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ding


카리브 해의 이름 없는 섬에 성대한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돈은 버는 만큼 쓰게 마련이다. 오로지 두 사람과 지인들을 위해 작은 섬의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건물이 지어졌다. 날이 좋지 못 했다면 실내에서 치러졌을 식은 무사히 야외에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바다는 시리게 푸르고, 백사장의 모래는 실크를 밟는 느낌이 들게 했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하객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토니는 거울에 자신의 몸을 한 번 비춰보았다. 페퍼의 조언으로 수염을 밀어 어색했다. 이태리 휴양지에서나 입었던 흰 색 슈트와 구두 역시 촌스럽게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려고 전담 디자이너와 수많은 옷을 입었다 벗었다. 긴장은 되지 않았다. 전에도 그에게 이만한 빅딜은 많았다. 어쨌거나 그는 사막 한 가운데서 미사일을 팔다가 기어 나온 남자였다. 


그가 익숙하게 숨을 가다듬는 사이 거울 너머로 보이는 스티브 로저스는 심각했다. 의자에 걸터앉아 몸을 쭉 빼고 앉은 행색이 결혼을 앞둔 신랑의 기분 좋은 설렘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혼인 신고서를 먼저 내민 건 로저스 였으나 둘의 결혼식에 제일 공을 들인 건 페퍼였고, 다음으로 해피였으며 인공 지능 다음에서야 토니의 이름이 나왔다. 그의 이름은 맨 끝이었다. 둘 다 마찬가지일 테지만, 그야말로 눈을 떠보니 식장 앞에 있는 기분일 것이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거울 너머의 연인을 바라보던 토니가 돌아서서 스티브 앞에 섰다.  


"긴장 돼?"


"음"


그가 가늠해보듯 천천히 손을 뻗어 잡아왔다. 


"손이 차"


"그러게. 누구 손이 더 찬지 모르겠네."


장담했던 것과 달리 아주 편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함께 라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는데"


"결혼식 날 신부를 버리고 도망가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누구하나 원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소리야"


"추억은 좋은 거야"


"나타샤에게 들었어."


토니는 그제야 왜 스티브 로저스가 결혼식이 아니라 장례식에 온 듯 침통한 얼굴을 짓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다시, 결혼식은 야외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흰 천. 섬에 있는 커다란 나뭇잎과 섬에 없는 꽃들도 사치스러운. 춤을 추기 위해 불러온 밴드는 두 사람이 좋아하는 재즈가수였다. 관객은 없었지만 사진작가는 있었다. 애초에 나란히 시청에 서류나 제출하면 그만이었다. 서로에게 충실한 반지도 나누어 끼어 끝이면 좋으련만 세상은 뒤집어 질 예정이었다. 보여주는 그림 구상에 익숙한 건 토니 쪽이었다. 


“대화를 많이 하기로 했잖아”


그는 토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 뭐든지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결혼식을 성대하게 열고 싶어 하는 줄만 알았다. 주는 대로 입었고, 시키는 대로 식장 위를 걷는 연습을 했다.


"이런 얘기 좋아하지도 않고, 조용히 넘어가면 좋잖아. 크게 싸울 일도 아냐"


"속상해"


와중에도 토니는 스티브의 접혔던 옷 부분을 유심히 확인하기 바빴다. 손목과 무릎 목덜미까지.  


"내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야. 당신도 알잖아"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토니는 그의 가슴팍에 걸린 부토니에에 잠깐 코를 묻었다가 잘 세워둔 자신의 부케를 들었다. 해피가 타이밍 좋게 문을 두드리고 얼굴을 들이 밀었다. 나갈게. 곧 결혼할 양반들이... 적당히 하고 얼른 나와요. 


