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널드를 따라 들어간 방 안은 의외로 아늑했다.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조명도 없었고 병원을 연상시키는 하얀 인테리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내렸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문을 열 때마다 다른 세계로 이어지게 만들어놨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년동안 방치된 허름한 집에서 깔끔한 병원으로, 깔끔한 병원에서 아늑한 가정집으로 넘어온 벤은 레지널드를 경계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평범한 사내보다는 특이한 건물 내부 구조가 더욱 흥미로웠다. 무언가에 홀린 듯 방 안으로 빨려들어간 벤은 벽에 걸린 그림들을 발견했다. 한 눈에 봐도 비싸보이는 예술작품들이었다. 평범하고 아늑한 가정집이 아니었구나. 병원을 지나 도착한 곳은 부잣집 대저택이었던 모양이었다.

본래 호기심이 많고 흥미를 가진 것에 금방 빠져드는 벤이었다. 이곳에 납치되어 왔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채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수 많은 그림들 속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작품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재밌던지 레지널드가 문을 열고 그 문을 통해 여러 명의 연구원들이 들어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건 어느 시대의 누구 작품인 것 같고… 저건 잘 모르겠네.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생각하며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도중 유독 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벤의 키보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언뜻 봐도 누군가의 가족사진이었다. 깨달은 순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가운데에 서 있는 성인 남성과 그 앞에 줄 지어 서 있는 아이들. 그중에서 파이브는 자신의 이름을 주장하듯 다섯번째 순서에 서 있었다. 먼 거리였지만 파이브의 얼굴만큼은 선명했다. …어렸을 때부터 잘생겼구나. 항상 생각했던 것이지만 파이브의 얼굴은 예술에 가까웠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명화들 사이에서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벤은 소리 없이 미소지었다. 지금이랑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보이긴 했으나 파이브의 어릴 적 모습을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고 행복했다. 나중에 파이브를 만나게 된다면 어릴 적 사진을 봤다며 놀려줄 생각이었다. 한 손으로 길게 찢어진 입술을 가리던 벤은 잠시 미소를 잃었다. 다시 만나게 되면이라…. 그제서야 자신이 있는 곳이 웃으면서 즐길 곳은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세상에, 벤. 이게 공포영화였으면 넌 이미 죽었어.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레지널드가 도끼를 든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어도 놀라지 않을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아, 미안하군. 내가 아직 저녁을 먹지 않아서…. 괜찮다면 같이 먹겠나?"

벤과 눈을 마주한 것은 도끼가 아닌 포크를 들고 있는 레지널드였다. 살짝 어벙해진 벤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비어있던 기다란 식탁에는 몇 인분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들 중 대부분은 벤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음식이 무슨 죄가 있겠어. 비록 파이브와 레스토랑에서 만찬을 즐긴 지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으나 벤은 입맛을 다졌다. 스스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성장기라 주장했다.




음식의 맛으로만 평가하자면 레지널드와의 저녁식사는 지금까지 것들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파이브가 사준 저녁식사도 비싼 축에 속했었는데 이 만찬은 얼마나 들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5성급 호텔보다 맛있어! 벤은 5성급 호텔에 가본 적 없었으나 정확한 비유는 아니었지만 그의 말에 딴지를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5성급을 넘어선 6성급 호텔이다! 입 안에 음식을 가득 밀어넣으며 중얼거렸다.

"넘버 파이브에게 어디까지 들었나?"

지금 이 순간 자신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거라고, 레지널드가 말을 걸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스테이크를 입 안으로 밀어넣기 위해 벌렸던 것을 천천히 닫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벤은 갑자기 차가워진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어떤 식으로 대답해야 파이브에게도, 자신에게도 피해가 오지 않을 지  위한 시간을 벌어야 했기에 닫았던 다시 입을 열어 스테이크를 씹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여물을 씹는 소처럼 턱을 움직였다. 그러나 음식이라는 것은 씹으면 씹을수록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렇다 할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지만 벌써 입 안이 텅 비게 되었다. 아직 고기가 남아 있는 것처럼 연기하며 공기라도 씹을까 생각했지만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레지널드가 부담스러웠다. 질문을 회피하는 것보단 맞서 싸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파이브가 알고 있는 건 전부 알고 있겠죠?"


