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스트 내용:











사랑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가끔 그냥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기도 하지만, 존나 빠르게 당신을 들이받기도 한다.
 남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찾아오는 점에서 알 수 있지만 이 사랑이란 것은 아주 폭력적이고 돼먹지 못한 놈이라 수가 틀리면 정결한 수도사든 낡아빠진 창부든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데, 또 변덕쟁이라 넘어뜨린 사람을 일으켜 세워 먼지를 툭툭 다정히 털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도리어 쓰러져 나뒹구는 뒤통수에 침을 뱉고 지나가기도 한다.

 대비책이라면 글쎄, 방안에 콕 박히는 수밖에는 없으나 어디 그게 가능한 일인가? 특히 여기저기 쑤시고 다닐 일 많은 우주 평화 지킴이라면, 아하, 그건 절대 안 되지.

 그래서, 불운히도 한껏 기분이 나빠져있던 범우주 날건달에게 엉겁결에 들이 받힌 앞길 창창한 제다이 기사, 몰의 정신은 아득히 멀고 먼 은하로 여행을 떠났다...








 "뭐하냐?"

 

몰은 파드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의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던 또 다른 제다이, 아나킨 역시 덩달아 놀라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미쳤어? 내 턱에 구멍날 뻔했잖아!"


정말 찔렸으면 못 해도 바람구멍이 세 개는 났겠다며 길길이 날뛰는 아나킨을 짜증 나는 표정으로 째려보던 몰은 이윽고 한숨을 쉬며 사과했다.


 "미안."

 "... 뭐? 너 진짜 뭐해?"

 "아무것도 안 해."

 "어디서 맞고 왔어?"

 "그럴 리가."

 "메이스가 때렸나?"

 "마스터 윈두 친근하게 부르지 마. 그리고 맞은 적 없다니까."

 "왜? 저번에 너 다듬이질하는 거 봤는데?"


파다완 딱지도 겨우 땐 녀석이. 몰은 와글와글 질문을 쏟아내는 스카이워커를 떨떠름하게 쳐다보다 다시 한숨을 푹 쉬었다. 아나킨은 무척이나 수상하다는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허리에 척 손을 올렸다.


 "뭐야? 진짜 뭔데."

 "신경 꺼."

 "임무 중에 실수했어?"

 "... 신경 끄라니까."

 "그럼 보고하다 실수했어? 방금 보고하고 나온 길이지?"

 "그만 물어봐. 귀찮아."

 "알겠어... 난 식당 가서 포크로 밥풀이나 쪼개고 있어야겠다... "


시무룩한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사람 마음 쓰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기에 몰은 잔뜩 짜증이 나서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비틀었다. 고작 몇 살 어리다고 가끔 톡톡히 동생 노릇을 하려 드는 스카이워커는 마스터 윈두의 세뇌에 가까운 교육에 따라 몰이 온 힘을 다해 지키는 평정을 무참히 박살 내버리는 주범이었는데, 사실 원인은 다른 제다이들처럼 딱 잘라 쳐내지 못하고 아홉 살 꼬맹이를 툴툴거리면서도 받아주었던 과거 몰의 행적 때문이었지만 사원의 모두가 아는 것을 그만이 몰랐다.


 "... 별 거 아니야."

 

그가 땅을 보며 심각한 낯을 하는 동안 아나킨은 몰래 히죽 웃었다. 빙고. 나이트 스카이워커는 청년으로 가는 길 끄트머리에 선 소년이 가진 마지막 특권, 개구진 미소를 간신히 숨겨내며 진지하게 물었다.


 "뭐야, 말해봐. 내가 들어줄게."

 "......"


몰은 방금 전까지 앉아있었던 계단참에 도로 앉으며 옆자리를 고갯짓 했다. 신이 나 털썩 주저앉는 아나킨을 못마땅하게 쳐다봐준 그는 이내 또 한숨을 푹 쉬며 말문을 열었다.


 "임무 중에 만난 사람이 있는데... "









스튜존은 제법 아름다운 행성이었다. 심드렁한 표정을 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줄기가 매끈하고 단단한 나무들이 드문드문 솟은 데다 개천이 많고 아직 쌀쌀한 날씨에도 풀이 무성해 척 보기에도 풍요로웠으며 무엇보다 공기가 아주 맑았다. 가는 곳곳에서 색색의 작은 새들이 날아올랐고 이따금 꼬리가 복슬복슬한 짐승이 스피더의 안장을 타고 올랐는데,


 "아, 알겠어. 중요한 부분부터 말해."


... 내게 주어진 임무는 스튜존의 어떤 귀족을 한 달간 호위하는 것이었다. 덕망 높은 자선 사업가로 알려진 나의 경호 대상은 두 달 전 쿠앗 행성계에서 벌어진 평화 시위가 어디에서(분명히 쿠앗 드라이브 야드) 로비를 받은 것이 틀림없는 연방 정부에 의해 무력 진압당한 건 이후로 그곳의 독립운동 단체를 후원하고 있었다. 그는 공화국 측의 호위 제안을 쭉 거절해왔지만, 아흐레 전 침실에 숨어든 암살자에게 살해당할 뻔하자 마침내 보호를 요청했다.


 "그 사람 이름이 뭔데?"

 "오비완 케노비."


호위 임무야 여러 번 맡아본 적이 있었으니 별 다른 감흥은 들지 않았다. 


 "제 이름입니다. 앞으로 한 달간 잘 부탁드립니다."


경호 대상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 제다이 기사단에서 호위로 파견된 몰입니다."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기사님?"

 "그냥 이름으로 부르시면 됩니다."

 "좋아요, "


오비완 케노비는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몰."


특히 웃을 때 더 그랬다.


