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야 김 대리야. 대박이다. 짐 챙겨서 빨랑 나와.”



민정은 힐끗 모니터 오른쪽 아래를 봤다. 퇴근시간을 고작 48분 남겨놓고 듣기에 절대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제가 제 자신과 불금 맥주 약속이 있어서요. 지금부터 외근은 좀 곤란한데. 민정은 잠깐 미친척 그런 말이라도 해볼까 고민해봤다. 노상철 차장은 어느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자신의 오래된 크로스백을 어깨에 둘러매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건수 하나 제대로 물긴 문 모양이었다. 불쑥 고개를 들어 민정을 쳐다보는 눈길에 빨리 짐 안 챙기고 뭐하냐는 의미가 고대로 담겨있다. 어쩐 일로 정시퇴근을 다 해보나 했다. 하는 수 없이 민정은 한숨을 삼키며 컴퓨터 전원을 끄고 자신의 가방을 움켜쥐었다.




“내가 두고 보라고 했잖아. 두고 보라고.”



뭘 보라는 거야 자꾸. 앞이나 똑바로 봐요.




말 한 번 할 때마다 상철은 한 쪽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 때마다 민정은 불안한 눈으로 상철 대신 유리창 너머로 앞차와의 간격을 가늠했다. 며칠 내내 회의실에 틀어박혀서 통화하는 소리만 넘어오길래 저거 또 제대로 된 일은 안하고 일하는 척 시늉만 낸다며 대표님이 민정의 자리로 다가와 은근슬쩍 흉을 본 게 딱 어제다. 그 때 민정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엑셀 차트에 열심히 아무 수식이나 그려댔다. 일하는 척이든 진짜 일을 하는 것이든 뭐든 큰소리 뻥뻥 쳐가며 진행하는 상철에 비해 민정은 대리 직함을 단 지 6개월이 지나도록 아직 제대로 된 퍼포먼스 하나 보여준 적이 없었다. 대리 뱃지 도로 내놓으라 하면 어쩌나 사실은 악몽도 몇 번 꿨다. 오늘 이렇게 군소리 없이 상철의 차 조수석에 앉아, 퇴근길 꽉 막힌 올림픽대로 한복판에 갇혀있는 이유도 뭘 하나 단단히 문 게 틀림없는 상철의 곁을 따라다니면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게 있을까 싶어서 라는걸 민정은 부정하기 어려웠다. 아마 상철도 그러기 위해서 민정을 콕 집어 따라 나서라고 한 게 분명했으니까.




“그래서요. 뭔데요. 이제 말 좀 해줘요. 우리 어디 가는데.”




민정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회사에서 차장 노상철에게 말을 걸 때와는 달리 훨씬 편한 말투였다. 상철은 민정의 사수였고, 실무진 면접 때도 상철이 들어왔었다. 얘 안 뽑아주면 내가 이 회사 때려칠 거라고 대표 앞에서 상철이 고집까지 부렸다는 사실은 민정이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있었던 첫 회식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아직도 민정은 상철에게 내가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냐며 물어보지 못했다. 쑥스러워서가 아니고 뽑은걸 후회한다는 대답이 되돌아올까 봐서였다. 그것과는 별개로 상철은 줄곧 민정을 꽤 살갑게 챙겼고 그래서 민정도 상철 앞에선 좀 편하고 솔직하게 굴 수 있었다. 고민 상담을 이유로 가끔 퇴근 후 술 한 잔 하지 않겠냐며 민정이 먼저 말을 거는 회사사람도 상철이 유일했다.




“우리? 인천공항.”




상철이 힘을 주어 대답했다. 얼굴이 싱글벙글했다.




“인천공항? 우리 어디 해외 가요?”




나 여권 회사에 놓고 왔는데. 민정이 당황해 하자 상철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해외가 아니고, 해외에서 막 돌아온 사람 픽업간다.”




상철 답지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던지고 보는 평소 화법은 어디 가고 말을 자꾸 빙빙 돌렸다. 뜸을 들이는 모습이 딱 생방송 경연 프로그램에서 1위 발표를 앞두고 시청자들 심장을 쥐락펴락하는 못된 MC의 그것과 똑같았다. 첫 회사생활에 보고 자란 게 상철이라 어느덧 서두가 길어지는 대화는 딱 질색이 된 민정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린다.




“아 그래서 누군데 그게. S급 아니기만 해요. 지금 당장 112에 납치됐다고 신고할ㄱ..”


“유지민.”




결국 뱉어진 이름에 민정의 고개가 절로 상철을 향해 돌았다.




“...유지민? 그 유지민?”




이름만 발음했을 뿐인데 머릿속이 벌써 하얀색으로 가득 찬다. 펄럭이는 하얀색 테니스 스커트.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움직이는 하얀색 테니스화. 새카만 머리카락 위로 푹 눌러쓴 새하얀 모자. 들려지는 라켓.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내려치는 스윙. 마시세요. 느끼세요. 이 강렬한 상쾌함을. 그 해 부동의 1위였던 C사의 스포츠 기능성 음료를 꺾어 내린 P사의 전설은 거기서 시작됐다. 특별히 성분이 추가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모델이 유지민이었다. 그러나 그거면 충분했다. 유지민의 이미지를 갖는 회사가 결국 모든 게임을 이긴다는 법칙. 그 법칙은 1년 후 P사와의 계약이 종료되고 두 배의 계약금을 부른 C사와 계약을 한 유지민이 C사에게 다시 1위자리를 돌려줌으로써 다시 증명되었다.




“근데 유지민이 우릴 왜 만나요?”




민정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힐끔 본 상철은 혀를 끌끌 찼다.




“넌 진짜 그렇게 정보력이 없어서 이 바닥 어떻게 살아남을래?”




민정의 표정이 금방 샐쭉해진다. 숫기가 없어 상철처럼 친화력으로 사람들에게 정보를 빼내어 오는 데는 영 젬병인 민정은 정보력이라는 단어에 제일 약했다. 쉽게 분해했다. 그런 민정의 얼굴 변화를 본 상철이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설명했다. 유지민 시장 나왔어. K그룹 스폰서 그만 받겠다고 선언했잖아. 상철의 설명이 이어진다. 대기업의 스폰서 기회가 자신 말고 더 어리고 더 도움이 필요한 선수들에게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것이 언론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유지민의 선한 의도였다. 그동안 보여준 태도와 일치하는 유지민다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좀 더 선수 개인의 감정적인 요소가 섞여있는 것 같다는 것이 상철의 생각이었다.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상철이 빨대를 꽂아 놓은 관계자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유지민이 그룹으로부터 크게 상처받은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릴 만나주는 거라고? 그것도 귀국 하자마자?”


“그래 임마. 알고 보니 우리 사촌 형의 장인어른의 고향 친구의 학교 후배가 유지민 아버지였단다. 내가 진짜 눈물로 읍소했다는 거 아니냐.”




해외에서 난다긴다 하는 유지민도 결국 학연지연혈연의 늪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국인이구나. 갑자기 주제도 모르고 밀려드는 측은지심에 민정은 고개를 돌려 여전히 꽉 막힌 도로를 잠시 바라보았다. 호주 오픈 결승전이 바로 지난주였다. 경기는 무려 지상파에서 생중계됐다. 유지민이 한국 여자 선수 최초로 결승에 진출했으니 당연했다. 유지민 개인의 인기로 봐도 당연했고. 순간 최고 시청률이 40%가 넘었댔나.



그리고 유지민은 그 경기에서 졌다. 단순 수치상으로 대략 대한민국 인구의 1/3이 봤다는 계산이 나오는 그 경기에서, 한국 해설진의 간곡한 표현을 빌리면 무척이나 아쉽게,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면 압도적으로 발려 져버렸다. 민정은 퇴근 후 맥주를 마시면서 경기를 지켜봤다.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승자와 악수를 나누던 그 끝의 끝까지 전부 다.



나 같으면 피곤하고 분하고 짜증나서 아무도 만나기 싫을 것 같은데. 프로 선수는 또 다른가. 서다 가다를 반복하는 탓에 온 사방이 붉은 후미등들로 가득한 도로는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민정을 갑갑하게 했다. 도로에서 눈을 뗀 민정이 다시 상철을 봤다.




“그럼 오늘 가면 도장 찍는 거예요? 계약서고 뭐고 우리 아무 것도 없잖아.”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한 번 만나나 주는 거지.”




아 뭐야. 그럼 그렇지. 김이 팍 샌다.




“계약서에 도장 찍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셨대.”


“알현할 기회 한 번 받는게 어디냐. 우리 같은 쩌리가.”




그렇긴 했다. 유지민 정도면 다른 대기업들에 유명한 스포츠 매니지먼트회사에 오만 회사들이 줄지어 서있을 텐데. 그 회사들에 비하면 민정의 회사는 서열로는 최하급이었다. 그런데도 유지민이 한국 오자마자 만나준다는 건 그래도 좀 기대해볼 여지가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대개는 그랬다.




“그럼 만나서 엄청 입을 잘 털어야겠네요. 나 말고 준수나 데려오지 그러셨어요.”




이 일을 하는 주제에 낯까지 가리는 민정은 오늘 처음 만날 지민을 대하는 것이 영 자신이 없었다. 이런 일에는 작년에 새로 입사한 준수가 넉살이 좋아 제격이었다. 상철은 고개를 내젓는다. 모르는 소리 말아라. 여자 선수들은 남자들이 우르르 가서 만나는 거 싫어해. 거기다가 널 안 데려가면 내가 누굴 데려가. 니가 내 행운의 부적인데. 말 끝에 상철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민정이 금세 싫은 얼굴을 했다. 신입 시절에 멋모르고 상철을 따라다녔다가 절대 불가능할 거라고 여겨졌던 계약을 몇 건 성사시킨 이후로 상철이 멋대로 붙인 민정의 별명이었다. 이제는 듣기만 해도 팔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민망함만 남기는 수식어. 행운의 부적은 무슨. 그 부적빨 끊긴 지가 언젠데.



그래도 유지민과의 전속 계약을 성사시킨다면 올해는 그 성과 하나로 게임 끝이었다. 내년 연봉 협상은 안 봐도 비디오 아니 안 봐도 유투브였다. 대리 괜히 달아줬다며 새로 발급 받은 명함이 대표님에게 찢어발겨지는 꿈은 더 이상 안 꿀 것이 틀림없었다. 잘 해야지. 필요하다면 신발도 핥아야지. 점점 정체가 풀리는 듯 했다. 차는 어느새 제 속력을 내어 빠르게 공항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민정은 가는 내내 차창 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유지민을 갖는 자가 모든 것을 이긴다. 그 법칙만을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반드시 제 힘으로 유지민을 가져 보이겠노라고 다짐하면서.










니가 깨워. 제가 왜요. 그럼 남자인 내가 깨우리. 아씨. 눈빛으로만 주고받은 대화 끝에 민정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일러준 주소대로 무사히 도착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오랜 비행으로 지친 것인지, 아니면 민정과 상철이 몸담고 있는 S&M을 개무시하는 것인지 차 뒷자석에 앉은 유지민은 차에 타자마자 집주소를 알려준 이후로는 자신의 집까지 오는 내내 잠만 잤다. 오늘만큼은 말 많은 준수에게 빙의해 열심히 입을 털어보려 했던 민정의 결심도 시작조차 못해보고 그렇게 구겨졌다. 진짜로 누굴 콜택시로 아나. 그래도 선수들이 중요한 경기가 끝나면 완전 탈진 상태에 빠지는 걸 모르는 바도 아니라서.



민정은 조수석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 지민이 타고 있는 뒷좌석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데도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지민을 잠깐 내려다 보다 몸을 숙였다. 팔을 뻗어 살짝 지민의 몸을 흔들었다.




유지민 선수. 저기. 유 선수. 집 도착 했..




까지 말한 순간 유지민의 눈이 번쩍 뜨였다. 놀랐는지 기댄 차 시트에서 몸을 화들짝 일으킨 바람에 얼굴이 민정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낯선 사람의 얼굴에 민정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정면으로 마주한 유지민의 얼굴이 너무 생경했고, 또 너무 예뻤던 탓이었다. 잠에서 덜 깬 눈이 천천히 깜박거릴 때마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미모로만 테니스 치면 진작에 랭킹 1위인데. 유지민의 테니스 플레이를 기록한 유투브 밑에 최다 추천을 받아 제일 첫 번째로 달려있던 댓글이 왜 지금 갑자기 스치는 건지. 그 댓글을 보며 분개했던 마음과는 별개로 민정은 지금 이 순간 그 댓글에 적극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예쁜 사람을 이렇게나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적이 살면서 또 있었나 싶었다. 얼어붙어 가만히 서있는 민정의 기색에 지민의 눈이 점점 의아함을 띄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민정은 황급히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아. 아. 죄송합니다.”




