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_ 그대가 미워요 - grey piano








"요섭아."

"응."

"우리... 진짜, 왜..."



먼저 말문을 연 남자의 눈에 눈물이 한가득 고였다.

술병들이 즐비한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입을 한 번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 진짜 왜 헤어졌냐."

"...말했잖아. 우리가 왜 헤어지는지."

"거짓말. 다 거짓말이잖아."



기어코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눈물을 흘리는 남자의 반대편에 앉은, 그 남자는 눈가만 발개질 뿐 울지 않았다.



"...그래, 거짓말이야."

"..."

"거짓말인 거 알면서... 왜 아직도 힘들어하는데, 넌."

"요섭아..."

"너 까먹는 거 잘하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냥 잊어. 그리고."



그 남자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눈을 꾹- 감았다 천천히 떴다. 남자의 눈물을 차마 보기 힘들다는 듯이.



"좋은 사람 만나. 네가 떳떳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

"..."

"갈게. 잘 지내."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말자, 우리.








안녕하세요.

오늘은 제 이야기를 한 번 해볼까 해요. 몇 년을 꽁꽁 감추었는데 오늘 딱 한 번만 털어놓을게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던, 제 10년 연애의 끝을 맞이한 이야기를요.


저에겐 아주 어릴 때부터 친했던 친구가 있었어요.

부모님들끼리 친해서 태어나기 전부터 친했던 그런 친구였대요. 장난 삼아서 한 명이 아들 낳고 한 명이 딸 낳으면 결혼 시키자고 할 정도로요.


저랑 그 애는 생일이 딱 6개월 차이 나요.

그 애는 여름에 태어났고 저는 겨울에 태어났는데, 5일 늦게 태어나서 다른 해로 넘어가버렸지 뭐예요. 그래서 자꾸 자기가 형 노릇 하더라고요. 칠칠 맞은 주제에.


그래도 저희는 유치원도 같이 다니고 초등학교, 중학교 모두 같이 나왔어요. 아, 고등학교도요. 여기는 동네가 좁거든요.

어릴 때부터 태권도도 같이 다니고 축구도 열심히 하고... 같이 목욕탕도 잘 다녔어요.


뭐랄까... 저희는 친구 치고는 조금 유난스러웠던 거 같아요.

동네가 좁다 보니까 유치원 때 친구가 초등학교 때 친구, 초등학교 친구가 중학교 친구, 중학교 친구가 고등학교 친구들이었거든요. 그래서 그 애랑 저는 친구도 많이 겹쳤어요.

그러다 보면 엄청 어릴 때 친구라도 다른 친한 친구가 생기면 서로 소원해진다고 하더라고요.



"야, 양요. 집에 가자!"

"어? 어, 잠깐만. 아씨, 좀 기다려! 가지 말고!"

"빨리, 빨리! 쪼끄만 게 왜 이렇게 느려?"

"진짜 뒤진다."



저희는 노는 친구는 각자 조금 달라도 꾸준히 친했어요.

초등학생 땐 제가 그 애보다 키가 아주 조금 더 컸었는데, 중학교 때부터 그 애는 무섭게 크더니 결국은 저보다 머리 하나 더 커졌었거든요.

다른 친구들보다 아주 조금 작았던 저는 다른 녀석들이 저를 많이 놀렸어요. 놀린다고 가만히 있을 제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럴 때마다 그 애가 많이 도와줬어요.

뭐, 도와줬다고 하기보단 욕을 해줬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잔병치레가 조금 잦은 편이었던 저 때문에 그 애 가방엔 항상 저를 위한 상비약들이 가득 들어있었어요. 다치면 무조건 업어서 보건실로 데려다주고요.

팔을 다쳐도 업어서 데려가더라고요. 유난스러운 놈.



"양요, 팔 괜찮냐? 어쩌다 다쳤냐?"

"축구하다가 넘어졌는데 땅 팔로 잘못 짚어서."

"야, 말도 마라. 다친 건 팔인데 윤두준이 굳이 양요섭 업어서 보건실로 달려갔잖아. 존나 요섭 공주와 백마 탄 두준 왕자."

"내가 왜 공주야, 씨발."

"야, 우리 엄만 내가 발 다쳐도 안 업을 듯. 너네 왜 안 사귀냐?"

"아, 지랄 좀 하지 마. 덩치도 산만한 게 너희 어머님은 무슨 죄임?"



