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아침은 아무르가 준비했다. 하지만 변변찮은 재료가 없었으므로, 야영하면서 먹는 음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정성을 들인 게 감자를 통째로 쪄서 베이컨, 빵과 함께 먹는 정도였다. 마을에서 얻어온 감자를 다듬으면서 살인마를 보게 되면 알려달라던 촌장을 떠올렸다. 하지만 아주 잠시였을 뿐, 큰 감상은 남기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어쨌든 그들은 죄를 뉘우치지 않은 채 알아서 살 테니, 아무르가 신경 써야 하는 건 노력해봐도 나아지질 않는 변변찮은 아침 식사뿐이었다. 론은 그것도 맛있다며 남김없이 먹어주었지만, 아무르는 맛을 음미할 수 있게 된 론에게 제대로 된 요리를 해주지 못한 게 마냥 아쉬웠다.

 

“ 로니, 아직도 잠이 잘 안 오나요...? 어제 잠을 설친 거 같아서요. ”

 

론은 종종 잠에 잘 들지 못하고는 했다. 정신적으로 날카로워서 불면증에 시달리며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휴식을 허락받았다. 호스코프가 된 후에는 괜찮아진 것 같았으나, 지난밤에 얼핏 깼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어 신경 쓰였다. 염려가 담긴 목소리에 론은 황금빛 눈매를 달처럼 휘며 웃었다.

 

“ 아냐, 나 이제 잘 자는 거 알잖아. 어제는 산책 좀 하고 온 거야. ”

 

아무르는 문득, 죽은 자와 그의 가족이 하룻밤을 함께 보내는 풍습을 떠올렸다. 그런 풍습이 없는 곳에서도, 이미 숨이 멎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며 미련을 털어내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어쩌면 론도, 양부를 떠나보내기 위해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갔던 걸지도 몰랐다. 아무르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나, 들으면 곤란한 말들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아무르는 괜히 더 캐묻지 않았다. 정작 론이 들으면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느냐며 웃었겠지만 말이다.

식사 후에는 삽과 시신을 챙겨 산을 올랐다. 론이 혼자 올 때면 머물렀다던 산장까지 거리가 꽤 되었다. 그런데 산장에 도착할 때까지, 빽빽한 나무 틈에 자그마한 건물이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았을 때 폭은 좁고 가로로 긴 산장은 나무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왜 레쉬가 론에게 이곳으로 도망치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숨기에는 아주 적격인 곳인지라, 이런 곳에 무덤을 만든다면 발견할 사람도 없을 듯했다.

 

“ 제가 도울 게 있을까요...? ”

 

아무르는 가만히 지켜봐야 할지, 아니면 도와야 할지 갈등하며 물었다. 론이 먼저 가자고 하기에 따라오기야 했지만, 정작 직면하고 나니 자신이 나서도 되는 일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론이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공유해주는 건 분명 기쁜 일이지만, 다시금 확인을 받아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 그럼 땅 좀 파줄래? 보존 마법은 제거하고 묻어야 할 거 같거든. ”

 

시신을 묻을 수 있는 깊이로 땅을 파내는 것보다, 상자에 들어 있는 마물의 핵을 꺼내는 일이 더 간편하다. 하지만 심약한 아무르에게 시킬만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르도 구태여 그 일을 대신하겠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고 배려해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땅을 파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만약 겨울에 왔다면 얼어 있는 땅을 두들기느라 더 고생했을 터였다. 반대로 너무 지체했다면 더운 날씨로 땀을 흘렸을 테고 말이다. 날을 참 잘 고른 셈이었다. 그리고 울창한 숲이라 그늘이 져서 해가 머리 위에 솟은 시각인데도 그리 덥지 않았다.

한참을 묵묵히 파 내려가다가, 가슴께까지 가려질 정도가 돼서 멈추었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싶어 고개를 내밀고 물어보려고 했을 때- 론은 뚜껑이 열린 상자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입술은 완만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아직 털어내지 못한 추억을 떠올리는 표정에, 아무르는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 내 이름 말야, 아버지가 지어준 거 알고 있지? ”

“ ... 들은 적은 있어요... ”

 

이번 삶에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며 ‘카셀트로니’가 아닌 ‘론’이라고 부르라고 정정해주었다. 그런데 그건 이번 삶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레쉬가 그의 양부일 때면 론은 늘 자신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겼다.

 

“ 너무 평범하고 흔한 이름이지? 그렇게 살라고 지어주신 거라서 그래. 평범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면서 말야. ”

 

특히나 론의 외모와 삶은 평범하지 않았기에, 더욱 그랬다. 론은 그것이 무척이나 기뻤다. 자신의 행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참으로 낯설면서도, 이미 그 행복을 두 손에 거머쥔 기분이었다. 이미 떠나버린 사람이라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마음이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한 론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가벼우면서도 산뜻한 미소였다. 정성을 들이지 않은 것만 같은 흔한 외자 이름에 그런 뜻이 숨겨져 있다는 건, 줄곧 혼자만 알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론은 양부가 지어준 이름, 양부가 기도했던 행복, 그가 남긴 것을 품고 있는 마음을 혼자서 곱씹는 대신, 아무르에게 공유해주고 있었다. 

 

“ 그분께 감사드려야겠어요. ”

 

론이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니, 아무르도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안락한 집에서 부부로 사는 삶을 선물한 게 레쉬의 영향이라고 생각하니, 이제는 그가 질투가 나지 않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아무르는 론의 사고방식과 성정을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늘 실패했으니 말이다.

 

“ 그래, 두고두고 고마워하라고. ”

 

괜히 죄책감 느끼지 말고. 론은 뒷말은 삼켜 버리고 장난을 치듯 가볍게 말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아무르가 상자 안을 보게 될까 봐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제게는 소중한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지만, 심약한 아무르가 보면 몇백 년은 못 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은 직접 지은 거였지? ”

“ ....... 네,.... 그랬죠,.... ”

“ 이제는 이름 뜻을 알려줄 때도 되지 않았어? 물어볼 때마다 매번 말을 돌리고 안 알려줬잖아. ”

 

처음 아무르의 이름이 가지는 의미를 물어본 것은 가벼운 호기심이었다. 호스코프인데 따로 이름을 짓고, 론에게만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한 적도 더러 있다. 직접 지었다는 이야기까지는 해주었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매번 물어볼 때마다, 지금처럼 말을 흐리면서 시선을 피한 까닭이다. 론은 구태여 알려주지 않는 것을 추궁할 필요까지는 없겠다 싶어 관두고는 했다. 크게 의미를 두고 물어본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비밀을 공유하게 된 지금에 와서도 저리 말을 흐리니 더욱 의아해졌다.

 

“ 나랑 관련된 거야? ”

“ .... 그건, 맞는데요,.... 별, 뜻은 없어요, 그냥... ”

“ 그냥 뭐? 나랑 관련된 거면 아무렇게나 지은 건 아니잖아. ”

 

아무르가 론과 관련된 일에 가볍게 취급했을 리가 없다. 심지어 많은 생을 지나오면서도 늘 같은 이름을 사용해왔으니 말이다. 아무르가 가진 인간의 외형이 론의 취향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바꾸지 않고 유지한 것과 비슷한 이유일 터였다. 아무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마 제 입으로 말하기가 민망했다. 하지만 론은 물러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다.

 

“ 그게,.... 아무리 싫어하는 상대여도, 그렇게 부르다 보면,.... 마음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

“ 하긴, 이름을 부르다 보면 정들기야 하겠지? ”

 

호스코프는 이름이라기보다는 호칭의 의미가 더 크다. 누군가를 사람, 인간, 따위로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름을 짓고 부른다면 거리감도 줄어들고 정들기엔 효과적일 터였다. 론은 그런 의미로 받아들였으나, 아무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의도도 없잖아 있긴 했으나, 그보다 더 큰 의미가 있다.

 

“ 제 이름이,..... 사랑한다는 뜻이라서,...... ”

 

목소리는 점차 옅어지고 어물거렸지만, 단둘이 있는 숲속에서 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제야 이름의 뜻을 듣게 된 론은 왜 그간 아무르가 자신의 이름 뜻을 알려주지 않았는지, 왜 이제야 말해주었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놀라서 벌어졌던 입술이 뺨에 걸릴 정도로 휘어졌다.

 

“ 맙소사, 호스코프시여.... 그렇게 불리면서 안 민망했어? ”

“ ...... ”

 

아무르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새빨개진 얼굴을 숨겼다. 민망한 건 처음뿐이었고, 나중에는 좋기만 했다. 저를 증오하는 순간에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 같아서, 그래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더 부끄럽다. 시신을 묻기 위해 파 놓은 땅인데, 아무래도 자신이 들어가야 할 것만 같았다.

구덩이에 몸을 숨기고는 낯부끄러워하는 걸 보면서 론은 당장이라도 키스를 퍼붓고 싶은 기분에 잠겨 웃고 말았다. 사랑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짓는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름을 알려주지도 않고, 부르지도 말라고 엄포를 놓은 것이다. 정말 론이 아니고서야 불러서도 안 될 이름이었다. 물론 인간으로 살면서도 사용한 이름이니, 이제는 그 의미는 많이 흐려졌겠지만 말이다.

 

“ 이제 어쩔 거야? 다른 사람이 널 부를 때마다 질투하게 생겼잖아. ”

“ 너무 놀리지 말아 주세요,.... ”

“ 놀리다니. 난 진담인데. ”

 

얼굴을 보지 않고 웃고 있는 목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가벼운 농담인지 알만했다. 아무르는 민망함을 잊으려고 괜히 입을 꾹 다물고 몸을 웅크렸다. 론이 숨죽여 웃는 소리를 못 들은 체하면서 말이다. 론은 배려 넘치게도, 아무르가 낯부끄러움을 잊을 때가 되어서야 시신을 마저 묻자며 재촉했다.

아무르는 구덩이에 들어간 채로, 론이 건네는 상자를 받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시신은 여러 상자로 분리되어 있는데도 제법 묵직하게 느껴졌다. 론이 마지막으로 건넨 것은 작은 배지였다. 여러 개의 별을 다양한 각도로 돌려 겹쳐 놓은 듯한 형태였는데, 뒤에는 아무르가 처음 보는 언어가 적혀 있었다.