지민은 그런 민정의 사과는 듣는둥 마는둥 하더니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를 쓸어올려 손으로만 정리를 했다. 비켜선 민정의 몸 덕분에 생긴 빈 공간 사이로 긴 다리가 쑤욱 내밀어져 주차장 바닥을 밟는다.



미디어에서 봐왔던 이미지랑은 영 다르네. 민정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물론 놀랄 일은 아니었다. 대회 상금보다도 스폰서와 광고가 직접적인 수익을 좌우하는 프로 운동 선수들에게 실력과 더불어 이미지 관리는 어느새 필수가 되었으니까. 연예인들 마냥 앞에서는 순진하고 운동밖에 모르는 척 해도 뒤로는 별 짓 다하는 선수들이 널리고 쌨다. 물론 그런 선수들은 매니지먼트 회사 쪽에서도 잘 안 맡으려고 했다. 이런 선수들은 까딱 잘못하다가는 스포츠 면이 아닌 사회 면에서 이름을 발견하기가 십상이라 회사도 전속 계약을 맺을 때 제일 먼저 확인하는 것이 인성이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유지민은 실력이면 실력, 화제성이면 화제성, 인성이면 인성 뭐 하나 속 썩일 구석 하나 없는 특 S급이었다. 프로 데뷔 이후 안 좋은 쪽으로는 기사 한 줄 난 적 없는 우리의 국민 여동생. 국민 언니.



그런데 그것도 어느 정도는 가식이었던게 아닐까 민정은 지민을 만나고부터는 퍽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상철에게 짐을 건네주는 순간부터 지민의 얼굴이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민정과는 명함을 주고 받기는커녕 제대로 한 번 쳐다보지도 않았다. 거만하다면 거만하다고 볼 수 있는 태도였다. 아무리 경기가 끝난 지 며칠 안됐다고는 해도.




“노...상철 차장님이라고 하셨죠.”




지민이 주차장에 우뚝 선 채로 어느새 운전석에서 내려 지민의 캐리어를 내려주고 있는 상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죄송해요. 비행기 안에서 내내 한숨도 못 잤더니 제가 실례를 했네요.”


“아이구 아닙니다. 저야말로 만나주신 게 감사하죠.”




내민 손을 살짝 맞잡으면서 상철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지민은 살풋 따라 웃고는 금세 손을 놓았다.




“제가 한국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요. 아버지가 하도 성화셔서 약속을 잡긴 잡아야겠는데 오늘 말고는 시간이 없더라구요.”




지민은 예의 바른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목소리에는 아쉬울 거 하나 없는 사람 특유의 무덤덤함과 여유로움이 함께 묻어났다. 지민의 말을 들은 노 차장은 잠시 당황한 기색을 비추더니 금세 표정을 지우고 또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유 선수 바쁘신 거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저희야 만나서 저희 회사를 소개해 드릴 기회를 얻은 걸로도 충분히...”


“그런데 이 쪽은?”




이어지는 상철의 말을 끊고 지민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아닌 민정이었다. 눈만 꿈벅거리며 두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민정은 갑자기 자신에게로 꽂히는 네 개의 눈동자에 살짝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아, 여기는 저희 회사 마케팅팀 김민정 대리입니다.”




상철의 소개를 듣고는 있는 건지 지민은 고개를 비스듬히 꺾고 민정을 빤히 쳐다봤다. 약 한 시간 전부터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 새삼 처음 본다는 얼굴로 자신을 관찰하는 스포츠 스타 앞에서 지어야 하는 적절한 표정 따위를 민정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민정은 입술을 한 번 물었다가 혀로 쓸고는 지민을 향해 다가갔다. 다가가서 마케팅팀 대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 정중한 태도로 고개 숙이기.




“처음 뵙겠습니다. 김민정 입니다.”


“......처음?”


“...에?”




무난한 인사로 화두를 열려 했던 민정이 예상치 못한 지민의 말에 얼빠진 목소리를 냈다. 고개를 드니 눈이 마주친다. 지민이 허리를 굽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민정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민정은 또 한 번 숨을 꾹 참아야 했다. 민정의 눈썹부터 입술까지 하나하나 꼼꼼히 뜯어보는 새카만 두 개의 눈동자. 그 상태로 한참을 민정을 본 지민이 확신에 찬 얼굴로 다시 말했다. 역시. 맞네. 멀리서 보니 확신을 못했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확실히 맞아.




“우리 처음 아닌데. 우리 구면이에요.”


“네......? 저희가요?”




그럴리가요. 민정은 어리둥절했다. 본 얼굴이면 기억을 못 할 얼굴이 아니시잖아요. 그러니까. 유지민씨가. 속으로만 열심히 항의하는 민정의 표정을 읽은 지민이 한쪽 입 꼬리만 올려 웃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어쩐지 그 얼굴이 민정은 살벌했다.




“김민정씨는 나 기억 못해요? 와. 되게 서운하네.”




이런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 조차도 나 같은 회사원 나부랭이에게는 치명적인 공격이 된다는 것을 유지민은 모르는 걸까. 스포츠 스타를 못 알아보는 스포츠 마케터? 당장 자격증부터 따고 딴 일 알아봐야 할 판이었다. 그만큼 민정은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민정은 진짜. 진짜로 지민을 만난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그래요. 우리 악수부터 하죠.


“반가워요. 나 유지민이에요.”




운동 선수 치고는 눈에 띄게 작은 손이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였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의외의 모습이라며 패널들을 한참을 웃고 떠들게 했던 그 손이 민정 앞에 흔들거린다. 나랑 손 안 잡을 거예요? 그렇게라도 묻는 듯.



민정은 엉겁결에 재촉하는 지민의 손을 맞잡았다. 상철과의 그것과는 달리 지민은 민정의 손을 꽉 잡아왔다. 손은 의외로 따뜻했다. 아니.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불에 타오르는 듯한 생생한 촉감에 화들짝 놀라 금방 손을 빼내려던 민정을 막은 건 지민이었다. 민정의 손을 놓치지 않고 힘주어 잡아 쥔 채로 지민이 고개를 틀어 상철을 보며 말했다.




“차장님 저희 내일 다시 보죠. 제가 내일 회사로 갈게요. 아까 회사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예? 예??? 아. 에스엔앰입니다. 사옥은 한체대 쪽에 있어요.”


“회사 위치 좋네요. 몇 시에 갈까요? 한 시. 한 시가 좋겠다. 그쵸?”




퍽 쾌활한 목소리였다. 아 뭐. 상철은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그 얼굴은 민정만큼이나 어리둥절해 보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 가늠하기 어렵다는 얼굴이 해답을 원하듯 민정을 쳐다봤지만 민정이라고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리 없었다. 모든 상황을 온전히 알고 있는 건 지민 혼자인 듯 했다.




“아. 근데 유 선수 아까는 오늘 말고는 시간이 없다고...”




상철이 머뭇거리면서 말을 흐렸다. 그 말을 들은 지민이 짧게 웃음을 터트린다. 웃음기가 잔잔하게 남은 얼굴이 다시 민정을 향한다. 시선으로만 민정을 꽉 채운다.




“그러게요. 근데 방금 생겼네요. 그 시간이.”




입술만 움직여 느긋하게 웃는 얼굴 앞에서 민정은 어쩐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단단히 묶는다는 게 이럴 때 쓰는 표현이구나 싶다.



그리고 우리 김민정 대리님은. 다시 운을 떼는 목소리에 민정이 찔끔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일까지 나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오기. 숙제.”




단단하게 엄포하는 그 말까지 듣고 나서야 민정은 지민의 손으로부터 풀려날 수 있었다. 손바닥은 어느새 민정 자신의 땀으로 축축했다. 민정은 티나지않게 손을 뒤로 돌려 청바지에다가 손을 쓱쓱 닦았다.











“야! 내가 말 했지! 니가 내 행운의 부적이다!”




유지민이 우리 회사에 직접 오다니. 청소업체 불러야하는거 아니냐. 대표님이 이걸 아시면. 아 대표님한테 당장 전화부터 해야겠다.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상철은 연신 그런 말을 했다. 소리를 지르며 민정의 어깨를 잡고 흔들기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민정은 느리게 눈만 깜박였다. 모든 것이 멍했다. 방금 자신이 만난 사람이 불세출의 미녀 테니스 스타 유지민이라는 것도, 그 유지민이 한낱 쩌리 직장인 김민정을 먼저 알아본 것도 다 현실감이 없었다. 뺨은 여전히 뜨끈했다. 지민에게 손이 붙잡혔던 내내 아마 붉게 달아올라 있었을 것이다. 지민은 뭐라고 생각했을까. 바보 같다고 느끼진 않았을까.




“대표님. 놀라지 마십쇼!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 김 대리 두고 보라고, 대형 사고칠 놈이라고 말씀 드렸죠?”




통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민정은 어느 새 어둠이 짙게 깔린 한강을 넘겨다 봤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는데 자신의 손을 있는 힘껏 잡던 지민의 그 메마른 손의 뜨거움만은 여전히 생생했다. 작지만 자신의 손을 틀어쥐기엔 충분했던 운동 선수 특유의 단단하고 강인한 손. 생각 끝에 뺨이 다시 홧홧해져온다. 민정은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애를 쓰며 자신의 빈 두 손을 자신도 모르게 서로 맞잡았다.



2.




민정은 양 손에 든 음료 캐리어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회의실 문을 등으로 밀었다. 총 5개의 음료가 담긴 캐리어 두 개를 회의실 테이블에 내려놓은 민정은 숨을 고르며 곧 이 곳에서 일어날 회의를 머릿속에 그려봤다. 대표님이 드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임 변호사님이 드실 카푸치노. 노 차장님이 드실 바닐라 크림 콜드브루. 그리고 나머지 두 잔은 자허블과 자바칩 프라푸치노였다. 민정은 이마를 긁적였다. 조사를 한다고 하긴 했는데 크게 자신은 없었다. 그러니까, 유지민이 이 두 개 중에 무슨 음료를 선택할지 말이다.



지난밤 집으로 돌아간 민정이 밤새 인터넷을 서치하며 알아낸 바로는 지민은 커피를 그다지 즐겨마시지 않는 것 같았다. 몸 관리를 위함인지 아니면 취향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어도 인터뷰 중 찍힌 사진이나 파파라치 샷 속에서 지민이 마시고 있는 음료는 물이나 스포츠 음료를 제외하면 거의 자허블이나 달달한 프라푸치노들이었다. 그래서 나름 고심 끝에 골라온 메뉴들이었다. 물론 민정이 마시게 될 음료는 지민에게 선택 받지 못한 비운의 것이 될 터였다. 둘 중에 하나는 먹겠지? 먹었으면 좋겠는데. 자신이 무엇을 먹게될 지는 이미 고려사항이 아닌 민정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얹었다.




“김 대리 벌써 나왔어? 오 역시 쎈쓰. 땡큐 잘마실게~”




회의실 문을 힘차게 열어젖힌 상철이 익숙하게 자신의 몫의 커피를 집어 든다. 쥐 죽은 듯 조용했던 회의실이 상철의 등장으로 금세 시끄러워진다. 민정은 익숙한 그의 수다를 듣지 않고 흘리며 힐끔 회의실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12시 50분을 막 넘어가고 있는 시간이었다. 정말로 10분 후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지민이 여길 온단 말이지. 믿기지가 않네. 와. 진짠가. 고작 어제 본 사람인데도 봤다는 것이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인물이라 민정은 지민이 이 곳에 들어설 때까지는 계속해서 이런 얼떨떨한 기분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유지민은 정확히 1시 정각에 회사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오. 어? 처음 뵙는 분이 두 분이나 계시네.”




운동선수치고는 살짝 늦었고, 스타 플레이어치고는 과하게 성실한 시간감각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민정에게 지민은 고개를 까닥이는 정도로만 인사를 했다. 엉거주춤 따라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을 때에는 지민은 이미 대표를 필두로 한 회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민정은 어색한 동작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적당한 인사말들이 오가는 가운데에 멀뚱히 서있다가 틈을 봐서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던 음료 두 잔을 양 손에 쥔 채로 한 번에 지민을 향해 내밀었다.




“저.... 유지민 선수.”


“네?”


“음료요.”


“....저 이거 두 잔 다 마시라구요?”




황당함이 덧칠해져 있는 목소리와 멀뚱거리며 민정을 응시하는 눈.




“아. 아. 아뇨아뇨. 당연히 아니죠. 한 잔만 고르시면 됩니다.”




