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등장하는 배경 및 인물은 실제와 무관함을 명시합니다.)



"지민아, 이 어미가 다시 너를 부를 때까지 이 곳에서 꼼짝말고 기다려야 한다. 그때까지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절대, 절대 이 곳에서 나오면 아니된다. 알겠느냐."

"...어, 어머니는요?"

"...이 어미의 말을 꼭 명심해야 한다."



툇마루 밑의 어둡고 좁은 공간으로 다급하게 지민의 작은 몸을 밀어 넣으며 어미는 지민에게 몇 번이나 신신당부 했다. 절대 이 곳에서 나오지 말라고. 영문도 모른 채 흙먼지가 가득한 곳에 갇힌 지민이 돌아서려는 어미의 치마 끝자락을 움켜 쥐었다. 어머니, 가지마세요. 본능적인 두려움에 지민이 눈물이 가득 맺힌 눈동자로 어미를 애처롭게 올려다 보았지만 어미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을 뿐 다시 지민을 향해 뒤돌아서지 않았다. 돌아선 어미의 뒷모습이 흔들려 보였다. 그것이 지민 자신의 눈물 때문인지, 어미의 눈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지민아, 내 너 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것이다."



어미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났다. 어미는 지민에게 마지막 말 한마디를 남긴 채 그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네 이놈! 여기가 어디라고!! 썩 물러서지 못할까!!"

"....죄인 좌의정 박현식은 죽음으로 그 죄를 갚도록 하여라."

"무례하다, 이 놈!! 누구의 사주를 받은 것이냐!"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지민의 아비를 향해 날카로운 겸을 겨눴다.



"...황제폐하의 명이시다."

"....그 무슨."

"박가의 일족은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여라. 



"네, 네 이놈!!! 헉!!!"

"대감!!"



남자의 말을 끝으로 참담한 살육이 벌어졌다. 지민이 뛰어 놀던 넓은 마당은 순식간에 피 웅덩이로 변했다. 코를 찌르는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고 비명과 울음소리로 가득한 집 안은 그야말로 생 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지민은 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시종들이 날카로운 칼날에 가차없이 베어져 나가는 것을 어두운 공간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지켜 보았다. 자신의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필사적으로 소리를 참으며. 



"...도...련..커흑..님.."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지민의 눈 앞으로 무언가가 쓰러졌다. 경악과 공포로 가득 찬 지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지민 자신을 돌보던 시종의 눈이 지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차디찬 흙 바닥을 구르며 피 눈물이 맺힌 채 자신을 부르는 시종의 마지막 모습을, 왜 자신 혼자만 그 곳에 숨어 있는 것이냐고 원망하는 듯한 그 모습을.



'...도련...님...'

'..아, 아니야.'

"...련...님..."

"....아, 아...."

"도련님!!"

"...헉!!"



지민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깨어났다. 또 그 꿈 이었다. 매일 밤 자신을 괴롭히는 잊을 수 없는. 아니 잊지말라는 듯 자신을 깨우치는 그 날의 꿈. 지민은 매일을 그날의 악몽에서 헤매고 있었다. 지민이 누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식은 땀으로 가득한 이마를 닦아냈다. 옆을 돌아보자 지민을 깨운 시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그 꿈을 꾸셨습니까? 안색이..."

"...나는 괜찮다."

"몸에 좋은 탕약을 올..."

"...괜찮다하지 않았느냐."

"....예. 송구합니다. 도련님."

"....아니다, 네가 무얼."

"...저..도련님. 대감마님께서 찾으십니다."

"....내 채비를 하고 건너갈 테니 너는 그만 나가 있거라."

"예, 도련님."



시종이 나가는 것을 확인한 지민이 자신이 입고 있던 의복으로 손을 가져다 댔다. 꿈의 여운인지 손 끝이 떨려왔다. 지민이 지긋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그들의 죽음의 무게 만큼, 지민 자신 또한 생 지옥 속에 살고 있었다. 



.



"....숙부님."

"앉거라."



장지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좌 해 있는 숙부의 모습이 보였다. 조용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온 지민이 그 앞에 무릎을 꿇어 앉았다. 숙부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찻잔을 제자리에 올려둔 숙부가 고개를 들어 지민과 시선을 마주했다. 



"지민아."

"...예. 숙부님."

"지민이 네가 이 곳에 온지 스무해가 되었던가."

"...그러합니다."

"....그래.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나. 참으로 느리고도...빠른 세월이었지."



숙부가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생각에 잠긴 얼굴로 쥐고 있던 찻잔의 모서리를 매만졌다. 지민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저 숙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민이 너에게도 참으로 힘든 세월이었음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숙부인 내가 너를 더 보듬어 주었어야 했거늘...그러지 못하여 내 참으로 미안하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그 날, 숙부님께서 저를 거둬 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미 세상에 없는 목숨일 것입니다."



아비규환이었던 그 곳에서 울부짖는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민 것은 자신의 숙부였다. 



"...네 부모의 죽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지민아."

"....제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날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 또한 자신의 숙부였다.



"...드디어 때가 된 것 같구나."

"....."

"곧 황제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궁에서 성대하게 연회가 열릴 것이다."

"....황제의...탄신일..."

"그래. 그 때라면 의심없이 궁에 스며들기 좋겠지."

"....."

"보름날에 궁중 연회에 설 무희들이 입궁 할 것이다. 그때 그들과 함께 입궁 하거라."



숙부의 말에 지민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부모를 잔혹하게 도륙한 선 황제와, 그의 적장자인 황제. 원수의 자식. 자신이 죽여야만 하는 존재. 



"...혹, 망설여지느냐."

"....."



숙부의 질문에 지민이 고개를 들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지민의 눈동자가 숙부의 주름이 깊은 얼굴을 응시했다. 지민의 붉은 입술이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나즈막이 말을 뱉어냈다.



"....할 것입니다."

"....."



스무 해의 세월 동안 자신을 혹사하며 매일 같이 검을 쥐었던 이유. 그 날 이후 자신은 한 시도 쉼을 얻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매일을 그려왔다. 자신의 손으로 부모의 원수를 갚는 그 날을. 그리고 그 원수를 갚고 자신을 옥죄는 이 삶의 무게를 벗고 온전히 해방되는 그 날을. 

그 것만이 자신이 살아가는, 이 의미없는 생을 지속하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설령, 제가 죽는다 하여도."



지민이 자신의 마른 주먹을 꽉 움켜 쥐었다. 



_황제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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