저희는 정말 그렇게 유난스러웠어요.

친구들이 장난 삼아서 너희 왜 안 사귀냐고 할 정도로요.

그때는 말이 안 됐거든요, 그게.

사춘기도 같이 보내고 처음 본 야동도 그 애랑 같이 보고... 뭐, 이것저것 거의 다 그 애랑 처음 했거든요. 그렇게 서로의 민낯을 다 아는데 어떻게 좋아한다는 마음이 들겠어요.


근데 들더라고요.

어이없네요. 제가 그런 마음이 먼저 들었다는 게. 아니, 어쩌면 당연했던 걸 수도 있어요. 그 애는 너무 다정했거든요, 저한테만.



아.

저한테만 다정한 줄 알았어요.

저희는 17살까지 친구로 지내면서 여자친구가 있었던 적이 없어요. 저도, 걔도. 종종 고백을 받긴 했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두 거절했어요.

그런데 18살이 되던 해에, 그 애는 저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달려왔어요.



"야, 요섭아. 내가 너한테 제일 먼저 말해주려고 첫 번째로 달려왔다."

"어? 뭔데."

"이 형님... 여자친구 생겼다."



솔직히 조금 충격이었어요.

왜 충격을 받지, 내가? 그땐 그렇게 생각했는데... 뻔하죠, 뭐. 제가 그 애를 좋아하던 거였어요.



"...뭐냐? 사귈 생각 없다면서."

"우리 이제 18살이잖냐. 수능 보기 전에 한 번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아, 어. 야, 나 피곤한데 너네 집 가라."

"어? 아, 밀지 마! 왜 피곤한데! 자다 일어났다며?"

"나가라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별로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아서 저희 집을 찾아온 그 애를 내쫓아버렸어요.

그리고 울었던 거 같아요. 그 애한텐 저 밖에 없는 줄 알았거든요.

그 다정함을 다른 사람이랑 공유해야 한다는 게 싫었나 봐요. 아, 그건 아직도 싫긴 해요. 그때 그 이야기 들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짜증이 솟구치고... 앞으로 그럴 거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질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 애의 연애 소식은 그다음 날 바로 학교에 파다하게 퍼졌어요. 인기도 많고 고백도 많이 받았지만 한 번도 연애를 해보지 않은 그 애의 연애는 나름 큰 이슈였거든요.

그렇게 크게 이슈된 거 치고 생각보다 그 애의 첫 연애는 금방 끝났어요.

저는 짜증 나서 그 애의 연애에 대해 아무것도 안 물어봤었거든요. 같은 반 친구들이 그 애한테 물었어요. 저 대신, 물어보고 싶었던 걸 잘 물어보더라고요.



"야, 며칠이나 사귀었다고 벌써 헤어져?"

"헤어지는데 이유가 있냐? 그냥 헤어졌어."

"왜, 왜 헤어졌는데?"

"아, 그냥~"

"아, 궁금해 뒤지겠네. 빨리 말해봐!"

"우리 꼬맹이를 너무 탐내잖아, 걔 친구들이."

"엥? 양요섭?"

"어."

"미친놈. 그래서 헤어졌다고?"

"어. 귀찮게 하지 말고 떨어져, 이제!"



솔직히 기분 좋았어요. 어쨌든 헤어진 이유에 제가 있다는 거였잖아요.

제 이름이 들려서 그 애 쪽으로 고개를 확 돌렸는데 저랑 눈이 마주치고는 씨익- 웃는 거예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거 같았어요. 그동안 부정했던 마음을 그때 인정 한 거 같아요.


내가 이 애를 참 많이 좋아하는구나. 큰일 났다.


그리고 그 애랑 집에 갈 때 넌지시 한 번 물어봤어요.



"...야, 진짜 걔랑 왜 헤어졌냐?"

"아, 나 종일 그 질문만 들었어. 너까지 그럴 거냐?"

"말이 되냐? 나 때문에 헤어졌다는 게."

"진짠데."

"..."



진짜 장난기 싹 빠진 목소리, 눈빛으로 말하니까 괜히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입을 꾹 다물고 그냥 땅만 보고 걸으니까 걔가 어깨동무 하면서 진짜 이유를 더 말해줬어요.



"걔 친구들이 뭐만 하면 양요섭, 양요섭. 너 데려오라고 하도 성화여서. 짜증 나서 헤어졌어."

