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낮

W. Hathor





[태자 전하 전 상서.



暳草如碧絲 혜종 땅의 풀이 푸른 실 같을 제

瑛椴低綠枝 영천 땅의 자작나무는 어느덧 푸른 가지를 드리우는구나

當更逢恁日 임과 다시 만나기를 손꼽는 날들은

是者斷腸時 애간장이 끊어지는 때로다

春風不相識 봄바람은 눈치도 없이

何事入羅幃 어이하여 장막에 불어오는지



지난날 전하께서 북장성을 순수하실 때 소녀에게 지어 보내신 시입니다, 기억하십니까.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통 말로는 어여삐 여긴다 표현하질 않는 분이시니 영 무심하신 것 같다가도, 어쩌면 전하의 모든 순간들이 제게 오시는 전하의 마음이었음을 소녀가 다 헤아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공사가 다망한 가운데 짬짬이 들러 낯을 비추시는 것이 그립다 말씀하시는 것인 줄,

보내는 서신 한자락에 아끼신다는 마음을 담아 보낸 것인 줄,

더러 입을 맞추시는 것이 소녀를 귀애한다 하는 것인 줄,

선물하시는 꽃에 연모한다는 뜻을 담아 보낸 것인 줄을요.


예, 전하께서는 소녀를 연모하십니다. 소녀가 전하를 연모하는 것만큼, 혹은 그보다도 많이요.


임술년 사월 초하룻날, 제게 주셨던 생일 선물을 기억하세요? 꼭두새벽부터 소녀의 규방을 찾아와 과꽃을 한 아름 안겨주셨지요. 전하께서 주신 것들은 그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그것이 소녀에게는 가장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어느 날엔가, 꽃에 물을 주던 한 종비 아이가 일러주더이다. 과꽃에 담긴 의미는 내 남은 일생을 임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는 뜻임을요. 말로 전하기엔 조금 간지러운 말을 늘 그리 선물에 담아 보내시는 것을 소녀도 다 압니다.


그러니 이해합니다. 다소 무심하신 분이더라도 마음만은 깊이 소녀를 연모하시는 것을. 더러 말로 표현하지 않으셔도 저를 반려로 맞고자 하시는 그 마음을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그저 그립다는 말을 이리 한 것이니 달리 곡해는 마소서. 전하께서도 종종 그리하시지 않았습니까. 오래 보았던 만큼, 우리는 퍽 닮은 점이 많을 테니까요.


열흘 뒤 묘시(卯時) 법복사로 가는 길목, 장산골 초입의 처마 밑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전에 소녀에게 하신 청혼에 대한 대답을 그날 드리려 합니다.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오소서.]





“어찌, 하오리까.”



지밀이 황후를 향해 물었다. 올려다본 웃전의 안색엔 분노가 적잖이 일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손이 그녀가 지금 얼마나 참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손에 쥐어진 서신이 바스락 대는 소리를 내며 힘없이 구겨졌다.



“태자가 그 계집에게 혼인을 청하였다는 사실을 정녕 알지 못하였느냐.”


“죽여 주시옵소서 황후 마마-!”



돌아온 무능력한 대답에 기가 찬 황후가 서안 위에 놓인 서신들을 냅다 집어 내던진다. 쌓였던 종이 뭉치들이 바닥에 산발적으로 흩어졌다.



“어디 일개 학자 집안의 여식 따위를...! 대관절 태사 따위가 무엇이관데! 태자도, 폐하께서도!!”



근래 들어 태자궁에 인태사 댁발 서신의 수가 많아지는 듯하여 몇 차례 소식을 가로챈다는 것이 이리 큰 대어가 낚일 줄은 곤녕궁 안의 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태자가 종종 궁을 출타하는 것쯤이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고, 스승인 인태사의 집에 은밀히 드나드는 것 또한 알았으나 다름 아닌 그 댁 내실에, 그것도 미혼의 여인이 기거하는 규방에 드나드는 것이었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저자의 *책바치나 양인과 다를 바 없는 일개 문관 집안의 여식 따위가 감히 내 아들과 은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리도 앙큼한 계집을 봤나.

* 서책을 만들어 파는 장사꾼.


“태자궁에 기별을 하오리까. 지금쯤 석강을 마치셨을 시각이오니 분명...”


“정녕 미치지 않고서야 어딜...! 태자궁의 서신을 황후전에서 빼돌렸다 직접 고하기라도 할 참인가!”


“망극하옵니다, 황후 마마.”


“...지밀은 듣거라.”


“하명하시옵소서.”


“금일 이 시간부로 태자궁으로 들어가는 사적인 서신은 모두 이곳 곤녕궁을 거쳐야 할 것이다. 또한 이후로 태사 인의겸의 가택에서 오는 소식은 일절 태자에게 닿아서는 아니된다. 전하지 않음은 물론이요, 태자는 그러한 서신의 존재조차 알지 못해야 할 것이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소인이 알아본즉, 그 댁 규수와 태자궁 간에 오간 서신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던 듯싶사옵니다. 못해도 한 해에 수백통은 오가던 서신이 하루아침에 끊긴다면, 전하께서 오히려 이상히 여기시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직접 불러 타이름이 어떠실는지요.”


