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섬광



 "그쪽 아들, 똑똑하지? 공부도 잘하고. 근데, 그거 공부만 잘하는 머리야. 지금 돈 잘 벌고 하니까 믿고 있는 모양인데, 하루라도 빨리 아들 계좌 확인해 봐."

 강우는 철저하게 장 여사를 무시하고 있었다. 장 여사에게는 복채를 받을 생각 없으니, 돌아가라고 말했으나 끝끝내 은영 엄마 옆에 앉아 있었다. 

 "똑똑한데 헛똑똑이야. 유혹에 약하고. 돈은 계속 들어올 사주인데, 다 빠져나갈 팔자기도 해."

 "네? 그럴 리가요. 우리 아들 굉장히 착하고 성실해요."

 "아들 취미가 뭐야?"

 "취미, 그런 거 없는 거 같은데……."

 "쉬는 날마다 강원도를 그렇게 가네?"

 "네? 강원도요?"

 "믿든 말든, 그쪽이 알아서 해."

 은영 엄마의 얼굴이 심각해진다. 강우는 가만 생각에 잠기다가 말을 덧붙였다.

 "차별하지 마."

 "그건 또 무슨……."

 "아들 아들, 하는 거 다 눈에 보여."

 "……."

 "딸 마음에 더 상처 주면 나중에 진짜 후회한다."

 "전 차별한 적 없어요. 그게 무슨……."

 기분이 상한 듯 은영 엄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강우를 흘겨 보았다.  

 "다 그렇게 말하더라. 아들에게는 평생 모은 재산으로 뒷바라지 다 해주면서, 딸은 뭐 하나 안 해주고. 그거 다 날릴 팔자일 텐데, 아들 말이야.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

 은영 엄마는 부들부들 떨뿐,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지 못했다. 계속 장 여사가 은영 엄마라고 말했으니, 어림짐작으로 딸이 있다는 걸 알았겠지만, 아들이 있다고는 먼저 입 열지 않았다. 하지만 강우는 기가 막히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하는 말마다 모두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세상 용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라더니, 눈빛이나 분위기가 쉽지 않다. 얼굴을 보아 딱 내 딸 또래 같은데.

 "우리 딸은요? 선녀님, 제발 좀 말씀해 주세요."

 하아.

 강우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쪽 딸은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게 없다니까?"

 "어렸을 때부터 애가 맨날 헛것 보고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그게 끝난 게 아니라고……. 제가 정말 걱정돼서 찾아온 거예요."

 장 여사는 지금까지 유원이 무탈하게 자라준 것에 늘 감사했다. 딸은 엄마를 철없다고 나무라지만, 장 여사는 항상 딸 생각이 먼저였다. 어디 아프지는 않은지, 또 불면증이 심해지지는 않았나, 딸은 엄마에게 많은 걸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더 세심하게 들여다보아야 했다. 딸은 잘나가는 배우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늘 마음에 걸린다. 어릴 때 있었던 일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사람 일이라는 건, 쉽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게 있어."

 강우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또 남이 쉽게 끼어들어서는 안 될 일도 존재하지."

 처음 신을 받았을 때는 앞뒤 가리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모두 지껄였다. 그래서 주하온에게도 실수를 저질렀고 그 모든 것은 제 입이 저지른 업보였기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사면서도 도와주었다. 하지만 이제 더 선을 넘어서는 안 되었다. 적정선에서 멈추어야 했다. 

 "무슨 걱정 하는지 알겠는데, 괜찮아."

 오히려 칼자루는 네 딸이 쥐고 있으니. 


* * *


 컨디션이 좀처럼 올라오지 않는다. 배우 생활을 하면서 잠이 모자란 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몸이 좋지 않은 건 처음인 듯했다. 심지어 오늘은 잠도 자고 나왔는데도 그랬다. 커피를 마시고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유원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꿈만큼 찝찝한 게 없다. 분명 어떤 꿈을 꿨다는 걸 기억할 정도로 인상적이었다는 건데, 왜 기억이 나지 않을까. 

 "유원아, 몸 괜찮아?"

 "그냥, 피로가 쌓여서 그런가 봐."

 화장실에 다녀온 유원이 미간을 좁혔다. 숍에 도착하기 전에 가볍게 식사를 하고 메이크업을 받고 나니, 어느새 아홉 시가 다 되어 간다. 의상을 갈아입은 유원은 거울을 보며 매무새를 정리하고 숍에서 나왔다. 차에 올라탄 유원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지압하고 있었다. 계속 머리가 무겁고 아파서 정신이 하나 없었다.

