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음이 좋았다. 밀어내도 좋았다. 무심한 눈길로 보아도 온도없는 다정함으로 등을 토닥거려도 좋았다. 아마 강만음이 욕설을 뱉어도 모질게 대해도 이 마음은 좋다며 아우성일 것이다. 연정이란 이토록 질기고 끔찍한 면모가 있었다. 당신도 그랬을까.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남희신은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에게도 연정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오늘처럼 강만음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밤이면 속죄하고 싶었다. 자신은 강만음을 이런 식으로 위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여지를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 오히려 모질게 구는 면이 있었다. 자신이 단 한 번이라도 강만음의 불면을 신경 쓴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이라도 그의 눈물을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던가. 위로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랬던 적이 없었으면서 별안간 깨달은 감정을 쥐고서 당신에게 내민 것일까. 당신이 당연히 반길 것이라 생각했던 오만한 자신감. 그 오만함이 없었더라면 지금쯤 난 미래에서 당신과 행복하게 웃고 있을까.

가졌으나 가지지 못했던 마음에 대해 생각해본다. 가졌으나 자신이 망쳐버린 관계에 대해 생각해본다. 당신을 살리기 위함이라고 했으나 정녕 그것은 당신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죄책감을 잊고서 당신을 사랑하고 싶다는, 당신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그런 생각. 지금 이 절절한 마음을 당신에게 보여도 괜찮은 것일까. 기억을 찾은 뒤 매 순간이 지옥이었고 죄악이었다. 매 순간 더 사랑하며 그를 원하는 것 또한 벌일까. 아니면 기회일까. 그것을 생각하노라면 가슴이 갑갑해졌다.

 

“잠이 안 옵니까.”

 

“……예.”

 

시간을 가늠하는 듯 강만음의 시선이 바깥으로 향한다. 침상에 걸터앉은 강만음이 제 무릎을 두드렸다. 푹 주무셔야 하지 않습니까. 강만음이 내미는 호의를 거절하기 힘들었다. 단 한 번의 거절에도 영영 필요없다 여기며 거둘까 봐. 하여 남희신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서 강만음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강만음은 남희신의 어깨를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걱정일까. 이 걱정에는 무엇이 담겨있을까. 걱정 틈에 다른 감정은 없을까. 지겹도록 반복되는 생각임에도 남희신은 그런 생각을 거둘 수 없었다.

 

“…만음은 어찌 안 주무시는 겁니까.”

 

“짧게나마 달게 잤더니 개운합니다.”

 

“그렇습니까.”

 

들숨에 강만음의 향이 가득 찬다. 뱉기 싫었다. 영영 가둬두고 싶은 향이었다. 허겁지겁 향을 삼키듯 마시는 것과 상관없이 강만음은 일정하게 남희신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토닥토닥. 위로하는 듯 안심시키는 듯. 그 토닥임에 점차 잠이 몰려왔다. 연정이 아닐지언정 강만음은 유약한 모습을 보이는 이를 쉬이 내치지 못했다. 언제까지 이런 모습을 받아줄까, 당신은. 날 사모하지 않는 당신은 날 어디까지 참아줄까. 이런 불안한 미래라도 지키기 위해서는 강만음이 기억을 찾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도자기 일은 우연일 것이다. 허니 동요하지 말자. 동요하지 말자. 그리 스스로를 다독이며 남희신은 점차 수마에 빠져들었다.

 

온씨 잔당들. 그들이 각 가문을 조사하고 있는 정황이 드러난 이상 세가 사람들은 조용히 있을 수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그들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온씨들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기억하는 이들은 치를 떨며 모였다. 이번에야말로 소탕해야겠다는 의견에 토를 다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계획 없이 움직이자는 것도 아니었다. 남희신이 알아 온 정보가 있어 동선을 짜는데 막힘이 없었다.

 

양민에게 피해입히지 않는 것,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 이번에야 말로 온씨 잔당들은 제대로 소탕하는 것. 이번에도 그들의 목표는 그렇게 좁혀졌다. 정예병으로 꾸리되, 사일지정을 모르는 어린 수사들은 빠져야 한다는 의견에는 여론이 갈렸으나 사람을 베는 일이 어찌 경험이 되겠느냐는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그날의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사들도 제외됐으나 종주들은 예외였다.

 

“아릉이 걱정입니다.”

 

“…아무래도 그러실 테지요.”

 

남희신은 강만음의 걱정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금여란만큼 어렸던 나이에 온씨 토벌에 나섰으나 그 나이에 겪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경험이었다. 가능하면 겪지 않아도 좋을 경험이기도 했고. 막고 싶었으나 금여란은 이미 한 가문의 종주였다. 이번 전쟁에 나서 굳건함을 보인다면 금린대에서 입지가 좀 더 단단해질 것이다.

 

“걱정하세요, 만음. 그때와 다르지 않습니까. 잔상에 괴로워한다면 조언해주고 달래주고 좋은 쪽으로 풀어 줄 어른들이 존재합니다.”

“……”

 

“우리에게는 없었지만 금 종주에게는 우리가 있잖습니까.”

 

그 시절에는 없었지만, 지금은 있는 것. 남희신의 말에 강만음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렇군요. 그리 말하는 이의 입술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어 남희신은 안도했다. 비로소 강만음의 가족이 됐구나, 싶었다. 저번처럼 앓아눕는 날이 온다면 강만음이 병명을 듣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일은 없겠구나. 그런 예감. 혹은 확신이 들었다. 강만음과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하여 남희신은 강만음을 따라 웃었다. 전쟁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잠깐 잊을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 이렇게라도 강만음의 곁에 머물 수 있는 이유를 찾으면 좋을 것 같았다.

 

“만음.”

 

“예.”

 

“만음.”

 

“예.”

 

“만음.”

 

“…뭡니까.”

 

그저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부르면 답을 돌려주는 사람이 있어 좋았다. 하하, 하고 웃은 남희신이 말했다. 제가 잘하겠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강만음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라는 말도 의문을 표하지도 않아 대화는 끊어졌다. 그래도 좋았다. 강만음이 그어둔 선 하나를 넘었다는 사실은 남희신을 들뜨게 만들었다. 하여 다시 만음, 하고 강만음을 부른 순간이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강만음이 귀를 막고 속이 거북한지 헛구역질을 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남희신은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두려움이 남희신을 삼킨다. 이름 부르는 것마저 앗아가려는 것인가.

 

“……”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몸이 안 좋으신 겁니까.”