"그가 정말로 모든 걸 말해줬다고 생각하나? 자네를 속이고 있은 것일지도 모르지."


"사람을 불러다놓고 한다는 게 고작 이간질인가요? 들었던 것보다 훨씬 별로네요."


아이들을 상대로 인체실험을 해대는 미친 놈에게 너무 대들었나 싶었지만 다행히 레지널드는 크게 기분이 상한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살짝 미소지으며 감탄하고 있었다. (평소 파이브가 자주 짓던 미소와 똑같았다. 파이브는 레지널드의 손에서 자란 것이 확실했다.)


"…생각보다 당돌하군. 마음에 들어."


당신 아들이랑 사귀고 있는지라. 벤은 우아하게 와인을 마시며 생각했다. 순간적으로 입 밖으로 튀어나가려던 말을 와인을 이용하여 억지로 집어삼켰다. 레지널드가 자신의 반항적인 태도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긴 했지만 이 발언은 아니었다. 해도 되는 말과 해서는 안되는 말을 구별해야만 했다.


"…지금까지 나는 총 43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실험을 했고, 그 중에 단 6명이 지금까지 살아있네. 이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겠지?"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은 아닌 듯 했지만 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의 실험체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아끼는 아이가 누군 것 같은가?"


벤은 고민할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파이브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절 납치했으니까요? 감정이 생긴 파이브를 협박하려고 저를 이용하려는 거잖아요. 바로 죽이지 않고 협박이라는 귀찮은 방법을 선택한 건 파이브를 죽이기 아까워 하는거니까…."

정석적인 자세로 의자에 앉아 벤을 바라보던 레지널드가 손을 뻗어 저 멀리에 있는 와인잔을 집어들었다. 술을 좋아하나… 벌써 몇 잔째야, 저게. 벤은 살짝 신경쓰였다. 알코올은 사람들에게서 판단력을 빼앗는 액체였다. 술에 취한 레지널드가 무심코 자신을 죽여버리진 않을까 걱정되기 시작했다.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며 레지널드가 말했다.

"넘버 파이브는 뛰어난 아이야. 눈치가 빠르고, 주제 파악을 잘 하지. 무엇보다 남은 아이들 중에서 가장 머리가 좋아. 난 그 애가 내 연구를 완성시켜줄거라 믿네."

벤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결국 나를 죽여버리겠다는 선언 아니야? 애써 돌려말하려는 것이 화가 났다. 그냥 바로 죽여버리겠다 선언해줬으면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질테니까. 벤은 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는 아니야."

벤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이야기가 낯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해보려 했지만 표정관리가 쉽지 않았다. 그 다음 무슨 말이 이어질지 알지 못해 두려웠다.

"혹시 넘버 6가 죽인 이유도 알고 있나?"





촉촉해진 눈으로 파이브를 올려다 보며 앨리슨이 입을 열었다.

"벤은 지금… 아버지와 함께 있을거야."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말하고 있는 터라 문장이 뚝뚝 끊겼다. 울고 있는 형제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 파이브는 평소보다 느린 그 문장을 기다려줄 인내심도, 시간도 없었다. 예의에 어긋남을 알면서도 앨리슨의 문장에 끼어들었다.

"알아. 그래서 어디에 있는데. 집? 연구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어딘가? 그것만 알려주면 돼."

시체를 치워야 하니까 뒷산 같은 곳이려나.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디에고가 들었다. 진심이야?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파이브의 초조함을 막아섰다.

