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오해의 발단은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지나가듯 던진 물음에서 비롯되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랑 언제부터 사귄 거야?”

“고등학생 때부터였나.”


지루한 교양 수업이 끝난 직후 책상에 얼굴을 박고 긴 숨을 토해낸 동기가 고개를 들었다. 필기구를 챙기던 이와이즈미는 들려온 물음에 멈칫하는 기색 없이 대답했다. 그 모습이 마치 밥 먹었냐는 형식적인 치렛말에 아무 거리낌 없이 대답하는 듯 보였다. 아주 당연하고도 사소한, 처음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그럼 서로가 첫 연애야?”

“응. 오이카와도 그 전까지 사귀는 애 없었고, 나도 그랬고.”

“그럼 햇수로 몇 년째야. 적어도 5년은 된 거네?”

“3년까지는 기념일 챙겼는데, 그 뒤로는 귀찮더라. 오이카와만 챙기고 있어서 잘 모르겠어. 그 정도 될걸?”


귀찮다는 게 딱 이와이즈미답다. 그 3년도 오이카와 성화에 못 이겨서 챙긴 거지? 이와이즈미를 향해 고개를 돌린 동기는 곧 팔을 쭉 뻗어 강의 내내 움직이지 못한 몸을 요란하게 들썩였다. 오이카와랑 사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더라. 다섯 손가락 중 절반 가량을 접은 이와이즈미가 눈을 굴렸다.


“그럼 다른 남자는 안 궁금해?”

“뭐가?”

“아니, 다른 남자랑 연애하면 어땠을까. 이런 거 안 궁금해?”


가방을 챙기던 이와이즈미의 손이 멈칫했다. 생각지도 못한 물음이었다. 여태 그런 의문은 가져본 적 조차 없을 뿐더러, 다른 남자라는 단어 역시 퍽 낯설게 느껴졌다. 뭐야, 이와이즈미는 그런 궁금증 없었던 거야? 이와이즈미를 향해 몸을 돌린 동기가 흥미롭다는 듯 덧붙였다.


“내 주변에 너처럼 처음 사귄 애랑 오래 만난 애가 있거든. 걔는 궁금해하던데.”


오이카와가 아닌 다른 남자. 익숙한 이름 옆에 낯선 단어가 비집고 들어왔다. 악의라고는 전혀 없는, 지나가듯 던진 동기의 순수한 물음은 이와이즈미에게 꽤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듯 보였다.


“곧 오이카와 올 시간이네. 그럼 다음 수업 때 봐, 이와이즈미!”


어느새 몸을 일으킨 동기가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책상 위에 둔 이와이즈미의 휴대 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잠금 화면에 언뜻 보인 이름은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이와이즈미는 도착한 메일을 확인하지 않고 가방을 챙겼다. 뛰어오는 것 같은 익숙한 발소리가 점차 짙게 울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와쨩!”

“오이카와.”


살짝 헝클어진 갈색 머리칼이 발소리의 주인공이 오이카와라는 것을 방증하는 듯 보였다. 가볍게 숨을 고른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온 익숙한 향에 초겨울의 찬바람이 함께 붙어 있었다.


“점심 먹으러 가자. 오후 수업 없지? 오이카와 씨가 두부 사다 놨으니까 밥 해 줄게!”

“너희 집으로? 너 오후 수업 있잖아.”

“이와쨩 밥 해 주고 가도 안 늦어~”


어제 저녁에 장 보러 마트 갔거든. 시식 코너에서 아주머니가 잘생긴 총각 맛 좀 보고 가라고 두부를 권하는데, 어떻게 안 살 수가 있겠어. 그래서 이와쨩 밥 해 줘야지, 하고 샀지. 재잘재잘 내뱉는 목소리도,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뒤통수 역시 지극히도 익숙한 것이었다. 오이카와가 아닌 다른 남자……. 익숙한 이름과 낯선 단어를 곱씹던 이와이즈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곧 커다란 손에 잡힌 제 손을 풀고 익숙한 손가락을 엇갈려 맞추었다. 마주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Simple Illusion

사소한 오해



“맛은 괜찮았어?”

