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장, 또 염방존을 만나러 가십니까?



희신광요 합작
셀링(@selling789)님 작업물




평소 밖에 나가길 즐기지 않는 자라 할지라도 오늘 나들이를 가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할 만한 날씨였다. 그랬기에 맹요는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로 빨랫감을 한 아름 안고 길을 나섰다. 그는 고개를 들어 끝 모르고 펼쳐진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는 촉촉한 여린 풀들이 내는 사박사박 소리가 들려왔다. 맹요는 항상 쉴 틈 없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때문에 빨래를 끝내고 나서는 뭘 해야 할지 계속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특별히 빼먹은 일은 없었다. 새가 짹짹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자니 금방 개울이 나타났다.

얼마 전 꽃샘추위가 찾아왔던 것이 무색하게 이제는 완연한 봄이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벗 삼아 맹요는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시원한 감촉이 손을 부드럽게 감싸고, 어깨 너머로 비치는 햇살에 등이 따스해졌다. 훈훈해진 날씨 덕에 앞으로 지내기가 퍽 수월해지겠다고 생각하며 맹요는 손에 힘을 주어 물기를 짜냈다. 탁탁 털어내고 넓게 펼쳐 널자 옷들이 바람결에 너울너울 춤을 췄다. 회색의 옷은 맹요의 것, 새하얀 옷은 희신의 것, 황갈색은 다시 맹요의 것, 맑고 옅은 푸른색은 다시 희신의 것이었다. 빨래를 마친 맹요는 바로 옆에 자리한 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넓고 평평한 그 위에 꽃잎들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택무군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려나.’

맹요는 목 안에서 울리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며 바위 위로 드러누웠다. 따뜻하게 데워진 온도가 등을 감싸오는 것이 꽤나 아늑했다. 손에 남은 물기가 시원하게 마르는 동안 바람은 맹요의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몸 위로 따스하게 내려앉는 햇살과 간간이 시야에 들어오는 빨래들의 너울거림, 모두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완벽했다.

‘이런 날을 그냥 보내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지. 택무군께서 바람이라도 쐬신다면 좋을 텐데...’

잠시만 쉬었다가 일어나려고 했는데, 맹요는 햇살이 옭아매어 버린 양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내심 그도 몸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기분 좋은 게으름에 취해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그런 맹요를 부추기기라도 하듯 새와 개울의 소리가 자장가처럼 귀를 간질였다. 자꾸만 눈앞이 흐릿해지더니 결국 맹요는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화창한 날씨를 눈앞에 두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 법이다. 희신은 맹요에게 멀리 나가지는 못하겠지만 함께 주변을 걷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으려 언제나의 그 개울로 향했다. 빨래가 널려있는 아래에 대뜸 누워있는 모습과 마주해 살짝 당황하기는 했지만, 희신은 곧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날씨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느새 맹요의 옷과 머리카락 위에도 꽃잎이 내려앉아 있었다.

‘정말 아요는 항상 저렇게 자는구나.’

맹요는 어느새 습관대로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저런 곳 위에서 자면 나중에 몸이 쑤시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의 잠든 얼굴이 너무나도 평온해 보여 깨우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희신은 맹요를 내려다보며 바위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자는 사람을 두고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왠지 눈을 뗄 수 없었다. 희신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맹요의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곱게 드리운 것을 보고 있었다. 희신은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소리를 죽여 천천히 바위 위에 누워 보았다. 그는 야외는커녕 실내에서도 침상이 아닌 곳에는 누워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희신도 몸을 누이자마자 맹요가 왜 이곳에 누워 잠들어 버렸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풀과 나무가 바람에 스치는 소리, 눈을 돌리면 시야에 가득 차는 쾌청한 하늘, 그리고 바로 앞에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은인의 얼굴. 주변의 모든 것이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거슬림 하나 없이 완벽했다. 희신은 늘 정자세로 잠에 들었기 때문에 누워서 맹요의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주 누워 있던 적이 한 번 있기는 했지만, 그때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맹요의 몸은 천천히 호흡에 맞춰 작게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팔랑거리며 날아온 꽃잎 하나가 그런 그의 볼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맹요는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지 잠에서 깨려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희신과 처음 지내기 시작했을 때는 작은 소리에도 잘 깼는데, 요즘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듯이 자곤 했다. 희신은 밀려드는 춘기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의식도 자꾸 멀어져 감을 느꼈다.

