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여전히 맑고 화창했다. 쓴소리를 하면서도 꿋꿋이 제 옆을 지키던 동생들이 퉁퉁 부은 눈으로 침대에 기대어 선잠이 들 때 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은 평소와 같았다. 환자복을 입고 병원 뒤뜰을 거니는 사람과 가운을 입고 바쁘게 다른 병동으로 뛰어가는 사람. 그리고 그 가운데 나무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이 번뜩 눈에 들었다.

여기서 우는 사람은 가족이 아프거나 곧 죽을 거라서 그러는 거라던 소년의 말대로였다.

그 이후, 소년을 서너번 더 만날 수 있었다. 그 애는 열두살이랬다. 열두살 치고는 아주 작고 말라서, 처음에 나이를 듣고는 조금 놀랐던 것 같다. 병명은 백혈병. 열 살 쯤 입원을 해서 벌써 2년째 병원에 있다고 했다. 어쩌다가 안면을 튼 아이의 어머니는 초췌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병원에 있으면서 친하게 지내던 옆 침대 형, 누나가 갑자기 다음날에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그때마다 소년은 놀랄지언정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아이는 이제 죽음을 목도하고도 울지 않게 되었는데, 자신은 아직도 눈물 한번을 참지 못한댔다. 그리고 결국 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저를 사랑해마지않는 부모님을 먼저 두고 떠났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남은 자기 목숨은 형 앞으로 달아둔 거니 형은 누구보다 건강히 오래 살 거라고 했다. 지금껏 장례식에 몇 번 가봤지만 자녀 상에 가본 건 그게 처음이었다. 고통스럽고 괴로울 정도로 아이의 어머니는 울부짖다가 결국 탈진해 쓰러지기까지 했고, 아버지는 담배만 내리 한 갑을 피는 걸 반복했다. 결국 부모님을 대신해 수척한 표정의 고등학생이 손님들을 맞았다.

그때부터였다.

당장 죽음을 맞이할 자신보다 죽음을 맞이할 사람들이 더 걱정되기 시작한 건.




즐거운 나의 집




아무래도 누나한테 너무 심한 말을 해버린 것 같다.


홧김에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 안 날 말들을 뱉어놓고는 눈물, 콧물, 침 몽땅 쥐어짜내며 벤치에 쭈그려 앉아서 울기 바빴다. 그래, 누나도 누나만의 사정이 있었을 텐데. 내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했어, 아니? 그래도 이건 누나가 너무한 걸….



"누나가 이제 나 안 보려고 하면 어쩌지…. 일주일이면 풀리려나…?"

"너 나랑 일주일이나 말 안 하려고?"



으억! 동혁이 뒤에서 들린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벤치에 올리고 있던 두 발을 떨궜다. 누나는 늘 그랬던 무표정한 얼굴로 늘 그러지 않았던 펑퍼짐한 환자복을 입고 머리를 대충 집게핀으로 틀어 올린 채 뒤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환자 같아서, 이제야 진짜 누나가 아프다는 게, 곧 죽는다는 게 실감이 나서, 동혁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한 방울 흘려버렸다.



"누나, 누나 진짜 죽어…?"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되어 있어."

"아, 그런 말 하지 말고…!!"



빼액 소리를 질러버린 동혁이 자신을 보고 작게 미소 짓고 있는 누나를 마주하고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누나는 걱정도 안돼?"

"응. 걱정, 근심, 불안은 이미 실컷 해놨거든."

"그치, 누나는 반년이나 제 수명을 숨긴 으른이시니까 수긍도 빨랐겠지…."

"동혁아, 누구나 죽는 게 쉽지는 않아."

"……."

"나라고 다르지는 않았어."

"……."

"그걸 혼자 견뎌낼 시간이 필요했던 거라고 생각해주면 안될까?"



내 생각이 짧았어, 미안해.