“응. 솔직히 우리 엄마 것보다 맛있는 것 같아.”

“그래도 어머님 따라가려면 멀었지.”


그릇을 닦는 소리와 싱크대 위를 둥둥 떠다니는 물소리가 오이카와의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뒤섞였다. 이와이즈미는 접시에 가지런히 놓인 사과 하나를 포크로 찍어 한 입 베어 물었다. 오이카와의 등 뒤로 단정하게 묶인 에이프런의 매듭이 보였다. 설거지를 하려는 이와이즈미를 가볍게 밀어내고 고무장갑을 사수한 오이카와는 오후 수업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며 후식까지 챙겨 주었다. 이와이즈미는 달그락거리며 그릇을 닦는 널찍한 등을 바라보았다. 혀끝에 달달한 사과 향이 맴돌았다.


“있잖아, 오이카와.”

“응. 사과 더 줄까?”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그릇을 털어낸 오이카와가 에이프런의 매듭을 끌렀다. 곧 이와이즈미에게 내어 준 사과의 양이 별로 줄어들지 않은 것을 본 듯 오이카와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사과 별로야? 분명 어제 시식할 때는 맛있었는데.”

“아냐, 맛있어. 너도 먹어 봐.”


이와이즈미는 쥐고 있던 포크로 사과 하나를 콕 찍어 오이카와에게 내밀었다. 그대로 상체를 숙여 포크에 꽂힌 사과를 한 입 베어 문 오이카와가 빙그레 웃으며 이와이즈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삭아삭 씹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그럼 왜 안 먹어. 배불러?”

“아니, 그냥. 너랑 같이 먹으려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오이카와는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양손으로 턱을 받치고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는 모양새가 오후 수업은 완전히 잊은 듯 보였다. 포크에 반쪽 가량 남은 사과를 오이카와의 입에 넣어 준 이와이즈미는 문득 오전에 동기가 던진 가벼운 물음이 떠올랐다. 내가 다른 남자와 연애를 했다면…. 오이카와도 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연애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을까? 속에서 생긴 물음을 말미암아 이와이즈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찰나, 곧 눈썹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에 어깨를 움찔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심각한 표정을 지어, 이와쨩.”


걱정을 담은 적갈색 눈동자가 이와이즈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와 다른 남자. 낯선 단어가 잇몸을 툭툭 건드렸다. 이와이즈미는 제게 온전히 닿는 눈빛에 억지로 삼키려 했던 물음을 가볍게 뱉어냈다.


“네가 아니라 다른 남자와 연애했다면 어땠을까?”


눈썹 부근을 배회하던 따스한 온기가 멈칫했다. 싱글벙글이던 오이카와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 괜히 말했나. 이와이즈미는 남자 친구의 표정을 살필 새도 없이 포크를 쥐고 있던 손으로 제 머리칼을 지분거렸다. 다른 남자라는 단어가 이질적일 정도로 그런 생각은 한 적 없는데, 오이카와의 입에서 다른 여자와 연애했다면 어땠을지 궁금한 적이 있다는 말이 나오면 억울할 것 같았다.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걔는 괜히 그런 걸 물어봐서. 이와이즈미는 동기를 책망하며 다소 부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덕분에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오이카와의 목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어, 너, 오후 수업 가야지. 시간 다 됐잖아.”


식탁 모서리를 배회하던 녹색 눈동자가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오이카와의 오후 수업 시작까지 30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소파 위에 둔 가방을 가져와 내밀었다. 좀처럼 오이카와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 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점심은 네가 차려 줬으니까 저녁은 내가 해 줄게. 덧붙인 목소리에 떨림이라도 느껴질까 저도 모르게 말이 빨라졌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내민 가방을 받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이와이즈미가 그의 등을 미는 모양새였다.


