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행사를 마친 여주는 잠시 쉬기 위해 아무도 없는 회의실로 향했다. 털썩- 의자에 편하게 등을 기댄 채 앉은 여주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의연하게 행사를 진행하기는 했지만 여주라고 긴장을 안 한건 아니었다. 잠시 긴장을 풀고 숨을 돌리고 있는데





"전무님. 식사는..."


"아, 저는 괜찮아요. 그냥 좀 쉴게요. 차 실장님은 점심 드시고 오세요."


"그러면 간단하게 드실 거라도 챙겨올까요?" 


"아니에요. 괜히 뭐 먹었다가 얹히기는 싫어서."





아, 그럼 미안하지만 점심 먹고 들어오는 길에 커피 한 잔만 부탁해도 될까요. 여주의 말에 차 실장은 웃으며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는 차 실장이 점심을 먹고 올 동안 잠시 눈을 감고 있을 생각이었다. 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일단은 잠시 편하게 마음을 놓고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어차피 이 회의실을 찾을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다행히 여주의 걱정과는 다르게 눈을 감고 있으니 점점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





동료들과 함께 있던 동혁은 차 실장을 발견했다. 차 실장 근처를 훑어보며 여주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고 차 실장에게 걸어가 조심스레 여주의 행방에 대해 묻자, 차 실장은 동혁에게 여주가 있는 장소를 알려줬다. 동료들이 동혁을 보며 손짓을 하며 얼른 오라고 얘기했고 동혁은 먼저 가 있으라는 말과 함께 여주가 있는 회의실 쪽으로 향했다. 조심스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자, 등을 돌려 앉아있는 여주의 뒤통수가 보였다. 동혁이 낮은 목소리로 여주를 부르며 천천히 다가갔고 눈을 감고 있는 여주가 보였다.







잠을 잘 못 자는 여주를 알기에 동혁은 최대한 여주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히 뒷걸음질 치는데 잠결에 인기척을 느꼈는지 살짝 눈가를 찌푸리는 모습에 동혁이 움직임을 멈췄다. 아직 완전하게 잠에 빠져든 건 아닌 것 같았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휴대폰의 진동이 느껴졌다. 아마 동료들의 전화겠지. 동혁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여주에게 덮어줬다. 여주가 혹시라도 자다 추위를 느껴 깰 수도 있으니까. 살짝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조심스레 넘겨 주고서는 회의실에서 빠져나왔다. 






*






잠에서 깬 여주가 눈을 떴다. 너무 오래 잔 것 같은 느낌에 시간을 확인해 보려고 척추를 세워 몸을 일으키는데.







"일어났어?"


"...뭐야? 언제 왔어?"


"행사장에 언제 왔냐고 묻는 거야- 아니면 여기 언제 와있었냐고 묻는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재민이었다. 여유롭게 웃으며 턱을 괴고서 여주를 쳐다보고 있는 재민은 앞에 있던 커피를 슥- 여주 쪽으로 밀었다. 차 실장님은 김 대표님이 찾아서 잠깐 갔어. 그래서 내가 대신 커피 전해주러 왔지. 여주는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기울이며 스트레칭을 하고서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커피의 얼음이 좀 녹아있었다. 





"깨우지 그랬어."


"너무 잘 자고 있길래."





잘 자기는 했지. 이동혁 덕분에. 여주가 눈을 떴을 때 자신의 몸 위에 덮어져 있는 옷을 보고 누구 옷이지 생각을 함과 동시에 코 끝에 스쳐가는 향에 바로 알아챘다. 동혁이 자주 쓰는 향수였다. 얘는 또 언제 왔다 간 걸까. 여주는 그래도 피곤하긴 하다고 잠이 오긴 하네. 그래서 서서히 동혁에게서 벗어나긴 하는구나. 생각했었는데 





"이 버릇을 또 언제 고치나..."


"응? 뭐라고 여주야?"


"어, 아니야. 아무것도."






*






오후 행사를 진행하던 여주의 발밑으로 뭔가가 굴러와 채였다. 고개를 숙여 발끝을 쳐다보자 장난감이었다. 여주는 몸을 숙여 장난감을 줍고서 주위를 둘러보자 한 어린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를 찾는 듯 바닥을 이리저리 쳐다보고 있는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 시선에 맞춰 무릎을 접었다. 





"이거 네 거야?"





여주 손에 들린 장난감을 본 아이가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난감을 아이에게 건네주자 두 손으로 받고서는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어른들은 어디 있어? 여주의 질문에 장난감을 손에 꽉 쥔 아이는 어딘가를 가리켰다. 아이가 가리킨 방향에도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은 안 보이길래 부모님을 찾아줘야 하나 생각을 하는데 





"엄마가 금방 다녀온다고 가만히 있으랬지!"





아이의 엄마가 타박을 하다가 여주를 보고 어머! 하며 손을 올려 입가를 가렸다. 여주는 접혔던 무릎을 펴 자리에서 일어나고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고, 시선을 내려 아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크게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며 엄마 손을 꽉 잡고 가는 아이를 보며 착하네.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누가 가까이 다가왔다. 인기척에 옆을 돌아본 여주가 재윤과 눈이 마주쳤다.





"웬일로 네가 날 보고서 아무렇지도 않지? 아,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너는 할 일도 없니."


"할 일이 없다니, 바쁜데 친히 시간 내서 온 건데." 


"시비 걸러 온 거면 조용히 꺼지고." 





재윤이 온다는 건 이미 차 실장한테 보고받은 내용이었다. 지환을 만나고 온 다녀온 차 실장은 지환에게 부탁 받은대로 오후 행사에 여주를 지환이 말한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차 실장님. 저 일정 변경 없이 오후 행사에도 참석합니다.'


