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영은 현관 앞에서 나갈 채비를 하는 채원의 곁을 불안하게 서성였다. 간밤에 채원이 했던 말이 생각나 마음이 복잡했다. 하루를 공유하고, 체온을 나누고, 같이 잠에 들면서 원영의 이름이 불리는 일이 잦아졌다. 그게 좋아서 기쁨에 섞여드는 혼탁한 감정을 모른 체 했다. 같은 얼굴을 한 나를 보고 그 애 생각을 하진 않는지 묻고 싶을 때마다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럴 때면 홀로그램 속 비키의 모습과 바인더에 빼곡한 비키의 정보가 떠올랐다. 원치 않아도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흘러들어와 그 애와 저를 비교하며 다른 점을 지워나갔다. 그런데 너무 많이 생각했나보다. 알고 싶다가, 원망했다가, 끝내는 시기한 탓이다. 




"따라가면 안 돼요?"




축 처진 눈썹, 불안한 눈동자. 말을 꺼내기까지 치열하게 갈등한 표가 났다. 채원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아침 내내 어찌나 눈치를 살피던지. 눈뜨자마자 원영의 빤한 시선을 받아야했다. 주인이 일어나기 기다리는 강아지 마냥 원영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침대에 턱을 괴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가늠도 가지 않았다. 채원이 눈만 끔벅이고 가만 쳐다보니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죄송하단다. 기가 푹 죽어 연신 사과하는데 숨이 턱 막혔다.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라는 말이 목 끝에 걸려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다녀올게."




채원은 오랜 부재를 메우기 위해 사무실에 나가야했다. 예나는 채원을 대신해 임시로 마련한 사무실에서 엉망이 된 데이터와 서류를 복구 중이었다. 연구원들의 얼굴이 영 좋지 못하다고 했다. 연구 실적을 쌓아 이직하려던 몇몇은 아예 사직서를 냈다. 무기한 연기된 프로젝트에 다른 직원들의 미래도 불투명했다. 말이 수석연구원이지 실질적 오너나 다름없는 채원이 언제까지 그들을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또 저 얼굴이 발목을 잡는다. 




"다녀오면 이야기 좀 하자."




원영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아슬하게 밟고 서 있던 얄팍한 빙판에 금이 갔다. 그 작은 균열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원영아. 왜 울려고 해. 원영아 얘,"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원이 황급히 따라 앉았다.




"무슨, 무슨 이야기요.."




원영의 흔들리는 목소리가 불안에 잔뜩 절어있다. 채원이 씁쓸히 숨을 뱉으며 어색하게 원영을 감싸 안았다.




"말 좀 들어봐. 응? 우리...그래, 지금 말할게. 밖에 나가자고 하려 했어."




이어지는 말에 도리어 걸려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고, 다 무너진 목소리가 채원의 귓가에 뚝뚝 떨어진다.




"저 내보내려고 그러죠. 저 버리려는 거죠."



"아냐 원영아. 왜 말을 그렇게 해. 근처에 호수공원이 있어. 산책하고 너 좋아하는 것으로 외식도 하자. 둘이. 응? 같이 가자는 말이야. "




그 말에 켜켜이 누적된 서러움이 파도처럼 밀려온 모양이다. 참고 있던 울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와 끝내 목놓아 우는 원영의 마른 등을 연신 쓸었다. 채원의 주머니에서 계속 진동이 울렸다. 예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우선 다녀와서 이야기하자. 울지 말고. 일을 핑계 삼아 우는 원영을 남겨 두고 현관문을 나섰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터였다. 닫힌 현관문을 등지고도 발걸음이 영 무거웠다. 키도 훌쩍 큰 게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정말.


결국 도로 들어가 아직까지 현관 앞에 주저앉아 우는 원영을 방에 데려가 침대에 눕혔다. 품에 안고 토닥여주자 여즉 훌쩍이던걸 그제야 멈춘다. 아이가 따로 없네. 하긴 따지고 보면 원영은 이제 겨우 한살이다. 돌잔치를 해줘야 하나. 실없는 생각에 웃음이 샌다. 끌어안고 피실 거리니 원영이 몸을 조금 떨어뜨려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올려보았다. 




"지금 웃었어요?"


"응?"


"웃었잖아요. 그죠."