“어… 잘 다녀와.”


이와이즈미는 신발을 구겨 신은 오이카와의 등 뒤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터벅이며 신발을 끄는 느릿한 소리가 귓가를 스쳤지만 그것을 개의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 내가 아닌 다른 여자…. 오이카와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정말 억울할 것 같았다. 이 감정이 질투란 건가?


“다녀올게….”


생각하던 찰나에 어느새 열린 문이 맥없이 닫혔다. 센서 등이 잠시 반짝이다 인기척이 없자 점멸했다. 여태 오이카와와 사귀면서 질투란 감정을 느낀 적이 있던가. 이와이즈미는 저 자신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좀 전에 느낀 감정이 질투라는 것을 인식하는 속도가 다른 감정에 비해 현저히 느렸다. 그러므로 답은 간단했다. 느낀 적이 없다.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걔는 왜 그런 걸 물어봐서, 정말. 재차 동기를 책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이카와가 신발을 끌며 나간 현관에 한참 서 있던 이와이즈미가 걸음을 돌렸다.


“어, 그러고 보니까….”


질투라는 감정을 오이카와가 눈치챌까 서툴게 얼버무리고, 감정을 갈무리하느라 미처 느끼지 못한 것들이 하나둘 선명해졌다. 현관에서 배웅할 때 오이카와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 신발을 끄는 소리가 느릿하게 귓가를 스친 것. 평소의 오이카와라면 배웅하는 이와이즈미에게 가기 싫다며 한참을 칭얼거렸을 것이다. 그리고 오이카와는 신발을 구겨 신지 않는다. 현관을 나서는 모습을 떠올리던 이와이즈미의 고개가 잠시 갸웃거렸다. 내가 괜한 걸 물어봐서 기분이 상한 건가. 기울어진 고개가 곧 제자리를 찾았다. 맛있는 거 해 주고 풀어주면 되지 않을까.


“아.”


어느새 갈변한 사과가 가볍게 물음을 정리한 이와이즈미의 시야에 잡혔다. 사과의 껍질을 깎으며 싱글벙글이던 오이카와의 얼굴이 선연히 떠올랐다. 이와이즈미는 후식으로 우유빵이라도 사다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에 달달한 사과 향이 퍼졌다.



*



“좀 늦네….”


식탁 위에 둔 휴대 전화가 오후 여덟 시를 알리려 반짝였다. 오이카와의 수업이 끝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허나 센서 등은 점멸한 채 좀처럼 등을 밝힐 줄 몰랐다. 이와이즈미는 식어 가는 오므라이스를 바라보다 이내 어두워진 액정을 툭 건드렸다.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라도 할 텐데.”


오이카와는 늦는 경우가 생긴다면 득달같이 이와이즈미에게 전화를 했다. 빨리 가지 못해 미안하다며 우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랬기에 이와이즈미는 이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저녁 식사와 연락 한 통 없는 오이카와가 낯설었다. 심지어 물음을 던진 직후 오이카와의 행동이 묘하게 달라진 것 같았다. 그것이 못내 신경 쓰이는 듯 이와이즈미는 휴대 전화를 꼭 쥐고 고민하는 눈치였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곧 결심한 듯 이와이즈미는 밝아진 액정의 문자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뚜르르, 몇 번의 신호음이 울렸다. 응답을 기다리는 이의 초조한 마음을 놀리려는 건지 신호음의 꼬리가 점차 길어지는 것만 같았다.


“……어, 오이카와?”


늘어지던 꼬리가 뎅강 잘려 나갔다. 하지만 바로 들려야 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이와이즈미가 재차 입을 열었다.


“오이카와?”

-이와이즈미?


들리지 않는 오이카와의  목소리에 손가락이 잘게 떨릴 즈음, 건너편에서 이와이즈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의 낯선 상황 탓인지 상대의 목소리 또한 낯설게 느껴졌다. 이와이즈미의 입술이 달싹였다.