“이를 말인가? 폐하를 닮아 그 고집스러운 성정이 퍽이나 타일러 지겠구나.”


“하오나...”


“즉위식의 기일을 받은 뒤로 근래 태자가 듣던 제왕 수업의 양이 곱절이다. 눈 떠 잠드는 순간까지 온통 후계 수업에 정진하느라 일각이 아쉬울 시기이거늘 이깟 서신들이 그 아이 눈에나 들어오겠는가? 당분간은 한두 통 아니 온다고 해도 눈치채지 못할 게야. 허니 장 상궁,”


“예, 마마.”


“황성에 머무르는 부의성 사병 두엇을 인태사의 가택 주변에 은밀히 배치시키게. 특별히 날래고, 살수에 능한 자들로.”


“그리 하명하심은...”


“태자가 그토록, ‘어여삐’ 여기는 여인이라지 않더냐.”


“보호를 위함이옵니까?”


“보호라...”



황후의 입가에 비뚜름한 웃음이 걸렸다. 웃전의 꺼림직한 하명에 지밀이 고개를 갸웃하는데.



“바쁜 태자는 황궁을 출타할 짬이 없으니 저절로 그 계집과는 연락이 소원해질 테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 또한 멀어지겠지. 그러니 명심하게, 이 서신은 처음부터 황궁에 당도하질 않은 것이야.”


“분부 받잡겠나이다 황후 마마-.”



♬ Flavor of Life (청향만리) - 나의 나라 OST



아니나 다를까, 근래의 민형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황제를 대신하여 *상참(常參)과 공무를 보고 조강(朝講)에 들어 경전을 익히며 제국의 법령과 조세를 점검하고 각 성에서 올라온 상소문과 탄원서를 검토하는 일들을 도맡아 해야 했다. 그 후엔 주강(晝講)에 들어 법제서를 익히고 체력 단련, 오후엔 병부의 보고를 들은 뒤 금의위 훈련 참관, 변방에서 올라온 사정서 등을 검토, 그 후엔 다시 정 3품 이상의 문신들이 자리한 상참에 참석한 후, 쉬지 않고 또다시 석강(夕講).

* 조회.


제아무리 젊고 건장한 스물한 살의 청년이래도 하루아침에 닥친 살인적 일정을 감당하기엔 다소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는지 태의감에서는 아침저녁으로 기력을 보강하는 탕약을 지어 태자궁으로 올리곤 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위를 물려받는다 하여 어영부영 무늬뿐인 황제가 되는 것이 민형의 성정상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 그는 이를 악물고 제게 주어진 책임들을 다하고자 애쓰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하루의 일과를 다 마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태자궁으로 돌아올 때면, 환복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쓰러져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종종 그 전날 입었던 의대 그대로 다음날 정전에 나선 날이 사흘에 한번 꼴이었으니 더 말해 무엇 할까.



그런 와중에 혹시나 제 정인에게 서신이 와있을까 짬이 나는 대로 서신 더미를 뒤적여보지만 인태사 댁에서 보내온 서신은 단 한 통도 없었다. 온통 종친과 성주들에게서 온 쓸데없는 서신들뿐. 처음 며칠이야 이러니저러니 고민이 많겠지, 무언가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이 있겠지 하고 제 정인을 이해해 보려고 하였으나, 이리 오래도록 서신이 당도하지 않은 것은 처음이라 민형은 이내 마음에 조바심이 났다. 당장에라도 궁을 출타하여 능산현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제 앞에 쌓인 일정과 책임들이, 제 곧은 이성이, 늘 조급해지는 그의 마음을 가로막았다.



그렇다고 걱정 한 자락 없다 말하기엔 역시 무리가 있었다. 거한 일정을 마치고 채 환복하지 못한 민형이 침상에 고꾸라진 채 그대로 의식을 잃고 잠드는 와중에도 손에는 늘 지난날 정인에게서 온 서신 뭉치들을 꼭 쥔 채로 눈을 감았거든.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서신을 써 제 정인에게 보내 보아도, 이번엔 정말 단단히 화가 난 겐지, 답장 한통 오지 않아 깜깜무소식이었다.



이참에 그동안 여인에게 무심했던 못난 사내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놓기라도 한 결심이 선 것인가. 한 자라도 좋으니 제발 무어라 답 좀 해. 민형이 쥔 붓이 종이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마지막 구절을 적는 그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다. 창살 사이로 볕이 얕게 들고, 문밖에선 하루의 시작을 고하는 지밀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자 전하, 기침하셨는지요. 세숫물을 대령하오리까-.”


“오냐. 저, 그보다 천 상궁.”


“예 전하.”


“금일 온 서신은 이것이 다인 것이냐.”


“그러하옵니다.”


“...”