 

“ 참전 군인이라는 배지래. 뒤에 적힌 건 헤텐어야. ”

 

벤체스터가 대제국으로 자리 잡고 나서, 초대 황제의 이름을 딴 체르트어가 공용어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에서 쓰던 언어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헤텐어는 고나코의 고유 언어로, 레쉬가 나고 자란 곳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쓰는 언어다. 배지 뒤에 헤텐어로 적힌 것은, 레쉬의 이름이었다.


“ 그럼 이건 유품 아닌가요? 이건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요,...? ”

“ 그걸 뭐 얼마나 들여다본다고 가져가? 쓸모도 없을 거고. 참전해서 공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정상적으로 이민한 게 아니라서 혜택을 받지 못할 거라고 그러시던걸. ”

 

애초에 레쉬는 그것을 유품으로 남기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타국에서 신분 증명을 하기 위해 챙긴 물건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렇게 챙겨온 물건 중 남은 게 그것뿐이다 보니, 그가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유품으로 남은 것이다. 론이 미련 없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니 아무르도 더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 상자의 가장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흙을 덮고 땅을 다졌으나 비석은 달리 없었다. 론이라면 미리 준비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여기에 레쉬가 묻혀 있다는 사실은 자신만 알면 충분했다. 그리고 아무르는 유일한 예외였다. 아주 잠시, 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무덤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감정을 전부 파헤치기보다, 그저 흘러가도록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아무르는 땅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퍽 간절하게 눈을 감고 바치는 기도에 론은 피식 웃고 말았다.

 

“ 대체 누구한테 기도하는 거야? 이제는 내가 호스코프인데. ”

“ .... 그래도, 해야 할 거 같아서요. ”

 

나지막이 침묵만을 곱씹는 론의 얼굴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의 슬픔을 함께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장례도 넋을 비는 기도도, 산 사람을 위한 일이다.

 

“ 로니,... 만약 제가 죽으면,... ”

“ 넌 안 죽어. ”

“ 정말 만약에요. 그러면 유품이라도 가지고 있어 주세요. 신체 일부라도 좋으니까요,... ”

 

론이 칼같이 잘라냈음에도 아무르는 말을 끝까지 이어갔다. 레쉬처럼 조각을 내서 상자에 담아두든, 단순히 머리카락을 일부 잘라내든, 어느 형태로든 자신을 기억해주었으면 한다. 가능하면 최대한 선명한 형태로 옆에 남고 싶다. 위안을 얻고자 하는 말에 론은 눈썹을 찡그렸다.

 

“ 그래? 그럼 내가 죽으면 곱게 묻어. 비석도 세우지 말고, 내 물건은 싹 다 버리고, 초상화 끌어안고 살지 마. 알았지? ”

“ ..... ”

 

서로가 원하는 죽음의 형태도, 그 이후조차 너무나도 다르다. 아무르는 앓는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얼어붙고 말았다. 아무르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시체를 곱게 묻는 것까지는 할 수 있겠지만 분명 남들이 밟고 다니지 않도록 보란 듯이 비석을 세울 테고, 그의 유품도 하나도 빠짐없이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의 생전 모습이 담겨 있는 초상화를 보며 그리움을 곱씹을 것이다.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론은 코웃음을 쳤다.


“ 거봐, 너도 생각하기도 싫지? 나라고 아닌 것처럼 말하기는. 그런 말 할 시간에 옆에 있을 생각이나 더 해. 사랑한다는 말이나 해주면 더 좋고. ”

“ 그대를 사랑하기에 한 말이었는 걸요,.... ”

“ 이왕이면 듣기 좋은 말로 하란 거였어. ”

 

론은 기운이 빠진 아무르를 달래주듯이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땅을 파느라 흙먼지가 묻은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하기야, 정말 죽을 것도 아닌데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론이 심술 맞는 말을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론은 죽은 이에 대한 묵념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올라올 때와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다시 언덕 아래로 향했다. 아무르는 그 옆에서 나란히 따라 걸었다.

 

“ ... 내년에 또 올 건가요? ”

“ 아니, 이제 안 올 거야. 남은 물건도 다 처분해야지. ”

 

아무르에게 자신과 관련된 것들을 모두 버리라고 말한 것은, 아무르가 그러기는 어려울 것을 알면서 한 말이기도 했으나- 론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으니, 달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 대체할 필요가 없다. 비록 기억이 흐릿해지는 날이 오더라도, 그것은 결코 상실이 아닌 다른 행복으로 채워지는 일일 테니 가슴 아파할 이유가 없다.

그 단호한 태도에 아무르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만약 레쉬가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으나, 어쨌거나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의 영혼은 이미 다른 육신을 입고 살아가고 있을 테니 터무니없는 상상이었다. 마치, 그의 무덤에 대고 존재하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던 것처럼 말이다.

론은 무척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다. 기쁜 일도, 버거운 일도, 오로지 혼자서 감당하고자 하는 성정을 가졌다. 그런데 드물게 의지했던 사람을 묻는 자리에, 아무르도 데려와 주었다. 그것이 부담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닌, 그만큼이나 아무르에게 마음을 내어주고 있다는 증명과 같은 일임을 이제는 안다. 그렇기에 아무르도 이제는 그의 방식을 존중하기로 했다.

 

 



[Chapter 17. 막간]



189.

 

론은 집을 확인하러 올 때마다 물건을 하나둘 정리해두었다. 그런 탓에 이미 집안 대부분이 텅 비어있었다. 덕분에 정리할 물건은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상자가 있던 선반이나 주방의 가재도구 정도였다. 나무로 만들어진 건 토막을 내어 불태웠고, 쇠로 만들어진 건 챙겨서 다른 마을에서 팔아버리기로 했다. 왜 그렇게까지 깔끔하게 정리하나 물었더니, 혹여나 이곳에 다른 사람이 살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자주 오지 않을수록, 방치되면 방치될수록 집은 금세 망가지는 법이라 덧붙이면서 말이다. 자신이 소유한 것을 독점하고, 남에게 침범당하고 싶어 하지 않는 성정이니 알만했다.

오두막에서 떠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그마저도 론이 어릴 때 자주 놀러 갔다던 연못을 다녀오기도 하고, 산에서 잡아 온 동물을 구워 먹느라 걸린 시간이었다. 그 느긋함에 아무르는 정말 여행이라도 나온 기분이었다. 게다가 무척 다행스럽게도, 떠날 때까지 아무르가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론을 본 마을 사람이 있는데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의아스럽기는 했으나, 좋은 일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에르센에 가면, 그 사람만 돕고 나서 더밍엄으로 가나요? ”

 

고향으로 가던 길에, 에르센에 고나코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 론이 레스카가 곤란하겠다며 도우러 가야겠다면서도, 흥미와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던 것을 떠올리고 물었다.

 

“ 아니, 당분간은 에르센에서 할 게 많아. 더밍엄에 거주 신청도 내야 하고, 상단도 등록해야지. 어디에 개점할지도 보러 다녀야겠는데. 좋은 땅은 다 주인이 있을 테니 돈 좀 써야 할지도 모르겠어. 물건도 문제네.... 첫 품목이 중요한 법인데 뭘 한담? 일단 내 신분으로 보면 마물이나 무기를 매매하는 게 낫긴 할 텐데.... ”

“ ..... 간단한 일이 아니네요. ”

 

론은 머릿속으로만 생각해두었던 일을 죽 늘어놓았다. 상단을 제대로 하려면 에르센에서 하는 게 낫다. 더밍엄에서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크게 이득을 볼 수 없는 시작이다. 상단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는 것도, 물건을 사고파는 것도, 에르센을 거점으로 두는 편이 훨씬 이롭다. 아무르는 듣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정도로 할 일이 많았다. 그 반응에 론은 눈썹을 비죽였다.

 

“ 너도 바빠질 예정인데. 더밍엄에 집을 사려면 거주권을 먼저 얻어야 하거든. 아무르, 마물 관련해서 적당한 논문 하나 써봐. 네가 아는 것만 써도 학회에서는 새로운 인재라고 떠받들어 줄 거야. ”

 

더밍엄에는 마물을 연구하는 학회가 있다. 하지만 대륙의 모든 지식을 모아놓는 더밍엄이니 있는 것이지, 인간을 잡아먹는 생물에 대해서 깊게 알려는 사람이 드물다. 마물의 분포가 그리 높지 않으니 더욱 그랬다. 심지어 마물을 연구하는 학회에서도 용병들에게서 얻은 정보를 간추리고 발표한 것에 가깝다. 그러니 아무르가 가지고 있는 지식 일부만 발표해도 새로운 발견이라며 큰 공적을 얻을 수 있다.

 

“ 논문이 크게 인정받으면 거주권 신청했을 때 가산점을 줄 거야. 거기에 신관 신분까지 더해지면 뭐, 거주권은 이미 딴 셈이지. ”

“ .... 논문이요...? 본 적도 몇 번 없는걸요..., ”

“ 참고할만한 논문을 구해다 줄게. ”

 

론은 첨삭도 해주겠다며 달래주었다. 하지만 아무르는 일이 커진 것만 같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보아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을 쓴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 더밍엄 학회에 낼 논문을 쓰라니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울뿐더러, 대체 어떤 걸 써야 론이 원하는 결과를 보이면서도 인간의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런 고민을 하느라 론의 말을 되짚는 데까지 한참 걸렸다. 그는 마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하고 있었다.

 

“ ... 그대가 논문을 쓴 적도 있나요...? ”

“ 내가 쓴 건 논문이랍시고 제국을 찬양하면서 선동하기 위한 거야. 사교계에서 써먹을 일이 있어서 필명을 따로 만들어서 냈지. ”

 

더밍엄은 여러 이유로 필명을 거짓으로 대는 행위를 용납해주고 있다. 논문을 더밍엄에서 사는 학자들만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국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 또 때로는 아주 예민하게 받아들여질 이슈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쓰이기도 한다. 그럴 때면 학자들은 본인과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필명을 달리했다. 그렇다 보니 누가 썼는지 알게 되더라도 묵언해주는 분위기다.

