금 그냥 죽고 말까. 죽은 자신을 발견하고 좀비가 물면 좀비가 되는 건가. 재현은 기필코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주연도 살려야 한다. 재현은 주연을 죽일 자신이 없다.


“집중해. 좀비한테 물리고 싶지 않으면.”


재현의 말에도 주연의 눈꼬리는 뾰족하기만 하다.


“이렇게 산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그런 말도 하지 마. 살린 사람은 뭐가 되냐.”


그 말에 주연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다문다. 주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재현은 생각한다. 차마 뒤를 돌지도 못 하고 칠판에 의미 없이 쥐고 있던 백묵이 뭉쳐서 주르륵 칠판 아래로 흐른다. 꼭 눈물이 떨어지는 모양 같다. 진짜 울고 싶은 건 난데 왜 이게 울고 지랄. 주연에게 되는대로 지껄였지만, 재현도 속 시끄럽긴 마찬가지다. 갑자기 좀비는 뭐고, 좀비를 죽인 건 또 뭔지. 차인 애 고백하는 데 도우미 노릇을 한 것도 짜증인데, 그것 때문에 원망까지 독박을 쓰게 된 이 상황까지. 그러나 재현은 지금 그런 건 좀비나 주라는 마음으로 어금니를 꽉 깨문다. 자꾸만 뒷골이 당긴다. 남들 두개골을 날린 대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교장실 빙고. 재현은 횡재라도 했다는 듯 한 켠에 서 있는 골프백에서 골프채를 꺼냈다. 혹시 모르니까. 재현은 아예 골프백에 들어 있던 골프채 다섯 개를 다 꺼낸다. 두 개는 테이프든 끈이든 칭칭 감을 요량이고, 하나는 비상용으로 들고 다닐 생각이다. 무기를 손에 쥐자 귀신같이 안정감이 조금 든다. 어이없네. 재현은 보이는 서랍을 뒤져 테이프까지 찾아낸다. 둘둘 만 테이프를 가위로 자르고 혹시 몰라 가위도 주머니에 킵. 단도 정도는 되려나. 재현은 꽂혀 있던 다른 가위 하나를 주연의 주머니에도 찔러 넣어준다.


“필요할 수도 있잖아.”


잘 챙기라는 뜻이었는데, 주연은 ‘열심히네요’ 하고 빈정댄다. 내가 살고 싶댔지. 재현은 며칠 후가 졸업인데 대체 이게 뭔지 어이없다는 듯 혀를 내뺀다. 대학 가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놀아야 되는데 수능 보고 죽는 게 말이 돼? 억울해서 못 죽지. 나 너 좋아하느라 연애도 못 했잖아. 이 얼굴로. 재현이 이제사 억울한 게 다 무슨 소용이냐는 듯 말하고, 그 이야기만 하면 주연은 뾰족하다가도 조금씩 뭉툭해진다. 눈치 빠른 이재현은 이주연이 용납하는 선을 기가 막히게 잘 알아서 아슬아슬하게 선을 지킨다. 주연이 선을 양보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재현은 생각한다.


“저기 봐. 운동장에도 좀비가 있어.”


재현의 턱짓에 주연도 시선이 창가로 향한다. 좀비 셋이 거북이보다 느린 속도로 운동장을 배회 중이다. 산책하나? 저기서 뭐 하는 거야? 재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하긴, 나도 좀비를 오늘 처음 봤는데 쟤네도 좀비가 처음이니까 뭣도 모르고 저러겠지. 재현이 혀를 차다 말고 번뜩 스친 생각을 내뱉는다. 입구 문을 닫고 셔터를 내릴 순 없나? 정문도 닫는 게 나을 수도 있잖아. 바깥에서 계속 학교로 들어오는 좀비들을 막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학교에 좀비가 손에 꼽을 정도만 있는 거라면 그게 낫지. 재현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미처 보이지 않는 좀비들이 더 나온다면 어쩌지. 머리를 바쁘게 굴리는 재현과 달리 주연은 여전히 비협조적이다. 협조적인 이주연이랑 목숨 걸고 내달려도 위험한 판에 비협조적인 이주연과 위험을 강행한다...?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하는 게 더 안전할 것 같다. 하지만 복도에서 이성을 잃고 하키 스틱을 휘두르는 주연을 보았으므로 재현은 도박에 제 목숨을 건다. 못 먹어도 고. 이건 못 먹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꽥 죽을 수도 있지만.


“들어봐.”


재현은 운동장에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학교를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학교에 남자는 소리예요? 주연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다. 밖이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여긴 우리가 아는 상황이고, 밖은 모르는 상황이니까. 왜 학교가 더 안전할 것 같은지 재현이 여러 이유를 늘어놓는 걸 제대로 듣지도 않고 주연은 고개를 끄덕인다. 주연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를 묻진 않았어도 재현은 쉽게 짐작한다. 김나은이 여기 있으니까. 아직도 과학실에 있는지, 좀비가 되어 이주연을 물겠다고 돌아다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작전이랄 것도 없다. 정문에 있는 수위실까지 좀비를 뚫고 달려가 정문을 잠근다. 본교 문도 잠글 수 있는 열쇠가 있다면 문도 잠근다. 그게 전부다. 갈 거면 얼른 골프채를 손에 쥐라는 재현의 눈짓에 주연은 이걸로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주연의 손에 스틱만큼 어울리는 건 없다. 그걸로 괜찮겠어? 충분해요. 그렇다면야. 재현은 교장실 창문을 연다. 문도 있는데 굳이 창문을 넘는 건 또 뭐야. 골프채를 손에 쥐며 걸어가는 재현을 보고 있던 주연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젓곤 재현이 그랬던 것처럼 창문을 뛰어넘었다. 발소리를 들은 좀비들이 재현에게로 달려들었다. 원 스트라이크. 뒤이어 투스트라이크. 뒤를 돌자 남은 좀비는 이미 주연이 해치운 뒤 재현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주연의 뒤로 어디서 달려온 건지 좀비가 둘이나 더 붙었다. 한 놈씩 날리면 돼. 재현의 말에 주연이 제 오른쪽에 있는 좀비를 해치웠고, 재현도 풀스윙으로 좀비를 후려쳤다. 다리에 힘을 주고 내달려 경비실을 뒤진 둘은 정문부터 닫았다.


“근데 이거 생각보다 좀 약해 보이는데? 이걸로 괜찮은 거 맞나?”


오래된 학교인 덕에 최근 생긴 학교들처럼 담장 없는 학교가 아닌 게 다행이었다. 둘의 키보다 훨씬 더 큰 녹슨 철문은 매년 페인트칠을 하는 데도 군데군데 낡아 금세 둘의 손바닥엔 벗겨진 페인트칠이 묻어났다. 재현이 단단히 정문이 잠긴 걸 확인한답시고 철문을 흔들어대는 소리가 좀비 소집 신호라도 되는지 둘이 뒤를 돌았을 땐 좀비 세 마리가 둘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미 다섯도 날렸는데 셋이야 껌이지. 그러나 재현의 마음과 달리 하나둘씩 좀비들이 운동장으로 모이고 있었다. 센 척은 다 했지만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찌릿한 게 지나가더니 온몸이 뻣뻣해진다. 시발. 다 죽이면 되지. 할 수 있어. 재현은 입술을 감쳐물고 팔에 힘을 준다.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좋아. 재현은 오늘따라 운수가 더럽게 나빴으니 운수 좋은 날의 결말과는 딱 반대일 거라고 생각한다. 결론은 산다는 거다.