-야, 이와이즈미. 너 얘 좀 데려가.

“…하나마키?”

-목소리 들으면 모르겠냐?


빨리 와서 네 애인 데려가라고. 이와이즈미가 대답할 새도 없이 하나마키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오이카와가 받아야 할 전화를 하나마키가 받은 이유를 알기는커녕 대뜸 오이카와를 데려가라니. 숫제 이와이즈미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 뿐이었다.


-오이카와 우리 집에서 울다 지쳐 잠들었거든. 난 힘 다 빠져서 못 해. 네가 데려가.

“울다 지쳐 잠들어?”

-자초지종은 됐고, 일단 와. 지금 자면서도 네 이름 웅얼거리니까.


끊는다. 상황 파악을 위해 이와이즈미의 입이 벙긋거릴 찰나, 이골이 난 듯한 목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액정에 비친 통화 시간은 채 1분도 되지 않았다. 이와이즈미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하나마키네 집에? 울어? 오이카와가? 머릿속에 물음표가 연달아 그려졌다. 그러기도 잠시, 기울어진 고개가 제자리를 찾았다. 좀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인 통화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였다. 하나마키의 집으로 가는 것. 외투를 챙기는 이와이즈미의 손이 분주해졌다.


“어….”


바삐 움직이던 발이 멈칫했다. 현관을 나서는 이와이즈미의 발걸음을 붙잡은 것은 식탁 위에 올려 둔 우유빵이었다. 잠시 고민하듯 눈을 굴리다 우유빵 하나를 챙겨 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곧 이와이즈미의 발이 다시 분주해졌다.



*



초겨울의 해는 꽤 짧은 편이다. 어느덧 어둑해진 하늘에는 낮과는 달리 냉기가 그득 스며든 찬바람이 돌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흩날리는 옅은 겨울바람에 코를 훌쩍였다.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손을 꺼내 초인종을 눌렀다. 외투가 얇은 탓인지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는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둔했다. 이와이즈미의 몸이 잘게 떨렸다.


“아오, 드디어 왔냐.”


첫 번째 벨이 채 울리기도 전에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질린 듯한 얼굴의 하나마키가 이와이즈미를 맞이했다. 하나마키는 얼른 들어오라며 거실을 가린 제 몸을 벽에 밀착했다. 한 발자국 들어서자 밖과는 달리 따스한 훈기가 외투에 섞인 찬바람에 스며들었다. 냉기의 잔여물을 털어내려는 듯 몸이 잘게 떨렸다. 훈기를 느끼며 신발을 벗으려던 이와이즈미가 멈칫했다. 뒤축이 엉성하게 구겨진 신발과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신발의 주인인 듯한 남자가 시야에 잡혔다.


“너희 헤어지냐?”

“어?”


대뜸 치고 들어온 질문에 이와이즈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좀 전의 통화부터 앞뒤 잘라먹은 하나마키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이야, 그게. 이와이즈미는 바닥에 얼굴을 맞댄 형체를 흘기는 하나마키의 질문에 반문했다. 신발을 벗고 훈기 가득한 집 안에 겨우 들어섰다.


“말도 마라. 수업 끝나고 대뜸 찾아와서 네가 자기 버리면 어떡하냐고 울고 불고.”

“…내가 오이카와를 버려?”


거실 바닥에는 널브러진 형체를 제외하고 다 마신 맥주 몇 캔이 나뒹굴었다. 식탁에 자리 잡은 하나마키가 마시다 만 맥주를 홀짝이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뒹구는 캔을 흘기던 이와이즈미의 눈이 절로 뾰족해졌다.


“어쩔 수 없었어. 우선 진정시켜야 되니까.”


이와이즈미의 눈빛에 제 발 저린 듯 변명을 늘어놓던 하나마키가 냉장고를 뒤적였다. 마실 게 맥주뿐인데. 너도 마실래? 묻는 목소리에 이와이즈미는 고개를 저었다. 오이카와가 차려 준 점심 식사 이후 텅 빈 속에 알코올을 들이부어 위를 혹사하고 싶진 않았다.


