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럼 학교 다니다가 군대 왔어?”

“예 그렇습니다”

 

“네가 지금 몇 살이지? 우리 그때....”

“제가 네 살 어립니다. 선배님, 아니 군의관님이 네 살 위셨습니다”

 

“야 우리끼리 있는데 무슨 군의관님이야. 딱딱하게 그러지마”

 

태형은 석진에게 자신이 지나치게 몰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호칭을 일부러 ‘군의관님’이라고 썼다. 그리고 사실 이곳에서는 그렇게 불러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석진은 그런 호칭이 어색하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그럼 내가 선배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그러고 보면 석진을 제대로 호칭을 붙여 불러 본 적도 별로 없는 것 같다.

 

 

“일단 상처 좀 보자. 아프거나 그러지는 않고?”

“괜찮습니다”

 

“어디 보자.... 응. 잘 낫고 있네. 약은 조금 더 먹자. 물 안 닿게 조심하고 있지?”

“네 그렇습니다”

 

 

석진이 태형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쥔다. 하지만 태형은 절대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세월이 거의 십 년 가까이 흘러갔는데도,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선명히 되살아 날 수가 있는가. 그동안 태형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분명 다른 사람들과 연애 다운 연애를 했고 그들 또한 석진 못지 않게 사랑했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석진에 대한 감정을 완전히 지워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발견한 것이 당혹스럽다.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감정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나는 지금 왜 이럴까? 혼란스러운 태형의 눈동자는 석진을 바로 보지 못한다.

 

 

“군생활은 할 만 해? 안 힘들어?”

“음.... 할 만합니다. 괜찮습니다”

 

“넌 잘 했을 것 같다”

“.................”

 

“행보관님 되게 사람 좋아 보이더라. 너 되게 아끼시는 것 같던데”

“네. 좋은 분입니다”

 

“그래. 넌 착하고 싹싹해서 어딜 가든 사랑 받을 거야”

 

 

대체 형은 내가 착하고 싹싹한 줄을 어떻게 알죠? 우리가 서로의 성격을 알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나요? 태형은 석진의 말에 다시금 혼란에 휩싸인다. 태형은 사실 석진의 성격에 대해 잘 모른다. 잘 안다고 하면 그것이 거짓말이다.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 태형이 석진에게 마음을 품은 건 그 외모의 영향이 100퍼센트에 가깝다.

그러나 석진은 태형이 착하고 싹싹하다는 점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면 형은 나에 대해 조금은, 내가 형에 대해 아는 것보다는 더 많이 알고 있다는 뜻인가? 알 수가 없다. 머리가 아프고 숨이 찬다.

그러고 보면 지금 태형에게 가장 중요한 건 석진이 그날의 일을 기억하느냐다. 태형에겐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날이겠지만 석진에겐 아닐 수도 있다. 태형은 자신 외에도 석진을 남몰래 짝사랑하는 사람들이 숱하게 많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후에 안 일이지만, 석진에게 고백을 했다가 자신처럼 거절당한 사람들이 자신의 주변에도 꽤 있었다.

그만큼 석진에게는 흔한 일이니 잊었을까. 나는 아직 그때 그 감정이 그대로인 것 같은데. 태형의 아련해지는 눈빛을 눈치 챈 것인지, 아니면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석진은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물론 태형에게만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제안이다.

 

 

“심심하면 놀러 와. 앞으로 종종 보자”

“.............예?”

 

“응? 뭐가?”

“아... 아닙니다...”

 

“내 말 못 들었어?”

“아, 아닙니다. 들었습니다”

 

“약 처방해 줄 테니까 기다렸다가 갖구 가”

“예.... 감사합니다”

 

 

앞으로 종종 보자 - 학창 시절에는 단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혜택을 여기에서 뒤늦게 누리게 되다니. 사실 별 뜻 없이 의례적으로 건넨 인사였을 가능성이 크지만, 태형은 저도 모르게 그 인사말에 부질없는 희망을 걸게 된다. 여전히 그에 대한 감정을 품은 죄다.