“잠깐만.”


뭐라도 좀 마시자. 목말라. 좀비를 다 해치우고 반쯤 지친 재현이 땀을 닦으며 주연을 멈춰세운다. 자판기 앞에 선 재현이 주머니를 뒤진다. 뭐 마실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럼 말던가. 안 마시면 지 손해지 내 손핸가. 재현은 더 권하는 일없이 지폐를 넣었다. 위이잉 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오는 버튼을 바라보던 재현이 콜라를 눌렀다. 덜커덩 음료가 떨어지는 둔탁한 듯 경쾌한 소리에 상체를 숙여 콜라를 꺼냈다. 여전히 주연은 고개를 돌린 채여서 재현도 지체없이 반환 레버를 눌렀다. 떨어지는 잔돈을 주머니에 넣으며 재현은 그 날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주연을 처음 만난 날.


음료수나 하나 뽑아 먹을 생각으로 자판기로 가던 재현은 우연히 뻔한 장면 하나를 목격했다. 학교에서 제일가는 인기남 이주연이 그 주인공이었다. 잘생겼네. 소문의 이주연의 얼굴을 본 건 처음이었다. 매번 하키 헬멧을 쓰고 있는 것만 봤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 애썼다. 얼굴 잘하는 이재현은 얼굴에 약해서 소문만으로도 이미 주연을 좋아하게 될 것만 같았다. 왜 그런 거. 아직 들어오지도 않은 전학생을 선생님이 들어오라고 말하기 전부터 문을 넘어 들어오는 그 애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직감. 재현에게도 그랬다. 직감 좋은 게 이러라고 좋은 건 아니었겠지만. 제 예상대로 재현은 누군가에게 고백받는 주연을 목격했고, 이어 미안하다며 고백을 거절하는 주연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백도 전에 차인 느낌으로 재현은 원래 제 목적을 떠올리곤 몇 걸음 걸어 자판기 앞에 섰다. 지폐를 넣고, 빨간불이 들어온 버튼을 누르는 대신 주연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바로 직전 물리 시간에 들었던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빛의 속도를 설명하던 그는 빛보다 몇 년 전 빛보다 빠른 중성미자가 발견되었다며 아이슈타인의 이론이 뒤집힐지 초미의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이는 측정 오류로 인한 것이었다고 했다. 빛보다 빠른 것이 과연 있을까?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수업을 마쳤다. 빛보다 빠른 속도. 재현은 그건 사랑의 속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과치고는 퍽이나 문과 같은 소리였지만 그랬다. 이재현의 세계가 방금 이주연으로 인해 뒤집혔으니까.


“저, 돈 다시 나왔는데요.”


그 소리에 놀란 재현이 뒤를 돌아봤다. 멀리서 봤던 이주연이 바로 제 옆에 서 손가락으로 지폐 투입구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랫동안 반응이 없자 자판기가 다시 뱉어낸 지폐가 반쯤 튀어나와 있었다. 놀란 재현이 다시 지폐를 집어 넣고 아무 버튼이나 눌렀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도 무엇을 눌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미안, 하는 말을 겨우 내뱉고 돌아서는 재현을 불러세운 주연의 목소리였다. 잔돈 안 가져가셨는데. 아아. 재현이 어색한 미소를 짓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잔돈을 꺼내자 주연이 또다시 말을 걸었다.


“저 죄송한데 200원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500원밖에 없어서요. 펼친 손바닥에 곱게 놓여 있는 학을 보며 재현은 쥐고 있던 동전 두 개를 자판기에 넣어주곤 뒤돌아섰다. 재현의 뒤통수 뒤로 주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갚을게요! 저 1학년 5반 이주연이에요! 하키룸에 더 오래 있어요. 하키부 이주연 찾으시면 돼요! 하키부 걔가 얘구나. 재현은 이전까지 하키의 히읗도 몰랐다. 한국에서 하키라니. 둘 다 히읗으로 시작하네 정도의 감상이 전부였지만 그날 이후로 재현은 하키부 경기를 꼬박꼬박 챙겨보기 시작했다. 자판기 앞에서 마주친 주연과 하키복을 입고 필드에 선 주연을 좋아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당장 달려가 좋아해, 사귀자, 소리를 할 줄 알았다. 재현도 저 자신을 잘 몰랐던 거다.


고백 대신 재현이 할 수 있는 건 겨우 우연에 기대는 일뿐이었다. 현금 없는 사회로 가는 마당에 재현은 매일 주머니에 짤랑거리는 동전을 들고 다녔다. 교통카드와 신용카드로도 교내 자판기는 결제가 됐지만 누가 보면 아직도 짤짤이나 하는 초딩 마냥. 그리곤 매일 같이 자판기에서 콜라를 뽑아 먹었다. 어느 날 자판기만 한 주연이 서 있었다. 재현은 혹시 진짜 주연인가 싶어 빠른 속도로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올렸다.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가 움직인다. 진짜 주연이다. 찾았어요. 안 찾으러 오시길래. 그러니까 재현을 찾은 건 주연이었다. 어쩌면 재현이 부르지 못한 마음을 들었는지도. 


그땐 목말라서 죽을 뻔했는데 생명의 은인이라며 호들갑 떠는 말을 담담한 목소리로 잘도 하더니. 재현은 다 마신 캔을 한 손으로 와작하고 구겨서 자판기 옆에 놓인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골인. 예스! 재현이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좋아요?”

“뭐?”

“좋은가 봐요.”

“좋겠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좋을 리가 없잖아. 재현의 말에 주연이 조소한다. 너 혹시 미친 거야? 나 모르는 새에 좀비에 물리기라도 했어? 이건 이재현이 아는 이주연이 아니다. 좀비에 물리기라도 했어? 이제껏 주연의 캐릭터와 180도 다른 모습에 살짝 제가 모르는 새 좀비에 물린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물론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김나은을 제가 그렇게 만든 이후로 쭉 원망 섞인 저 눈빛을 모른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재현도 할 말이야 많다. 그건 엄연한 정당방위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뭘?”

“나은 선배 말이에요.”

“여기서 김나은이 왜 나와?”

“선배가 죽였잖아요.”

“걔가 너 물어뜯으려고 했던 건 기억에서 지웠어?”

 

앞뒤 잘라먹고 그런 소리하는 거,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비꼬는 말이었지만 재현은 아, 들을 사람은 없네, 불행히도 너랑 나 빼면 모두 좀비가 된 것 같으니까, 라며 제가 뱉은 말을 정정한다.

 

“선배 저 좋아하잖아요.”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재현은 똑똑히 들으라며 마치 조선 붕당의 이해짤처럼 간단하게 상황을 정리한다. 좀비가 나타났어. 좀비가 물어뜯으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좀비를 죽였어. 끝. 알겠어? 재현의 정리엔 이재현도, 이주연도, 김나은도 없다. 생략된 인간이라는 표현과 좀비. 이분법이 전부다. 주연의 입꼬리가 빳빳하게 굳는다.