첫날부터 나는 케노비 백작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의 촘촘한 일정을 전부 함께해야 했다. 행성 중심지와는 조금 떨어진 고풍스러운 성에 도착하자마자 내부 구조를 파악할 시간도 없이 바로 중심 은하의 렌딜리로 향했으며, 방문 목적은 렌딜리 스타드라이브에서 개최한 자선 연회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아마 쿠앗 드라이브 야드의 경쟁사이기 때문에 케노비에게는 중요한 자리였을 것이다. 군수 기업의 자선 행사라니 난 역시 웃기다고 생각하지만.

 통성명을 한 뒤 케노비는 비서에게 각종 서류와 보고서를 받아 보느라 바빴고 나 또한 연회장 구조와 경호 대상의 이동 동선을 파악하느라 서로 길게 대화할 만한 시간이 없었다. 나는 어쩐지 그가 꺼림칙했으므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뭐? 왜? 좋은 느낌으로 이상한 거 아니었어?"


그에게서 받은 감상은... 모르겠다. 그건 좋다 나쁘다로 표현할 수 있는 종류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그 밖의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비완 케노비를 보자마자 분명 무언가를 느꼈으며, 요동치는 포스를 따라 두 개의 심장이 크게 수축하고 팽창하며 피를 빠르게 밀어내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백히 나는 긴장한 상태였다.


 "그거... 아니다. 계속 말해 봐."


어쨌든 나는 임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화려한 연회장에서도 케노비는 특히 눈에 띄었고, 화술이 매우 뛰어났으며 사교적이고 친근한 웃음으로 금세 주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어떤 이들은 간혹 과한 신체 접촉을 시도했기에 그들을 막아야 했지만, 케노비는 나를 부드럽게 밀어 세우고 사람들에게 사과하며 그저 웃어넘길 뿐이었다.
 하지만 그를 보호하는 것이 나의 임무이고 나는 맡은 일에 충실한 제다이이기 때문에 그의 만류에도 위험 요인을 차단해야 했다.

 나는 그가 아직 독신이라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너 그거... 아니야. 계속 해. 재밌다."


연회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그는 발코니로 향했다. 당연히 나 또한 그를 따라나섰는데 생각하기에 발코니는 한적하고 밤공기와 맞닿아있어 일이 벌어지기엔 딱 좋은 곳이었다. 


 "어, 뭐야. 뭐야. 뭔데? 벌써?"


... 그러니까, 적의 기습을 받기에는 딱 좋은 곳이었다. 나는 위험 요인은 없는지 재빨리 확인했다. 그동안 케노비는 연회장의 노란 불빛이 새어들지 않게 커튼을 꼼꼼히 정리하고 선선한 바람에 몇 가닥 날리는 머리를 정리하며 난처하게 웃어 보였다.


 "기사님. 이건 제가 하는 일의 일부입니다. 경호도 좋지만...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하군요."

 "당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그는 계속 미소 짓고 있었지만 묘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어쩐지 나는 그 눈을 마주 보고 있기가 힘들었고, 그건 제법 자존심 상하는 일이, 웃지 마라.

 웃지 말라니까?


 "아, 미안. 미안... 안 웃을게! 아, 다시 앉아."


... 하여튼 우리는 꽤 오래 대치 상태를 유지했다. 그러다 갑자기, 케노비는 코앞으로 불쑥 다가와 내 허리에 손을 올렸다. 나는 당황해서 뭐 하는 거냐 물으려다 혀를 세게 깨물고 말았는데 하필 송곳니 끝에 걸려 거의 구멍이 나다시피 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백작은 은근한 미소를 유지하며 내 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정 그러시다면, 기사님께서 제 파트너가 되어주시면 되겠습니다. 어때요?"


나는 울컥울컥 솟는 피를 삼키느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냥 고개를 끄덕이면 될 일이었다. 케노비는 내가 허둥지둥하는 꼴을 보며 묘한 비웃음을 짓더니 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건네고는 시끌벅적한 연회로 돌아가 버렸다.
 뒤쫓아갈 생각도 못한 채, 나는 멍하니 손수건을 들고 서있다가 입가를 타고 흐르는 피를 서둘러 닦아내곤 멋대로 사라진 백작을 찾아 임무로 복귀했다. 손수건에서는 꽃 냄새 비슷한 것이 났다.
 또다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던 그는 어느 공작의 새하얀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다 나와 눈이 마주치곤 또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완전히 패배한 기분이었다. 분명 싸움 상대가 아니라 경호 대상인데, 어째서 그런 도발에 넘어가 화가 났던 것인지 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든 오비완 케노비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나는 평정을 잃지 않으려 제다이 강령을 두 번 외고도 입안에 감도는 비릿한 맛에 한 번 더 강령을 중얼거리며 남은 시간을 그의 곁에서 꾸준히 사람들을 쳐내는 데에 보냈다. 꼭 오기가 생겨서만은 아니고, 그게 내 일이니까. 
 백작은 그런 나의 행동에도 별 말이 없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게 더 불쾌했다.



성으로 귀환하는 내내, 백작은 피곤했던 건지 눈을 감고 미동도 않았다. 비서가 몇 번 불러도 대답을 않는 것이 자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나는 그가 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름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려는 건지 뭔지 무척 신경이 쓰였지만 거기다 대고 구태여 내색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덕분에 가는 길은 조용했지만 나는 끊임없이 짜증이 났다. 동시에, 제다이로서 평정을 잃는다는 것은 좋지 못한 신호이므로 걱정이 되었다.

