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정대만은 게임을 잘했다. 


도리도리 잼잼 곤지곤지를 동네에서 가장 빨리 깨친 아기였다. 걸음마를 뗀 후엔 보리보리쌀로 사촌들을 다 이겼고 유치원에서는 놀이의 제왕이었다. 운동장에 나가면 모두 대만이와 놀고 싶어 했다. 술래잡기를 하면 아무도 못 찾을 곳에 꼭꼭 숨었고, 술래를 하면 평소 습관을 단서로 누가 어디 숨었는지 귀신같이 맞혔다. 비석치기 땅따먹기 구슬치기 딱지치기의 귀재였고 여자애들 하는 쎄쎄쎄 공기놀이 고무줄놀이도 잘했다. 

몸뿐 아니라 머리도 잘 썼다. 룰이 복잡할수록, 참여자가 많을수록 정대만은 재미있어했다. 초등학생이 되고 한동안은 방과후 교실 할리갈리에 빠져 지냈고 얼마 뒤엔 책가방에 원카드를 넣어 다녔다. 명절에 어른들 고스톱을 구경하더니 금세 룰을 익혀 훈수를 놓는데, 어린애 안목이 신통방통해 그의 조언을 귀담아들은 넷째 삼촌은 꽤 큰돈을 땄다. 딴 돈은 고스란히 대만이 용돈이 되었다. 큰 회사 높은 사람이라는 둘째 삼촌은 저녁 내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대만이 칭찬을 했다. 어린 나이에 벌써 전략적 사고를 할 줄 안다나? 전략적 사고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주어진 상황을 분석해 기회와 자원을 파악하고, 자신과 타인의 의사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며 어쩌고저쩌고… 

명절 내내 입이 귀에 걸려 싱글벙글하던 부모님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아들래미가 그간 북극해의 빙산같이 잠겨있던 영재성을 발휘해 어느날 갑자기 과학 올림피아드 상을 타오지 않을까, 그런 대단한 기대를 했다는데 정대만은 그만 열한 살에 농구를 만나버렸다. 친구 따라 놀러 간 방과 후 농구부에서 묵직하고 단단한 주황색 공을 높은 골대에 던져넣은 순간 정대만의 인생은 문자 그대로 바뀌었다. 첫사랑의 정의는 자기 전에 생각나고 만사에 우선하게 되며 떠올리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존재라던가. 열한 살에 정대만은 첫사랑을, 나아가 죽는 순간까지 삶을 함께할 사랑을 찾은 것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정대만은 농구에 푹 빠져 살았다. 벽에 마이클 조던 포스터 붙여놓고 농구 생각만 했다. 농구. 날랜 몸과 영리한 머리를 동시에 써야 해서 재미있었다. 우리 편 넷 적 다섯의 장단점과 성향을 계산에 넣고 뛰는 순간마다 전략을 짜야 해서 흥미진진했다. 상대 움직임을 예측하고 내 편을 움직여 방어하고, 그사이 내가 뛰어올라 득점을 성공시키면 가슴이 희열로 터질 것 같았다. 중학교에선 정신차리고 수학 올림피아드의 길로 가주지 않으려나 하는 부모의 희망을 무참히 짓밟으며 대만은 중학 삼 년 내내 밥 먹고 농구만 하더니 삼 학년 여름에는 결국 현내 mvp를 땄다. 


고등학교 1학년에는 농구를 그만뒀다. 


농구를 그만두며 생긴 게임 공백은 전자오락이 메꿨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함께 주름잡던 동년배들이 슬슬 전자오락의 세계로 넘어갈 즈음 농구에 정신을 지배당했던 정대만은, 고등학생이 돼서야 처음으로 오락실 조이스틱을 쥐어 보았다. 형광 연두색 조이스틱 한 쌍을 어색하게 만지작대는 열등생을 새로 사귄 친구들이 비웃었다. “야, 넌 지금까지 게임도 안 하고 뭐했냐?” “그러게.” “인생 낭비했네.” “그러게.”

