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신고 겸 메모장이랑 임시저장함 긁어모았습니다


1. 은율+신무영+호

"네놈이 무사히 대학 생활에 군 생활까지 마쳤다는 점에 약간의 경이를 느껴. 차차웅한테 세상은 아직 만만하구나."

"싸움 거냐? 일단 잘 알겠고 넌 오늘 저녁 없다."

"너 언제부터인가 말 안 듣는 아들한테 저녁밥 안 차려주는 부모 같은 소리 입에 달고 있는데 스스로 부끄럽지 않냐."

"난 항상 떳떳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물몸이면서 얼굴에만 철판을 깔았군."

"어, 그래서 나는 부끄럼이 없고 너는 저녁밥이 없지."

"랑아랑아 나는?"

"너는....눈치가 없네."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뭔 줄은 알고?"

"그거 시대별로 계속 바뀌어서 영 모르겠더라. 차라리 차차웅 7대 불가사의나 만드는 게 낫겠어."

"온 차차웅이 다 궁금해할 만한 이슈가 일곱 개나 있긴 하냐?"

"음- 일단 하나가 잭의 옷 구조라는 건 알 것 같아."


"랑아, 차차웅이란 건 원래 나사가 몇 개 정도 빠져 있는 거야. 우리가 지금껏 내다버린 나사들만 모아도 철물점 하나는 거뜬히 차릴걸?"

"내다버리지 말라고...주우라고 미친 놈들아...."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 같은데 너도 그 미친 놈들의 일원이란다."


2. 약간 눈 돌아간 테오가 준이랑 싸우는 중이고 신무영+호는 관전하고 있습니다

'잘 알았지, 준.'

사실 잘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는 존재가 불안정하니까 무엇도 당연하게 여기면 안 돼. 특히 너는.'

왜 존재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해.'

예고 없이, 준의 발밑에서 빛이 번쩍했다. 준비 시간 없이 작동하는 인이 전투에 얼마나 큰 메리트를 가져다 주는지는 준도 테오 못지 않게 잘 알았다. 보아온 게 있으니. 잽싸게 몸을 굴려 인의 영역에서 벗어났지만, 연기 속에서 금방 발이 날아왔다. 융복에 포함된 수화자는 옛날식으로 발목까지 단단하게 형태가 잡힌 것이었고, 맞으면 구둣발 못지 않게 아팠다.

복부를 정통으로 얻어맞고 구른 준이 캘록거리며 어깨를 확 움츠렸다. 방금까지 머리가 있던 자리를 스쳐 머그컵이 저 멀리 날아간다. 무늬 없이 희게 광택을 내는 머그컵에는 언제 새겨넣은 건지 작은 크기의 인이 빙 둘러져 있었다. 바닥에 닿자마자 산산조각나는 대신 노란 빛을 내며 폭발한 접대용 머그를 보며 신무영이 가느다란 탄식을 뱉었다.

"인을 저런 식으로도 쓰는구나....근데 내 물건 집어던지지 말고 그냥 구현한 무기에 새겨도 됐을 텐데."

"어차피 인으로 폭발시킬 매개체라면 내구도보다 속도가 중요하니까. 손에 집히는 대로 쓰는 거겠지. 총각탈의 구현 숙련도가 어느 정도인진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넌 나중에 폭발한 머그컵한테 사과해라."


3. 방위사제 기반 마노 독백 날조

시체는 무섭다. 싸늘하게 식은 그의 시신을 앞두고서야 나는 내가 시체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어둑한 방, 시체 썩는 냄새, 무엇을 잘못했는지 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 사부에게 파문당한 뒤 그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더라.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몇 개월이 지나도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비각에게서 사부의 근황을 듣고서야 나는 그가 돌아오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무언가가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각인된 절망의 기억.

그러니까 시체는 무섭다. 비각의 수하에서 해부하고 망가뜨린 시체가 몇 구인지를 생각해보면 꽤나 우스운 말이지만, 시체는 무섭다. 결코 환자를 죽게 하지 않는 스승의 아래에서는 시체를 볼 일이 극히 드물었으므로. 시체는 곧 그의 부재와 동의어였다.


4. 학원물 쓰려다가 때려치웠던 거

명목은 유리창이었지만, 그보다는 유리창을 깨트린 공이 도자기 꽃병까지 치고 지나간 죄가 더 컸다. 가늘고 섬세한 무늬로 둘러싸인 꽃병은 힘 빠진 축구공이 좀 스쳤다고 엎어져서 박살나거나 하진 않았다. 붙어있던 장식 중 일부가 공에 맞아 떨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시사철 모란이 꽂혀 있는 그 꽃병은 교장이 상당히 애지중지하는 물건이었다. 학생들이 유리창을 깨든 과학실을 폭파시키든 방송용 티비를 박살내든 학교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사고에 관대함-정확히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대처하던 젊은 교장은 사고를 친 당사자들을 담담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파일에서 종이 두 장씩을 꺼내줬다.

한 장은 있는 줄도 몰랐던 각자의 벌점표였고, 다른 한 장은 퇴학처분이 안내된 처분서였다.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파격적인 처벌에 학생들이 항의하기도 전에 선생님들이 먼저 달려와 비명을 질렀다. 유리창 좀 깼다고 퇴학이라뇨. 그러나 교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학생들의 벌점표를 가리키며 한 마디 했다.

퇴학기준벌점은 50점이지요.

그렇지만 애들이 뭐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어떻게 벌점을 한번에 50점씩 줍니까!

항의에 아랑곳 않고 교장이 다시 한번 벌점표를 가리켰다.