'김 대표님은 전무님이 걱정이 되신다고.'


'내가 거기서 그 사람을 피하면 내 입지가 어떻게 되겠어요.


'….'


'차 실장님도 제가 피하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해요?' 





여주는 재윤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꽤 뿌듯하겠어? 재윤은 행사장을 넓게 한번 둘러보며 얘기했다. 여주는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가 전화 와서는 네 칭찬을 하길래 와봤는데... 칭찬받을 만하네." 





여주가 피식 웃었다. 재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너한테 칭찬 받으려고 열심히 한 게 아니라서- 네 칭찬은 거절할게. 여주의 말에 재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여주를 쳐다봤다.





"근데 여주야.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는 없어."


"…."


"그렇게 잠도 줄여가며 뼈 갈아서 열심히 했는데 나한테 뺏기면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하겠어."





안 그래? 재윤의 도발이었다. 재윤은 자신의 말에 여주가 바로 표정을 찌푸리며 자신을 노려볼 거라 예상했지만, 





"너야말로 사람답게 지내고 싶으면 거기까지만 해." 


"뭐?"


"내가 참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여주는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돌려 재윤을 쳐다봤다. 쓸데없는 상상 따위 그만하고. 아무리 상상은 자유라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현실을 자각하고서 상상해야 하지 않겠어?" 


"…."


"난 내 거중에 하나라도 너한테 넘겨줄 생각 절대 없거든." 






*





행사를 마치고 나서 여주는 차를 대기 시켜 놓겠다는 차 실장에게 먼저 퇴근하라고 말하고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이미 여주를 기다리고 있던 재민이 보였고 차에 올라타 둘은 지환과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꽤 오랜 시간 신경 쓴 행사가 끝이 나니 후련한 마음도 들었지만 행사를 진행하며 좀 더 보완했으면 좋았을 점들도 몇 가지 보여서 조금 아쉬움도 남았다. 지환은 그런 여주에게 그래도 큰 문제 없이 끝났으니 오늘은 마음 편하게 쉬자며 달래고서 잔을 들었다. 





여주도 지환의 말대로 오늘만은 일 생각을 살짝 내려놓고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가볍게 한 두잔만 마시려고 했던 게 세잔이 되고, 네 잔이 됐다. 여주는 얼굴에 열이 올라오자 자신이 얼마나 마셨지 생각을 해봤지만 정확히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이 안 나 그냥 많이 마셨구나- 생각을 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동혁이 만나기로 했는데. 취기가 올라온 여주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좀 전에 말했다시피 이렇게 많이 마실 생각을 하고 온 게 아니라서 이곳에 오기 전 동혁에게 연락을 남겨놨었다. 





- 누가 자는 거 몰래 보고 가래.

- 이따 옷 돌려주러 갈게.





여주가 취기가 올라올 정도였으니 지환도 마찬가지였다. 지환의 술 버릇은 잠을 자는 거였다. 피곤하다며 눈을 꾹 감았다 뜨던 지환은 자리를 정리하고 재민에게 여주를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대리를 부르고 사라졌다. 나오기 전 여주는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 했고 재민은 익숙하게 여주의 짐을 챙겨 기다리다 다정한 손길로 여주를 챙겨 차에 올라탔다 . 





"뭐야... 나재민 너 술 마셨잖아."


"저기요- 형이랑 너랑 둘만 신나서 마셨지. 저는 한 잔도 안 마셨거든요?"


"뭐? 정말? 왜?"


"왜긴 왜야."





너 데려다주려고 안 마셨지. 재민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을 하고서는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열이 올라 더위를 느낀 여주가 나 창문 열어도 돼? 하며 물었고, 재민은 흘긋 여주를 보며 씩 웃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지나가는 풍경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여주의 집 앞에 도착했다. 





안전벨트를 푸르고 내리려는 여주 보다 더 빠르게 차에서 내린 재민이 조수석 문을 열고 여주에게 손을 뻗었다. 여주는 푸흐흐 웃으며 야. 됐어. 내가 무슨 그 정도로 취한 줄 알아? 하며 혼자 내리고서 차 문을 닫는데 몸이 휘청했다. 빠르게 여주를 잡아준 재민이 덕분에 뒤로 넘어지진 않았다. 





"와, 재민아. 나 뒤로 넘어질까 봐 식겁..." 





여주가 말을 멈췄다. 재민이 넘어질 뻔한 여주의 허리를 잡고 자신의 쪽으로 당긴 덕에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여주는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재민의 시선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재민은 여주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였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여주야. 왜 긴장해?"





재민의 장난 섞인 목소리에 여주는 정신을 차리고 재민의 품에서 벗어나 입구로 향했다. 응? 여주야. 왜 긴장했어-? 여주의 뒤를 쫓아오며 물어오는 질문에게 아, 긴장한 거 아니거든! 놀라서 그런 거야! 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위에까지 안 데려다 줘도 돼?" 


"어. 방금 깜짝 놀라서 술 다 깼어. 너도 얼른 집에 가."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는 알림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여주는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고서 재민에게 가보라며 손짓했다. 재민은 싱글싱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올라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층이 올라가는 걸 확인한 재민이 뒤를 돌아 나왔고 자신의 차 쪽이 아닌 곳으로 향했다. 주차 되어 있는 한 차량에 걸어간 재민은 운전석 창문 쪽을 살짝 두드렸고, 







"보셨다시피 여주는 잘 올라갔어요. 제가 확인했으니까 그만 돌아가셔도 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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