민정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왜 이렇게 바보같이 굴어. 속으로는 제 스스로의 어설픔을 탓했다. 하나는 자허블이구요. 하나는 자바칩 프라푸치노인데. 그게 그러니까. 제가 뭘 좋아하실지를 정확히 몰라서. 설명을 이어나가던 민정이 입을 다문 건 쑥 들어와 자허블을 손에 쥐는 새하얀 손을 본 직후였다.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가벼운 웃음과 함께 자허블이 떠나간다. 민정은 입술을 말아 물며 남겨진 자바칩 프라푸치노를 손에 든 채로 몸을 돌렸다. 와야 할 사람은 다 왔으니 이제 민정은 빠져야 할 차례였다. 어른들 얘기하시는 자리에 애가 남아있는 건 실례니까.




“대리님. 어디가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을 때, 민정은 이번에는 총 8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광경 앞에 놓여야 했다. 이들 중 자신을 부른 사람은 틀림없이 유지민이었다. 제일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순간 정신이 아찔해진다. 아무래도 자신은 미비한 무대 공포증이라도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내심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 저는 회의 참석자가 아니라서...”




설명을 하려는데 이번에도 지민의 방해가 먼저였다.




“그런게 어딨어요. 저 때문에 토요일 출근까지 하셨는데. 아쉬운 대로 여기 앉아서 제 얼굴이라도 많이 보고 가세요.”




이건 농담일까. 진담일까. 민정은 말문이 막혀 멍청히 눈만 깜박였다. 그런 민정을 구해준 사람은 상철이었다.




“그래, 김 대리. 회의에 참석자 비참석자가 어딨어. 많이 참여할 수록 좋은 거지. 여기 자리도 많은데 여기 얼른 앉아.”




의자까지 빼내주며 호들갑을 떠는 통에 이제는 회의에 참여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해지는 상황이 됐다. 하는 수 없이 민정은 회의실 구석 자리 의자를 빼내어 거기에 앉았다. 앉으며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자 거기엔 또 지민의 눈동자가 있었다. 벌써 회의실 상석에 자리잡고 앉아있던 지민은 종이 빨대를 물고 민정이 사온 자허블을 쪽쪽 빨고 있었다. 어찌나 힘을 주어 마시는지 그 볼이 움푹 파여있었다. 눈이 마주치니 자신의 눈을 접으며 제법 살갑게 웃는다.



그런 지민은 코트 위의 유지민 보다는 느슨해 보였고 어젯밤 본 유지민 보다는 생기가 넘쳐 보였다. 오프때는 이런 얼굴을 하고 있나 보지. 어제는 거만해 보였는데 오늘은 또 소탈해 보인다. 하루 만에 사람의 이미지가 이렇게나 바뀌는 것을 보니 확실히 유지민은 김민정에게 낯선 사람이었다. 민정은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상기했다. 그리고 또 생각했다. 지민을 과거에 민정이 알았을 리 없다고. 어제의 그 작은 해프닝은 순전히 지민의 오해에서 비롯한 일일 것이라고.




“음. 뭐 대충은 아실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제가 지금까지는 회사가 없었어요. 운 좋게 어릴 때부터 스폰서를 잘 만나서 별 어려움 없이 운동을 하기도 했고, 광고 계약 같은 건 부모님이 알아서 관리해주셨는데. 이제 저도 제법 성인이 됐기도 했고, 이제는 부모님이 모르시는 저만의 비자금이라는 것도 좀 가져보고 싶기도 하고.”




마지막 말을 마치며 지민은 하하 웃었다. 입으로 소리 내어 분명하게 발음했다. 하하. 농담이니 웃으라는 소리였다. 눈치껏 회의실에 웃음들이 흐른다. 웃음과 동시에 여러 시선들이 오고 가는 가운데에서 민정은 자신의 몫의 프라푸치노를 입에 넣었다가 금세 뱉었다. 윽. 너무 달아. 이걸 왜 돈 주고 사먹지. 지민의 말은 끊기지 않고 금세 이어진다.




아무튼 그래서 제가 슬슬 매니지먼트 회사를 알아보려 하는 중인데.




곧장 본론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민정도 여기 앉은 회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퍽 긴장이 돼서 음료를 내려놓고 가만히 지민을 응시했다.




“솔직히 말하면 에스앤엠? 처음 들어봤어요. 찾아보니까 아직은 회사가 주로 신인급 선수들 발굴하고 계시는 단계 정도더라구요.”




지민이 눈썹을 들썩인다. 동의를 구하는 모양새였지만 회의실 안의 그 누구도 지민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나이는 회의실에 앉아있는 인원 중에서 두 번째로 어리지만 존재만으로도 수억을 넘어서 수십억을 몰고 다니는 이 젊고 자신만만한 스포츠 스타가 막 시작하는 단계인 중소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에 와서 뭘 요구하려는지 슬슬 가늠이 안돼 모두가 불안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에스앤엠과 계약을 한다면 모두가 놀라겠죠. 유지민 정신 나갔다고 하겠죠. 그리고 저는 그들에게 보란 듯이 에스앤엠에게 그 누구도 감히 상상도 못했던 정신 나간 액수의 돈을 벌어다 주겠죠.”




그것도 일 년이 아닌 몇 년 동안 말이에요. 뻔뻔하리만치 태연한 얼굴로 유지민은 자신의 가치를 굳이 되짚어나갔다. 모든 말들이 반박할 여지가 없는 사실들이다. 나름 이 바닥에서 날고 긴다는 중년의 남자들이 실시간으로 기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민정은 자신의 회사가 가차없이 평가되는 모습이 슬프다가도 또 재밌기도 했다. 한 편으로는 묘한 쾌감이 일기도 했다. 고작 한 살 차이일 뿐인데 저런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유지민이라는 존재에게 대리 만족을 느꼈다.




“그래서 에스엔앰은 저랑 몇 년 계약을 원하시는 건가요?”




또 곧장 본론. 회의실을 쥐락펴락. 지민은 마치 이미 승부의 추가 기울어진 경기하듯 굴었다.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저희는 우선 4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민이 눈을 좀 크게 떴다.




“와. 제 영혼까지 전부 소유하고 싶으시다는 거네요.”




웃음이 섞여있었지만 이번엔 아무도 웃지 않았다. 너무 길다는 의미를 돌려 말하는 중이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았다. 당연한 충돌이었다. 유지민은 이제 고작 26살이었고, 만으로는 24살이었다. 테니스 선수로는 완전한 전성기의 나이였다. 회사는 그런 유지민이 전성기를 보낼 때까지 전부 소유하고 싶은 욕심일 테고, 유지민은 자신의 전성기를 한 회사에서 모두 보내기 보다는 더 좋은 대우, 더 많은 광고를 해줄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니고 싶을 테고. 무엇보다 유지민이 직접 언급한 것처럼 S&M이 지민이 4년 동안 믿고 몸 담을 만한 확실한 회사일 거라는 보장은 전무한 상태니까.




4년. 4년... 유지민이 매끈한 턱을 자신의 손으로 쓸며 중얼거렸다. 지민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회의실 분위기가 바뀐다. 민정도 어느새 그런 지민에게 집중해 숨조차 조용히 쉬고 있었다.




“사실 저는 어제 그냥 예의상 인사만 주고 받고 명함만 받고 말 생각이었어요. 처음 들어 보는 회사라 불안하기도 했고, 저에게 직접 컨택을 하신 게 아니고 가족을 이용해 청탁의 모양새를 띈 게 영 별로라서.”




이 지점에서는 노 차장의 얼굴이 평정을 잃고 순간 구겨진다. 민정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고, 자신이 평소 따르는 상사가 곤란함을 겪는다는 것에 불쑥 반발심이 치밀어 인간 유지민을 향한 호감도가 자신의 마음 속에서 팍팍 깎여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니 깎아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어서 오늘 이렇게 마음만 맞으면 계약까지 할 결심을 하고 에스앤엠에 찾아온 것은.”




몇 점이나 깎을까. 50? 아니야 500? 민정이 그런 무용한 생각만 골똘하게 하고 있을 때.




“모두 저기 있는 김민정 대리님 때문...아니야 덕분이거든요.”




한 번 더 8개의 시선이 모조리 민정을 향한다. 이번에도 유지민의 말 한마디 때문이었다. 민정은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는 등허리를 느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물을게요. 김민정 대리님.”


“에? 아니 예? 네??”




제가 생각해도 터무니 없을 만큼 바보 같은 목소리였다. 오래도록 말을 하지 않았던 통에 볼품없이 나간 새된 톤은 덤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민은 민정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낸 숙제. 해왔어요?”




벼락같이 찾아온 숙제 검사 시간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차피 큰 기대를 했던 계약도 아니고.




쉬는 날이면 아예 업무용 핸드폰을 꺼버리는 상철에게서 날아온 위로 메시지야말로 민정이 얼마나 큰 사고를 쳤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민정은 침대에 누운 채로 핸드폰을 곁에 떨어트려놓고는 얼굴을 양손에 파묻었다. 상황은 한 줄로 설명이 가능했다. 유지민과의 계약을 날렸다. 부연설명을 붙이면 이랬다. 숙제를 못한 김민정에게 실망한 유지민이 계약 건은 없던 일로 하자는 말 한마디만을 남겨놓고 회의실을 떠났다. 다시 핵심요약. 김민정이 모든걸 다 망쳤다. 이상 끝.



민정은 2월이라 아직은 너무나 차가울 한강물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추위를 잘 타기 때문에 추워서 죽기는 싫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민정도 알았다. 다 헛소리였다.




구면이고 숙제고 나발이고 다 핑계고 사실은 중소 회사 하나 가지고 놀고 싶었던 거 아니야?




열받은 상태에서 무심코 나온 생각이었지만 두 번의 만남 동안 민정이 지켜본 유지민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법한 가정이긴 했다. 눈에 띄게 몰상식한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지민은 틀림없는 스타 플레이어의 전형이었다. 스스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그 가치를 이용해 사람들을 조종할 줄 알았다. 바꿔 말하면 나쁜 마음 한 번 먹으면 쩌리 회사에 이제 막 대리 직함을 단 쩌리짱민정 따위는 손쉽게 짬쪄먹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와나. 갑자기 열받네.




민정은 벌떡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생각 하다하다보니 진짜로 그런 듯 했다. 그런 듯이 아니고 확실했다. 이제야 깨달았다. 회사 전체가 유지민에게 완전히 농락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내가 유지민과 아는 사이였으면 못 알아봤을 리가 없잖아. 못 알아보는 게 다 뭐야. 아는 사이었으면 싸인도 받고, 어? 사진도 찍고, 어? 아니. 이게 아니고.



민정은 씩씩대며 다시 핸드폰을 들어 인스타그램에 들어갔다. 검색을 해서 유지민의 계정에 들어갔다. 계정명 옆에는 당당하게 파란색 배경의 체크 표시가 달려있고, 팔로워수는 무려 800만명이 넘는 유지민의 공식 계정에. 알 바야 쓰레빠야. 인터넷 세상에선 익명이 곧 법이다. 민정은 익명이라는 비겁함에 기대 지민에게 디엠을 보내 실컷 욕이라도 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5분 전에 유지민이 올린 새 게시물을 발견하는 순간, 민정의 생각의 궤도는 완전히 선회하고 만다.



지민이 올린 사진은 흔하디 흔한 인증샷이었다. 오늘 마침 광고 촬영 중인 지민을 위해 팬들이 돈을 모아 커피차를 보내준 모양이었다. 음료 하나와 마카롱 하나를 양 손에 쥔 채로 커피차 곁에 서서 인증샷을 찍은 그 길쭉늘씬한 몸이 민정은 그렇게 오늘따라 얄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비록 숫기가 없고 정보력도 딸리는 민정이었지만 그런 그에게도 자신 있는 것은 있었다. 그건 바로 기억력이었다. 민정은 한 번 가 본 곳은 절대로 잊지 않는 무서운 기억력이 있었다. 그래서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지금 지민이 촬영중인 곳이 경기 북부지역 어딘가의 테니스 코트라는 것을. 작년에 지금은 회사 소속이 된 남자 테니스 선수와 접촉하기 위해 노 차장하고 가본 곳이었다.



한 번 결심한 이상 민정은 망설이지 않는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민정은 벌떡 몸을 일으켜 침대를 나섰다.










“저기. 실례가 많으십니다. 혹시 유지민 선수 어디에 계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민정은 스텝으로 보이는 아무 남자나 붙잡고 상당히 공손하게 물었다. 개인적 악감정과는 별개로 유지민은 모두의 호감을 얻고 있는 국민 스타다. 마케팅팀에서 일하는 민정의 태도는 직업병 마냥 어쩔 수 없이 영향력을 따라 기울게 돼있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광고 모델의 행방을 묻는 민정을 남자는 아래위로 훑었다.