"...그럼 나 부르지."

"너 걔네랑 놀고 싶어?"

"그렇게 원하면 한 번 쯤은 가줬겠지. 괜찮은 애 있으면... 나도 연애나 한 번 해보고. 좋지, 뭘."

"...너 연애하고 싶어?"

"너도 하는데 나라고 못 할 건 뭐야."

"넌 안 돼."

"왜?"

"안 돼. 아무튼 안 돼. 우리 꼬맹이 연애하는 걸 오빠가 어떻게 보냐?"

"오빠는 지랄."

"그리고 괜찮은 애들도 없었어. 딱- 귀찮은 스타일. 알지?"

"네가 제일 귀찮아."



그렇게 저는 제 마음을 꽁꽁 잘 숨겼어요.

잘 숨겨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 숨긴다고 열심히 숨겼어요. 그렇게 18살도, 19살도 잘 넘겼어요. 같이 공부도 열심히 하고 가끔 축구도 하고. 게임도 하고, 몰래 야자 튀고 치킨이랑 피자도 먹으러 갔어요.

매일 모든 게 똑같았어요. 제 마음 빼고요.


저희는 같은 대학교를 가기로 약속했어요. 군대도 같이 가기로 하고... 성인이 되면 같이 살기로 약속도 했어요.

근데 정작 지켜진 건 딱 하나였어요. 같이 살기로 한 거.

같은 대학은 못 갔지만 나름 서울 안에 가까이 있는 대학이라 중간 쯤에 방을 구해서 같이 살았어요. 그 날 얼마나 떨렸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여태까지 내 마음 잘 숨겨왔는데 같이 살면... 시도 때도 없이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을 거 같았어요.



"야, 너네 과 시간표 진짜... 노답이다."

"...지는."

"끝나는 시간이라도 최대한 맞춰봐. 이거 어때? 이거 들어봐, 너."

"아, 싫어! 이 교수님 진짜 별로래."

"어허. 직접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를... 악!"

"너나 잘해, 너나!"



같은 학교 못 간 게 너무 아쉬워서 저희는 시간표라도 나름 맞춰봤어요.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같이 저녁 먹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면 미리 말하기. 뭐, 이런 간지러운 규칙들까지 정해두고요. 나름 잘 지냈어요, 우리는.

그러다가 제 마음이 들키게 된, 아니. 제 마음을 터트리게 된 계기는 생각보다 사소한 일이었어요.



 저는 요리를 잘 못 해요. 그래서 부엌에 잘 들어가지도 않고, 요리를 즐기지도 않아요. 그 애는 요리를 잘해서 같이 밥을 먹을 땐 요리를 직접 해줬거든요.

그 날은 우리가 같이 저녁을 먹기로 정해둔 날이었어요. 저는 마지막 수업 하나가 갑작스럽게 휴강이 되어서 곧장 집으로 갔는데, 왠지 제가 간단한 요리 하나라도 해주고 싶었어요.

인터넷에서 간단한 요리 레시피를 찾고 간단하게 장을 보고 와서 음식을 만들고 그 애를 기다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올 때가 됐는데 안 오는 거예요. 전화를 해도 안 받더라고요. 한 다섯번 쯤 전화를 했을 때, 그 애가 전화를 받았어요.

정말 짜증 나게도, 다른 여자 소리까지도요.



"윤두준, 어디야? 너 왜 안 와."

"여보세요? 아, 진짜 미안한데 오늘 저녁 같이 못 먹을 거 같다. - 두준아, 뭐해? 얼른 와! - 기다리고 있어?"

"...어. 미리 말 좀 하지 그랬냐."

"진짜 미안. 우리 내일 꼭 같이 저녁 먹자. 응? - 두준아아-. 누구야? - 어? 아냐, 친구."

"바빠 보이네. 잘 놀다 와라, 그럼."



항상 저랑 한 약속이 우선이었어요.

대학 가서... 갑자기 친구들 약속이 생길 수도 있죠. 저랑 한 약속을 깰 수도 있어요. 여자? 만날 수도 있죠.


아니요. 사실은 다 이해 못했어요. 하기도 싫었어요. 그 애한텐 항상 제가 첫 번째길 바랬어요. 너무 이기적이지만요.