“전하, 북장성의 수비대를 충원하는 일을 논의코자 성주 황보을이 금일 편전에 들었사옵니다. 조강에 드시기 전 그리로 납시라는 황명이옵니다.”


“알았다.”



제게 당도할 여주의 서신은 물론, 그녀에게 제가 쓴 서신조차 제 모친의 처소로 빼돌려지고 있다는 것을 결코 알 턱이 없는 민형은 애타는 제 마음을 어쩔 길이 없이 부지런히 서신을 적어 댈 뿐이었다. 오매불망 제게 절대로 당도하지 않을 서신을 기다리며. 결과적으로, 그가 마지막으로 인태사댁을 방문한 날 이후로는 두 사람 사이에 서신이 한통 오간 게 없던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잠시라도 쉴 틈이 나면 이리 조바심이 나게도 자꾸만 그 찌푸린 낯을 떠올리게 만드는 정인의 행동이 영 서운했다. 그러다 화가 나기도 하고, 또 이내 미안해지기도 하는 민형이었다. 돌아보면 결국은 늘 제가 표현하지 못해 여주가 속상해했던 일들이 더러 두 사람 간에 거리를 만들어내던 기억들뿐이었거든.



무엇보다, 그날 그녀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



‘...조금 더 시간을 주세요. 길진 않을 겁니다. 허나, 막연히 행복할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아요.’



정녕 나와 혼인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것일까. 결정하기까지 그 시일이 오래 걸릴지언정, 끝내는 그녀가 제게 오는 길을 선택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서로를 마음에 둔 세월이 얼마인데.



그저 황제의 명 한마디면, 그녀가 자신의 여인이 되게 만드는 것은 사실 일도 아니었다. 황제 즉위식 날 여주를 제 배필로 맞이하겠다는 조서를 발표할 예정이었지만서도, 제 정인을 그리 막무가내로 끌고 오듯 맞는 건 싫었다.



‘그러니 말씀해 주세요, 진정 그런 연유 때문에 소녀를 비로 맞길 원하세요? 정녕 저와의 혼인이 정치적인 수 때문만은 아니신 거잖아요.’



올곧은 제 정인의 성정을 잘 아니까. 제가 싫다는 건 정녕 때려 죽어도 아니 할 위인인 것도 아니까. 더욱이, 내가 비로 맞고 싶은 이는 태사 인의겸의 여식이 아니라, 오래간 마음에 깊이 품어온 정인 인여주인데.



그런데 그녀 쪽에서 영 답장이 없는 거다. 제 청혼에 대한 답도, 몇 년을 주고받던 안부 인사도, 그 어느 것도. 차라리 원망을 가득 담은 서신이래도 좋으니 무어라 말이라도 좀 전해주면 좋으련만. 답답함에 그의 미간이 펴질 겨를이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길지 않을 거라며. 그러면 내 청혼에 대한 그대의 대답은 결국 거절이야...?



내내 머뭇거리는 민형이 생각을 할 잠깐의 짬도 주지 않을 요량인지 밖에서 또 한 번 지밀이 고한다.



“전하, 폐하께서 조반도 아니 잡숫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속히 가셔야 하옵니다-.”


“...알았다.”



이제 보니 참으로 잔인한 여인이 아닌가. 민형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민형의 사정을 알 길 없는 여주 또한, 제 정인과 완전히 차단되어 더욱이 외로운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





“란영아, 오늘도 서신이 아니 온 게지?”


“예 아씨...”



그 시각, 여주는 규방 마루에 앉아 민형과 답교를 갔던 지난 원소절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 사 신었던 운혜를 든 채 영 풀이 죽은 얼굴로 궁에서 당도한 서신이 없는지 란영에게 묻는다. 어제도 한나절 내내 스무 번은 더 물었던 물음이었다.



“날은 이리 좋은데, 기다리는 소식은 오질 않으니.”


“전하께서 어쩌면 이리도 무심하실까요...? 아씨 서운하시게...”



란영은 제가 다 안타까운지 조심스레 제 주인의 얼굴을 살피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조금 더 기다려보자, 언제고 오겠지.”







달과 낮











“명중이오-!”



시위를 놓기가 무섭게 제노의 활을 벗어난 화살이 과녁의 중앙을 꿰뚫었다. 몇 시간을 그 자리에서 활을 쏘아 댄 탓에 과녁의 홍심이 볼품없이 늘어져 있다. 천무제 이후로는 희영각 출입을 하지 않았다. 공연히 제가 활 쏘는 연습을 하고 있음을 더는 숨길 이유가 없었으니 황자궁의 활터를 이용하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제노가 과녁을 향해 바로 서서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쏠 준비를 한다. 탁 하고 놓자 살이 과녁을 향해 쏜살같이 달아난다.



팍-.



“명중이오-!”



올곧게 박힌 저 화살만큼, 그 여인의 마음도 내게로 곧이 온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텐데. 제노의 머릿속에 낯익은 얼굴 하나가 두둥실 떠오른다. 수백 번을 떠올려도 물리지가 않는 얼굴이었다. 세상의 모든 귀한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소중한 제 정인.



