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보귀환 소재

- 장강~봉문쯔음의 스포일러 있음. 추후 항주마화 부근의 스포일러도 있을 예정. 

- 좀 짧음







중원 돌아가는 꼬라지가 말이 되건 안되건, 기왕 살아난 몸을 거적데기마냥 두는건 당보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남궁이 면도 못서고 굼뜨게 움직여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보면 지금 있는 곳은 안휘나 그 언저리겠다 싶었다. 당보는 당장이라도 당가에 달려가 니들이 미쳤냐고 후려까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종잇장같은 몸으론 장강도 건널 수 없다. 썩을 놈의 화의인지 조약인지 때문에 장강부터 남쪽으로는 죄 사파놈들이 떵떵거리고 활개를 친단 소리다. 내력한톨 없는 비루한 몸뚱이로는 장강을 넘긴 커녕 지나가다 산적들한테 먼저 상납하게 될 것이다. 지난 백년간 정파놈들이 얼마나 돼지같이 굴었는지는 몰라도 멍청해빠진 제 가문이나 형님이 있던 화산파가 어찌되었는지는 확인해봐야 할 것 아닌가. 뒈지기전에 당가를 부탁한다고 말했거늘, 이렇게 돌아왔으니 보는 김에 화산도 좀 봐줘야하지 않겠냐 싶은 맘도 들었다. 양심에 가책 좀 느껴보라고 꿈에 나왔나. 입이 쓰다. 그 양반, 천마 모가지도 썰었으니 금분세수하여 잘 살다 갔으려나……. 몸을 뒤로 제껴 털퍼덕 누웠다. 고요한 적막이 숨을 내리눌렀다.


“뭐하러 살아돌아온거람.”


공기를 깨뜨리고자 부러 소리내어 한탄해보았다. 꿈에서 깬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당보야, 하던 목소리가 선연하다. 하기사 제 입장에선 엊그제까지만 해도 들은 목소리다. 당보는 평이한 목소리에서 청명의 감정을 읽었다. 눈물 한방울 없이 요동치던 눈동자가 다시금 저를 본다. 남들이 보면 매정하다 평했을지 몰라도, 그건 청명에게 있어 확연한 동요였다. 당보는 알았다. 그 전쟁의 유일한 희망이 무너질 수 없어서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던 것을 안다. 청명이 울지 않았기에 당보도 울지 않았다. 반추에 빠져 느적대고 있을 시간이 없다. 


당보는 느릿하게 일어나 숨을 크게 한 번 쉬고는 가부좌를 틀었다. 내공심법부터 다스려야 했다. 여느 세가들이 그러하듯이 사천당문의 아이들 역시 어릴 적부터 수련을 한다. 지금 당보가 들어가있는 몸뚱이는 적게봐도 이립에 가까웠기에 상대적으로 뒤쳐진 시간이 아깝다. 부지런히 따라잡아야 했다. 당가의 내공이 독공을 기반으로 한다지만 당보는 굳이 독을 찾아먹지는 않았다. 애초에 지금은 가문의 사람인 몸이 아닌지라 편하게 주워먹을 독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굳이 그렇게까지 하며 독공을 다스릴 미련은 없다. 머저리같이 독에만 매달릴 바에야 암기술이나 비도술을 더 닦자는 판단으로 살아온 생애는 새 삶을 살게 되었다고 손바닥 뒤짚듯 바뀌지 않는다. 정파의 머저리들이 이곳까지 와서 도움될 일은 없으니 사파들의 앞마당에서 목숨이라도 부지해야한다. 강호유람을 하던 가문의 자식들을 보던 사파놈들의 모가지를 따러다니던… 뭐든 하려면 살아남아야 할 터이니. 적어도 삼년의 수련할 기간은 주어졌다. 당보는 눈을 감았다. 고요한 적막은 더이상 방해가 되지 않는다.