음식은 다 버렸어요. 차갑게 식은 거 혼자 먹기도 싫었고. 입맛도 없어서 그냥 다 치우고 누워서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리고 자정이 한참 지난 시간에서야 그 애는 들어왔어요.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면서요. 술도 잘 못 마시면서.



"...요섭아, 자?"

"..."

"우리 요섭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듣기 싫으니까 그만 좀 사과해."

"어? 안 자네..."



실실 웃으면서 벽 보고 누워있는 제 몸에 엎드려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아무 말 없이 웅크리고 있으니까 제 몸을 억지로 돌려 눕혔어요.

제 옆에 앉아서 제 얼굴을 내려다보는 얼굴에 눈물이 울컥 터져 나올 거 같았어요.



"삐쳤어? 아님, 화났어? 우리 꼬맹이."

"..."

"아, 화 풀어라아. 요섭아. 응? 뭐 해줄까. 뽀뽀라도 해줄까?"



제 얼굴을 꽉 부여잡고 입술을 쭉 내밀고 다가오는 그 애의 얼굴을 피하지 않았어요. 눈도 안 감았어요.

아주 약간. 내심 기대하긴 했지만, 안 할 걸 알고 있었거든요.



"이게, 쫄지도 않네."

"꺼져. 짜증 나니까."

"요섭아."

"..."

"우리... 참 유난스러워. 그치? 다른 애들은 약속 파토 나도 그냥 그러려니 한다던데. 우리는 항상 이유가 필요하고 서로가 우선이었잖아."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갑자기 진지해진 그 애가 덜컥 무서웠어요.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하는데... 제 모든 걸 다 들키는 기분이었어요. 그동안 꾹 참고 숨겨왔던 제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느낌이요.



"사실 오늘 꼭 안 가도 되는 약속이었어."

"..."

"그냥... 이렇게 별 이유 없이 너랑 했던 약속을 깨고. 그냥 남들이랑 똑같은 평범한 친구 사이로,"

"...그래서, 오늘 별 이유도 없는데 약속을 깼다. 이거야?"

"..."

"병신처럼 너랑 저녁 먹을 생각에 한 번도 안 해봤던 요리까지 하면서 기다렸던 내가... 그냥 아무 생각도 없는 머저리 새끼였던 거지."



왜 갑자기 저희 사이에 대해 특이점을 느낀 걸까요, 그 애는.

20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저랑 떨어져서 지내다 보니까 유난스러웠던 점이 눈에 들어왔던 걸까요?

잘 모르겠어요. 그때 기억이 뚜렷하게 나지는 않는 거 같아요.



"그래. 네 말대로 우리 유난스럽고 이상해. 안 평범하고 다른 새끼들이랑은 다르지. 근데, 그거 왜 그런지 알아?"

"..."

"내가 너 좋아해서 그래. 그게 다른 새끼들이랑 우리가 제일, 다른 점이야."



근데 이상하게, 놀라지 않더라고요.

놀라지도 않고 더럽다는 눈으로 보지도 않고. 그냥 무덤덤한 눈빛이었어요.

그 날 그렇게 저는 제 마음을 충동적으로 고백했어요. 그리고 그 애는... 그냥 제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한참을 아무 말 하지 않고 제 옆에 있다가 방을 나갔어요.


바보 같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저는 도망가기로 마음을 먹었어요. 그 애를 마주하기가 무서웠거든요.

뭐, 이 나이대에 도망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저랑 그 애가 군대를 같이 지원했었는데, 그 애는 떨어지고 저는 붙었더라고요.

부지런하게 도망갈 준비를 했어요. 그 애도 모르게요.


그런데 선수 쳤어요. 그 애가 먼저요.



"요섭아. 얘기 좀 하자."

"너랑 할 얘기 없어."

"나 군대가."



그 애나 저나 참 이기적이에요.

와중에 그 애가 먼저 군대 간다는 사실을 듣고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싶어서 엄청 화가 났었던 거 같아요. 도망도 지가 먼저 가고. 지가 뭘 잘했다고.

뭐, 저도 잘한 건 없었지만요.



"...이기적인 새끼."

"요섭아. 나 너랑 멀어지고 싶지 않아."

"허, 너 좋아하는 새끼 옆에 두고 우월감이라도 느끼시게? 더럽다고 안 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되냐? 작작 해, 윤두준. 지금 너랑 대화하고 있는 것도,"

"나도 너 좋아해, 요섭아."

"뭐?"