 

 


 

 

 

 

 

 


 

[놀러 와. 자주 보자]

 

‘종종 보자’라는 말이 ‘자주 보자’로 어느덧 바뀌어 있는 왜곡의 기적. 태형은 이제 석진이 자신에게 처음 했던 말이 무엇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오로지 ‘자주 보자’라는 말로 뿌리 깊게 남아 태형의 의식을 쥐고 흔든다.

 

그래, 자주 보고 싶어.

 

시간이 지날수록 그 왜곡된 기억은 굳어져 급기야 태형에게 행동으로 옮기도록 명한다.

 

 

“으아아.. 행보관님.....”

“와 이라노. 와 이라노”

 

“저 배가 너무 아픕니다...”

“배가 아프다꼬? 뭐고. 화장실을 가라 그라면”

 

“아 그 배 아닙니다... 하아....”

“그런 배가 아니라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배를 틀어쥐고 나타난 태형. 행보관에게 쓰러지듯 들러 붙어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영문을 모르는 행보관은 배가 아프다며 쓰러질 듯한 제스처를 보이는 태형을 보고 당황한다. 태형은 결국 무릎까지 털썩 꿇으며 자신의 복통이 심상치 않은 것임을 온몸으로 어필한다.

 

 

“와 이라노? 니 맹장이가?”

“아..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니 뭐 잘못 뭇나?”

“잘 모르겠습니다...”

 

“야가 야가, 식은땀 흘린다이”

“흐으....”

 

 

사실은 식은땀이 아니다. 일부러 땀이 조금 흐를 만큼 몸을 움직여 놓았다. 지금 태형은 전혀 배가 아프지 않다. 물론 완전히 말끔하다는 것은 아니고 조금 속이 불편하기는 하다. 그러나 이렇게 죽을 상을 할 만큼 배가 아프지는 않다는 뜻이다. 태형은 자신의 연기력에 새삼 감탄한다. 이야, 내가 이런 짓도 할 줄 아는구나. 태형은 군생활 내내 그 흔한 꾀병 하나 부린 적 없고, 감기 몸살도 두어 번 앓고 지나간 게 전부다. 한 번 쯤은 아프다고 나 몰라라 드러누울 법도 한데 그런 적이 없었다. 그러니 태형은 자신의 연기가 행보관에게 제법 호소력이 있을 것임을 예상했다.

 

그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한 것 같다.

 

 

“그라면 의무대를 가 봐라! 여서 이라지 말고. 가자 얼른. 일어나 봐라. 일어날 수 있겠나?”

“예.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 팔 단디 잡아라”

“예.....”

 

표정 관리를 잘 하자. 김태형 너는 할 수 있다. 행보관은 그리 애쓰지 않아도 태형의 연기에 홀려 그를 의무대에 보내기로 마음 먹은 것 같다. 속으로는 흐뭇하게 웃지만 겉으로 태형은 얼굴을 몹시 찌푸리며 아픈 연기에 심취한다.

 

 

“임마 이거 한 번도 아프다 소리 안 하드만 와 이라노... 참내”

 

 

형. 기다려요. 내가 지금 보러 갈게요. 태형이 이렇게 법석을 떨면서 아픈 체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석진을 만나러 가기 위해서다. 석진을 다시 만난다고 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리라는 생각은 없다. 다만 그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다. 석진은 분명 자주 오라고 했다. 그가 조금 다른 뉘앙스의 말을 했었다 하더라도 지금 태형에겐 중요하지 않다.

 

 

 

 

 

 

 

 

 

“임마 이거 와 이랍니꺼?”

“잠시만요 행보관님”

 

“예...”

 

허리를 시원히 펴지 못한 채로 배를 틀어쥐고 나타난 태형. 영문을 모르는 석진 역시 놀란 표정이다. 태형의 뒤에 선 행보관은 걱정이 되는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린다.