 

“죽이고 싶었던 건 아니고요?”

“야!”

 

신경줄을 제대로 긁힌 재현이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지르다가 급하게 데시벨을 줄이고 주변을 살핀다. 혹시나 그 소리에 좀비들이 뛰어올까 봐서다. 다행히 아직까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넌 생명의 은인한테 말하는 싸가지가 남다르네?”

“은인? 은인이라고 했어요?”

 

살려달라고 한 적 없어요. 죽는다고 정해진 것도 아니었잖아요. 주연의 말에 재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진다. 좀비인 걸 봐놓고도 그렇게 말하시겠다? 재현은 답이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이번엔 아예 손바닥을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이유도 모르고 갑자기 좀비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죽자사자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사랑타령 하고 싶으면 너 혼자 많이 해. 난 빼줘.

 

“죽여놓고 빠지는 게 돼요?”


선배가 죽였잖아요. 죽였다, 는 단어를 이렇게 쓰네. 그것도 두 번이나. 몸에서 피가 가시는 기분이다.


“넌 너 살린 건 빠뜨리고, 김나은 죽인 것만 말하네.”


그렇게 미우면 죽여. 이러다 좀비 될 수도 있는데 차라리 지금 죽지 뭐. 너 스틱 잘 날리잖아. 내 대가리도 날려봐 그럼. 재현이 여봐란듯이 머리를 들이민다. 가까워지는 재현의 얼굴에 주연도 눈을 부릅뜨고 지지 않는다. 그건 링크장에서나 짓는 표정이다. 링크장을 나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배시시 웃는 게 이주연인데 그런 이주연도 좀비랑 엿바꿔 먹은 모양이다.


“김나은 죽이면 내가 너랑 사귈 거라고 착각해서 내가 걜 죽인 것처럼 말하는데, 김나은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어차피 너는 나 안 좋아한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거든?”


일 년도 넘게 알고 있는 사실인데 새삼스럽게 죽이긴 왜 죽여. 말하고 나니 재현은 진짜 억울하다. 지구가 미쳐 돌아서 하루아침에 좀비들이 나타나도 변하지 않는 설정값도 있다. 해가 서쪽에서 뜨고 세상이 두 쪽이 나도 이주연은 이재현을 좋아할 일이 없다. 좀비가 나타나도 마찬가지고, 세상에 유일하게 둘만 남는데도 이주연이 제게 좆을 세울 거라고도 생각 안 한다. 그건 이재현이 게이로 태어났고, 이주연은 헤테로로 태어났으니까 진작부터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럴 소리를 해대는 게 재현은 진심으로 짜증 난다. 아니, 화가 난다. 매번 웃고만 있으니까 저는 보자기로 보이나 보지 싶다. 그래, 헤테로 좋아한 게 죄지. 그냥 뭐 남자면 다 좋아하는 줄 아나. 씹스러운 기분에 재현은 대꾸도 하지 말까 싶다가 이것만은 확실히 해야겠다 싶어 욱하고 내뱉는다.


“좋아하는 애니까 물려주는 게 사랑이야? 내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애 살리는 게 사랑이거든?”


아, 됐어. 관둬. 방금 그 멘트로 천년의 사랑도 다 식었으니까 네 마음대로 해. 주연의 눈썹 앞머리가 빳빳해진다. 쉬운 질문을 어렵게 하는 건 이주연이다. 이주연도 안다. 지금 주연이 원망해야 하는 건 재현이 아니다. 재현이 아니었다면 주연은 내장이 다 파먹힌 시체로 뒹굴고 있거나 운동장을 배회하며 간간히 학교 건물로 들어오는 좀비 중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거기까지 주연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직 이주연은 이 악몽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 했다. 그걸 알지만 이제 재현도 주연의 어리광을 받아줄 생각이 없다. 재현이 주연을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다. 문제는 말은 천년의 사랑도 식었다고 해놓고 여전히 관성처럼 좋아하는 마음이 뚝 끊기지 않는 거다. 제 마음인데 제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짜증 나서 재현은 더 화가 난다.


“그럼 가서 물리시고 좀비 되시던가요. 안 말리니까.”


자신은 가 볼 테니 혼자 잘해보라고 비꼰 재현은 큰 보폭으로 주연의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지려다 저도 모르게 걸음이 느릿해지는 것을 발견한다. 저따위 좆같은 말을 한 이주연이랑 같이 있고 싶지 않은데 상황이 받쳐주질 않는다. 이건 인류애다, 인류애. 제 짝사랑을 인류애로 대충 퉁치는 느릿한 걸음걸이가 얼른 따라붙으라는 무언의 제스처라는 걸 주연도 알기에 볼 안쪽을 짓씹는다. 방금은 제가 생각해도 너무 했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타이밍. 주연의 입술이 벌어지다 미안의 미음 발음도 채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켜진 스피커에서 삐— 소리가 귀를 찢더니 이내 사이렌 소리가 퍼진다. 꽤나 길게 울리던 사이렌 소리가 잠잠해지고 기다리면 구조대가 온다는 목소리가 울린다. 기다리면, 이라는 기약 없는 단서에 둘 다 입술을 꽉 깨문다.


“기다리긴 뭘 기다려. 기다리다 뒈지는 게 빠르겠네.”


재현이 혀를 차며 걸음을 뗐다.


“어디 가는데요?”

“뭐, 그럼 여기 우두커니 서 있을까? 좀비밥 될 때까지?”


평소 재현의 말투가 사근사근하진 않았어도 이렇게 불퉁하고 비아냥댄 적은 없었다. 진짜 좆까라 그래. 그러면서도 진짜 과학실로 다시 간다고 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충돌한다. 온갖 신경이 뒤통수에 다 달라붙은 것처럼 재현은 촉각을 곤두세운다. 다행히 블러핑이 먹혔는지 제 뒤를 따라 오는 발소리가 들려오자 재현은 주연이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린다. 방금 복도에 내뱉은 심장이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것만 같다.








숙직실의 문을 열자 눌어붙은 피 냄새와 썩어가는 시체 냄새가 둘을 역하게 반겼다. 뇌는 물론 내장이 다 파먹힌 시체 세 구가 있었다. 자다가 죽은 건가. 재현과 주연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시트를 끌어당겨 시체 위로 덮어주고 숙직실의 문을 닫았다.


“교실로 올라가면 무릎담요 같은 거라도 있겠지.”


차라리 그쪽이 더 안전할 거야. 책걸상으로 문도 다 막고. 1층만큼이나 2층도 불안하잖아. 3층 교실이 낫지. 재현은 나름의 논리적인 의견을 피력한다. 계단도 다 막을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럼 애초에 봉쇄가 되는 거잖아. 재현의 말에 주연은 그럼 나갈 땐 어디로 나가는지 묻는다. 구조대가 오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지. 아니면 창문으로 나가던가. 3층에서 뛰어내리다 다치기라도 하면요? 좀비에 물려 죽는 것보단 낫지. 어떤 것과 비교해도 좀비가 되는 것보단 낫다는 말에 주연도 반박을 멈춘다. 어차피 계단을 다 봉쇄하는 건 불가능하다. 둘이서 양쪽 계단을 다 막는 것도, 그렇게 다 막을 만큼의 무언가도 찾기 힘들다. 설사 둘이서 사물함을 죄다 밖으로 끌고 나와 벽으로 막는다고 해도 말이다.