"좋아해. 좋아하는데, 모르겠어. 난 아직 네가 친구로서 좋아."

"장난하냐, 지금?"

"확실한 건 다른 친구들이랑은 달라. 병철이, 석현이. 이런 새끼들이 좋은 거랑 다르다고. 그러니까, 시간을... 좀 주라, 요섭아."

"..."

"내가 너를 친구로서만 좋아하는지, 아니면. 널... 내가 너랑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는 건지. 정리하고 올게, 요섭아. 그러니까 기다려주라. 응?"

"...군대 간다는 새끼를 뭘 기다려, 내가."

"첫 휴가. 내가 너랑 같은 마음이면... 우리 집으로 올게. 네가 없으면 내가 기다리고 있을게. 못 만나면 그다음 휴가 때. 그때도 못 만나면... 그다음 휴가에도."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요?

저는 기다렸어요. 줏대도 없는 등신 같이.

초조하게 언제 휴가 나오나... 이미 나왔는데 나랑 같은 마음이 아니라서 안 온 걸까. 생각하다가 나를 더럽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때 그 애의 기다려달란 말에 내가 너무 설레발 친 건 아닐까.

매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으로 지냈어요.


그리고 어느 날, 그 애가 왔어요.

저와 함께 살던 집으로.



"요섭아. 나 왔어."

"...어, 왔냐?"



현관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어요. 그 애도, 저도.

옛날이랑 달라진 게 없어서... 그냥, 예전 친구처럼 지내기를 바란 건가 싶었는데... 그 애랑 눈을 계속 마주치고 있다가 제가 눈을 피해버리니까 한 발자국 다가와서 저를 꽉 껴안아 주더라고요.



"보고 싶었어."

"...어."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

"난 너 보고 싶어 죽겠던데. 엄마보다 더."



저를 한참 껴안고 있던 그 애는 절 품에서 떼어놓고는 제 얼굴을 계속 들여다봤어요.

머리 빡빡 밀어서 못생긴 놈. 보기 싫다고 밀어냈는데 꿋꿋하게 붙어있더라고요. 참 찌질하게도 눈물이 나올 거 같아서. 그 모습은 절대 보여주기 싫어서 끝까지 밀어내고 방으로 들어갔어요.

눈물을 참으려고 심호흡 후- 후- 하는데, 그 애가 들어오는 거예요. 참으려고 했던 게 무색하게 그 애가 문 여는 소리만 듣고 눈물이 팡- 터져버리는 거 있죠.



"왜 울어, 요섭아. 응?"

"...안 울어. 꺼져, 빡빡아."

"우리 요섭이가 우는데 내가 어떻게 꺼져. 나 봐봐, 섭아. 우리 진짜 오랜만에 보는데. 나 너 진짜 보고 싶었는데 얼굴 안 보여줄 거야?"



눈물 뚝뚝 떨어지는 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 애는 제 입에 가볍게 입을 맞춰줬어요. 한 방울 떨어지면 쪽-, 또 한 방울 떨어지면 쪽-.

그러다 제 눈물이 다 그쳐갈 때 쯤에, 저희는 첫 키스를 했어요. 저만 눈물 젖은 첫 키스였죠. 어쩐지 첫 키스가 짰다며, 그러더라고요.

그렇게 저희는 연애를 시작했어요. 뭐, 군대 가 있는 동안은 사귀는 게 사귀는 거 같지 않았지만... 서로 낯간지럽게 편지를 쓰진 않았어요. 그 애가 한 통 써주면 저도 한 통 답장 하는 정도?


행복했어요.

고작 한 통씩 주고받는 편지였어도 그 애랑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리고 제가 얼마 후에 군대를 가고, 그 애가 먼저 제대를 했어요. 제 면회도 가끔 오고... 그렇게 남들처럼은 못 사귀더라도 더 유난스러워진 친구처럼 잘 사귀었어요.



"야. 나 뭐 물어봐도 돼?"

"뭔데?"

"너 왜 내가 좋아한다고 했을 때 안 놀랐어?"

"응? 알고 있었으니까."



저희는 거의 집에서 데이트 했어요.

같이 살기도 했고, 마땅히 밖에서 데이트 할 곳이 없었거든요. 가끔 심야 영화도 보고 소매 끝자락 잡고 다니면서 공원도 나가고...