내가 웃었나. 반쯤 몸을 일으켜 팅팅 부은 눈으로 무슨 진기한 광경을 보듯 입꼬리를 실룩이는데 그게 우스워 또 웃어버렸다. 그 모습에 눈꼬리에 눈물방울을 매단 원영이 더 환하게 웃는다. 웃는 거 처음 봐요. 근데 왜 웃어요? 몰라. 알려주세요. 싫어. . 근데 뭐 먹으러 갈 거예요? 너 먹고 싶은 거. 저 아보카도연어덮밥 먹고 싶어요. 뭐?그런건 또 어디서... 유진이가 자랑하던데요. 만들어 먹을까요? 아, 마트가요! 저 마트도 진짜 가보고 싶었어요. 못살아 정말...








스물하나, 서른셋 下

장원영 김채원









원영은 오후 늦게 잠에서 깨어났다. 이불에 얼굴을 묻으니 은은하게 남은 채원의 체향에 기분이 좋았다. 잠들기 전까지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다. 원영아. 장원영. 속삭이는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좋아서, 죽을 것만 같았다. 장원영. 이 세글자만은 오롯이 제게 부여된 것이 맞았다. 이제는 다 타버린 비키의 보고서에 장원영이란 글자는 없었다. 오직 V-0010, 자신의 보고서에만 그 이름이 적혀있었다. 채원의 사랑과 집념의 부산물이라는 생각도, 이름이 불리면 잊을 수 있었다.


비키가 되고 싶은 것은 정말로 아니었다. 이미 죽은 사람의 대체재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 애를 사랑하던 그 마음만을 갈망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채원은 저를 결코 비키라 여기지 않는다. 지난밤 채원의 말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오늘 실제로 처음 본 채원의 웃는 얼굴까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실실 웃음이 났다. 원영은 가뿐히 일어나 찬물로 대충 세수를 하고 후드를 꿰어입고 집을 나섰다.


간만에 찾은 지하 연구실 입구는 노란 테이프가 얼기설기 붙어있었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에 한손으로 소매를 끌어모아 입가를 막았다. 멀리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원영은 급하게 테이프를 손으로 휘휘 뜯어내버리고 온통 새카맣게 타버린 연구실에 발을 디뎠다. 어수선하게 흩어진 시커먼 잔해들을 발로 대충 치우고 들어가 보니 철문은 열린채였다. 안쪽 기밀 공간을 가장 먼저 정리한듯 했다. 원영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곳을 애써 외면하고 문 옆에 카드삽입구를 살폈다. 


카드키는 여전히 꽂힌채였다. 과거 언젠가 채원이 늘상 소지하고 다녔을 낡은 카드키를 조심히 뽑았다. 중앙엔 색이 바랜 채원이 반듯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언젠가 옷장 밑으로 굴러 들어간 펜을 꺼내려다 기다란 자 끝에 걸려나온 채원의 소지품. 처음 그 얼굴을 봤을 때 한참을 혼란한 감정에 휘둘려야 했다. 건조한 얼굴에 걸린 낯선 미소를 종일 들여보았고, 이것을 보고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생에 첫 거짓말이었다.








*








채원은 침대에서 한참 동안 원영을 달래주다 까무룩 잠이 든 것을 확인하고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느지막이 도착한 사무실을 휑하니 어수선했다. 어색하게 말을 붙여오는 직원들을 뒤로 하고 임시로 마련한 테이블을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말끔한 책상 위에는 원영의 보고서와 일기만이 놓여있다. 모든 게 한순간 재가 되어버리고, 우습게도 장원영 하나 남았다. 비키의 모습을 빼다박은 실험체 10호. 같은 얼굴의 원영은 다르게 울었다. 비키는 어떻게 울었더라. 아득해서 생각이 잘 안 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직원들은 조각난 데이터와 타버린 서류를 수집하여 복구하는데 정신이 없어 보였다. 채원은 잠시 보고서 뭉치를 손끝으로 쓸어보고 저를 찾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한참 밀린 일거리를 처리하고 어슴푸레할 때쯤 예나와 건물 밖 산책로를 찾았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 거리에 바람이 선선했다. 한숨을 돌리는데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의 예나가 입을 열었다. 




"프로젝트V 자료 손실이 심각해. 거의 다 수기작성했던게 이럴때 독이 되네. 솔직히 욕심같아선 원영이가 도와줬음 좋겠어. 걔는 다 기억할거 아냐. "




무슨 말인진 알겠어. 원영은 마음만 먹으면 글의 조사까지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비키의 연구보고서를 복구해달라 부탁하면 원영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는 채원이었다. 




"...너무 힘들어서 괜한 소릴 했네."




예나는 그렇게 말하며 입을 꾹 다문 채원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원영의 장래에 대해 이런 저런 의견을 덧붙여온다. 나중에라도 원영이 원한다면 재단 연구소에 한 자리를 내줘도 좋을거 같다고. 