 더 걱정할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백작은 스튜존이 보일 때쯤이 되어 눈을 뜨더니 또 예의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 보이곤 방을 안내하겠다 했는데, 나는 무언가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는 성에 도착하자 아주 산뜻한 걸음으로 어떤 크고 화려한 방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위의 방이라기엔 과했으며, 구조상으로도 성의 심장부에 위치한 것이 손님을 위한 것은 아닌듯했다.


 "편하게 지내시면 됩니다."

 "......"


무엇보다 침대가 두 개라는 것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내가 멀뚱히 서있는 동안 케노비는 시종을 물리곤 갑자기 옷을 벗기 시작했다. 


 "뭐, 뭐하시는 겁니까."

 "탈의 중입니다."

 "그건 보면 압니다!"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가 내의마저 벗어던지기 전에 서둘러 뒤를 돌았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스리며 마악 항의의 말을 쏘아붙이려 하는데 매끄러운 재질의 천이 살에 스치는 소리와 케노비의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와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뭐 어떻습니까. 같은 사내끼린데."


나는 어쩐지 멍청이가 된 것마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덕망 높은 귀족이라더니 참 무례하지 않나? 슬슬 참기 힘들어지는 화를 내리누르며 나는 한마디 해주리라 굳게 결심하고 뒤를 돌았다. 
 케노비는 어느새 탈의를 전부 마친 뒤 자줏빛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부드럽게 웃어 보였는데,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쓸데없이 거짓말할 때의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불쾌했다.


 "왜 여기서 환복 하시는 겁니까."

 "그야 여기는 제 침실이니까요."

 "그럼 제게는 다른 방을 배정해주시죠."

 "하지만, 몰. 저를 곁에서 지키는 것이 기사님의 임무 아닌가요?"


나는 기어코 으르렁거리며 신경질을 내버렸고 그러자마자 뼈저리게 후회했다. 고작 이런 일로 평정을 잃다니... 마스터 윈두의 싸늘한 눈빛이 나를 치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스승님의 보랏빛 라이트 세이버를 떠올리는 것은 침착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 알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눈썹을 까딱거리다 욕실로 들어가 버렸고, 나는 남겨진 채로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려 명상을 시작했다. 
 조금 뒤에 물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소리와 융단 같은 러그에 발을 가볍게 내딛는 소리, 그리고 이쪽을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집중하는 척을 하며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케노비는 한참 그 자리에 서서 나를 구경하나 싶더니 이내 바스락거리며 침구를 푹 덮고는 잠을 청했다.

 얼마간을 기다리다 규칙적으로 내뱉어지는 숨소리를 들으며 슬그머니 눈을 떴다. 무슨 배려인지 은은한 작은 조명이 두어 개 켜져 있었고 백작이 잠들기 전 몇 모금 마시던 위스키 잔이 협탁 위에 놓여 눈길을 끌었다. 나는 그것의 냄새를 맡아보다 얼굴을 찡그리고 내려놓았다. 아주 독한 술임이 분명했다.
 무척이나 심란한 기분으로, 나는 케노비의 약간 붉은 기 도는 밀색 머리꼭지를 내려다보다 불을 끄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침대에 누워 자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나는 선잠에 들었다.


그러다 얼마 못가 숨을 급하게 몰아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깨버렸다. 소리의 근원은 케노비 백작이었다. 그는 이불을 꼭 붙잡고 온통 식은땀에 젖어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내 손이 이마에 닿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나는 어둠 속에서 희미한 안광을 보고 잠시 놀랐다가 그가 손을 뻗어 등을 켜자 정신이 들었다.
 바로 앞에서 본 그의 눈은 옅은 청회색이었다. 어떻게 보면 연둣빛이 도는 것도 같았다. 케노비는 울고 있었다.


 "... 불을, 전부 끄셨군요."


그는 헐떡이며 간신히 말했다. 내게 안긴 채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케노비는 사람을 부르려던 나를 손짓으로 만류하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잔에 따라져 있던 그 독한 술을 말릴 새도 없이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는 그가 눈물 자국을 거칠게 닦아내는 모습을 보다 문득 말했다.


 "괜찮은 겁니까?"

 "네."


그는 건조하게 대답하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등을 몇 개 더 켰다.


 "앞으로는 불을 전부 끄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나쁜 꿈을 꾸거든요."

 "...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미리 말한다는 것을 잊었네요, 제가."


솔직히 말하자면, 악몽에 시달리는 그의 얼굴을 보고 나서부터 케노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백작은 멍하니 잔을 들고 서있다가 이내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 낮에 문제가 좀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니었고, 또 지금 상황은 내가 만든 것이었으므로 나는 머뭇거리다 조금 떨어져 있지만 그의 것과 나란히 놓여있는 침대로 가 앉았다. 
 딱 적정하게 맞추어진 실내 온도에도 그의 취향인지 침구는 풍성하다고 할 정도로 푹신했다. 하지만 정말로, 누워 잠들고픈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그냥 그가 자는 것을 새벽이 올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았다.



케노비는 해가 떠오르기 몇 분 전에 깨어났다. 잠버릇이 있는 건지 아니면 악몽 때문이었는지 밤새 제법 뒤척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머리에 잔뜩 까치집이 지어져 있었다. 피곤한 얼굴로 가만히 일어나 앉아있던 그는 나를 발견하고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침 인사를 건넸다.

 둘째 날은 외부 일정이 없었다. 케노비는 집무실에서 업무를 처리하다(대충 그의 자선 사업에 관한 일이었던 듯했다) 컨디션이 영 좋지 않은 것인지 금방 그만두었다. 비서가 유령 보듯 놀라는 것을 보면 드문 일인 것 같았다.
 그는 성의 남쪽에 있는 화원으로 이동했다. 날씨가 제법 쌀쌀함에도 그곳에는 벌써 꽃이 핀 나무가 한가득이었으며 자주 찾는 곳인지 사용감 있는 의자와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었다. 백작은 잠시 생각하더니 시종을 불러 의자를 하나 더 가져오게 했지만 나는 앉지 않았다.