 


그 뒤의 기억은 흐릿했다. 희신은 지나버린 한 때를 더듬으며 흙먼지와 낙엽이 수북이 올라앉은 바위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광요와 자신이 누워있던 그 바위였다. 가만히 손을 얹어 보자 한기가 스멀스멀 손끝을 타고 기어올랐다. 마른 낙엽은 스치기만 해도 힘없이 바스라졌다. 앙상한 나무들만이 시야를 가득 메우는 쓸쓸한 풍경 속에서 겨우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희신 하나뿐이었다.

희신은 아무도 모르게 훌쩍 운심부지처를 떠나왔다. 숙부님과 망기에게는 마음 정리를 위한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짧은 글만을 남겨두었다. 한동안은 바깥의 혼란을 견딜 수 없어 폐관수련을 하며 틀어박혔지만, 이제는 늘 요동치는 마음을 감당하지 못해 충동적으로 길을 나서고 말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희신 안에서 휘몰아치는 괴로움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목적지 하나 없는 방랑을 떠날 생각이었으나 막상 고소를 떠나니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장소밖에 남지 않았다. 운심부지처와 금린대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그와 보낸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곳이었다. 그곳을 아는 사람은 희신과 광요 단 둘뿐이었다. 희신은 한실에서 끊임없이 지난 시간을 곱씹다 결국 이곳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선문세가니 뭐니 하는 것들과 동떨어진 지역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시골 마을을 지나, 길도 없는 깊은 숲을 가로질러 꼬박 하루를 걸어야 그곳이 위치한 산의 초입이었다. 물론 어검을 한다면 훨씬 짧은 시간에 도착할 수 있지만, 지금의 희신은 그럴 수 없었다. 거대한 산맥과 이어진 그 산은, 자칫 헤맸다가는 상상치도 못한 깊은 곳까지 사람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 산의 골짜기에 그들이 머물렀던 집이 교묘하게 숨어 있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 방금 청소를 마친 것처럼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지만, 두껍게 내려앉은 먼지로 보았을 때 빈집이 된 지 족히 1년은 된 곳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탓에 가구와 세간이 남아있음에도 마치 죽어있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누가 그 집을 짓고 누가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다만 이런 산중에 들어와 산 것이 보통 사연은 아닐 거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리고 희신과 맹요가 그곳을 발견한 것은 천운이었다.

건조한 바람이 희신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아침부터 태양은 기세를 펼치지 못하고 어두운 구름만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새까맣게 죽은 나무둥치와 메마른 가지 사이를 지나는 희신의 머릿속에 비슷한 날씨였던 오래전 그날 밤의 기억이 피어올랐다.


 

이제 겨울은 지나가려나 싶던 차에 독하디독한 꽃샘추위가 잔뜩 성을 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하늘은 대체 무엇에 그리 심통이 나셨는지 사흘째 햇빛을 보여주지 않았다. 서리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온도가 뚝 떨어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들이 지내는 집은 빈말로라도 번듯하다고 할 수 없었기에 매서운 바람은 벽 사이와 문틈을 멋대로 드나들었다.

희신은 서늘한 산속 운심부지처에서 날 때부터 자라왔고, 수련으로 단련된 몸이었기에 심하게 고되지는 않았다. 문제는 맹요였다. 그는 아직 금단도 제대로 맺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잠에 들기는커녕 그저 가만히 있는 것조차 그에겐 고문이었다. 맹요는 가지고 있는 옷을 모두 껴입고 이불을 꽁꽁 둘렀어도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무릎을 감싸 안고 작게 웅크린 맹요를 보며 희신은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걱정스러운 눈빛을 느꼈는지 맹요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희신이 눈썹을 축 늘어뜨린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택무군,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아침이 되면 괜찮아질 겁니다.”