‘아, 아버님이 심부름 시키신 걸 잊었습니다! 이를 어쩌지요 황자님? 부러 오셨는데...’


‘스승님께선 묏자리를 보러 간밤에 경응으로 떠나셨다며.’


‘그, 저... 아유 내 정신 좀 보게. 오늘 어머님이 옷감을 보신다 하여, 소녀가 말동무도 해드릴 겸 함께 장에...’


‘부인은 일각 전에 출타하시던데.’


‘어... 아! 찬방에서 요깃거리 좀 내오겠습니다. 황자님 시장하시지요?’


‘찬방에 일손이 있는데 그대가 어찌 직접 가. 예 있어.’


‘역시 저 그냥...’


‘자꾸 어딜 가.’



여주의 손목을 붙잡는 제노의 손길이 다급했다.



며칠 전, 모친의 가락지를 주며 제 마음을 여주에게 고백한 뒤, 여주는 유달리 제노를 피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을 어려워한 적이 없는 그녀의 태도가 그리 바뀐 것이 확연히 느껴지니 제노는 영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지난 8년간,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자신이었는데 이제는 가장 불편한 이가 되어버렸으니.



그도 그럴 것이, 여주는 줄곧 자신을 벗으로 생각했을 진데, 실은 그동안 저를 여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며 다짜고짜 청혼을 해대니 황망하기도 하고 그 처지가 퍽 난감할 테지.



그래도 그날 그 마음만은 온전히 다 진심이었다. 아비와 형에게 모진 말을 듣고 온 마음이 고단하여 뱉은 충동적인 말이었지만, 언제고 그간 품었던 이 마음을 다 털어놓으며 너를 내 반려로 맞고 싶다 전할 요량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말하지 않으면 그대는 그대로 형님의 손을 잡을 테니.



그대의 마음이 지금 내게 있지 않음을 안다. 허나 그대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찌 살고자 희망하는지는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아. 태자비가 되어 궁 안에 갇힌 듯 사는 삶을, 그대는 결코 원치 않아. 그대가 정녕 원하는 것을 형님은 줄 수 없고, 난 그대에게 줄 수 있어. 그런데 어째서 그런 얼굴로 나를 보는 거야...?



저와 한공간에 있는 상황을 자꾸만 벗어나려는 여주를 붙들고 제노는 눈을 맞추며 부단히도 설득했다. 계속된 종용에도, 그녀는 미안함과 괴로움이 섞인 낯으로 번번이 제노를 외면할 뿐이었다.



여주의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명일 다시 오겠다 말하며 애써 웃는 채로 돌아섰지만 막상 먹먹해져 오는 속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내가 온전히 들어차 있는 그 마음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니,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래도 기다려야지. 기다리는 것에는 이미 이골이 났잖아.



그런데 저 때문에 흔들리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요동치는 여주의 혼란스러운 속을, 가엽게도 제노만 모르는 듯했다. 제노가 시시때때로 눈앞에 나타나 마음을 들쑤시며 뒤흔드는 통에 그녀는 이제 제노가 온다 치면 바쁘다, 곤하다, 아프다는 말로 둘러대 그를 돌려보내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이 고집스런 사내는 아랑곳 않고, 그 비싸다는 얼음을 사가지고 와서는 열을 내려야 한다며 걱정스런 얼굴을 한 채 규방 안에 당당히 발을 들이는 것이 아닌가.



천무제 날 밤, 가락지를 준 이후부터 제노는 더 자주 규방을 찾아오며 갖은 선물 공세로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자 애썼다. 더욱이 자녕궁의 지밀이 드나들며 저와 제노를 맺기 위해 본격적으로 혼사를 진행시키는 통에 여주는 그만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수더분하고 조용한 이인 줄만 알았지 이리 고집이 있는 인사일 줄이야. 미안한 마음과 답답한 마음이 동시에 든 그녀가 결국 모질게 거절했지만, 제노는 다시 온다는 말을 남기고 웃으며 돌아설 뿐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사내로 다가오는 오랜 벗의 행동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노골적이었다.



그런 그녀의 속을 알리 없는 제노도 계속된 거절을 만난 탓에 황자궁으로 돌아온 후부터는 죽 시무룩한 상태였다. 오후 나절 내내 활터를 벗어나지 못했던 건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고. 복잡한 그의 속을 두드리기라도 하듯, 화살이 과녁 위로 묵직하게 꽂혔다.



다시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짐과 동시에 제노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제 손을 벗어난 화살이 한 발 한 발 과녁에 꽂힐 때마다, 오늘 들은 차가운 거절의 말들이 한마디씩 그의 귀에 꽂혀오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팍-.

‘...황자님께 여지를 두었다면 분명 소녀의 잘못일 겁니다. 허나 그를 인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말씀드렸잖아요, 소녀가 마음에 품은 이가 어떤 분인지.’



팍-.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만 보는 법입니다. 눈앞에 현실이 있어도 바로 보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둔 허황만을 보곤 하지요.’