 "나 두통약 좀 줘."

 운전하던 매니저가 백미러로 유원을 보았다. 글로브박스에서 약을 넣어둔 파우치를 꺼낸 매니저가 유원에게 건네주었다.

 "머리 많이 아파?"

 "그냥, 좀."

 물과 함께 약을 삼킨 유원이 한숨을 쉬었다. 

 "차 밀리니까, 좀 눈 붙이고 있어."

 "응."

 좀 나아져야 할 텐데, 유원은 눈을 감으며 휴식을 취했다. 차가 밀린다. 방송국에 도착하면 작가와 함께 시상하러 들어가는 타이밍을 들어야 하고 대본을 보며 멘트를 정리해야 한다. 시상식에 참석한다고 하여, 가만히 앉아 있는 건 아니었다.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이 꽤 많았다. 정리가 끝나면 레드 카펫을 걷고 사람들을 보며 인사도 해주고 짧은 인터뷰까지, 늘 해오던 일인데 지금은 몸이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눈을 감고 있다가 얕은 잠에 빠져든다. 이렇게라도 잠을 자는 게 나을 듯하여, 가만 눈을 감고 있었다. 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차가 덜컹거리는 소리, 클랙슨 울리는 소리가 귀에 닿는다. 꿈을 꾸었다. 본능적으로 잊어버렸던 그 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얼굴이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는, 피투성이가 된 여자가 서 있었다. 한복? 색이, 화려한 한복…… 얼굴, 얼굴은 왜 보이지 않는 거지?

 이게 꿈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눈에 보이는 저 여자가, 어릴 때부터 날 괴롭혀왔던 그 환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궁금했다. 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나를 그토록 힘들게 했는지.

 "… 하지 마."

 소름 끼치던 그 목소리. 무어라 말하는데, 귀에 온전히 닿지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걸음을 옮겨 보지만, 온몸에 무거운 추를 단 듯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뛰어야 해, 사라져 버릴까 두려워 달음질을 치지만,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그를 …… 하지 마."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를 사랑하지 마."

 기억났다. 어릴 때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그 목소리가, 그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밤이 되면 홀연히 나타나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고 사라졌던 그 환각이, 다시금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숨을 몰아쉬며 눈을 뜬 유원은 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손을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작게 쥐가 났을 정도였다. 

 "……."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불쾌함이 가슴을 꽉 채우고 있다. 유원은 물을 찾아 마시고 숨을 고르며 시트에 몸을 기댔다. 요즘 일에 치여서 많이 지친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잊고 살던 그 환각이 다시 되살아 날 리가 없었다.

 엄마는 나를 괴롭히던 그 모든 것들이 무당이 써 준 부적 덕분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원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본디 사람 일이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유원이 생각하기에도 어릴 적 제 몸은 약했고 그 때문에 마음도 유약했다. 몸과 마음이 약해지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귀신이라 말하는 세상에 없는 존재에게 시달리기 마련이었다. 몸이 건강해지고 자연스럽게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현상에서 벗어났다고 믿었다. 그러니, 지금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몸이 피곤해서 그래서 다시 그 여자가 나타난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었다.


* * *


 "신인상 시상이 가장 먼저라서 시작 전에 미리 대기하시면 돼요."

 유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본 리딩을 하며 함께 시상을 할 남자 배우와 호흡을 맞추었다. 대본에 쓰인 멘트는 주로 드라마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유원은 지친 얼굴이면서도 작가의 말을 경청하며 시상식을 준비했다. 

 "언니!"

 다른 대기실을 배정받은 하온이 유원을 찾아왔다. 이제 막 대본 리딩을 마친 유원이 하온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늘 하온이 예쁘네?"

 오늘은 문제없이 준비한 의상을 입은 하온을 보며 유원이 말했다. 

 "네, 잘 어울려요?"

 "응. 예뻐."

 하온은 지쳐 보이는 유원의 얼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하루가 다르게 유원은 수척해진다. 그 옆에 조심스럽게 앉은 하온은 가만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힘들었어요?"

 "조금. 그냥 이상하게 더 힘드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슬퍼요."

 "그냥 옆에 있어."

 "……."

 "그게 가장 힘이 나."