"잠깐, 너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마음이 급한 파이브는 디에고의 말에 귀를 기우릴 생각이 없었다. 앨리슨에게 빨리 장소를 말해달라고 재촉하기 위해 그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쓸데 없는 소리를 할 생각이라면 제발 닥치고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파이브의 넓찍한 등과 마주한 디에고는 억울한 듯 입을 열었다.

"아니, 시발 좀 들어봐. 아버지는 벤을 죽이려는 게 아니야!"

"…뭐?"

등을 돌렸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파이브가 디에고를 바라보았다. 항상 이성적이던 파이브의 표정이 무너지는 것을 본 디에고는 작은 쾌감을 느꼈지만 그것을 음미할 시간은 없었다. 성질 급한 파이브가 화를 내기 전에 서둘러 말을 이어야 했다.

"나를 협박하려고 벤을 납치한 게 아니라고?"

"그래! 죽이려고 했으면 뒷산 같은 데에 데려갔겠지. 벤은 지금 지하 연구실에 있어."

"대체… 왜?"

파이브의 물음에 앨리슨과 디에고가 눈을 마주쳤다.





"가장 쓸모 있는 건 넘버 5였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넘버 6를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일단 넘버 5보다 차분하고 조용했지. 자네도 알다싶이 넘버 5는 가끔 도가 지나칠 때가 많거든.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할 때가 많았어. 그에 반해 넘버 6는 나랑 가장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었고, 무엇보다."

벤은 긴장으로 인해 손에 땀이 생기기 시작함을 느꼈으나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달그락 소리조차 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표면적으로는 레지널드가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넘버 6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무언가가 느껴졌다. 레지널드가 천천히 썰고 있는 것이 스테이크이 자신처럼 느껴졌다.

"지성의 힘을 가지고 있었거든. 내가 가장 기대하고 있던 감정이었지."

"지성…."

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주마등이라는 것을 느꼈다.

너는 '지성'이야.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하루종일 책을 읽기 시작했지? 지성이 강화되서 이 세상의 모든 지식들을 흡수하고자하는 마음이 강해져서 그래.

파이브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우주 공강에 대처하는 벤의 자세는 다음과 같았다. 도서실에서 재밌어 보이는 신간 도서를 빌린다. 읽는다. 도중에 배고프면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다. 다시 책을 읽는다.

그동안 보내왔던 대학 생활들도 빠르게 지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입시 시절 때 쌓였던 욕망들이 터져나온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확실히 일반적인 사람들의 독서량과는 차원이 달랐다. 책 읽겠다고 밥을 거절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이제와서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늦은 일이었고, 그때 알아차렸다 해도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이었으니까.

"…듣기로는 자네도 지성의 힘을 갖고 있다던데."

벤의 주마등은 거기서 끝이 났다.





파이브는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으로 힘껏 내던졌다. 스트레스를 날려줄 날카로운 소리를 원했으나 돈으로 가득찬 가방은 퍽 하는 미묘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이딴 허무한 소리로는 화가 가라앉지 못했다. 가방을 여러 번 차던 것을 멈추고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 가방은 한 쪽 벽에 위치한 책장에 부딪혀 벤이 정성스럽게 쌓아둔 책들을 떨어뜨렸다. 그제서야 파이브가 그토록 원하던 소리가 들렸다.

"벤을 넘버 6로 받아드리겠다니!!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그 사실을 전한 것은 앨리슨이었으나 파이브의 분노는 디에고를 향했다. 디에고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파이브로부터 멀어지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벽에 붙어 있었던 탓에 더 이상 뒤로 물러날 수 없는 위치였다.

"왜 나한테 지랄이야! 내가 결정했냐?"

"말렸어야지!! 그걸 보고만 있었어?!"

"그 사람이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이야? 아버지가 그렇게 하겠다고 결정했으면 절대 번복되는 일은 없어! 잘 알잖아!!"