방해가 되지 않기는 개뿔이…. 당보는 새삼 제가 얼마나 가문의 혜택을 누렸는지 실감했다. 독이든 영약이든 땅에서 솟는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놈의 집구석, 하고 진절머리 치긴 했지만 사실 빼먹을건 다 쏙쏙들이 빼먹고 자란 셈이다. 아무것도 없이 밑바닥부터 시작하려니 아쉬워지기 마련이다. 생전 무공에 대한 지식도 알만큼 있고 지존의 이름까지 달았는데 그까짓거 뭐 어렵겠나! 하고 호기롭게 시작한 패기를 후려치고 싶다. 독공은 당장에 못하니 형편에 맞춰 적당히 변형 좀 하면 되겠지 싶었는데 퍽이나 안이한 마음가짐이다. 어짜피 내공심법이나 신체의 단련은 시간과 인내의 싸움이다. 특히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것은 정신과 육체의 괴리감이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부터 어색했던 감각은 무공 수련에서도 방해가 되기 일쑤였다. 머리는 암존일 적의 움직임을 구사하는데 정작 따라가야 할 몸은 한참이나 부족하여 허우적댄다. 근력, 길이, 지구력, 민첩함…, 하나같이 모지리다. 어쩌겠는가, 이미 벌일 일이거늘.





마을 어귀에 가까운 집이라지만 문파도 아닌 마당에서 나 수련하오, 하고 광고하고 다닐 수는 없었다. 당보는 주로 인적이 드문 산이나 동굴로 기어들어가곤 했다. 어짜피 가족을 잃어 눈치 볼 사람이 없고, 앞가림이 급급한 마을 사람들은 홀로 남은 사내에게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간간히 그날의 노파만 안부를 확인하고 갈 따름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무구였다. 탈탈 털리고 남은 재물이 없는 빈털털이는 싸구려 비도조차 구할 여력이 없었다. 당보는 적당히 나무조각을 다듬어 쓰거나 발에 채이는 돌을 써보곤 했다. 깨진 장독대의 조각을 암기처럼 휘둘러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손에 쥐는 대로 던지다보면 한참 전쟁 중이던 적의 기억이 스물스물 올라오고 만다.


매화검존은 무구를 가리지 않았다. 그의 손에 쥐는 모든 것이 검이었고 매화였다. 무인들이면 으레 하나쯤 쥐고 있는 애병조차 없었다. 화산의 도인이면 다들 주어지는 매화검이나 달랑 들고다녔으며, 그마저도 없으면 손에 잡히는 아무 검이나 쓰곤 했다. 사파의 검을 뺏어 쓰기도 하고, 마교도의 팔을 잘라내고 빼어 쓴 적도 있었다. 때로는 죽은 사형제들의 시체에서라도 뽑아 쓰던 사람이다. 나뭇가지에 내력을 둘러 검으로 쓸 수도 있는 사람이었으니, 매화검존에게는 어떤 무구든 그저 꽃을 피울 도구에 불과했다. 그런 형님한테 인간 백정이니 자신은 손에 딱맞는 무기가 있어야한다느니 떠들어댔지만, 결국 저도 수중에 든게 없으니 아무거나 주워다 쓰게 된다.


“내가 그래도 암존이었는데 추혼비는 커녕 조악한 비도도 아니고 돌이나 다듬어 쓰는게 말이 되냐고, 말이….”


안그래요, 도사 형님? 피식 웃던 당보는 꾀죄죄한 꼬라지로 드러누워있다가 다시 벌떡 일어섰다. 힘들다고 숨을 돌리면 과거를 본다. 눈을 감으면 청명의 마지막 얼굴이 떠오른다. 풀내음이나 흙먼지의 냄새임에도 불구하고 매캐한 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당보야, 부르는 소리가 귓가에 환청으로 맴돈다.


계속 꿈에서 머무르면 지금 살아 숨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금 밟고 있는 땅은 마가 깃든 죽은 땅이 아니다. 당보는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당보는 대부분은 흙과 돌바닥을 밟았고, 아주 가끔 꿈을 뒤돌아보고, 다시 땅을 디뎠다. 당보는 이따금씩 무거워지는 발걸음을… 애써 내딛는다. 그렇게 혹사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굴리고서야 기절에 가까운 수면에 들었다가도 훅 찾아오는 적막감에 소스라치게 눈을 뜬다. 항상 있던 존재의 부재가 이따금씩 당보를 잠에서 깨게 하고, 발을 멈추게 하고, 숨을 멎게 한다. 무엇이 당보를 붙잡는지 알고 있으나 당보는 멈출 수 없었다. 당보는 여전히 몸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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