 하온의 손을 잡고 유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고 하온을 본다. 눈에 하온이를 담고 작게 웃었다. 그저 손을 잡고 있을 뿐인데, 조금 힘이 나는 것만 같다. 

 "오늘 하온이 조연상 후보던데?"

 "그냥 후보에요."

 "받을지도 몰라."

 "아니, 저는 드라마 전체에 나오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하온은 데뷔하고 나서 한 번도 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상을 받을 만큼 잘했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더 나은 사람이 상을 받는 것이 옳았고 괜히 기대했다가 아쉬운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되려 상을 받을 확률이 높은 사람은 유원이었다.

 "언닌, 대상 후보잖아요."

 "나는, 받을만하지."

 짧게 고민하다가 단정 지어 말하는 유원이었다. 

 "그리고 너도 받을 자격 있어."

 언제나 유원은 객관적이다.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는 성격이었다. 드라마는 충분히 잘됐고 방송사에서 올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원톱 주연인 유원이 대상 받을 자격은 충분했고 초반 상승세를 견인한 하온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기에, 유원은 하온의 손을 꽉 쥐며 말을 이었다.

 "넌 가끔 너무 자신감이 없어."

 "…… 다른 사람들도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너는 없다고 생각하니? 뭐, 후보로도 만족하는 거야?"

 "아니요. 그냥, 괜히 기대했다가 아니면 슬프잖아요."

 "아니면 욕하면 돼. 네깟 게 뭔데 나를 안 줘? 하고."

 "저는 그럴 성격이 못 돼요."

 그 대답에 유원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내가 그래서 널 좋아해."

가끔은 답답하지만, 이렇게 순하고 착해서 그래서 좋아하는 거였다. 나와는 다른 사람에게 보통 빠져든다고들 말하니까. 이렇게 달라서, 그래서 깊게 빠졌나 보다.

 "그래도 수상 소감은 정리해 둬."

 "…… 지금요?"

 "응, 혹시 모르잖아. 감사한 사람은 미리 정리해 봐."

 하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살면서 감사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우습게도 가족도 없는 거나 다름없어서, 도망간 엄마의 이름도, 도박에 빠져 결국 감옥에 간 아빠의 이름도 부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유원이 생각났다가 그다음은 쓰리스타 멤버들이었다. 사이는 멀어졌지만, 그래도 인생에서 손꼽을 만큼 좋았던 사람들이었다. 그 다음은, 역시 강우인데…… 그의 본명을 몰라서 말하지 못할 듯하다. 또 괜히 수상소감으로 무당 이름을 말했다가는 다른 오해를 살지도 몰랐다.

 "나는 생각보다 가난한 사람이구나……."

 하온이 허탈한 듯 웃었다. 그러다가 레드 카펫을 걷는 유원을 보고 고개를 젓는다. 우스운 일이었다.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좋은 일이 생기고 있는데, 왜 작은 일로 이렇게 기운이 없어지는지. 가난하지 않다. 이제 조금씩 달라질 테니, 내 곁에는 좋은 사람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 바꿔 생각하면 다시 사라지던 기운이 돌아왔다.

 하온은 유원을 깊이 사랑한다. 이제는 그가 없으면 다시 일어설 힘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깊게 사랑했다. 내 곁에 없었던 사람이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늘 유원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고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었다. 하지만 늘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약한 모습은 가끔은 죄책감을 느끼게 했다.

 유원은 잘나가는 톱스타였고 구설수가 많았던 주하온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이 기사에 나오면 대중들은 두 사람을 비교하며 비난했다. 늘 사생활이 깨끗했던 유원이었기에 하온과 급이 맞지 않다는 말도 돌았었다. 하온은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고 유원에게 모자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설사,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여우조연상 수상자는 주하온 씨입니다!"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모든 순간에, 유원이 있었다. 그가 꽃다발을 챙겨주며 안아주었고 이 모든 순간이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마이크 앞에 서서 멍해지는 그 순간,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다가 뚜렷하게 느껴지는 꼭 해야 할 한 마디.

 "유원 언니, 고마워요."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 웃는 얼굴이 그 누구보다 예쁜 사람, 내 곁에 영원히 있어 줄 것만 같은 사람. 하온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목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다음 날에도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막연한 행복은 하온에게 있어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늘 울고 괴로워하던 지난날들은 이 순간을 위해서 겪어온 나날처럼 느껴졌다.

 "언니, 오늘 대상 축하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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