 

“ 그걸로는 거주권 못 얻어. 오히려 내가 쓴 걸 밝히면 나에 대한 인식만 안 좋아질걸? ”

 

오히려 필명보다 더 까다로운 것이 심사였다. 제국이 다른 나라에 비해 굉장한 발전을 이룩했다는 것은 증명할 수 있지만, 거기에 우연적인 요소보다 운명적인 요소가 컸다고 설파하느라 심사를 여러 번 거쳐 겨우 통과했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 자기, 저번에 더밍엄에 갈 때 널 내세워서 갔잖아. ”

“ 기억해요. 그대가 예전에 사고를 벌였다고 했죠.... ”

“ 아니, 좋게 해결했다니까? ”

 

몇 년 전의 일을 기억해내며 하는 말에 금색 눈이 샐쭉하게 올라갔다. 아무르는 뒤늦게야 당시에 론이 잘 해결했다고 말했음을 기억해냈지만, 달리 긍정할만한 일은 아니었다. 론은 당시 더밍엄에서 마물을 기르는 사람의 집을 일부러 지나쳤다. 비록 공격 수단을 제거했다지만 여전히 인간을 섭취하려는 욕망이 남아 있던 마물은 론을 보고 미친 듯이 달려들었고, 론은 정당방위로 그 마물을 죽였다. 좋게 해결하자는 중재 때문에 적당히 넘어간 모양이지만, 론이 보상을 받지 못한 것만 봐도 일부러 벌인 짓이 아닌지 의심받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 하여튼, 나도 거주권을 얻긴 할 거야. 근데 후원금을 내서 들어갈 생각이라 그래. 그렇게 거주권을 얻으면 그다지 인정해주는 분위기는 아니거든. ”

 

더밍엄이 금전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황금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식을 보존하고 이어가는 데도 결국 돈이 들어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액의 후원금을 내고 신분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받으면 거주권을 내주기도 했다. 입국 심사보다 더 까다롭게 보지만, 갖은 방법을 끌어다 써서 통과할 작정이다.

오히려 더밍엄은 황금 그 자체보다, 돈만 되면 다 해결되는 줄 아는 사람을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무례한 이들에게 데인 자들은 주머니가 묵직하면 머리는 든 게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모든 이들이 그리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대체적인 분위기는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론이 아무리 사람들과 잘 지내려고 노력하더라도, 그러한 인식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론의 가족으로서 아무르를 데려간다면, 더욱이 심할 테고 말이다. 안 그래도 사람을 사귀는데 서투른 아무르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될 터였다.

 

“ 그러니까 나를 전면으로 내세우는 것보다는 너를 내세우는 편이 낫지. 더밍엄도 재능 있는 인재에게는 너그러운 편이니까. 그리고 그 가족에게는 더욱 선처해주는 경향이 있고. 그럼 내가 혹시라도 무슨 일을 벌였을 때 거주권 박탈은 막을 수 있지 않겠어? ”

 

아무르가 바로 그 인재가 될 거라고 확신하는 투였다. 아무르는 낮게 신음했다. 논문을 써야 한다는 거로도 골치가 아픈데,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더욱 고민이 되었다. 론이 부담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여도 아무르가 막막함에 잠겨 있을 때였다. 슬쩍 다가온 주점 직원이 따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먹음직스러운 새구이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론이 이런 음식을 시킨 적이 없어 잘못 가져다주었나 싶어 고개를 들자, 얼굴을 붉힌 점원과 눈이 마주쳤다.

 

“ 저기, 이건 서비스예요. ”

“ 고마워, 잘 먹을게. ”

 

잠시 식사하러 들른 주점에서 서비스라니? 아무르가 당황하는 사이에 론은 직원을 향해 화사하게 웃어주었다. 새초롬해 보이던 눈이 휘어지니 그보다 매혹적일 수가 없었다. 우물쭈물하던 여자는 뺨이 더욱 새빨갛게 붉어지더니 쟁반을 폭 끌어안고 가버렸다. 그 모습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인지라, 아무르는 저 깊은 바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을 것만 같은 기분에 잠겨 들었다.

론은 어느 삶에서나 제법 인기가 많았다. 다만 그것은 사랑스럽고 어여쁘고, 중성적인 외모에서 기반했기에 남자가 다수였다. 호스코프가 된 이후로는 신체가 나이에 어울리는 정도로 성장하여, 중성적인 느낌은 많이 사라졌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한참을 들여다보게 되는 매력은 사라졌으나, 대신 그 자리에는 누가 보아도 또렷하게 청년이면서도 아름답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만드는 화사함이 자리 잡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제법 사람이 많은 마을을 지나쳐갈 때마다, 멀찍이서 홀린 듯이 바라보는 시선이 적잖았다. 남자는 예전만큼 있었고, 또 그 숫자만큼 여자들도 시선을 빼앗길 만큼 매력적이었다. 오히려 여자들이 던지는 시선이 더 순진하고 풋풋한 감정을 담고 있어, 아무르는 기묘한 감각을 곱씹어야 했다. 예전에는 자신도 저렇게 멀찍이서 지켜보는 처지라 특별한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참으로 불쾌했다.

 

“ 결혼식도,... 에르센에서 하는 건 어때요...? ”

 

결혼식을 하고 나면 쌍으로 이루어진 반지를 끼게 될 것이다. 그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아무르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의 손가락에 가느다란 금속을 끼우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추파를 던지더라도 곧 마음을 접고 포기하게 될 터였다.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거나, 론의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것보다는 훨씬 온건한 방법이기도 했다. 충동적으로 꺼낸 말에 론은 얼굴이 환해졌다.

 

“ 그럴까? 네가 번잡한 건 싫어할 거 같아서 더밍엄에서 할까 했는데. 더밍엄 결혼식이 정말 간소하거든. 하지만 에르센에서도 간소하게 할 수 있을 거야. 어떤 게 좋아? 별장 하나 빌려서 사람 몇 명만 초대해서 할까? ”

 

아무르가 직접 결혼식 이야기를 꺼내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벌써 그럴 마음이 들었다니 정말 좋은 일이었다. 질투에 사로잡혀 충동적으로 꺼낸 말에, 론이 신나서 재잘거리니 아무르의 기분은 단숨에 풀렸다. 서비스를 준 음식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오로지 자신과 결혼을 올릴 생각에 사로잡혀서는 들떠 있다. 그런 걸 보니, 정말 괜한 감정에 사로잡혔구나 싶어 안심도 되었다.

 

“ 아니면 단둘이서 할래? 도미실리오에서는 부부끼리만 보내고, 합혼주를 마시는 거로 끝내잖아. 그게 더 좋으려나? ”

“ 그대는 사람 많은 쪽이 좋지 않나요...? ”

“ 그렇기는 하지만, 굳이 없어도 돼. 다 형식적인 거니까. 그리고 내 취향대로 결혼식을 올린 게 대부분이잖아. 마지막은 너한테 맞춰줄게. ”

 

론은 겉치레로 하는 결혼이든, 마음을 확인한 후에 치른 결혼이든, 늘 사치스럽고 북적거리는 쪽을 선호했다. 누구도 어딘가 부족하다는 말을 못 하도록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준비했고, 사치스러운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초대하는 사람도 늘 많았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일면식만 겨우 있는 사람까지, 연회장이 빼곡하게 들어찰 정도였다. 아무르는 매번, 초대한 사람의 인적을 외우느라 결혼 준비는 론에게 다 맡기고는 했다.

물론, 그런 것도 싫지는 않았다. 아무르는 인간을 좋아했다. 다만 관계를 쌓는 게 서툴러서 즐겁게 어울리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람이 진심이 담긴 축하 인사를 건네는 것도 참으로 신기한 기분이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결혼식에서 좀처럼 즐길 줄을 모르고 장식품처럼 서 있는 아무르의 모습을 보아온 론은 차라리 사람이 없는 쪽이 나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아무르는 그 배려가 마냥 고마웠다. 론이 기꺼이 내준 기회가 소중하기도 했다.

 

“ 참, 결혼 드레스도 맞춰야겠네. 달링이 좋아하는 순백색으로. ”

 

다른 여인에게 웃어 준 얼굴이 얼마나 의미가 없고 가벼운 미소에 불과했는지, 지금 아무르를 향한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금빛 눈동자는 따스한 봄날에 녹아내린 꿀처럼 깊은 감정에 절여져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달게 느껴졌다. 그의 머릿속에 누구 생각으로 가득한지, 구태여 묻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덕분에 아무르는 잠시 들었던 질투심을 말끔하게 잊을 수 있었다. 그걸 빤히 알고 있는 론이 속으로 이렇게 단순해서야 대체 자신 말고 누가 데리고 살려나 싶고,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190.


에르센은 다시 와도 적응되지 않는 인파를 자랑했다. 아무르는 남들보다 부쩍 키가 큰 덕분에 멀리 내다보며, 론이 걷기 편하도록 사람이 없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전에는 사람에 치여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쩔쩔맸던 걸 생각하면 매우 큰 변화였다. 


“ 이번에도 그의 저택에서 머무나요? ”

“ 상단 설립하는 것도 그렇고, 레스카에게 도움을 구할 게 많거든. 그럴 거면 거기서 지내는 편이 낫잖아. 그리고 여관보다 훨씬 방음도 잘 되고. ”


은근한 말에 아무르의 창백한 뺨에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그리고 레스카라면 갑자기 찾아가도 싫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길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편지는 물론이며, 미리 언질도 없이 방문하였으나 저택의 고용인들은 이번에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집주인인 레스카가 업무 때문에 나가 있으니 느긋하게 기다리라며 식사와 차를 내주기까지 했다.


“ 어서 오게! 정말로 와주었군! ”


일을 마치고 돌아온 레스카도 반겨주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팔을 벌려 론을 꽉 끌어안았고, 그다음으로 아무르도 끌어안았다. 너무 스스럼없이 다가온 탓에 아무르가 물러나거나 피할 새도 없었다. 바짝 굳어버린 아무르의 등을 팡팡 소리가 나도록 두들겨주고는 웃는 얼굴이 무척 기뻐 보였다.