 

“글쎄요. 이상없는 것 같은데. 음. 아마도 걱정을 과하게 했다가 해소되어 그러는 것 같습니다.”

 

별거 아니라는 투로 강만음이 말했다. 그리 말하면서도 이상한지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 이유를 알 것 같은 남희신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제발 아니기를, 제발 아니기를. 기우이기를. 우연이기를. 그리 바라는 마음이 지옥이었다.

 

“거기서 뭐 하십니까. 집에 안 가실 겁니까.”

 

멍하니 서 있는데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남희신이 몸을 움직였다. 그래. 기우일 것이다. 기우여야 했다. 지금이 이리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강만음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벌어지지 않을 일을 걱정하지 말자. 그리 다짐하며 남희신은 걸음을 옮겼다.

 

 










 

홀로 하는 사랑에도 당연히 욕심이 존재했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사소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사모하는 이에게 이름을 불리는 일 같은 것 말이다. 다른 것은 차마 바랄 수 없기에 이름이라도 불리기를 바라는 마음. 택무군, 택무군. 하는 부름이 아니라 희신이라도 불리고 싶은 욕심. 불리는 것에도 욕심이라는 단어가 붙어야 할 만큼 외사랑은 처절하다. 당신도 이런 느낌이 들었을까. 아니다, 당신은 나보다 훨씬 괴로웠겠지.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리 중얼거리며 남희신은 곧게 누워 자는 강만음을 보았다. 곤히 자고있는 얼굴이 편안해 보여서 좋았다.

 

“악몽은 제가 다 가져가겠습니다. 좋지 않은 일도, 좋지 않은 기억도 다 제가 지니고 있겠습니다.”

 

모나고 흉한 것은 모두 자신이 가져가고 싶었다. 험한 길을 걸었을 강만음이니까. 그것에 일조했던 자신이니까 못난 것은 자신이 다 가져가고 싶었다. 동그랗고 아름다운 것만, 강만음을 상처주지 않을 것들로만 채워두고 싶었다. 과거라고 해야 할지, 미래라고 해야 할지 모를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은 강만음을 찌르는 모나고 흉한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기를. 손을 뻗었으나 차마 강만음의 볼을 쓸어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겁이 났다. 지난밤 악몽이 강만음에게 옮겨붙을까 봐. 기억이 흘러 들어갈까 봐.

 

“모든 시간이 다 지나면. 그러면 감히 당신에게 이름으로 불러달라 청해도 될까요?”

 

“…….”

 

“말액을 단 한 번이라도 만져달라고…아니, 그건 바라지도 않으니 함이라도 열어봐달라고 하면 과한 부탁일까요.”

 

욕심이 커진다는 것은 곧 마음이 커진다는 뜻. 남희신은 제 바람을 속삭이다가 바로 제 입을 막았다. 안 된다. 이런 바람은 위험하다. 용이 말하지 않았던가. 용이 그나마 막아주고 있던 둑이 무너졌다고. 자신도 작은 일에서 모든 기억을 되찾았는데 이런 행동은 좋지 않다. 바람도 참아야 한다. 그래야 사모하는 이와 가까이 있을 수 있으니까. 형식적인 걱정이라도 제일 먼저 들을 수 있으며 강만음에게 변고가 생겼을 때 빠르게 알 수 있으니까. 이것으로 만족하자. 더는 바라지 말자. 썩어갈지라도 속으로만 생각하자. 그래도 이 말은 괜찮지 않을까. 홀로 몰래하는 고백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연모합니다.”

 

연모합니다. 느리게 연모를 뱉어내는 숨에 습기가 묻어났으나 그걸 알아줄 이는 이곳에 없었다. 남희신의 마음으로 가득한 새벽을 지우기라도 하듯이 동이 트고 있었다. 창틈으로 스며든 햇살이 강만음의 볼에 닿는다. 실금처럼 얇았던 빛이 점점 넓게 퍼진다. 마침내 빛이 눈가에 닿았을 때, 인상을 찌푸린 강만음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당신은 알까. 햇살을 받은 당신의 눈은 평소보다 옅어져 연한 회색에 가까워진다는 것을. 당신이 눈이 부셔 인상을 찡그리는데도 그 찰나의 아름다움이 너무 벅차서 오래도록 눈에 담고 싶다는 것을.

 

“…으.”

 

“발이 덜 쳐졌던 모양입니다. 발을 내려드릴 테니 좀 더 주무세요.”

 

“괜찮습니다.”

 

손을 휘휘 저으며 몸을 일으킨 강만음이 하품을 하며 목을 뒤로 젖힌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좀 더 자면 좋으련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데 좀 더 쉬면 좋으련만. 모레면 온씨 잔당들을 토벌하러 움직여야 했다. 쉬어두는 것이 좋을 것인데 일어나자마자 바삐 움직이는 강만음을 보니 마음이 이상했다.

 

“만음.”

 

“왜 그러십니까.”

 

“이번 일이 끝나면 말입니다.”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남희신은 혀끝을 깨물어 말을 멈추고 싶었다. 허나 쉽지 않았다. 미래를 위해 어떤 약속이라도 받아내야만 할 것 같았다. 택무군?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남희신의 기색을 보며 강만음이 그를 부른다. 손을 든 강만음이 볼을 쓸어주어 저도 모르게 울었음을 깨달았다. 두려웠다. 남희신은 두려웠다. 미래를 약속받아야만 강만음을 영영 묶어둘 수 있을 거라는 생각과 섣불리 뱉은 약속이 그의 역린을 건드려 사라진 기억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오랜시간을 함께 했지만, 미래에 약속을 둘 정도로 친밀하지 않다는 것과 두려움을 꿰뚫고 흐르는 강만음에 대한 연정.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 망설이는 겁니까.”

 

“이번 일이 무사히 다 끝나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함께?”

 

말끝을 흐리는 남희신의 말꼬리를 잡아채며 강만음이 되물었다. 눈물을 모르는 척하는 당신의 다정 혹은 무심. 그것을 보다가 남희신은 입을 열었다. 온씨를 소탕하는 일이 모두 무사히 끝나면 여행을 떠날까요? 겨우 입 밖으로 꺼낸 말에 민망했고 허탈했다. 고작 이런 말을 뱉기에도 이만한 고민을 해야 한다. 외사랑하는 이는 이토록 겁이 많아진다.

 

“뭐, 좋습니다.”