 "왜, 어서 앉지 않으시고요."

 "서 있는 쪽이 반응하기에 더 좋습니다."


케노비는 나를 훑어보더니 한참 뒤에 기분 나쁘게 웃으며 대뜸 대답했다.


 "그건 그렇겠지요."


그러고는 갑자기 꽃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동백나무는 따듯한 기후에서 자라나지만 꽃은 굳이 다른 계절을 두고 겨울에 피운답니다. 지금은 날이 많이 좋아져 눈이 녹았지만 새하얀 설경에 붉은 꽃은 나름 장관입니다."


나는 꽃이라면 장미밖에 몰랐으므로 가만히 듣고 있었다. 사실 나무에 핀 꽃도 그냥 장미인 줄로만 알았다.


 "동백꽃은 질 때도 잎이 한 장 한 장 떨어지는 게 아니라 꽃이 송이 채로 떨어지지요. 재미있지 않나요. 꽃말은 기다림, 애타는 사랑이고... "

 "......"

 "기사님의 뒤에 있는 흰 동백은 비밀스러운 사랑을 뜻한답니다."

 "그렇습니까."


그는 시큰둥하게 답하는 나를 보고 천천히 일어나 이쪽으로 오더니 하얀 꽃을 하나 땄다. 


 "추운 날에는 벌이나 나비가 없어서 새가 대신 꽃가루를 옮겨주는데... 동백꽃은 그래서 꿀이 많아요."


그러더니 짧게 꺾인 꽃대를 입에 물고 끝을 빨았다. 동백꽃이란 것은 꽃잎이 많아 여러 겹으로 동그랗고 크게 모여있는 것이었는데, 향이 제법 좋았고, 또 나는 그때 케노비가 건넸던 손수건에서 났던 것이 동백꽃 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흰 꽃을 물고 눈웃음치는 오비완 케노비는 나...

 오후에는 별 다른 일이 없었다. 식사는 나쁘지 않았고 백작도 딱히 시비를 걸어오지 않,


 "아, 뭔데! 왜 말하다 마는 거야!"


... 않았다. 나는 그날 잠자리에서 불을 전부 꺼버리는 실수 같은 건 하지 않았고,


 "진짜 짜증... 뭐?"


아마 오비완은 악몽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어... 어어... 잠깐, 너 설마... "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나킨 스카이워커... 그날 아무 일도 없었어. 신경 돋우지 마라.

셋째 날도 외부 일정이 없었다. 전날과 달리 케노비는 해가 지기 몇 시간 전까지 쭉 업무를 보았고, 나는 그의 집무실 한 구석에 서서 그가 관리하는 자선 단체의 현황이나 들으며 무료하게 창밖이나 구경했다. 그게 미안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백작은 일을 마치고 승마를 제안했다.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으므로 나는 그냥 승낙했다.


 "말은 원래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는 참으려는 기색도 없이 웃었는데, 마구간의 말들이 나를 보고 나오려고 하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경 안 씁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벤, 이리온."


그는 네모난 무언가를 크림색 말에게 먹이며 잘 정돈된 갈기를 쓸었다. 벤이라고 불린 그 말은 개중에는 가장 겁이 없는 것인지 주춤거리면서도 곧 내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어색하게 그 동물을 쓰다듬었다.


 "머리와 목 이외에는 만지지 않는 게 좋아요. 특히 뿔은... 아... "

 "... 만지면 안 되는 겁니까?"


스튜존의 말들은 이마에 뾰족한 뿔이 하나씩 나있었다. 그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와 말을 번갈아 보더니 이번에는 정말 웃음을 참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입꼬리가 잔뜩 비져나와 그닥 효과는 없었다.


 "기사님은 만지셔도 되겠군요."


이유가 궁금하긴 했지만 나는 해도 괜찮은 것은 굳이 따지지 않는 편이었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말 위에 올랐다.

 그의 성 서쪽에는 말이 달릴만한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울타리가 박인 둘레로 간간히 가축이 몇 마리씩 풀을 뜯고 목동이 이쪽을 향해 경례를 보내기도 했다. 아주 평화로운 곳이었다.
 조금 앞서 달리는 케노비는 즐거워 보였고,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짐승을 타고 달리는 것엔 딱히 취미가 없었지만 안장 위에서 보이는 풍경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백작은 꽤 멀리까지 달려 나가더니 잔잔한 호숫가에 멈춰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


 "말을 타본 적이 있으셨나 봅니다."

 "제다이들은 유사시를 대비해 다양한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가요?"


그는 잠시간 말없이 호수를 바라보다 말했다.


 "제다이로 사는 건 어떻습니까? 분명 나쁜 점도 있을 텐데."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는데, 여태까지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의심이 없었으며 제다이가 추구하는 선에 의심이 없었다. 수호를 위해 태어난 생이며 생과 사는 포스의 뜻에 따라 결정되고 우리는 따르면 되는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건지 의아했으나 의례적으로 대답하기엔 그는 매우 진지해 보였기 때문에 한참 말을 골라야 했다.


 "나쁘다고 할 만한 건 없습니다. 그저 포스의 뜻을 따르고 평화를 수호할 뿐입니다."

 "포스의 뜻이요."

 "네."

 "기사님께서는 어떤 거대한 힘이 우리를 굽어살피며 평화롭게 살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십니까?"


케노비의 눈은 맑았고 햇살이 비쳐 거의 희게 보일 정도로 투명했다. 내가 대답하기 전에, 그는 고개를 돌리며 손을 들어 보였다.