결국 둘은 3층 오른쪽 복도 끝에 붙어 있는 교실로 들어선다. 교실까지 가는 길에 좀비를 다섯이나 만났다. 좀비들이 흘리는 기괴한 소리와 머리 깨지는 소리만 순차적으로 울려 퍼지고, 다시 조용해진다. 주연은 복도에서 조금 떨어진 교실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냐고 말한다. 같은 이유로 재현은 끝 교실을 주장한다. 여차하면 위든 아래든 도주로가 가까운 곳이 낫지. 주연은 반박하는 대신 캐비닛부터 끌어 문을 막는다. 뒷문은 캐비닛과 사물함으로, 앞문은 교탁과 책걸상으로 막아둔 후에야 둘은 숨을 돌린다. 힘들어 죽겠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은 재현은 엉덩이가 너무 시리다며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일어난다. 이렇게 잠들었다가 내일 동태 돼서 눈 못 뜨는 거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좀비에 물리기 전에 아사나 동사가 더 빠를 것만 같다.


재현은 의자 뒤에 가지런히 걸려 있는 무릎담요를 수거해 주연에게 던진다. 덮고 있어. 웬종일 끅끅대거나 그르렁거리거나 고막이 째질듯한 소리를 들었던 게 이명처럼 남는지 재현은 귓불을 죽죽 잡아 당긴다. 피로감에 몸이 잠깐 균형을 잃고 갸우뚱 기울어진다. 책상을 잡은 채로 잠시 서 있던 재현은 책상을 든다. 책상 세 개를 붙인 재현은 잠시 고민하다 하나 더 붙인 후 주연에게 누우라고 말한다. 혹시 몰라 사물함에서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체육복을 둘둘 말아 올려놓기까지 한다. 바닥에 누우면 냉기 올라와. 좀비가 들이닥치냐 마냐 하는 가운데 바닥 냉기 걱정은. 주연은 눕는 대신 의자에 앉는다. 고집 피울 걸 피워. 재현의 말에도 주연은 뾰족하게 눈을 치켜뜬다. 그냥 인류애거든? 맘대로 해라. 재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다.


시끄럽던 사위가 조용해지자 냉기에 몸이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바람이 많이 부는지 창문이 덜컹거렸다. 팔이 욱신거렸다. 하도 골프채를 꽉 쥐고 다닌 탓이었다. 차라리 자는 게 나을까. 자고 일어나면 말도 안 되는 개꿈이지 않을까. 재현은 혹시 제 생애 첫 고백과 첫 까임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악몽을 꾸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해 뜨면 좀비들도 안 다니나?”

 

그랬으면 좋겠다. 피곤해. 재현은 진심으로 피곤한 목소리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대려나. 재현은 이럴 줄 알았으면 유치하게 그걸 왜 보냐고 하지 말고 좀비가 나오는 영화를 몇 개는 더 봐둘걸 그랬다고 생각한다. 영화로 좀비 영화를 학습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다고. 제가 아무리 멜론탑백에 주야장천 들어 있는 무수한 사랑 노래와 이별 노래를 들었어도 제 사랑엔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는 걸 떠올린 재현은 피식 웃고 만다. 만약 제가 영화 속 주인공이라면 이주연을 끝까지 살리고 구조되기 전 죽는 역할이려나.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역할이 꽤나 제게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다시 재현은 골프채를 제 몸 가까이에 붙인다.


탁, 탁. 무언가가 가볍게 부딪히는 것도 같았고, 발을 딛는 것 같기도 한 소리였다. 일정한 리듬 없이 들려오는 불규칙한 소리에 골프채를 쥔 재현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재현은 몸을 낮추고 조용히 복도로 난 창으로 향한다. 눈에 보이는 건 없지만, 분명하게 소리가 들린다. 소리의 출처는 오른쪽 복도 끝, 꺾어진 벽이다. 희미하게 그르렁대는 목소리가 들린다. 마른침을 삼키자 목이 따갑다. 이미 피로함에 성대가 부은 모양이었다. 먼저 나가는 게 좋을까, 기다리는 편이 나을까. 재현은 전자를 택한다. 혹시라도 좀비가 조용히 지나간다면 일단은 체력을 아끼기로 한다. 이미 앞문과 뒷문에 잔뜩 책걸상을 붙여 막아놓았으니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창문을 타고 넘어오든, 문을 열려고 애쓰든 그 순간 대가리를 날려버릴 작정이다.


다행히 비척비척 걸어오는 좀비는 재현과 주연이 몸을 숨긴 교실에 들어오지 않고 그대로 복도를 지나간다. 순간 긴장이 풀려 짧게 안도의 숨을 토해내다 주연과 눈이 마주친다. 담배 말리네. 재현이 담배를 꺼내기 위해 안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담배와 함께 딸려나오는 초코하임 하나. 이미 주머니 안에서 부스러진 초코하임이었다.

 

“먹을래?”

 

주연은 답이 없다. 안 먹으면 지 손해지 내 손핸가. 자판기에 이어 벌써 두 번째 무시를 당한 재현은 일부러 주연에게 보란 듯이 초코하임을 입에다 구겨 넣었다. 맛만 있네. 과장되게 씹다 과자 부스러기가 훅 목에 걸린다. 쩍쩍 눌어붙은 초콜릿 때문에 목이 마른다. 헛기침을 하며 재현은 창문을 열고 밖을 살핀다. 운동장을 느릿느릿 배회하다 거의 멈춰 선 것처럼 보이는 좀비들이 군데군데 점처럼 서 있다. 재현은 창틀에 걸터앉아 그 좀비들을 안주 삼아 느긋하게 담배를 피운다. 정신이 확 들 만큼 찬바람이 닿는 데도 여전히 몽롱한 기분. 지금 제정신이긴 힘들지. 재현은 상체를 더 바깥쪽으로 기울여 좀비들의 수를 센다. 천천히 내뱉는 연기에 가려졌던 좀비를 포함해 다시. 하나, 둘, 셋... 입술이 반쯤 뭉개졌다.


“담배도 피워요?”

“뭐, 이제 스무 살이니까?”


거짓말. 피우는 거 보니까 처음 피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 동안 왜 말 안 했어요? 말해야 되는 거였어? 재현의 대꾸에 주연은 입을 다문다. 한 대로는 모자라 나머지 한 대를 더 피우며 재현은 습관적으로 너머의 복도를 살핀다.


“선배랑 꽤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했는데?”

“아니었던 것 같아서요.”


고작 담배 피우는 걸 몰랐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재현의 말에 주연은 답이 없다.


“그동안 잘 맞았던 게 아니라 선배가 맞춰줬던 거였죠?”


