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사 X 헌터 / 연상연하 상호병찬입니다.
  • 텀을 두고 쓰인 두 편을 묶어서 한 번에 올립니다. 이야기는 좀 더 이어질 것 같습니다.
  • 헌터물+능력자물을 잘 아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서 본 설정이 여기저기 섞여 있을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 드립니다...







1. 잘 아는 괴물


박병찬의 손목을 타고 진동이 울렸다. 길드 내에서 회의 중이던 병찬이 창틀에 올라섰다.


“또 창문으로 나가실 거죠?”

“미안, 초원아. 외벽 부서지면 형아 사비로 청구하고.”

“형 돈이 어딨어요.”


전부 길드 운영비로 돌리면서. 병찬은 굳이 소리를 듣지 않아도 이초원이 할 말을 이미 예상할 수 있었다. 공기의 떨림이 초원의 움직임을 전해주었다. 초원을 바라본 병찬이 손을 흔들었다. 초원은 고개를 저으며 제 눈을 가렸다. 언젠가 저러다 죽을 거야. 초원이 할 생각이야 뻔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병찬이 눈을 뜬 순간부터 공기는 언제나 저를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창틀을 발로 밀쳐내며 하늘을 바라본 병찬이 제 손목의 헌터 디바이스를 확인했다. 목적지는 P시 근방의 바다였다. 게이트 오픈까지 앞으로 3시간, from 진재유. P시 근방이다 싶더니 역시 진재유였다. 그럼 알려준 시간은 정확할 터였다. 타이머를 설정한 병찬이 공중을 박차고 뛰었다. 허공을 가르는 움직임이 날카로웠다. 산뜻한 바람이 몸을 받치고 등을 밀었다. 이 속도면 P시까지 2시간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쁘지 않은 컨디션이었다. 나빴더라도 괜찮게 만들어야만 했다. 굳이 재유가 병찬에게까지 알림을 보낸 이유가 있을 테니.



박병찬의 기상호는 어느 순간 세상에서 사라졌다. 상호를 기억하는 건 그를 알고 있던 S급 헌터들뿐이었다.

A급 헌터, 스토퍼 기상호. 박병찬의 연인. 지상 클랜의 마도공학자. 서글서글하고 쑥스러워하는 얼굴이 귀엽던 스물하나짜리 어린애. 왼쪽 눈 아래 눈물점 하나가 콕 찍힌, 밀색 머리에 쭈뼛거리면서도 제 할 말은 다 하던 자존심 강한 애.

세상은 누군가 갑자기 사라져도 어제와 똑같이 돌아가곤 했다. 병찬이 상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I시의 거점 길드, 조형의 메인 헌터 자리는 연인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지상 클랜의 S급 헌터 재유가 이상 현상을 느끼고 연락했을 때 병찬은 I시에 새로 관측된 게이트를 막기 위해 진입 중이었다.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병찬이 재유에게 연락할 수 있을 즈음에는 이미 재유가 다른 S급들에게 연락을 돌린 뒤였다. 상호를 만나본 적 있는 S급은 모두 상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찬이 초원에게 상호를 아냐고 물었을 때, 초원은 ‘형이 요즘 스카웃하려는 헌터에요?’라고 물었다. 병찬과 상호가 사귄 지 2년이 넘어가는 때였다.


그렇게 세상에서 상호가 사라진 지 어언 5년이었다. 병찬은 여전히 짝이 맞지 않는 반지를 끼고 있었고 상호가 제게 알려준 플레이리스트를 들었다. 취향이 아니던 J-POP의 가사를 다 외웠고, 가끔 김다은의 오타쿠 토크에 어울려줄 만큼 애니메이션을 봤다. 그리고 재유가 보내는 알림을 받았다.

재유는 제 소속 클랜원에게 책임감이 강했다. 병찬과 더불어 여전히 상호를 찾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의외인 것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성준수 역시 이 수색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위화감이 느껴진다고 했던가, S급의 끝자리를 엿보는 A급에게는 뭔가 다른 모양이었다.