“ 설마 에르센에 다시 오겠다는 말을 안 믿은 거야? ”

“ 이렇게 금방 올 줄은 몰랐으니 말일세. ”


빈말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라면서, 급작스러운 방문에 기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왔으니 한잔해야 하자는 제안에, 론은 거절했다. 레스카는 웬일이냐는 듯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술을 아무리 퍼마셔도 쓰러지기는커녕, 숙취에 시달리지도 않는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건강이 안 좋아 용병 일은커녕, 여행조차 다니지 못했던 걸 기억해냈다.

 

“ 혹시 아직 몸이 안 좋은가? ”

 

지금은 무척 건강해 보인다. 오히려 이전보다 많이 성장하여 그 나이에 걸맞은 외모가 되었다. 예전에도 아름답기야 했지만, 스물을 넘었다고 보기에는 어린 티가 많이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건장한 청년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나 그런 것이지, 아직은 조심해야 할 때인지도 몰랐다. 슬쩍 묻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 진심이 담긴 염려에 론은 얼른 고개를 내저었다.

 

“ 아냐, 난 아주 건강해. 아무르가 싫어해서 그런 거지. ”

“ 싫어하는 정도는 아니에요,... ”

 

아무르는 괜히 자신 때문에 론이 즐거워하는 일을 못 하는 것이 신경 쓰여 말했음에도,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 눈치였다. 레스카는 이전에 그들이 에르센을 찾아왔을 때, 술집을 전전하며 마시면서도 아무르는 술잔에 입을 대지 않게 신경 썼던 걸 떠올리고는 납득했다. 술집을 가는 건 관두고, 저택에서 가볍게 와인 한잔을 마시는 것으로 대신했다. 

 

“ 자네와 이렇게 조용한 분위기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군. 세상에 안 변하는 게 없어. ”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론은 늘 침묵이 파고들 틈이 없는 자리를 원했다. 누구 하나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 장소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뒤섞여 떠들며 놀고, 그다음 날에는 언제 만났느냐는 듯이 헤어지는 가벼운 인연을 즐겼다. 무거운 현실 이야기는 덮어놓고 오로지 즐거움만을 추구하던 친구가 이제는 와인 한 잔도 입술을 적시는 정도로만 마시고 있으니, 지난 세월이 그에게 얼마나 고단했는지 느껴졌다. 그리고 이제는 가벼운 술자리는 마다할 정도로 안정된 듯하니, 친우로서 정말 기뻐할 일이었다. 불현듯 감상에 젖은 친구의 말에 론은 가볍게 턱을 까딱였다.

 

“ 맞아, 너무 변해서 탈이지. 전쟁 말고는 할 게 없던 고나코인들이 이제는 에르센에 와서 난동을 부린다며? ”

“ 난동이랄 것도 없네, 그들도 세상에 적응할 기회와 시간이 필요한 게지. ”

 

고나코는 벤체스터와 에르센 등, 여러 나라가 붙어 있는 큰 대륙에서 떨어져 있는 섬 지역으로,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거기다 땅을 맞대고 있는 유일한 나라는 철천지원수인 팜부크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전쟁 때문에 개개인은 물론이며 나라 전체에 여유라고는 없었다. 다른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폐쇄적인 경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런데 팜부크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려 전쟁할 이유도 없어졌으니, 갑작스러운 여유에 그들은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는데 아직 익숙하지 않은 셈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관광객들이 만들어내는 문젯거리에 꽤 골치가 아플 텐데도, 레스카는 그들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한 너그러운 이해심 덕에 여전히 론과 친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론도 좋은 의도로 돕고자 나섰다.

 

“ 나 쓸모 많은 용병인 거 알잖아. 도울 거 없어? ”

“ 문제가 많은 건 사실이네만, 왕국 간의 문제라 말일세.... ”

 

눈매를 살짝 찡그리며 말을 흐리는 것이, 더 이어가기 영 곤란하다는 티가 났다. 론은 곤란해하는 레스카를 더 추궁해서 알아낼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곧 관두었다. 왜 말하기 곤란해하는지 본인이 말해주기 전에 눈치챈 까닭이다.

 

“ 벤체스터 황족에게 도움을 받기에는 곤란하다는 거지? 뭐, 이렇게 될 거 예상하긴 했지만. ”

 

생일 연회에 레스카를 비롯해서 용병 신분으로 알고 있던 사람들을 초대하여 그들을 속였음을 밝히고 이해를 구했다. 끝까지 론의 성향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도 몇 있긴 했지만, 레스카는 너그러운 마음씨로 쉽게 이해해준 편이었다. 그런데도 이전처럼 자신의 친우에게 솔직하게 상황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기는 어려워졌다. 다 알면서도 한 일이니,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예상했다고 해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 자네를 못 믿는 건 아닐세. 다만, 이제는 자네가 황족인 걸 알다 보니, 조금 난처하게 됐다네. ”

 

레스카는 변명처럼 덧붙였다. 차라리 몰랐을 때가 나았다. 론이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있을 때, 자신을 알아본 노에드에게 발설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덕분에 노에드가 없는 자리에서는 레스카를 도와주며 이런저런 일에 개입할 수 있었다. 그러면 노에드는 차마 론이 황족이라는 것도 말하지 못한 채로 외부인을 끌어들이지 말라고 말했다. 그런데 레스카는 자신의 친우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며 두둔하니, 노에드만 속이 터지고는 했다. 하지만 이제 레스카도 뻔히 알다 보니, 예전처럼 그럴 수가 없었다.

 

“ 사실 네 골치 아픈 일 좀 덜어주고, 나도 도움 좀 받으려고 했는데 말야. 우리 더밍엄에 거주권을 얻기로 했거든. ”

 

론은 일부러 밝게 말했다. 그에 레스카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둘을 번갈아 보았다. 와인은 입에 대지 않고, 마치 이 자리에 끼어서는 안 될 사람처럼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아무르는 그가 그렇게 놀라는 까닭을 알 수가 없었다.

 

“ 자네가 벤체스터에서 이민은 허락하고 있지 않다는 걸 모를 리는 없고,.... 설마 불법으로 이주하려는 건가? 그럼 위험하지 않겠나? ”

 

그제야 아무르도 레스카가 놀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황족이 다른 나라에 이주하는 건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닐 터였다. 그리고, 황족을 시해하려 했다는 이유로 팜부크를 없애버린 황제라면 론이 이민한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도 떠올린 모양인지 무척 걱정스러워 보였다. 그에 론은 웃음을 터트렸다.

 

“ 아, 내가 설명이 부족했네. 그건 괜한 걱정이야. 내 동생은 아직 모르고 있긴 하지만, 안다고 해도 말리지는 않을 거야.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종종 황실에 찾아가서 얼굴을 비춰줘야겠지만. 그리고 ‘카셀트로니 도미프뢰르’로서 이주하려는 것도 아니야. 에르센에서 활동하던 용병, ‘론’으로 더밍엄 거주권을 얻으려는 거지. ”

 

비록 사실을 덮어두고 하는 셈이지만, 그렇다고 위장 신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신분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완전히 다르고, 론은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선택할 생각이었다.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고 누리려는 욕심에 레스카는 혀를 내둘렀다. 

 

“ 그럼 아무르 경은? 그는 신관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나. ”

 

아무르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레스카가 짚어주었다. 아무르는 이제 호스코프가 아닌 인간이니 인간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비록 제국에 대한 애국심이나 충성심은 찾아보기 힘들고, 사시사철 눈이 쌓인 북부가 고향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더라도 그는 ‘아무르 시브’, 제국민이자 신관이니 말이다. 어느 쪽이든 벤체스터에서 자유롭지 않은 신세다. 하지만 론의 반응은 가볍기만 했다.

 

“ 그건 이미 해결해뒀어. ‘황족을 치료한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자유 신분을 허락한다’고. 신관 직위는 가진 채라서 어디에서 거주하든 시민권은 얻지 못하겠지만 뭐, 더밍엄이 외지인들에게 시민권을 주지도 않을 테고. ”


외지인에게 허락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머물거나 거주하는 것이지, 정치나 대소사에 참여할 수 있는 시민권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니 어디에서든 잘 먹힐 신관의 신분을 유지하는 편이 오히려 나았다. 막힘 없는 대답에 아무르마저 얼이 빠졌다.


“ ... 어느 틈에 했어요? ”

“ 더밍엄으로 이주하기로 했을 때 해뒀지. ”

 

의아해하는 아무르에게 론은 가볍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는 행동이 빠르고 망설임이 없다. 신혼집을 더밍엄으로 거론한 이상, 그 외의 선택지는 없다는 것처럼 추진하는 행동력이 참으로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 그런데 내가 도와줄 게 있을지 모르겠군. ”

“ 있고말고. 총독이 될 분께서 왜 이렇게 겸손을 떠실까. ”

 

그저 용병이라면 모를까, 론은 무려 황제의 비호를 받는 몸이지 않나. 대체 무얼 도울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론의 농담에 레스카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론의 동생이자, 제국의 황제에 나란히 둘 사람이라 자부하는 말에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수 없다.

 

“ 용병인 나에 대한 소개서를 써줬으면 해. 구태여 좋게 적을 필요는 없어. 내가 법을 어기지 않고 살아온 용병이라는 보증 정도면 충분하거든. ”

“ .... 음, 사실이기는 하지. 아슬아슬하게 넘어간 게 꽤 되지만 말일세.... ”

“ 어쨌든 위법은 아니었잖아. ”

 

가볍게 넘겨버리는 태도만 보아도, 론이 요령을 부려 좋게 넘어간 것이라는 걸 아무르도 눈치챌 수 있었다. 예전 일들을 되짚어보던 레스카는 곧 그러겠노라 답해주었다. 정말 아슬하게 넘어간 일들이 많긴 했어도, 도시 내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등의 중범죄에 해당하는 일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개인적으로 운영할 상단도 세우려고 하는데- ”

“ 자네가 상단을? 드디어 내 제안을 진지하게 생각해본 모양이로군! 뭐든 말하게! ”

 

당장 자세를 바로 하며 경청할 태도를 보이는 모습에 론은 눈썹을 틀어 올렸다. 레스카가 위험한 용병 일은 그만두고 상단을 운영해보는 건 어떻냐며 제안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자신이 금전적인 후원을 하고 상단 관리법도 알려줄 테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론은 번거로운 일이 늘어날 것을 눈치채고는 칼같이 잘라냈다. 그런데 한참 지난 지금 와서도 이렇게 반길 줄은 몰랐다.