캡틴에게는 그의 이름과 명예는 열렬히 지지하면서도 21세기 그의 행보에는 반대하는 특이한 지지자들이 있었다. 문제는 이들이 팬덤을 자처하면서 보수적이고, 실질적으로 거슬리며, 영향력을 막대하게 행사할 수 있는 지지층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의 존재는 캡틴 아메리카 본인보다도 닉 퓨리와 콜슨, 그리고 토니 스타크의 골칫거리였다. 영원히 숨길 수 없을 거라면 명랑한 게ㅇ1 결혼식을 벌여야 했다. 명암은 분명해야 했고 결코 캡틴 아메리카가 순결이라는 구닥다리 가치를 보여주는 일은 없어야 했다. 혹시 몰라 토니는 손에 화사한 꽃까지 꺾어 들었다. 

나타샤와는 제대로 된 연락조차 나눈 지 오래 되었다. 토니는 그가 페퍼에게 들은 몇 가지 진행사항 만으로도 금세 진실에 도달했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태연한 이가 미심쩍어 언질도 주고 말이다. 애를 먹으라고 한 소리를 아닐 것이다. 바깥에서 행진을 준비하는 선율이 들리기 시작했다. 토니는 일종의 경고라고 봤다. 오늘로 시작인데 그만 좀 숨기라는.   



"그럼 나한테 그 징그러운 서류를 내밀지 말았어야지. 그런데 당신은 후회 없잖아?"



두 사람은 문 앞에서 숨을 가다듬었고, 조금 아플 정도로 힘을 주어 손을 맞잡았다. 진지하게 고개를 내리는 남편을 보고 토니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다름 음악 일 수 있었지만 전통적인 결혼행진곡이었고, 짧은 길이 드레스 없이 걸어도 길게 느껴졌다. 연습을 주도한 사람답게 페퍼 역시 손을 말아 쥐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이런 날까지 비서일 필요는 없노라고 눈웃음을 치는 토니 덕에 그도 어쩔 수 없이 따라서 미소 짓고 말았다. 


스티브가 종종 찾고는 했던 성당의 신부가 주례를 보았으며 서약과 키스가 이어졌다. 우스갯소리로 던진 부케는 나타샤가 받았다. 셰프의 음식은 평이 좋았다. 사진작가는 부지런히 일했다. 캡틴 아메리카와 거대 그룸의 경영자가 찍힐 거라고 짐작했던 예상과 달리 인화된 사진 안에는 뻣뻣한 금발 청년과 조금 쑥스러워하는 신랑이 담겨 있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였으며 성공적인 결과물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의 거실에 걸리기도 했다. 




한껏 춤을 추고 노래가 끝나자 모두들 떠났다. 섬에는 오롯이 둘만 남아 백사장 위를 걸었다. 신발은 벗었고, 열기가 덜 가신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간질였다. 



"나쁘지 않았지?"


"응"



오지 못 하겠다고 한사코 거절했던 제임스 뷰캐넌 반즈를 식장에 앉혀 놓은 사람은 토니였다.


“내가 용서할 주제는 아니었더라도 용납하고 싶지 않았어. 당신 물건이 내 밑으로 들어오는 데 익숙해지는 건 또 어떻고. 아무리 가리지 않고 만났다고 해도 누구한테 넣으라고 말해보긴 처음이었다고.”


“토니”


“알고 있었잖아. 내 자존심 뭉개가며 그쪽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시치미 떼지마”


“......”


“자기 얼굴은 못 보니까... 내가 좋다고 매달렸을 때 어땠는지 읊어주진 않을게”

    

왜 모르겠는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무엇이 잘 안 되고 있는 지 조차 몰라 서로 헤맸다. 고통을 악무는 턱을 바라보아야만 했고, 풀어주는 일조차 조심스러워 얌전히 그의 손가락이 엉덩이에 들락날락거리는 걸 기다렸다가 느리게 행동했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당황했을 때 스티브는 몰아붙였다. 집요하게 추적해 완전히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런 열망이 제 안에 숨어 있는지도 몰랐다. 


“이제 와서 싫었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내가 그 자존심보다 더 당신을 사랑하고 있으니 한 번만 봐달라는 거지. 그리고... 당신은 나처럼 결혼식이 따분하고 지루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었잖아. 전쟁터에서 감히 꿈꿔볼 수 있다면 귀하게 여길 거라고 생각한 순진한 애송이였다면 모를까."


"......"