 

고민이 무색하게 강만음의 대수롭지 않은 답이 떨어졌다. 어디로 갈까요, 하는 말까지 이어지지 않는 그런 답이었다. 아침의 고요가 잔잔하게 공간을 채운다. 곧 다가올 모든 일에 비해 너무도 잔잔한 공기였다.

 









 



 

“어떻게….”

 

일그러진 표정의 남자는 당황스러워 보였다. 당연하다. 이토록 일찍 장소가 발각될지 몰랐겠지. 손을 쓴 게 효과가 있었다. 거짓 정보를 토대로 발 빠르게 움직였으니 저들 입장에서는 때가 이르게 들킨 것일 테다.

 

“증거를 줄줄 흘리고도 들키지 않기를 바랐던 건가.”

 

차가운 강만음의 말투에 온조의 아들은 그럴 리가 없다며 발악을 했다. 자신의 앞에 쓰러진 자신의 수하들을 보며 고개를 저으며. 남희신은 등 뒤를 살핀다. 큰 피해는 없었다. 금여란을 구하기 위해 강만음이 다치지도 않았으며, 고소 남씨 수하들도 운몽 강씨 수하들도 안전하다. 무엇보다 '빌미'를 만들기 위해 강만음이 일부러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처럼 사람과 사람이 얽혀있지 않으니 혼란을 틈탄 기습을 꿰하지 못할 것이고 강만음이 크게 다칠 일이 사라졌으니 이보다 안심되는 일이 어디 있을까. 물론 그때처럼 제가 공격당하더라도 강만음이 몸을 날려 막아줄지는 의문이었지만. 다행이라고 불러야 할 일에 쓴 웃음을 애써 감추며 남희신은 심호흡을 했다.

 

내뻗는 검에는 망설임은 없었다. 많이 처리를 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직 숨어있던 자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기억을 더듬어보니 진짜 정예병들은 온조의 아들과 함께 등장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있는 이들 중 폭약을 지닌 이들이 있을 것이다!"

 

남희신이 소리를 질렀다. 내력이 실린 목소리가 적군과 아군의 사이에 가라앉았다. 효과가 미미한 폭약이었으나 중상을 입었던 이들이 생각나 마음이 조급해졌다.

 

"너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온조의 아들이 칼을 겨누며 남희신에게 말했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폭약이라는 말에 아군도 적군도 술렁거리는 것이 느껴진 까닭이다. 그런 정황이 발견되었던가. 그런 정황을 흘렸던가.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실수했다. 입술을 짓씹으며 남희신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거짓 증거를 만들어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순탄했기에 안심한 것일까. 아니면 당연히 언급했다 생각했던 것일까. 의문을 담을 눈길들이 쏟아졌다. 혀끝을 깨물며 남희신은 곁눈질로 강만음을 살핀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건 상관없다. 지난 시간에서 전전긍긍했던 평판 따위 알게 뭐란 말인가. 허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연화오와 운심부지처가 곤란해질 것이 뻔했다. 이유를 생각해야 했다. 이유. 이유.

 

“너는 어려서 모르겠군.”

 

“뭐?”

 

“네 집 안 사람들이 하는 짓이야 뻔하지. 그 집 안 사람들을 보고 자란 것이 아님에도 똑 닮은 짓을 하는 것을 보니 피가 더럽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군.”

 

“하긴 사일지정 때도 온씨들이 그런 더러운 짓을 했지.”

 

강만음의 말에 뒤에서 공감하는 말이 얹어진다. 아. 남희신은 작게 탄식했다. 그랬다. 사일지정 때 독기를 품은 온가 사람들이 폭약을 몸에 지니고 동귀어진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주로 어린 수사들에게 들러붙었었고 하여 피해가 제법 컸었다. 지난 시간에도 이번 시간에도 그 일을 왜 떠올리지 못했을까. 주먹을 꽉 쥐었다. 사랑에 깊이 빠진 이들은 이토록 멍청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제 사랑이 지독하여 이런 것일까. 날붙이가 오가는 상황임에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랑에 매몰되어있다 한들 이번 일은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 같은 일이었다. 조금 더 여유를 두고 움직였어도 됐을 일이다. 아니다. 남희신은 제 생각을 정정했다. 여유를 두고 움직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바로 움직이는 것이 맞았다. 생각을 부정하고 또 다시 부정하다가 문득 생각해본다. 이리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일까 사랑 덕분일까.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 냄새가 속을 뒤집는다. 적군과 아군이 구별되지 않는 전장에서 남희신은 버릇처럼 강만음을 찾았다. 거칠어지는 삭월을 겨우 다스리며 남희신은 주변을 살핀다. 지난 시간과 비슷했다. 곳곳에서 폭약이 터졌으나 아군은 부상을 입는 정도에서 그친 것 같았다. 아니 저번 시간보다 훨씬 좋았다. 중상을 입어 더 이상 수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수사들도 더러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수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저번 시간보다 부상자가 적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복잡했던 머리 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바라지 않는 상황을 피하기위해 저들을 끌어들였다는 죄책감이 있었는데 그 무거웠던 마음이 좀 덜어진 까닭이다.

 

죄책감이 덜어진 자리에 비슷한 죄책감이 들어앉는다. 생자의 온기를 빼앗는다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저들이 선악 유무와 상관없이 이 모든 과정들이 문득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미래를 위한 일이라 다독여 보았으나 부질없었다. 기억이 중첩되며 죄책감이 배가 되고 피로도가 배가 된다. 그런 와중에도 눈은 강만음을 찾고 있다는 것이 우습다. 미친놈. 남희신은 조용히 뇌까리며 적진을 살폈다. 살아있는 적은 없었다. 끝이었다.

 

“택무군. 저희 진영에서 부상자는 서른다섯 명입니다. 특별히 크게 다친 이는 없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다면 문제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 다행이군. 빠르게 파악해주어 고맙네.”

 

“아닙니다. 택무군께서 신신당부하신 일이잖습니까. 약도 꼼꼼히 챙겨온 덕분에 여기서 다 치료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래. 뒷일도 부탁하겠네.”

 

“네!”

 

포권을 취한 뒤 사라지는 수사를 보다가 남희신은 급히 강만음을 찾았다. 선두에 서서 싸웠으니 다쳤을지도 모른다. 가까이서 살피고 싶었다. 죽음의 자리에서 생자에 대한 기쁨을 이야기한다는 아까의 거북함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만음은 어디 있기에 이리 안 보이는 것일까. 전쟁이 끝난 뒤 제일 먼저 금여란에게 갔으나 그는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을 확인했다면 당연히 그는 자신의 조카를 보러 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크게 다쳐 어딘가에 쓰러진 것이 아닐까. 불안함에 심장이 옥죄여오는 것 같았다. 아니다. 기우다. 기우여야 했다. 전장에서 자신이 너무 잡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일까. 하여 끝까지 강만음을 눈으로 좇지 못해 생긴 일인 것 같았다. 한 명이라도 빨리 베지 못해 생긴 일인 것 같았다.

