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료 / 후지 슈스케x에치젠 료마




Chapter 1 Borderline

1-2 약속과 약속 Ⅰ




졸업식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줄어드는 날짜만큼 학교는 식을 준비하기 위한 분주함이 더해가고 있었다. 테즈카의 꽃을 준비해야하는 료마 역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후지 선배, 아직 꽃 받을 후배가 정해지지 않았다더라?”


지금 졸업식 최고 화제의 인물은 단연코 후지 슈스케였다. 수십년을 이어온 전통에 개의치 않기라도 하는건지 여전히 상대를 밝히지 않고 있었다. 호들갑을 떨어대는 동기 옆에서 료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일이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나?’


설령 자신이 꽃을 주지 않아 후지가 난감해진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후지의 책임이었다. 료마는 후지의 제안을 여전히 승낙하지 않았고 후지의 제안은 여전히 일방적인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좋은 일 아냐?”


이 중차대한 사안에 대해 오히려 좋은 일이라니, 옆에서 재잘대던 동기들의 시선이 일제히 료마에게로 몰렸다.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운듯 멋쩍게 료마가 입을 열었다.


“선배가 부탁하는게 전통이라지만 후배가 허락을 구하는 것도 금지, 아니잖아?”


물론 그 선배가 다른 사람에게 화동을 허락할지는 나도 모르지만.

어쨌든 후지의 화동이란 가능성이 1%라도-실은 한없는 제로- 있는게 아니냐는 료마의 대답에 동기들이 별안간 불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주 작게 양심이 찔리지만 어쩌겠는가. 휘말리는 것은 귀찮고 말리지 않으면 재밌어 질 것 같은데.


“그래, 못해도 거절밖에 더 당하겠냐! 간다, 료마!”


양옆의 미즈노와 카츠오가 말리기도 전에 이미 호리오는 복도 끝까지 뛰어가고 있었다. 료마는 점점 멀어지는 호리오의 등을 보면서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몇분만에 울면서 뛰쳐오려나? 까만 고양이는 곧 닥쳐올 남의 불행을 즐겁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간, 후지는 교장의 호출을 받아 응접실의 문을 연 참이었다. 이 시기에는 전도유망한 졸업생을 미리 데려가기 위한 물밑 작업이 활발했다. 이름만 들으면 알법한 세도가에서부터 명망높은 기사단까지. 자신을 부른 것도 그 중 하나겠거니 싶어 얼굴이나 확인해 볼 겸 호출에 응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후지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여어~ 장남, 오랜만이구만?”

“6년만이네요. 잘 지내셨습니까.”


상대가 권유를 하기도 전에 후지는 이미 응접실 소파에 앉았다. 제법 대단한 집안의 인물임에도 후지는 전혀 주눅 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개의치 않는다는 듯, 건너편의 남자도 자세를 삐딱하게 잡았다. 서로 초면은 아니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에치젠 공작 각하.”






후지를 찾으러 온 학교를 헤메던 호리오는 얼마 지나지않아 호들갑을 떨며 돌아왔다. 잔뜩 들떠 상기된 얼굴이었다. 후지를 만나 허락을 받았다기에는 시간이 짧았다. 그러니 뭔가 다른 소식이 있다는 얘기였다.


“내가 후지 선배를 찾으러갔는데 말이야~!”

“근데 왜 이렇게 금방 왔어? 선배한테 1초만에 차였냐?”


태연한 얼굴로 료마가 묻자 호리오가 빼액 소리를 지르며 씩씩거렸다. 그리기를 잠시 숨을 고른 호리오가 보기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주변을 살핀 후 목소리를 낮췄다.


“본관에 지금 엄청난 방문객이 와 있어.”


천기누설이라도 하듯 호리오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료마도 어디 들어나보자싶어 장단에 어울리기로 했다.


“그런데 마차에 에치젠 가의 인장이 찍혀있지 뭐야!”

“에치젠? 그 마츠다이라 다섯 가문인 에치젠이라고?”


놀란 카츠오가 목소리를 높이자 호리오가 연신 입술에 검지를 갖다대며 호들갑을 떨었다. 미즈노도 많이 놀란 모양인지 눈만 동그랗게 뜨곤 양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료마는 여전히 태평했다. 권력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조금 전 호리오가 꺼낸 이름은 이 나라의 가장 강력한 권력자 중 하나였다.


마츠다이라, 그리고 에치젠. 

왕가를 지탱하는 다섯 가문은 본디 ‘마츠다이라’라고 하는 하나의 가문에서 뻗어나왔다. 마츠다이라는 시간이 지나 왕가가 되었으며 다섯 가문은 두 개의 공작가와 두 개의 후작가, 그리고 하나의 백작가로 나뉘어 왕가와의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서 권력의 틀을 짰다.

그 중에서도 에치젠은 당대 공작이 승계를 잇기 전 다섯 가문 중 가장 권력의 말석에 있던 집안이었다. 전대의 무남독녀, 현 공작부인이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가게 되면 본가의 혈통이 끊길 정도로. 지금은 권력자들의 눈엣가시가 될 정도로 폭넓은 지지를 받는 가문이 되었지만. 그것은 모두 현재 수장의 자리에 올라있는 난지로가 이룬 업적이었다.

