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준비를 서둘렀음에도 휴일 정체에 버스가 막히기까지 해서 결국 10여 분을 늦어 버린 희수는 웬일로 제 시간에 와서 기다린 지수를 보자마자 사과를 했다. 


"지수야. 진짜 미안해…! 늦게 일어나서."

"이이잉.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어!!"

"미안. 저번에도 그렇고."


징징대긴 했지만 지수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다정하게 희수의 팔짱을 꼈다. 마음은 아직은 어색했지만 워낙 오랫동안 그래서 그런지 자세는 완전히 익숙했다. 그래도 약간은 의아한 듯 지수는 희수에게 물었다. 


"근데 웬일로 늦잠을 잤어?"

"아, 어제 영인이랑 술 마셨는데……. 너무 많이 마셔서."

"아. 영인이랑?"

"응. 기억이 안 나. 막판에는…."

"………와. 너 새터 이후로 처음 아니야? 필름 끊기는 거."

"…그러니까. 실수했을까 봐 겁나."

"너는 뭐 하이톤 되는 거 빼곤 술버릇 없잖아. 아 좀 우는 거 같기도 하고."

"아. 어떡해. 어제도 운 것 같은데……."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와앙 헛울음을 우는 희수에 지수는 아무 말도 없다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걔 나랑 둘이 술 마시면서 진짜 별꼴 다 봐서 괜찮아."

"……둘이?"

"막 내가 술 마시고 진짜. 어휴. 넌 양반이었을 거야."


하긴. 둘이 친했지. 지수가 영인의 주전공인 행정학을 복수전공했기 때문에 교환학생에 다녀와서는 둘은 많은 수업을 같이 듣곤 했다. 실제로도 수업 끝나고 저녁도 꽤 자주 먹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왠지 지수의 말에 불쾌한 기분이 훅 밀려 왔다. 왜지. 이유 모를 낯선 기분에 희수가 당황하는 동안 지수는 신나서 말을 잇고 있었다. 


"아, 저번에도. 에휴. 나 정말 술 끊어야 돼."

"싸웠댔지. 네가 영인이 때문에 화났다고."

"푸하하. 공영인이 그래?"

"응."

"귀엽네. 공영인. 사과도 안 해 놓고."


피식 웃으면서 머리를 쓸어넘기는 모습에 짙은 애정이 묻어났다. 맞아. 그랬었지. 지수는 영인의 이야기를 할 때 저런 묘한 미소를 짓곤 했다. 영인과 지금처럼 가까워지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 

그랬지. 그래서 영인이 제 편을 들어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둘이라서. 그래도 어제 영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희수는 입술을 끌어올렸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세상에 은근 비밀이 없단다?"

"지수가 말했어?"

"그전에 눈치채긴 했지만. 너 오고 며칠 뒤 이실직고도 했지."

"그렇구나."

"네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서. 모르는 척했는데. 알려 줄 걸 그랬나."

"으응. 왠지 너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역시 그랬나. 묘하게 늘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생각했다. 평소에는 세상 뚱하게 늘어져 있는 영인이 지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면 꼭 옆에 와 제 기분을 풀어 주곤 했으니까. 그 일이 있고 처음 지수를 만날 때도 아직 용서할 준비가 안 됐다면 같이 가 주겠다고 한 거였구나. 그날 저녁도 일부러 나를 살피러 기다린 거구나. 그리고 오늘도. 마음 한 구석이 뜨뜻해졌다. 무언가 터져서 따뜻함이 고이는 것만 같았다. 


"이건 내가 미안.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일부러 말 안 했는데. 또 나름 답답했겠네."

"으으응. 내가 말 안 한 거니까. 그리고 맞기도 해. 막 누구 탓…. 그런 게 듣고 싶던 거 아니니까."

"탓 하고 싶은데? 그 미친 계집애. 제 정신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 정도로 미친년일 줄은 몰랐지."

"아하하……."

"내일은 쉬는데 왜 부르는 거야."

"너무 그러지 마. 어쨌거나 지수도 노력하는 거니까."


영인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희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꺼내려고 생각한 말은 놀랍게도 희수의 입을 통해 나왔다.