놀랍게도-그리고 두렵게도-벌점표에 기록된 벌점은 각각 다른 사유로 기록된 것이었다. 강임 고등학교는 교칙이 빡빡했지만 동시에 그 교칙을 어겼다고 해서 엄격히 잡는 사람이 없었다. 크고 작은 사고는 일상이었고 아무리 평범한 학생이라 해도 어지간히 고지식한 녀석이 아니고서야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 교칙 어기기를 생활화했다.

은율이 빠르게 자신의 벌점표를 훑었다. 교내 기물파손 32점. 등교시 교복 미착용 또는 불량 17점. 실내화 미착용 9점. 수업 땡땡이 10점. 지각 10점. 지정시간 외 체육복 착용 8점. 교사 지시 불이행 5점. 싸움 25점. 사행성 오락 8점.

사행성 오락이라니 이거 설마 기숙사에서 유행했던 부루마블 말하는 거냐. 가끔 교실에서도 천 원씩 걸고 하긴 했지만 그걸 두고 사행성 오락이라고 하냐.

애초에 벌점이 있는 줄 알았으면 상점으로 상쇄를 시켰지!! 내가 대회 나가서 타온 상이 몇 개인데. 그리고 벌점이 쌓여 있으면 교내봉사나 정학이 먼저 아니야? 왜 벌점이 퇴학기준벌점이라는 50점을 넘다 못해 100점을 넘길 때까지 언급도 없는 건데?!

다음 순간 은율은 깨달았다. 이건 함정이었다.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지나치게 엄격한 교칙에 비해 대놓고 잡는 사람은 없다. 얼핏 보기에 감시는 느슨하다. 교칙에 따르면 벌점은 교사진이 부여하지만, 학생이 자신의 일탈을 목격한 듯한 교사 전원에게 찾아가 일일히 묻거나 일주일에 한번씩 갱신되는 벌점표를 확인하지 않으면 자신이 벌점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벌점표 확인 절차는 매우 귀찮고 복잡하다.

벌점을 상쇄해줄 수 있는 상점은 교사에게 요구하거나, 자기 행동에 대한 보고서에 교사의 서명을 받아 제출해야만 받을 수 있다. 즉 상점을 받을 만한 일을 했어도 귀찮다고 제때 상점 신청을 하지 않으면 상점표는 갱신되지 않는다. 이러니 강임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상점에도 벌점에도 거의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살았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벌점은 착실히 누적되고 있었다. 누가 어떻게 언제부터 이런 상세한 사항을 기록해왔는진 모르겠지만 허위로 적힌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 교칙에 의거하여 정당하고 적합하게 부여된 벌점이었다. 이쯤되면 정성이다.

교칙을 어겨도 벌점을 안 주는 게 아니라, 이런 일이 있기 전까지 차곡차곡 벌점을 보관해뒀다가 갑자기 빼드는 거였단 말야? 수틀리면 누구든 퇴학시킬 수 있게 준비하고 있었다고? 내 교육권은, 이게 무슨 학생인권조례 엿먹이는, 아니 그보다 이게 법적으로 가능해? 퇴학처분 기각 소송 못 거나?

은율이 반발심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확 처들었다.

물론 교장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숙였다. 아무리 별명이 망나니인 은율이라 해도 사리판단은 할 줄 알았다.

교장이 누구인가. 환웅. 누가 붙인 건지 모르겠지만 별칭은 잭 오 랜턴. 편의상 교장이라는 직위로 호명되지만 학교법인의 이사장까지 겸하고 있는 데다가, 유명한-그러나 정확한 실체는 베일에 싸여 있는-대부호 권력가 집안의 사람이었다. 정치계나 법조계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고, 조폭이나 갱단과도 연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애초에 왜 학교 운영 같은 걸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런 거물이 제 심기 건드리는 학생을 학교에서 쫓아내는 방법이 고작 벌점 누적에 의한 퇴학처분이라면 차라리 귀엽다.

근데 우리가 딱히 심기 건드릴 짓을 한 건 아니잖아. 꽃병 하나 쪼끔 망가뜨렸을 뿐인데. 그 정도로 애지중지하는 건가?


5. 방위사제 기반 새하 독백 (유리창)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떨어지는 눈의 그림자도 고드름에 반사된 빛도 아니다. 그는 잠시 한겨울의 모진 추위가 창문을 넘어 그의 뺨에 직접 와닿는 듯한 기분을 받는다.

네가 겨울이라면 너는 북풍에 의탁한 나비처럼 손을 뻗어 두꺼운 유리창을 긁고 있는 걸까.

많이 아팠느냐. 많이 외로웠느냐.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차마 물을 수조차 없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그 앞에 붙어 서서 입김을 불어본다. 차가워진 입술에 숨을 불어넣듯이.

나는 아직도 목소리마저 얼어붙을 듯한 겨울산에서 나비의 날개보다 여린 숨을 이어가던 아이를 기억한다. 위태롭고, 차갑고, 고통스러운. 겨우 살려냈다고 생각했던 그 숨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음에 원통해한다. 그 숨. 하얗게 차갑게 곪아드는 와중에도 괴롭게 뱉어내던 숨.

성에가 낀 것처럼 하얗게 흐려지는 유리창. 그 너머로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길들은 새처럼 날개를 파닥거린다. 눈 위에 오목하게 패인 발자국을 떠올린다. 작고 하얗던 손을 떠올린다. 너를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짧은 몇 마디에 너를 욱여넣기에는 나에게 너라는 존재가 너무 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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