에치젠 난지로. 그의 경력을 나열하자면 왕국 북서부의 공작령을 다스리는 영주, 현왕의 형이자 선왕의 장자이며 왕세자의 숙부. 즉 왕의 자리에 가장 가까웠고 지금도 가까운 인물이다. 

그런데 왜 왕족인 난지로가 에치젠 공작가의 일원이 되었는가. 파란은 20년 전 그가 승계권을 내려놓고 에치젠의 데릴사위가 되며 시작되었다. 그가 갑자기 왕위계승권을 두고 물러난 이유는 전대 공작과 본인 밖에 모른다.

어찌됐든 백 년 이상 왕가 혈통이 부재했던 공작가에 진짜 왕족이 입성하며 '진짜' 공작가가 된 셈이다. 

혼란과 충돌이 시작되었고 이를 끝낸 사람 역시 그였다. 푸른 늑대의 기사를 이끌고 몸소 전장을 누볐다. 그것이 에치젠 난지로가 선택한 방법이였다.




“그래서 그게 어쨌는데?”


호리오를 향해 료마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사학교의 졸업생 중 상당수가 귀족의 사병이 되기에 호구조사 수준은 아니어도 내노라하는 가문 정도는 대부분 머릿속에 들어있는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눈 앞의 에치젠은 정말 관심없다는 표정으로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너 기사학교 다니는거 맞냐.”

“여기 기사학교 아니었어?”


황당하다는 얼굴로 잠시 말이 없던 호리오의 어깨가 처졌다. 원래 이 녀석은 이런 녀석이였지. 동기 중에서, 선배들과 비교해도 누구보다 뛰어난데도 어디 다른 세상 사람처럼 생뚱맞은 행동을 했다. 호기심 왕성한 고양이같아서 눈을 떼면 엄청난 일을 벌이기 일쑤 였고 그런 그를 매번 나무라는 건 룸메이트인 테즈카의 몫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호리오의 눈에 동정의 눈빛이 비쳤다. 그래서 테즈카 선배가 료마를 화동으로 지목한거구나. 마지막까지 학교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큰 희생을 하신거구나.

호리오가 무슨 망상을 펼치는지 관심이 없는 료마는 등을 돌리려다 호리오에게 붙잡혀 다시 강제로 착석해야만 했다. 


“엄~청 엄청 엄청 중요한 일이지! 에치젠 공작님은 왕위에 오르시진 않았지만! 누가 뭐래도 이 나라의 몇 없는 왕족이시거든.”


수가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문제인 것이 왕족의 수다. 많으면 적은 이권을 두고 골육상쟁을 치르는가 하면 적으면 당장 다음 후계가 공석이 되는 나라도 있는 것이다. 이 나라는 후자에 속했다.

지금의 왕, 그러니까 난지로의 동생에게 본디 딸과 아들이 여럿 있었지만 죄다 요절하고 하나 남은 아들이 지금의 승계 1순위인 왕자였다. 결혼한지 2년이 지났으나 아직 왕손을 보지 못한 왕실로서는 왕위를 잇지 않겠다고 뛰쳐나간 난지로를 다시 붙잡아야 했으며 자연히 3순위는 난지로의 아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남자가 백성들로서는 구름 속 인물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아~ 그러니까 지금 왕자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자식이 없으면 공작 그 사람이 왕이 된다 그거구나. 근데 그쯤되면 늙어서 무덤에 들어가지 않을까?”

“무슨 그런 불경한 소릴! 하긴 뭐, 우리같은 밑바닥 백성들이야 누가 되든 나라만 평화로우면 그만이지만.”


잠시나마 진지했던 호리오의 얼굴이 평소의 장난끼많은 소년의 것으로 돌아왔다. 공작가의 소식에 흥분도 잠시, 점심시간이 끝나감을 알리는 종소리에 서둘러 자리를 파했다. 료마의 시선이 멀리 떨어진 본관을 향했다가 이내 호리오들과 자리를 떠났다.






“각하께선 저를 곤란하게 만드는 걸 좋아하시네요.”


눈꺼풀에 가렸던 파란 눈동자가 스산했다. 6년동안 자신의 뒤를 봐 준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도가 지나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의 공작이 가져온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다.

후지가 아무리 집을 나와도 후지는 후지 슈스케였다. 이 나라의 세도가 중 하나였으며 아직 혼약자가 정해지지 않은 젊은 귀족 청년. 수 많은 가문에서 탐을 내면서도 동시에 그러하지 못한 이유는 후지를 기사로 삼을만한 배짱이 없어서기도 했다.

어찌됐든 학교를 졸업하면 본가에서도 지금처럼 가만 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가 가문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겠지만 여전히 후지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단지 자네 뒤를 봐준 것에 대한 대가만은 아니야. 책임을 조금이라도 져달라는 거지.”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 진지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과연 한때 왕이 될 운명이었던 남자가 뿜어대는 위압감은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를 정도였다.