"유진이 말론 이쪽에 흥미도 재능도 있어보인다길래. 그건 그렇고 괜히 신경 쓸까 봐 말 안했는데...박 주임 그 새끼 임시 사무실 다 때려 부수고 난리도 아니었어. 터무니 없는 금액을 보상금으로 요구하는걸 계속 거절했더니 언론에 죄다 폭로해버리겠다고 생난리를 피웠다니까." 




재단에서는 여러 분야의 연구가 진행 중인데, 채원의 연구팀은 다른 팀의 연구원들을 주기적으로 관찰 평가하여 그 중 업무 실적과 성향이 적합한 자를 직접 채용하고 있다. 예나가 열을 내며 언급하는 박 주임도 마찬가지로 타부서 연구팀에서 스카우트된 케이스였다. 나름대로 엄격하게 평가하긴 하지만 어딜가나 지뢰는 있기 마련이니까.




"박 주임 집안 사정이 안좋다며. 원하는 대로 줘. 부족한 금액은 내가 해결할게." 




최대한 잡음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특히 박 주임이 원영과 마주하는 일이 생겨선 안된다. 박 주임이 지금 상태로 원영을 보면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원영의 상처를 이이상 덧나게 할 수는 없다. 불만스러운 얼굴의 예나가 뭐라 말을 보태려 채원을 쳐다보는데 지척에서 불콰한 낯의 남자가 비틀비틀 다가왔다. 지독한 술 냄새와 엉망인 옷차림에 절로 인상이 써졌다. 박 주임이었다. 두사람을 발견한 남자 비릿하게 웃으며 채원의 곁에 다가와 스치듯 속삭였다. 소름이 끼쳤다. 그 말을 놓치지 않은 예나가 남자를 붙잡고 따지듯 묻고. 언성이 높아질수록 점점 더 찜찜하게 조여오는 불안감이 온몸을 에워쌌다. 원영이를 봤다고...? 채원은 더 망설이지 않고 두사람을 등진 채 다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버석하게 말라버린 나뭇잎이 발밑에서 쉽게 으스러진다.










*








실험체 10호를 깨우기 얼마 전, 예나와 가볍게 실랑이가 있었다. 예나는 10호가 깨어나 적응 기간이 끝나면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자고 했다. 채원은 매장당하고 싶으면 그러라며 코웃음을 쳤지만, 속내는 비키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집요하게 수십년간 죽은 사람을 복제하고 있는 인간이 비키의 연인이라니. 아름답게 회자되는 비키의 명성에 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름은 어떻게 할까? 비키?"


"말이 되는 소릴 해. 10호면 충분해. "


"사람을 어떻게 10호라 불러. 더구나 이 친구는 자아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할거라니까?" 


"이제 와서 윤리같은걸 운운할 셈이야? 아무튼 비키는 안 돼."


"그럼 직접 고르게 하자. 사실 리스트도 뽑아놨어."


"팔자 좋네. 시간이 넘치지? 뭐라고 하고 이름을 고르게 해? 클론이라고 소문내려고?"


"적응 좀 하면 알려줘야지. "


"매장당할 일 있어? 헛소리 좀 하지 마. 적당히 아무거나 붙이든지." 


"치, 일단 들어봐. 장민주, 장유리, 장은비, 장혜원......"




장원영어때요? 예나와 10호의 이름 여부를 두고 가볍게 실랑이를 하는데, 박 주임이 키득거리며 끼어들었다. 오, 그거 좋다. 입에 착착 붙네. 예나가 손뼉을 치며 반색하니, 옆에 있던 동기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야, 너는 술자리에서 한 말을.... 속닥이는데 숨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최 소장이 인상을 구기며 반문하자 능글맞게 웃으며 답한다.




"10호니까요. 숫자를 따서 원영. 어때요?"




급격하게 굳어지는 예나의 표정에 박 주임이 농이랍시고 손을 휘휘 저으며 자리를 피했다. 문 너머로 쑥덕거리며 저열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알만한 두사람이 술자리에서 무슨 말을 했을지 대충 짐작이 된 예나가 어이없다는 듯 탄성 같은 한숨을 뱉는다. 




"정말 너무들 한다. 사람을 안줏거리 삼아서...내가 쟤 맘에 안 든다고 했지. 대체 왜 뽑은 거야?" 




투덜거리는 말에도 말이 없던 채원이 조용히 태블릿 전원을 킨다. 




"잘 어울리네."




흘리듯 말하고 예나가 말릴 새도 없이 데이터 입력란에 글자를 입력한다. 




"미쳤어? 지금 그걸...!"