창백한 입술 새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희신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아득바득 혼자 버티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그 말에 속이 상할 지경이었다.

어떻게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일까. 왜 이 공자께서는 춥다, 힘들다 그 한마디를 하지 않으실까. 내가 버젓이 있는데 왜 저리 혼자 옹송그리고 계실까. 손이라도 빌려 달라 하신다면 바로 내어 줄 텐데.

희신은 맹요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맹요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맹요는 그 어떤 일이든 혼자 버티는 것이 익숙했다.

희신은 이제 보기 드물게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대뜸 침상으로 올라앉아 맹요가 두르고 있던 이불을 걷어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맹요가 멍하니 있는 사이 희신은 자신의 장포를 벗어 맹요의 머리끝까지 덮어씌웠다.

“쓰고 계십시오. 제가 입고 있었으니 조금이나마 따뜻할 겁니다.”

“정말 괜찮...”

습관적으로 맹요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다 튀어나오기도 전에 희신은 자신과 맹요를 함께 이불로 감쌌다. 희신이 맹요의 새빨개진 손을 감싸 쥐고 입김을 불어 넣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맹요가 화들짝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희신도 몸을 옮겨 따라붙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손이 얼음장 같습니다.”

사실이었기에 맹요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한참 전부터 감각이 사라진 손은 아무리 움직여 봐도 남의 것처럼 느껴졌다. 희신의 숨결이 자신의 손에 와 닿는 느낌에 맹요는 따뜻함과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오싹함을 느꼈다. 계속 꿈지럭대며 손을 빼내려 했지만 희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단하게 붙잡은 채 몇 번이고 더 숨을 불어넣었다. 맹요의 머릿속에 언제인지 모를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로 소매 한끝만 스쳤는데도 자신의 옷을 보란 듯이 털어내던 그 사람. 얼굴이 흐릿하고 이름도 몰랐지만, 한껏 일그러진 표정과 경멸에 찬 눈빛은 여전히 선명했다. 무수히 많고 하나같이 비슷한 기억들은 그에게 흔한 것이었으나 그것들이 속을 할퀴는 감각은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질 수 없었다.

“택무군... 저 진짜...”

“맹 공자.”

희신은 맹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를 한 번 부를 뿐이었지만 그 안에는 쉽게 깨어지지 않을 단호함이 어려 있었다. 눈만 도로록 굴리던 맹요가 바로 앞의 희신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다시 시선을 떨구고 말았다.

그 뒤로 이어진 희신의 행동에 순간 맹요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고소 남씨의 택무군이 저를 끌어안은 것은 또렷한 현실이었다. 맹요는 파득 놀라며 몸을 굳혔으나 차마 희신을 세게 밀쳐내지는 못했다. 희신은 그런 맹요의 어깨를 감싸고 아직 뻣뻣하게 굳은 두 손을 자신의 몸 가까이로 끌어와 품었다. 틈 없이 맞닿은 곳으로부터 서로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전해져왔다. 온몸에 퍼지는 감각이 전에 느껴본 적 없이 생경했다. 맹요는 저 순수한 호의에 이렇게까지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으나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심장은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았다. 와중에 차게 언 몸은 남의 온기에 기꺼워하며 자꾸만 기대려 들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체온을 나누며 한참을 붙어있자 서서히나마 온기가 피어났다. 그제서야 놀란 몸을 진정시킨 맹요는 가만히 안겨 있던 게 뒤늦게 민망해졌는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택무군, 이제 놔주셔도 괜찮습니다.”

“아직 안됩니다.”

“제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 좀 눕고 싶습니다.”