“이와쨔앙…….”


한껏 잠긴 목소리가 웅얼거리더니 이내 몸을 뒤척였다. 그 소리에 하나마키는 정말 질린다며 혀를 찼다. 이와이즈미의 눈길이 제 이름을 부르는 오이카와에게 향했다. 울고 불고 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오이카와의 눈두덩이 퉁퉁 부어 있었다. 


“네가 그랬다며. 다른 남자랑 연애하면 어떨까, 뭐 이런 거.”

“아, 그건,”

“그 뒤로 네가 다른 남자가 좋다고 가 버리면 자긴 어떡하냐고 날 붙잡고 우는데, 어휴.”


깊은 한숨을 내쉰 하나마키가 고개를 두어 번 내저었다. 곧 목이 타는 듯 맥주를 들이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오이카와를 버리고 다른 남자 만날 위인은 못 되거든.”

“그게….”

“딱 봐도 사이즈 나오네. 누가 너한테 이상한 말 해서 그거 생각하다 오이카와한테 물어본 거지?”


아, 씨. 배고파. 저녁도 못 먹었는데. 구시렁거리던 하나마키가 남은 맥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와이즈미는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찬 기운 탓에 둔했던 손끝 감각이 돌아온 것 같았다.


“친구가 다른 남자와 연애하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 한 적 없냐고 물어봐서….”

“안 봐도 비디오지. 그래서?”

“…나는 그런 생각한 적 없는데, 오이카와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억울할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여태 여자 문제는커녕 언제나 좋아한다며 제 마음을 숨기지 못해 안달이 났던 오이카와였다. 그런 오이카와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와이즈미는 처음과 달리 한껏 좀스러워진 목소리로 꾸역꾸역 말을 이었다. 맥주 한 캔을 더 꺼내려다 생각을 거둔 하나마키가 좀 전보다 더 깊게 숨을 내쉬었다.


“너희는 왜 오래 사귀고도 서로 삽질이냐.”


답답하다, 답답해. 뒤이어 제 가슴을 내리치는 시늉까지 한다. 이와이즈미의 고개가 더욱 수그려졌다.


“그렇게 생각했을까 봐 질투하는 애나, 그 말 듣고 헤어질까 봐 울고 불고 주접 떠는 애나.”

“…….”

“뭐, 사랑하면 서로 닮는다고는 하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하나마키가 잇새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체증이 가셨다는 듯 두 팔을 올려 기지개를 켰다. 슬쩍 이와이즈미의 고개가 들렸다.


“쟤 깨면 알아서 잘 달래라. 너 오기 전까지만 해도 네 이름 중얼거리면서 눈물 뚝뚝 흘렸으니까.”


방금 봤으니까 알겠네. 아, 배고파. 이어 몸을 일으킨 하나마키가 제 배를 쓸어내렸다. 이와이즈미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코를 훌쩍이는 오이카와에게 다가갔다. 문득 차갑게 식었을 저녁 식사가 뇌리에 스쳤다.

 

“배고프면 오이카와네 가서 밥 먹을래?”

“어?”

“오늘 저녁 같이 먹으려고 만들어 뒀는데 안 와서 못 먹었거든. 가서 먹을래?”


식긴 했지만 데워서 먹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 어느새 오이카와의 머리를 제 허벅다리 위에 올린 이와이즈미가 중얼거렸다. 하나마키는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지만 곧 아무렇게나 벗어 둔 외투를 잽싸게 걸쳤다.


“먹을 것도 없는 여기서 세기의 주접을 떨 너흴 보는 것보단 그게 훨씬 낫겠지.”

“비밀번호는 0610이야.”

“0610? 누구 생일 같은데.”

“응. 내 생일이야.”

“미친. 비밀번호부터 주접 떨고 있어.”