일방적으로. 주연의 말에 이번엔 재현이 묵비권을 행사한다. 딱히 맞춰줬다고 생각한 적 없는데. 남들은 재현이 뻣뻣하고 자기 고집만 센 것처럼 보지만 사실 재현은 꽤나 유연하다. 맞춰준다고 생각 안 하고 자연스럽게 남들에 따라 제 일부분을 꺼내 보여주는 게 더 맞았다. 주연에게는 더더욱. 재현은 짧아진 담뱃대를 창틀에 눌러 끄고는, 남은 꽁초는 문틀 사이에 숨겨 둔다. 괜히 운동장에 던졌다 좀비들을 자극이라도 하면 머리 아파질 테니까. 텁텁해진 입천장을 혀끝으로 뭉개져 등을 돌리자 어느새 제 뒤에 선 주연이 너무 가까워 재현은 깜짝 놀라 몸이 기운다.


“조심하세요.”


그러다 떨어져요. 주연이 재현의 팔을 힘주어 끈다. 그렇게 살고 싶어서 좀비들 죽여놓고 여기서 떨어져 죽으면 억울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주연의 손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는데도 잡혔던 팔에 남아 있는 감각은 여전하다. 이미 다 흩어진 담배 연기가 없어도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마음이 자꾸만 퍼져서 그렇다.


“담배 더 있어요?”

“왜? 너도 피우게?”

“이참에 배워볼까요?”

 

학생회장이 피우는데 못 피울 거 없잖아요. 주연이 어디 한 대 달라는 듯 손을 내민다.

 

“아니.”


담배도 더 없어. 재현은 보기 좋게 텅 빈 담뱃값을 구겨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제 손에 집히는 것을 꺼내 주연의 손에 무언가를 놓아준다. 사과맛 마이쮸가 덜렁 주연의 손에 놓인다.


“안 어울리게 왜 맨날 이런 거 들고 다니나 했더니.”


금연 마이쮸였네요. 주연은 마이쮸를 까 재현의 입안에 넣어준다. 또 있어. 이번엔 재현이 포장지를 벗긴 마이쮸를 주연의 입안에 밀어 넣는다.


“이건 네가 좋아해서 갖고 다니는 거거든.”


너 이거 좋아하잖아. 미처 닿지 않은 창문에서 찬바람이 세차게 분다. 어지럽게 흩날리는 커튼이 둘의 시야를 가린다. 어쩌면 그래서 재현은 서슴없이 하고 싶은 말을 꺼내 든다.


“아, 마이쮸 먹여서 꼬실랬는데.”


안 넘어오더라. 800원 갖곤 어림도 없지. 또다시 장난으로 턴백. 이번엔 장난치는 그 말투에 오히려 더 긴장감이 돈다.


“잊었어? 좋아한다니까. 백 번도 넘게 말했는데.”


창문을 닫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적막이 흐르는 교실에 퍼지는 재현의 고백. 낮고, 끝이 갈라진 목소리가 주연에게는 너무 크게 들려서 주연의 시선은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아무리 관성적인 고백이었어도 고백이 고백이 아니었을 리 없다.


“아, 지금은 아니니까 오해 말고.”


아까 진짜 정떨어졌다는 거 진짜거든? 굳어 있던 주연의 얼굴이 풀어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심각하게 구겨진다. 심사가 어지럽다는 듯한 표정에 재현도 덩달아 버석해진다. 진짜거든. 재현이 한 마디 덧붙인다. 진짜라는 단어는 좀 이상하다. ‘진짜’라는 말을 덧붙이면 더 거짓말 같아지는 구석이 있다. 어이없는 단얼세. 창틀에 걸터앉아 대롱거리던 발의 움직임도 갑자기 어색하게 느껴진다. 숨 쉬는 것도 어색하게 느껴지는 적막에 재현은 창틀에서 내려와 주연과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책상을 다시 붙인다.


“좋아하다 어떻게 갑자기 안 좋아해져요?”


선배는 좋겠어요. 감정이 탈부착인가 보네. 재현은 주연의 어깃장을 무시하려다 욱한 마음에 반문한다. 그럼 계속 좋아할까? 어쩌라는 거야. 누울 수 있을 때 누워서 자기나 해. 안 그래도 피곤한데 피곤한 것 좀 더하지 말고. 지친 재현의 목소리에 주연은 대꾸 대신 재현의 말처럼 책상에 눕는다. 재현이 덮으라고 놔둔 작은 무릎담요 두 개로는 다 덮어지지도 않는다. 삐져나온 발. 머리끝까지 올리느라 정작 배는 하나도 덮어지지도 않았다. 배 까고 자면 감기 걸려. 방금 성질을 부려놓고 재현은 제 책상에 올려놓은 무릎담요 하나를 펼쳐 주연에게 덮어준다. 밤은 길고, 주연은 재현의 옷에 묻어 있는 선명한 핏자국들을 떠올린다. 어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 오래전 재현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린다. 그럼 계속 좋아할까?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도 주연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재현도 잠이 안 오기는 마찬가지일 테니 굳이.






 

 

마치 수위라도 되는 것처럼 복도를 어기적어기적 돌아다니던 좀비들 탓에 둘은 한숨도 자지 못 하고 퀭한 눈으로 뜨는 해를 맞았다. 둘은 혹시 저희처럼 숨어서 살아 있는 누군가가 있지는 않을까 싶어 우선 3층을 수색하기로 결정했다. 누구 있어요? 혹여 그렇게 묻는 소리에 좀비 떼가 나타날까 크게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그러나 둘의 기대와 달리 캐비닛 안에 숨어 있던 좀비 하나와 저희끼리 언제 물고 뜯긴 건지 낭자한 피를 뒤집어쓴 좀비 시체 더미만 발견했을 뿐 3층 교실을 전부 살펴도 둘 이외에 인간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일요일인 게 다행인 걸까 불행인 걸까. 아직까지 인간인 사람도 없었지만, 좀비의 수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것도 수색이라고 교실을 돌아다녔더니 재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어제부터 하루를 꼬박 먹은 게 없었다. 먹는 게 이재현 인생의 낙인데 세상에나 몇 끼를 거른 거야.

 

“아무래도 매점에 내려갔다 오는 게 좋겠어.”

 

이러다 배고파서 먼저 죽겠어. 골프채를 휘두르든 발차기를 하든 그것도 뭘 할 힘이 있어야지. 재현은 좀비들이 많이 없는 지금이 기회라고 했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거지만 선배는,”


거기까지 말하던 주연이 입을 다문다.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말을 하다가 마는 것이고 둘째는...도 아니고. 생각했던 거지만 뭐? 재현의 말에 주연은 고개를 젓는다. 그럴 거면 말을 꺼내지나 말던가. 싱거운 걸 떠나서 궁금한 건 못 참는 재현이지만 어차피 주연이 입을 다물기로 했으면 끝까지 말하지 않을 게 뻔했으므로 더 이상 추궁하기를 관둔다. 대신 재현은 물백묵을 흔들어 칠판에 예상 경로를 그린다. 매번 1층까지 내려갔다 올 수도 없으니까 2층 교실에 몇 개, 3층 교실에 몇 개씩 비상식량을 두는 편히 낫겠다는 의견도 제시한다. 그리고 만약 좀비 떼가 늘어났으면, 음, 일곱? 열? 아무튼 좀 많다 싶으면 그냥 던질 테니까 무조건 반대방향으로 달려. 알겠어? 재현이 삼각 플라스크를 들어 보여준다. 잠은 안 자고 어젯밤 뭘 그러게 만지나 했더니 황, 인이며 질소 등을 섞어 플라스크로 화염병을 만든 모양이었다.