맹요는 자신의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게만 느껴졌다. 일단 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희신은 두른 팔을 풀지 않고 말없이 몸을 천천히 기울였다. 그대로 마주 안고 누운 모습이 되자 맹요가 버둥거리며 희신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택무군...! 이제 진짜로 괜찮으니까 그만 놔 주세요.”

그 말대로 했다간 애써 만들어 놓은 온기가 달아날 것이 뻔한 데도 맹요는 한사코 벗어나려 했다. 희신은 자신과 붙어 있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듯이 구는 맹요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처음부터 한 침상을 쓰고 있었다. 이 집에서 보낸 첫날 밤부터 부딪힌, 어찌 보면 사소하지만 그들에게는 너무 중대했던 문제에 대한 나름의 답이었다.

 

일단은 안전한 곳에 도착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하나뿐인 침상을 보자마자 당연히 서로를 재울 요량이었던 그들은 밤중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입씨름을 하게 되었다.

“맹 공자, 공자께서 저를 구해주셨는데 제가 어찌 염치없이 침상을 쓸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택무군을 바닥에서 주무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두 사람은 한사코 거절하며 반 시진에 이르도록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이러고 있기 지긋지긋할 정도였지만 둘 다 어물쩍 져 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택무군, 제발 부탁이니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도움을 받은 것은 저인데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이럴 거면 차라리 같이 쓰...”

찬물을 끼얹은 듯 갑자기 말이 뚝 끊겼다. 어쩌다 보니 튀어나온 말이었는데 곱씹어보니 좀 이상했다. 조금 전까지 잘만 말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우물쭈물 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공자, 제 말은... 저희가 계속 이러고 있을 수도 없고...”

“어... 저도 무슨 말씀이셨는지 압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계속 이러고 있을 거면 차라리 같이 쓰자는 결론이 나고 말았다. 물론, 그들은 침상에 눕자마자 조금 전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어떻게든 양보했어야 했다. 두 사람은 서로 어깨를 딱 붙인 채 상대 쪽으로는 고개도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맹요가 슬그머니 돌아누우려 했지만, 침상이 내는 둔탁한 소리에 움찔하며 다시 몸을 돌려놓고 말았다. 속으로 둘 다 사내인데 꺼릴 게 뭐 있냐고 계속 되뇌었지만,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만 그 껄끄러움을 내색하면 분위기가 더 이상해질 것 같았기에 꾹 참고 목석처럼 굳어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상대를 바닥에서 재우는 게 더 고문일 것이라고 애써 위안을 삼으며 눈을 꾹 감았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시작된 동침에 겨우 익숙해지려던 차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침상에 누워 잠만 잘 때의 이야기였다. 희신도 남과의 접촉에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자꾸 자신에게서 떨어지려는 맹요를 놓아주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면 또 몸이 차가워지실 겁니다.”

“하지만 택무군께서 불편하실 텐데...”

“병이라도 드실까 걱정이 되어 이러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희신은 모든 일을 부드럽게 넘어갈 것만 같은데, 의외로 한번 고집을 세우니 도무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고집 하는 것은 맹요도 마찬가지였지만 추위는 사람을 한순간에 지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괜찮다고 웅얼거렸으나 이내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규칙적으로 변한 숨소리가 희신의 목 언저리에서 느껴졌다. 묘한 간지러움에 희신은 괜히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본인 고집으로 맹요를 계속 끌어안고 있었지만 희신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자꾸만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생각을 쫓아내려 희신은 부러 맹요의 옷깃을 더 꼼꼼하게 여며주었다. 찬 공기 탓에 희신은 자신의 목덜미를 타고 귀와 얼굴로 열기가 번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품 안의 작은 몸이 잠을 쫓아내기라도 하는 양 눈을 감아도 그 호흡만이 더 선명해졌다.