파이브의 발걸음이 멈췄다. 고래고래 소리치던 것도 그만두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디에고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아버지의 결정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딱 한 명? 하지만 그 사람조차 파이브의 마음에 들지 못했다. 언제까지고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늙은 여우 같은 여자. 파이브는 두통이 밀려오는 것을 참지 못하고 이마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 여자 말을 듣는 것 같아서 싫었는데."

작게 중얼거렸다. 형제들의 귀에는 닿지 못한 작은 속삭임이었기에 그 누구도 '그 여자'가 누구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물어봐도 대답해주지 않았겠지만.

"가야겠어."

단호하게 말하는 파이브는 어깨를 풀고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형제들의 의미 없는 눈빛 교환을 끝낸 앨리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파이브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에게 현실을 알려줘야만 했다.

"지금 가봤자 늦었어. 루서가 떠난지 2시간은 넘었으니까… 설령 비행기를 타고 간다고 해도…."

"걱정마. 내가 비행기보다 빠르니까."

"…뭐?"

형제들이 동시에 외쳤다. 여섯 형제들 중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면 웃기지도 않는 농담 그만하라며 핀잔을 줬을 것이 분명한 문장이었으나 그들은 웃어 넘기지 못했다. 상대는 넌센스 문제마저 수학 공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이었다. 절대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닐거라 확신하면서도 어딘가 찜찜했다. 사회생활을 16년동안 해봐서 아는데, 이런 류의 사람은 농담 같지도 않은 농담을 하고선 남들이 웃어주지 않는다며 화를 내는 것이 특기였다. 조용히 눈동자만 굴리다 바냐가 먼저 입을 열었다. 파이브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눈물이 뚝 끊긴 상태였다.

"…파이브. 진심이야?"

그나마 가장 정상적이고 친하다고 여긴 형제에게서 경멸과 걱정 그 중간 단계의 눈빛을 받은 파이브는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 표정을 본 클라우스는 역시 파이브는 농담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라며 안심했고, 디에고는 그것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린 충격으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는 것이라면 자신이 성심성의껏 도와주겠다 다짐하며 파이브에게 손을 뻗었다.

"…니들, 아버지가 왜 이런 실험을 하는 지는 알고 있어?"

천천히 다가오는 디에고의 손을 쳐내며 파이브가 말했다.

"당연하지. 인간의 감정 중 일부분이 한계까지 발달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확인하려는 거잖아."

"맞아. 우리는 그걸 목적이라고 불러. 그럼 제대로 된 실험을 하려면 또 뭐가 필요한 지 알아?"

"…자본?"

"연구실!"

"실험 대상..?"

여러 가지 답들이 나왔으나 파이브의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놓고 실망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가설. 이 멍청이들아."

멍청하다는 소리만 들으면 발작하는 디에고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게 뭐가 중요한데! 우린 지금 니가 니 입으로 자기가 비행기보다 빠르고 말한 게 진심이냐고 물었거든?"

"…아버지는 이 세상에 초능력자들이 실존한다고 믿고 계셨어."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디에고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 마디 내뱉었다. …뭐?

"우리들을 대상으로 한 '이 실험'을 통해 초능력자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도 믿었고."

"…그."

이번에 소리를 낸 것은 앨리슨이었다.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한탄하듯 말했다.

"그럼 우리가 초능력자란 말이야?"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이 잔뜩 커져 있었다. 앨리슨을 바라보던 바냐의 눈 또한 마찬가지였다. 클라우스는 자신의 몸 이리저리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디에고는 묘하게 들떠보였다.

"미친, 우리가 초능력자라고..?"

"그걸 지금까지 모르고 있던 너네들이 더 미친 것 같다."





"그럼 너가 비행기보다 빠르다고 한 게 초능력에 대한 얘기인거구나? 무슨 능력이야? 빠르게 달리는 능력? 날아다니는 능력?"

"세상에..! 혹시 외계인이랑 접신하는 건 아니겠지?! UFO 부를 수 있어?!"

