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연병장에서 빠져나온 김현성은 홀로 고요한 복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차분한 표정과 달리 그의 발걸음에서는 묘한 흥분이 베여 있었다. 매일 이 시간만을 기다려 온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부드럽게 휘어져 있던 눈매는 목적지였던 문이 시야에 잡히자 원래 형태로 되돌아왔다.


 문을 중심으로 있던 인기척들이 그가 나타나기 무섭게 하나둘씩 빠른 속도로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지금은 다른 길드원들과 원정을 떠난 박리안 씨는 아닐 거고. 기영 씨를 위해 만든 친위대 중에서 다른 사람들일 터였다. 일반적인 훈련생들보다 훨씬 더 혹독한 환경에서 발탁된 이들답게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실력도 좋은 편이었다. 그래봤자 훈련생들과 마찬가지로 김현성의 발끝조차 따라잡지 못하는 이들이었지만.


 친위대의 기척이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 있던 김현성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문짝 너머에서 들어와도 좋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이 거부당할 리 없단 걸 알면서도 김현성에겐 그 허락이 무척 반가웠다. 괜히 옷깃을 한번 정리한 뒤에야 김현성은 문고리에 걸린 마법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창문 대신하여 설치된 거대한 여신의 거울을 배경으로 서류가 가득 올라와 있는 책상이 있었고, 그곳에 김현성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잔잔하던 심장 소리가 그를 마주하게 되자 저절로 빠르게 뛰었다.


“기영 씨.”


 몇 번을 불러도 질리지 않는 이름을 마음속으로도 되뇌며 김현성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주무실 시간입니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이게 자기 직업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에스코트부터 권해온다. 매일 보더라도 질리지 않는 잘생긴 얼굴에서 ‘나 정말 즐겁게 잘 지내고 있어요.’라는 티가 팍팍 났다. 걱정과 슬픔으로 축 처져있기만 하던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보기 좋기는 했다. 저절로 빛이 난다고 해야 하나.


 결국 이번에도 백기를 든 건 이기영이었다. 들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은 이기영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옷걸이에 걸어둔 외투를 챙기기 위해 손을 뻗자 김현성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여기요.”


 얼른 입으시라며 양손으로 외투를 잡아 벌리고 있는 모습이, 주인하고 얼른 산책하러 가고 싶은 마음에 목줄을 물고 선 강아지처럼 보이는 건 환각일까. 얘는 지가 날 어떤 표정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를 거다. 이기영은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김현성이 든 외투에 팔을 꿰어 넣었다.


 다음에는 문을 열어주겠지. 외투를 여미는 사이 등 뒤에 있던 김현성이 문 앞에 있는 걸 봐도 이젠 놀랍지 않았다. 복도로 나오자 집무실의 환한 빛마저 사라졌다.


“갈까요?”


 집무실 문을 직접 걸어 잠그는 일까지 한 김현성이 손을 뻗어왔다. 이기영은 어색하게 그 손을 맞잡았다.

길드마스터가 부길드마스터의 퇴근길을 직접 책임지는 이 희한한 광경은 약 한 달 전부터 반복되고 있었다.


 과거와 같은 초대형급 이벤트가 없다고 관리자가 한가해지는 건 아니다. 대륙 여기저기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터지고 있었고, 기존에 만들어둔 시스템이 어긋나지 않도록 체계적인 보수도 필요했다. 이지혜를 비롯하여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다른 신들의 도움이 있긴 해도 최종적인 마무리는 이기영의 손이 닿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다소 무리를 하긴 했다. 외부 일정을 소화하던 와중 미처 회복하지 못한 피로가 몰려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잠깐 정신을 잃는 일이 있었다. 의식을 되찾은 순간 몸은 단단한 팔에 감겨 있었고, 팔의 주인인 김현성이 목에 핏줄까지 세워가며 사제를 불러대는 게 보였다.


 어어, 얘 분명 나랑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언제 또 금방 날아왔대. 덕분에 더러운 바닥에 구르지는 않았지만, 이기영은 슬쩍 올라갔던 눈꺼풀을 도로 내렸다. 계산에도 없었던 상황에서 괜찮다고 비척비척 일어나봤자 상황은 악화할 게 뻔했다.


 있지도 않은 빌런의 공격을 받은 게 아니라 단순히 과로였다는 진실이 밝혀졌을 때 김현성의 표정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이 어려있었다. 괜한 걱정을 시켰다는 생각에 미안한 맘이 조오금 들긴 했다. 근데 나 원래 잘 쓰러지자너. 이번에도 그런 거라고.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가벼운 소동일 뿐이라니까.