 

옷 사이로 스며드는 찬바람이 뼛속에 사무쳤다. 맑지 못했던 머리가 이제 아려오기 시작하자 희신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두통 탓에 희신의 얼굴에선 봄날 같은 미소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남 앞에서는 억지로라도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괜찮아 보이려는 발버둥일 뿐이었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푹 잤던 날은 그저 까마득했기에, 피로는 희신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희신은 하루도 빠짐없이 꿈을 꿨다. 이 산에서 함께하던 시절이 펼쳐지기도 했고, 금린대나 운심부지처일 때도 있었다. 꿈속의 광요는 희신이 기억하는 가장 화사한 모습으로 그를 반겼다. 그러면 희신은 그것이 꿈인 줄도 모르고 기쁨에 벅차올랐다. 그러나 시작이 어떠하든 꿈의 마지막은 늘 같았다. 광요는 희신의 앞에서 슬픔에 잠긴 눈으로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었고, 그런 그에게 희신은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마지막 순간에 너를 믿어주지 못한 것이 그렇게나 서러웠다면 차라리 자신을 때리고 욕하라고, 하다못해 저주를 퍼부어도 좋으니 자신에게 딱 한 마디만 해 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광요는 그런 희신을 눈앞에 두고 그저 눈물만 그렁거렸다. 희신의 손에 들린 삭월은 어느새 광요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광요가 겨우 무어라 입을 달싹였지만 마치 물속에 잠긴 듯 소리 없는 읊조림이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희신은 소스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가 몸부림친 탓에 침상은 늘 엉망이었고 몸은 언제나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희신은 깨어있는 동안에도 꿈이 남긴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도 광요의 마지막 표정이 아른거리는 희신의 앞으로 그들이 머물렀던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18년이라는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았는지 모든 것이 변해있었다. 지붕은 무너지고, 군데군데 부서진 벽에 겨우 붙어있는 문은 바람에 삐걱이고 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두 사람이 떠난 이후 사람의 왕래가 전혀 없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희신과 광요가 사는 동안에는 초라했던 그곳을 고치고, 다듬고, 물건을 채워 넣으며 사람 사는 온기가 돌게 만들어 두었다. 그렇게 살아있는 공간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무색하게 지금은 그저 폐허가 되어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하니 희신은 안 그래도 피곤한 몸에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예상한 모습이지만 역시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달랐다. 희신은 무너진 잔해로 입구가 막힌 부엌 앞에 미동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섰다.

‘정말, 뭐든 도와드리고 싶은데 제가 손을 대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택무군께서 안 계셨더라면 이 산속에서 저 혼자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하지만 맹 공자께서 저를 도와주시느라 이런 아무것도 없는 산속에서 지내시는 것 아닙니까.’