후지가 집을 나가고도 이렇게 기사학교 졸업을 코앞에 둘 수 있었던 건 에치젠 난지로의 공이 컸다. 아무리 후지가라고 해도 왕의 혈통을 이은 공작가를 무시할 수는 없는데다 후지의 아버지는 공작에게 호의적인 입장이였다. 그가 설득한다면 공작이 돌보는 조건으로 충분히 납득하고도 남음이라.


“거절하기는 어려울테고, 들어나보죠. 제가 어떤 책임을 져야하는지.”

“후지 군, 자네 ‘그것’ 기억하나?”


잠시 숨이 멈췄다. 이 사람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있는거지? 그 이름은 후지가 밖으로 새어나갈리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아버지가 공작과 친하다고 해도 알려주지 않았을텐데. 싱글벙글 웃고있어도, 권력을 마다한다고해도 그는 태생이 누군가의 위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잊을리가 있나요.”

“그것에 대한 책임이라고 해두지.”


에치젠 난지로가 제 앞에 놓인 차를 마저 털어넣었다. 미지근하다 못해 착잡하게 식어버린 찻물에서 쓴맛이 배어나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 바라시는게…?”


공작을 떠보려고 해봐야 계속 본인만 손해볼 뿐이었다. 후지와 에치젠 사이에 놓인 세월의 경험치는 후지로서는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는 허울만 좋은 귀족이 아니었다. 길고 긴 시간을 가장 험한 곳에서 견뎌온 사람이었다.


“내가 죽으면.”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유언이란 말인가. 유언은 자신이 아닌 본인의 아들, 아니면 최소한 고문 변호사를 입회해서 해야할 일인데.


“자네가 이 학교를 졸업하고 2년 이내에 내가 죽으면, 1년 동안 내 아들의 기사가 되어주게. 그것으로 우리 사이의 거래는 끝. 손해보는 조건은 아니지?”


아버지가 왜 공작을 좋아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네모 반듯한 사각형의 후지 가 인간에게 에치젠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극 그 자체였다. 유우히 흐르는 일상을 지루하지 않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한 스푼의 스파이시.

어떤 이유든 에치젠 난지로가 꺼낸 제안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형태였다. 자신이 죽으면, 그것도 신출내기 기사에게 후계자를 1년 동안 부탁한다니. 

오직 두 사람만이 증인인 유언이었다. 설령 에치젠 난지로가 2년 내에 죽더라도 이를 증명할 사람이 없는 이상 후지가 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고 해서 따지고 들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에치젠 난지로는 후지에게 제안한 것이다.

변덕을 부려도 결국 후지는 약속을 지킬게 뻔하니까. 그것의 무게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기 위해 후지 슈스케를 이용하고 있으니까.


“제가 거절할거라곤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에치젠 난지로의 눈빛에 그늘어 어렸다. 머나먼 옛 추억을 되새기기라도 하듯, 혹시나 아비없이 살아갈 아들을 걱정하기로 하듯.


“후지 슈스케, 자네는 결국 받아들일걸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에 차있는 한마디였다. ‘에치젠’으로 살아온 20년 세월은 이를 위한 시간이었다. 단 하나의 결말을 바꾸기 위해서. 이는 실제로도 후지에게 유효했다. 다른 가문도 아닌 에치젠의 제안이라면 어지간한 가문에서는 당분간 후지를 어떻게해볼 생각도 못할 터.

그런데 왜 하필 2년일까. 그는 무슨 확신이 있어 2년의 유예와 1년의 계약을 꺼낸걸까.

에치젠 난지로의 의중은 후지에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에게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될 하나의 사건이었다. 마치 ‘6년 전’ 처럼.


“나라고 좋아서 자네를 선택한 것은 아니야. 오히려 자네가 나서지 않았으면 하지.”


깊고 선명한 기억이었다. 잊어버리는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에치젠 난지로에게 주어지는건 언제나 선택의 연속 뿐이었다. 수 많은 이들의 생사가 자신의 선택으로 결정되었다. 후지 슈스케 역시 그러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계약서를 준비하죠."

"그럴 필요 없네."


에치젠 난지로가 의뭉스레 미소지었다. 여전히 후지는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계약을 계약으로서 온전하게 완성하기 위해서는 계약서가 필요했다. 하물며 지금 이 자리에는 에치젠 난지로와 후지 슈스케, 두 사람뿐이었다. 어느 한쪽에서 그런 계약을 한 적 없다고 우기면 그걸로 흐지부지되는 얄팍한 것이었다.


"저를 믿으시나요?"


후지가 물었다. 6년 전의 선택은 오롯이 자신의 결정이었다. 그의 뒷배를 빌린 것 역시 그때의 후지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그의 인품이 아닌 권력을 믿었다.


"어느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네는 선택할거다. 그러니 이건 계약이 아니라 약속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했다. 오늘의 선택이 어떠한 미래를 만들지 누구도 알지 못하기에. 다만 가장 불행한 미래만은 오지 않길 바라며.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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