제 머리 위에 손을 올려 천천히 쓰다듬어 주는 그 손길에, 나지막하게 귓가를 간질거리는 그 목소리에, 동혁은 그제야 제 인생에서 누나의 크기를 깨달아버렸다. 그래서 그 손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다.



"나랑 약속했잖아, 절대 나만 두고 먼저 어디로 안 가겠다고…."

"미안해, 약속 못 지켜서."

"이제 누나가 없으면 우린 어떡하지…?"

"달라지는 건 없어, 너희는 너희의 삶을 살아가면 되지. 네 인생에서 내가 전부는 아니었잖아."

"누나는 몰라, 누나가 내 전부였단 말이야…."

"아니, 너는 이미 많이 자랐는 걸."



열여섯, 가진 거라곤 제 몸뚱아리 하나 뿐이던 그 비가 내리던 그날부터 말이야. 너는 너의 선택대로 아주 바르고 좋은 것들만 골라서 지금의 너를 만들었고, 그런 너에게 나는 전부가 되지는 못해.



"금방은 슬프더라도 언젠가는 이겨낼 수 있을 거야."

"……."

"너는 이제 충분히 강한 어른이니까."



뺨에 맞닿은 누나의 손이 아직 너무 따뜻해서, 동혁은 더 울래야 울 수도 없었다.



-



할 일이 많은데 병원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너희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건데?"

"누나 완치할 때까지."



사각사각 사과를 깎아 포크에 푹 찍어 누나에게 내민 동혁이 단호히 말했다. 당번이라도 정한 것처럼 두 명씩 돌아가며 병실을 지켰다. 다 들킨 마당에 내가 여기서 뭘 더 하겠어, 말을 수도 없이 해봤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냥 평생 여기서 살란 거네."

"꼬우면 얌전히 치료받고 완치 판정 받고 나가시등가. 아, 맞다 모레 정우형 온댔는데."

"정우? 김정우가 왜?"

"왜긴, 그냥 흔한 병문안이지. 오늘이 정우형 누나 발인날이라서 정리하는 대로 오겠대."

"허, 참. 너희 도대체 어디까지 소문낸 거니? 나 아프다고 이젠 뭐, 도영 오빠랑 태용 오빠도 찾아오겠다?"

"어? 정답. 내일 재민이가 도영이 형 데려온대. 태용형은 누나 아프다는 거 듣자마자 아주 오열을 하더라. 그래도 둘이 꽤 친했나 봐."

"그냥 뭐, 종종 네 얘기나 하고 그랬지."



누나는 한손에 사과를 찍은 포크를 든 채 다른 손으로는 펜을 쥐고 다이어리에 부지런히 뭔가를 적어 내리고 있었다. 슬쩍, 동혁이 눈을 돌리면 누나는 매정히 도끼눈을 뜬 채 다이어리를 덮었다.



"아, 치사하게!"

"이건 내 유서 같은 거야. 나중에 봐."



그 말에 휙, 예쁘게 토끼 모양으로 깎아놓은 사과 위로 칼을 내려놓은 동혁이 또 눈물을 가득 매달고 빽 외쳤다.



"왜 자꾸 죽는다는 걸 확정 지어 말해, 적어도 우리 앞에선 안 그러면 안 돼?!"

"그래야 너희도 부정하지 않고 내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

"기대하면 실망만 더 커져.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나는 얼마 안 남았어."



누나는 가끔 이렇게 가차 없고 냉정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 순간, 작게 열려 있던 병실 문의 아주 작은 틈에서 동혁은 아래로 내리 깐 눈동자를 보았다.

잠시후 느리게 열린 문에, 누나는 고개를 돌아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녕, 동혁아."

"어, 어…. 넵, 재현이 형 안녕하세요."



반듯한 정장 차림의 훤칠한 남자, 동혁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주었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는 못했다.



"나 민하랑 둘이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잠깐 자리 비켜줄 수 있을까."