 기영 씨의 몸은 홀몸이 아니다 어쩌고 무리하지 말아 달라 저쩌고 하면서 징징거리는 걸 적당히 달래주면 될 거란 예상과 달리, 김현성은 그날부터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이기영의 수면 시간을 말도 없이 마음대로 정해놓는 걸로 모자라서 그 시간에 맞춰 직접 마중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기영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새 나라의 어린이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남아있는 일을 놔두고 잠이나 자러 가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그러자 김현성은 망설이지 않고 이기영을 가볍게 안아 올리고서는 그대로 침실까지 직행한다는 만행을 저질렀다. 놀란 이기영이 공중에서 발버둥을 쳐봐도 김현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묵묵히 침실까지 배송했다. 그날 두 사람의 모습은 많은 파란 길드원들 뇌리와 손거울에 다양한 각도로 박제되어 하룻밤 사이 전 대륙에 뿌려졌다. 참고로 해당 사진을 올린 길드원은 길드 내부 사정을 베니고어그램에 업로드한 죄로 3개월간 감봉 처분을 받았다.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픽 쓰러졌으니 놀란 마음이야 이해 갔다. 그렇지만 말이야.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 더 열받는 건 이러한 김현성의 횡포를 말리지 않고 도리어 응원하는 주변인들 반응이었다. 파란 애들이야 원래부터 이기영이 쉬길 바랐으니 그렇다고 쳐도, 믿었던 김미영 팀장마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고개까지 돌리는 걸 보고 이기영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동의하지 않은 강제 취침에서 벗어나기 위해 화를 내기도 하고, 이런저런 말들로 회유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무엇하나 통하지 않았다. 김현성은 지나칠 정도로 이기영을 재우는 데에 진심이었다. 벽을 두고 이야기한다는 게 이런 걸까? 김현성이라는 벽은 너무나도 견고해서 뭐 하나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천생 딜러라 탱커 역할 같은 건 어울리지 않는 놈이라도 녀석의 바탕에는 신급의 피지컬이 있다. 김현성이 버티고 서있기에 들어간 이상, 그와 동급의 네임드를 데려오지 않는 한 이기영이 벗어날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


 길드마스터의 독단으로 결정된 이기영의 공식적인 업무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8시까지. 이후는 자유였으나 이기영은 대체로 업무를 보고 있는데, 밤 10시가 넘도록 침실로 가지 않고 집무실에서 버티고 있으면 김현성이 직접 찾으러 온다. 포인트는 이기영이 어느 장소에 있건 뭘 하고 있건 관계없이 강제로 침실로 데려간다는 점. 설마 여기까진 오지 않겠지 싶었던 붉은 용병 길드까지 쳐들어오는 바람에 얼마나 식겁했는지 모른다.


 더 놀란 건 붉은 용병의 길드원들이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파란 길드마스터에 당황한 이들이 버벅거리면서 앞을 가로막았다. 그런 그들을 날려버리게 된다면 붉은 전신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거나 다름없다는 최소한의 이성적인 판단은 있었는지 얌전했지만, 남의 길드에 다짜고짜 찾아온 행동이 비매너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소식을 전달받은 차희라와 이기영이 응접실로 나올 때까지 김현성은 자리에 앉아있지도 않고 말없이 서 있었다. 김현성 이름이 나온 순간 차희라의 얼굴에서 호전적인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본 이기영은 안절부절못하는 심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평화롭게 흘러가는 나날 속에서 붉은 전신은 극심한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걸 해소해줄 만한 상대와 마주한 상황이었다. 불안해진 이기영이 둘 사이에 끼어들려 했으나, 김현성의 입이 열리는 게 한 박자 더 빨랐다.


“지금은 기영 씨가 주무실 시간입니다.”


“뭐?”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 이기영과 반대로 김현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차희라에게 자신에게 주어진 목적을 유려하게 설명했다. 이 대륙에서 자기와 동등하게 싸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는 차희라는 얼이 빠진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더니 곧 소리 내어 웃어대기 바빴다. 


“자기가 자야 하는 시간이라면 어쩔 수, 크흡, 없겠네.”