"해보니 좋았어 나도. 모처럼 어떻게들 사는 지 얼굴도 봤고, 당신은 평소보다 잘 생겼고, 편했고. 속셈은 있었다고 해도 좋았잖아 우리"


한참 모래를 헤치던 걸음이 멈췄다. 달빛이 환했지만 도시의 밤만큼 눈이 부시지는 않았다. 스티브에게는 이 정도의 농도가 익숙했다. 제 연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또렷했다. 


"그래, 결과적으로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하루였어"


과장을 하지 않는 남자가 행복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줄곧 당신도 나와 같은 기분이기를 바랐지"


의지하던 선글라스가 없던 이에게는 맨 눈으로 보기에는 어렴풋한 밤이었다. 렌즈를 낀 눈으로도 스티브의 어떤 부분은 번지듯이 보였다. 표정이 잘 읽히지 않아 살짝 미간이 찌푸려졌다. 특별한 하루였다고 고백하는 이 앞에 내놓을 감상은 아니었던지라 토니는 조금 미안해졌다.


"염치없게도 말이야"


"이쪽 입장에서는 미안할 일도 많다 싶은데 나도 찔리는 구석이 있거든. 비긴 걸로 하자 캡“


우중충한 얘기는 이걸로 마무리 짓는 거야. 파도는 넘실거렸고 토니는 무심코 넘어오는 파도에 충동적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종일 아웅다웅하느라 바빴지만, 모처럼 카메라가 따라 붙지 않는 바닷가였다. 

아까운 짓을 했다. 옷도 벗지 않고 토니가 그대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얼결에 받아든 토니의 흰 색 재킷을 들고 스티브가 나지막이 웃었다. 이내 출렁이는 몸 위로 올라온 토니가 그를 불렀다. 어쩔 수 없이 겉옷만 벗고 따라 들어가니 정작 토니가 보이지 않았다. 살짝 걱정이 되는 찰나 다리를 잡는 손길이 느껴졌고, 충분히 내칠 수 있었으면서도 스티브는 물 아래로 빠져 토니와 시선을 마주했다. 머리카락은 이런저런 모양으로 흐트러졌고 사위는 고요했다. 숨이 달린다고 허우적거릴 때까지 입 맞추었다. 장난이라면 스티브 역시 빠지는 편은 아니었다. 

 

 

*


그의 제안으로 서류를 작성했지만 제출은 하지 않았다. 상징적인 행동이라고 판단한 토니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반지가 사진에 남지 않게 하는 일 정도야 사실 만남을 조금 더 윤택하게 하는 약간의 스릴일 뿐이었다. 이렇듯 완전히 해프닝 인 줄로만 받아들였던 일을 몇 해가 지나고 나서야 진지하게 만들자고 하니 토니는 걱정부터 앞섰었다. 


꼭 필요한 일일까? 이제 와서? 라는 물음에 침묵하는 눈동자가 상처 받았기에 토니는 두 말 않고 따라 나섰다. 황당하지만, 한 해는 생각보다 짧았다. 몇 번의 장기미션이면 금방 동이 나는 시간이었고, 한 사람도 아니고 대리를 세울 수도 없는 구청의 업무 마감 시간은 두 사람에게 너무 일렀던 것이다. 


이별이라는 표현보다 이혼이라는 말이 와 닿을 법한 갈라짐이 있었으며 동거 한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돌이켜보면 쉴 틈 없이 달려왔다. 일하고 연애하고 싸우고 다시 만나고. 


“신혼느낌 나네” 


그러니 함께 욕실에 들어서며 토니가 한 말은 은혼식에 하는 가벼운 농담처럼 뱉어졌다. 누가봐도 해피의 취향인 장미 꽃잎이 뿌려진 침대를 뒤로하고 욕실에서부터 붙어먹는 일이 그러했다. 유명인으로 사는 것만 해도 벅찼던 스티브에게 간혹 토니의 감당할 수 없는 부가 좋다고 느껴지는 날들이 있었다. 통유리로 된 창으로 들이치는 쏟아지는 별들과 밤, 달빛과 넓은 욕조는 그중 하나였다. 