오락실엔 게임이 많았다. 농구 관둔 정대만의 넘치는 시간을 적당히 날려 줄 만큼 많았다. 가나다라 읽는 법을 어제 배운 늦깎이가 차근차근 배움을 높여 가듯 정대만도 오락실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하나하나 전자오락을 깨 나갔다. 벽돌깨기, 보글보글, 뽀빠이 슈팅, 동전이라면 주머니에 차고 넘쳤다, 원숭이 레이싱, 봄버맨, 슈퍼소닉, 록맨. 몸이 참을 수 없이 근질근질한 날에는 DDR을 뛰었다. 농구코트에서 단련된 날랜 다리가 리듬에 맞춰 위아래 양옆으로 날듯이 스텝을 밟았다. 

배움은 늦됐지만 정대만에겐 전자오락 분야에서 성공할 자질이 있었다. 그에게 중학 농구 현내 mvp를 안겨줬고 고교 농구도 하기만 하면 최강 산왕 상대로도 선전할 동체신경, 반사신경, 운동능력. 뛰어난 전략적 사고 그리고 게임을 하면 이겨야 하는 성정. 고등학교 2학년 봄이 되자 정대만은 동네 오락실에서 가장 게임을 잘하는 놈이 됐다. 정대만이 기기 앞에 앉으면 원코인에 보스 깨는 장관 구경하려 사람이 몰렸다. 한때 그에게 잘난 체하며 조이스틱 쥐는 법을 가르쳐준 패거리에게 웃전마냥 훈수도 놨다. 

“무식하게 닥돌하면 어떡해?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가자! 측면 숙이고 점프, 뒤로 구르고 포션 먹고. 보스 온다. 치고 빠지고 측면 정면. 패턴 보이지? 숙이고, 필살기! 정훈이 넌 필살기를 너무 아껴. 쓸 수 있을 때 써야 돼. 여기서 뒤구르고 자, 마지막 포션 빨고, 심호흡. 할 수 있다. 측면, 숙이고, 정면. 막타!” 하란 대로 하니까 스테이지가 깨졌다. 노란 글씨로 스테이지 클리어가 번쩍이는 화면에 눈물을 글썽이는 정훈이.“대만아, 나 이거 죽을 때까지 못 깰 줄 알았다.” 그런 친구의 등을 두드리며 이를 드러내고 웃는 정대만. “그러게 진작 도와달래지. 형님 말 듣길 잘했지?” 


그들 한 걸음 뒤에는 빈 좌석에 앉아 담배를 빠는 박철이 있다. 


빡철이, 게임을 하지도 않으면서 인기 게임기 좌석을 뻔뻔하게 차지하고 있어도 오락실 알바 형이 감히 비키라고 한소리 할 수 없는 놈. 그는 정대만과 함께일 때만 오락실에 왔다. 그는 정대만이 게임하는 거, 정대만이 게임하는 애들한테 훈수 놓는 거 보는 걸 좋아했다. 

너도 하지 않겠냐고 정대만이 꼬드기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빡치면 게임기 깨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돈 물어 줘야 되잖아.”


반론을 펴기 힘든 이유였다. 


박철을 게임에 끌어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친구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정대만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지만 박철도 정대만만큼 줏대 센 놈이라 잘 안됐다. 그러다 딱 한 변 박철을 게임판에 앉혔는데, 그 일은 좋게 안 끝났다. 

정대만이 박철네에 앉혀 지낼 때였다. 오토바이 고장 나 어디 나가지도 못하는 날 정전으로 티비까지 꺼지자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정대만은 집에서 가져온 트럼프 카드 한 벌을 꺼냈다. 방금까지 잠 안 오고 심심하다고 불평했던 박철에겐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얇은 이불을 접어 판을 펴고 정대만은 게임의 규칙을 설명했다. “카드 종류는 네 가지야. 스페이드, 다이아몬드, 클로버, 하트. 종류별로 숫자 카드가 열 장, 그림 카드가 네 장. 먼저 나온 카드랑 종류나 숫자가 같은 카드를 내서 손패를 먼저 다 터는 쪽이 이기는 거야.”