 생각지도 못한 잠자리 마중에 있던 투지마저 사라져 버렸는지 차희라는 피식피식 흘러나오는 웃음기를 참지 못했다. 마지막에는 우리 자기 잘자, 라며 엉덩이까지 토닥토닥해가면서 배웅해주었다. 수치심에 굳어버린 이기영은 그 상태로 김현성에게 인도되었다.


 같은 길드원도 아닌 붉은 용병 길드원들이 보는 앞에서 끌려가는 심정은 뭐라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 뒤로는 이기영은 김현성이 찾아오는 시간대에 타인과 만나는 약속을 함부로 잡지 않게 되었다.


 이 밖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회피를 시도해보았으나 김현성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하다못해 중간지점으로 도망이라도 칠 수 없을까 싶어서 오랜만에 베니고어의 도움도 청해보아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녀는 간절한 후배의 부름에도 답해주지 않았다. 간간이 베니고어가 처리한 일들이 올라오는 걸 보면 잠수라도 탄 건 아닌데. 의도적으로 이기영을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 보고 싶었다며 달려들 때는 언제고.


 이지혜와 벨리알도 비슷했다. 베니고어처럼 연락을 아예 안 받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김현성이 벌이고 있는 만행에 대해서는 교묘하게 다른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설마 얘들도 내가 정시출근, 정시퇴근하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이기영은 이를 갈았다.


 거의 완벽하게 고립 상태가 된 이기영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김현성의 잠자리 마중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당장 그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자너. 기회만 된다면 벗어날 생각이긴 한데, 당장은 무리였다.


“현성 씨가 매번 이렇게 직접 오실 필요는 없어요. 대신 다른 분을 보내셔도 되잖아요.”


 함께 침실로 향하는 복도를 걸으면서 꺼낸 말에 김현성의 눈썹이 기운 없이 내려갔다. 아. 쟤 또 저런 표정 짓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겁니다만…혹시, 싫으신가요?”


 잘생긴 얼굴 위로 스며드는 짙은 슬픔에 이기영은 얼른 손부터 내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저 때문에 현성 씨가 매일매일 오시면 번거로우시잖아요.”


“번거롭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전부 기영 씨의 건강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요.”


 네, 네. 그렇겠죠. 그러시겠죠. 지루한 말들이 이어지는 동안 이기영은 영혼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몇 번째 듣는 건지 모를 말을 흘려듣다 보니 금방 침실에 도착했다. 이기영의 침실은 집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평범한 대륙민들보다 떨어지는 피지컬을 가진 이기영에게 긴 이동 거리는 비효율적이다. 다른 건물이기는 해도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어서 걸으면 채 십 분도 되지 않았다. 이 짧은 거리를 굳이 바래다주고 앉아있으니 이기영으로선 한숨만 나왔다. 


 김현성의 볼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침실 안까지 쫓아 들어왔다. 제 방이라도 되는 양 서슴없이 들어와 집무실에서 했던 것처럼 외투를 받아든다. 알아서 옷가지를 착착 정리하고 있는 뒷모습을 착잡하게 보던 이기영은 잠옷을 챙겨 욕실부터 다녀오기로 했다.


 욕실에서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자 김현성이 전날처럼 침대 옆 테이블에 뭔가를 세팅하고 있는 게 보였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건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향로. 저거라도 없었어도 나았을 텐데. 이기영의 표정이 저절로 뾰로통해졌다.


“그거…오늘도 꼭 써야 하나요?”


 처음 김현성에게 잡혀 침실로 억지로 끌려왔을 때, 이기영은 자는 척 침실을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시바 나 없으면 대륙이 제대로 돌아갈 것 같아? 세상의 온갖 일들은 밤에 이뤄지는 법이라고.

하지만 침실 안을 은은하게 채우는 향기를 눈치채자마자 기절하듯이 숙면에 빠져들었다. 눈을 떠보니 시간은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 당황했었지. 지금은 그 원인을 알고 있다. 바로 저 향로 때문이었다.


“네. 이게 기영 씨를 푹 주무실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걸요.”


 여우 같은 구석이 있다는 건 전부터 알았는데 이런 준비성까지 갖췄을 줄은 몰랐지. 이기영은 마력으로 불이 붙은 향로를 흘끗 쳐다보았다. 지난번에도 확인했던 아이템 설명이 눈앞에 비쳤다.


[말레우스 신의 황금 향로 – 준신화 등급]

[아우로라 여신에 대한 사랑으로 밤마다 방황하던 말레우스 신이 직접 황금으로 빚어 만든 향로.