 "아닙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군요. 수도사에게는 의심이 있으면 안 되는 법이지요."


말에 올라타며 그는 높은 곳에서 물었다.


 "하나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들이미는 벤을 토닥여주었다.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습니까?"

 "제다이는 살생을 지양합니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제압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라이트 세이버를 사용하는 겁니다. 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


문득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저 간결히 대답했다.


 "네."


그는 또다시 무언가를 묻고 싶은 듯 입을 달싹거렸으나 이내 말을 몰아 출발했다. 나 역시 짐승의 등에 오르며 그의 뒤를 따랐다.


밤이 되어 씻고 나오니 케노비는 또 은은한 등을 여러 개 켜 두고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훅 풍기는 알코올 냄새에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괜한 참견이다 싶다가도 그냥 두고 보기에는 불편한 기분이 들어 결국 말을 꺼내고 말았다.


 "술보다는... 잠이 안 온다면 다른 걸 마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다른 거요?"

 "우유라든가."


그는 또 예의 미묘한 웃음을 걸치더니 잔을 입에 댔다. 알코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기분이 퍽 좋아 보였다.


 "어린것이 먹어야 할 것을 제가 뺏어서야 쓰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식사 때 잘 드시던데요."

 "하하... 뭐... 그거야 그거고, 고작 잠 좀 자보겠다고 남의 젖을 가로채기엔 면이 서지를 않아서요."


나는 건성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이 불편하기는 여전했다. 악몽을 꾸던 그의 창백한 얼굴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일까. 마침 케노비는 잔을 다 비우고 조금 남아있던 술을 마저 따르려고 했기에 나는 냉큼 새로운 잔을 들이밀었다.


 "저도 주시죠."

 "흠, 임무 중에 괜찮은 건가요?"

 "자브락은 인간보다 알코올에 강합니다."


내 의도를 알아챘을지는 모르겠지만, 케노비는 남은 술을 전부 따라주었다. 알코올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던 데다 술에서 정말 좋지 못한 향이 났으므로 나는 그것을 들이키며 떫은 표정을 숨기려 최선을 다해야 했다.
 술은 향만큼이나 독했다. 호기롭게 말한 것치곤 아찔해지는 정신에 나는 한참 말없이 무릎쯤을 노려보다가 그에게 충동적으로 물었다. 물론 지금은 굉장히 후회하고 있다.


 "무슨 꿈을 꿨던 겁니까."

 "꿈이요."

 "첫날 꿨던 악몽 말입니다."


시선을 올려 마주한 그는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케노비는 웃을 때마다 눈가를 따라 몇 개 선이 생겼는데, 그 선들은 그를 매우 장난기 있어 보이게 만든다. 
 그 웃음을 멍하니 보는 동안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내가 질문을 후회하기 전에 대답했다.


 "제 유모의 꿈을 꿨습니다."

 "... 유모요."

 "네. 며칠 전... 그러니까 누군가 제게 암살자를 보낸 날 말이죠."


케노비는 크리스털 잔 끝을 둥글게 덧그리며 회상에 잠겼다.


 "그 날 유모가 변을 당했습니다. 제게는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죠. 그때의 꿈을 꿨어요."


고개를 든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얕게 퍼졌던 술기운이 싹 가시는 것을 느끼며 당혹감에 자세를 바르게 했다. 어쩐지 첫날 깨물었던 혀가 다시 아려오는 느낌이었다. 난 뭘 하려고 했던 걸까? 


 "그...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는 상체를 숙여 내게 가까이하며 조용히 말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건, 포스의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는 아예 몸을 일으켜 내가 앉은 의자의 팔걸이에 손을 짚었다. 나는 대답을 할 생각도 못한 채 그저 입가를 굳히고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케노비는 손을 올려 내 귓가를 쓸었다.


 "단순하네요."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두고 사라지더니 무언가를 쥐고 나타났다.


"좀 더 화려한 게 낫지 않나요."


그리고는 다시 내게 몸을 숙여 귀를 만지작거렸다. 반대편에 손을 뻗을 쯤에 정신을 차린 나는 케노비의 손을 잡아 내렸고 그 안에는 내 피어싱이 있었다. 그리고, 아마 그가 가져온 듯한 연한 청색의 보석이 박힌 것도.


 "이게 더 어울리는데."


백작은 웃으며 남은 한쪽으로 다시 손을 뻗었고 나는 그를 막아 세웠다. 그의 무례에 대해 무언가 말해야 했겠지만, 내가 저질렀던 무례에 대해 생각하느라 입을 열 수 없었다. 술 때문인지 조금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케노비는 내게 잡힌 손을 바라보더니 한참 뒤에 몸을 물렸다. 그리고 침대로 가 편하게 눕더니 잠을 청했다.

 오른쪽 귀를 더듬으니 손끝에 울퉁불퉁한 보석의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내 동그란 볼 피어싱을 보다가 눈을 돌렸다.
 그날은 잠들 수 없었다.


 "와... 이게... 그거야...?"


손 치워라.


 "너 근데 이거 메이스는 절대 모르게 해라. 알면 진짜... "

 "알면? 내가 알면 문제가 될 일이 있나, 스카이워커?"


두 명의 젊은 제다이들은 모골이 송연해져 천천히 뒤를 돌았다. 언제나처럼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몰의 스승이 그들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마스터 윈두... 어쩐 일로...?"

 "몰, 이번 네 요청에 대한 논의가 추가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미 결정 난 사안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고. 몰은 초조하게 손을 쥐락펴락했다. 윈두는 그 모양을 아주 의심스럽게 쳐다보다 깔끔하게 대화를 마쳤다.


 "따라와."