 

“ 그렇게까지 반길 일이야? ”

“ 당연하지 않나. 자네라면 분명 성공할 거래도. ”

 

론이 때때로 다른 지역에서 겪은 무용담을 늘어놓을 때면, 레스카는 새로운 기회를 보고는 했다. 용병 없이는 다른 지역도 오가기 힘들어하는 평범한 상인들과 달리, 혼자서도 마물을 잡을 수 있는 실력의 론은 정말 거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값어치가 있는 물건을 알아보는 눈도 가지고 있고, 흥정이나 친화력은 두말할 것도 없으며, 미래를 내다보고 대비하면서도 대범함을 갖추고 있다. 상인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은 대부분 갖춘 셈이었다. 

가능성을 일찍이 엿보았던 레스카는 지루해하지 않고 상단 관련 이야기를 들어주고 조언해주었다. 등록을 위한 서류나, 수입할 지역과 물건은 어떻게 선정하면 좋은지, 오 년 전과 달라진 유통법에 대해서도 빠짐없이 짚어주었다. 

아무르도 론과 관련된 일이니 귀담아들으려고 노력했으나, 알아듣지 못하는 것들이 더 많았다.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지만, 여러 왕국의 문화와 엮인 법률과 사사로운 규칙은 단순히 들어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의문을 한번 꺼내 보았다가 대화 흐름이 끊기는 것을 본 뒤로는 입을 다문 채 듣기만 했다. 론의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면, 공부할 게 많아 보였다.

 

“ 상가 등록할 건물을 보러 갈 때 말하게. 내 관할 지역이라면 매수할 때 도움을 줄 수 있을 걸세. ”

“ 그렇게까지 도와준다면야, 거절하지 않을게. ”

 

먼저 부탁한 일은 아니지만, 거절할 까닭이 없었다. 레스카가 매수에 도와준다고 해봐야 나쁜 수를 써서 좋은 자리를 얻어주려는 게 아니라, 외지인에게 사기를 치려는 것을 막아주고 문제가 없는 건물인지 알아봐 주는 것에 가까울 테니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밤은 점점 깊어졌다. 술은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와인잔을 다 비운 사람은 레스카 뿐이었다. 물론 그 한잔 가지고 취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오히려 입조차 대지 않은 아무르만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깊은 잠에 빠졌던 론을 다시 깨울 방법을 찾으면서, 마음 편하게 쉬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론이 깨어난 이후로는, 인간이 된 까닭인지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로감에 나른해지고는 했다. 론이 일부러 일정한 시간이 되면 잠드는 생활에 길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로, 몰려드는 잠을 억지로 밀어냈다.

그래도 이미 길들여진 몸은 따스한 온기를 그리워하며 어둠에 잠겨 들었다. 레스카와 론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덧 푹 감겨버린 눈매에 따스한 손길이 닿으니, 아무르는 본능적으로 그에 더 닿고 싶어 온기에 뺨을 비볐다. 잠에 취해서 부리는 애교에 론은 웃음을 꾹 억누르느라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 오늘은 이만해야겠네. ”

“ 그래, 급하게 한다고 될 일도 아니지 않은가. ”

 

저는 괜찮아요, 겨우 눈을 뜬 아무르는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으나 론은 물론이며 레스카조차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무르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잠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 방은 따로 안내해주지 않아도 되겠지? ”

“ 물론이지. 아, 방은 하나만 쓸게. ”

“ 그러게나. ”

 

그 말에 잠에서 확 깬 듯이, 귀까지 붉어지는 아무르를 보고 레스카는 태연하게 대답해주는 거로 배려해주었다. 연인이라고 소개도 했겠다, 이미 그런 관계라는 건 다 알고 있는 사람인데도 부끄러워하는 모습마저 귀여웠다. 말로 하는 대신에 뺨에 입을 맞추니, 아무르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

가벼운 접촉은 방에 들어간 후에는 농밀하게 바뀌었다. 순식간에 옷을 벗겨내어 훤히 드러난 가슴께에 이를 세워 살짝 깨무는 행동에 아무르는 신음을 삼켰다. 고개를 돌린 방향에 유리 하나 없이 훤히 드러난 창문이 보였기 때문이다.

 

“ ... 로니, 여기도 방음은,.. 안 되지 않나요? ”

 

여관은 방음이 안 된다고 했던 바와 달리, 에르센의 저택도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추운 겨울에 대비하여 바람을 막는 유리창과 두꺼운 커튼까지 걸어놓는 벤체스터와는 달리, 에르센은 겨울에도 크게 춥지 않아 창문을 가로막는 장식이 없다. 아래나 위층이라고 구조가 다르지 않을 테니, 분명 다 들릴 터였다.

 

“ 여관보다는 나아. 그리고 어디 가서 제 주인의 친구들끼리 붙어먹었다고 떠들어댈 사람도 없고. ”

 

비록 레스카에게 형식적인 보고는 하겠지만 말이다. 이전에 찾아왔을 때 하도 오래 괴롭힌 까닭인지, 레스카에게 결국 이야기가 들어가고 말았다. 물론 레스카는 아무르를 배려하여 론에게만 말했다. 그러니 론도 아무르에게 어디서나 시종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 따위는 해주지 않았다.

 

“ 그래서, 싫어? 안 할 거야? ”

“ ... 아뇨. 그건 아니지만요. ”

 

여전히 아무르는 성욕과 거리가 멀다. 하지만 론이 자신을 보며 잡아먹을 듯이 불타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좋다. 아무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부드럽게 입을 맞춰주고, 애무에도 정성을 들여주는 것이 좋았다. 이제는 론이 제게 욕정을 느낀다는 게 기쁘고 안심되는 일이니만큼, 끌어당기는 손길에 기꺼이 허리를 숙였다.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섞여들었다.

 




191.


론은 상단 관련으로 여기저기 알아보고 다녀야겠다며, 아침만 먹고 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이무르는 잠시라도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으려고 입을 꼭 다물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티가 너무 났다.

 

“ 결혼하고 나면 낮에는 떨어져 지내게 될 텐데, 이제 익숙해져야지. ”

 

결혼하면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해야 하는 법인데, 떨어져 있어야 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니. 론의 존재가 삶의 모든 것인 아무르는 삶을 다양한 색으로 채우고자 하는 연인의 성정이 마냥 아쉽다. 차라리 상단 일을 배울까, 갈등하고 있으려니 론은 그 생각을 다 읽은 것처럼 웃으며 뺨에 가볍게 키스해주었다.

 

“ 어차피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텐데 그렇게 불만스러워할 거 있어? 날 기다리는 시간도 즐겨봐. ”

“ .... 그게 가능할까요? 그대 생각만 하게 될 텐데요,... ”

“ 연구를 시작하면 푹 빠질 거면서, 그렇게 예쁘게 말해 봤자 소용없어. ”

 

론은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하면서도 무척 기분이 좋았던지라, 반대쪽 뺨에도 키스해주었다. 아무르는 옆에서 쉼 없이 떠들며 행복을 곱씹게 해주던 사람이 사라지니 세상 모든 게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연신 한숨만 나왔다. 이 공허한 감각을 잊기 위해서라도 연구에 매진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마침 론이 참고할만한 논문을 구해다 준 참이다. 두툼하게 쌓여 있는 논문을 읽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갈 터였다. 하지만 그 집중력은 오래 가지 않아 다른 방향으로 튀고 말았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필기도구를 사러 시장에 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신선하고 품질 좋은 버터, 얕은 물항아리에서 팔딱거리는 해산물과 각종 산지에서 들여온 과일과 채소가 흔하게 널려 있는 시장을 보는 순간 발이 이끌렸다. 그리고 필기구를 사야 한다는 것도 잊고, 식자재를 맘껏 사들이고 말았다. 론이 돌아올 때 즈음에는, 양손 가득 사 온 식자재로 실력을 발휘한 뒤였다.

 

“ 참 호화롭군. 이건 벤체스터 음식인가? ”

 

처음 보는 음식들로 채워진 식탁을 보며 레스카는 혀를 내둘렀다. 어설프게 따라 한 게 아니라는 듯이, 차려진 요리들은 하나같이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다만, 레스카가 보기에는 낯선 음식들이 대부분이었다.

 

“ 벤체스터도 있고, 다른 곳도 있어요. ”

 

론은 벤체스터에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황실에서 실컷 먹었을 터였다. 그렇기에 도미실리오에서 론이 잘 먹던 요리들만 골랐다. 기억이 없던 이전과 달리, 이제는 론이 어떤 음식을 더 좋아하는지 알고 있으니 이전보다 쉬운 일이었다. 도미실리오에서 쓰던 것과 똑같은 재료를 구할 수는 없었지만 대체할 건 많았다. 대륙의 모든 것이 모여드는 에르센이기에 가능했다. 도미실리오에 관해 레스카에게 말할 수는 없으니, 적당히 다른 지역 음식이라고 둘러댔다.

 

“ 요리에 소질이 있는 줄은 몰랐군. 그래도 손님에게 고생을 시킬 수야 없지. 다음부터는 향신료가 적은 음식이 올라올 테니, 너무 고생치 말게. ”

 

아무르가 처음 왔을 때, 이곳의 음식을 먹기 버거워했다. 사실 당시에 레스카는 그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는데, 론이 간이 덜 된 음식을 따로 준비해주는 걸 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때를 떠올린 레스카는 주방장에게 따로 말해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 아니에요, 저 때문에 만든 게 아니라서,.... 당분간 요리는 제가 하고 싶은데요... ”

 

가능하면 풍부하게 식자재를 사들일 수 있을 때 론이 좋아할 만한 요리를 해주고 싶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럭저럭 먹을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한 음식이 아니라, 양질이 훨씬 풍부한 요리들로 말이다. 론이 이제 맛을 느낄 수 있게 되었으니 더 잘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집에서 신세를 지면서 주방을 계속 빌려도 되는 걸지, 다소 민망한 기분이 들어 목소리가 점차 흐려졌다. 그 모습에 레스카는 호탕하게 웃었다.