 

“온조의 아들. 그자는 죽었던가.”

 

남희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자신이 벤 자가 온조의 아들인지 아닌지 얼굴을 기억할 여유를 지닌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자가 지난 시간 어찌했더라. 그자는 시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기습을 꾀했었다. 자신이 한 명을 더 죽인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악의가 가득한 눈을 하고서 제가 달려들었던 그자.

 

“택무군!”

 

‘희신.’

 

시신이 들썩인다는 생각을 한 것과 외침이 들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안돼. 남희신은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술만 벙긋거렸다. 왜. 당신이. 왜. 왜. 왜. 강만음의 일격으로 이미 생기가 사라진 온조의 아들의 가슴 팍에 삭월을 찔러넣으며 남희신은 강만음을 껴안았다. 왜 이번 시간에서도 다치는 것은 당신인가. 왜. 나는 당신을 구하지 못하는가. 왜.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거 같았다. 지난 시간 품 안에서 축 늘어졌던 강만음이 지나치게 생생해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마…만음. 어찌. 어찌.”

 

“괜찮습니다.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어깨를 부여잡고서 강만음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 그래. 지난 시간에도 급소를 다쳐 쓰러진 것은 아니었다. 부상과 피로가 쌓일 대로 쌓인 것이 더 커 쓰러졌던 것이지. 이번 시간에는 그런 자잘한 전투를 최소화했으니 강만음은 크게 다칠 일이 없었고 피로도도 낮은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어쩐지 수상해 뒤쪽을 살폈다가 도망가는 놈들을 처리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하는 행동이 꼭 누구를 지키는 모습이기에 시선을 끄려는 건가 했는데 이런 얕은수를 준비해둔 모양이군요.”

 

“피가, 피가 많이 납니다. 어서 치료를 합시다.”

 

“급한 대로 지혈만 하면 됩니다. 나보다 더 크게 다친 이들이 있는데 종주입네 하며 먼저 치료를 받으라는 겁니까.”

 

“네! 그러자는 겁니다. 그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앞을 내다보고 움직인 강만음은 정말 강만음다웠다. 그가 그리 행동한 덕분에 장차 벌어질 수 있는 위험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더 약하고 더 심하게 다친 이들을 위해 양보하는 모습 또한 한 가문의 어른다웠다. 방심하고 있던 이를 구한 것도 이 땅에 명성을 떨친 수사다웠으며 정의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 헌데 그 알고 있음은 불안은 잠재워주지 않았다. 당신의 다정이 나를 죽이고 있노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것 역시 강만음의 탓이 아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강만음이 자신 때문에 다쳤다는 것에 소름이 끼쳤다. 날카롭게 벼려진 분노가 몸 곳곳을 돌아다녔다. 목 안에서 피 맛이 나는 것 같았다. 강만음에게 화가 난 것은 아니다. 어찌 감히 강만음에게 화를 내겠는가.

 

남희신의 목소리가 커지자 이목이 쏠렸다. 소란에 응급처치할 약을 들고 달려오는 이를 보며 강만음이 인상을 찌푸렸다. 남희신의 팔을 뿌리치는 강만음의 얼굴에 숨기지 않을 불쾌함이 떠올랐다.

 

“내가 택무군의 아랫사람입니까.”

 

“…….”

 

“감사의 말을 바란 것은 아니나, 아랫사람 대하듯 이리 다그치니 불쾌하군요.”

 

쯧. 혀를 차며 강만음은 걸음을 옮겼다. 치료는 저쪽에서 받겠다고 달려온 수사에게 전하는 목소리에도 노기가 묻어있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나는, 나는 그저. 멀어지는 이의 등에서 중얼거렸으나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이 소란스러운 풍경 속에서 남희신의 중얼거림은 너무도 작았다. 무엇을 위해 달려왔는가. 거짓 증거를 보태면서 좀 더 후에 일어날 일을 앞당긴 것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도 있었으나 강만음이 전장에서 크게 다치는 것이 보기 싫어서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자신 때문에 강만음이 다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서였다. 그 이유가 가장 컸었다. 자신 때문에 다친 강만음을 다시 볼 자신이 없기에. 그래서.

 

달달 떨리는 손을 감추고 남희신은 강만음을 걸어갔던 길을 따라 걸었다. 급하게 지어진 천막 아래 상의를 벗은 강만음이 환부를 보여주고 있었다. 손이 모자란 풍경을 보다가 남희신은 의원에게 다가갔다. 내가 마무리하겠네. 작게 중얼거리자 의원은 감사하다는 말을 한 뒤 급한 곳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미안합니다. 전장에서 흥분했던 것을 갈무리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

 

“죄송합니다. 만음. 결코 당신을…그리 생각했던 적이 없습니다.”

 

“…….”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알아보았는데 연화오 수사들도 크게 다친 이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네. 금 종주도 무사합니다. 이번 기억이 상처로 남지 않도록 자주 찾아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겠지만요.”

 

“택무군은 어떻습니까.”

 

천을 환부에 대고 감고 있던 남희신의 손이 멈춘다. 노기가 사라진 목소리로 강만음이 다시 물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무감하면서도 동시에 다정했다. 어찌 그 두 가지 경우가 공존할 수 있을까.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남희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저는 괜찮습니다. 다 만음 덕분입니다. 남희신의 답에 강만음은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이군요.

 

“헌데 말입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자로 나를 부르지 않았으면 합니다.”

 

“……네?”

 

벗었던 옷을 입으며 강만음이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황스러워하는 남희신을 보다가 그저 그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는 말을 던지고서 걸음을 옮기는 이는 어쩐지 비로소 개운해 보였다. 불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헛구역질을 하는 강만음이 파편처럼 떠오른다. 비수처럼 날아와 심장에 박힌다. 언제부터 그가 이름을 부르는 것에 거북함을 느꼈지? 보는 눈을 의식하기에 이런 요구를 대놓고 할 사람이 아닌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이건 그저 가벼운 거북함일 뿐이다. 강만음의 비위에 거슬리는 행동만 안 한다면 우리 관계는 끊기지 않을 것이다. 아슬하나, 불안하나 이어질 것이다. 주먹을 꽉 쥐고서 남희신은 일어나지 못했다. 일어날 수 없었다. 문득 모든 일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무엇을 위해 이리 달려왔는가. 나는 무얼 위해-.