다급하게 손을 뻗는 예나를 뒤로 하고 채원의 가벼운 터치로 입력된 정보값이 인공배양액의 뇌파 학습 장치에 즉시 전송된다. 이제 V-0010이 눈을 뜨면 장원영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것이다.  








*








원영이 정신을 차린 곳은 처음 눈을 떴던 병실이었다. 아, 나 왜 여기 있지. 흐릿한 정신에 쏟아지는 형광등 빛에 시야를 가리려 팔을 드는데 손등이 뻐근했다. 손등에서부터 길게 늘어선 링거줄과 익숙한 병실 풍경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는 원영의 머리 위로 익숙한 인영이 드리워진다.  




"정신이 들어요?" 




유진의 말간 얼굴이 눈물범벅이다. 안개 낀듯 희뿌연 기억에 흐릿하게 채원의 잔상이 떠올랐다. 뿌연 증기 속에서 창백해진 얼굴로 저를 살피던 채원의 얼굴. 하나둘 떠오르는 기억에 몽롱하게 풀어진 안면근이 점차 굳어갔다. 


채원은 뜨거운 물이 흘러넘치는 욕조에 잠겨 의식을 잃어가는 원영을 너무 늦지 않게 발견했다. 고온에 망가져 버린 칩을 확인한 채원은 지체없이 자신의 손목에 있던 칩을 분리해 원영에게 옮겼다. 응급실로 이동한 뒤 칩과 재생 주사 덕분에 원영의 상태는 금방 회복되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약물을 과용해 온 채원이 문제였다.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신체가 칩의 부재로 더이상 재생 주사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분의 재생칩 완성은 육개월이나 남았다. 그때까지 쇠약해진 채원의 몸이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대충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원영은 링거를 뽑아던졌다. 유진을 채근하여 황급히 채원의 병실을 찾았지만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서 무균실의 투명한 유리 벽 너머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위태로운 그 모습에 심장이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새하얀 병실에 홀로 누워있는 여자의 작은 숨은 산소호흡기가 대신 쉬어주고 있었고, 손목엔 두꺼운 붕대가 감겨있었다. 사방에 주렁주렁 달린 여러 개의 줄에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는 듯 보였다. 원영은 유리 벽에 이마를 대고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죄책감과 참담함에 손이 덜덜 떨려왔다. 








*







채원은 아주 느리게 회복해가고 있다. 투여하는 약물과 링거줄이 줄어들고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수준이었지만 미약하게 나마 정신을 차리는 횟수가 늘어났다. 일반 병실로 옮기고 부터는 원영이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다. 그깟 이름이 뭐라고 채원이 준 목숨을 한순간에 버리려 했을까. 어차피 채원에 의해 부여된 생이었다.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목숨줄까지 넘겨주었다. 그게 연민이어도 상관없다. 채원과 전처럼 지낼 수만 있다면 다 괜찮았다. 이대로 평생 갇혀살아도 상관없으니 살아만 있어 달라고. 작은 회색 공간에 웅크린 채 살아도 당신만 있다면...이제 나는 정말 괜찮다고. 매일 밤 채원의 손을 잡고 듣지 못할 말을 건넸다.








*







귀를 찢을 듯한 이명에 안간힘을 다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느리게 회전하는 천정이 쏟아져 내려오고, 시야가 거칠게 끊긴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걱정스레 내려보는 예나의 얼굴이 보인다. 원영은 무사한지 묻고 싶은데, 고장 난 가로등처럼 껌뻑거리며 자꾸만 정신을 놓는다. 마지막으로 눈을 떴을때 주변이 어둑어둑해 잘 보이지 않았다. 관절 마디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숨을 쉴때 마다 명치가 심하게 저려왔다. 가슴을 부여잡고 어렵게 고개를 돌리니 창밖은 새카만 밤이었다. 손가락 끝의 감각을 느끼려 애쓰며 느리게 호흡을 하고 있으니 서서히 정신이 맑아졌다. 


조금씩 몸을 움직여 침상에 몸을 기대기까지 또 한참이 걸렸다. 그리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간이 침대에 웅크려 잠든 길쭉한 인영을 인지했다. 원영.. 반사적으로 불러보았지만 목이 잠겨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채원은 또 한참을 움직여 침상에 다리를 내리고 발바닥에 닿는 차가운 바닥을 감각했다. 깊이 잠든 원영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도 미동이 없었다.  


폴대를 잡고 한발 한발 조심스레 이동하여 병실 안의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가볍게 찬물로 세안을 하고 거울을 보며 한손으로 더듬더듬 얼굴을 매만졌다. 그새 잔주름이 늘었다. 더이상 재생 주사가 소용없는 거겠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가늘게 연명하던 삶이다. 그 애는 이런 내 모습도 좋다고 할까. 종국엔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우스워 쓰게 웃었다.