간다. 집 어지르지 마라. 상박을 털어낸 하나마키가 급히 현관을 나섰다. 이와이즈미는 저 자신과 오이카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잔뜩 어질러져 있는데. 입술을 삐죽이며 주위를 둘러보던 시선이 오이카와에게 향했다. 눈빛에 미안함이 가득 서려 있었다.



*



하나마키가 집을 나서자 색색거리는 숨소리만이 집 안을 맴돌았다. 이와이즈미는 제 품에서 잠든 오이카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잔뜩 구겨진 눈썹 사이 불안과 초조함이 그득 맺혀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해 주었던 것처럼 구겨진 눈썹을 어루만졌다. 두어 번 쓸어 주자 미간 사이 내 천 자를 그렸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르르 풀어졌다. 이와이즈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미안함이 역력한 눈빛은 그대로였다.


“난 그런 뜻으로 말 한 게 아니었는데.”


단순히 휘발성 짙은 물음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자신과 관련된 일이면 온갖 걱정을 달고 사는 오이카와의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내가 잘못했지. 미안해.”


가벼운 물음에서 비롯된 사소한 오해가 낳은 결과였다. 제 잘못이 컸다. 이와이즈미는 제 기준에 맞춰 짧게 생각한 저 자신을 질책했다. 눈썹을 어루만지던 손이 코를 훌쩍이며 잠든 오이카와의 머리칼로 향했다.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음….”


머리칼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오이카와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이내 눈꺼풀에 가려졌던 적갈색 눈동자가 천천히 이와이즈미를 담았다.


“…이와쨩?”


지척의 느껴지는 온기가 꿈인가 싶어 오이카와는 눈을 두어 번 꿈뻑였다. 그럴수록 느껴지는 온기도, 손길도, 눈앞의 이와이즈미 역시 점차 선명해졌다. 코끝에 은은한 향이 스쳤다. 익숙한 향이었다.


“어, 깼어?”


눈썹 사이에 맺혔던 불안과 초조함이 적갈색 눈동자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이와이즈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지극히도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난 이와쨩 없이 못 살아!”


당찬 목소리였으나 떨림이 배어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제 배에 얼굴을 파묻은 탓에 오이카와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 표정이 선연히 그려졌다. 오이카와가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지 알 수 있었다.


“난 이와쨩이 아니면 안 돼!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랬는데… 이와쨩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이야!”


떨리는 갈색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 좋게 손에 감겼다. 짧게 숨을 내쉰 이와이즈미가 입을 열었다.


“나도 너 없으면 못 살아.”


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이 풀렸다. 오이카와는 차츰 고개를 들어 이와이즈미와 눈을 마주했다. 언제 맺혔는지 발갛게 충혈된 눈망울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이 오이카와의 뺨을 어루만졌다. 체온을 담은 눈물이 이와이즈미의 손끝에 닿았다.


“…이와쨩?”

“나도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알겠어?”


물기를 그득 머금은 목소리에 이와이즈미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짓고 내뱉는 음절마다 무게를 실었다. 어르는 듯한 말투에 오이카와의 눈이 깜빡였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맹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모습에 이와이즈미는 살풋 웃음을 터뜨렸다. 알겠냐고. 검지로 오이카와의 콧잔등을 툭 건드렸다.


“…아, 아, 뭐야!”

“완전 울보네. 울보 오이카와.”


눈빛에 스며들었던 불안과 초조함은 이와이즈미의 손끝에서 증발했다. 급하게 몸을 일으킨 오이카와가 이와이즈미의 손을 제 손으로 덮었다. 푸른 녹안에 비친 자신을 마주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오이카와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내가,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 줄 알아? 갑자기 그런 말을 하니까….”

“미안해.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니라 나는, 그게….”


어느덧 이와이즈미의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오이카와는 제 손 안의 온기를 놓칠세라 힘을 실었다. 허나 눈에 가득 담을 수 있는 건 푸른 녹안이 아니라 발갛게 물든 정수리였다.


“나, 나는….”