"영인이 넌 정말 착해…."

"하? 그리고 내가? 채지수나 최유민이 웃겠다."

"으으응. 정말이야. 늘 고마워."

"내일 괜찮겠어? 많이 마셔 갖고."

"응. 괜찮아…."


말은 그렇게 해도 희수는 무언가 긴장이 풀리자 몸도 풀려서 취기가 확 돌았다. 그리곤 식탁에 팔을 베고 누워서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진짜 좋아…. 너랑 있는 거."

"참 뜬금없는 고백이네."

"정말이야. 마음이 편하고 든든해."

"그래. 더 말하면 어색할 것 같은데."

"어색 안 해…!! 안 어색하거든?!"

"워 워. 급발진. 워 워."


음주운전이라 그래? 왜 이렇게 급발진이야? 웃으면서 영인은 고민이 있으면 말하라며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이 무척 기분이 좋았다. 주인에게 안기는 강아지가 이런 기분일까 싶을 정도로. 그게 마지막 기억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15.2.


어제 영인에게 말하고 기분이 많이 풀린 건지, 아니면 익숙함이라는 게 무서운 건지, 지수와의 쇼핑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보통 때보다 더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게 고르고 싶은 게 두 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영인이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런가? 뭐 걔는 좀 웜톤이니까."

"아, 그런가? 궁금하다. 퍼스널컬러."

"그런 거 돈 아깝다고 안 받을 것 같지. 공영인은."

"아하하. 응. 맞아. 이거 입혀 보고 싶다…."

"구부정해서 그렇지 키가 꽤 크지. 이것도 완전 공영인."

"진짜!"


지수가 고른 원피스를 들고 희수는 해맑게 웃었다. 8월이 생일인데, 벌써 사 주면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겠지. 지수는 웃다가 그 옆의 블라우스를 꺼내 희수에게 댔다.


"우리 옷 고르러 왔잖아! 이거 어때?!"

"아. 와. 귀엽다."

"그치? 지금 신은 운동화랑도 찰떡."

"응. 와아."

"사이즈도…. 이게 55네. 입어 봐."

"그럴까? 괜찮을 것 같아?"

"응. 완전. 빨리 들어가~~"


지수의 말에 따라 희수는 블라우스를 들고선 탈의실로 들어왔다. 그래도 아까 그 원피스가 계속 눈에 밝혔다. 그냥 눈 딱 감고 사갈까. 많이 비싼 것도 아닌데. 결국 소곡주는 영인이가 샀고…. 아 그래도. 밖에서 지수가 블라우스 단추가 100개쯤 되냐고 보챌 때까지 희수는 멍하니 고민에 빠져 있었다.




여름옷을 한 보따리 산 지수는 의자에 놓인 쇼핑백을 의기양양하게 바라보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쭈욱 빨았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이 너무 예전과 같아서 희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둘이 같이 사는 건 어때? 공영인이 안 괴롭혀?"

"괴롭히기는. 엄청 잘해 줘."

"걔가 은근 그래? 히."

"응. 은근 세심하고 착해."

"영인이가 그날 나 안 온 거 뭐래? 삐졌대?"

"아, 응. 네가 자기한테 삐졌다고…."

"삐진 줄 알면! 바로 바로 달래 주러 튀어와야지 말이야. 하여간 공영인~~."

"아하하."


왠지 영인이라면 ㅡㅡ 이런 표정을 지으며 '내가 왜?'라고 할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또 가겠지. 너무 상상이 가서 희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는 모습에 지수는 다행이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진 거 같아 다행이야."

"그래?"

"미안해. 정말로."

"…그 얘긴…. 이제 괜찮아. 고마워. 지수야."


두 손으로 자신의 손을 꼬옥 붙잡는 모습이 마치 여고생 같았다. 이렇게 애교 많고 천진난만한데 또 얼굴은 고양이상에 화려한 미인이었으니 다소 제멋대로인 면이 있어도 다들 좋아할 만했다. 희수 자신 역시도 그래 왔으니까. 


"그럼 요샌 잘 지내고 있어? 사람 많이 만나?"