 

 

 

 

 

 


 

 

 


 

 

무엇이 저 사람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이토록 사람을 망가트리는 감정이 질투나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어찌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리 지독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은 대체 내게 뭘 원하는가 내어줄 것이 없는 이에게 뭘 원하는가.

 

속이 갑갑해 강만음은 도무지 침소에 머물 수 없었다. 깊게 잠든 이를 한 번 확인한 뒤 강만음은 침소를 벗어났다. 시원한 새벽 공기를 마시자 속이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지금이야 이 껄끄러움을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할 수 있지만, 모든 일이 정리된 이후에도 외면할 수 있을까. 전처럼 부부인 척 행동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없었다.

 

“힘들군.”

 

이 연화오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강만음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연화오에 남희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까지 불편하지는 않았는데 언제부터 그가 이토록 불편해진 것일까. 다시 갑갑해지는 속에 가볍게 가슴을 쳐보지만, 갑갑증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사실 짐작 가는 날은 있다. 별안간 도자기가 깨진 날. 남희신이 겁에 질려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날. 치밀어 오르는 거북함을 견디지 못해 밖으로 나와 속을 게워냈던 날. 이름이 얹힌 것처럼 속이 갑갑해 견딜 수 없었던 그날부터였다. 어느 날은 남희신의 부름을 견딜 수 있었지만 어느 날은 견디기 힘들었다. 화가 났다가 거북했고 불편했고 또.

 

‘어찌하여 서글픈 것일까. 이름을 불린 것이 무어라고.’

 

때로는 처절한 슬픔이 밀려들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감정은 남희신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 불편함은 눈덩이처럼 커져 사람이 많은 곳에서 슬쩍 잡는 손도 함께 보내던 밤도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 두려움으로 불안함으로 물드는 남희신의 얼굴을 보면 더 그랬다.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일까. 왜 나는 이런 기분에 시달려야 하는 것일까. 왜. 내가 당신 때문에.

 

“이 혼인을 유지하는 것이 정녕 옳은가. 어머니, 아버지 어찌 생각하십니까. 내가 그를 계속 여기에 둬도 된다고 생각합니까.”

 

사당 안으로 들어간 강만음은 부모님의 위패를 보며 중얼거렸다. 정녕 이대로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이 혼인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 가문에 득이 되겠습니까. 절혼 한다면 잃을 것이 많을까요. 갑갑함에 물어보았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사실 자신이 선택하고 싶은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와 한 약조가 있으나 그것이 대수랴. 이만하고 싶었으나 가문끼리 엮인 관계이니 쉬이 결정할 수 없었다.

 

“내 불편함과 상관없이 이상했던 점이 있습니다.”

 

그가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도자기에 소망을 담았다는 것을 발설한 적이 없는데 그가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 온씨 잔당을 쫓는 일도 그렇습니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발견되었을 때 그는 마치 이미 안다는 듯 행동했고 또-. 하나하나 나열하다 보니 더 의심스러웠다. 동시에 이런 일로 그를 이상하게 여기는 자신이 미친 건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이상했다. 대놓고 이상했던 점과 콕 집어 말할 수 없었던 순간들이 차례로 지나갔다. 거북함. 불편함. 서러움. 역시 원인을 알 수 없는 감정이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만음.’

 

그때였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노인인지 아이인지 모를 목소리. 언뜻 들으면 어머니 목소리 같기도 했었고 아버지 목소리 같기도 했었다. 동시에 자신의 목소리 같았으며 남희신의 목소리 같기도 했었다. 소리의 진원을 찾아 강만음이 걸음을 움직인다. 걸음을 옮기며 강만음은 무심결에 생각한다. 아마 저 목소리는 남희신일 것이라고. 인생을 통틀어 자신의 이름을 가장 많이 부른 사람은 남희신이었기에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만음. 부름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불로 지진 듯 아팠다. 가슴을 움켜쥐고서 밭은 숨을 쉬며 강만음은 기감을 끌어올렸다. 이상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만음. 다시금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강만음은 어떤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산을 올랐을 때 기억이었다. 이상하게 기시감을 느꼈던 날. 그날도 목소리를 들었었다. 하나는 남희신의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글쎄, 그 이름은 죽었다니까요.’

 

자신의 목소리였다. 헉. 숨을 급히 들이쉬며 강만음은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파열음이 들렸다.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건 간절함이 담긴 비명이었다. 언어가 되지 못한 살려달라는 외침이 선명하게 들렸다. 소름이 끼쳤다. 귓가에 웅웅 울리는 비명소리는 분명 자신의 목소리였다. 만음. 이번에는 저 목소리가 누구 것인지 확실하게 알 것 같았다. 만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자신이었다. 강만음의 목소리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눈앞에 못 보던 위패 하나가 놓여 있었다. 검은 천으로 덮인 불길한 위패였다. 확인해야 할까. 확인해야겠지. 사당에 이상한 것이 생겼으니. 당연히 확인해야 할 것인데 확인하기 두려웠다. 망설이는 강만음을 재촉하듯 다시 부름이 들렸다. 만음. 만음. 만음. 만음. 만음.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들려 깨지고 있는 것이 꼭 자신의 이름 같았다. 힘껏 달리다 멈춘 사람처럼 거친 숨을 쉬며 강만음이 중얼거렸다.

 

“글쎄, 그 이름은 죽었다니까.”

 

킥킥 저도 모르게 웃음을 뱉으며 강만음은 눈을 감았다. 세상이 울렁거렸다. 마치 물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일렁이고 울렁이는 물살에 떠밀린다. 저항할 수 없었다. 물에는 저항하는 것이 아니므로 강만음은 어렸을 때부터 학습된 것을 떠올리며 오히려 몸에 힘을 빼고 물살에 몸을 맡겼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더욱 선명해진다. 일렁이고 울렁이고 무언가가 깨지는 파열음 틈으로 차갑고 무심한 목소리 하나가 끼어든다. 저를 연모한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틀림없이 남희신의 목소리였다. 의아함에 눈을 뜬다. 앞에, 누군가가 있었다.