팍-.

‘너무 오래 봐왔기에, 어쩌면 황자님께선 애정과 우정을 구분하지 못하시는 걸지도 몰라요. 지금 그 마음속 그릇된 애정이 황자님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겁니다.’



팍-.

‘그렇게 고집을 부리신 대도 제 마음이 당장 그곳으로 향하진 않습니다...’



팍-.



“...그릇된 애정이 눈을 가린다.”



제노가 입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여주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팍-.



“마음에 담아둔 허황만을 본다고.”



돌연 쏘던 활질을 멈춘 그의 물기 어린 시선이 무더기로 화살이 꽂힌 과녁을 향했다. 아니, 그대는 몰라. 내가 그대를 갖기 위해 무얼 더 할 수 있을 줄 알고.



그때였다. 살을 하나 더 집어 들던 제노의 등 뒤로, 누군가의 날선 목소리가 날아와 그를 향해 비아냥댔다.



“과녁을 아주 부술 기세구나.”


“...”


“그 과녁이 혹시, 나냐.”



민형이었다.



민형은 그 시각, 일과를 마치고 태자궁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때아닌 밤중에 황자궁에서 활 쏘는 소리가 들려오길래 걸음을 이리 틀어 와보니 이리 불편한 아우의 낯이 그를 맞이한 것이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낮에 여주에게서 모진 거절을 듣고 돌아온 지라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데, 그 여인이 마음에 품은 당사자가 나타나 저런 소리를 지껄이니 제노의 속이 깨나 뒤틀렸다.



“이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



태연하고자 애쓰려 제노가 화살을 집어 든다. 그런 아우를 보며 민형이 조소 섞인 대답을 내놓았다.



“이 밤에 그런 얼굴을 하고 활을 쏘는 위인이 할 만한 질문은 아닌 듯싶은데.”


“가벼운 조롱 따위를 하러 오신 건 아닐 텐데요.”


“근래에 스승님 댁 출입이 잦더구나.”


“...”



결국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제노가 눈을 치켜뜬다. 이제는 여주와 관련된 일이라면 그 무엇이든 간에, 저 입에서 나오는 것을 참고 있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그 아이를 손에서 놓으려니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게냐. 허나 서둘러 포기하거라, 오래가면 다치는 것은 결국 네 마음뿐일 것이니.”


“늘 그 여인을 외롭게만 하십니다.”


“...”


“그것을 두고 어찌 연정이라 하겠습니까.”


“그 아이가 너와 어울린다고 생각해?”


“...”


“그 여인의 그릇을, 네가 다 품어 안을 수 있겠느냔 말이다.”



서로를 향해 쏘아 대는 두 황자의 시선이 팽팽했다. 그 시선 사이에 놓여있는 것이 보위든, 혹은 여인이든 간에 둘 중 어느 한쪽도 쉬이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내 일전에 네가 잘 알아듣도록 설명을 했던 듯싶은데. 헌데도 기어이 네 옆자리에 그 여인을 세울 생각을 했단 말이더냐.”


“...”


“감히 일개 황자 따위가, 머지않아 능황의 보위에 오를 태자를 제칠 수 있을 듯싶어? 그 여인에게 네놈이 줄 수 있는 것이 대체 무에 있을까.”


“허면 전하께선 그 여인에게 정녕 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뭐라?”



민형에게서 제 애정을 조롱당한 날 이후부터, 제노는 민형을 절대 형이라 부르지 않았다. 비록 어미는 다르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진정으로 제 형제라 믿었던 이. 그러나 그 마음을 먼저 외면한 것은 민형이었다. 제노의 선의와 애정을 보란 듯이 베어내 버린 건 바로 그였으니까.



“그 여인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 줄은 알고서 이리 당당하시냐 말입니다.”


“...”


“감히 말씀드리옵건데, 전하께서는 결코 주실 수 없을 겁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놓고 다투어야하는 직계와 방계. 둘은 결코 같은 선 안에 있을 수 없다. 어쩌면 두 황자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이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단지 순진했던 아우가 그것을 조금 늦게 알아버린 것일 뿐.



며칠 새 저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 제노를 노려보며 민형이 입술을 짓이겼다. 그 모습을 보던 제노가 먼저 시선을 거두며 차갑게 돌아선다.



“오래 활을 쏘았더니 곤하여 먼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소신의 무례한 행동을 문제 삼으시려거든 익일 하시지요. 그럼.”



고개를 숙여 목례하며 처소 쪽으로 걸어가는 제노의 뒷모습을 민형이 말없이 본다. 되돌릴 수 없는 관계. 서로의 속내를 들켜버린 이상 그 이전의 관계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음을 이제는 두 사람 모두 알아차린 듯했다.



이전까지 제노는 제 형을 단 한 번도 적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 유일하게 저를 아끼는 혈육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민형의 진짜 속마음을 알아차린 후부터 제노의 순수한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갔다.