드라마틱하게 휘날리는 옛 마스터의 로브 자락을 응시하며 젊은 기사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불행은 항상 마스터 윈두로부터 전해지면 더 극적으로 그를 침울하게 만든다.


 "... 무슨 요청을 했는데?"

 "... 임무 교체 요청."

 "뭐? 왜?"


몰은 대답하지 않고 마스터 윈두의 뒤를 따랐다. 아나킨의 투덜거림이 끊이지 않았지만, 이 제다이 기사는 지금 그 모든 일을 수용할 정신이 못 되었다.










뇌는 주어진 정보를 처리하며 알아서 빈틈을 매운다. 어떤 사실이 주어지면 그에 맞는 알고리즘을 적용하여 나머지를 추측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거짓보다는 진실이 보다 더 교묘한 속임수에 이용된다.

 보자, 오비완 케노비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타인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에는 도가 튼 뛰어난 사기꾼이다. 본성과는 상관없이 그런 재주를 타고났다.
 본성에 대해 말을 꺼낸다는 것은 변명하기 위함이다. 오비완 케노비는 선한 본성을 지녔다. 그러나 이 사람은 불운히도 가진 재주를 썩 좋지 못한 곳에 발휘하도록 가르침 받았기에 천천히 변하였다. 그나마 심지가 굳은 탓일까, 그의 선함은 뒤틀려 형체를 잃을 지경이 되어서도 그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하도록 이끌었다. 그렇기에 어둠은 오비완 케노비에게 매혹되었을 것이다. 변하여도 변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애틋하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다들 생각해주시길. 수많은 참주와 수많은 독재자, 화려하고 비참한 말로를 걸었던 그들 모두 가슴속에 품은 대의가 있었다. 오비완 케노비 역시 그의 사악한 스승이 눈을 가렸을지라도 천칭을 들고 당당히 고개를 쳐들며 선서하였지만 그라고 다른 길을 걸을 것 같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수한 이상도 대중 앞에 서고 열두 달이 흐르면 속 알맹이는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데 그라고 다를 수 있을 것 같은가?
 이미 더럽혀진 주제에.

 그리하여 대의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를 뒤집어쓴 욕망을 쥐고 흔들며, 오비완 케노비는 그의 발아래 죽어간 이들을 모른척했다. 어쩌면 모른척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끊임없이 그 자신을 시험하려 들었다.
 무의식이 만들어낸 검은 악몽의 발굽은 무참하게 정신을 짓밟고 내달린다. 악몽은 그를 시험하고, 시험하며, 그 군마의 당당한 주인 오비완 케노비 역시 짐승을 시험하고... 아, 포스여. 

 이 가련한 사람을 굽어살피소서.




그러나 오비완 케노비의 시험관은 하나가 더 있었다. 누구이겠는가? 바로 그에게 다스 티라누스라는 이름을 내린 사악한 스승, 다스 시디어스였다. 어린 오비완의 철없는 순수에 매혹된 시디어스는 아이를 데려다 구정물에 담그고 역겨움에 구역질하며 눈물 흘리는 작은 등을 친절히 쓰다듬어주었다. 이게 세상이노라, 너는 무엇을 하겠니. 아이는 입을 꾹 다물고 한참을 분에 겨워 울다 말했다. 세상의 밑바닥에 구멍을 내겠습니다. 더러운 것은 흘려보내고 정결한 것을 남기겠습니다. 
 악마에게 다짐하는 각오에는 아무리 가벼운 것이라도 대가가 따른다. 허나 어린 오비완 케노비는 그것을 몰랐다. 하지만 알았다 하더라도 그리 대답했을 것이다. 그의 본성은 선했으니. 그러나 꼭두각시의 본성은 말 그대로 허상일 뿐이다.

 제 손으로 저버린 인륜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오비완 케노비는 더욱 밝게 빛났다. 마치 별이 터지기 전 가장 밝은 것처럼, 그는 곪아가면서도 능숙함을 가장했다. 하지만 마지막 하나를 끊어내자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 마지막 하나. 바로 이 이야기를 꺼내려 화두를 던진 것이다. 오비완 케노비의 교묘한 속임수에 사용된 진실.



다스 시디어스는 그의 제자를 시험하기 위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선물을 보내왔다. 가장 최근의 선물은 스튜존의 케노비 성으로 수신되었다: 발 빠른 암살자, 생물, 취급주의.

 평소라면 곤란할 것 없었으나 불행히도 개봉의 순간을 누군가 목격한 것이다. 오비완 케노비는 붉은 광검을 들고 누군가의 잘린 목 앞에 그린 듯 서있었다. 문이 갈라진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오고 그는 나이 지긋한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하나하나 죽어 없어진 그의 혈육들 대신 오비완 케노비를 보듬고 살피던 마지막 남은 가족이었다.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으로 바위처럼 굳어있을 뿐이었다. 노란 눈과 붉은 라이트 세이버의 의미를 여인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전, 오늘에 선행되는 악행도. 늙은 여인이 모른 척 길러냈던 총명한 도련님의 비극을.

 오비완 케노비는 동시에 깨달았다. 잊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리라는 것을. 그리하여 다스 티라누스는 마지막 인륜을 단번에 끊어냈다. 포스는 그의 망설임 없는 의지에 따라 힘을 쥐어주었고 케노비의 마지막 가족은 붉은 선이 차디찬 밤공기를 빛냄과 동시에 목이 잘려 부드러운 융단 위에 스러졌다. 이것이 소년의 마지막 장례가 되리라.