앗 네엡, 이민하와 정재현을 번갈아보던 동혁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어쩐지 숨이 막힐 것만 같은 분위기여서,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슬금슬금 병실 밖으로 나섰다.


정재현은 차분히 침대 맞은 편 의자에 앉아 저를 바라보는 제 오랜 친구를 보며 말간 미소를 지었다.



"민하야."

"마크가 말해줬어?"

"응, 어제 회사에 왔었어."



바로 어제, 두 눈이 퉁퉁 부어 짓무른 이민형이 저를 찾아와서는 또 다시 눈물 한번 쏟아내고는 울먹이며 뱉어냈다. 우리 누나, 많이 아프다고, 정말 많이 안 좋다고. 반년 전 한국에 오자마자 암 선고를 받은 일부터, 지금껏 작정하고 저희를 속인 얘기까지 모두 울분을 토하며 뱉어냈다. 그래도 동생들 앞에선 형 행세한다고, 어른스러운 척 감정을 최대한 숨긴 게 분명했다.



"민하야."

"응."



'우리 이제 결혼할까, 나 이 정도면 오래 기다려줬다고 생각하는데.'


멋 없이 꺼낸 그 청혼에도 답지 않게 환한 웃음을 지어줬던 그 애가,


'애초에 서로 좋아죽어서 결혼하는 사이는 아니잖아, 우리가.'


아무 이유도 없이 겨우 그런 말로 거절할 일은 없었을 텐데.

꾹꾹 삼킨 눈물이 티가 날까 봐 최대한 천천히 내뱉었지만, 그 애의 이름 석 자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목소리엔 감정이 가득 담겨버렸다.



"우리 결혼할까?"



정재현이 환하게 웃었다. 근데도 눈에선 가느다란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지고 있었다. 앙상하게 마른 손을 끌어와 품에서 꺼낸 반지 케이스에서 얇은 실반지를 끼워 주었다. 이민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재현아, 나 곧 죽는대."

"응, 알고 있어."

"당장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몰라."

"음, 그럼 최대한 서둘러야겠다. 그냥, 우리끼리 작게. 너랑 나랑 둘이서만."

"……."

"너한테 남은 하루 이틀이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 잘 아는데, 그중에 하루만 나한테 내 주면 안될까?"



맞잡은 정재현의 왼손 약지에는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가 됐든, 남은 시간은 너의 진짜 가족이 되고 싶어."

"더 좋은 사람, 더 적당한 사람 많잖아. 왜 꼭 나를…."

"너를 많이 사랑하니까."

"……."

"내가 니가 아니면 안될 것 같아, 민하야."



끌어안고서 귓가에 읊조리는 그 말에 고개를 떨구고 눈물만 흘렸다.

너는 정말, 정말 어쩌려고 그래. 나는 네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야. 하염없이 엉엉 울며 툭툭, 가슴팍만 쳐대다가 결국 이기지 못하고 너른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나는 그다지 빼어나게 예쁘지도 않아."

"내 눈엔 세상에서 제일 예뻤어."

"허영심도 많고."

"내가 제법 능력이 있어서 괜찮아."

"딸린 식구들도 많고."

"식구가 많다는 건 좋은 거지."

"독단적이고 고집도 세서 가끔은 너를 힘들게 할 거야."

"그거라면 이미 이골이 나 있거든."

"결국에는 너를 놓고 먼저 가버리게 될 거야."

"…응."

"그래도 괜찮아?"



파르르 떨리는 그 목소리에 정재현이 환하게 웃으며 어깨를 쓸어주었다.



"응, 나는 다 괜찮아. 너라면 다 좋아."



생명을 담은 사랑의 고백은 늘 눈부실 만큼 반짝였다.

아주 먼 훗날, 지금의 이 순간과 선택이 손가락질 받는 날이 올지도 몰랐다. 그래도, 정확한 건 후회는 없을 거라는 거였다. 남은 미련도 없었다. 그러니까, 눈물은 여기가 마지막인 걸로. 이게 끝인 거로 하자.