“뭐예요? 커피차 데려온 팬이에요? 그 사람들 아까 다 유지민이랑 사진 찍고 집에 갔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남자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유지민이라니. 유지민이 니 친구냐 임마. 민정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 우선은 참기로 했다.




“아. 아니요. 저는 팬이 아니구요.”


“걔네들 아니에요? 뭐야 그럼. 빨리 나가요. 여기 관계자 외 출입금지인 거 몰라요?”




미처 민정이 자신의 소속을 설명하기도 전에 남자는 민정을 향해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손을 거칠게 휘젓는 게 당장이라도 나가지 않으면 보안업체 직원이라도 부를 기세였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남자에게 쬐끔 쫄아버린 민정은 그렇다고 곧장 목적을 포기하고 돌아서기도 싫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얼굴로 주춤거렸다. 아. 어쩌지. 어떡하지.




“그 분 저 만나러 오신 분이에요.”




그 때였다. 근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향한 곳에는 유지민이 서있었다. 얼굴은 어제와는 다르게 화장이 짙었다. 광고주의 요구가 있었는지 쨍한 색깔의 테니스 원피스를 입은 채로 포니테일 질끈 묶은 머리에는 썬캡을 쓰고 있었다. 색다른 모습을 보니 또 낯설다. 남자 스텝이 지민의 요구에 고개만 한 번 꾸벅하고 사라진 후에도 그래서 민정은 꿀 먹은 사람처럼 못박힌 듯 서있었다. 지민과 단둘이 남겨진 적은 처음이라는 사실이 갑자기 확 의식이 됐던 탓이었다.




“우리 김민정 대리님은 엄청난 워커홀릭이신가봐요. 토요일에도 일하시고 일요일에도 일하시고. 너무 회사에 충성하지 마요. 몸만 상하지.”




일평생 회사 한 번 다녀본 적 없을 지민이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는 것이 꽤 얄미워 민정은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 떴다.




“저 오늘 일하러 온 거 아닌데요.”


“그래요? 난 또 계약 한 번만 다시 생각해달라고 부탁하러 온 줄 알았네.”




지민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몸을 약간 민정으로부터 안 보이는 곳으로 비틀었다. 다시 그 몸이 민정으로 향했을 때는 지민의 입술엔 담배 한 대가 물려있었다. 민정의 눈이 저절로 커진다.




“담배... 피워요?”


“왜요? 운동선수가 담배 피우는 거 처음 봐요?”




지민이 태연하게 물었다. 당연히 그건 아닌데. 그건 아니지만. 당신은 국민 여동생. 국민 언니. 깨끗하고 건강하고 또 맑고.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모두가 다 유치한 생각들뿐이라 민정은 입술을 꾹 물었다. 지민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 되살아났다. 이쯤 되니 민정은 정말로 궁금했다. 진짜 유지민은 누굴까. 사실 지금까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지민의 모습은 전부 가짜인 것이 아닐까. 갑자기 이 곳에 찾아온 목적이 또렷해진다.




“회사 일이요. 몸 상하는 건 차라리 괜찮죠. 회사 생활하면서 제일 힘든 게 마음 상하는 거예요. 그건 모르죠.”


“마음? 마음이 상했어요? 언제?”




연기가 민정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히 내뱉으며 지민이 민정을 쳐다봤다. 그렇게 묻는 얼굴이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순하다. 짙은 화장을 하고 있는데도 그랬다. 아무래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알지 못하는 게 분명해 민정은 헛웃음을 지었다.




“당신이요. 유지민 선수, 당신 때문에 어제 상처받았잖아요. 제가요.”




지민이 담배를 쥐고 있는 손가락을 반쯤 꺾어 자신으로 향했다. 나? 라고 묻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너요. 너.




“제가 정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저 진짜로 진짜로 기억력 하나는 끝내주게 좋거든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는 과거에 만난 적이 없어요. 그저께가 처음이었어요. 물론 저는 유 선수가 단순하게 실수로 착각을 했을 거라고 믿어요.”




설마 일부러 절 골탕 먹이시려고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을 못하니 서운하다 하셨겠어요. 이 말을 하면서 민정은 슬쩍 지민의 얼굴을 살폈다. 지민은 크게 표정변화가 없었다. 이따금 담배를 입술로 가져가며 민정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제 요지는요. 단순한 실수와 오해로 계약이라는 무거운 건을 진행시키고 무르고 한다는게 말이 안된다는 거죠. 저희 회사도 지난 번에는 너무 준비가 부족했으니까 다음주에 다시 시간을 잡아서 회사로 방문해주시면 이번에야말로 진지하게....”


“김 대리님, 나한테 왜 거짓말 해요.”




아니 이 사람 진짜 사람 말 끊는 게 아주 습관이네. 민정은 이번에도 싹둑 잘려버린 자신의 말을 애써 삼키며 지민을 쳐다봤다.




“일하러 온 거 아니라더니 일하러 온 거 맞네 뭐.”




지민이 입술을 좀 부풀렸다. 어린아이가 떼를 쓸 때나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어이없게도 순간 그게 좀 귀여워 보인 민정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거짓말 또 있어. 기억력 하나 끝내주게 좋다는 말.”


“아니 그건 진짜 거짓말 아닌데.”


“거짓말 맞는데.”


“아니라니까?”


“맞다니까? 우리 만난 적 있다니까? 대리님이 기억력이 나빠서 기억을 못하는게 내 잘못인가?”


“우리 진짜 만난 적 없다니까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요!”




민정이 결국 소리를 빽 질렀다. 그 말을 들은 지민이 조금 열받은 얼굴을 했다. 손가락 사이에 쥐고 있던 담배를 바닥으로 던져 신고 있던 테니스화로 비벼 껐다. 그러더니 갑자기 휙하고 민정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질러놓고 뒤늦게 아차 싶은 민정의 목이 저도 모르게 바짝 움츠러든다.




“만난 적 없다구요?”




내가 증거 대볼까요. 그럼 믿을래요? 지민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민정에게 으르렁거렸다. 담배를 쥐고 있지 않았던 다른 손을 들어 천천히 검지를 핀다.




“대리님 여기에 점 있잖아요. 내 말이 틀려?”




민정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떡하고 벌렸다. 지민의 검지가 자신에게로 다가와 툭 하고 짚은 지점의 옷 아래에는 틀림없이 선명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봄이 오려면 아직은 한참은 남은 날씨 탓에 늘 두툼한 폴라 니트만 입고 다니는 요즘의 민정만 봤다면 절대, 절대로 몰랐을 위치였다.




“이래도 내가 다른 사람이랑 당신을 착각한 거야?”




그렇게 되묻는 말에는 뭐라 더 할 말도 없었다. 이제 문제는 정말로 과거에 유지민을 자신이 어디서 봤냐는 것이었다. 왜냐면 그 점의 위치라는 것이, 생각해 보면 계절이 여름이라고 한들 쉽게 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렇잖아. 가슴 바로 위에 있는 점인데 이걸 대체 이 사람이 언제 무슨 수로 봤다는 말이야. 나는 왜 점까지 보여준 사람을 까맣게 잊어버린 거고. 그것도 보통 사람도 아니고. 유지민을. 천하의 그 유지민을.



머리가 새하얘진 민정의 낯빛을 잠깐 살핀 지민이 짧게 기가 막히다는 웃음 소리를 냈다.




“와 진짜 기억 못하나 보네..... 이제는 오기까지 생기려고 해요.”




지민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잠깐. 이거 혹시 대리님 작전이에요?”


“....뭐가요.”


“운동선수들 승부욕 생기면 앞뒤 안가리고 끝장인거 알아서 이러는 거죠?”




알 수 없는 말이나 늘어놓는 지민에게 돌려줄 대답같은건 민정에게 없었다. 그저 괜히 찾아왔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냥 차분하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지민에게 문자로나 빌걸. 괜히 열받은 마음에 찾아와서는 진짜로 자신 때문에 다 망친 것이라는 걸 확인만 한 셈이 됐다. 한강물 여전히 차갑나. 차갑겠지. 그래.



말이 없는 민정을 또 지민이 빤히 바라봤다. 그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진짜 후회할 거 같은데. 진짜로 후회할 거 같은데. 또 혼자만 알아듣는 말만 중얼거리다가 결국 결심한 얼굴로 민정에게 손을 뻗는다. 손바닥은 하늘을 향한 채로 까닥인다.




“뭐요... 왜요.”


“핸드폰이요. 핸드폰 좀 줘봐요. 내 꺼는 촬영장 안에 있어서.”




갑자기 내 핸드폰은 왜 필요하냐고 물을 힘 조차 지금의 민정에게는 없었다. 얼굴인식까지 얌전히 해다가 건네주니까 지민이 작은 만족감이 어린 얼굴로 씨익 웃었다. 그 상태로 지민은 화면을 좀 조작하는 듯 하더니 금세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


“아~ 안녕하셨어요. 아뇨아뇨. 저는 김 대리가 아니구요. 아뇨아뇨. 사고가 나긴요. 김 대리님은 제 앞에 멀쩡히 살아계세요. 네네.”




멀거니 지민이 하는 걸 보고만 있던 민정의 정신이 천천히 되돌아왔다. 지민이 통화하고 있는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민정도 아는 사람인 듯 했다.




“아 제가 누구냐면요. 저 유지민인데요. 하하하. 네네. 놀라셨죠. 네. 저도 김민정 대리님이 이 황금 같은 일요일에 휴식도 포기하시고 저랑 계약해보겠다고 찾아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그쵸. 네. 그러니까요. 차장님은 좋으시겠어요. 이런 직원을 두셔서.”




지민의 말을 들은 민정의 눈이 한 순간에 커진다. 지민은 지금 상철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저도 좀 지금 제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고, 오늘밤에 집에 돌아가서 엄청 후회할 것 같긴 한데요.”




마치 상철이 눈 앞에라도 있는 것처럼 눈을 접어가며 통화를 하던 지민이 천천히 민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민정과 눈을 맞춘 지민의 입술이 망설임 없이 열린다.




“저 에스앤엠이랑 계약할게요. 4년짜리로.”




민정은 헙하고 숨을 삼켰다. 뜻밖의 말에 놀란 반응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대신 저도 조건이 있어요.”




아직 지민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조건부 계약이라는 말에 다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는 민정의 반응이 퍽 만족스러운지 지민의 입 꼬리가 하늘로 솟는다. 그 웃음이 묘하게 불길하다고 민정이 느낄 무렵 지민의 입술이 다시 떼어진다.




“김민정 대리님 오늘 부로 제 전속으로 붙여주세요. 네. 네네. 그 뜻 맞아요. 제 매니저 시켜달라는 얘기예요. 네에. 네에. 넵. 오늘부터 당장이요.”




불길함은 왜 어째서 절대로 예감을 배반하는 법이 없는지.



지민은 입을 벌린 채로 충격에 빠진 민정을 바라보며 부드럽고 여유롭게 웃었다. 그것은 자신의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을리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아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3.




한 시도 쉬지 않고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계 4대 테니스 오픈인 호주 오픈에서 한국인 최초로 결승까지 진출하셨는데, 소감 한 말씀만 부탁 드리겠습니다!”



“너무 감격스러웠죠. 뭐라 표현할 말을 찾기도 어렵네요. 정말 감격스러웠고... 또 믿겨지지가 않았고 처음 테니스 라켓을 잡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훈련들과 시합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절 응원해 주시는 많은 국내 팬 분들 덕분에 제가 늘 힘을 얻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항상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어요.”




테이블 위에 깔린, 붙여진 방송사 마크가 모두 다른 수십 개의 마이크. 그 뒤로 홀로 앉은 단 한 명의 선수.




“호주는 한국과 다르게 여름 날씨라고 알고 있는데, 한국에 돌아오셨을 때 춥지는 않으셨나요?”


“저는 늘 몸도 마음도 뜨거운 편이라 쌀쌀한 한국이 좋습니다. 모처럼 들린 건데 오랜만에 와도 참 좋네요.”




부드러운 웃음에 플래시가 촤르르 터진다. 【테니스 요정의 환한 미소. “역시 한국이 최고!”】 혹은 【“나는 늘 뜨거운 여자!” 국민 여동생 타이틀은 이제 그만】. 기자들 머릿속에는 그런 타이틀 후보들이 스쳐 지나간다. 아무래도 후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클릭수가 어마무시하게 오를 것이다. 유지민이라는 이름은 늘 화제성과 클릭수 보장으로는 일등효자상품이니까.