다시 걸음을 옮겨 곤히 잠든 원영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부드럽게 귀뒤로 머리칼을 넘기니 원영이 꿈지럭대며 눈을 떴다. 한참을 눈만 깜박이던 원영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어...!언제..어..괜찮아요?세상에..어떡해..의사.. 의사 부를까요?" 




설수설하는 모습이 퍽 우스워 채원이 바람빠지듯 웃어 보였다. 




"부르지 마. 괜찮아. "




허둥지둥하는 꼴이 귀엽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왔다. 괜찮아요? 얼른 누워요. 그게 티가 났는지 금세 심각해진 원영이 채원을 부축해 침대에 눕히고 안색을 살폈다. 채원은 여기저기 살피는 원영의 손을 잡았다. 




"안아줄래?" 




안 하던 요구에 꽤나 당황한 얼굴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어색하게 채원의 옆에 자리를 잡으니 채원이 자연스럽게 원영의 팔을 베고 안겨 왔다. 그게 다 얼떨떨하던 원영은 상황파악이 되자 귀까지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긴장감에 몰래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어설프게 반대편 팔을 들어 채원의 등을 두드렸다. 




"괜찮은 거 맞죠?"




 원영은 힘없이 끄덕이는 채원에게 조금씩 말을 걸었다. 지금 아픈 데는 없는지. 얼마 만에 깨어난 지 아는지.채원이 정신을 잃은 동안 있었던 시시콜콜한 일들까지. 채원은 힘이 없어도 꼬박꼬박 반응을 보이며 경청했다. 중간중간 눈치 보는 원영을 다독이듯 계속 말해달라고 말도 붙여가며 원영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새 두서없던 원영의 말도 점차 차분해졌다. 늦은 밤 가라앉은 나직한 목소리가 채원의 가슴 속에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차오르게 했다. 어린 애의 마른 품이 포근했다. 잠들지 않으려 애쓰며 무어라 속삭이는 말들을 흐리게 되새겼다.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다정해 가물가물 눈이 감겨왔다. 저도 모르게 파고들자 원영이 팔을 크게 내어 끌어안는다. 채원은 반쯤 무의식에 잠기며 숨을 들이쉬었다. 언젠가 맡아본 익숙한 체향. 가슴의 통증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다정하게 토닥이는 손길을 느끼며 채원은 정말로 잠에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단잠이었다.  








*







채원을 보내고 오는 길에 원영은 호수공원을 찾았다. 계절감을 모르는 원영의 얇은 옷차림에 따라오는 시선을 무시하고 한참을 걸었다. 호젓한 공원 끝자락에 다다른 원영은 마른 가지에 그늘이 없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바닥이 차가워 한기가 올라 팔을 쓸었다.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잔잔하게 물결치는 생경한 호수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 가방을 뒤적인다. 찬바람에 굳은 손으로 서툴게 재생 버튼을 눌렀다. 일렁이는 홀로그램 너머로 그토록 소원하던 하늘이 비친다. 시리고도 푸른 그곳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채원의 미소가 신기루처럼 흩어지고, 원영은 울지 않았다.   














***












급하게 숨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잊을 만하면 반복되는 꿈이었다. 발버둥 칠수록 끝없이 가라앉기만 하는 늪.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뜨끈하고 끈적한 액체가 생생해 헛구역질이 났다. 텁텁한 공기에 숨이 막혀 이불을 걷어내고 이마의 식은땀을 훔쳤다. 몸 상태가 안 좋아질 때면 어김없이 가위에 눌린다. 이어지는 타는듯한 갈증에 급하게 거실로 나갔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가위눌렸어?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있던 원영은 들여다보던 태블릿을 놓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에게 다가가 이마를 짚었다.




"왜 자꾸 이런 꿈을 꾸는지 모르겠어요."




또 같은 꿈을 꾼 모양이다. 걱정스런 마음에 시무룩하게 말하는 뺨을 어루만지니 작은 얼굴을 기대오며 눈을 감는다. 그게 사랑스러워 눈꺼풀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온도감에 감은 눈이 미세하게 떨리고 이내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웃으며 올려보는 앳된 얼굴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며 다정한 말들을 속삭이고, 마주보는 맑은 눈동자를 보며 다짐했다. 오늘은 모든 것을 말해주어야겠다고. 밤마다 너를 괴롭히는 정체 모를 꿈에 대해서. 그리고 너와 나에 대해서. 



그리하여 너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인지 말해줄 것이다. 



서른셋의 장원영이, 스물하나의 김채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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