이 순간은 짧은 만큼 그 누구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니까.



-



"우리 결혼해."



비장한 표정의 마크의 옆에서 제법 밝은 표정의 재현이 외쳤다.



"우리…? 무슨 우리요?"

"형이랑 마크형 결혼해요?"

"남자끼리…?"

"캐나다는 동성혼 가능해요."



쑥덕쑥덕, 저기, 저기로 계속 운을 띄운 마크형의 말은 들을 새도 없이 한참을 떠드는 소년들을 재현이 한마디로 틀어막았다.



"나랑 민하랑."



갑작스런 결혼 발표에 제노와 인준은 입을 틀어 막았고, 천러와 지성은 와! 육성으로 소리 내 소리쳤다. 재민은 턱을 괴고선 흘끔 재현을 바라보았고, 동혁은 눈만 데굴데굴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원래 사귀는 사이셨던가?"

"원래 누나랑 재현이 형이랑 어렸을 때부터 결혼 약속 오가던 사이인 건 맞아."



그말에 아이들은 새삼 제 눈앞에 있는 저 두 사람이 재벌 집 아들내미들이란 걸 깨닫고 말았다. 으으, 저러니까 진짜 부자 같잖아.



"알다시피, 우리가 시간이 많이 없어. 목표는 일주일 뒤야. 언제 민하 상태 갑자기 안 좋아질지도 모르고, 최대한 빨리 서두르고 싶어서."



웬만한 건 다 생략할 생각이었다. 상견례 같은 거야 뭐 민하나 자기나 부모님이랑 그렇게 살가운 사이 아니니 패스, 예물, 예단 다 패스. 신혼집은 병원이다, 패스. 신혼여행? 명심해라, 신부는 말기 암환자다. 패스.

신부의 동생 마크가 나서서 웬만한 건 다 기각을 놓는 통에, 남은 건 별것 없었다.


결혼식, 드레스, 사진 딱 그것만.



"식장부터 빨리 예약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듣자 하니 결혼하려면 한 육개월 전에 예약해둬야 한다고 하던데-"

"…거기서부터가 문제야. 결혼할 식장이 없어."

"지방으로 가야 하나…."

"미쳤어? 우리 누나 병원 반경 30킬로미터 밖으로 못 내보내. 기각."

"형, 죄송한데 저희는 형 결혼보다 누나 건강이 먼저라서요…."

"응, 그거야 나도 알지."



그거야 정재현도 동감하는 바였다. 세상에 돈이면 안되는 거 없다. 형 돈도 많으니까 액수로 밀어붙이자 파와 자세히 보면 결혼 직전에 파투 난 커플이 하나씩은 꼭 있을 거다, 그들을 노리자 파가 대립하는 가운데 턱을 괴고 그 광경을 구경만 하던 재민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아이, 그럼 그냥 여기서 하지 그래."



확실히 별 생각 없이 내민 말이었다. 태평한 재민의 표정이 말해주는 듯했다.



"…어?"

"…어?"

"으잉…? 너희 뭔데 혹하는 표정이야."



생각해보면 상당히 그럴듯한 말이었다. 누나 병원이랑도 가깝고, 부지도 제법 넓고, 누나가 신경 썼다는 조경도 완벽했으니까.



"괜찮은데…?"



단번에 결혼식장이 정해졌다.



"식장으로 꾸미는 건 제가 할게요. 아는 분 중에 결혼식장 인테리어 같은 거 하시는 분이 계시거든요. 도와주신대요."



인준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오더니 밝은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말했다.



"앗, 그럼 누나 입장곡은 내가 연주할래. 내가 꼭 해주고 싶었어!"



천러가 신나서 외쳤다.