 

“태형아. 여기 누워 봐”

“옙....”

 

 

석진은 우선 태형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그를 병상에 눕힌다. 태형은 석진의 지시대로 가만히 병상에 누워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으으 - 행보관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간혹 고통스러운 신음도 흘려 준다.

 

“내가 배 눌러 볼 테니까 아픈 곳 얘기해”

“예....”

 

“여기 어때?”

“거긴 괜찮습니다”

 

“흠... 여기는?”

“아아아”

 

“아 여기가 아프구나...”

 

물론 거짓말이다. 새빨간 거짓말. 거짓말을 하는 일이 이렇게 즐거운 것이었다니. 태형은 그동안 한 번도 꾀병을 부리지 않았던 자신의 고지식함을 원망한다. 행보관은 석진의 뒤에 서서 그 어깨 너머로 내다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너 뭐 잘못 먹은 거 있어?”

“어제 뽀글이 먹고 잤는데....”

 

“흠.....그게 탈이 난 것 같은데”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태형은 정말로 어제 밤늦게 뽀글이를 먹고 잤다. 그래서 속이 불편한 것까지는 거짓이 아니다.

 

“행보관님. 아무래도 어제 먹은 게 문제가 있는가 봅니다”

“어이구, 하여튼 밤늦게 뭐 먹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일단 주사 한 대 맞히고 약 처방하겠습니다”

“예 군의관님”

 

그런데 상황이 예기치 않은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다. 태형은 처음 꾀병을 부릴 때에 석진을 만나러 와서 조금이라도 이곳에 머물다가 갈 작정이었다. 물론 행보관이 따라 온 것까지도 태형의 계산에는 없는 일이었지만 막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태형은 이제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자신의 꾀병을 정말 진지하게 받아 들이고 있는 석진에게 협조를 구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말을 할까. 이러면 너무 속이 빤히 보이려나 -

 

그러나 어차피 석진은 기억하고 있다. 자신이 그에게 서투른 고백을 했다가 거절당했던 일을 말이다. 새삼 더 부끄러울 일도 없다. 그때 일만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군의관님”

“어”

 

태형은 행보관이 듣지 못하게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부른다. 주사를 준비하러 가던 석진이 다시 뒤돌아서 태형을 내려다 본다.

 

“잠시만... 가까이....”

“응. 왜?”

 

우선은 행보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석진의 귀를 빌려야 할 것 같다. 석진의 얼굴이 가까이로 쏟아지자 예기치 못하게 숨이 덜컥 막힌다. 아, 너무 가까워. 안 돼 - 그러나 태형이 미처 막기도 전에 석진은 이미 자신의 얼굴을 태형의 가까이에 대고 있다. 태형은 순간 할 말을 잊고 멍해졌다. 몇 초의 정적은 결코 그가 계획한 것이 아니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석진의 얼굴은 눈이 멀 정도로 황홀하다.

 

 

“저... 잠시만 누웠다 가면.. 안 됩니까?”

“어?”

 

“잠시만...”

“이 녀석 이거...”

 

“..................”

“알았어”

 

 

석진은 다행히 태형의 전하려는 뜻을 이해했다. 태형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 역시 이런 식으로 자신을 찾아 와 조금 숨을 돌리고 가려는 일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석진은 태형의 의도를 눈치 채고 씩 웃는다.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지자 태형의 눈은 더더욱 환하게 부신다.

 

“행보관님. 얘 좀 눕혀 놓았다가 나중에 상태 보고 보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그럼 그래야지요 뭐...”

 

“제가 좀 더 지켜 보다가 괜찮아지면 돌려 보내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주십시오. 이거 괜히 실례를”

 

“아닙니다. 나중에 보낼 때는 혼자 보내면 됩니까?”