박차는 공기에 서서히 짠 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P시 근방이었다. 병찬이 감각을 끌어올렸다. 공기를 타고 흐르는 진동이 몸을 울렸다. 이계의 마력이 대기를 찢어내며 게이트를 열고 있었다. 헌터 디바이스에 뜬 남은 시간은 40분, 재유를 찾아서 이야기를 듣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서서히 고도를 낮춘 병찬이 투명한 계단을 밟듯 공중을 걸어 내려왔다.

항구는 이미 대피가 완료된 상황이었다. 최소 A급 이상의 게이트일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일반인에게는 C등급의 게이트도 재난이었다. 팔짱을 끼고 바다를 노려보는 준수의 어깨를 병찬이 건드렸다.


“안녕, 준수. 재유.”

“아, 오셨어요.”

“반갑심더.”


불안한 얼굴로 서 있던 재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그거?”

“네, 글네요.”


재유가 병찬에게 알림을 보낼 때는 한 가지뿐이었다. A급 이상의 게이트에서 상호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질 때. 하지만 여태까지 있었던 6번의 게이트 중 상호의 흔적이 발견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재유를 만났던 곳은 K시 외곽의 산이었다. 갑작스럽게 열린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거대 여우 마물을 지상 클랜이 처리하는 모습을 본 뒤였다. 조심스럽게 재유가 정리할 때도 다 되지 않았냐는 말을 꺼냈었다. 병찬은 그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못 들은 걸로 하겠다고 말했다.


“속을 언제까지 썩이려고, 시바거.”

“그래 말하지 마라, 준수.”

“뭐 어때. 독수공방 5년 차쯤 되니까 이젠 얼굴 보면 더 낯설 거 같은데?”

“찾으면 꼭 저한테도 말해주세요. 어떤 새낀지 저도 확인 좀 하게요.”

“알겠어. 준수한테는 특별히 한 대 때릴 기회도 줄게.”

“형은 안 때리세요?”

“글쎄…”


처음엔 부정했었다. 그저 상호가 일이 있어서 잠시 사라진 거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1년 뒤엔 참신하게 저에게 이별을 선고하는 건지 고민했다. 2 년째에는 준수의 말대로 나타나기만 하면 죽기 직전까지 때릴 거란 다짐을 하기도 했다. 3 년째에는 차라니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인생이고 능력이고 뭐든 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4 년째의 병찬은 일 년 동안 외부활동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재유에게 알림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디바이스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5 년째, 병찬은 이제 농담처럼 상호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갈매기가 낮게 날며 옆을 스쳐 지나갔다. 준수가 제 허리춤에 매고 있던 환도에 손을 올렸다. 공기를 넘어서 파도가 울렁거리며 회오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병찬도 끼고 있던 반 장갑을 다시 확인했다.


“갈까, 준수?”

“넵.”

“둘 다 조심하고, 민간에 피해 없게 해주이소.”


고개를 끄덕인 준수가 먼저 높게 뛰어올랐다. 공중의 수분을 얼려 도약대를 만든 준수가 쏘아지듯 튀어 나갔다. 정확하게 제가 발을 디딜 지점에만 얼음꽃이 나타나는 솜씨가 예술이었다. 병찬도 늦지 않게 몸을 띄워 올렸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변으로 눈먼 마물이나 공격이 튀어 나가는 일이 없도록 바람 막을 치는 일이었다. 얇지만 단단히 압축된 반구 모양의 공기층을 둘러친 병찬이 준수의 근방에 멈췄다. 바닷속은 준수가 담당할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공기와 얼음으로 만들어진 둥근 구가 게이트가 생길 지점을 완벽하게 가두고 있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요한 일렁임이 원을 그리며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번 게이트는 수면 근방에 생길 모양이었다. 순간 빨려 들어간 바다 사이로 심연이 비쳐 보였다.


“눈 감아, 준수!”