이토록 중요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형제들이 절망할 줄 알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잔뜩 신이 난 모양이었다. 네 명 중에 두 명은 자꾸만 쓸데 없는 것을 물어봤고 나머지 두 명은 허공에 대고 손을 뻗으며 두 손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파이브는 형제들에 비해 초능력을 다루는 데에 능숙한 편이었지만 아직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는 아니었다. 온 신경을 집중해야 겨우 성공할까 말까한 수준이었는데, 형제들은 그 집중마저 못 하게 했다. 결국 인내심이 한계까지 도달한 파이브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제발 좀 닥쳐봐!!! 집중 좀 하자!!!"

파이브의 호통에 형제들 모두 급하게 입을 닫았지만 클라우스는 예외였다. 와! 집중을 해야만 발동되는 능력인가보구나! 하며 오히려 더 신기해했다.

형제들을 진정시킨 파이브는 눈을 감고 모든 신경을 손에 집중하였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나아가야 했다. 주먹을 쥐는 신체적 힘과 능력은 전혀 상관 없었으나 본능적으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는 것과 목숨줄처럼 손에 쥐고 있는, 벤이 선물해준 작은 파편 하나가 살을 찢고 있었으나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으로 인해 정신이 맑이지는 듯 했기에 마음에 들었다.

 파이브의 능력은 공간이동. 하지만 이번에 넘어야 할 것은 공간이 아닌 시간이었다. 몇 번 넘어보지 못한 공간을 다루는 것도 어려웠지만 시간만큼은 아니었다. 공간 이동을 조금 활용하면 시간까지 뛰어넘을 수 있다는 핸들러의 말과는 다르게 시간은 공간을 '조금' 활용하는 수준을 뛰어넘었다. 오랫동안 연구해봤으나 실전은 커녕, 이론적으로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오류가 발생할 때마다 핸들러가 뭐라고 했더라? 자신이 발견한 수식 하나를 줄테니 자신의 편에 서길 바란다고 했던가? 관심도 없고 원하지도 않아서 제대로 듣지 않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수식의 일부분만이라도 알아올 걸 후회해봤자 이미 늦어버렸다.

양 손에서 느껴지는 묘한 느낌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공간 이동은 공기를 가르고 나아가는 느낌이었다면 이것은 빨려들어가는 것에 가까웠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는다면 목표와 다른 곳으로 가게 된다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두려웠지만 동시에 환희했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계획대로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이브는 지금 당장 초능력을 이용해 연구실로 이동한다고 해서 벤을 구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앨리슨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미 벤은 연구실로 끌려들어갔을테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만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벤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수술을 진행할 만큼 성질이 급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벤은 아직 수술대에 오르지 않았을 거라 확신했으나 아버지의 손아귀에 들어간 벤을 공간 이동 능력만으로는 구하기 어려웠다. 벤을 완벽하게 구하려면 약간의 시간 조정이 필요했다. 루서와 벤이 연구실에 들어가기 전으로. 아버지를 만나기 전으로. 가야만 했다.

파이브는 형제들을 슬쩍 바라보고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형제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초능력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자신이 과거로 넘어가 벤을 구하게 된다면 형제들은 파이브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모두 잊게 될 것이었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형제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쩌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라는 변명을 중얼거리며 죄악감을 떨쳐냈다. 초능력은 그 힘이 강할수록 대가 또한 강했다.

형제들에게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은 파이브는 조용히 초능력을 사용해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파이브가 도착한 곳은 허허벌판이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으나 곧 이곳이 연구실이 숨어 있는 벌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사람들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다. 루서와 벤 또한 마찬가지였다. 습관적으로 손목에 채워진 시계를 내려다보았다가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멍청하긴! 미래에서 갖고 온 시계가 정확할 리 없잖아!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발을 굴렀다.

연구실을 효과적으로 숨기기 위한 벌판에는 현재 상황에 대해 알 수 있을 만한 물건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달이었던 것이 태양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정확히 온 건가? 파이브는 여전히 벌판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루서와 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이 상황에서 파이브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연구실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마주칠 수도 있었지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혹시라도 벤이 이미 연구실 안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라면 잠깐의 망설임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갖고 올테니까. 벌판 중심에 서 있는 낡은 집으로 들어가며 파이브는 생각했다.