“흠.”

“공격할 수도 있어. 상대 손패에 카드를 먹이는 거야. 공격 카드는 2, 에이스, 스페이드 에이스, 조커 순으로 쎄. 아, 에이스는 1번 카드야. 특수 카드 7은 나와 있는 카드 무늬를 바꾸고, 방어 카드 K는 내 카드를 한 장 더 내게 해 줘. 이해했어?”

“어.” 

“공격 카드가 뭐라고?” 

“요 조커랑, 이거랑… 뭐랬냐.”  


첫판은 박철의 무참한 패배였다. 초심자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정대만은 판이 끝나기 무섭게 박철의 손패를 가져가 들여다보더니 제가 다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철아, 여기 하트 K 있잖아. 초기 패였지? 첫 장이 하트였으니까 이걸 제일 먼저 냈어야 됐는데. 하트 7 같이 내서 다이아로 무늬 바꿨으면 나 다이아 없어서 카드 먹어야 했는데…” 

박철의 패배를 안타까워하던 정대만은 그러나 게임이 시작되면 봐 주지 않고 승리를 향해 전진해, 두 번째 판에서도 무기력한 박철을 상대로 순식간에 승리를 거뒀다. 박철이 게임의 규칙을 외우지 못해 졌다고 여기는지 정대만은 이번에도 철의 손패를 가져가 이길 수 있었을 경우의 수를 또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 

박철이 놓친 기회들, 써야 했을 전략들을 짚어주는 중간중간 정대만이 “이해했어?”하고 되물으면 박철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짓은 아니다. 뭔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는 있으니까. 박철의 목 위에도 머리라는 게 달린 것이다. 어려운 게임이 아니다. 진지하게 임하면 그럭저럭 붙어볼 수 있다. 손패 운이 좋다면 한 판 쯤은 이겨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솔직히, 진지하게 임하기 귀찮았다. 이기자고 용 쓰기 귀찮았다. 머리 쓰기 싫었다. 이게 뭐라고 열 내냐, 빠칭코는 경품이나 나오지. 카드로 공격을 하니 방어를 하니 떠들지만 진짜 공격도 방어도 아니다. 맞아도 아프지 않고 때려도 쾌감이 없다. 이긴다고 적의 배때지를 밟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다고 피를 흘리지도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 규칙에 얽매여 이기니 지니 열을 내는 정대만이 우스웠다. 우스워서 짜증스럽고 또 귀여웠다. 

세 번째 판, 다정스럽게 전략을 조언해 주던 정대만은 게임이 시작되자 이 판도 이겨야만 성에 차겠다는 듯 전력으로 달려든다. 눈 깜박할 사이 제 손패 여섯 장 중 네 장을 버리고 박철의 손에 두 장을 더해준 정대만의 기세가 등등하다. 박철은 그 신난 얼굴을 곯려 주고 싶었다. 


스페이드 5 위에 박철이 클로버 K를 올려놓자, 정대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철아? 규칙 아직 못 외웠어?” 

“대만아, 그런 거 언제 일일이 따지냐. 유도리 있게 가자.” 

“엉?” 


무슨 소리냐고 안 된다고, 규칙대로 해야 한다고 스페이드 5 위에는 조커 아니면 스페이드나 숫자 5 카드만 낼 수 있다고 왁왁거리는 정대만 보란 듯 박철은 K위에 카드를 석 장 더 올렸다. 도를 넘는 황당함에 정대만의 입이 벌어졌다. 


“철아, K로 덜 수 있는 카드는 한 장이야. 세 장이나 버리면 어떡해? 아니, 애초에 K도 지금은 못 낸다니까?”

“그럼 K만 봐줘.” 

“되겠냐? 

“되는데.” 