"으응. 맨날 집에서 놀아. 영인이랑 놀거나."

"…헤에. 그렇구나."

"응. 원래 막 밖에 나가는 성격 아니니까. 가끔 학원 샘들이랑 식사 정도?"

"심심하겠다아. 희수. 남소 받을래?"

"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의 희수에 지수는 순간 제 실수를 떠올렸는지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면서 미안해했다. 


"아. 미안. 진짜 미안. 내가 할 소린……. 진짜 아니다. 그지."

"아하하…. 그, 생각해 줘서 고맙지만. 아직 누구를 만나기는…… 좀 힘들 것 같아. 미안."

"으으으응. 내가 또 경솔하게 행동했어. 아. 영인이가 이러지 말라고 했는데."


고개를 돌리며 미안한 들 글썽이는 모습에 어이없던 건 조금 풀렸지만 튀어나온 영인의 이름에 희수는 알 수 없는 거슬림을 느꼈다. 오늘 뭔가 묘하게 지수 입에서 영인의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것 같았다. 평소에도 이 정도로 그랬나?


"미안해서 오늘 너 옷 사 주려구 했는데. 왜케 못 골라~"

"그러게 다 예뻤는데."

"진짜 결정장애네. 우리 희수는."

"미안."

"나 없으면 쇼핑 어떻게 하니~~ 답답쓰!"


예전이라면 그러려니 넘어갔을 말이 지수와의 변한 관계 때문인지 살짝 걸렸다. 그러나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닐 게 분명하기에 희수는 그러게 맞장구를 치며 웃어 보였다. 

'그래도 뭘 사긴 사야 하는데.'

작년에 비해 좀 살이 빠져서 입을 게 없기도 했거니와 영인이 (핑계겠지만) 뭘 사 왔냐며 고개를 빼꼼 내밀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사람 많은 곳이 싫어 쇼핑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 영인이었으나, 새 옷을 사거나 보는 것도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으음."

"왜? 뭐 사고 싶은 거 생겼어?"

"지수야. 나 그."

"???"



15.3.


우와. 이렇게 딱 붙는다고. 희수는 점원과 지수가 골라 준 H라인 원피스를 들고 입을 쩍 벌렸다. 회사 면접 때나 졸업사진 찍을 때 입은 투피스 정장보다도 훨씬 라인이 드러나는 옷이었다. 결혼식 때 영인이나 지수가 입는 것만 봤지 자신이 입을 생각은 않던 옷이었다. 


"웬일이래? 희수 요런 스딸 잘 안 입었잖아!"

"그냥. 요새 경조사 많아서…. 까만색 단정한 원피스 하나 갖고 싶었어서."

"맞아요. 고객님. 이게 포멀하고 깔끔해서 어떤 자리든 다 잘 어울려요~"

"그런가요…?"

"일단 입어 봐. 백날 몸에 대고만 있으면 알겠어?!"

"응."


희수는 탈의실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평소에 이런 핏한 원피스를 자주 안 입어서 그런지 등의 지퍼를 올리기가 어려웠다. 전혀 그럴 일 없지만 혹여 옷이 상할까 봐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한몫했다. 희수는 조금 망설이다가 문을 살짝 열고 지수를 불렀다. 


"웅? 왜? 작아?"

"아니. 그, 나 등에 지퍼 좀……. 손이 안 닿아!"

"푸하하. 어휴 우리 희수."


지수는 깔깔 웃으면서 탈의실로 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에 케미솔을 받쳐 입는 건데. 막상 맨등을 보이려니 조금 창피했지만 희수는 조심스레 뒤돌아 등을 보였다. 지수는 잠시 말이 없다가 등이 하얗다며 웃었다. 그리곤 천천히 지퍼를 올렸다. ,


"히얏! 뭐해애?!"

"아니. 장난~ 아팠어? 미안."

"아픈 건 아니구 놀랐어!"

"미안. 미안. 자~ 다 올렸다. 우리 희수 언니 없이 어뜨케 사니."

"피. 고마워."


등허리를 찔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른 게 민망해 희수는 얼굴을 붉히며 감사를 표했다. 그리곤 함께 탈의실 문 밖으로 나왔다. 