연구실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작동 방법은 소파 아래 숨겨져 있는 계기판을 만지는 것이었지만 그곳으로 향하지 않았다. 먼지가 빼곡히 쌓여 있는 것을 만지고 싶지 않았다. 능력을 연속해서 사용하면 할수록 나중에 후유증을 심하게 겪었으나 지금은 미래의 일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파이브는 다시 한 번 온 신경을 주먹에 집중하였다. 공기의 흐름이 두 주먹에 모이고, 파이브는 그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연구실은 파이브가 기억하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여전히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얗고, 파랬다. 딱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연구실 안이 너무나도 조용했다. 형제들이 모여 있을 때처럼 미친 듯이 시끄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연구실은 항상 소리 없이 분주했었다. 소음에 민감한 레지널드가 있을 때조차 이렇게까지 조용한 적은 없었다.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파이브의 이성이 소리쳤다.

바쁜 발걸음으로 연구실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벤이 있을 만한 곳 모두를 돌아볼 예정이었다. 조심성 없이 문을 열어재꼈고, 벤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았다.

"벤!!"

한참을 둘러보아도 벤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한 파이브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들을 가능성이 더 컸지만 차마 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어디있어! 대답해봐!! 점점 불안해지는 마음에 목소리 또한 커졌다.

"어라? 파이브!"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리자 파이브가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확신했지만 눈을 마주하고 나니 더욱 확실해졌다. 벤이었다. 파이브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벤에게 다가가려 했다. 벤 옆에 서 있는 레지널드를 발견하자 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표정 또한 순식간에 굳어졌다. 레지널드는 파이브와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표정 또한 달라지지 않았다. 눈치 빠른 파이브였지만 그조차도 쉽게 읽지 못하는 무표정이었다. 화를 내고 있는건지 기뻐하는건지 알 수 없었다.

"세상에, 이게 얼마만이야! 그동안 어디에 있었어?"

"…뭐?"

소리 없이 시작된 눈싸움에서 패한 것은 파이브였다. 한걸음에 달려와 자신의 손을 잡아채는 벤으로 인해 두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레지널드와 함께 있는 것도, 자신을 보며 반가워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역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벤이 자신에게 한 말이었다. 오랜만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레지널드에겐 들려주고 싶지 않아 벤에게만 조용히 속삭였다. 감정에 비해 작은 목소리가 짐승의 울음소리와 같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벤 또한 마찬가지였다. 벤은 파이브의 행동을 이상하다 여기며 얼굴을 찌푸렸다.

"시간여행이란 얼음장 같은 물로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도토리가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의 기묘한 재회를 지켜보던 레지널드가 입을 열었다. 파이브는 벤에게 속삭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레지널드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이 처음과는 살짝 바뀌어 있었다. 그제서야 파이브는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누누히 말을 했는데도 결국 실패했구나."

실망. 실망이라…. 이성의 힘을 잃고 감정이 생겨버린 것에 대한 실망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레지널드가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파이브의 시간여행. 파이브는 벤을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 설마. 하는 생각이 들면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인 파이브와 다르게 레지널드는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고 있지 않았다.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표정과 정반대의 과장된 인사를 하며 과거에서 넘어온 파이브를 맞이했다.

"16주 후의 미래에 어서오렴, 넘버 파이브."

무엇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손에 쥐고 있던 금속 파편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을 때였다.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던 둥근 모양의 파편은 파이브가 상황을 완전히 파악했을 타이밍에 맞춰 움직임을 멈췄다. 파편에 그려져 있던 우산 모양이 하늘을 향한 채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여기까지가 계획 상으론 시즌 1의 마지막화....

시즌 2는.................. 







관심이 필요합니다.

호두 R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