“결승전을 대비하기 위해 유지민 선수가 특별하게 준비하셨던 게 있었을까요?”


“습관적으로 해오던 일을 충실히 했어요. 짜여진 식단대로 먹고, 짜여진 연습 프로그램을 소화했고, 가벼운 스트레칭과 자기 전이면 늘 하는 명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오히려 결승이라고 긴장해서 안하던 짓 하면 탈날 것 같았어요.”




하하. 짧게 소리 내어 웃는다. 신호처럼 연회장을 가득 채운 기자들과 관계자들 사이에도 산발적인 웃음들이 터진다. 순간적으로 분위기는 느슨해진다. 지민은 그 틈을 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물병을 쥐어 가져와 빨대를 빨며 메마른 입안을 축였다. 다음 질문을 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손들이 들어올려진다. 방금 전 질문은 오른편에서 나왔으니 이번엔 중앙 뒷편의 사람을 고른다. 지민의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낡은 고동색 점퍼를 입고 있었다. 지민은 대수롭지 않게 습관적으로만 질문을 위해 손에 쥐고 있는 펜을 달싹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결과가 좋지 않았네요. 첫 결승 진출이라 그런가. 역시 안하던 짓까지 해봤어야 했던게 아닌가 싶은데.”




애써 지민이 띄워놓은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대신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더 크고 잦아진다. 지민의 표정변화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담고 싶다는 욕망이 담긴 소리들이 온 사방을 가득 채운다. 지민은 마음 속으로 셋을 셌다. 하나. 두울.




“그게 질문인가요?”




아아. 못 참았다. 대외적인 밝고 적당히 애교가 섞인 활달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열 받았을 때만 나오는 낮고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걸려들지 말자. 가볍게 넘기면 그만이야. 지민은 짧게 스스로를 책하며 한번 더 물을 마셨다. 그 순간에도 플래시는 수십 방이 터진다. 대박사건. 지민을 제외한 모두가 머릿속에 그 단어를 떠올리고 있을게 분명했다. 오늘 특종 하나 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꼴들이 지민은 앞에서 혼자만 보기 아까울 지경이었다. 지긋지긋하다는 감정이 행여나 얼굴에 드러날까 싶어 지민은 부러 더 천천히 물을 마신다. 그러면서 숨을 골랐다.




“방금 질문하신 분 성함을 여쭤봐도 될까요?”


“네. 저는 스포츠 전문 잡지 ‘스피드’의 최배덕 기자입니다.”




뭔 잡지 이름이 저렇게 촌스러. 지민은 싱긋 웃으며 자신을 소개한 남자와 눈을 맞췄다.




“안녕하세요, 최 기자님. 질문을 정확하게 해주시길 바랄게요. 아무래도 오늘은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기자회견 자리라서 선문답도 주고받을 수 있는 인터뷰 형식의 대화를 원하시는 거라면 제 매니지먼트 회사를 통해 정식으로 일정을 잡아주셔야 하거든요.”




오오. 지민의 입에서 나온 새 소식에 장내가 술렁인다. 지민이 회사를 찾고 있다는 소문은 벌써 다 퍼졌을 테다. 예상하지 못한 건 한국에 온지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유지민이 벌써 거취를 정했다는 점이었다. 그와 관련된 추가 질문을 하고 싶어 손들이 성급하게 들어올려진다. 그러나 지민은 일부러 못 본 척 했다. 최 기자만 빤히 쳐다봤다. 더 이상 지민의 평정을 뺏을 목적으로 두루뭉실한 말이나 던지며 시간을 끌 수 없게 된 남자의 뺨이 당혹감으로 조금 빨개지는 모습을 놓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저의 질문은. 프로 데뷔 이후로 유지민 선수의 랭킹은 매년 꾸준히 상승하고 있고, 그 만큼 기량도 점차 성장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긴 하지만, 어떤 전문가들은 유지민 선수가 좋은 선수이나 한계가 뚜렷한 선수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건 선수 본인도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민은 대답 없이 고개만 한 번 끄덕거렸다.




“그랜드 슬램 대회에서 아직 한 번도 우승을 해보지 못했다는 점, 중요한 경기 때마다 치고 나가지 못하고 매번 쓴 패배를 맛본다는 점 등을 들어 플레이 스타일에 변화를 꾀하는 것이 맞는 것 아니냐 혹은 뚜렷한 위닝샷의 부재가 원인 아니냐 하는 목소리들이 많습니다. 이에 대한 유지민 선수 본인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지민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화기애애하고 무난하게만 흘러갈 줄 알았던 기자회견은 지민의 대답을 기다리는 수 백 개의 눈들이 지켜보는 엄중한 심판장으로 바뀐다. 적어도 지민은 그렇게 느꼈다. 혀 하나 잘못 놀리면 칼날지옥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지민은 이럴 때면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그랬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왜 이다지도 늘 힘든지.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것들. 알지만 쉽사리 극복하지 못하는 문제들은 늘 사방에 깔려있기 마련이었다. 오늘의 이 질문도 그 중 하나겠지. 지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제 부족함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코칭 스텝들과 활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문제점을 보완 중에 있습니다. 늘 저를 응원하고 기대해주시는 분들께 우승이라는 좋은 소식으로 찾아 뵙지 못한 점 사과 드립니다.”




지민은 마이크에서 잠깐 입술을 떼고는 고개를 숙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을 뜨고 있을 수 조차 없는 번쩍거리는 플래시 세례가 지민의 숙인 등 위로 쏟아져 내린다. 유지민은 그 가운데에 오직 홀로 앉아있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다시 고개를 든 지민이 익숙하게 마이크로 얼굴을 가져간다. 짧게라도 어떻게 보완해 나갈 생각인지 들려줘야 할 차례였다. 그래야 모두가 이 <유지민 선수 귀국 및 호주 오픈 결승 진출 기념 특별 기자회견> 이 열린 명동 L호텔 연회장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지민은 그걸 잘 알았다. 그래. 아주, 잘 알았다.




“와 아니 씨발 진짜 양아치 새끼들이네.”




참을 수 없음에 벌컥 화를 내며 들여다 보고 있던 핸드폰 화면을 김민정 대리가 신경질적으로 꺼버린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야야. 아서라. 니가 간다고 뭐가 달라지냐. 유지민이가 그런 질문 한두 번 받아봤겠어?



상철은 씩씩대며 걸려온 민정의 전화에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지민이 한국에 올 때면 쓴다는 전용 실내 테니스코트의 위치를 카톡으로 전송해 주었다. 그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일부러 어그로를 끌기 위함이든 냉철한 기자 코스프레를 위함이든 이 정도 질문으로 프로 데뷔 이후로 인터뷰를 해봤어도 수백 번은 해봤을 유지민이 마음의 상처를 입거나, 뭐 깊은 우울감에 빠지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건 민정도 안다. 그쯤은 알 것 같았다. 심지어 민정이 기자회견 실황 녹화 영상을 본 건 기자회견이 끝난 지 여섯 시간도 넘은 시점이었다. 기자회견장에서 조금이나마 받았을 법한 상처들도 이 시간이라면 저녁 한 끼 잘 먹고 배 두들기면서 깨끗이 잊었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그런데도.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닌데도.



민정은 상철에게서 주소를 전해 받자마자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네비에 주소를 찍으면서 확인한 시간은 어느새 저녁에서 밤으로 접어드는 시간이었다. 민정도 스스로가 이해가 안됐다. 뭐가 이렇게 마음에 걸리지. 또 뭐가 이렇게 신경 쓰이고. 손바닥 만한 휴대폰 액정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지민은 늘 미디어에서 접해왔던 유지민의 모습 그대로였다. 소탈하고 유머러스하고 국민적 인기에 도취되지는 않으면서도 그 관심을 적당히 즐길 줄 아는 타고난 스타 플레이어.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질문을 차분하게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쪽으로 반응한 점도 훌륭한 태도였다. 군더더기 없이 다 좋았다. 역시 에스앤엠이 다시 회사를 창립해도 못 건질 대어를 잡았다. 그래. 다 좋은데.



정작 민정이 거슬렸던 건 따로 있었다. 많지도 않았다. 딱 하나였다. 그 하나 때문에 민정은 지금 가속 페달을 밟으며 퇴근시간이 지나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고 그래서 가장 깊게 각인되고 말아 운전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서 자꾸만 맴도는 그 장면.



짧지만 진심이 담겨있다고 느껴질 만한 사과 이후에 다시 말을 하기 위해 마이크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가던 순간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던 유지민의 얼굴. 민정으로선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빳빳하게 선 목과 꿀렁이던 목울대. 정말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해서 하는 사람처럼. 좋은 음식보다는 싫은 음식부터 냅다 삼켜버리는 착한 어린아이가 짓는 표정과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 유지민이가.



그래. 별 거 아닐 수도 있었다. 아닐 확률이 월등히 높았다. 오랜 인터뷰에 목이 말랐던 걸 수도 있고, 그냥 무심코 말을 하기 전 흔히 하는 습관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민정은 자신의 이 기묘한 신경쓰임이 사실은 과민반응이었음을, 지민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해프닝이었음을 확인 받고 싶었다.



얼마나 남았지. 민정은 시선을 틀어 내비게이션을 본다. 목적지까지 남은 시간 10분. 민정은 가속 페달에 올려둔 발에 좀 더 힘을 주었다. 차는 막힘 없이 목적지를 향해 어둠이 짙게 깔린 길을 헤치고 나아간다.











“다시.”


팡.


“다시 주세요.”


팡.


“한 번 더.”


팡.




민정은 행여 큰 소리를 내어 집중을 깰까 싶어 조심스럽게 코트장 안으로 들어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지민은 서브 연습 중이었다. 있는 힘껏 뛰어올라 공을 반대쪽 코트로 날려보낼 때마다 곁에 선 코치로 보이는 남자에게 지민은 새 공을 요구했다. 아 하필 또 되게 신경 쓰이는 훈련을 하고 있네. 지민이 항상 약점으로 지적 받는 것 중 하나가 서브와 리턴의 발전이 더디다는 것이었다. 랠리 능력은 좋은데 서브공격과 리턴공격이 무뎌 반대로 원샷원킬로 경기를 끌어가는 선수를 만나면 짧게는 4구 안에 포인트를 잃었다. 속수무책으로 끌려 다녔다. 오늘 기자회견장에서 받은 공격도 이와 같은 문제점 지적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이 늦은 시간까지 자신의 약점인 서브 연습을 하나. 민정은 별게 다 신경이 쓰였다.



연습은 민정이 코트장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민정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연습에 몰두하는 지민 탓에 민정도 잔뜩 집중해서 지민이 운동하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코치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한 지민은 그런 말과 함께 코트 바닥 위로 벌렁 누워버린다. 멀리서만 봐도 완전히 지쳐 나가 떨어진 듯한 얼굴이었다. 손에 쥐고 있던 라켓을 여전히 손에서 놓지 못한 채로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눈만 꿈벅꿈벅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민정은 슬몃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지민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지민이 넋이라도 나간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생각에 빠져 민정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는 듯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누워있는 지민에게 몸을 기울여 눈을 마주쳤다. 지민의 얼굴 위로 어둡게 민정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지민의 눈가가 자신의 시야를 가로막은 사람을 알아보기 위해 가늘어졌다가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셔 잔뜩 찌푸려졌다가 이내 반가움으로 커진다. 어. 어어. 김 대리님이다. 씨익 웃는데 그러면서도 몸을 일으킬 힘은 없는지 여전히 코트에 그대로 누워있는 지민을 따라 민정도 지민 곁에 주저앉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저도 나름 이 바닥 잔뼈가 굵어요. 여기저기 찔러볼 데 많아요.”




괜히 허세 한 번 부려보는 민정에게 지민이 힘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훈련 엄청 열심히 하네요. 좀 쉴 줄 알았는데.”


“쉬긴요. 곧 다시 대회 나가 봐야 하는데. 원래 같았으면 한국도 들어오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근데 왜 들어왔어요? 라고 민정은 묻고 싶었다.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그러나 물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지민에게 민정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아무도 그 이름을 모르는 매니지먼트 회사 직원과 모두가 그 이름을 아는 테니스 선수 간의 간격은 얼마나 될까. 지금 지민이 누워있는 코트바닥에서부터 그런 지민의 얼굴을 환하게 밝히는 조명이 매달려있는 저 천장까지의 거리? 아니면 한국에서 다음 대회가 열릴 미국까지의 거리? 그거보다 더 할까? 지친 건지 할 말이 없는 건지 입술을 꾹 다문 지민은 눈마저 질끈 감고 있었다. 괜히 왔나 민정은 뒤늦게서야 후회를 했다. 몇 번 말 좀 주고받았다고 지민이 민정을 친근하게 여길 리가 없는데. 벌써부터 지민을 편한 사람처럼 느끼고 인터뷰 질문 하나에 여기까지 달려온 자신이 누가 봐도 우습고 이상한 사람이었다.




