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차

김포공항-제주공항

8천보


혹시나 분실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아침 일찍부터 출발하긴 어려웠다. 최대한 늦은 비행기를 예매했다. 낮까지 분실물 연락을 기다리다가 느지막이 집을 나섰다. 물론 배낭을 찾을 수는 없었다.


김포공항에 가기 위해 전철에 몸을 싣는데, 벌써부터 피곤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별 탈 없이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수하물을 부치고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을 찾아 나섰다. 기운이 없었기에 속이 편한 된장찌개를 택했다. 차돌이 들어간 된장찌개는 따뜻했고 맛있었다. 덕분에 조금 체력이 돌아왔다. 그래. 이제 막 시작인데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었다. 비행기를 타는 것은 간만이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1년에 한두 번씩은 꼭 해외여행을 갔었는데, 요새는 통 공항 올 일도 없던 차였다. 비록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공항은 여러 좋은 추억을 꺼내오는 곳이었다.



1시간 만에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제주공항하면 모두가 떠올리는 야자수가 날 반겼다. 숙소는 애월 쪽에 잡았다. 애월면 내에서도 많이 외진 곳이었다. 왜 이렇게 외진 곳에 숙소를 잡았냐면…… 이유는 딱히 없다. 그제 밤에 충동적으로 예약한 곳이기에, 위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않았다. 게스트 하우스치고는 시설이 깔끔했던 것이 눈을 끌었던 것 같다.


그런고로 숙소까지 가려면 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했다. 문제는 내가 제주공항에 도착한 시기가 꽤 늦은 밤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운전면허가 없기에 당연히 렌트카도 빌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는 이미 애월로 가는 버스 여럿이 운행을 마쳤을 시간이었다. 인터넷으로 찾아본 버스시간표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나마 끊기지 않은 버스를 필사적으로 찾았고, 어떻게든 숙소 근처까지 가는 루트를 찾아낼 수 있었다. 숙소 ‘근처’까지라, 상당히 걸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겨우 나는 숙소 부근에서 내릴 수 있었다. 이제 여기서 몇십 분을 더 걸어가야 했다. 그곳은 평범한 촌골 마을이었다. 게스트하우스가 없었다면 관광객은커녕 외부인들이 들락거리지도 않았을 법한 장소였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어서 코앞도 보이지 않는 구간이 더 많았다. 다행히도 나는 또래 여성들에 비하면 밤길을 무서워하지 않는 편이었다. 중학생 때 강원도 어느 산골에 있는 기숙학교를 다녔던 탓이다. 거긴 가로등이 아예 없었다……. 여하튼 그런 연유로 나는 겁 없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잘 안보이겠지만 일단 겨울의 대삼각형을 찍으려 해본 것이다


고요한 밤에 그저 캐리어 끄는 소리만 울렸다. 캐리어 소리에 놀란 개들이 내가 지나갈 때마다 마구 짖어댔다. 혹시 묶이지 않은 개가 있을까 약간 긴장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마을 곳곳에는 검은색 화강암으로 쌓은 담장들이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제야 여기가 제주도가 맞구나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드니 별이 잘 보였다. 스텔라리움 어플리케이션을 켜서 별자리를 확인해보았다. 겨울의 대삼각형이 머리 바로 위에 떠 있었다. 수도권에 있을 때에는 네온사인에 가려져 볼 수도 없던 밤하늘이었다. 그렇게 별을 벗삼아 걷다보니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게스트하우스는 사진으로 본 것보다 더욱 만족스러웠다. 시설은 매우 깨끗했고, 12인실이었으나 캡슐 호텔처럼 커튼으로 개인 공간을 격리할 수 있었다. 짐을 풀고 바로 야식거리를 꺼냈다. 이동을 오래 한 터라 배가 고팠다. 공용 공간에 앉아 오는 길 편의점에서 산 레몬 맥주와 감자 과자를 뜯었다. 나는 알코올에 약한 편이라 2도짜리 레몬 맥주는 딱 취향에 맞았다. 엄마에게서 카톡이 왔다. 잘 도착했다는 의미에서 맥주 마시는 사진을 보냈다. 술 자주 마시지 말라는 잔소리를 듣고 말았다.