집에서 데이트 할 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좁은 거실에 티비 틀어두고, 그 애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으면 그 애는 제 머리를 항상 쓰다듬어줬어요. 다 좋지만, 그게 제일 좋았어요.

사랑 받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힘들었던 제 짝사랑을 보듬어주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요. 



"나 티 진짜 안 냈는데? 어떻게 알아?"

"네가 나 말고 좋아할 사람이 또 누가 있냐?"

"자신감 뭐야. 진짜 재수 없어."



집에서는 저희도 다른 커플들과 다를 바 없었어요.

아주 깨소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워낙 저희 둘 다 오글거리는 걸 싫어하는 스타일이긴 했지만 저런 유치한 질문도 하면서... 뭐, 나름 잘 사귀었어요.



"야, 윤두준. 환기하면 안 된다니까?!"

"아이, 그래도 어떻게 환기를 안 시켜. 실내 공기가 너무 맴돌아도 안 좋아."

"아니, 오늘 미세먼지가 더 안 좋아. 몇 번을 말해, 내가. 씨발."

"씨발? 욕 좀, 요섭아. 어?"

"...욕이 안 나오게 하면 되잖아, 네가!! 아, 짜증나. 왜 네가 말 안 들어놓고...!"

"어? 입 또 세모된다."

"야!!"



물론 싸우기도 싸웠죠.

같이 살다 보니까 완전 사소한 이유로도 싸우고 또 금세 화해하고.

재미있었어요. 행복했고요. 짝사랑한 시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어요.


저희는 심하게 싸워도 누가 먼저 이별을 말하지 않았어요.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오래 떨어져 있지도 않았어요.

그렇게 잘 사귀던 저희의 10년 연애도.

그 애랑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 같았던, 저희도 끝이 나더라고요.



"두준아."

"응."

"너는 나랑 왜 사귀었어?"

"왜긴. 좋으니까 사귀었지."



저희는 서로 좋아서 사귀었어요.

저는 그 애와 연애를 하면서 더, 더 많이 좋아하고 그러다가 사랑하게 됐어요. 그 애가 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어요. 미래에 대한 겁이 많았던 제가, 결코 평탄하지 않을 게 분명한 미래를 생각하면 벌벌 떨었던 제가. 그 애만 있어 주면 그래도 이겨낼 수 있을 거 같았어요.


그 애는 어땠을까요.

절 좋아해서 사귀었다는, 그래서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저와 연애했던 그 애는 절 사랑했을까요.

좋아서 연애를 시작할 순 있어요. 하지만 그게 사랑이 되었을 거라는 확신을 할 수 없었어요.

그 애랑 처음 사귀기 전에, 그 애가 했던 말이 있잖아요. 나랑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그 말이. 10년 전에 들은 그 말이 요즘 왜 이렇게 생생하게 맴도는지.

그냥 저와 태어날 때부터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을 등지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겠죠. 그 애는.



"응, 엄마. 무슨 일이에요? 어, 집이지. 아이, 안 본다니까요. 별로야, 그런 거."

"아주머니야? 왜, 뭐라 하시는데?"

"어? 별 거 아냐. 아까 뭐라고 했더라?"



30살이라는 나이.

요즘은 한창이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죠.

서른이 넘고 나서 그 애는 아주머니한테 전화가 오면 난감한 듯 보였어요. 사실, 대충 예상은 했어요. 저도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숨기는 것도 이해했어요. 제가 알면 기분 나쁠 걸 아니까 숨겼던 거겠죠.



"요섭 씨, 어딜 그렇게 멍하게 봐?"

"...네?"

"저 카페 가고 싶어? 저기 평이 썩 좋진 않던데."

"아... 정말요? 아니에요, 그냥. 분위기가... 좋아 보이길래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끼리 저녁을 먹기로 한 적이 있었어요.

식당까지 걸어가다가, 어느 한 카페에 익숙한 사람이 앉아있는 걸 봤어요. 서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드문드문 대화를 이어가는 그 애를요.

자기의 의지로 간 건 아닐 거예요. 저에게 거짓말을 하고 저 자리에 나간 것도 이해해요. 그리고 저는 저녁 약속을 그냥 취소해버렸어요.


혼자 집까지 걸어갔어요.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걸었어요. 그거 알아요? 생각이 너무 많으면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제가 딱 그랬거든요.

왜 나에게 비밀로 했을까? 어쩌면 정말 뻔한 정답이 나오는 질문이겠죠.