“내가 화학도 좀 해.”


재현은 괜히 학생회장이 아니라는 듯 재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준비 됐어? 주연은 그런 준비 같은 건 이미 되어 있다는 얼굴을 했다.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사람이었던 좀비를 죽일 준비는 영원히 되지 않을 것 같다.

 

“간다?!”

 

재현의 신호에 주연은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가 뱉는다. 칠판에 그려놓은 재현의 예상은 초장부터 들어 맞는다. 당연하게 3층 복도를 어슬렁거리던 좀비 두 마리가 달려들었다. 곧 올라오겠네. 달려오는 좀비를 후려치면서 재현이 뒤를 살폈다. 생각도 못 했는데 4층에 있던 좀비 두 마리가 이전과 달리 빠른 속도로 둘을 덮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층에 있던 좀비들도 올라오고 있었다. 3층 복도에 있던 나머지 좀비 하나와 위아래에서 밀려드는 좀비까지 도합 여섯이었다. 둘이 왜 갑자기 3배로 불어? 진짜 염병이네. 욕을 내뱉으며 재현이 스틱을 휘둘렀다. 이거 아무래도 하나 더 가져와야 될 것 같아. 곧 부러질 것 같은데. 휘두르는 감이 그랬다. 누가 들으면 좀비 사냥꾼처럼 연장 감별까지 하다니. 하루 만에 아주 전문가 다 됐네. 재현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좀비들에게 황과 질산을 던지고, 지지 않고 스틱을 휘두르는 주연을 백업했다. 뭐야, 왜 안 터져? 당황한 재현이 다시 스틱을 잡아쥐기 전에 주연이 먼저 스틱을 휘둘렀다. 힘은 재현이 더 셀지 몰라도 밥 먹고 퍽만 치는 하키 선수는 역시 못 당한다. 주연에게 맞은 좀비들은 머리가 움푹 파이더니 코와 입, 귀에서 피를 토해내며 즉사했다. 얼굴에 튄 피와 살점이 소매로 대충 닦아낸 재현이 말했다. 나이서. 개저씨 같은 리액션에 주연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방금 눈앞에서 좀비 몇을 죽여놓고 매점에 도착한 재현은 그런 건 아무렇지 않은지 낼름 만쥬 하나를 까 입에다 넣는다. 그게 들어가요? 주연은 그런 눈빛이다. 그런 주연의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재현은 샌드위치랑 크림이 들어간 건 먹지 말라며 주의를 준다. 상했을지도 몰라. 주연이 애도 아니고 그 정도는 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현은 방부제가 잔뜩 들었을 초코파이 따위를 주연에게 던졌다.


“그게 지금 들어가요? 대단하다 진짜.”

“지금 입에 넣어야 주머니엔 이따 먹을 게 들어가지.”


속이 울렁거리는지 주연은 정말 안 먹을 거냐는 재현의 말에도 거듭 사양하고 냉장고에서 포카리만 꺼내 마셨다. 안 먹으면 지 손해지. 어제부터 그 말을 달고 살면서도 재현은 부지런히 칼로리바를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여차하면 자는 이주연 입에 바를 구겨넣고 턱과 머리를 잡고 수동으로 꼭꼭 씹게 만들어주는 방법도 있다.


재현은 매점 포스기 옆에 있는 라디오의 버튼을 누른다.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 갑자기 튀어나온 트로트에 재현은 놀라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다. 주연의 눈도 땡그랗게 커져 있다. 라디오인 줄 알았는데 효도라디오였어? 재현이 이마를 짚는다. 찬찬히 기계를 살피다 AM과 FM 버튼이 있다. 혹시나 소리를 듣고 좀비들이 몰려올까 싶어 볼륨을 가장 작게 낮추고 재현은 FM 라디오를 튼다. 치직거리다 이내 신호를 잡은 기계가 방송을 뱉어낸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산발적인 좀비 출몰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대피 권고 방송을 요약하자면 대형마트, 백화점 등으로 피신해 살아남을 것. 어떻게든 버티라는 소리였다.


“계속 학교에 있어요?”

“아마 그 편이 낫겠지?”


왜? 집에 가고 싶어? 재현의 물음에 주연이 고개를 내젓는다.


“그럼 나랑 계속 같이 있는 게 싫은 쪽이야?”


주연이 고개를 내젓기도 전에 재현이 손을 뻗어 저지한다. 말하지 마. 나도 좋아서 같이 다니는 거 아니니까. 재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을 까뒤집고 짐승 같은 소리를 내는 좀비 떼들이 복도 끝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나이스 타이밍이라고 해야 할지. 재현은 좀비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속도를 높여 좀비 떼에게 선빵을 날린다. 이미 굳은 피가 범벅이 된 얼굴과 서로 자기들끼리도 내장을 파먹는 것인지 덜렁거리는 내장에 얼굴이 일그러지면서도 재현은 그러쥔 골프채로 열심히 타격을 가한다. 이것도 하다 보니 는답시고 일격에 좀비 대가리를 날리는 법을 터득해 이제는 그리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원샷원킬로 대가리를 날린다. 둔탁한 타격음도 꽤 경쾌하게 들릴 정도다. 이게 다 좀비 때문인데 좀비라도 다 죽여야 속이 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재현은 기괴한 소리와 함께 온몸에서 떨그럭 소리를 내는 좀비들에게 일격을 날리느라 여념이 없다. 두 번째, 세 번째 좀비의 머리도 재현의 일격에 깔끔하게 복도로 나뒹군다.


피 좀 덜 튀기게 죽이는 법은 없나. 퍽 날릴 때 제일 깔끔한 동작 있으면 좀 알려주든가. 골프채를 연신 휘둘렀더니 뻐근한 어깨를 빙빙 돌려 대던 재현은 뒤늦게 얼굴이며 목에 튄 피를 소매로 닦는다. 깔끔하게 닦이지 않은 게 영 찝찝한 얼굴을 하던 재현은 화장실 밖을 부탁한다. 흐르는 물에 피를 닦아내자 세면대가 붉게 물든다. 혹시 피 때문인가. 피에 반응해 달려드는 거라면... 재현이 좀비에 대해 새로운 가설을 세울 동안 문 앞에 서 있던 주연은 물 흐르는 소리를 뒤로 하고 화장실과 가장 가까운 과학실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긴다. 이미 좀비 떼가 휩쓸고 간 과학실을 작게 난 창으로 살핀다. 손이며 얼굴에 튀긴 피를 벅벅 닦아낸 재현은 주연에게 너도 씻을 거냐고 묻지만 답이 없다. 좀비들이 들을까 걱정에 너무 작게 말했나. 다시 한번 들어올 거냐고 물어도 여전히 답이 없다. 너 씻어야 돼! 아무래도 피 때문인 것 같아.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일단 피는 닦는 게 좋겠어. 세면대 아래로 흥건한 붉은 물이 다 빠지는 동안 아무런 답이 없자 재현은 전투태세를 하곤 밖으로 나온다.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나온 재현은 과학실 문을 여는 주연을 보고 한숨처럼 숨을 토해낸다. 제 감정의 관성처럼 주연도 그렇겠지.