“대리님 얼굴 보니까 그래도 좋네요. 우리 엄청 오래간만이잖아요.”


“오래간만은요. 일요일에 보고 월,화,수. 오늘 목요일이니까 삼일밖에 안 지났는데.”


“3일이면 엄청 오래간만 아니에요? 내 팬들은 경기 때만 보는 거 감질맛 난다고 광고 좀 맨날 찍어달라던데. 티비만 틀면 나왔으면 좋겠다고.”


“그건 유 선수 팬들이니까 하는 소리구요.”


“그럼 김 대리님은 제 팬 아니에요?”




지민이 눈을 번쩍 뜨더니 몸을 일으켜 아빠다리를 하고 앉았다. 왈칵 화라도 내려는 모양새로 민정의 얼굴을 향해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바람에 갑자기 지민과의 거리가 확 가까워진 민정만 괜히 민망해 시선을 피해 코트 바닥 언저리를 내려다봤다.




“아... 뭐예요. 뭐 한국 사람들은 다 유지민 선수 팬이어야 해요?”


“와. 그건 아닌데 또 막상 팬 아니라는 소리를 들으니까 되게 서운하다. 김 대리님은 저 서운하게 하는 데에는 도사네요 도사.”




지민이 우는 표정을 흉내 내며 자신의 운동복 가슴 언저리를 움켜쥐었다. 윽. 나 완전 상처받음. 몸을 푹 숙이면서 장난스럽게 중얼거리길래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역시 그 기묘한 신경쓰임은 기우였구나 싶어 민정은 안심했다. 훈련 때문에 지쳐 보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지민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삐졌다는 표시 팍팍 내면서 다시 코트에 드러누우려는 걸 보면 오히려 평소보다도 텐션이 좋아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웃음을 꾹 참으면서 대신 민정은 손을 뻗어 진짜로 코트 바닥에 다시 누우려는 지민의 팔을 잡았다. 왜 그러냐고 눈으로만 물어오는 그 눈동자에 눈을 맞춘다. 붙든 지민의 팔은 잔뜩 달아올랐다가 이제 막 식어가는 통에 용암 같이 뜨겁기도 또 한편으로는 늪 같이 서늘하기도 했다. 꼭 민정이 느끼는 지민과도 같은 촉감이었다.




“계속 장난치려고 했는데, 진짜 오해할까봐서.”




저 유지민 선수 좋아해요. 옛날부터. 나직한 민정의 말을 들은 지민의 입가가 천천히 굳는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 민정을 바라본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지민 때문에 오히려 당황한 건 민정이었다. 왜 이러지. 내가 뭐 말실수라도 했나.




“아하하. 뭐야. 와 진짜 순간 깜짝 놀랐네.”




지민이 눈을 잔뜩 접어가며 크게 웃어 버린건 그 순간이었다.




“김 대리님은 무슨 내 팬이라는 말을 그런 눈으로 사랑 고백하듯이 해요. 나 순간 심쿵했잖아. 어떻게 거절해야 하지? 싶어가지고.”




자신이 무슨 눈을 했는지 알 리 없는 민정은 지민의 반응만이 민망해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안 봐도 자신의 뺨과 귀가 새빨개져 있을게 훤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한참을 웃어제낀 지민이 읏챠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에게로 내민 손을 민정이 거부하지 않고 잡아 쥐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민정을 끌어당겨 준다. 여전히 손에 쥔 라켓을 가볍게 붕붕 휘두르며 지민이 물었다.




“내 팬이라면서 왜 내 매니저는 죽어도 하기 싫다 했어요? 난 나 싫어서 하기 싫다는 줄 알았는데.”




그 얘기라면 끝난 얘기인 줄 알았는데. 으레 그 일요일 날의 얘기다.




“그 때도 말씀 드렸지만 제가 어떻게 유 선수 매니저를 해요. 전 그냥 일개 마케팅팀 직원일 뿐인데.”


“아하. 자격이 없다?”


“자격이 없다기 보다는.... 능력이 없다? 아는 게 없다?”


“으흠.”




지민이 자신의 턱을 쓸었다. 쓸면서 민정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생각을 읽기는 어려운 눈빛이었다. 또다시 지민의 뜨거운 눈빛 앞에 꼼짝없이 갇히는 기분이다. 그게 싫은 민정은 생각나는 대로 아무 말이나 했다.




“근데요. 사과는 하지 말지 그랬어요. 그거 유 선수가 사과할 일도 아닌데.”


“....아아.”




금세 민정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린 지민이 얼굴을 풀며 어깨를 으쓱했다. 별 것도 아닌데요 뭐.




“그냥 그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거 한 번 보여준 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뭐가요.”


“지는 거 싫잖아요. 경기든 기자들에게든. 인정하기 싫었잖아요.”




기자회견 영상을 보던 때의 감정이 되살아난 민정의 표정이 점점 격해진다. 그 사람들 정말 너무 해요. 진 게 뭐 선수 잘못인가. 사람이 질 수도 있지. 좀 지면 어때. 몇 번 진 거 가지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말할 건 또 뭐야. 혼잣말을 하는 것인지 누군가에게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진 말들을 빠르게 털어놓는 민정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만 있던 지민이 큭큭대며 웃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대리님 마음 다 알았으니까 그 놈의 ‘졌다’는 말 좀 그만해요.”




귀에 딱지 앉겠네. 민정은 분한 마음에 서두르다 본의 아니게 지민에게 또 한 번 상처를 줄 뻔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입을 딱 다물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게 아닌데 이 사람 앞에선 왜 잘해보려고 할 때마다 더 엉키고 마는지 모르겠다. 삽시간에 조용해진 민정을 살핀 지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라 하는거 아니에요. 대신 화내줘서 고마워요.”


“유 선수는 고마울 일도 많네요. 미안할 일도 많고.”




민망한 마음에 민정의 말이 또 비뚤게 나가는 데도 지민은 상관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난 하도 정색하면서 매니저 하기 싫다고 못한다고 그러길래 나 되게 싫어서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나한테 관심 되게 많구나? 기자회견도 다 챙겨보고.”


“......말했잖아요. 옛날부터 좋아했다니까.”


“계속 좋아한다고 말하지 마요. 나 좀 설레려고 해. 날 기억도 못하는 사람한테.”


“유 선수야말로 기억 못한다는 말 좀 그만해요.”


“그럼 빨리 기억을 해내요.”




그렇게 말해봤자 진짜로 기억이 안나는 걸 어떡해. 민정의 볼과 입술이 심통 난 어린애처럼 부풀어 오른다. 지민은 그런 민정을 탓하지도 재촉하지도 않았다. 발걸음을 옮겨 바닥에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는 테니스 볼들을 주워 볼 바구니에 집어 넣는다. 차분히 정리를 하고 있는 지민의 뒷모습을 민정은 좀 바라보고 서있었다.




“저 근데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김 대리님이라면 나 전부 대답해줄 수 있어요. 뭐든 다 물어봐요.”




너스레를 떠는 지민에게 민정은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물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묻기 쉽다.




“근데 진짜로. 결승에서 왜 그랬어요?”




민정의 질문을 들은 지민이 뒤를 돌아봤다.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질문이 좀.. 이상한데? ‘왜 그랬어요?’ 내가 뭘 어쨌지?”


“아니 그냥요. 결승이라 긴장했을 수도 있지만 그거 치고는 너무 유 선수답지 않은 플레이라서. 난 부상이라도 입었나 했어요.”




음.


지민이 입술을 한 번 물었다가 잠깐 생각하는 얼굴을 했다.




“김민정 대리님 퀴즈 잘 풀어요? 나 갑자기 퀴즈 몇 개 내고 싶은데.”


“퀴즈요...?”


“유지민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을 가리키는 용어는?”


“베이스...라이너?”


“그럼 유지민과 같은 *베이스라이너에게 제일 갖춰야 할 덕목은?”


“빠른 발과..... 긴 랠리를 견딜 수 있는 강인한 체력, 그리고...”


“그리고?”


“멘탈 관리 능력...”




지민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대충 알 것만 같다. 민정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그럼 여기서 제일 어려운 문제! 유지민이 호주 오픈 결승에서 철저하게 진 이유는? 뭘까~요?


“......멘탈이 무너져서.”


“정답! 어휴 우리 대리님 천재네 천재. 그런 데 나가야겠어. 도전 골든벨 같은거.”




그 방송 없어진 지가 언젠데. 민정은 의미 없는 말은 삼켜버리고 대신 지민을 빤히 쳐다봤다. 민정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지민이 다가왔다. 이제는 다 식어버린 땀냄새와 함께 이름을 알 수 없는 기분 좋은 시원한 향의 향기가 훅하고 민정에게로 밀려왔다. 땀냄새가 싫을 만도 한데 민정은 지민의 냄새가 싫지 않았다. 마주 보고 선 사이로 시선이 이어진다. 민정은 숨을 조심스럽게 쉬었다. 그러지 않으면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뛰고 있는 심장을 유지민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아까 대리님이 한 말 다시 돌려줄래요.”


“......무슨 말이요.”


“능력이 없어서, 아는게 없어서 내 매니저 못하겠다는 말이요. 테니스 그런 거 잘 몰라도 돼요. 어차피 테니스는 내가 알아서 하는 거고. 내 테니스는 내가 제일 잘 알지.”


“......”


“나한테 필요한 사람은 그냥 날 위해 대신 화내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상황보다 가끔은 나를 먼저 생각해줄 수 있는 사람. 난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요.


“......”


“사실은 그래요. 대리님 말이 맞아요. 분했어요. 내가 못해서, 내가 부족해서 진 건데도 제가 부족했습니다, 유지민이 형편없어서 지고 말았습니다. 그거 인정하려니까 눈물이 막 나려는 거예요. 짜증나잖아. 근데 누구한테 짜증이 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돌아와서 여기서 훈련만 내내 했어요. 생각 그만하려고. 밥도 안 먹고 공만 쳤어. 그런데도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계속 땅굴파고 들어가고 있었는데.”


“......”


“아까 대리님이 막 표정 찡그리면서 기자들한테 나 대신 화를 내는 걸 보는 순간 기분이 사르르 녹는 거예요. 다시 기분이 막 좋아지는 거예요.”


“아니... 그건.”


“나 원래는 그래. 저렇게까지 나랑 붙어 다니기 싫다는데 내가 뭐라고 싫다는 사람 내 매니저를 시키나 싶었었거든요. 근데 마음이 또 달라졌어요. 아까 대리님이 맞춘 대로 나 멘탈 약해요. 가끔은 그런 내가 분해 죽을 것 같아. 그래도 너무너무 그랜드슬램 우승은 하고 싶어요. 대리님이 내 옆에서 나 우승할 수 있게 도와주면 안돼요?”




대리님만 옆에 있어주면 우승 그거 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 말을 끝으로 지민은 자신의 말을 마쳤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정말 한결같이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해버리는 사람이다. 민정은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느끼면서도 지민의 진지한 제안 앞에 마땅히 거절할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천하의 유지민이 우승이 너무너무 하고 싶다잖아. 근데 김민정이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잖아. 이런 말을 들었는데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천지에 과연 있을까. 일단 민정은 아니었다. 그렇게는 못했다.




“...알았어요. 해요. 하면 되잖아요. 유지민 선수 매니저 그거 내가 할게요.”




민정의 승낙을 들은 지민이 환하게 웃는다. 여전히 민정은 지민의 웃는 얼굴 앞에서 심장이 멎는 듯한 이 기분에는 익숙해지지 못했다. 아마 한동안은 계속 이럴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고작 자신 하나 때문에 기분 좋아하는 한국의 스포츠 스타와 마주보고 서있는 기분이 민정도 절대 싫지만은 않아서. 오히려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심장은 민정도 앞으로 지민과 함께할 날들을 기대하고 있음을 여지없이 말해주는 증거였다.



함께 테니스 공들을 정리하던 중에 지민이 민정에게 툭 물었다.




“근데 김 대리님 여권은 있죠?”


“여권? 네, 당연히 있긴 하죠.”


“잘 됐네요. 오늘 집 가서 짐부터 싸요. 없는건 가서 사면 되니까 제일 필요한 것들 위주로.”


“왜요...?”


“우리 내일 모레 출국이거든요. 어디로 가는지는 알죠? 내 '팬'이니까.”