“뭐. 말년 병장 녀석인데 탈영이야 하겠습니까. 혼자 보내시면 됩니다. 저는 그럼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십시오”

 

다행히 행보관은 군의관인 석진의 말에 별다른 의심을 품지 않는다. 만일 태형이 이런 식으로 말을 했더라면 당연히 의심을 했겠지만, 전문가가 하는 말이니 전혀 수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

 

 

“태형아. 니 그라면 나중에 니 혼자 알아서 오이라이. 내 데리러 안 온다. 니 어차피 길 안다 아이가”

“예 행보관님....”

 

“정 아파서 못 걸어 오겠으면 전화해라. 데리러 올 테니까”

“옙...”

 

“그라면 저 먼저 가 보겠습니더. 고생하이소”

 

행보관은 결국 먼저 의무실을 나간다. 태형은 행보관이 의무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단단히 확인하고 나서야 길게 한숨을 내쉰다. 석진은 키득거리면서 다시 태형의 곁으로 간다. 그리고 태형의 이마에 가벼운 꿀밤을 먹인다.

 

 

“이 자식 이거. 말년이라고 꼼수 부리네?”

“히히...”

 

“너 배 안 아프지 하나도”

“아 아닙니다! 진짜 속이 좀 안 좋긴 했습니다”

 

“근데 못 걸을 정돈 아니잖아. 안 그래?”

“예 그거야 뭐....”

 

“너 같은 애들이 한 둘인 줄 아냐. 나도 척이면 척이지”

“감사합니다”

 

“괜찮아. 어차피 나도 심심했는데 뭐. 몇 시까지 가면 되는데? 너무 늦게 돌아가면 안 될 거 아냐”

“뭐... 한 두어 시간 있다가 가면... 안 되겠습니까?”

 

“아이쿠. 두어 시간이나. 그래. 알겠다. 그럼 거기 가만히 누워서 한숨 자든가”

 

사실 석진에게 뚜렷이 말을 걸 만한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태형은 그저 이렇게 편안히 누운 채로 석진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다.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석진이 졸업하던 날, 석진의 고등학교 앞에서 서성거린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수많은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석진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대신 ‘00의대 합격 1명’이라는, 석진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한 현수막 아래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지금도 무엇을 어쩌자는 것은 아니다. 그저 부끄럽고 아쉽다고만 여겼던 과거의 추억에 잠시 그 주인공과 함께 매몰되어 있는 것도, 괜찮은 일일 것 같아서다.

 

 

 

 

 

 

 

 

 

 

“행보관님.....”

“아잇. 또 왜!”

 

“저 머리가 너무 아픕니다....”

“이번엔 또 머리가?!”

 

“아 행보관님 진짭니다... 아 머리야.... 하....”

“임마 이거 요새 와 이래 빌빌거리노 어?”


 

복통을 호소하며 의무대를 다녀 온 것이 꼭 닷새 전. 이번에는 또 다른 핑계가 필요하다. 이번에는 두통이다. 태형은 사실 자신이 이만큼이나 계획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깨달았다. 처음에는 복통, 다음에는 두통, 그 다음에는 목이 욱신거리고 몸이 으슬으슬 춥다는 것. 그렇게 몇 가지의 핑계를 미리 더 짜놓았으니 자신의 준비성에 새삼 스스로 탄복하고 있다.

지난번 의무대에 갔을 때에는 석진과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동안 서로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며 지냈는지가 주된 화제였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석진의 삶을 그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것은 태형에겐 황홀한 축복이었다. 그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태형은 자신이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지고 뭉클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석진에게 가려고 한다.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난 닷새 동안 그리움은 정말로 똘똘 뭉쳐 응어리가 된 것 같다. 그러니 없던 두통도 생길 지경이다.

 

 

“아나. 타이레놀 무라”

“아까 먹었습니다... 근데 안 가라앉습니다...”

 

“그럼 하나 더 무라”

“지금 벌써 두 개 째입니다...”

 

“아니 니는 타이레놀이 어데서 그래 많이 났노? 니 약 꿍쳐놨나? 이 자슥이?”