여태 안 입어 봤던 스타일이라 안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던 원피스는 생각보다 예뻤다. 점원은 맵시를 다듬어 주면서 몸매도 좋고 키도 있으셔서 너무 잘 어울리신다며 칭찬을 늘어놓았다. 희수 자신이 봐도 제법 어른스럽고 쿨해 보여서 퍽 마음에 들었다.


"지수야. 나 어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듯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는 지수에 희수는 멋쩍은 듯 돌아서 다시 거울을 살폈다. 그래. 내 옷인데. 내 맘에 들면 사는 거지. 예쁜 것 같아. 가격도 합리적이고. 다음에 구두 신고 같이 놀러 나갈까. 그럼 키도 비슷할 것 같은데. 


"?"


키가 비슷해서 뭐. 희수는 자신이 한 생각이었지만 좀 이상한 생각이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슬슬 미용실 예약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으니 통화가 끝났는지 지수가 또각또각 다가왔다. 


"지수야."

"…헤에."

"너무 잘 어울리시죠? 하나 하세요. 정말 활용도가 좋아요."

"네. 예쁜 것 같아요."

"그런가?"


뜻밖의 이견에 희수는 고개를 들어 지수를 바라보았다. 지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확실히 의견을 표명했다.


"희수 넌 원래 입는 스타일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아유. 잘 어울리시는데…."

"좀 더 여유로운 실루엣이 낫지 않아요? 바스트도 있고."

"그럼 이거는 어떠세요?"


점원은 딱 봐도 줏대 없어 보이는 희수에 비해 의견이 뚜렷한 지수에 동조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원피스를 골라 주려는 눈치였다. 예전이었다면 그냥 지수가 아니랬으니까 벗었을까. 그러나 지금의 조희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

"어?"

"나 마음에 드는데. 단정하고 예뻐."

"아유. 맞죠!"

"…그래? 흐응. 그래도 이게."

"응. 고마워. 그것도 입어 볼게. 근데 나 이거 마음에 들어서. 꼭 사고 싶어."


지수는 조금 놀란 듯 눈이 커졌다가 눈썹을 그러모으면서 미소를 보였다.


"그래. 뭐 경조사 같은 자리 많으니까."

"응. 고마워. 네 의견도 이해하는데, 내가 사고 싶어서."

"그래~ 그래. 일단 갈아입고 나와."


희수가 탈의실로 들어간 뒤 무표정하게 "허." 하며 콧방귀를 뀌곤 머리를 쓸어올리는 지수에 점원은 벌벌 떨며 옷가지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 네가 골라 줬는데 결국 내 고집대로 해서."

"됐어. 다시 생각해 보니까 괜찮은 거 같아. 아까 운동화라서 좀 어색했는지도?"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아까도 얘기하려고 했는데 신발 귀엽네. 샀어?"

"아, 응. 그때 유민이 보러 서산 내려가다가. 영인이랑 하나씩 샀어."

"아. 영인이랑"


뭐지. 희수는 다시 지수의 태도가 약간 이상함을 느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날이 선 듯한 태도에 희수 역시 지수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영인이 운동화 싫어하는데."


왜 이런 말을 나한테. 그것도 네가. 정말 정보를 알려 주고 싶어서일까? 희수는 의심했다.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던 신앙 같던 제 친구를, 이미 신은 신뢰를 잃은 지 오래였기에. 


"몰랐나 봐."

"아."

"희수는 덜 친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지?"


지수가 나를, 채지수가 조희수를, 또, 또 다시. 이기려고 하는구나. 빼앗으려고 하는구나. 공영인이라는 사람까지. 이미 웃음기는 사라졌으나 희수는 일부러 입꼬리를 올렸다. 


"아닌데."

"뭐가?"

"나랑 영인이 친해. 지수야."

"5개월 동안 정 많이 들었구나?"

"응. 그리고 영인이 운동화."


희수는 살짝 발을 들어올려 제 운동화를 보았다. 공영인은 운동화를, 조희수를. 


"안 싫어해. 편하다고 좋아해."


자신의 말로 인해 지수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희수는 그날, 처음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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