불길한 기운이 손을 뻗듯 게이트 밖으로 기어나오고 있었다. 저것을 그대로 직면하면 이지를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병찬이 빠르게 준수를 밀쳤다. 본능에 따라 발아래 수분을 얼린 준수가 그대로 쭉 밀려났다. 세차게 밀려나는 공기에 병찬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저 안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든, 제가 처리해야만 했다.


“병찬 햄?”


낡고도 어린 목소리가 저를 불렀다. 병찬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제 손을 마주 잡는 무게가 익숙했다. 마력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다. 게이트가 닫히고 있었다. 공중에 뜬 채로 병찬에게 모든 걸 맡긴 건 기상호였다.

제가 아는 기상호가 아니었다.








2. 알 수 없는 영웅


차원을 걷는 자. 기상호가 새롭게 얻게 된 이름이었다. 언젠가는 용사였고, 또 언젠가는 마왕이었고, 세계의 파괴자, 멸망의 나팔을 부는 자, 666번째의 이계인, 황혼을 이끄는 자, 혼돈의 바다를 풀어내는 자, 돌아보지 않는 자였다. 용사라는 이름 위로 쌓여간 악명을 세자면 세헤라자데가 무색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악명을 아는 건 오직 상호뿐이었다. 악명을 붙인 이들은 결국 부서져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이었다. 사그라드는 운명을 바라보는 것은 처음에는 서글펐고, 종내에는 무감해졌다. 새로운 이름에 따르는 능력은 보상인지, 벌인지 모를 일이었다. 수없이 쏟아지는 혜성 사이를 걸어, 죽어가는 운명 틈 사이를 고를 수 없는 힘은 처벌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수없이 되돌렸던 운명에 쌓인 카르마에 더해 역천을 성공한 것을 고깝게 봤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상호는 삐뚤어진 마음으로 걸음을 멈추어섰다. 하나의 세계를 구해낸 대가로 수만 개의 세계가 스러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라니, 악취미였다.


그러나 상호는 별 사이를 쉼 없이 걸어야만 했다.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있었으므로. 가장 최초의 세계, 아주 오래전, 용사이기 전에 그저 학생이었던 열여섯의 기상호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야 했다. 어쩌면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상호가 제가 갈 수 있는 차원을 알아보는 법은 간단했다. 부서진 기억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길은 상호가 갈 수 있는 곳을 안내하고 있었다. 큰길의 가짓새로 삐져나온 작은 길들은 저마다 보여주고 싶은 차원과 이어져 있곤 했다.

상호는 그래서 이 길이 기억의 조각이라고 생각했다. 찬란하게 별처럼 빛나는 소원이 모여, 어쩌면 저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용사를 부르는 길이 되었겠지. 수없이 많은 과거의 소원은 기억이 되고, 소망은 길이 되어 한때는 용사였던 그를 안내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 간단했다. 처음 길에 올랐던 날, 검은 우주 위를 산책할 수 있게 단단히 받치는 모래알 같은 반짝임을 손으로 떠올려 봤기 때문이었다. 알갱이 알갱이 하나마다 간절한 기원을 담은 것들은 저마다 상호를, 용사를 부르기 위한 길이 되어 있었다.



이번에도 상호가 바라던 세계는 만날 수 없었다.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이 지배한 세계는 마치 매트릭스 같았다. AI가 보여주는 환상 속에 빠진 인간들은 스스로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기계는 인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것이 인간을 사랑한 탓이겠지. 어느 날 나타난 잠들지 않은 인간에게 AI는 웃어 보였다. 그것을 웃었다고 해도 되는 걸까?

제 소개를 하지 않는 상호에게 불면자라는 칭호를 붙여준 AI는 자신을 파레이돌리아라고 소개했다. 아주 오래전에는 나도 이름이 있었어. 아득히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를 가진 AI는 모순적이게도 인간의 얼굴을 가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호는 그를 검은 네모로 인식했다.

자지 않는 인간아, 나를 끝내 잠들게 해주겠니? 라는 부탁에 상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의 중심인 AI가 종료된다면 아마 모든 인간 역시 갑작스러운 전류 공급 중단으로 말미암은 쇼크사를 겪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상호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세계로 자신을 불러온 소원은 잠들고 싶다는 AI의 것이었으므로.

