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

정후소 문을 열고 들어온 하예 하나가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요 근래 들어 자주 얼굴을 보는 이였다. 희수는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그저 익숙하다는 듯 숨을 푹 내쉬며 몸을 일으켰을 뿐이다. 송방으로 향하는 동안 하예는 면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래, 제들도 양심이 있다면 부끄럽기는 할 것이다. 희수는 걱정과 한숨을 뭉뚱그려 내뱉었다.

“또 강 행수가 밥을 먹질 않는 것이냐?”

“예에……, 그나마 나리가 계셔야 반이나마 드시곤 하옵니다.”

“벌써 세 번째일세. 매번 이렇게 나를 부르니, 원. 정 노인은 무얼 하고? 아님. 다른 하예들도 많을 터인데 진수성찬이라도 한 번 차려 내 보지 그런가. 저 대궐의 수라상 못지않게 차린다면 식욕이 동할지도 모르지 않은가.”

“갖은 권유를 드려 보아도 진하게 우려낸 차로 충분하다, 정 마음에 걸리거든 곁들여 먹게 숙실과나 좀 내어 오거라, 하고 마실 뿐입니다. 그리 지난 날짜가 수일이니 이제는 저희 같은 것들이 백날 말씀드리는 것이 효과가 없음을 알 수밖에 없습지요. 나리께서 한 번 동석하여 주실 때 드시는 양이 더욱 많습니다요.”

하례장인 정 노인은 묵묵히 제 할 일만을 해내는 사내이니, 유린이 한 번 그렇게 말했다면 더 만류하거나 대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꼿꼿하게 서서 고개를 숙이고는 차를 내오라 할 위인이었으니까. 하례장이 그렇게 대응하는데 그 밑의 아랫것들이 무슨 말을 더 하겠나. 송방 안의 모습이 훤하게 그려져 희수는 혀를 찼다.

얼마간을 더 걸어 송방 부근에 다다르자 정 노인이 대문 바깥에 나와 있었다. 희수와 눈이 마주치자 몸을 굽혀 보이며 인사해왔다. 더 이상 무슨 공치사를 듣고 말고 할 것도 없어서, 희수는 곁에 준비된 소반을 들고 유린의 처소에 들어섰다.

“강 행수.”

“어머, 도련님이 아니시옵니까.”

침상에 걸터앉아 있던 유린이 희수를 보고 천천히 일어났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인사를 해오는 태도가 도리어 이상하게 여겨졌다. 평소대로의 미소 띤 얼굴이건만 힘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희수는 소반을 침상 옆에 내려놓았다. 희수가 들고 있던 상 위를 보게 된 유린의 미간에 살짝 골이 팼다. 목소리가 실타래처럼 차츰 길어지기 시작했다.

“또 하예들이 도련님께 부탁을 드렸는지요? 송방의 법도가 지엄한데 행수의 안위에 대하여 외부에 구구절절 말하는 이들이 늘어나니, 이를 어찌 다스려야 할지 소인은 도무지…”

유린의 말이 길어질수록 목소리의 온도가 낮아지자 희수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 아니. 강 행수. 이것은 그냥.”

그러다가 소반을 끌어 유린 앞에 놓고선 배시시 웃었다.

“내가 걱정되어서 왔지요. 강 행수가 식사도 못 하고서 일에 매진하고 있을까 저어돼서. 응?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하고 있잖아요.”

“…….”

“그러니 내가 이리 소반을 들고 온 게 아닙니까? 그렇지요? 죄 없는 하례들일랑 놔두시고 나를 혼내셔야겠소. 맞지요?”

유린의 시선이 희수의 휘어진 눈꼬리에, 부드럽고 조그맣게 속살거리는 입술에 닿아 멎었다.

“강 행수?”

아무 대답이 없자 희수의 입매가 움찔 굳었다. 제 말에 무언가 기분이라도 상한 것인가 머리를 맹렬하게 굴리고 있는데 유린이 손을 뻗어 수저를 쥐는 것이 보였다. 희수는 화색을 띠었다.

“아, 먹어 볼 마음이 드셨소? 강 행수, 이것은 부드럽게 고기를 으깨어 같이 끓인 쌀죽인 것 같은데, 속이 허할 테니 이것을 먼저 드셔보세요. 그다음에 이, 생선구이를 같이….”

그러나 희수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떨그렁!

갑작스럽게 정적을 찢는 금속음이 울렸다.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유린이 제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고 바닥에는 숟가락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얼굴은 평소대로라 희수는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유린이 눈꼬리를 축 내리며 중얼거렸다.

“아, 도련님. 소인이 식사를 해보려 했습니다만은, 힘이 없어 이처럼 숟가락을 들기도 벅차니 이를 어쩌면 좋사옵니까…….”

희수는 펄쩍 뛰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아니, 아니. 강 행수. 얼마나…. 진짜 송방 사람들 다 악독해! 사람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밥도 죽도 안 먹이고.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이전엔 그래도 혼자서 떠먹을 힘은 있었는데. 이번엔 얼마나 고생을 했기에! 아니, 강 행수가 안 먹을 것 같았으면 입을 벌려서라도…….”

거기까지 말하다 말고 희수가 멈칫했다. 그러자 유린이 갑작스럽게 생기를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빙그레 웃으면서 되물어왔다. 어쩐지 즐거운 기색이었다.

“예? 입을요? 입을 벌려서 어떻게 하는 것이옵니까?”

“어? 아니. 그…, 마, 말이 헛나왔소.”

희수가 당황하며 대꾸하자 유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매끈한 손가락이 그 턱을 쓰다듬는다.