“아 그냥 급할 때 먹으려고 두 알 정도 갖고 있었습니다... 흑... 그런 것까지 뭐라고 하십니까”

 

“허허 이 놈 참”

 

 

하지만 이번은 지난번과 달리 행보관의 태도가 호락호락하지 않다. 선뜻 태형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것도 같다.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있으나 조금의 의심도 품고 있는 게 확실하다. 행보관은 대뜸 손을 들어 태형의 이마를 짚는다. 열감이 느껴지지 않으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태형은 순간 엄청난 긴장으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한다. 남들은 잘만 하는 이 사소한 거짓말도 태형에게는 벅찬 일이다.

 

 

“열은 없는데....”

“....................”

 

“의무대 빨리 가서 군의관님께 진료만 받고 오겠습니다...”

“니 솔직히 말해라. 이거 꾀병이제”

 

“아 행보관님! 제가 꾀병 부리는 거 보셨습니까?”

“................”

 

“저 한 번도 아프단 소리 한 적 없지 않습니까 지금까지....흐으....”

“하긴. 그건 글타마는...”

 

 

태형은 이런 경우를 대비해 큰소리를 칠 것까지도 다 계획을 해 놓았다. 태형은 그의 말대로 단 한 번도 행보관이 보는 앞에서 아프다거나 약한 소릴 한 적이 없다. 자신이 그렇게 무식하리만치 우직하게 살아 온 것이 오늘을 위한 밑밥이었던가 생각하니 새삼 감격스럽다.

결국 행보관은 오늘도 태형의 꾀병에 쉽게 굴복하고 만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신뢰를 쌓아야지 - 태형은 흐뭇하게 속으로 웃지만 얼굴은 잔뜩 찌푸리고 있다.

 

“알았다 임마... 갔다 온나 그라면”

“...........감사합니다...”

 

 

만일 다른 병사가 통증을 호소하며 의무대에 가야겠다고 했다면, 행보관은 따라 나서겠다고 먼저 일어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태형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면죄부가 하나 있다. 말년 병장이라는 사실은 태형에게 무척 유리하게 작용한다. 굳이 일일이 따라다니지 않아도 마음 놓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야. 갔다가 빨리 온나이”

“예 행보관님...”

 

 

꺄호 - 태형은 만일 행보관이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더라면, 환호성을 외치며 의무대로 내달려 갔을지도 모른다.

 

 

 

 

 

 

 

 

 

 

“야. 너 너무 자주 오는 거 아니야?”

“아 진짜 머리가 아팠단 말입니다”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피....”

 

“너 이렇게 멀쩡한데 두통은 무슨 두통?”

“한 번만 눈 감아 주십쇼”

 

“참내....”

“저 여기 좀 누워도 됩니까?”

 

“........... 네 침대냐 거기가”

“아, 편안하니 좋네”

 

 

며칠 만에 찾아 온 태형을, 석진은 역시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묻는다. 태형은 그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능청스럽게 웃으며 먼저 병상으로 가 눕는다. 석진은 의자에 앉아 태형 쪽으로 몸을 돌리고 쳐다보며 웃는다.

 

 

“야. 의무대가 말년 병장 안방이냐”

“군생활 빡세게 했습니다. 이 정도 선물은 제가 저한테 줄 가치가 있습니다”

 

“참.. 할 말이 없다”

 

 

사실은 형 보러 오는 거, 형도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태형은 석진이 자신의 속내를 모를 리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모른 체하는 것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무엇을 어쩌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간 일이다. 물론 자신은 그때의 감정을 여전히 붙들고 놓지 못한다. 붙들고 놓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저도 모르게 계속 쥐고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석진이 좋아서 꾀병을 부리는 것만은 사실이다.

오늘은 또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사실 태형에게는 정말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러나 지난번 대화에서는 감히 묻지 못했다. 그것은 그날 밤 태형이 골목에서 보았던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때 석진이 키스를 나누던 사람과 아직까지 교제를 하고 있으리라는 추측은 신빙성이 낮다.