 

“ 얼마든지 그러게! ”

 

연인이 아닐 때도 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쫓아다녔다. 그런데 이제 남들에게 밝힐 정도로 확실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니, 더 좋은 음식을 해주고 싶어서 안달이 날 만도 했다. 여행하면서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맛없는지 알고 있는 레스카는 흔쾌히 그러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집주인의 허락을 받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을 때, 식당 문이 벌컥 열렸다.

 

“ 시종이 곧바로 식당으로 가보라던데- 이게 다 뭐야? ”

 

시종이 등을 떠밀어서 어쩔 수 없이 왔다는 듯이 말하던 론은 레스카처럼 처음에는 놀랐다가, 아무르가 한 일임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사르르 휘어 웃었다. 론은 그것들이 도미실리오의 요리라는 건 한눈에 알아보았다. 도미실리오는 자극적인 음식은 몸에 좋지 않다며 피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론은 그중에서도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만 찾고는 했다. 지금 에르센의 음식에 비하자면 그마저도 간소한 편이지만, 도미실리오에서는 연회에도 드물게 올라오는 요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론이 자주 찾던 음식들이 식탁에 올라가 있으니, 모를 수가 없다.

 

“ 논문에 집중하라고 두고 갔더니만, 깜찍한 짓을 했네. ”

 

말은 그리하면서도 꿀이 떨어질 것처럼 감정이 듬뿍 묻어나는 눈빛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기뻐하는 티가 나니 아무르도 몽글몽글한 기분에 잠겼다. 당장 키스라도 할 것처럼 애틋한 감정이 오가는 눈빛에 레스카는 둘이 즐거운 식사를 하라며 슬쩍 빠져나가려고 했으나, 론에게 붙잡혔다.

 

“ 우리끼리는 다 먹지도 못해. 봐, 식기도 세 개를 준비해놨잖아. ”

“ 음, 신혼부부 사이에 끼는 것 같아 좀 그렇네만... ”

“ 어서 앉으래도. 아무르가 한 요리가 얼마나 맛있는데. 어디 가서 먹어보지도 못할걸. ”

“ 그 정도는 아니지만,.... 입맛에 맞으면 좋겠네요. ”

 

론은 흥얼거리듯이 말하면서 제일 먼저 자리에 앉았다. 레스카는 아무르가 한 번 더 자리를 권하고 나서야 앉았다. 아닌 게 아니라, 식기도 세 개를 준비해두었을뿐더러 일부러 레스카를 배려하여 에르센의 향신료를 사용한 요리도 준비해두었다. 레스카는 처음 먹어보는 이색적인 음식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쾌하고 정겨운 분위기에 아무르는 황실에서 셋이서 함께 식사할 때면 느끼지 못했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 이렇게 먹으니 또 색다른데. 나중에도 종종 해줘. ”

“ 매일 해줄 수 있어요. ”

 

더밍엄에서도 론을 위해 요리한 적이 있다. 그때도 론은 그릇을 전부 비웠을뿐더러, 무척 맛있다는 칭찬 또한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배려에서 나온 행동이었음을 지금은 알 수 있다. 그때는 또 해달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차이가 아무르를 더욱 기쁘게 만들었다. 많이 먹지는 않더라도, 음미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매일 해도 힘들지 않을 터였다.

 

“ 아니, 그럼 질리고 말 거야. 가끔 해주는 거로 충분해. ”

“ 맞네, 절제와 기다림도 즐거움의 일부지. ”

 

후식으로 준비한 과일과 허브를 넣은 주스를 마시며, 레스카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면서도 론과 이러한 부분에서 공감하게 될 줄 몰랐다고 덧붙였다. 자극을 쫓아다니던 친구가 좋아하는 음식을 가끔만 해달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될 줄이야,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라며 말이다.

 

“ 이건 정말 맛있군. 나중에 레시피를 알려줄 수 있겠나? ”

“ 물론이에요. 별로 어렵지 않아요. ”

 

에르센에도 강한 향신료를 곁들인 음식을 먹은 후에 먹는 주스가 따로 있긴 하지만, 아무르가 해준 주스도 썩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재료가 다양하게 들어간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다른 주스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으깨고, 즙을 내는 과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아무르는 좋은 친구를 위해서라도, 상세히 적은 레시피를 전달해주겠노라 약속했다.


“ 참, 일은 어떻게 됐나? 암시장 쪽을 보러 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

“ 별로 건질 건 없었어. ”


아무르는 그제야 론이 왜 자신을 떼어놓고 갔는지 알 수 있었다. 론이 보러 간 암시장은 이전에 아무르가 노예로 위장하고 들어갔던 근방이었다. 그날을 다시 떠올리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 론이 자신을 속여서 정말 팔아넘기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얼마나 떨었던가. 솔직히 지금도 론이 왜 그러지 않았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 그러고 보니 자네가 사라졌을 때 말일세. ”

 

이전의 날을 되짚어보던 것은 아무르뿐만이 아니었다. 레스카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씰룩거리면서 슬쩍 아무르에게 몸을 기울였다.

 

“ 저 친구가 자네가 간 방향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더군. 얼마나 애타게 쳐다보고 있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가 실연의 고통을 곱씹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 걸세. ”

“ .... 로니가요? ”

 

당시 아무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벗어났음에도 조금도 다정히 대해주지 않는 론에게서 도망치느라 뒤를 돌아볼 새가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때 돌아보았더라면, 충격과 당혹에 어우러진 표정을 짓고 있는 론을 보았더라면, 아마 멀리 가지 못하고 되돌아오고 말았을 것이다. 그 표정을 보지 못했다니, 아쉽고도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혀 되물었다.

 

“ 그래, 그렇다니까. 자네랑 싸운 게 얼마나 티가 났는지 모른다네. ”

“ 난 그런 표정 지은 적 없어! ”

 

셋이서 있는 식당에서 감출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레스카가 하는 말을 다 들은 론은 부쩍 높아진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리 부정해보아야 사실임을 인정하는 바와 다름없기에, 레스카의 웃음이 더 짙어질 뿐이다. 레스카가 왜 론과 친구로 지내는지 알 정도로 장난스러움이 듬뿍 묻은 얼굴이었다.

 

“ 자네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후에도 그렇네. 위험할 걸 알면서도 직접 구하러 가야 한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렸네. 전날에는 자네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지 말아야겠다고 말해 놓고 말일세. ”

“ .... 그런 말을 했어요? ”

“ 어디 그뿐이겠나? 자네가 도망갈 거라고 지레짐작하면서 얼마나 전전긍긍했는지 모르네. 사소한 거로도 기뻐하니 자꾸 해주고 싶어진다고 말하질 않나, 자네 앞이라고 말도 예쁘게 하고 있다고 하질 않나- ”

“ 그 입 좀 닥쳐! ”

 

신이 나서 떠들어대던 레스카는 잔뜩 날카로워진 론의 어투에 입을 다물기는 했으나, 여전히 실실 웃는 채였다. 예전 일을 들먹여도 코웃음을 치며 뻔뻔하게 굴어서 좀체 놀릴 기회가 없던 친구가 잔뜩 성이 나서는 날을 비죽 세우고 있으니 웃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 레스카, 너 결혼하면 두고 봐. 네가 뱃멀미로 종일 난간 붙잡고 있었던 거나, 만취해서 부린 추태를 상세히 말해주고 말 테니까. ”

“ 젊은 시절에 그런 일 한번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

 

숫제 으르렁거리는 듯한, 위협으로 가득한 목소리였으나 레스카는 오히려 껄껄 웃었다. 어떻게 하면 똑같이 엿 먹일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씩씩거리는 모습이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 저 친구는 부끄러우면 저렇게 폭력적으로 군다네. 정말 솔직하지 못한 친구일세. ”

“ 좋아, 난 참을 만큼 참았어. 한마디만 더 하면 앞으로 평생 입 다물고 살게 해줄게. ”

“ 저렇게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하면 진심인 게지. ”

 

론은 이번에는 대꾸하지 않고 슬쩍 흘겨보기만 하고 말았다. 그 모습에 레스카는 이젠 정말 조용히 해야겠군, 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더 떠들었다가는 한 대 얻어맞아 이빨이 부러질 성싶었다. 더 듣고 싶었던 아무르만 아쉽게 되었다.

그래도 에르센에 도착했을 때 즈음에는 이미 마음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니 조금은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레스카에게 듣고 나서야,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행동들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갈등하는 마음에 빠져 있지 않고서야, 때로는 다정했다가 때로는 그리도 못되게 굴 이유가 없기도 했다. 게다가 그렇게 싸우고 도망쳤는데도 구하러 와준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무사히 돌아온 후에도, 크게 다쳤던 다리가 흉이 남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낫는 걸 보고는 안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아무르는 그의 태도에 무척이나 혼란스럽기도 했는데, 어찌 보면 무척 당연한 일이었다. 예전 일을 부끄러워하며 화를 내는 모습을 보니, 아무르도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 혹여나 론에게 보일까, 바닥으로 내리깐 눈동자에는 따스한 빛이 담겨 있었다.





192.


론은 상단의 이름을 정하고, 등록 신청을 내고, 다양한 방식으로 숨겨놓았던 자금을 한 은행에 맡기고, 적당한 해안선 창고를 확보해놓는 등, 며칠 동안 아무르가 논문 몇 줄을 겨우 쓴 것에 비하면 무척이나 빠르게 진행했다. 집중력은 물론이며, 판단을 내리는 것도 빠르고, 망설이거나 뒤돌아보는 법이 없는데 인맥까지 넓으니 더욱 막힘이 없었다. 레스카 또한 자신이 나서서 도와주는 것보다 론이 도와달라고 할 때 손을 거드는 것을 낫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그럼 나는 업무에 시달리고 있겠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주게나. ”

“ 그렇게까지 빠져주려고 하지 않아도 되는데. ”

“ 마음은 고맙네만, 정말 바빠서 그렇네. 내일부터는 점심도 같이하기 어렵겠어. ”

 

쓴웃음을 지으며 거절하는 태도는 둘 사이에 눈치껏 빠져주려는 능청이라기에는 퍽 고단해 보였다. 아무르는 그제야 레스카의 눈 밑에 거뭇하게 피곤이 내려앉은 것이 보였다. 오늘도 어지간히 바빴던 모양이다. 하지만 론은 오히려 더 의아해졌다.