 그리고 그것이 오비완 케노비의 악몽이었다. 온전한 과거의 재현 속에서 그날과 다른 것은 잠결에 흘린 눈물뿐이었다. 리빙 포스가 현재 하는 실물의 우주에서 그가 감히 죽은 육신 앞에 서글퍼할 자격은 없었으니.
 그를 품에 기대게 하고 눈물을 닦아주던 제다이의 손길을 느끼며 시스 군주는 이 희극에 어떤 점수를 매겨야 할지 우스운 고민을 하였다. 이것은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시험이다. 동시에 스승이 내린 또 다른 시험이기도 했다. 장례식에 안타까움에 잔뜩 젖은 얼굴을 비추고 역시 제다이 기사단의 비호를 받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하는 팰퍼틴 의원에게 케노비 백작은 그러마,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그렇게 시스 군주는 무뚝뚝하지만 혈기 넘치는 호위 기사를 시험의 도구로 채택했다. 제다이를 방에 들이는 그 순간까지 그는 고민하였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불을 끌지 말지는 저 자가 결정하게 될 것이다. 불이 꺼지면, 악몽이 그를 덮칠 것이고 아니라면, 그날은 다른 날처럼 흘러 지나가겠지.
 오비완은 그 순진함과 순수함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고통에 나약하게 몸부림치는 이 죄 많은 사람을 평화의 수호자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척 보기에도 한눈에 사랑에 빠진 듯한 이 정결한 수도사가 시스 군주에게서 어떤 것을 이끌어낼지, 오비완 케노비, 흔들릴 것인가?




아, 그리고 놀랍게도. 오비완 케노비는 제법 흔들리고 말았다. 나쁜 꿈에 시달린 그를 품에 안아 들고 미안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평화의 수호자가, 꽃을 물고 희롱하는 귀족의 눈웃음에 고개 돌리던 수도사가, 처녀 총각만 밝히는 스튜존 명마의 뿔을 뚱하니 쓰다듬는 청년이, 염려와 걱정 그리고 죄책감에 말 한마디 못하고 짐승에게 식별표 달듯 백작의 보석을 끼워 넣는 오비완 케노비를 바라만 보던 제다이 기사 몰이 시스 군주의 마음을 흔들었다.

 시험은 계속될 것이다. 그저 흔들리고 만 것일 뿐 아닌가? 아직 추상같은 암흑 군주는 쓰러지지 않았다. 들킬 것인가 숨길 수 있을 것인가, 시험은 같은 문제를 가지고 내용만이 변질되었다.

 그러나 고양이처럼 무심한 척하면서도 하룻밤 지날 때마다 가까이 다가와 자리를 차지하는 그 꼴은 제법 귀엽지 않나. 처음에는 멀뚱히 서있기만 하더니.
 오비완은 애써 자신을 설득하며 잠에 들었다. 그 자신이 웃음 짓고 있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욕망에 충실한 시스로 길러졌고 애써 대의를 표명하며 그것을 제 1의 욕망으로 정하리라 마음먹었어도... 그래 오비완 케노비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다 스러져가더라도 그의 본성이 그러하니까.






넷째 날은, 나갈 일이 있었다. 오비완은 인정 많은 자선가로 위장하고 있으니 이곳저곳 불려 갈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다.
 쿠앗 드라이브 야드가 쿠앗 행성계 연방 정부에 로비를 한 것은 모두가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유도한 것이 그 케노비 백작이라는 것은 극히 소수만이 알고 있다. 무시무시하게 성장해나가는 거대 군수 기업을 부추기는 동시에 경쟁사의 자선 연회에 참가하고, 또 짓밟힌 자유를 되찾으려 발버둥 치는 독립 단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다스 티라누스의 일이다.

 그래서 오비완과 몰은 중심 은하로 떠났다. 목적지는 코렐리안의 아직 훼손되지 않은 정글 근처, 홀로 높게 솟은 연회장 건물 최상층 바로 아래.
 케노비 백작이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은 코렐리안 엔지니어링 코퍼레이션의 임원에게 그가 후원 중인 쿠앗의 독립운동 단체에 코르벳을 납품할 의사가 있는지 은근히 묻는 것이다. 동시에 무역 연합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모습을 보이며 중립 의사가 투철한 코렐리안 측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것까지. 하지만 이미 썩을 대로 썩은 코렐리안 정치인들의 속내가 어떨지는 뻔하다. 어쨌거나 그들의 행성을 먹여 살리는 것은 공업, 정확히는 조선업 아닌가. 양측 관계자들 사이에서 능청스럽게 최근 의회의 동향과 관세 이야기를 꺼내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오비완은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젯밤 일 때문인지 몰은 누가 봐도 어색하고 어정쩡한 낯이었다. 오비완은 그의 오른쪽 귓바퀴에서 반짝이는 푸른 보석을 못 본 채 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그건 제법 재미있었다. 시스 앞에서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모르는 제다이라니.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 희극의 입장권이다.

 그리고 역시나, 오비완과 나름 친분이 있었던 그 임원은 흔쾌히 제안을 승낙할 듯싶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확인한 케노비 백작은 교묘하게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단어를 선정하여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화를 주도했고, 이내 무역 연합의 이사 한 명이 낯을 붉히기 시작했다.


 "지금 우리를 낄 곳 못 가리는 분탕 종자라고 칭하시고 싶은 겁니까?"

 "아, 이사님. 오랜만입니다. 그럴 리가요."


오비완은 깜짝 놀란 척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다 웃어 보였다. 그의 눈이 가볍게 접힘에 따라 이사는 울그락불그락해지더니 소리 나게 걸어와 오비완의 앞에 섰다. 네모이디안 출신이 대부분인 무역 연합 이사회에서 유일하게 인간인 그녀는 한때 케노비 남작을 제법 좋게 평가했었지만 은근한 추근거림이 매몰차게 거절당한 이후로는 아니었다.
 글쎄, 오비완은 좀 더 침착한 사람이 취향이었으니까. 묶인 채로 괴롭힘 당하는 건 취향이 아니고. 이쪽 일을 하다 보면 진위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소문들을 직접 두 눈으로 알게 될 때가 있다.