 

 

 

 

 

 


 

 

 

 

 

바깥의 소란스러움에 남희신은 부스스 눈을 뜬다. 간밤에 꾼 꿈이 너무 지독하여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꿈 끄트머리에서 용이 말했다. 살아서는 안 될 사람이 살아버렸어. 원래라면 죽었어야 할 사람인데. 이젠 정말 막을 수 없어. 그리 겁을 주는 용 앞에 꿇어앉아 남희신은 빌었다. 제발요. 제발요. 그리 비는 남희신에게 용은 말한다. 나는 네 소원보다 그 아이의 소망을 먼저 생각하기로 했었지. 결국 큰 사건은 바꿀 수 없음이야. 남희신을 절망으로 이끌기 충분한 말이었다. 바깥의 소란스러움이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어지러웠다. 당신의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바꿀 수 없다는 사건은 설마.

 

“종주님!”

 

남희신의 정신을 완전히 깨운 것은 부사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강만음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한 남희신은 서둘러 문을 열었다. 정신을 잃은 강만음이 한 수사의 등에 업혀 있었다. 무슨 일이느냐고 묻기도 전에 곤선삭에 묶여 바닥을 구르는 이가 보였다. 저 복장은, 남희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묶인 이를 본다. 본 적 있는 이였다. 온씨 잔당들 사이에서 죽을 뻔했던 운심 수사였다. 수행력이 낮아 제외되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이번 일에 포함되었던 사람.

 

“무슨 일인가.”

 

“암살시도였습니다.”

 

종주님께서 정신을 잃기 전 주박을 걸어 도망치지 못한 모양입니다. 부사는 빠르게 답한다. 곧 의원이 침소에 들이닥쳤다. 진맥을 하고 상처를 치료하는 손이 분주했다. 부사는 강만음을 살피며 남희신이 궁금해 할 만한 점을 토막토막 뱉어냈다. 정신을 흐려지게 하는 향을 피운 것 같다고. 고강할수록 잘 먹히는 그런 향이었다고. 정신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강만음은 급소를 피했으며 동시에 암살자를 잡는데 성공한 것 같다고.

 

“누가 암살을 하는 마당에 가문의 의복을 입고 하겠습니까. 하도 자신이 진짜 운심부지처 수사라 주장하기에 끌고는 와본 것입니다.”

 

“…운심부지처에서 본 기억이 있어.”

 

“참이라는 것이군요.”

 

부사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가문의 수사가 다른 가문의 종주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은 결코 조용히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불길함에 소름이 돋았다.

 

“많이 다치신 것이더냐.”

 

“아닙니다. 그저 저자가 사용한 향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시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남희신의 질문에 의원이 답했다. 남희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시선 끝에는 억울해 보이는 운심부지처 수사가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저자는 왜 강만음을 죽이려고 든 것일까. 어째서. 남희신은 급히 운심부지처에 서신을 보냈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문의 이름이 나온 이상 안에서 해결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포박된 이를 보며 남희신은 생각했다. 저자는 살아서는 안 될 사람이었을까. 어찌 만음을 노린 것일까. 왜.

 

고강한 수사일수록 잘 듣는 향은 상등품이다. 일개 수사가 쉬이 구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동시에 취급하는 곳이 별로 없을 것이니 은밀히 유통된다고 해도 경로를 잘 조사해보면 범인의 덜미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을 해결하는데 일이 크게 소요되지 않을 수도 있다. 헌데 이 불길함은 가시지 않는 걸까. 왜 바뀌지 않을 일에 운심부지처 사람 때문에 다쳐 정신을 잃는 강만음이 있는 것일까. 설마 바뀌지 않을 일이 또 있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났다. 두려웠다. 지금 저 사람을 문책하는 일보다 강만음의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일을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협박성이 짙어지는 질문에도 수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속이 타들어갔다.

 

다음날 소식을 들은 운심부지처에서 사람이 왔다. 모두 놀란 얼굴이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다시 지지부진한 문책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남희신은 불안했다.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저는 분명 가문의 어른이 시킨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대체 누가 이런 일을 시켰다는 말인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굳이 가문의 복장을 하고서그런 행위를 한 이유는 무엇이지?”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고 하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완벽할 자신이 있었으니 이왕이면 운심부지처 수사로서 성공하고 싶어 그랬습니다.”

 

당돌한 수사의 말에 여기저기서 분노를 참지 못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배후를 조사할 것도 없다고 저자를 당장 죽이자는 말이 먼저 터져 나왔고 우리끼리만 이리 떠들 것이 아니라 일을 크게 공론화하자는 말도 나왔다. 물론 그 의견은 힘을 얻지 못했다. 아직도 종종 기회를 노리는 방계들 때문이라도 자신이 아프다는 말이 바깥에 새어나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강만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많은 말이 오갔으며 암살자의 처분을 어디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말이 오갔다. 많은 의견이 오가는 와중에도 향을 누가 샀는지 추적을 했으며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중에도 강만음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결국 결론은 강만음이 깨어나기 전까지 연화오에 구금시켜 놓자는 것으로 끝맺었다. 모든 것은 그의 결정에 따를 것이며 만일 이 일이 정말 운심부지처와 깊게 연관이 있다면 마땅히 책임을 물겠노라 약조를 했다. 당연한 결론을 내리는데에 나흘이나 걸린 것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이번에 강만음이 다쳐 의식을 잃은 것도 자신의 탓인 것 같아 남희신은 마음이 무거웠다. 자신의 탓일까 봐 두려웠다.

 

“만음.”

 

문득 걸음을 멈추고서 남희신은 조용히 강만음을 불러본다. 만음. 이 부름이 뭐라고 그리 매정하게 등을 돌린 것일까. 그날 결계를 깨고 들어가 강만음을 불렀다면 그랬더라면 조금 달라졌을까. 그가 울고 있음을 알았던 밤들 중 단 한 번이라도 깨어나 무슨 일인지 물었다면 달라졌을까. 무릎을 내어주고 달래주었다면, 그러면 조금 달라졌을까. 자신이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조금이라도 달라졌을 이제는 사라진 시간에 대해 생각해본다. 시간을 다시 돌리고 싶었다. 지금도 돌아온 시간 속임을 알지만, 다시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허면 그땐 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땐 비로소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받고 싶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건네주었던 함을 열고 환하게 웃는 강만음이 보고 싶었다. 희신, 하고 불러주는 강만음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무엇이 문제일까. 모든 기억을 찾았을 때 강만음에게 사죄해야 했을까. 그때야말로 정말 마지막 기회가 아니었을까. 강만음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을 때 무릎을 꿇고 죄를 말해야 했을까. 제발요, 제발요.하고 빌었어야 할 대상은 용이 아니라 강만음이었을까. 만일 그렇게 했으면 강만음이 다치는 일이 없었을까. 어쩌면 관련 있을 일을 연관지으며 어쩌면 관련 없을 일을 이어붙이며 남희신은 생각을 이어나갔다. 후회되는 일도 바라는 일도 너무 많았다. 후회되는 일도 바라는 일도, 그 속에 존재하는 자신이 끔찍해 견딜 수가 없었다.