잠들고자 하는 사용자 신체의 일부를 담고 향로에 불을 피우게 되면 싱그러운 식물 향기가 주변을 감싸면서 어지러운 머릿속이 진정되고 그 누구도 깨울 수 없는 깊은 단잠에 듭니다.

환기할 수 없는 공간에서 사용할 경우를 주의하십시오. 향로의 불을 끄지 않는다면 사용자는 영원히 잠들게 됩니다.]


 어디서 챙겨왔는지 모를 이기영의 머리카락 하나를 향로 안에 집어넣던 김현성은 자신을 관찰하는 시선을 느꼈는지 전에도 했던 말을 똑같이 내뱉었다.


“충분히 검증을 마친 아이템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검증은 또 누가 한 건데. 이기영은 입을 삐죽거리려다 참았다.


 김현성이 대체 무슨 재주로 저런 수상한 물건을 구해왔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약물 내성에 어지간한 세뇌형 마법도 들지 않는 희부신의 성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준신화급 아이템이라니. 아이템의 출처를 백방으로 추적해봐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웠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이었다. 흔적을 지운 당사자는 아마 높은 확률로 눈앞에 있는 이놈일 거고.


 잠깐. 이 회귀자 자식이 설마 여태 나에게 말하지 않고 꿍쳐둔 게 더 있는 건 아니지? 믿었던 바깥양반의 비자금을 알게 된 안사람처럼 이기영의 눈초리가 사나워지려는 찰나였다. 방안을 환하게 하던 빛이 사라지고 향로만이 희미하게 주변을 비추었다.


“기영 씨.”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이기영은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알고는 있다. 상대는 그 김현성이다.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으며 해치지 않을 인물. 비록 배가 뚫린 전적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기영이 의도적으로 유대감을 끊으면서 발생한 일종의 사고였다. 김현성은 자신의 의지로 이기영에게 직접적인 해를 입힐 수 없다. 이건 절대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명제였다. 애초에 무슨 짓을 하려고 했으면 굳이 재우지 않아도 되겠지. 내가 현성이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자너.


 이기영이 이불자락을 올리고 꾸물거리면서 침대 위로 오르자 김현성의 눈빛이 한층 더 부드러워진다. 베개에 머리를 눕히는 동안에도 그 시선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오늘도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기영 씨.”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건 가슴께가 다 간질거릴 만큼 다정한 목소리였다. 몇 번을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기분에 이기영은 이불 속에 감춰진 손만 꼼지락거렸다.


“안녕히 주무세요.”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듣기 좋은 목소리와 함께 향로에서 나는 향기는 점점 짙어지고, 맑았던 정신도 흐릿해져 갔다. 그 와중에도 이기영을 바라보는 김현성의 시선은 꿀을 발라놓은 듯이 달았다. 숨길 생각도 없이 쏟아지는 애정은 이기영을 배부르게 만들어주었다.


 그냥 며칠만 더 현성이랑 이 소꿉놀이 같은 일상에 어울려 줄까? 어차피 곧 시작되는 동계훈련 말고는 당장 급한 일도 없고. 내가 일찍 자는 거 하나로 저렇게 기뻐하자너. 그동안 많이 일했으니까 조금은 쉬엄쉬엄해도… 괜찮겠지.


 이기영은 스며드는 향에 저항하지 않고 눈꺼풀을 내렸다. 의식이 점차 깊은 수면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모습을 김현성은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마지막 잠옷 단추까지 채워놓고 나자 하늘에서 동이 트는 게 보였다. 정확히는 침실에 설치된 여신의 거울이 현재 하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불 꺼진 향로를 수거한 김현성이 다시 침대 쪽을 돌아보자 이기영의 입술이 우물거리며 뭔가를 찾았다. 김현성은 근처에 있던 물을 입에 머금고 눕혀놨던 이기영의 고개를 조금 들어 올린 상태로 입을 맞추었다.


 자는 사람에게 물을 마시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수분이 부족한 몸은 수면 중임에도 본능적으로 물을 찾았다. 느린 수분 공급은 몇 차례 반복되다가 삼키지 못하고 흘린 물줄기가 상의를 적실 즈음에야 마무리되었다. 가슴께까지 흘러내려 온 물을 전부 핥아 정리한 김현성은 끝으로 둥근 이마에다 쪽 소리 나게 입 맞추었다.


“잘 자요, 기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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