"그럼 축가는 내가 불러도 돼? 옛날부터 누나 결혼할 때 축가는 꼭 불러주고 싶었는데…."



동혁이 축가를 선점했다.



"그럼 웨딩케이크는 제가 만들게요."



인스타 핫플 카페 2대 사장 재민이 흔쾌히 외쳤다.



"사회는 제가 볼까요? 주례는 도영이 형 부르면 될 것 같고…."



도시교대 방송국 아나운서 이제노가 방긋 웃었다.


홀로 멀뚱히 눈만 깜빡이던 지성이 저를 쳐다보는 듯한 형들의 시선에 어, 어어,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저는….



"여, 열심히 형들을 도울게요…."



-



"누나가 아프다니, 믿기지는 않아요."

"왜 안 믿기는데?"

"누나는 늘 강하고, 어른스럽고…."



분명 과일 바구니를 사 온 건 자신이면서 김정우는 누나가 깎아주는 키위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연우는? 잘 보내줬어?"

"네, 공기 맑은 곳 나무 아래에 심어줬어요. 죽어서는 자유롭게 지내라고. 아- 누나, 우리 누나랑 고등학교 동창이었다면서요?"

"음, 그랬었지. 그다지 친하지는 않았어."

"치, 우리 누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을 텐데…."

"너희 누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걸."



용과를 예쁘게 썰어놓기 무섭게 하나를 콕 찍어간 김정우가 중얼거렸다.



"누나한테 시간이 조금만 더 많았으면, 우린 좀 더 좋은 사이가 됐을 텐데."

"응, 그건 좀 아쉽네."

"누나는 내가 밉지 않아요?"

"내가 니가 왜 미워."



나는 지금까지 누나를 조금은 미워했는데, 속으로 읊조리던 김정우를 보고 이민하는 한번 웃어 보였다.



"너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인데."

"…피아노도 못 치는 피아니스트가 어딨어요. 나는 이제 그냥 김정우라고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그냥 김정우…."



칼을 내려놓은 누나가 저를 똑바로 보았다. 또렷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면 늘 냉기만 풀풀 풍기는 것 같던 그 얼굴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잖아, 조금만 더 지나면 괜찮아 질 거야. 너에겐 언제나 네 곁을 지켜주는 가족들이 있는 걸."



누나의 말에 입을 쭈욱 내밀었다. 장례식 이후로 부모님은 제게 수고했다, 잘 있어라 같은 통상적인 말도 건네질 않고 그 이후 어떤 연락도 주고받지 않은 상태였다.



"가족은 무슨, 엄마랑 아빠랑은 장례식 이후로 연락도 잘 안 해요."

"자니 말이야."



그 입에서 나온 건 꽤 뜻밖의 이름이었다.



"너에겐 유명 피아니스트도 아닌, 그냥 너의 곁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줄곧 지켜준 가족이 이미 있어."

"……."

"그러니까 너는 괜찮아질 거야. 곧 누구보다 행복해질 거야. 장담해."



가만 보면, 이 남매는 무르기가 짝이 없고 쓸데없이 사람 마음을 동요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마크가 그러던데, 누나 결혼한다고."

"응."



그 따뜻함이 또 작용을 일으켜 부정적인 감정을 절반을 덜어버린다.



"행진곡은 내가 연주해줘도 돼요?"

"그건 안 되겠는데. 천러가 이미 찜해놨는걸. 아마 양보해주지 않을 거야. 너무 기대하고 있어서."

"치이…."

"그거 말고, 다른 날 해줄래?"



누나는 저를 빤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중얼거렸다. 나는 성당에서 장례식을 할거거든-.



"내 고별미사곡은 니가 연주해줄래?"



아마 그때 천러는 울기 바쁠 것 같아서 맡기기 조금 그러네.



"괜히 우울한 노래는 별로야, 내가 좋아하는 노래로 해줘."

"그럼 가서 우리 누나 만나면 한마디만 전해주시면 안돼요?"