"...응, 두준아."

- "어디야?"

"나 저녁... 먹고 있지. 약속 있다고 했잖아."

- "아직도 먹어? 근데 되게 조용하네?"

"잠깐 나와 있어. 너랑 전화하려고. 집 가?"

- "어, 이제 가려고. 오래 걸려? 데리러 갈까?"

"응. 오래 걸릴 거 같아. 먼저 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어요.

저에게 숨긴 그 애와, 그걸 아는 저는.

그 애와의 통화를 마치고 저는 이별을 결심했어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참 웃기죠.

길거리에서 우는 게 제일 추하다고 생각했던 저인데, 그런 짓을 제가 하고 있었으니까요.


제가 피했던 사실을 직면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애써 아닐 거라고, 저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위안해왔던 시간이 모조리 땅바닥에 처박히는 걸 보는 게 힘들었어요.


희망적인 미래만 생각하며 자기 위안을 하기엔, 이젠 너무 현실을 생각해야 해서 희망적인 미래를 생각할 수도 없게 만들었어요.

제가 너무 생각이 어렸나봐요. 아니. 그냥 믿고 싶지 않아서 눈 감고, 귀 막고 외면했어요. 저는. 영원히 그 애랑 함께하고 싶어서요.

그 애는, 자신이 없었나 봐요. 저와 함께할 자신이요.


아, 참. 그렇다고 그 애를 욕하진 말아주세요.

그 애가 저에게 티를 내진 않았어요.



"두준아."

"응."

"우리, 헤어질까?"

"...어?"

"헤어지자, 우리."



결국 이별을 먼저 고한 건 저였어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싸우지도 않았고 권태기가 온 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그 애가 절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이별을 선택했어요.



"갑자기 왜 그래, 요섭아.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화난 거 없어. 그냥, 우리 너무... 질리도록 오래 함께 했잖아."

"...그게 이유야?"

"우리라고 뭐... 꼭 거창하게 헤어질 이유는 없잖아, 두준아. 우리도 이제 미래를 생각해야지. 언제까지 붙어서 살 순 없으니까."

"...아니, 요섭아. 이렇게 갑자기 너 혼자서 결정을,"

"힘들어. 한 사람만 10년 넘게 만나는 것도... 지치고. 아, 우리 집은 어떻게 할까?"

"양요섭."

"아, 내가 나가는 게 맞지? 금방 정리해서 나갈게."

"..."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충동적으로 헤어졌다고 생각하지 마. 우리가 10년 전처럼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말고."


 

저는 그 애를 여전히 좋아하고, 사랑했으니까 눈 꼭 감고 모르는 척 그 애랑 계속 살 수 있었을 거예요.

그 애는 나를 좋아해. 나를 사랑할 거야. 그러니까 나랑 1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지. 라고 스스로 저를 다독이며 모르는 척, 함께 할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제가 이별을 택한 이유는요.


자신이 없었어요.

저는 그 애에게 모든 걸 보여줬고 그 애는 지극히 일부만 저에게 보여줬어요. 제가 몇십 년을 알고 있던 그 애의 모습은, 너무나도 작은 부분이었어요. 저는 그 애에게 아낌없이 다 쏟아부었지만 그 애는 그걸 소중하게 아끼고 간직하고 다 넣어두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애에게 더 보여줄 게 없었고 더 쏟아부을 게 없었어요.


그렇게 저의 10대, 20대를 바쳤던. 10년이 넘는 저의 짝사랑과 연애의 끝은 10분도 안 돼서 끝났어요.


내 연애는 누구보다 특별한 줄 알았고, 그 애랑 있으면 뭐든 이겨낼 수 있을 거 같았는데.

결국 그 애 때문에 저는 무너졌어요.

그렇게 정말 끝이 났어요.


그 애 없이 죽을 거 같지만 결국 아득바득 살겠죠, 저는.

힘들어도, 그 힘든 건 잠깐이겠죠.

그 잠깐 때문에 죽을 거 같지만요.

아니, 잠깐이 아니라 오랫동안 힘들겠죠.


이게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 입니다.

저만 아는, 진짜 이유요.


저의 지루하고 길었던 이야기를 봐줘서 감사해요.

이 이야기가 부디 그 애에겐 닿지 않기를 바랍니다.







글에 대한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

@duyo_gu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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