이 육체가 그리워서 애끓는 수음을 하던 날이 생생했다. 스티브의 두터운 손이 조각품을 매만지듯 천천히 덧그렸다. 적당한 미온에 나른해졌던 몸에 불이 붙는 게 느껴졌다. 토니는 몇 번 그 콧대를 미끈하게 훑다가 제 앞에 가져다 놓은 입술 위로 가볍게 입술을 마주 댔다. 필요한 만큼 고개를 틀어주고, 출렁이는 거품 물결 사이에서도 화인이 되어 피부 위에 느껴지는 손길과 키스를 느꼈다. 스티브의 왼팔이 제법 위협적으로 물 밖으로 빠져나와 욕조 뒤쪽을 잡고 몸을 바싹 붙였다. 당장이라도 뚫릴 것 같은 시선이 좋았다. 한결 풀어진 토니의 두 팔은 스티브의 목 뒤를 감쌌다. 


“그냥 넣어도 들어갈 것 같은데?”


깨물려도 변명할 말이 없는 도발이었다. 토니는 세게 잡히는 엉덩이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부지런히 입술을 찾았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몸이 불편했을 텐데도 스티브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둘 다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던 탓에 손가락 끝에 주름이 잡혀 있었고,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특히 소리가 울리는 공간 바로 귀 옆에서 터트리는 토니의 신음을 곧이곧대로 듣고 있어야 했던 스티브는 약을 하면 이런 기분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몽롱하며 유해했고, 당장에 무엇이든 내던지고 싶어지는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게 되는 순간. 




둘은 대충 몸을 추스르고 덜 닦인 몸으로 침대에 쓰러졌다. 시트 위에 샤워가원이 그대로 깔렸고 토니는 이미 맨 몸으로 스티브 위에 올라앉았다. 머리를 잠식하는 열기에서 잠시 벗어난 남편이 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원한다면 오늘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내가 지금 멈추고 싶은 것처럼 보여?”


“자존심 얘기 했었잖아”


그제야 무슨 얘기를 하는 지 알아들었던 토니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로 스티브의 가슴에 쓰러져 한참을 웃느라 바빴는데, 웃음에 흐려지는 말꼬리를 듣고 다시 고꾸라지는 식이었다. 첫날밤의 분위기는 완전히 파토가 난 듯 보였고, 행여 감기에 걸릴까 스티브가 떨리는 몸 위로 부지런히 이불을 옮겼다. 


“지금껏 생각을 못해봤을 뿐, 진심이야”


“그래 알았으니까 그만 웃겨. 내 취향은 고려 안 해?”


“......” 


“싫다는 거 아니니까, 입술 내밀지 마. 당장 내 몸 위에서 천 쪼가리 치우고”


공평하게 돌아가며 박자는 소리 아니었어. 토니가 다시 곧게 허리를 펴고 앉아 단단한 몸 위를 부드럽게 문지르고 깨물었다.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선을 밟은 느낌이 들었던 거지. 이제 나는 완전히 이걸 즐기는 몸이 됐구나. 까놓고 말해서 당신과 헤어진다고 해도 누군가를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이런 거 말이야. 그게 좀 싱숭생숭했다는 거였지. 

스티브는 다시금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었다. 장난스럽게 자신의 유두를 퉁기고 깨물면서 끝나고 나면 어쩌고를 운운하는 입을 보라.      

다 끝난 얘기 뒤척이기 싫어서 모면하려고 과장한 것도 좀 있고. 이 행간은 거짓일 것이다. 제 딴에는 충분히 복잡한 심경이었을 테지. 그의 속내가 서서히 끓고 있는 지는 눈치 채지 못하고 토니의 입술이 도장을 찍어놓기 바빴다. 은근히 허리를 움찔거리며 손을 아래로 내려 성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달링, 마지막 말을 기억해야지. 자존심 따윈 어떻게 되도 좋아. 이게 내 밑을 쑤셔 주는 게 좋다니까? 그야말로 화를 부르는 입술이다. 


원대로 얇은 이불은 빠르게 걷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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