사실은 대리님 티켓도 미리 다 끊어놨지롱.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식의 비밀을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털어놓는 지민을 보니 민정은 또 말문이 막힌다. 이사람은 애초에 민정을 놓아줄 생각따위는 없었던 거다. 대리님 대리님. 퍼스트 클래스 타 봤어요? 우리 그거 탈 거예요. 신나죠. 기내식도 얼마나 맛있다구요. 민정의 어이없는 기분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이 끊어 놓은 비행기 티켓에 대해 자랑만 늘어놓는 지민을 보면서 민정은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예고도 없이 자기 멋대로 일을 진행시키는 점은 좀 고쳐줘야 할 것만 같다고. 왜냐면. 우린 이제부터 함께 일 할 사이니까.


그렇게 유지민과 김민정은 미국 캘리포니아로 간다. 3월 초부터 열릴 BNP 파리바 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스포츠 선수와 그 스포츠 선수의 매니저로서. 두 사람은 이제 내일모레 이후부터는 줄곧 붙어있을 예정이었다.











* 베이스라이너 : 네트에 접근해 적극적인 공격을 펼치는 서브 앤 발리와는 달리 베이스라인 근처에서 상대방의 모든 공격을 끈질기게 받아치며 상대방이 실수할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의 플레이를 말한다. 플레이스타일상 긴 랠리는 필수이기 때문에 강인한 체력과 긴 랠리를 버틸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이 선수에게 요구된다. 또한 코트 전반을 커버해야만 하기 때문에 빠른 발과 넓은 시야도 베이스라이너라면 반드시 갖춰야만 하는 덕목 중 하나이다. 베이스라이너는 코트의 끝과 끝을 끊임없이 뛰어다니면서 한계의 한계까지 자신을 몰아세우는 플레이스타일이다. 그래서 이 스타일의 선수들은 부상도 잦은 편이다.



4.




“가서 음식 안 맞아서 배탈나면 이 약 먹구. 으슬으슬 감기 기운 있으면 이 약 먹구.”


“네에.”


“모르는 사람들이 웃으면서 말 건다고 무조건 따라가지 말구.”


“예에.”


“특히 이거 한 번 피워보라고 기분 좋아지는 거라고 뭐 쥐어줘도 절대, 절대 피우면 안 된다!”


“에에.”




에휴. 이거 맹하게 생겨가지고 그 먼 미국을 어떻게 보내나. 노 차장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쉬었다. 민정아 니가 내 영웅이다, 넌 이제부터 내 행운의 부적이 아니라 내 원더우먼이다 뭐다 난리를 칠 때는 언제고. 상철의 과잉보호 학부모 코스프레는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민정이 아까부터 그만 좀 하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내비치는 데도 아랑곳 하지 않는 상철을 멈춘 건 결국 지민이었다. 먼 발치에서 작별의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못 해 두 사람에게 다가온 것이었다.




“대리님. 저희 이제 들어가야 하는데.”




방해해서는 안 되는 둘 만의 세상이라고 느꼈는지 지민은 좀 머뭇거리면서 말을 걸었다. 민정은 반색을 하면서 기내용 캐리어를 쥐어 들었다. 차장님 저 다녀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그 인사에 첫 등교를 하는 초등학생 딸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짓는 상철은 애써 모른 척 했다.




“근데 그냥 궁금해서 별 뜻 없이 묻는 건데. 에스앤엠 가족 회사예요?”




라운지에서 탑승 시간까지 남은 시간을 때우던 중에 비치된 잡지나 뒤적거리던 지민이 잡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갑자기 물었다.




“에? 그게 뭔 소리예요?”


“아니 노상철 차장님이 혹시 김민정 대리님 아버지인가... 해서.”


“절대. 절대 아니죠. 이 얘기 들려주면 억울해서 그 분 돌아가시겠네. 차장님 아직 40대 초반에다가 결혼 한 번 안 했어요.”


“아. 그래요? 그럼 이건 우리 두 사람만의 비밀.”




민정의 말에 지민은 고개를 치켜들더니 대수롭지 않게 찌그러진 윙크 한 번 남긴다. 민정은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성이 다른데 어떻게 차장님이 제 아빠가 돼요.”


“그렇긴 한데. 또 모르잖아요.”




지민은 편견이 없었고 민정은 그런 지민이 어이가 없었다. 그럼 왜 아까 그렇게까지. 삼킨 뒷말까지 알아서 파악한 민정이 툴툴대며 대꾸했다. 그냥 제가 해외출장은 처음이라서 괜히 오바하는 거예요. 아아. 그렇구나. 민정의 설명을 들은 지민이 순순히 웃었다.




“근데 대리님 해외는 처음 아니잖아요. 미국도 처음 아니고.”




대화가 끝난 줄 알고 보던 핸드폰이나 마저 보려던 민정의 고개가 다시 들린다.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민정에게 흘깃 시선을 둔 지민이 피식 웃는다.




“말했잖아요. 난 대리님 다 기억한다니까. 우리가 언제 만났고, 어디서 봤고, 만나서 뭘 했는지.”




그냥 이 정도면 내가 기억 못해도 먼저 설명해주면 안될까. 그게 더 빠르고 서로 편할 거 같은데. 아예 보던 잡지도 덮어버리고 앞에 앉은 민정을 보는 지민은 잡지보다 흥미 있는 것을 찾아내어 퍽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확실히 민정은 미국이 처음이 아니었다. 여행으로 간 것은 아니니 꽤 긴 시간이긴 했어도 그래봤자 고작 일 년 정도의 체류였다. 그 사이의 시간들을 유지민이 안다고?




“그럼 우리 미국에서 만났어요?”




나름대로 지민의 말에서 힌트를 찾아낸 민정이 기특한지 지민이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리며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아이고. 시간 다됐네. 슬슬 들어갈까요?”




답은 들려주지도 않고 손목에 차고 있는 스마트워치로 시간을 확인한 지민이 말했다. 내가 진짜 드럽고 치사해서 빨리 기억해 내던가 해야지. 민정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지민은 빙그레 웃으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리님.”




민정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쥐고 있던 핸드폰을 재빠르게 아래로 내렸다. 민정의 바로 옆 통로 쪽 좌석에 앉아있던 지민이 빼꼼 좌석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 사진 찍고 계셨구나. 계속 찍으세요. 아니면 자리에 앉아계신거 제가 멋지게 한 장 찍어드릴까요. 저 사진 되게 잘 찍는데. 민정의 휴대폰을 빤히 쳐다보며 지민이 하던 거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다. 거 모르는 척 좀 해주지.




“아니에요. 저 그냥 핸드폰에 뭐 묻었나 본 거예요.”




퍼스트클래스쯤은 수십 번도 더 타봤을 사람 앞에서 처음 타봐 들뜬 티를 내기 싫은 민정은 빤히 보일 거짓말로 둘러댔다.




“근데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어요?”




일단은 이제부터 매니저 자격이니 민정이 지민의 안색을 살피며 재빠르게 물었다.




“아 뭐. 별 건 아닌데.”




말로는 별 거 아니라면서 되게 뜸들인다. 운을 뗀 이후로 한참 말이 없는 지민을 기다려주던 민정의 얼굴이 의아해진다. 그니까. 이게요. 제가 절대 일부러 그런다거나 나약해서라거나 그런게 아니라. 그냥 타고나기를 좀 그렇게 태어난 거거든요. 이게 절대 비행기를 오래, 자주 탄다고 해서 익숙해지고 그러는 건 또 아니더라구요. 역시 하면 할수록 느는 운동이랑은 참 달라요. 그쵸. 그런 민정을 의식한 듯 지민은 이런저런 말들을 했지만 민정이 듣기에는 다 쓰잘데기 없고 본론과는 한참 먼 곁다리 소리들이었다. 아 맞다. 이 사람 내가 빙빙 말 돌리는 거 되게 싫어하는 거 아직 모르는 구나. 이것도 기회 되면 말해줘야지.




“저 지금 유 선수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거든요? 그냥 제대로 말을 하시든가 그게 아님 곧 이륙 한다고 하니 얌전히 앉아계시던가 둘 중에 하나ㄹ...”


“저 손 좀 잡아주세요.”


“....예?”




답지 않게 민정의 눈을 피하면서 지민이 불쑥 손을 민정 쪽으로 내밀었다.




“이륙할 때 넘 무섭단 말이에요.”




이건 뭐..


자신의 코 앞까지 다가온 지민의 손과 우물쭈물 딴 곳을 바라보는 지민의 얼굴을 민정은 번갈아 봤다.




“절대 제가 뭐 대리님한테 이상한 마음 있다거나 하는게 진짜 맹세코 절대 아니구요. 진짜 비행기 뜨고 안정고도에 올라설 때 까지만 잡아주시면 되는데...”




민정의 침묵을 거절로 알아들었는지 지민이 피하던 시선을 민정에게 맞추며 허둥지둥 부연설명을 늘어놨다. 안...되나요? 역시 어려울까요? 눈썹을 늘어뜨리며 손 잡아달라 징징대는 유지민의 얼굴은 혼자 보기 아까울 만큼의 그것이었지만 민정은 이쯤만 괴롭히기로 한다. 비행준비를 모두 마친 비행기가 슬슬 이륙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요 뭐. 어려울 거 있나요. 이것도 매니저 업무에 포함되는 거죠?”




무섭다는 말은 진짜였는지 지민은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던진 민정의 농담엔 대꾸도 안하고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냅다 민정의 손을 잡아들었다.



고마워요. 역시 대리님이랑 같이 가니까 좋네요. 초조한 얼굴로 애써 민정을 향해 그런 말을 하는 지민을 민정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유지민이 이륙 공포증이 있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봤는데. 하기야 자신이 지민에 대해 뭐 제대로 아는 게 있을까 싶었다. 오늘부터 아마도 새롭게 알게 될 게 투성일 텐데.




“그리고 이따가 착륙할 때도... 잡아주셔야 해요.”




정정한다. 유지민은 이착륙 공포증이 있다. 앞으로 비행기를 탈 때마다 지민의 옆자리는 무조건 내 몫이겠네. 민정은 생각했다.



처음 잡아 쥘 때부터 느꼈지만 손이 참 작다. 근데 또 손바닥은 온통 굳은살투성이에 딱딱해. 여러모로 양극단의 면이 있는 유지민을 닮은 손이다. 사람들 앞에서 더할 나위 없이 당당했다가도 지금은 또 제 손 하나를 생명의 줄 마냥 꼭 붙잡고 벌벌 떠는 유지민과도 같은 손.



활주로로 이동한 비행기는 점점 속도를 내다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한다. 그에 맞춰 기체도 요동친다. 반사적으로 지민은 민정의 손을 쥔 자신의 손에 꽉 힘을 주었다. 잔뜩 어깨를 웅크리고 눈도 꽉 감은 채다. 민정은 손가락으로 살살 지민의 손등을 쓸어주었다. 이 작은 움직임 하나로 지민의 안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민정의 마음을 알기는 하는지 새하얗게 질린 지민의 얼굴은 비행기가 비행 안정 고도에 도달할 때까지 원래대로 돌아올 줄을 몰랐다. 그럼 매니저가 없을 때는 누가 이 손을 잡아 주었을까. 그래도 누군가 곁에 있기는 있었겠지. 그게 아니라면 너무. 민정은 순간 스치는 그런 생각은 재빨리 지워버리고 충실히 지민의 손을 잡아주는 것에만 신경을 썼다.











“와. 정신 하나도 없다. 그쵸.”




운전대를 양손으로 쥔 지민이 민정을 돌아본다. 지민의 그 말은 거짓말이었다. 아니 뭐 그래. 거짓말이라기 보다는 민정의 말을 대신 해준 것에 가깝긴 했다. 혼이 쏙 빠져나간 쪽은 지민이 아니라 민정이었으니까.



영어는 쏟아지지, 사람은 많지, 어디로 가야하는 지는 모르겠지, 중간중간 지민을 알아보고서 사람들은 다가오지, LAX공항에 도착해 미리 예약해 둔 렌터카에 올라탈 때까지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왔나 진짜 민정은 기억이 하나도 안났다. 예전엔 무서운 것 하나 없이 혼자서도 미국 여기저기를 쏘다녔었는데 싶었지만 그건 이미 수 년도 더 지난 얘기였다. 취직 이후 여행 한 번 간 적 없었던 시간들이 민정은 야속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런 민정을 챙긴 건 당연하듯 지민이었다. 대리님. 우리 이 쪽으로 가야 해요. 지민은 넘쳐나는 사람들로 복잡하기 그지 없는 공항을 제 집처럼 익숙하게 헤집고 다녔다. 다가오는 외국인들을 어떻게 대처해야할 지 몰라 쩔쩔매는 민정 대신 여유롭게 웃으면서 적당한 인사까지 해주는 것은 덤이었다.