지니고 있던 오래된 단검으로 단숨에 아주 작은 저장소를 파괴한 상호가 커다란 창 밖으로 불야성의 막이 내리는 것을 지켜봤다. 이 거대한 세계를 지탱하는 AI의 근본은 컴퓨터 하나에 장착하면 딱 맞을 것 같은 크기의 저장소였다.

자지 않는 기계들의 도시가 잠들고 있었다. 안녕, ▒▒. 파손된 데이터 때문에 치지직거리는 AI의 음성이 작별인사를 했다. 너무나 긴 시간이었어, 네가 없는 곳은. 상호가 고개를 돌려 검은 네모 위에 달린 웹캠과 눈을 맞췄다. 기나긴 이름 끝에 또다시 상호만 아는 이름이 더해졌다.



그리고 또 다음이었다. 별들은 순식간에 상호를 다시 길 위로 데려왔다. 다음은 또 어디일까. 이 여정의 끝이 있기는 할까. 소망의 길을 걷는 여행자는 가장 오래된 기억을 떠올렸다. 평범한 어린아이였던 시절의 자신이 희미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열여섯의 자신을 떠올리며 걷는 길은 어느새 갈림길 없이 곧은 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생각에 빠진 탓에 보지 못한 걸까? 상호가 뒤를 돌아봤다. 한 번도 걸어온 길을 뒤돌아본 적은 없었다. 당연히 그래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상호에겐 인간을 벗어난 뒤로 뇌리에 새겨진 규칙이 몇 가지 있었다. 작은 길을 따라 도착한 세계의 소원을 들어줄 것, 직접 생명을 해치지 말 것, 길을 되돌아가지 말 것. 1번과 2번은 상충할 경우 소원이 먼저라는 것까지 합쳐 네 가지였다.


처음으로 뒤돌아본 길은 적막했다. 반짝임이 사라져 어두운 우주 속으로 부서져 내리는 기억들이 보였다. 애초에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겠구나. 감정의 낮은 파랑이 지나고, 상호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뒤와 달리 눈이 아리게 아픈 빛들이 여전히 상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다란 운명, 혹은 소원이 부르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상호가 굴러다니는 작은 기억들을 발로 찼다.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기억이 길 아래로 떨어져 또 빛을 잃었다. 이렇게 커다란 소원이라면 들어주기 힘들지도 몰랐다. 작은 길을 따라 만난 소원들은 어렵지 않은 것들이었다. 무언가를 끝내는 것은 상호의 주특기였으니까.



길 끝에서 마주한 것은 푸른 바다였다. 수면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물 위라, 곤란한 일이었다. 수면이 얕으면 좋을 텐데. 여전히 수영할 수 있긴 하지만 물에 젖는 건 사양이었다. 소지품이 없어 돈을 구하기도 어렵고, 신분이 없어 무언가를 구매하거나 하는 것도 대체로 곤란했다. 하지만 나아가야만 했다. 길이 가리키는 곳이 이곳이었으므로.

언제나 그랬듯 상호가 손을 뻗었다. 무언가 소란스러운 외침이 희미하게 들렸다. 인간이 있는 건가? 자연스럽게 상황을 분석한 상호가 발을 내디뎠다. 찰랑, 물에 닿은 듯 수면이 파동을 일으켰다. 물속에서 건져 올려지는 것과 같은 감각이 전신을 감싸고 차가운 공기가 폐 속에 밀어 넣어졌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놀란 얼굴의 남자였다. 까마득한 과거에 두고 왔을 법한 얼굴이 상호를 맞이했다.


“병찬 햄?”


그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는 모습이 낯설었다. 제 손을 마주 잡는 거친 장갑에 시린 냉기가 손을 아리게 했다. 통로가 닫히고 있었다. 제가 아는 박병찬은 스물 한 살의 고등학교 5학년이었다.

낡고 부스러져 지친 얼굴의 영웅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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