 기어이 제 손으로 짓눌러야 하는 상대. 기필코 없애야만 하는 정적. 그래야지만 제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음을, 그는 점점 더 실감했다.



‘그들이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울 겝니다.’



조금의 동요도 없는 낯으로 얼마 전 조부는 제노에게 그리 말했다. 부의성의 성주, 귀족, 황후, 황태자, 모두 거사가 진행됨에 따라 축출될 인물들이었다.



거사에 뜻을 함께하겠다는 제 뜻을 전한 제노가 모중손에게 처음으로 들었던 계획은 사병 배치와 살생부 명단이었다.



휘향 금씨와 을주 모씨 가문의 당수, 이하 뜻을 함께하는 귀족들이 은밀히 모인 자리에는 사흔도 함께였다. 조부의 저택에 들어서며 사흔과 마주친 제노가 다소 경직된 상태로 눈인사를 건넸다. 사흔은 제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거사 일은 사월 초하루입니다.’


‘그날은, 아니 됩니다.’



다급한 제노의 목소리에, 곁에서 차를 우리던 사흔의 고개가 순간 들렸다.



‘어째섭니까.’



연유를 말하지 못하는 제노의 낯이 당황감에 멈칫하고, 덩달아 사흔의 낯 또한 순식간에 굳어졌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그의 사정을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은 모르나 그녀는 아는 까닭이었다. 그날은 제가 아는 어떤 여인의 생일이니까. 당연히 제노도 알고 있을.



‘...사월 초하루는,’


‘...’


‘묵주국의 조공행렬이 황성에 도착하는 날입니다. 경계는 삼엄하고 황군은 모두 중무장을 할 테니 때가 좋지 못할 겁니다. 차라리 태자의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는 날은 어떻겠습니까.’


‘즉위식이라면 열병된 황군의 수가 더 많을 진데...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더러 그렇지 않습니다. 조공행렬을 호위하는 때보다 대례 시 황군의 차림이 더욱 가벼울뿐더러,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각지에서 올라오는 귀족들과 이국의 사신단을 호위하느라 항구와 사방문으로 모든 병력이 흩어질 테니 그때 황궁을 치는 것이 오히려 묘수가 됩니다.’



제노의 일리 있는 설득에 모중손과 금정은 만족스럽게 웃었고, 사흔의 낯은 더욱 굳어져만 갔다. 거사의 계획에 관한 논의가 끝이 났을 무렵, 방안에 단둘이 남은 상황에서 제노가 사흔을 향해 물었다.



‘공녀께서도 알고 있었소? 거사에 대해서.’


‘전해 들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사옵니다. 그저 가문의 일이라 들었구요. 세세한 사항에 관해서는 아버님께서 말씀을 아끼신지라.’


‘저들의 경응 인씨 세가에 대한 경계가 심하오. 여주는 공녀에게도 누이 같은 아이라 들었는데, 허면 이러한 사실도 알고 계셨소.’



제노의 눈을 마주한 사흔의 입이 다물렸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놓치지 않은 제노가 경계 짙은 얼굴로 다시 묻는다.



‘말해 보시오. 정녕 그러오?’


‘...지금은 오직 대의만 생각하소서. 큰일을 앞두고 아녀자의 아둔한 의견 따위를 물어 무엇하시겠습니까.’


‘내 그 아이를 마음에 품고 있소.’


‘...’


‘며칠 전엔 혼인을 청하였지.’



잔인한 제노의 말에 사흔이 시선을 내리깔며 동요하지 않고자 애썼다.



‘혼인 동맹에 관해서는 들으셨습니까.’


‘들었소, 해서 이리 분명히 하려는 것이오. 나는 공녀에게는 마음이 없소, 공녀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


‘공녀와 공녀의 가문의 조력을 통해 내가 보위에 오르고 공녀가 후일 황후의 지위에 앉게 된다 해도, 내게 사내로서 그 어떤 마음도 공녀는 바랄 수 없다, 내 그리 말하고 있는 것이오.’


‘...’


‘내 평생에 여인은 그 아이 하나뿐이오. 그러니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내 조부가 제안한 이 계획을 거절하여도 좋소. 그 이유를 핑계 삼아 을주성이 휘향성을 비난할 자격은 없으니.’


‘상관없습니다.’


‘...’


‘그저 허울뿐인 자리래도 소녀는 괜찮습니다. 모르셨겠지만, 이 거사의 계획이 시작되던 순간부터 소녀는 이미 황자님의 여인이었습니다.’


‘정녕 마음에 품지 않은 사내와 혼인을 하겠단 말이오?’


‘황자님께서 어떤 여인을 마음에 품으셨는지는 소녀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리 가엽게 보지 마셔요. 성주의 딸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원치 않는 혼인은 각오해야 했던 일이니까요.’


‘...’


‘또한, 소녀의 마음에 품은 이가 황자님이 아니라는 말씀은 드린 적이 없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오?’


‘본디 휘향의 여인은 부군이 죽으면 따라 죽습니다. 그러니 황자님께서 먼저 제 가문을 배신하시지 않는 한, 제가 황자님을 할퀴는 일은 결단코 없습니다.’