싸늘한 바람 소리와 함께 그 옛날 나누었던 대화가 희신에게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옷과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며 허리춤에 찬 삭월이 흔들거렸다. 또다시 기억에 잠겨 넋을 놓고 있던 희신은 그 움직임에 화들짝 정신을 되찾았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손에 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재촉이라도 하듯이 덜그럭거리는 삭월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희신은 늘 시도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익숙해져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희신은 눈을 질끈 감고 아주 천천히 삭월로 손을 뻗었다. 손이 안쓰러울 정도로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이 차가운 검의 손잡이를 조심스레 감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희신은 숨을 깊게 내쉬며 손을 떼고 말았다. 희신은 그날 이후로 삭월을 다루지 못했다. 잠시만 쥐고 있어도 누군가의 살과 뼈, 그리고 다시 살을 뚫던 그 감각이 팔에서 어깨를 넘어 온몸으로 퍼졌다. 억지로 뽑아 본 적도 있지만, 티 없이 말끔한 날이 희신의 눈에는 누군가의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을 몇 번 겪고 나니 이제는 자신의 패검이 곧 반사적인 공포의 존재였다. 남의 시선 탓에 늘 지니고 다니기는 하지만, 그가 검을 잡는 모습을 계속 보이지 않으면 괜한 오해를 살지도 몰랐다. 하지만 빨리 이 느낌을 떨쳐내야 한다는 부담 때문인지 익숙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일은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 믿으며 애써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희신이 몸을 돌려 바로 옆의 한 칸짜리 방으로 향했다. 그곳은 그래도 들어갈 수 있는 상태였다. 희신은 문턱을 넘고 두 걸음도 안 되어 방 한가운데에 섰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 공간이 기억보다 훨씬 좁다는 것이었다. 혼자 지내라고 해도 좀이 쑤실 것 같이 작디작은데, 어떻게 이곳에서 둘이 지냈던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불편하다는 생각 한번 없이 그저 지내왔을 뿐이었다. 매일 아침 같은 침상 위에서 눈을 뜨고, 살아가기 위한 일을 하고, 가끔 여유로울 때면 책을 읽고 차를 마시며 하루하루를 함께했다. 세간들은 모두 기억 속 그 자리 즈음에서 형태만 간신히 남아 있었다. 희신은 또다시 밀려드는 기억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날도 종종 있던 느긋하고 한가한 밤이었다. 할 일은 모두 끝냈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작은 등잔불 하나만을 두고 차를 마시면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그들 사이에 대화는 꼭 필요하지 않았다. 맹요는 조용히 차를 홀짝이고, 희신은 맹요의 눈이 불빛을 받아 반들반들 빛을 발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에게 고정된 시선을 느꼈는지 맹요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는 희신을 향해 작게 미소 지었지만 미세하게 시선은 어딘지 모를 허공을 맴돌았다.

언젠가부터 희신은 항상 그 모호한 시선을 마주했다. 한 번 마주하기 시작하자 그것이 금세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었다. 이제는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닌 확신이었다.

“아요, 너가 나를 통 봐주지 않는구나.”

희신에게 나쁜 뜻은 없었기에 반쯤 농을 던지듯이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한마디에 찻잔을 기울이던 맹요의 손이 뚝 멈추었다.

“봐주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맹요의 어조가 평소와는 미세하게 달랐다. 희신처럼 남을 살피는 데에 기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희신은 돌아온 반응이 왠지 의미심장하게만 느껴져 공연히 그를 더 떠보았다.

“자꾸 네가 내 눈을 피하는 것처럼 느껴지더구나.”

“제가 눈을 피한다니요.”

희신은 나름대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고 말했는데 맹요의 태도는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불쾌함이 묻어나는 반응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툴게 거짓말을 하는 아이처럼 애써 무언가를 숨기려 드는 기색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니.”

“......”

“처음 만났을 때 너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었는데.”

맹요는 이제 희신의 말마따나 눈을 맞추는 시늉도 내지 못했다. 희신은 자꾸만 쪼그라드는 것처럼 보이는 이 아이가 왜 이럴까 싶으면서도 괜히 작은 고집을 부리고 싶어졌다. 희신은 작은 찻상 너머로 얼굴을 슬쩍 내밀었다. 맹요는 무어라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눈을 내리깔았다. 희신은 그 모습에 짓궂게도 얼굴을 더 들이밀었다. 그저 장난으로 시작한 행동이었다.

“혹 네가 날 보기 싫어하는...”

희신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굳어버리고 말았다. 맹요가 고개를 들자 두 얼굴이 고작 한 뼘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그저 장난이었다고 말하며 이제 그만 둬야 하는데, 막상 가까이에서 눈이 마주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너무나도 멋쩍은데, 누구 하나 멀어지려 하지 않았다.

희신의 가슴 속에 저릿하면서도 간질거리는 느낌이 차올랐다. 언젠가 한 번 느껴본 듯 낯설지는 않았다. 누가 옭아매어 놓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의 시선이 끊어지려 하지 않았다. 희신은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희신을 바라보는 맹요의 눈 속 깊은 곳에는 고요한 일렁임이 있었다. 애써 숨기려 하지만 가진 사람도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 자꾸만 작은 틈을 비집고 스며 나오는 일렁임이었다.