“.....죄송해요. 알고는 있었지만 저 진짜 매니저 자격이 없네요.”




국제 면허증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 심지어 운전까지 지민에게 맡겨야 하는 민정은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조그맣게 사과를 하는 그 얼굴이 잔뜩 시무룩했다.




“제가 너무 급하게 대리님을 데리고 온 거잖아요. 저 운전하는 거 좋아해요. 괜찮아요.”




지민은 그저 부드럽고 가볍게만 웃었다. 대리님 우리 노래나 들으면서 갈까요. 더 이상 사과를 들을 것도 얘기할 이유도 없다는 듯 손을 뻗어 카오디오를 켠다.















“그래도 우리 운이 좀 따라주나 봐요. 엘에이가 제일 예쁠 때 딱 맞춰 왔네.”





제일 예쁠 때?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밀린 연락들을 부랴부랴 체크해 나가던 민정이 지민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든다. 민정은 지민이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앞차창 너머로 눈이 닿는 모든 곳이 비로소 LA였다. 그것도 서서히 그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하는 초저녁의 LA.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덕분에 노을은 몹시도 그 채도가 높아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모든 것이 생생했고 또 선명했다. 붉은색과 주황색 그리고 보라색이 각자 저마다의 빛을 강렬하게 주장하는 저녁 노을. 그 아래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높은 키의 야자수들. 그제야 실감이 났다. 캘리포니아였다.



낯선 나무들. 낯선 도로. 낯선 신호등과 표지판들. 익숙해 빠진 일상에서 잠시 벗어났다는 생각과 낯섦이 주는 기묘한 흥분감이 민정을 감싸고 돈다. 민정은 자신이 매고 있는 안전벨트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단지 일일 뿐이라며, 출장에만 집중하자며 애써 스스로를 다잡았던 것이 무색할 만큼 심장이 두근거린다. 생각해보니 오래 전 미국에 있었을 때도 캘리포니아에는 와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때도 분명 와보려 했다가 오지 못했었던 것 같은데. 잔뜩 부푸는 민정의 기분을 눈치챘는지 운전을 하던 지민이 살짝 운전석과 조수석 창문을 내렸다. 열린 창문 틈들 사이로 LA의 바람이 새어 들어와 기분 좋을 만큼만 민정의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지민은 행여나 민정이 자신을 신경 쓸까 티나지 않을 만큼만 힐끔 민정을 봤다. 언제 시무룩해져 있었냐는 듯 민정은 어느새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만 남겨두고 있었다. 지민은 웃음을 꾹 삼켰다. 마음껏 좋아해도 되는데 애써 꾹꾹 들뜸을 눌러 삼키는, 그러면서도 결국은 그 기분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민정이 귀엽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민의 그런 감정은 악명 높은 LA의 출퇴근 러시아워에 두 사람이 탄 차도 여지없이 걸리고 만 후에도 계속됐다.




“대리님. 이 구간만 지나면 또 막힘 없이 갈 거예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눈 좀 붙여요.”




지민이 몇 번이고 권했지만 민정은 한사코 거절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떻게 자요. 느리게 깜박거리는 눈에는 졸음이 가득 했고, 그 말을 하는 목소리는 웅얼웅얼 벌써 반쯤은 꿈나라로 넘어간 듯 했는데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지민은 민정의 그 머릿속이 너무 빤하게 들여다보이는 듯 해서. 선수에게 운전까지 시키고 있는데 매니저인 내가 어떻게 감히. 또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안 그래도 되는데. 정말 안 그래도 되는데. 이착륙만 늘 어려울 뿐 지민은 비행 자체는 익숙했다. 긴 비행 시간 동안 수면을 조절하는 법도 피로도를 최소한으로 낮추는 법도 이제는 빤했다. 그러나 민정은 그렇지 못했을 게 뻔했다. 일등석을 탔다고 해도 높은 클래스의 좌석이 긴 비행시간이 필연적으로 가져다 주는 피로감을 완전히 줄여주기는 무리일 테니까.



그래서 지민은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제발 자라는 말로 민정의 잠을 깨우는 대신 말 한마디 걸지 않고 운전에만 집중하는 방법으로. 그리고 그런 지민의 작전은 완전히 먹혀 들었다. 어느 순간 들려온 색색거리는 소리에 지민이 고개를 돌렸을 때, 지민은 고개를 자신에게 향한 채로 깊게 잠이 든 민정을 볼 수 있었다.



차가 신호에 걸린 틈을 타 지민은 민정을 향해 조심스럽게 팔을 뻗었다. 민정이 좀 더 편하게 잘 수 있도록 고개를 고쳐주면서 좀더 가까이서 민정의 얼굴을 살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듬직한 대리님 같다는 인상은 별로 받지 못했었지만, 지금의 민정은 정말로 그저 어린애 같았다. 왜 이렇게 귀엽게 생겼지. 지민은 무심코 생각한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도 안 변했어. 또 생각해 버린다. 지난 세월이 무색했다. 잊었다고만 생각했던 오래된 어느 날의 기억 속에서 당장 튀어나온 듯한 민정이 지민은 신기했다. 그 날 함께 나눠 마신 칵테일의 이름과 함께 들었던 올드팝까지도 전부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하고 이상했다. 정작 민정은 지민을 새까맣게 잊었는데도 말이다. 그럼 내가 가르쳐 준 주크박스 사용법도 다 까먹었겠네. 뒤에서 그 몸을 감싸 안는 듯한 동작으로 어설프게 수작이나 부릴 줄 알았던 어린 날의 유지민과 함께.



신호가 다시 바뀐다. 못내 아쉬운 마음을 삼키며 지민은 차를 출발시켰다. 어쩌면 그 날이 강렬했던 것은 나 혼자 뿐이었는지도 몰라. 민정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별볼일 없었던 하루였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더 쓰다. 생각 끝에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내밀고는 삐죽거렸다.











대리님. 김 대리님.




몸이 흔들리는 기운에 아주 깊은 수면 속으로부터 급하게 끌어올려진 민정은 번쩍 눈을 떴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니 바로 눈 앞에는 지민의 얼굴이 있었다. 조수석 문을 열어 민정을 깨우기 위해 몸을 기울인 채였다. 이거 어딘가 굉장히 익숙한 장면인데. 기시감을 느낀 민정은 짧게 얼굴을 찌푸린다. 민정이 눈을 뜬 것을 확인한 지민이 허리를 펴고서 민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잠에서 덜 깬 민정이 무심코 그 손을 붙잡고 차에서 내렸을 때 바깥은 벌써 한밤중이었다.




“저 대체 얼마나 잔 거 예요?”


“얼마 안 잤어요. 한... 30분쯤? 근데 그 사이에 해가 다 져버려서 이렇게 캄캄해졌네요.”




민정을 도로에 세워둔 채로 차 트렁크를 향해 걸어가며 지민이 대답했다. 그나저나 여긴 또 어디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탓에 시간감각도 공간감각도 무뎠다. 모든 게 어리둥절했다. 한국의 자동차들보다 훨씬 그 덩치가 큰 차들이 쌩쌩 지나가던 환한 고속도로는 사라지고 어둠이 깔린 도로를 몇 개의 가로등 만이 밝히는 곳이었다. 사방은 조용했는데 눈앞에는 새하얗고 깨끗해 보이는 2층짜리 건물만이 서있었다. 민정은 눈치껏 지민의 곁으로 다가가 짐 내리는 것을 도우며 물었다.




“여기가 숙소예요?”


“네. 근데 주최 측에서 빌라로 예약해 줬네요. 조용히 쉬라고.”




들어갈까요. 짐을 모두 내린 지민이 트렁크를 힘을 주어 내려 닫으며 싱긋 웃었다. 미국에 도착 후 한 시도 못 쉰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싱그러운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잠에서 막 깬 자신의 얼굴이 퍽 신경이 쓰인다. 민정은 자신의 뺨을 괜히 한 번 쓸었다.




“대리님, 큰 방 쓰실래요 작은 방 쓰실래요?”


“저를 대체 어디까지 민망하게 만드실 거예요. 당연히 제가 작은 방이죠.”




꼭 안 그래도 되는데. 지민은 중얼거렸지만 민정은 그 말을 못들은 척 했다.




“와. 김민정 출세했네.”




자신의 몫인 룸으로 들어서자마자 민정의 입에서는 그런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작은 방이라고 해도 방 하나가 웬만한 객실 하나보다도 크다. 짐 정리는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은 침대에 걸터앉아본다. 푹신한 침구가 푹 꺼지면서 적당히 단단한 침대가 민정의 몸을 안정적으로 받치며 출렁거린다. 커튼을 열어젖히니 그 아래에는 조명 빛을 받아 은은하게 수면이 반짝이는 전용 풀장마저 있었다. 이래서야 출장이 아니라 꼭 호캉스라도 온 기분인데. 본격적인 일정이 시작되기 전이라서 인지 아니면 그냥 자신이 감각이 안 잡힌 것인지 민정은 그저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민정이 살고 있었던 세계와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달랐다. 좋은 비행기 좌석. 좋은 렌터카. 좋은 숙소.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역시 그 중 제일은,




똑똑.




“대리님 나 저녁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가요. 소개해줄 사람도 있고.”




WTA 싱글 랭킹 18위의 유지민이 제법 정중하게마저 들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뿅하고 얼굴을 내밀고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식사 자리 동행을 권유하는 이 상황 자체겠지만. 민정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리 없는데 방금 전까지도 지민을 생각하고 있던 것이 들키기라도 할까 싶어 두려웠다.











“먼저 와 계셨네요? 주문 했어요?”




지민이 자연스럽게 그 어깨를 짚는다.




“아니. 내가 먹을 와인만.”




돌아보지도 않고 마시고 있던 와인잔을 들어올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는 어떤 여자의 뒷모습. 지민은 웃는 낯으로 테이블을 돌아 여자의 앞에 앉는다. 그러고 나니 민정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는 수 없이 지민의 옆자리에 따라 앉았다. 몸이 가까워지자 늘 쓰는 향수인지 민정도 한 번 맡은 적이 있는 지민의 향수가 곧장 밀려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된다. 쓸데없는 의식 하지 말자. 민정은 스스로를 애써 달래며 정면을 봤다.




“소개부터 할게요. 이 쪽은 제 수석코치님. 그리고 이 쪽은 이번 투어부터 제 매니저를 맡아주실 김민정 대리님.”




얼굴을 마주한 여자는 민정도 익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유지민 이전에 2000년대에 한국에 테니스 열풍을 불러일으킨. 지금은 유지민의 재능을 깨운, 그의 둘도 없는 선생이자 은인이자 유능한 코치로 더 유명한.




“정은아예요.”




은아는 엉덩이를 떼고 몸을 조금 일으켜 팔을 테이블 건너 민정이 있는 곳까지 쭉 뻗었다. 엉겁결에 민정도 엉거주춤하게 따라 일어나 악수를 응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감싸 쥔 그 손은 지민의 손과 비슷했다. 뜨겁고 딱딱한,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 성실한 운동선수의 손. 근데 민정씨. 갑자기 은아가 민정을 불렀다. 여전히 손을 꽉 쥔 채로 얼굴 여기저기를 꼼꼼히 살핀다.




“유지민이 매니저 하라고 졸랐죠? 민정씨가 한다고 한 거 아니죠?”


“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민정씨 딱 유지민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그래. 뻔하지 뭐.”


“아 코치님!”




은아의 말을 민정이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지민은 냅다 소리를 질렀고, 은아는 너도 참 너다. 하면서 혀를 끌끌 찼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지민의 얼굴은 확하고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김 대리님은 그런거 하나도 몰라요.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야. 됐고. 나 배고파 죽겠다. 이제 우리 밥 먹어도 되는 거지?”




안전부절 못하고 민정의 눈치를 보는 지민을 막으며 은아가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그제야 민정은 가끔씩 볼 수 있었던 지민의 막무가내 태도가 누구로부터의 가르침이었는지 알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두 사람이 민정을 두고 무슨 얘기를 나눈 것인지, 민정이 뭘 하나도 모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대리님. 뭐 드실래요. 여기 양고기가 맛있어요. 대리님 양고기 먹어요? 아예 대화 주제를 돌리기로 마음 먹었는지 지민이 민정을 향해 몸을 슬쩍 기울여 빠르게 메뉴를 설명한다. 동시에 지민 특유의 시원한 향수 냄새도 진해진다. 민정이 놓치고 있는 것이 뭔지는 몰라도 유지민의 단단한 약점인 모양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물어봐야겠다. 일단 오늘은 지민이 원하는 대로 넘어가주기로 한 민정이 대충 지민의 말에 맞춰주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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