 

남희신의 고민은 새벽을 밀어내고 아침을 불러왔다. 고민의 시작도 끝도 찾지 못해 헤매던 남희신은 눈을 뜨고 물을 찾는 강만음 앞에서 모든 것을 잊었다. 모든 고민이 부질없었다. 강만음과 눈이 마주친 순간 다시금 사랑에 빠진다. 강만음을 또 사랑하는 일이 다시금 사랑하게 되는 일이 모든 것을 무색하게 할 만큼 깊게 사랑하는 지금이 좋았다. 모든 것이 틀렸더라도 강만음의 곁에 있을 수 있는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일에 대한 업보는 어치피 자신이 받는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

 

“의원을 불렀으니 곧 올 것입니다. 어지럽거나 메스껍지는 않으십니까.”

 

“…….”

 

“만음?”

 

힘겨운 듯 심호흡을 하며 강만음이 말했다. 의원을 불렀으면 됐다고. 나가 있으라고. 축객령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남희신은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으며 강만음을 살폈다. 모든 감정을 잃었다는 듯 평온하고 무감한 얼굴이었다.

 

강만음은 암살자를 문책하기 전 연화오에 머물고 있던 위무선과 잠깐 독대했다. 강만음을 만나고 나온 위무선의 얼굴은 사뭇 심각했는데 남희신과 마주치자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생긋 웃으며 실없는 농담을 던진 뒤 남망기가 기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불길함이 발끝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두려웠다. 가장 두려운 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언인지 알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무감한 표정을, 남희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디선가 파열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찢기고 베인 손바닥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용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정녕 막을 수 없는 일이기에 일이 이렇게 흘렀는지. 강만음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시간을 돌려줄 수는 없는지.

 

강만음이 암살자를 추궁하는 동안 새로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향을 구한 이는 온조의 아들이었다. 가문에 첩자를 아주 오랫동안 심어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수진계는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혔다. 하기야 그들이 염탐하는 것만으로 어찌 정보를 모았겠는가. 내부에 적이 있을 것이다 짐작은 했지만 아직까지 남아있을 줄이야. 암살자 배후를 찾는 것에서 첩자를 색출하는 일로 바뀌면서 남희신과 강만음은 더욱 바빠졌다. 어렴풋이 전쟁 직전 사라진 자들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밝혀지자 남자는 킬킬 웃었다.

“ 그분이 그러셨거든. 자신이 죽더라도 이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두 가문은 크게 흔들라고. 내게 특별히 내려진 지시였어.”

어차리 지금 수진계에서 건재한 큰 가문은 두 가문밖에 없으니 불신을 심어놓으라는 말이었다. 얕은 수였다. 너무도 얕은 수여서 남희신은 더욱 화가 났다. 왜. 대체 왜 강만음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좋은 일이 더 많이 생겨야 하는데. 세상에 존재하는 좋은 일이란 좋은 일은 몽땅 모아 안겨주고 싶은 사람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제야 일이 마무리됐다는 느낌이군요.”

 

지친 듯 미간을 꾹꾹 누르며 강만음이 말했다. 폭풍이 연달아 몰아쳤으니 몸도 마음도 지칠만했다. 피로를 푸는데 어떤 음식이 좋더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온천이 있다고 하던데 그곳에 가면 피로가 좀 풀리지 않을까. 아니지 만음은 예민한 편이니 연화오에서 쉬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강만음의 한 마디에 남희신은 자연스럽게 그의 피로도를 낮출만한 방법을 생각했다. 연달아 다쳤으니 보양식을 먹는 것이 좋겠다고, 부사에게 그리 이르고 오겠다는 말을 막 하려던 참이었다. 강만음의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면 당장 그리했을 것이다.

 

“택무군.”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사당에 검은 천을 씌운 위패가 있던데 누구의 것인지 아십니까.”

 

검은 천을 씌운 위패. 그 말을 듣는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강만음은 어찌 그 위패를 아는 것일까. 숨 쉬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남희신은 헐떡거렸다. 호흡을 가다듬어야 함을 알고 있음에도 흐트러진 숨을 수습할 수 없었다. 숨을 어찌 쉬더라. 들숨과 날숨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할 흐름이 끊기자 숨 쉬는 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면 강 종주라는 이름도 죽일 참입니까.’

 

날카롭게 떠오르는 기억에 숨을 쉴 수 없었다. 극한의 두려움이란 이런 것일까.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

 

강만음이 품 안에서 꺼낸 것을 남희신 앞에 던졌다. 검은 천이 덮인 위패였다. 이 시간에서 존재해선 안 될 것이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어째서. 손끝이 달달 떨렸다. 오한이 들어 지금 당장 더운물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불 가까이에 가고 싶었다. 두터운 이불을 덮고 싶었다.

 

“꿈을 꾸었습니다.”

 

“…….”

 

“아주 길고 긴 꿈이었지.”

 

“…….”

 

“꿈을 꾸기 전 저걸 보았습니다. 환영인가 했는데 아니었더군요.”

 

“만음.”

 

푸하하하. 두려움에 잠식된 남희신의 부름을 듣고 강만음은 배를 잡고 웃었다. 몹시 우스운 것을 보았다는 듯 환하게 웃는 사랑하는 이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시원하게 터지는 웃음소리도 듣기 좋았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두고 왜 눈물이 흐르는 것일까. 급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남희신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입니다. 만음.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숨 가쁘게 뱉는 말을 들으며 강만음은 웃음을 거둔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은 웃음의 여파인 것일까. 무심하게 그것을 닦으며 강만음은 서랍을 열었다. 탁. 책상 위에 작은 함이 놓인다. 깨진 적은 있으나 열린 적은 없는 함이었다. 남희신은 눈을 느리게 깜빡인다. 마치 그러면 시간이 조금이라도 잡아둘 수 있다는 듯.

 

“나만 찾은 기억이라 말하고 싶은 겁니까.”

 

“…….”