‘...’


‘저와 제 가문을 믿으십시오. 황자님께서 보위에 오르시는 데 휘향 금씨는 전력을 다할 것이옵니다.’



결연한 사흔의 얼굴을 바라보는 제노의 표정이 혼란스러웠다. 그와 반대로, 오로지 제노의 조력자가 되겠다 말하는 사흔의 눈은 너무도 초연했다.



저를 연모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내와의 혼인. 더없이 슬픈 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애원하지 않았다. 제 가문을 배경 삼아 제노의 애정을 갈구하거나 강요하지도 않았다. 노력해서 돌아올 마음이었다면 그리했겠지. 헌데 자그마치 팔 년을 품어온 애정이라니, 애초에 상대가 될 리 없잖아. 가슴에 비수가 되어 박힌 제노의 말을 애써 외면하며 사흔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누군가가 짠 잔인한 판은 그렇게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어쩌면 끝내 모든 이를 불행하게 만들 서사의 시작점이었다.







달과 낮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더니 이내 쏴아 하고 내리기 시작했다. 올봄 들어 내린 여섯 번째의 비였다. 우산도 가져오질 않았는데. 초조한 듯 여주가 제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이대로 정말 전하께서 오지 않으신다면 큰 낭패인데.



[열흘 뒤 묘시 법복사로 가는 길목, 장산골 초입의 처마 밑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일전에 소녀에게 하신 청혼에 대한 대답을 그날 드리려 합니다. 그러니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오소서]



혹여나 바쁜 민형이 서신을 확인하지 못하였을까 같은 내용의 서신을 스물다섯 통이나 보내고, 그도 모자라 태자부에 직접 알현을 요청한다며 사람을 보냈으나 궁에서는 작일 아침까지도 소식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오는 족족 황후전에서 서신을 가로챘음을 여주는 알지 못했으니.



혹여나 소식을 전하는 이가 눈먼 이와 부딪혀 서신을 잃어버렸을까, 궁인들이 미처 빠트린 것은 아닐까, 혹은 전해지는 와중에 서신이 비에 젖어 내용을 확인치 못하신 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생각들로 애써 인내해 보아도, 여전히 답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날이 저물어가는지 하늘이 어둑해져오며 비가 제법 굵어졌다. 빗방울이 처마 밑까지 들이 치자 여주는 제 치마를 한 움큼 끌어 잡으며 보낸 서신이 지금쯤은 민형에게 닿았기를 간절히 바래 볼 뿐이었다. 전에도 제가 보낸 서신에 짓궂은 민형이 답장도 않고 갑작스레 나타나 놀래킨 일이 종종 있었으니까.



“오래 기다리지는 않을 겁니다. 길이 엇갈리지 않도록... 속히 오셔야 해요.”



민형이 있을 황궁 쪽 길을 향해, 여주는 닿지 않을 말을 흐렸다.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엄한 비만 세차게 내렸다.



그 시각, 제노는 *한 시진이 넘도록 남산현 곳곳을 다니며 여주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인태사 댁에 들렀으나 그토록 보고 싶었던 여주의 얼굴은 없고, 자신이 아닌 민형을 보러 황궁엘 갔다고 전하는 란영의 말만 들었다. 수발을 드는 란영도 대동하지 않고 홀로 출타했다, 그것도 제가 아니라 형을 찾으러 갔다는 말에 심기가 불편했지만 그도 잠시, 허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직접 데리고 와야지 하는 생각에 다시 환궁했다. 헌데 태자궁의 지밀에게 사가에서 방문한 객이 어딨느냐 묻자 돌아온 것은 금일 황궁에 그러한 방문은 없었다는 대답뿐이었다.

* 두어 시간.


필시 그 시비 아이가 잘못 안 게지. 혹여 다른 곳에서 민형을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어딘가 좀 이상했다. 태자궁 지밀 상궁의 말에 의하면 *묘시(卯時)부터 *유시(酉時)까지 민형은 줄곧 궁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하여 민형에게 여주의 행방을 아느냐 묻고자 알현을 청했으나 이미 정무를 보기 위해 편전에 들었다는 보고만 들었다.

* 05시~07시.

* 17시~19시.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나 분명 민형과 만나고자 한 시간과 장소가 엇갈렸거나, 혹은 연통이 민형에게 닿질 않아 그를 모르는 여주가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 것이었다. 한참을 달리던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 제노가 한숨과 함께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 시간이 되도록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 거야 대체...”



저자와 남대가 주변, 여주가 갈만한 곳들을 샅샅이 뒤져도 여주의 흔적은커녕 그녀를 닮은 뒷모습조차 보이질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아까부터 한두 방울씩 내리던 비가 조금씩 거세어져 갔다. 스산해진 주변에 날이 제법 추웠다. 제노는 여주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아까부터 저자에서 바삐 다니는 인태사 댁 일꾼들을 자꾸만 마주치는 것을 보니 댁에서 여주가 없어진 것을 안 모양이었다.