“가려고 연 거 아니야?”


망설이는 주연을 두고 재현은 일부러 먼저 과학실로 들어섰다. 가봐. 내 핸드폰도 찾을 겸. 들어가자마자 깨진 포르말린 냄새가 진동해 재현은 손가락으로 코를 막았다. 빠르게 부패하는 썩은 시체 냄새보다는 차라리 그편이 나았다. 주연에게 큰소리를 치며 들어온 것치고 내장이 파헤쳐진 시신들을 보자 얼굴이 일그러진다. 핸드폰이고 뭐고 저 사이를 헤집을 생각도 들지 않는다. 구역질을 참으며 재현은 핸드폰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차라리 약품이나 담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기왕 들어온 거 뭐라도 챙겨가야 억울하지 않으니까. 이주연처럼 누구 시체 구경하러 들어온 것도 아니니. 그사이 주연의 시선이 판넬에 가닿는다. Will you be my sunshine? 군데군데 떨어진 스펠링과 핏방울이 튄 판넬은 끔찍하다. 주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하루가 48시간처럼 느껴져서일까. 바로 어제의 일인데 일 년 전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사이 재현은 아연가루를 발견한 것이 꽤 기쁜지 화색이 돈다. 교사 책상 서랍에서 라이터 두세 개까지 손에 넣자 천군만마를 얻은 표정이 된다. 차라리 강당이나 체육관에 몰아넣고 확 불을 태워버려? 나 방금 너무 급진적이었나. 재현은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는다. 어느 시체가 김나은 시체인지 찾고 있는 이주연이 보기가 싫어서다. 근데 판넬로 내리쳤는데, 그거론 안 죽었을 텐데. 어제오늘 좀비들을 죽이며 다른 건 몰라도 하나는 확실했다. 제대로 머리를 날려야 좀비가 죽는다는 거였다. 판넬 정도론 어림도 없다.

 

‘혹시 김나은이 안 죽고 살아 있어서 이주연을 물기라도 하면? 이주연 지금 피도 안 닦았는데...!’

 

놀란 재현이 급하게 뒤를 돈 순간 눈앞이 캄캄하다. 고개를 들기도 전에 제 앞에서 들려오는 괴기한 소리. 보지 않아도 좀비가 내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놀란 재현이 급하게 골프채를 휘두르려고 하지만 사정거리가 맞지 않는다. 골프채를 들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손을 들어 올리던 좀비의 손목만 날렸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게 오히려 문제였다. 산 사람이라면 잠시라도 아파했을 텐데, 이미 좀비가 되어 자신의 손이 날아갔는지도 모르고 재현에게 그대로 달려들었다. 이미 골프채를 휘두르고 역동작이 걸린 재현이 손도 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저를 물려고 다가오던 좀비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날아가 문짝에 부딪혀 바닥으로 튕겨져 나갔다.


“조심해야지 뭐 하는 거예요?”


순간 막혔던 숨이 탁 트이고, 세상이 한 바퀴 빙글 도는 듯싶더니 언제 컴컴했냐 싶게 밝아진다. 눈앞에 주연이 점점 선명해진다. 잠깐의 침묵 끝에 재현이 숨을 뱉어낸다. 안도감에 재현의 얼굴이 풀어진다. 머리로 박치기라도 하던가 눈을 감으면 뭐, 순순히 죽겠단 거에요? 평소엔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가는 발성이 화가 났는지 꽤나 깡깡하다. 정신 차리라면서요. 주연은 혹여 좀비에게 물리진 않았는지 살핀다.

 

“빚 갚은 거에요.”

 

주연은 철제 캐비닛을 작게 노크한다.


“나가요, 얼른.”


재현을 밀다시피해 과학실 밖으로 내보낸 주연은 문을 닫는다. 바깥에서 문을 고정할 방법이 없는지 찾다 포기한다. 다 죽은 것 같아요, 일단은. 주연이 말한 ‘다’에 나은도 포함인가? 그다음 말을 찾지 못한 재현이 우두커니 서 있자 주연은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묻는다. 어디? 무슨 어디? 얼타는 재현의 반응에 주연은 그럼 여기서 좀비밥이 될 거냐고 대꾸한다. 어제 재현이 한 말을 그대로 갖다 쓰는 게 제법 어이없어서 재현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결론부터 말한다.

 

“음악실이나 강당.”

 

재현은 두 가지로 조건을 좁힌 이유를 간단하게 설명한다. 음악실은 문이 무거우니까 좀비들이 들어오기 힘들겠지. 피아노랑 장의자로 막으면 간단히 못 들어올 거야. 하지만 거기서만 버텨야 하니까 식량을 충분히 가져갈 필요가 있어. 강당도 마찬가지. 문이 두꺼우니까. 생각해보니까 음악실이 낫겠다. 강당은 골대를 옮기는 것 말고는 문을 막을 게 별로 없어 보이니까. 그래도 야구 배트도 있고 해서 무기는 더 많아 보이는데. 제가 말하다 결론까지 내린 재현은 그 전에 갈 곳이 하나 더 있다고 말한다.


“그게 어딘데요?”

“양호실.”


재현이 주연의 상처가 난 자리를 눈으로 살핀다.


“상처는 선배가 더 많을걸요.”


주연은 제 뒤에 딱 붙으라고 말한다. 서로 커버해요. 어쭈 싶으면서도 재현은 잠자코 주연에게 등을 제 등을 붙인다. 등에 닿는 따뜻한 체온에 재현은 숨을 몰아쉰다.



 




 

양호실에 들어선 둘은 문부터 걸어 잠근다. 양호실 침대는 세 개. 재현은 우선 나무로 된 가림막을 문에 딱 붙이고, 침대 하나를 옮긴다. 침대에 달린 바퀴는 너무 쉽게 문이 열리는 걸 허락할 것 같다. 재현은 책상을 먼저 끌기로 한다. 이미 먹통이 된 컴퓨터와 잡다한 것들이 올려져 있는 책상을 혼자 끄느라 바닥과 책상다리가 끌려 듣기 싫은 불협화음이 귀를 괴롭게 한다. 주연이 맞은편을 들어 올린다. 훨씬 수월해진다. 위에 침대 올릴 거예요? 주연의 물음에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둘은 책상 위로 침대를 거꾸로 해 올린다. 그 위로 의자까지 올리고, 기다란 자동신장계를 사선으로 걸어놓는다. 책꽂이도 옮겨놓는 게 나으려나. 피곤하지만 옮길 수 있는 것들은 다 옮긴 뒤에야 둘은 침대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눕는다. 눕자마자 몰려오는 피로감에 절로 앓는 소리가 난다.