 

“ 그렇게나 바쁘단 말야? 네 아래 사람들은 다 뭐하고? ”

“ 내가 직접 처리해야 하는 일이 좀 생겼네. 많지는 않은데, 하나같이 예민한 안건이라서 말일세. ”

“ 총독이 너한테 외부 일은 잘 안 맡기잖아. 아- 내가 에르센에 온 걸 알아서 그런 거구나? ”

 

레스카의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손도 빌릴 수 없는 일이라면, 관할 지역 외의 일이다. 그의 아버지, 노에드는 에르센의 총독이니 얼마든지 일을 맡길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여태껏 관할 지역의 일만 맡겨 온 것을 생각하자면, 왜 갑자기 레스카를 바쁘게 만들었는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론의 추측이 얼마나 예리했던지, 레스카는 쉽사리 부정하지도 못했다.

 

“ 네 나이가 몇인데 친구도 마음대로 어울리지도 못하게 방해해? 정말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피곤하시겠어. ”

“ 자네에 대해 오해하고 계신 모양이니 이해해주게, 언젠가 오해를 풀 기회가 있을 걸세. ”

 

실상 노에드가 론을 싫어하는 데 있어 오해랄 것도 없다. 자기 아들에게 정체를 숨기고 접근해서는 친구로 지내고 있으니, 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수 없어 경계했다. 그런데 론은 그렇게 날을 세우는 노에드 앞에서 빈정거리고 신경을 긁어놨으니, 제 아들에게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맡겨서라도 어울릴 시간이 없게 만드는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친구 앞에서 그 부모를 헐뜯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론은 혀만 차고 말았다.

레스카는 그저 둘 사이에서 빠지려고 말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아침 일찍 나가 저녁에나 돌아왔다. 그 덕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르는 점심에는 론과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둘이서 함께 살게 되면 저녁에 어떤 생활을 하게 될지 미리 경험해보기에 충분한 나날이었다. 론은 상단 일을 처리하고 다니면서도 점심은 꼭 돌아와서 아무르와 함께했고, 다시 저녁까지 바쁘게 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아무르는 논문에 집중했다. 마물이라는 넓은 영역 안에서 어떤 주제를 잡고, 어떤 식으로 논문을 써야 하는지 공부하는 건 시간과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인간들이 얼마나 지식을 쌓았는지 파악하고, 어떻게 해야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기에, 단순히 알고 있는 내용을 되짚는 일보다 더욱 까다로웠다. 

그러면서도 론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식사도 준비했다. 말린 육포나 싹이 나기 직전의 감자가 아닌, 풍부한 식자재를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론이 좋아하는 음식을 원 없이 만들 작정이었다.

 

“ 설마 날 살찌우려고 이러는 건 아니지? ”

“ 그렇게 먹어서 살이 찌긴 하겠나? 키가 크려면 좀 더 들어야지. ”

“ 키는 무슨! 고작 몇 살 많다고 누굴 애 취급이야? ”


저녁이 돼서야 돌아온 레스카까지, 셋이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루가 금세 저물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서인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 곧 봄축제라던데, 둘이서 데이트라도 하는 건 어떤가? ”

“ 사람이 너무 많을 거 같은데. 에르센 봄 축제는 늘 난리잖아. ”


론은 계속 밖으로 나돌았고, 시끌벅적한 일에 관심이 많으므로 곧 봄축제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하는 말에 아무르는 얼른 식사를 멈추었다.


“ 저는 좋아요. ”


론이 먼저 권하지 않은 이유를 아무르도 알았다. 사람이 많고 번잡하니, 아무르가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고 애초에 말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하루 이틀쯤 축제를 즐기는 거야 뭐 어려운 일이라고 말이다.


“ 저는 그대와 함께 다니는 거라면 어디든 좋아요. ”


그게 파도가 치는 바다든, 숨 막히는 제국이든, 사람이 발 디딜 틈 없이 없는 곳이든, 론이 있다면 다 족했다. 게다가 이제 론이 자신을 바라봐주는 상황이니, 즐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정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것이 표정에 드러나 론은 그제야 흠, 하고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 그래, 가끔 숨도 돌리고 그래야지. ”


그러게 한번 말이라도 해보라 그러지 않았나, 레스카가 론에게 슬쩍 속삭였다. 론은 제 얄미운, 그리고 동시에 고마운 친구에게 눈을 한번 흘겨주고는 말았다. 평민들도 편하게 즐기기 위한 축제이니만큼, 격식도 없고 정해진 것도 없었다. 대신 론은 평소와 달리 아침부터 분주히 옷을 골랐다.

벤체스터 여인들이 주로 입는 드레스로, 목선부터 발목까지 덮고 머리는 깔끔하게 틀어 올려 단정하고도 우아했다. 잿빛 하늘에 서 있으면 우중충할 정도로 칙칙하고 어두운 색감인데도, 론이 입으니 퍽 고상해 보였다.

새삼스럽게도, 아무르는 자신의 연인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금 깨달았다. 정말 안 어울리는 옷이 없었다.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인데도, 론을 위해 만든 것처럼 말이다.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아무르는 론이 세 번쯤 부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 그 많은 옷을 언제 산 거예요? ”

“ 어제 미리 사 왔지. 맞추기에는 너무 늦었으니까. ”


달링 몫도 있어, 론이 손으로 가리킨 방향에는 론이 입어본 옷과 딱 한 세트인 남성복이 가득했다. 아무르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안 입어볼 거야? ”

“ .... 입어봐야 할까요? 그대에게 맞추면 될 거 같은데요.... ”

“ 그래, 그럴 거 같았어. ”


론은 알면서도 한번 물어나 봤다면서 웃었다. 가벼운 웃음이었기에 아무르 또한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연회가 아니라 가벼운 축제라, 자잘하게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 그래서, 어떤 게 나아? ”

“ ... 고르기 어렵네요..., 전부 잘 어울리는걸요. ”


아무르는 최선을 다해 대답했지만, 론이 만족스러워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실로 그랬다. 굽어지는 머리칼을 틀어 올리고 단추를 하나도 빠짐없이 맞물린 단정한 옷부터 시작해서,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화사한 드레스나, 목선부터 가슴팍까지 그대로 드러나는 가벼운 옷까지, 무엇하나 어울리지 않은 게 없었으니 말이다.


“ 흠, 두 번째랑 세 번째가 제일 나았던 거 같은데. 다시 입고 나올 테니까 잘 봐봐. ”


론은 다시 파티션 너머로 향했다. 하지만 아무르는 다시 본다고 해서 달라질 거 같지 않았다. 꼭 하나만 골라야 한다니, 너무 어려운 과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대부분은 에르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벼운 복장으로, 소매와 바짓단이 넉넉하여 더운 날씨에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는 의복이었다. 물론, 흔히들 입고 다니는 것과 다르게 원단이 고급스러우며 섬세한 자수가 들어가긴 했지만 크게 눈길을 사로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 ... 두 번째요. ”

“ 자기, 예쁜 걸 골라달라니까. ”


두 번째로 입은 건 셔츠와 바지로 이루어져 살갗을 드러낸 부분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넉넉한 소매 아래로 손목이 얼핏 보이는 수준이었다. 


“ ... 그래도 세 번째는 아니에요. ”


반면 세 번째는 튜닉이었는데, 하늘하늘한 천이 발목까지 내려오고, 가슴골이 드러날 정도로 깊게 파여 있는 데다가 소매도 없었다. 덕분에 어깨부터 손목까지 하얀 피부가 뽀얗게 드러났다. 그걸 보며 눈가를 찡그리고 있는 아무르의 표정에, 론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 알았어, 알았어. 세 번째 입었다간 제대로 데이트도 못 하겠네. ”


지나가다가 힐끗 본 행인들까지 질투하느라 바쁠 게 뻔했다. 아무르는 민망해서 뺨을 붉히면서도 고개를 가로젓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론은 다시금 깔깔 소리 내어 웃고는, 아무르의 옷도 골라주었다. 론과 엇비슷하고 세부 장식이 깔끔하며 늘어진 곳 없이 잘 맞는 복장이었다. 론은 마지막으로 아무르의 머리를 뒤로 넘겨 분홍색 리본으로 묶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반면 론은 머리를 편하게 풀어 놓은 채였다. 꽃잎처럼 하늘거리며 굽어지는 머리칼이라, 그냥 풀어놓기만 해도 치장의 일부였다.





193. 


거리는 활기로 들떠 있었다. 다들 편하고 격식 없지만, 깨끗하고 단정한 차림을 하고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거리를 돌아다녔다. 거리 곳곳은 화사한 색으로 물들어 있고, 갓 핀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각종 악기로 화음을 맞추며 노래하는 이들, 그 앞에서 춤을 추고 손뼉 치는 사람들, 가벼운 음식과 음료를 파는 매대들 앞에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며 떠드는 사람들까지. 누구라도 미소를 짓게 될만한 광경으로 가득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제 인생에 봄날이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르는 까마득한 기분으로 주변을 구경했다. 


“ 이따가 행렬도 있다던데,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군것질부터 먼저 할까. ”


론은 자연스럽게 아무르의 허리를 감싸 당겼다. 아무르가 멀거니 바라보던 것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었다. 깊은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에 아무르도 자연스레 웃음을 머금었다. 인파를 쉽게 해치고 들어선 론은 사람이 많은 노점을 골랐다. 그곳에서는 과일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붉은 양념을 묻혀 팔고 있었다. 론은 나무를 투박하게 잘라 만든 꼬챙이로 과일 한 조각을 집어 아무르에게 내밀었다. 아무르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론이 어서, 하고 재촉하니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려 받아먹었다. 다소 긴장하면서 씹은 음식은 보기와는 다르게 달콤했다. 매운 향신료라고 생각했던 건 새콤한 맛을 내며 과일과 잘 어우러졌다.