두 얼굴은 누가 먼저 다가왔는지 모르게 코가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그렇게 시선으로 서로를 얽기를 한참이 지나고, 두 사람은 한 치도 안 되는 그 사이를 머뭇거리면서도 아주 천천히 좁혀갔다.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며 희신의 눈이 천천히 감겨들었다. 그에 답하듯 맹요의 눈도 스르륵 감기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희신의 눈앞에는 어둠만이 남았다. 서로의 위에 두 입술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정적마저도 자리를 피한 듯했다. 그들에게는 입술이 타인의 것과 맞닿는 낯선 촉감, 그리고 따뜻한 그 온도만이 느껴졌다. 그들은 그렇게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간간히 입술을 달싹이며 더 깊게 부벼올 뿐이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고 그들은 흐릿한 의식과 함께 천천히 떨어졌다. 희신은 심장이 아프도록 요동치고, 달아오른 얼굴이 홧홧한 것까지 겹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저 몽롱한 눈으로 맹요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맹요는 하얗던 피부를 목부터 귀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역시 안개라도 덧씌워진 듯한 눈으로 희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다.

그들이 한 숨, 두 숨, 호흡을 가다듬을 때마다 머릿속을 뿌옇게 만들었던 열이 조금씩 수그러들었다. 날아갔던 이성이 서서히 제 자리를 찾고, 아직 가까운 둘의 사이를 정적이 메우기 시작했다. 당혹감이 밀려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맹요가 먼저 눈을 피해 시선을 발치로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기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그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공기 속에서 작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희신은 아직 제가 한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맹요의 움직임을 따라 멍하니 눈만 굴리고 있었다.

찻상 한구석에 다기를 정리해 놓은 맹요는 문가로 다가섰다. 그 모습을 본 희신이 번뜩 자리에서 일어나 맹요의 어깨를 잡았다.

“이 밤에 어딜 나가는 것이냐?”

“......”

맹요는 등을 보인 채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당연히 희신은 왜 나가려 하는지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조금 전의 행위 탓에 혼란스러운 사람은 맹요 뿐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맹요가 문으로 손을 뻗자 희신이 앞으로 성큼 끼어들었다.

“차라리 내가 나가 있으마.”

희신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한 걸음을 내딛자 다급한 손길이 느껴졌다. 뒤돌아보니 맹요가 희신의 소매를 차마 당기지도 못하고 손끝으로 조심스레 쥐고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얼굴을 숨긴 그의 손이 작게 떨렸다.

“아직 밤에는 춥습니다.”

맹요가 들릴락 말락 한 작은 소리로 말했다. 희신이 발을 다시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고서야 맹요는 옷자락을 놓아주었다. 고개를 푹 숙인 맹요는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이내 숨만 한 번 들이키고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말 대신 내뱉은 깊은 숨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맹요는 결국 아무 말 없이 뒤돌아 곧장 침상에 올랐다. 그가 몸을 누이자 어김없이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맹요는 침상 끝으로 한껏 붙어 벽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덩그러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희신이 걸음을 옮겨 등잔불을 껐다. 하나 존재하던 빛이 사라지자 남은 것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희신이 몸을 올리자 침상이 또다시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희신은 반대쪽 끄트머리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이 몸을 뉘었다. 침상 밖으로 빠져나온 희신의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분명 등지고 있음에도, 어깨 너머 서로의 존재가 너무나도 선명했다.

희신은 하나뿐인 방이, 하나뿐인 침상이 그날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그 원망은 유달리 고요한 날씨부터 오늘따라 쥐죽은 듯이 구는 풀벌레에게까지 뻗쳤다. 그중 가장 원망스러운 것은 실수인지 무엇인지 모를 일을 저지른 자기 자신이었다. 이상하리만치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맹요의 옆에서 희신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밝고,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로를 대했다. 전날 밤의 일도 두 사람의 입에 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무언의 약속이 되었고, 이후로 단 한 번도 깨지지 않았다.