“어머, 소인은 도련님을 추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궁금하여 여쭙는 것이옵니다.”

희수는 유린의 눈치를 살그머니 보고는 말을 잇대었다.

“입을 벌려서 먹여주기라도 해야 하지 않았느냐, 하는…, 그! 그냥 생각입니다. 강 행수더러 그렇게 남들 눈에 뵈기 어려운 모습을 하라는 말은 아니고.”

그러자 유린이 느릿하게, 입을 살짝 벌렸다. 벌어진 입 사이로 고른 치열이며 붉은 혀, 분홍빛 살이 살짝살짝 보였다.

“이렇게 말이옵니까?”

단순하게 입을 벌린 것뿐인데 희수는 어쩐지 그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아니, 그. 강 행수가 직접 입을 열어주니 내가 다 고마운데. 어…,”

희수가 엉겁결에 쥐어 든 수저를 내려다보며 쩔쩔맸다. 차마 먹여준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유린이 귀여워하는 눈초리로 내려다보는 것 같았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얼굴을 마주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푹 숙인 얼굴로 열기가 몰리는 것만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도련님, 소인 기운이 없어서…….”

“어어. 드, 드셔야지요. 예….”

유린의 가련한 중얼거림에 희수가 허둥지둥 죽을 푹 떴다. 자꾸만 흘러내리려는 큰 숟갈을 그대로 유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유린은 수저 한가득 퍼 담긴 죽을 내려다보다가, 희수의 얼굴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받아먹었다. 이상하게 받아먹는 모습마저 전아한 느낌이 들었다. 유린의 입을 빠져나온 뒤에도 수저에는 절반 정도의 죽이 남아있었다. 그 꼴을 보고서야 희수는 제 실책을 깨달았다.

“아, 이런. 한입에 먹기에는 너무 많았지요.”

희수가 수저에 남은 죽을 무심코 입에 넣었다. 적당히 고소하고 간이 잘 되어, 입맛을 당기는 죽이었다. 밥알은 부드럽게 뭉개졌고 달큰한 쌀의 풍미가 났다. 모르긴 몰라도 매우 신경 써서 끓인 죽인 모양이었다.

“음, 이거 힘 좀 쓴 모양인데. 맛있네요.”

유린은 그런 희수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고개를 앞으로 당겨 희수에게 다가왔다. 얼굴이 아주 지근거리까지 가까워졌다.

그러자 희수가 놀라며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헐렁해진 희수의 손아귀에서 수저가 뚝 떨어져 내렸다. 도포 자락 위에 수저가 몇 번 굴러떨어지자 죽이 길게 묻어났다. 유린은 한참 가까이 있다가 몸을 뒤로 빼며 빙그레 웃었다.

“이런, 조심하지 않으시구요.”

그리고는 제 곁에서 수건을 꺼내 희수의 옷 위를 문질렀다. 부드러운 손길이 희수의 옷자락을 쥐고 슥슥 닦아나간다. 희수는 유린이 닦아주면 닦아주는 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침만 꿀꺽 삼켰다. 가까이 다가오는 통에 희미한 분내가 났다. 그냥 막, 다, 머리가 아찔했다.

손에 힘이 없다고 했는데, 수저도 못 쥔다고… 그런 것 치고 옷을 문지르는 손길은 잘만 자국을 닦아내는구나. 이상하다, 이상하다… 그렇게 뇌리를 맴돌던 생각들은 어느새 거칠어진 심장 박동 소리에 묻혀버린다. 겨우 입을 열었더니 나오는 목소리마저 떨리고 있다.

“강, 강 행수?”

“왜 부르시옵니까?”

“이제, 어. 다 닦인 것 같은데.”

그러자 희수를 휘 훑더니 다시 미소를 띠는 것이었다.

“여기도 묻었사옵니다.”

그 말에 이어진 것은 좀 전까지 옷을 닦던 수건이 아니었다. 유린의 얼굴이었다. 고른 숨결이 다시 다가왔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더, 더. 가까이. 어느새 유린의 체온까지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희수는 순식간에 온몸을 감싸고 도는 열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자연스럽다고 해야 할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은 스르륵 감겼다. 그러면서도 무엇인지 모르게 덜덜 떨면서 유린을 불렀다.

“강 행수…….”

유린이 제 앞에서 멈칫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인기척이 스르륵 멀어졌다. 희수가 실눈을 떠서 보니 유린이 빙긋 웃으며 제 손가락에 붙은 밥풀을 보여주었다.

“입가에 묻으셨기에 그랬사옵니다.”

“아, 아아. 예에.”

“혹, 실망하셨는지요?”

“아, 아니. 내가 무슨 실망을 한다고 그래요? 전혀 아닙니다.”

“정말요?”

“아, 그럼요! 어서, 어서 밥이나 마저 드십시다.”

희수가 부산하게 움직여댔다. 그러나 이상하게, 머릿속은 어질어질하기만 하고 집중이라곤 도통 되질 않았다. 죽을 뜨는 손길은 정성스럽다기보다 정신이 빠져있는 것처럼 헤펐고 수저에 겨우 담긴 죽은 주륵주륵 흘러내리기만 했다.

“정말 아니시옵니까? 솔직하게 말씀하여 주시면 소인이 참작하여드리겠습니다.”

“정말 아니래두. 강 행수, 그렇게 안 봤는데 상당히 고집 있으시오.”

그리고 유린은 그런 희수의 모습을 보면서 쿡쿡 웃음을 흘릴 따름이었다.*





@nynyp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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