2일차

수월봉

최저온도 8도 / 최고 온도 17도 / 맑음

1만 6천보

 

조식 시간은 8시 반이었다. 그러나 잠자리가 바뀐 탓인가 7시 반에 눈을 뜨고 말았다. 나는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조식 시간에 맞춰 일어났다. 조식은 기대 이상으로 알찼다. 신이 난 나머지 과식을 했다. 나는 위가 약한 편이라 아침을 많이 먹지 않는 편인데, 조절에 실패한 것이다. 덕분에 오전 동안에는 약간의 소화불량에 시달려야 했다.



본격적으로 여행할 수 있는 첫날이었다. 하지만 어디에 갈지는 정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자전거를 타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그래서 게스트 하우스의 사장님에게 근처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물었다. 사장님이 추천해준 곳은 수월봉이었다.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오름으로, ‘화산쇄설층’이라는 특이한 지형이 있다고 했다. 나는 냉큼 추천을 받아들여 수월봉을 향해 출발했다.


제주도는 아무래도 자가용이 없으면 이동하기 불편한 곳이다. 버스가 많은 것도 아니고, 자주 오지도 않았다. 그래서 많이 걸어야 했고 많이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마음은 느긋했다. 수도권에 있을 적에는 대중교통 대기 시간이 10분을 넘어가면 짜증을 냈다. 지금은 20분을 기다려도 별로 기다린 기분이 들지 않았다. 도시에서는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난 버스를 1시간가량 타고 수월봉에 도착했다. 우선 점심부터 먹어야 했다. 버스정류장 앞에 있던 고깃집에 들어가 점심 특선 메뉴인 육회비빔밥을 시켰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꽤 맛있었다.


가는 길에 유채꽃이 만발했더라


식사 후 자전거를 대여하러 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도, 여기서 대여해주는 자전거는 스쿠터에 가까운 것이었다. 가게 이름도 전기 자전거 대여소이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억울했다. 이럴 거면 스쿠터 대여소로 이름 짓던가! 하지만 여기까지 온 거 스쿠터라도 타지 않으면 아쉬울 것 같아 일단 스쿠터를 대여했다. 놀이공원에서 몰아본 범퍼카 외의 전동차를 몰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런 탈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계속 비틀댔고, 대여소 주인 분의 불안하고 애처로운 눈을 보고는 말했다. 환불해 주실 수 있나요…….


잔뜩 긴장하여 스쿠터를 연습한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해안가로 가서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했다. 멍하니 바다를 보며 파도 소리만 들었을 뿐인데 수십 분이 순식간에 흘렀다. 그러던 때에 누군가가 내 등을 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있던 것은 커다란 갈색 개였다. 상상도 못한 손님에 깜짝 놀란 나와는 달리 그 친구는 자연스럽게 내 등에 기대 자리를 잡았다. 바닷바람으로 식은 몸이 개의 체온으로 덥혀졌다. 그 자연스러운 모습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내가 키우는 개냐고 물어봤다. 목줄이 없는 것을 보니 들개인 듯했지만, 태도를 보아 사람 손을 탄 것은 분명했다. 유기견 신고라도 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내가 무언가 행동을 취하기 전에 개는 다시 떠났다. 간식이라도 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미안했다.


갈색 개가 떠난 후, 나도 일어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올레길 12코스 수월봉 지오트레일이었다. 원래는 스쿠터로 가려던 길이었지만 느긋하게 풍경 감상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걷는 것도 괜찮았다. 그 화산쇄설층이라는 것 때문에 본 적도 없는 풍경을 바다와 함께 구경할 수 있어 재밌었다. 굴러다니는 돌을 주워 돌탑을 세우기도 했다. 그렇게 그 근처를 한 시간 이상 걷다가 되돌아왔다. 그리고 눈에 띄는 카페에 들어갔다. 주문한 말차라떼는 시원하고 달달했다.



카페에서 여행일기를 쓰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에 가까워졌다. 나는 버스를 타고 한림으로 갔다. 한림 읍내에서 숙소로 가는 버스를 한 번 더 타야 했다. 버스를 갈아타기 전 저녁 먹을 곳을 찾아보았다. 읍내는 어느 정도 번화한 곳이었기에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갈 수 있었다. 부드러운 국물이 땡겼던 나는 베트남 음식점을 찾아갔다. 그러나 주문한 쌀국수는 거의 본토 스타일이라 매콤했고 향신료가 셌다. 고수 빼달라고 할 걸 그랬다…….


아무거나 끄적이는 잡덕 글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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