“이와쨩?”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데 네가 그런 생각한 적 있다고 말하면, 어, 억울할 것 같아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만들어낸 문장에 오이카와의 가슴이 새차게 뛰었다. 여태 느꼈던 불안과 초조함이 한참 전 과거의 일이라도 된 듯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삐죽이는 머리칼 새로 보이는 붉은 귓볼이 그저 사랑스러웠다. 오이카와는 잡은 손에 힘을 실어 이와이즈미를 부둥켜안았다.


“반칙이잖아, 이와쨩! 이렇게 선수 치는 게 어디 있어!”

“어?”

“이렇게 귀여우면 종일 불안했던 거 심통도 못 부리잖아!”


진짜, 이와쨩 너무해. 뱉은 말과 달리 목소리가 한껏 들떴다. 오이카와는 좌우로 제 몸을 흔들다 이와이즈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익숙한 향이 가득 스며들었다. 불안으로 잔뜩 긴장한 몸에 힘이 탁 풀렸다.


“…….”


꼬르륵. 그와 동시에 오이카와의 굶주린 배가 요동쳤다. 잠시간 침묵에 어깨가 움찔거리자 이와이즈미의 잇새로 웃음이 터졌다.


“혹시 몰라서 우유빵 가져왔는데.”

“…….”

“먹을래?”


어깨 부근에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살짝 몸을 떼어낸 이와이즈미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깊숙이 넣어 두었던 우유빵의 포장이 바스락거렸다. 포장을 벗기고 오이카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오이카와는 콧잔등이 시큰거리는지 코를 훌쩍이며 빵을 우물거렸다.


“원래 후식으로 준비했던 건데.”

“후식?”

“내가 괜한 말을 해서 기분 상했을까 싶어서. 오므라이스 만들고 기다렸는데.”


못 먹게 돼서 아쉽지만 그거라도 챙겨와서 다행이다. 이와이즈미는 모든 오해가 풀려 가벼운 듯 말을 덧붙였다. 우물거리던 오이카와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왜 못 먹어? 지금이라도 먹으면 되잖아. 먹을 수 있는데?”

“…너 지금 여기 어딘지 모르겠어?”


입 안의 잔여물을 겨우 삼킨 오이카와가 비스듬히 기울었던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곧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 눈앞에 선명해졌다. 뒤이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찾은 친구의 집이 선연히 떠올랐다.


“맛키…?”

“그래, 이 바보야.”

“어라, 맛키는?”

“너희 집에 있는데?”


어느새 오이카와의 입 가까이에 있던 빵이 바닥에 놓여 있었다. 우리 집에 왜? 곧 의문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너희 집 가서 밥 먹으라고 했는데?”

“에? 왜?!”

“저녁 안 먹어서 배고프다고 하니까…?”

“배고픈데 왜 우리 집에 가서 이와쨩이 만든 음식을 먹어!”

“그야 그냥 두면 버리니까… 아까워서 내가 먹으라고 했는데?”

“버리긴 왜 버려! 내가 다 먹을 거란 말이야!”


벌떡 몸을 일으킨 오이카와가 곧장 현관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발을 되돌려 바닥에 둔 우유빵을 챙겼다. 이와쨩, 얼른 가자! 맛키가 다 먹어 버리기 전에 가야 돼! 이와이즈미는 퉁퉁 부은 눈두덩을 하고 열을 올리는 오이카와의 모습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이와쨩, 빨리!”

“아, 알았어.”


저도 모르게 뱉은 물음 하나로 인해 종일 우울했던 오이카와가 이제는 차갑게 식은 저녁 식사로 인해 열을 내고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잔뜩 뿔이 난 뒤통수를 보며 다시금 생각했다. 너도, 나도. 서로가 아니면 정말 안 되겠구나. 이와이즈미는 제 손을 잡고 얼른 가자고 채근하는 온기를 느끼며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손끝에 얽히는 온기가 마냥 따뜻했다.

12670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