 

그러나 궁금하다. 그 사람이 아직도 석진의 곁에 남아 있는 것이든 아니든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는 줄을 알면서도.

 

 

“그나저나 넌 좋겠다. 전역이라서 곧”

“음... 뭐 아직은 감이 잘 안 옵니다”

 

“그래? 아직 실감이 안 나?”

“뭐.. 말년 휴가는 나가야지 실감이 날 것도 같고”

 

“너 그 동네에서 계속 살고 있다고 했지?”

“네”

 

“그렇구나.... 난 그 동네 안 가 본 지 꽤 된 것 같은데”

“이사... 가셨습니까?”

 

“응. 나는 어차피 학교 때문에 늘 밖에 나와 있었고. 엄마랑 아빠도 그 동네에서 이사 나오신 지 꽤 됐어”

“아...”

 

“그래도 그 동네 살 때가 좋았었는데”

“................”

 

무슨 뜻을 담은 말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 사람과의 추억이 아름다웠다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과 너무도 행복한 사랑을 나누었다는 것일까. 태형은 석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그런 반갑지 않은 의미를 덧붙인다.

 

“근데 넌 되게 그대로 잘 컸다”

“예?”

 

“너 어릴 때 모습 그대로라고”

“기억... 나십니까?”

 

“나지. 왜 안 나. 너 유명했었어. 잘생긴 애로”

“예?!”

 

“넌 몰랐냐?”

“저는 전혀....”

 

“얘 웃기네. 넌 그런 얼굴을 갖고 살면서 안 유명할 거라고 생각했냐?”

 

태형은 자신의 유명세보다는 석진의 유명세에 훨씬 더 익숙한 사람이다. 석진은 그 일대의 모든 학교에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김석진’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공부 잘 하고 잘생긴’이라는 수식어만 대면 누구나 아는 체를 했다. 그런 석진과 같은 학교 출신이라는 것이, 그래도 몇 번은 마주친 적이 있다는 것이 어린 태형에게는 얼마나 큰 자부심을 주었는지 모른다. 그것이 좋아하는 감정으로 번진 것이 문제이지만. 그래서 늘 태형은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기도 했다. 나는 역시 저 형의 곁에 설 수가 없는 거구나. 나는 저 형의 곁에 서기에는 너무 모자라고 초라한 사람이구나.

 

사춘기 태형이 가장 슬펐던 이유 중 하나다.

 

“너 근데 나 진짜 좋아했었던 거 맞지?”

“예?!”

 

예고 없이 훅 가슴을 파고드는 석진의 질문. 급습을 당한 태형은 얼굴이 새빨개져 어쩔 줄을 모르고 눈동자를 굴린다. 반면 석진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차분한 표정이다.

 

“뭘 그렇게 놀라? 내가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했냐?”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내가 그럼 널 어떻게 알아 봤겠어. 그걸 기억하고 있으니 알아 봤지”

“...................”

 

당연히 석진이 기억은 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절대로 먼저 말은 꺼내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었었다. 태형의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석진은 지나치게 담담한 어투와 표정으로 태형에게 그날의 일을 되새기게 한다. 일을 저지른 주범인 태형은 지금 귀가 뜨겁고 숨이 막힐 지경이다.

 

“너 그때 되게 조그맣고 귀여웠었는데”

“....................”

 

“근데 지금은 나보다 덩치가 크네”

“......................”

 

“그때보다 지금이 더 잘생겨진 것 같기도 하고”

“......................”

 

“아니 그냥 그렇다구”

“.......................”

 

왜 그 말을 나한테 하는 거죠? 무슨 뜻이죠 그건? 태형은 아무런 대답을 못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문 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대답을 해야만 좋을지 해답을 찾지 못한 상태다.

 

밥-뷔진-잠-뷔진-일-뷔진-밥-뷔진... 뷔진 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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