“너 이러면 파울… 아니, 반칙이야,” 


‘파울’이라는 단어를 입에 낸 순간 정대만의 얼굴에 그림자가 스쳐간다. 대만아 너 그거 내 눈에 안 보일 줄 알지. 웃기는 자식. 스포츠만 관련되면 만사 예민하게 굴면서 그 예민함이 혼자만의 비밀인 줄 아는 어설픔이 자극적이다. 박철은 언제나 자신과 달라도 너무 다른 정대만이 흥미로우면서도 아니꼬웠고, 아니꼬우면서도 귀여웠고, 그런 복잡한 심사를 행동으로 옮기고 싶다는 충동에 약했다. 정대만, 약 올라 해라. 곯려 주고 싶다. 예뻐해 주고 싶다. 화내는 얼굴을 보고 싶다. 


“파울 시켜라.” 

“야!”


정대만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짙은 눈썹이 매섭게 치켜 올라간다. 당장이라도 제 멱살을 잡아 올릴 듯한 그 기세에 박철은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박철과 아주 다르지만 때론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좋아하는 게임 집어치우고 이쪽의 안면에 주먹 한 대 꽂아줄 것 같은 정대만이 좋았다. 꼴받냐, 대만아. 이딴 걸로 화가 나냐. 열여덟에 벌써 담배 컬러로 변해 가는 이빨을 드러내고 입꼬리를 귀에 걸며 박철은 짐승같이 낄낄 웃었다. 한 대 칠래 대만아, 우리 싸울까. 이딴 카드 내던지고 서로 뜯고 물고 싸우며 우애를 다지는 형제 개들처럼 한 번 얽혀 볼래. 

도발하듯 박철은 마지막 손패 세 장을 차례로 카드 더미 위에 올렸다. 뻔뻔스러운 규칙 위반을 과시하듯 빈손을 터는 박철을 노려보던 정대만은 악문 잇새로 낮은 신음 소리를 내더니 어라라,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버렸다. 쾅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닫히자 박철은 머리를 긁적인다. 너무 과했나. 

뭐 그래도 정대만은 돌아올 것이다. 교복도 지갑도 여기 있는데 가긴 어딜 가냐. 이미 때는 한밤중, 주머니에 든 동전 몇 닢으로 아이스 하드 사서 공원을 어슬렁대다 빡철이 새끼 자겠다 싶으면 들어오겠지. 거실바닥에 어질러진 카드패를 정리하며 박철은 고민했다. 저거 기분 어떻게 풀어주나. 장난이 과했으니 한동안 근처에도 못 오게 할 텐데. 이딴 카드짝 말고 다른 거 하고 놀자고, 우리 몸으로 진짜 재미 보자고 꾀어나 볼까.




이 글 관련해 트위터에 쓴 잡담 붙여두자면: 정대만군 전략시뮬레이션게임 잘 할 거란 게 내안의 뇌피셜임. 애초에 정감독이 팬덤피셜 미래직업이잖아. 그거 하려면 움직임 보는 눈에 더해 게임머리 무섭게 잘 돌아가야 하니까. 

전략시뮬 게임 중에서도 장기나 체스는 취향 아닐 듯, 1:1의 정적인 게임이라. 정대만 외향성(=자극추구성) 높아서 참여자가 많아 다방향으로 머리굴려야하고 몸으로 해서 수많은 감각정보 동시에 처리해야하는게임 좋아할듯. 

반면 박철은 표면적으로 게임에 무관심한데, 실체 없는 규칙에 골몰하고 대가 없는 승패에 연연하는 짓이 원래 밖에서 보면 좀 우스꽝스러움. 세계관 설정 조목조목 따져가며 vs 토론 펼치는 오타쿠들이 외부에선 놀림감 되듯이. 

그러면서 게임에 열중한 정대만 보는 건 좋아하는게 박철의 특이점인데, 현실은 만화가 아니라고 비웃으면서 만화 보긴 하는 거랑 비슷한 양가적 태도. + 더해서 대만이의 영리함 자체는 꽤 좋아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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