"응."

"나는 누나 원망하지 않는다고. 한 번도 미워한 적 없다고."

"…응."



-



본격적인 항암치료를 병행해서 그런지, 기를 쓰고 자르지 않고 있던 긴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머리까지 깎아버리면, 진짜 암환자처럼 보여서 싫은데. 거울을 보면 수척해진 얼굴이 조금씩 티가 났다. 머리 길어봤자네, 이젠 누가 봐도 곧 죽을 애 내지 어디 아픈 애야.



"민하야-"



밖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황급히 빠진 머리카락을 쥔 손을 이불보 아래로 숨겼다. 환한 미소를 머금은 정재현이 들어왔다. 두 뺨은 발그레했고, 얼굴 가득 생기가 완연해 보였다. 부르 터 거칠해진 입술을 숨기려 입을 앙다물었다. 재현은 여전히 말간 얼굴을 한 채로 제 앞에 앉아서는 품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 제게 건넸다.


분홍색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 슬쩍 꺼내 보면 그 안의 카드에는 이름이 두 개가 적혀 있었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딸 같은 상투적인 문구는 없었다. 그냥 정재현과 이민하. 단지 그 둘 뿐이었다.



"평생을 함께해왔고, 남은 평생을 함께해도 아깝지 않을 사람 입니다."

"그 아래도 읽어줘."

"…변치 않을 사랑을 약속합니다."



만족스러운 듯 정재현이 미소지었다.



"…진짜 얼마 안 남았네."

"우리한텐 시간이 없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그가 가방에서 꺼낸 서류 봉투에서 나온 건 혼인신고서였다. 모든 칸의 내용들은 꼼꼼히 기입되어 있었고, 오직 맨 마지막 신부 측 서명란만 공란이었다.



"오늘 혼인신고라도 먼저 해놓고 싶어."

"……."

"신분증이랑 도장은 마크한테서 받았어. 너 서명만 받아서 제출하면 돼."



제게 펜을 건네는 재현의 손을 외면한 채 종이를 밀어냈다.



"싫어."

"민하야."

"너희 부모님이 아시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두 분 뵐 면목이 없어서 안돼."

"그냥, 내 말 들어주면 안돼?"

"…결혼식 한 번 정도는 그냥 아픈 친구를 위해 내가 한번 희생했다, 쇼했다 정도로 둘러댈 수 있는데 혼인신고까지 해버리면 그것도 못하잖아. 앞으로 너의 남은 세월은 길고도 길어. 너의 남은 시간까지 내가 방해할 수는 없어."

"오래 살아주면 되잖아."

"……."

"치료 열심히 받고, 건강해져서 못 간 신혼여행도 같이 가고, 예쁜 아이도 낳고, 가끔은 쓸데없는 일로 싸우기도 하면서, 그냥 그런 부부처럼. 평범하게 같이 살아주면 되잖아…."

"함부로 나의 끝을 상상하지 마."

"너야말로 함부로 너의 끝을 단정 짓지 마."



아직 너 살아 있잖아. 왜 그거까지 부정하려고 해.


주머니에서 도장 하나를 꺼내 이민하의 손을 끌어와 쥐여주고는 그채로 톡, 빈칸에 빨간 자국을 채워 넣었다.



"내일 가서 제출할게."

"……."

"내일은 못 올 거야."

"……."

"검사 잘 받고, 치료도 잘 받고. 밥도 잘 챙겨 먹어야 해."



터벅터벅, 떠나는 발걸음과 뒷모습에 시선을 주지도 못하고 입만 꾹 다물었다



너는 자꾸 내게 부채감을 안기려고 해.

나더러 뭘 어떡하라고.







다들 개학/개강은 잘 하셨나용

사실 회사에 다니면 개학시즌이라는 감흥도 잘 안 옵니당...... 깔깔,,, 나이를 너무 많이 주워먹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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