 

“택무군. 저 천에 감춰진 이름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

“이름을 불러주는 게 뭐가 어렵다고 거절했는지 원망했던 것 같습니다. 저 죽은 이는. 사실 저 죽은 이는 사모하는 이가 연정을 무기로 들었던 순간부터 죽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덜컥 심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찾을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은 자신이 강만음의 마음을 빌미로 정략혼을 요구했을 때부터였다. 엉뚱한 순간만 짚으며 후회했던 시간이 우스웠다. 스스로가 생각하기도 잔인해 떠올리기를 거부하고 있던 그 일이야말로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아니던가.

 

“그 꿈을 꾸고 나니 정말 모든 일이 해결된 것 같더군요. 남 선생님과는 이야기했습니다. 아, 물론 이전 시간을 말한 것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튼. 당신만 동의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시더군요.”

 

“만음.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죽은 이에게 해야 할 사과를 내게 하는 게 우습군요. 택무군. 당신이 용서를 구해야 할 건 내가 아니고 죽은 저 사람이외다. 당신을 사랑했던 저 사람.”

 

“…….”

 

“나는 당신에게 상처받은 적이 없습니다. 택무군을 사랑했던 적이 없으니까. 뭐, 그 풍경을 본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스스로를 애잔해하겠습니까, 굳이 연정을 끌고 온 당신을 가엽게 여기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있는 남희신의 손에 강만음은 함을 쥐여준다. 소중히 간직하겠다는 약속은 못 지키겠군요. 떨어지는 말이 너무 아팠다.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다 해도 좋았다. 그건 각오한 일이다. 감히 사랑을 바랐지만, 사랑해주지 않는 그를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자신이 원망할 자격이나 되던가. 허니 괜찮았다. 강만음이 하는 말은 모두 괜찮았으나 이 함을 돌려받고 싶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는 강만음의 발목을 잡은 남희신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못했습니다. 만음.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죽은 듯이 살겠습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이 연화오 깊은 곳에서 살겠습니다. 허니, 허니 제발 내치지는 말아주세요. 제발요. 염치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지은 죄가 많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리…무언가를 청할 자격도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래도 만음….”

 

울지 않으려고 했으나 눈물이 속절없이 떨어졌다. 원망조차 없는 강만음이 무서웠다. 정말 끝일까 봐 두려웠다. 평생 강만음을 볼 수 없을까 봐 겁이 났다. 그림자라도 좋았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싶었다. 밀려나도 좋았다. 적어도 강만음이 아프면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었다. 가끔이라도 마주칠 수 있는 곳에서 맴돌고 싶었다. 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보고 싶은데 이런 사람을 어찌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멀리서나 가까운 곳에서나 상사병을 앓을 것이라면 가까운 곳이 좋았다. 그것이 더 지독하다 할질도 가까운 곳이 좋았다.

 

엉망인 모습으로 우는 남희신을 보다가 강만음이 몸을 숙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온기 없는 다정함. 연약한 새끼 동물처럼 남희신은 눈을 감고 그 손길에 기댄다.

 

“이름을 불러달라는 말을 거절했던 마음을 알 것 같군요. 아마도 이 함을 열어달라던 당신의 청을 거절하는 마음과 비슷하겠지요.”

 

“안 열어봐도 됩니다. 정말입니다. 괜찮습니다. 어디다 넣어두고 잊으셔도 괜찮습니다. 참입니다.”

 

“사랑보다 미안함이 먼저 드는 것이 정녕 사랑일까 생각했더군요.”

 

“만음..제발….”

 

“사람을 망가트리는 게 좋은 사랑일리 없지요.”

 

“제발….”

 

“택무군.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원망스럽지도 않습니다. 때때로 감정이 묻기는 하나, 당신을 보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무감합니다.”

 

빨갛게 달아오른 눈가를 살살 쓸어주다가 강만음은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몸을 일으킨다. 발목을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친 뒤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이 개운해 보였다.

 

“나는 무감함을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내 이름이 불리는 순간 거북함을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느낌을 받을 때면 내가 나로써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 불편하기에.”

 

“…….”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게, 택무군 연화오를 떠나주십시오.”

 

‘남은 내 이름마저 죽이지 마십시오.’

 

겹쳐 들리는 목소리에 남희신은 더 이상 애원할 수 없었다. 문이 닫힌다. 남희신은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숨죽여 울었다. 감히 울음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몸을 둥글게 말고 울었다. 그러다 기어가 검은 천으로 덮인 위패를 주워 끌어안았다. 정말 강만음이라도 끌어안은 것처럼 남희신은 오래전 죽은 이의 이름을 껴안고서 울었다. 가슴을 치며 울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만음.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쏟아지는 사죄를 들어 줄 이가 없었다. 자신이 제일 잘못햇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러면서도 만약을 떠올리는 자신이 끔찍했다. 만약, 전쟁이 예정대로 일어났다면 그 첩자들은 죽었을까. 죽어버려서 암살 할 때 쓰려던 향을 쓸 일이 없었을까.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는 그 향. 그 향이 없었다면 강만음은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자신이 자잘하게 실수하지 않았다면. 만약에, 만약에게 쌓인다. 만약, 그때 내 첫마디가 당신이 날 연모하듯 나도 그렇습니다, 였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달라졌을까. 그럼 달라질 수 있었을까.

 

“연모합니다. 날 마음에 담지 않았더라도 당신을 연모합니다. 깊이, 연모합니다. 만음. 연모합니다. 연모합니다.”

 

 

 

 

 


 

 

 

 

 

 

모든 일이 끝난 수진계는 다시 평화로워졌다. 평화 속에서 사람들은 많은 소문을 옮겼다. 소문은 대부분 덧없는 것이었다. 덧없는 소문 중 오래 떠돈 소문이 있었다. 남희신이 품 안에 넣고 다니는 검은 천에 쌓인 것에 대한 것이었다. 정인과 나눈 것이다. 누군가의 초상화다. 가보다. 보석이다. 많은 말이 떠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저자에는 더 이상 금슬 좋았던 연화오 부부에 대해 떠들지 않았다. 다만 한때 그 사라진 소문의 주인공이었던 남희신은 시간도 소문도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위패가 강만음이라도 되는 것처럼 꽉 끌어안고서 잠드는 밤. 여전히 미안함과 연정을 읊을 수밖에 없는 밤. 좋다는 말을 지워도 사랑이라는 말이 남기에, 만음, 만음, 그리 중얼거리며 부서지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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