 

고작 몇 분. 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약장을 뒤진다. 소독약, 거즈, 연고, 밴드. 이 정도면 되려나. 재현은 주섬주섬 챙겨 주연의 침대 끄트머리에 놓는다. 소독약 뚜껑을 열자 병 입구에서 알싸한 향이 난다. 거즈에 소독약을 적신 재현은 잠깐 따끔할 거라고 경고한다. 소독약을 대자마자 고름이 섞인 거품들이 몽글몽글 일어난다. 쓰라림에 주연의 미간이 소리 없이 구겨진다. 상처를 치료해주던 재현의 손이 잠시 멈칫하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시 치료를 이어간다. 연고를 바르고 덧댄 거즈는 금방 피범벅이 된다. 새로 거즈를 다시 댈까 고민하던 재현은 어차피 잠시 쉴 테니까, 라는 단서를 달고 상처 위에 꽤 두껍게 약을 올린다. 일련의 의료행위를 마친 재현은 바깥 동향을 살핀다는 핑계로 창가로 향한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할게요.”

 

공기가 많이 섞여 있는 목소리에 커튼을 잡고 있는 재현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화낸 건 미안해요.”

“난 미안하단 말은 안 할게.”

 

재현은 뭐 어쩌란 거냐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주연을 보는 대신 시선을 돌리며 말을 잇는다.

 

“네가 좋아하는 애가 아니라 좀비였어.”

“............”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좀비가 죽이는데 가만 둘 순 없잖아.”

 

재현의 고백을 고백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주연은 약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간주 점프된 고백은 더 이상 둘 사이에 간주로 흐르지 않는다.


“왜 처음 듣는 것처럼 굴어. 이미 골백번 말한 건데.”

 

백 번 고백한 거에 하나 더 추가해서 백한 번째 고백 정도가 뭐가 대수냐는 듯 재현은 어깨를 으쓱인다.


“이젠 아니라면서요.”

“갑자기 뚝 그게 돼?”


그랬음 진작 안 좋아했지. 재현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까지 내쉬었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그러라고? 좋아하는 건 선배 마음이라면서요. 주연은 그건 제 권한밖의 일이라는 듯 시선을 피한다. 그런가. 널 좋아하는 건 내 권한인가. 제 마음의 방향키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어색하게 흐르는 시간. 재현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솜에 소독약을 묻히고 여기저기 난 생채기를 닦아낸다. 평소라면 그냥 냅두면 알아서 딱지가 지고 절로 다 낫는다면서 두었을 상처들 위에 연고까지 꼼꼼히 바른다. 그런다고 어색함이 지워지지는 않는다.

 

어색한 기운이 다시 제법 서늘한 공기로 느껴질 때쯤 재현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해가 뜨면 매점에서 먹을만한 것들을 챙겨 음악실로 가기로 했으니 뭐라도 담을 걸 찾아야 한다. 재현은 손쉽게 서랍에 있는 쓰레기봉투를 찾아낸다. 약도 좀 챙겨놓는 게 나으려나. 재현은 구급상자를 같이 꺼내놓고는 창틀에 걸터앉아 창밖을 본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 좀비들. 텅 빈 운동장을 내려다 보며 튀어나온 벽에 등을 기댄다. 시멘트 벽이 내뿜는 찬기가 등에 닿는다. 그런 재현의 귀에 닿는 주연의 목소리.

 

“선배는 왜 내가 좋아요?”

“그게 궁금해?”

“네.”

“넌 내가 왜 싫은데?”

 

이나은 죽여서? 말하고도 재현은 바로 제가 뱉은 말을 후회한다. 간만에 좀 분위기가 풀린 것 같은데 굳이 급속도로 냉각시키는 말을 뱉은 입을 때리고 싶다.

 

“싫어한 적 없어요.”

 

좋아하는 쪽이지. 웅얼거리듯 말을 먹어버린 주연에게 재현은 되려 묻는다. 내가 왜 좋은데? 제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네가 말하면 말해줄게. 선배가 먼저 말해봐요.

 

“안 말해줄 건데.”

“죽을 수도 있잖아요.”

 

고백...도 제대로 못 하고 죽으면 억울할 거 아니에요. 자기소개 타임이었어? 재현이 삐딱선을 탄다.

 

“그럼 죽기 전에 적선하는 셈 치고 키스도 해주지 그래.”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안돼? 목숨값이라고 생각하고. 말은 그랬으면서 얼굴은 기대도 안 한다는 표정이다. 빚졌다더니.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 그 얼굴에 주연이 재현의 어깨를 잡고 훅 몸을 붙여온다. 주연의 입술이 재현의 입술에 빠르게 닿았다. 움찔 상체가 흔들리는 재현을 잡아 더 바짝 끌어당긴 주연은 가만히 맞대고만 있던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 넣는다. 입술이 닿은 것도 놀라운데 혀까지 들어오자 재현은 급하게 숨을 훅 들이마신다. 맞닿은 입술 끝의 감촉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매끄럽게 감겨온다. 조금 당황한 재현은 애써 태연한 척 혀를 섞자 질척한 타액이 뒤섞이고 살덩이가 얽혀들어 양호실엔 잔뜩 젖은 소리가 울린다. 마구잡이로 뒤엉킨 혀가 입천장을 간질이고 희미한 열기가 둘을 감싼다. 거칠어지는 숨소리, 달리는 숨.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폭죽소리. 뇌가 터지는 소린가. 재현은 줄을 타고 들어가는 불꽃의 파열음 소리를 들으며 주연의 혀에 제 혀를 열심히 섞는다. 떼어지지 않는 입술에 호흡이 달릴 때쯤 주연이 입술을 떼어낸다. 끈적하게 입안을 배회하던 혀의 잔여감에 재현은 침을 삼키곤 참았던 숨을 몰래 내쉰다. 짧았는지 길었는지 시간의 흐름조차 가늠되지 않는 키스 후 어색한 공기들이 주변을 가득 맴돈다. 아니, 주연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중간중간 질척한 소리에 감정을 숨기지 못한 귀가 잔뜩 달아올라 있는 쪽은 재현이다. 까실까실한 공기가 손끝으로 만져지는 기분. 배경의 잡음들이 사라지자 사위가 너무 적막해 침을 삼키는 것도 곤란할 지경이다. 그런 재현의 귓가에 다시 펑, 퍼엉― 하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아닌가. 제 귓가에서 터지는 소리인가. 희박해진 숨을 고르며 재현이 묻는다.

 

“.....혹시 들었어?”

“네.”

 

다행이다.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다면 재현은 혀라도 깨물 작정이었다. 첫키스를 할 때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난다는 말을 듣고 그런 개소리라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그보다 더한 폭죽 소리를 들었으니 혹시나 제가 진짜 미쳤나 싶었다. 어디서 들리는 거지? 둘은 똑똑히 들린 폭죽소리를 찾기 위해 창가로 향한다.

 

“구조댄가?”

 

재현이 암막 커튼을 천천히 걷자 둘의 눈앞에 까마득한 밤하늘을 부메랑처럼 돌아다니며 날아다니는 불빛이 서로 엉겼다. 폭죽의 잔해가 꼬리처럼 떨어질 때, 저 멀리서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가 사이렌 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구조대가 오나 봐. 재현은 조금씩 가까워지는 헬리콥터를 보며 창틀로 올랐다. 뛰어내릴 준비 됐어? 그 말과 함께 돌아보는 재현의 뒤로 조금씩 밝아오는 빛에 주연은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빛 사이로 재현의 손이 주연의 손을 기다린다. 주연은 재현의 손을 잡고 함께 뛰어내렸다.

 

 

 



 

 

More Love, Less Panic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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