 

“ 거봐, 괜찮지? 네가 매운 음식 못 먹는 거 모를 줄 알고? ”

 

그래도 아무르가 쉽게 먹을 만한 것을 고르지 않고, 다소 갈등하며 큰맘 먹고 시도할만한 것을 고르는 게 장난기 많은 론다웠다. 만약 아무르 혼자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다. 아무르도 다른 꼬챙이로 과일을 집어 론에게 내밀었다. 망설임 없이 입으로 받아먹고, 입술을 꼭 다물고 볼을 우물거리는 것마저 어여뻤다.

 

“ 다음엔 저걸 먹어볼까? 저기도 사람이 많네. ”

“ ... 그보다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

“ 가끔은 이런 것도 즐겨야지. ”

 

아직 다 먹지 못한 그릇은 손에 쥔 채로, 꼬챙이에 꽂아 구운 새구이도 샀다. 살점보다는 뼈가 더 많아 보였고, 노릇하다 못해 과하게 구워져 탄 곳이 더러 보였다. 아무르가 보기에는 비위생적이고 영양소도 불량한 음식이기는 해도, 가끔이라고 하니 더 말릴 수 없었다. 그래도 손가락만큼 굵고 오동통한 벌레를 볶은 음식은 차마 먹을 수가 없었다. 론은 애초에 아무르가 먹을 거라는 기대도 없었던 듯, 아무르 손에는 멀쩡한 꼬치를 들려주었다.


“ 에르센이라서 다양한 음식이 참 많네. ”

“ ... 벌레를 음식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아요,... ”


애초에 그가 벌레를 만든 것은 자연을 관리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고, 인간이 섭취할 수 있는 것은 동물로 만들어주었는데 왜 벌레를 잡아먹을 정도로 빈곤해졌단 말인가. 심란한 마음으로 예쁜 입술 사이로 벌레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론은 낄낄 웃으면서 아무르가 싫어해도 충분히 맛을 본 뒤에야 내려놓았다.

사람이 많으니 무언가를 구경한다기보다, 인파에 떠밀려 가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무르는 재잘거리는 론의 목소리에 집중하느라 사람이 많은 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고, 주변의 구경거리에도 별달리 관심이 없었다. 어느 누군가 주고 간 화관이 론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끝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던 론이 아주 잠시 힐끗,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찰나에 가까운 눈짓이었으나 아무르는 줄곧 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이라도 발견했나 싶어 인파를 뒤져보았으나 마땅히 눈에 익은 낯을 발견하지 못했다.


“ 아니, 드물게 잘생긴 사람이 지나가길래. ”


극장 배우인가, 하고 잠시 스쳐 간 사람의 행색을 더듬어보는 말에 아무르의 눈매가 찡그려졌다. 어떠한 감정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내기도 전에 먼저 나온 반응이었다. 심미안이 남다른 론이 ‘드물게 잘생겼다’고 할 정도면 얼마나 인기가 있는 외모인지 알만했다. 론은 거울만 봐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외모를 가졌고, 자신의 외형이 남녀를 불문하고 얼마나 잘 통하는지도 잘 알았다. 게다가 론은 첩으로 미인을 여럿 들였었다. 큼지막하고 아름다운 보석을 모으는 것처럼 말이다. 아무르는 하나같이 예쁘장한 첩을 보며 왜 론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아무르는 눈가를 찡그렸다.

 

“ 내 취향은 아니지만. ”

 

뒤늦게 덧붙인 말이 아니었더라면 아무르는 제 감정을 토해내고 말았으리라. 그렇다고 썩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저 발언은 아무르가 자주 듣던 말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저놈의 취향, 정말 까탈스럽기 짝이 없을뿐더러 연인에게도 냉정한 말이었다.

 

“ 그대의 취향이 바뀌는 일은 없었던 거 같네요. ”

“ 한결같다는 걸 그런 식으로 욕하기야? ”


하지만 론은 부정하지 않고 웃었다. 절대적인 미의 기준이 아무르에게 맞춰져 있던 삶도 있었다. 도미실리오가 무너지지 않았으며, 최초와 달리 아무르가 절대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던 때였다. 사람들은 아무르처럼 창백하고 푸른빛이 도는 피부를 가지고 싶어 했고, 남녀를 불문하고 품위 있고 꼿꼿한 자세를,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투를 흉내 냈다. 그런 가치관이 보편적인 사회에서도, 론은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했다. 아무르와는 거리가 먼 것을 매력적으로 느꼈다. 


“ 늘 너만 예외였지. ”


이번에도 론은 아무르를 사랑하게 되었듯이, 취향 따위야, 아주 잠시 시선을 빼앗는 것들이야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속삭였다. 론은 양손을 위로 뻗어 아무르의 뺨을 감싸 당기고, 불퉁해서 꾹 다문 입술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춰주었다. 아무르는 더욱 허리를 숙여 애정 어린 손길을 담뿍 받았다. 본래 이렇게 트인 장소에서, 남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 벌이는 애정행각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지금만큼은 민망하면서도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야 주변을 맴돌면서 론을 힐끗거리던 사람들이 얼른 물러나 줄 것 아닌가.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도 기웃대는 걸 멈추지 않던 사람이 무언가 확신을 얻은 듯, 성큼 다가왔다.


“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너, 몇 년 전에 제국에서 열린 검투 대회에서도 우승한 녀석 아냐? ”

“ 으응? 그 일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다 있네. ”

 

갑작스럽게 아는 체를 해도 론은 당황하는 법 없이 진심으로 놀라움을 표했다. 검투 대회는 전혀 들은 바가 없는 아무르를 위해, 론이 설명해주었다. 릴리는 전쟁을 멈추고 왕국 간의 화합을 실천해 보이겠다는 명분으로 출신을 제한하지 않은 검투 대회를 열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의 형제를 만날 수 있다는 아도라토에의 신탁을 믿은 것이다.

제국을 자유롭게 오갈 기회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론도 그중 하나였다. 론은 용병의 신분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릴리는 목적대로 론과 재회했다. 그 계기로 아도라토에가 신에게 선택받았음을 증명하고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니, 기억해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 신기한 일이기는 했다.

 

“ 그쪽도 참가했어? ”

“ 물론이지. 하지만 떨어졌어. 그때는 아직 경험이 부족했을 때라서 말야. ”

“ 그래? 한번 붙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

“ 분명 내가 졌을 거야. 난 구경만 했는데도 무시무시하던걸. 네 상대는 다 반쯤 죽어서 실려 갔잖아. ”

 

그땐 미숙했다면서 애써 자존심을 세우던 상대도, 겨뤄보고 싶다는 론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기회가 있어도 검을 맞댈 자신이 없다는 투였다. 론은 대회니까 봐주는 게 없어야지, 하며 웃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당시에는 꽤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여서 손속에 여유가 없었다.

양부가 죽고 용병이 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권능을 없앨 방법은 까마득할 때였다. 심지어 자신이 황실의 자식임을 알고 있으니, 제국에 있는 게 영 불편했다. 혹여나 자신을 알아본 황제가 암살자를 보내지는 않을지, 누명을 씌우고 감옥에 가두지는 않을지, 수많은 상황을 가늠해보느라 신경이 무척 곤두서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일이 수틀리면 릴리를 죽이고 황제 자리에 앉을 생각도 있었으니, 살인마저 허용해주는 대회에서 남을 봐줄 여유 따위 없었다. 

 

“ 그럼 진짜 성물을 봤어? 황제 폐하도 알현하고? ”

 

황제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있는데도 대회에 참가한 이유는, 우승자에게 진짜 성물을 볼 기회를 주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성물을 알아볼 수 있더라도 그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성물을 다루는 방법도 잘 몰랐다. 그런 정보는 오로지 제국, 그것도 황실 대대로만 이어졌으니 말이다. 그러니 위험부담이 커도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아무르가 미리 적절한 시기를 골라 계획한 대로, 그리고 아도라토에가 예지한 대로 릴리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그저 그렇다고 하면 될 일이지만, 론은 성물과 황제라는 단어에 호기심을 느끼고 몰려드는 인파를 보고 새로운 기회를 엿봤다. 이참에 용병들 사이에 자신이 만들 상단을 미리 홍보해놓을 기회로 말이다.

 

“ 이야기가 좀 길어질 거 같은데.... 그리고, 그런 귀한 이야기를 들으려면 술 한잔 정도는 사야지. ”

“ 좋아, 기꺼이 사지! ”

 

상대는 대회에서 일찍 탈락해서 우승자와 대면할 기회도 없었다는 게 어지간히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러니 몇 년이나 지난 일을 여전히 기억하고, 길에서 마주쳤음에 아주 반가워하고 있다. 거기에 흥미가 생긴 사람들도 몰려들어 자신도 한 잔 사겠다며 합석을 청했다.

길에 널린 것이 노점이니, 차양도 없는 낡은 테이블에 둘러앉게 되었다. 론은 대회 참가부터 시작하여, 우승하고 황제를 만나는 일까지 하나의 책을 엮어내도 좋을 만큼 풍부하게 늘어놓았다. 그의 입담이 얼마나 좋았는지, 지나가던 사람들까지 발이 붙들렸다. 이야기가 다 끝나도, 초반을 듣지 못해 아쉽다며 다시 말해주기를 청하는 사람이 여럿이어서 같은 이야기가 반복되었다. 다시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며 망부석처럼 떠날 줄을 모르는 사람도 여럿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그는 방랑 시인처럼 많은 사람을 이끌게 되었다.

아무르는 론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분명 데이트라고 하지 않았던가?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게 아니었던가? 하지만 아무르는 불만조차 토해내지 못한 채로, 웃고 떠드는 론을 지켜봐야 했다. 론은 술을 사달라고 해놓고도 한 잔도 채 비우지 않았지만, 아무르는 답답해서 터질 듯한 속을 가라앉히느라 몇 잔이나 비웠다.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이목을 끌고 있는 론을 보고 있으면 여전히 속이 탔다. 뉘엿하게 노을이 질 때쯤엔, 이를 악물고 버티던 아무르는 결국 테이블에 뻗고 말았다.

창작 소설 / 1차 소설 / BL / 체격 차이가 확실히 나는 떡대수를 사랑함

녿요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