 "우리... 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 말에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화가 난 이사는 옆에서 초조하게 발을 동동거리던 부관이 그녀의 팔을 조심스럽게 건드리자 입을 꾹 다물며 웃더니 케노비 백작에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오비완 케노비... 당신이 이런 식으로 구는 건 나를 자극하려는 거지? 내가 참가하는 곳은 꼭 얼굴을 비추는 거, 알고 있거든."

 "이사님."

 "그래서, 지난번 애프터 파티에서는 그 의원님께 원하는 걸 받아냈나?"

 "그랬지요. 덕분에."


들켰네. 오비완은 무심하게 눈을 내리깔며 생각했다. 가십이란 관심을 끌기 가장 좋은 수단이다. 호기심은 돈줄을 물어오기 좋은 수단이고. 케노비 남작께선 아무나 상대하는 싸구려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아무도 상대하지 않는 성자는 아니었다. 뭐 적어도 은밀한 방 안에서 누군가의 고백을 듣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귀엽게 구는 건 좋지만, 이 이상은 조심하도록 해요. 백작님의 우는 얼굴을 보고 싶어 하는 건 나만이 아니거든. 계속 이런 식, 뭐야?"

 

오비완은 그의 한 달짜리 호위 기사가 앞을 막아서자 정말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살짝 보이는 각진 턱은 이를 악문 듯 경직되어있었다. 아마 다 들었겠지.
 백작은 기사의 검은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몰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보는 듯하더니 바로 자세를 바르게 하며 황당한 낯을 한 무역 연합 이사를 내려다보았다. 이 정도로는 말을 안 듣는구나.
 오비완은 무표정을 가장하며 제다이의 팔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러자 잔뜩 힘이 들어간 근육이 풀리며 짙은 호박색 눈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짜릿한 일이었다.
 순진한 호의를 마음껏 받아내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작은 해프닝은 케노비 백작의 사과와 웃음으로 끝이 났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동안, 오비완은 영 심란해 보이는 제다이의 옆모습을 안주 삼아 와인을 홀짝였다. 건조한 알코올의 어두운 적색은 그를 기분 좋게 만든다.













May the force be with you!

포스절입니다, 여러분. 기념으로 첫 리퀘스트에요.

네. 존나 길지요. 하지만 머리에서 길게 쓰라는 지시가 내려와서 손이 그렇게 썼습니다. 미안해요. 그래도 최대한 짧게 짧게 축약해서 써봤습니다. 사실 평소같았으면 저 내용으로 7편 정도는 썼을 겁니다.

어떤 분의 요청인지 저는 알 수 없지만 마음에 드셨다면 좋겠습니다. 굳이 누구라고 알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타나셔도 상관은 없고요. 마음에 안든다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왜냐하면 이미 많이 써버렸으니까...

쓰다보니 문제를 발견했는데, 리퀘스트를 넣으신 분이 성인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성인글이 취향일지 아닐지도요. 그리고 어디까지 하드해져도 되는건지도... 사실 다스 시디어스의 미니 오비완 교육법에 대해 조금 쓰다가 깨닫고 지워버렸습니다. 별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보셔야할 분이 성인글에 걸려 못보면 그건 슬픈 일이니까요.

이 글을 요청하신 분께서는 성인글도 괜찮다면 리퀘박스에 (당근)을 써넣어주세요. 수정 가능하게 해두었는데 그냥 따로 새로 넣으셔도 됩니다. 저는 구글 설문지의 매커니즘을 잘 모르거든요. 미흡한 사이버 망령입니다. 혹시 구글 설문지 말고 다른 좋은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저는 인터넷과 친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수위는 어디까지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어디까지 포용 가능하신가요? 어렵습니다. 혼자 아무거나 주워먹으면서 쓰다보니까 정말 어렵네요 이런건.
만약 (당근)을 넣은 적이 없는데 정해진 날짜에 글이 안올라온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당신을 사칭해 (당근)을 넣은 것이니 말해주시면 됩니다. 어차피 제 포스타입에 오시는 분들은 한줌이라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

아무튼 요청받은 글은 영원히 여기에만 올라와있을 겁니다. 이 포스타입의 글을 다 지우더라도 리퀘 글은 지워지지 않을 거에요. 요청하신 분에 한하여 아무데나 긁어가거나 링크를 걸어놓으셔도 괜찮습니다. 너무 곤란한 곳만 아니라면 정말 아무데나 괜찮아요. 수정만 하지 않으시다면 무단 복제 가능입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다른 리퀘스트는 시간 나면 차차 쓰도록 하겠습니다.

추가로 내용에 대해 말하자면, 오비완이 대충 두쿠 백작님 역할을 가져온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많이 다르긴 하지만요. 시스 네임도 뺏어와 버렸습니다. 다스 티라누스. 사실 오비완이 시스라면 두쿠 백작처럼 개인적인 이상을 좇는 참주형 지도자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스몰이는 누가 가르치는대로 크는 편일거라 생각해서 아주 충실한 제다이가 될 것 같고요.
제가 말이 너무 많네요. 그만 할게요.


다음 편은 5월 9일 00시 00분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정말 정직하게 쓴 만큼만 올린 거기 때문에... 좀 애매한 곳에서 잘렸죠? 다음 편도 애매한 곳에서 잘릴지도 모릅니다. 아마 총 3~4편 정도로 완결날 것 같네요. 써놓고 단편이라고 하면 단편이 되는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포스랑 함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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