 


순간 찌르는 듯한 두통이 희신을 기억 밖으로 끄집어냈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주변은 벌써 밤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희신의 어둑한 시야 위로 금성설랑포를 입은 광요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다시 만난 맹요는 곧 금광요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의형제의 연을 맺어 곁에 선 광요에게 이전처럼 희신의 눈을 피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이제 거리낄 게 없다고 내보이듯이 흔들림 없는 눈으로 희신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희신은 읽어낼 수 있었다.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을지라도 그 속의 일렁임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것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마찬가지였다.

잘 알면서도, 희신은 오랜 세월 동안 그것을 들추어내지 않았다. 광요는 소중한 의동생으로서 희신과 함께했고,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애써 묻어두었던 것을 구태여 들쑤시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찾아올 변화가 이 행복을 일그러뜨리지 않을까, 희신은 그것이 두려웠다. 그저 지금처럼만 지낸다면, 평생을 그렇게 보낼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희신이 품었던 바람이자 사실일 것만 같던 영원함은 무참히 부서지고 말았다.

발밑이 기울어지는 듯한 어지러움에 희신은 비틀거리는 몸을 벽에 기댔다. 몸이 마음을 따라가는 것인지, 최근 들어 희신은 전에 없이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꼬박 하루 넘게 제대로 쉬지 못하고, 두통까지 겹치니 현기증이 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희신은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리를 비우려 했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공간이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허름한 집 안 위로 희신이 기억하는 옛 모습이 끊임없이 덧그려졌다. 맹요였던 광요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희신의 머릿속은 언제나 과거의 잔상으로 가득했다. 처음으로 아름다운 금빛 옷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중요하거나 때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함께 밤을 수놓았을 때. 그가 아주 가끔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했을 때. 광요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이 지금의 희신에게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굴레였다. 그리고 뒤늦게야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추억 위로 덧입혀졌다. 부드럽게 미소 짓던 광요의 속이 얼마나 진물을 내며 곪아들고 있었는지 희신은 알지 못했다.

내가 조금 더 그를 도와주었다면, 따뜻한 말이라도 한마디 더 건네주었다면 그가 다른 길로 걸어갈 수 있었을까. 나만이라도 그의 한 조각 진심을 믿어주었다면 그 끝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을까. 늘 생각들이 어지러이 맴돌았으나 희신은 아무런 답도 낼 수 없었다. 그저 방향모를 후회와 대답해 줄 이 없는 질문만의 그의 몫이었다.

이제 버티지 못하겠다는 듯 희신의 몸 이곳저곳이 점점 아우성을 쳤다. 항상 억지로 끌려나오면서도 몸은 언제나 잠에 빠지길 간절히 바랐다. 힘이 계속해서 빠져나가자 희신은 결국 그 자리에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흙먼지투성이 바닥에 옷이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희신이 뻑뻑해진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광요는 희신에게 있어 한 가지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는 은인이자 친우이고, 마음이 쓰이는 동생이자 뜻을 함께하는 종주였다. 그 의미들을 모두 걷어내고 나면, 마지막에는 잔뜩 웅크린 감정 하나만이 남았다. 돌보아 주는 이 없이 가장 깊은 곳에 놓인 그것은 이름조차 가지지 못했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희신은 그것에게 이름을 붙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것이 향해야 할 곳을 잃은 후였다. 더이상 희신의 곁에는 광요가 없었다. 희신은 지난 모든 순간 하나하나, 광요를 사랑하지 않던 적이 없었다.

희신은 이제 원치 않아도 눈이 자꾸만 감겼다. 눈꺼풀이 굳어버리기라도 한 건지 다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젠 너무나도 힘들었다. 희신은 결국 자신을 붙들고 있던 마지막 끈을 놓아버렸다. 수마에게 몸을 내어주기 직전, 희신은 저도 모르게 바람결에 스치듯 작은 미소를 지었다. 꿈에서는 광요를 만날 수 있었다.

그대로 희신은 악몽 속으로 기꺼이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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