주변이 점점 더 캄캄해지고, 어느덧 *해시(亥時)를 알리는 인경이 울려왔다. 저자의 불이 하나 둘 꺼져 가는 사이, 그 시각 여주는 처음 서있던 법복사 처마 밑을 떠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아 있다. 걸터앉아있던 디딤돌 표면은 어느덧 축축해졌다. 으슬으슬 떨려오고 잔기침이 나오는 것이, 제 머리를 짚어보자 미열이 느껴진다.

* 21시~23시.


“...그저 연모한다 말할걸.”



혼자 중얼거리는 여주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왔다. 민형이 익위사를 대동해 규방에 들었던 날, 쌀쌀맞게 군 자신을 책망하는 듯했다. 고민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덥석 수락해 버릴 것을... 내가 그리도 미운가. 그러더니 이내 웅크린 무릎 위로 제 이마를 파묻는다.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몸이 부들댔다.



“그분의 곁이면... 그게 어떤 자리든 행복할 수 있을 거라 말할걸.”



소식을 통 모르니 이리도 마음이 애달파지는구나. 허공 위로, 입김과 함께 전하지 못한 말들이 흩어졌다. 고개 너머 바라본 법복사의 작은 불이 바람과 함께 꺼지는 게 보였다. 이제는 주위가 온통 어둠이었다. 입가에선 짠맛이 났다. 어느덧 자신도 모르는 눈물이 내려 얼굴을 적셔왔다.



“...흑,”



추위에 둔감해진 몸을 좀 더 웅크리며 여주가 정신을 놓지 않으려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저 멀리서부터 웬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



놀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자 누군가가 말을 탄 채 횃불을 들고 이리로 달려오고 있다. 어딘가 익숙한 인영이었다. 다가오는 이는 분명,



“...전하.”



제가 아는 어떤 한 사내. 여주가 오랜 시간 굽혔던 무릎을 펴며 일어서려 하지만 이내 자리에 풀썩 쓰러진다. 열이 올라 어지러운 듯 깊게 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말의 울음소리가 더 가까워지고 이내 멈춰 말에서 내린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횃불로 인해 점점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전하...?”


“그대 지금 예서 뭐하고 있는 거야!!!”



그런데 들려온 목소리는 그녀가 기대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누군가가 다가와 제 어깨를 붙들며 눈을 마주쳐오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이 밤에 여기까지 저를 찾아온 이가 그토록 기다렸던 제 정인이 아닌 벗이라는 것을.



“황자님께서 어떻게...”



저를 붙든 제노의 얼굴을 올려다본 여주가 멈칫한다. 단단히 화가 난 얼굴이었다. 힘겨운 듯 숨을 몰아쉬는 여주가 눈을 깜빡이며 정신을 또렷이 하려 애쓰지만, 대체 어찌 된 일인 지 정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여주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제노의 품에 쓰러진다.



갑자기 앞으로 푹 고꾸라지는 여주를 보고 놀랄 새도 없이 제노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못해도 족히 한나절은 이 비를 다 맞으며 있었을 것이었다. 제 손에 붙들린 얼음장 같은 여주의 몸에, 제노는 당장이라도 기함할 듯했다. 서둘러 의원에게 보여야 한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주를 태우고 달려와 인태사 댁에 당도한 제노가 저택의 대문을 크게 두드렸다. 품에 안긴 여주의 몸이 이제는 불덩이 같았다.



“아씨...! 다들 나와 보셔요, 아씨에요...!”



외실 안을 서성이며 좌불안석이던 란영이 제노와 여주를 발견하고 소리치며 달려온다.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제노의 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여주를 안은 채 내실 규방으로 들자 집안을 지키던 시비들이 놀라 달려 나왔다.



“속히 의원을 부르게, 어서!”


“아이고 우리 아씨, 아씨... 어떡해, 정신 좀 차려 보셔요... 아씨, 아씨이...”



제노와 란영이 부축해 침상에 눕히자 여주가 가쁘게 숨을 내쉬며 헐떡였다. 제노가 식은땀이 흐르는 여주의 이마를 닦으며 상태를 살피는 사이 란영은 서둘러 이불을 두어 겹 덮였다. 수반에 찬물을 가득 담아 규방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의 걸음이 분주했다.



눈도 뜨지 못한 채 붉어진 얼굴로 사경을 헤매는 여주를 보던 제노가 그만 분에 못 이겨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여주를 이지경으로 만든 탓을, 이 사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을 민형에게로 돌렸다. 제 평생에 이렇게까지 화가 치민 적이 없었다. 대관절 형님이 그대에게 대체 뭐라고.



방안을 가득 데운 수발드는 이들의 열기 속에 제노의 눈이 벌겋게 일렁였다. 여주의 손을 붙잡고 있던 그의 손엔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미련하게도 제 몸을 상하게 한 여주에 대한 원망과 민형에 대한 질투, 그리고 분노였다.







바빠 죽겠는데 입덕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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