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혼란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하는 고민이 들면 샤프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나는 정말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잘 모르겠다.
원래 미성년이란 그런 것이다. ‘사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만약 생각한다 해도, 어떤 게 바른 것인지 알아차릴 수 없는. 그래도 나는 그렇게 살고 싶었다. 이 철 없는 소음 속에서 선명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소음 시그널 A



시커먼 남자애들만 우글거리는 교실에선,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창문을 꼭 닫아 퀴퀴한 냄새가 났다. 소란스러운 그 곳 한 가운데에 내가 있다. 실은, 좀이 쑤신다. 쉬는 시간에 이렇게 자리에 앉아있는 것. 평생에 이토록 오래 자릴 지키고 앉아본 적이 없다. 이미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괜히 샤프만 휙휙 돌리며 딴 생각을 했다. 딴 생각이라고 해봤자 그런 거였다. 학교가 끝나려면 몇 시간이나 남았는지, 토요일이 오려면 며칠이나 남았는지, 방학까지는 또 얼마나 남았는지 같은 거. 그러다 생각할 것도 없어져 괜히 문제집만 뒤적거렸다.  

“권순영.”

앞자리에 앉은 영주가 뒤를 돌며 나를 부른다. 턱을 괴고선 눈만 들어 영주를 봤다.

“매점 갈래? 배고프다.”

배가 나온 모양을 보아선 배고플 때가 먼 것 같은데. 영주는 좋은 애지만 너무 자주 먹었고 너무 안 움직였다. 하루 종일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만 펴 놓고 있는 영주. 그런데도 성적은 중위권에서 맴돈다. 틈만 나면 교무실로 찾아가 선생을 붙잡고 질문을 해대는 성실하고 멍청한 영주. 조용한 성격에 말주변도 없다. 그래서 나는 자주, 그 애가 이야기 할 때면 멍을 때렸다.
중식과 석식을 먹을 때면 꼭 내 반찬을 덜어가는, 무엇이든 아는 체하는, 무식한 나를 아주 무시하는,  노는 애들만 보면 무서워서 설설 기고 욕하면서도 동경하는, 뒤섞이고 싶어서 안달내지만 결코 뒤섞이고 싶지 않아하는 모순투성이의 영주.

“난 안 갈래. 귀찮아.”
 “...그럼 뭐 사다줄까?”

착한 건지 호구인 건지 모를 성격의 영주.

“됐어. 생각 없어. 네가 뭐 내 셔틀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다시 처박았다.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도 문제집을 덮는다거나 고개를 다시 들지 않았다. 뱉은 순간부터 후회하고 있다.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 영주의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셔틀을 예로 든 건 좀 심했던 거다. 안 그래도 영주는, 중학교 때 당한 적이 있던 것 같았는데 말이다. 물론 그 애가 직접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함께 지내며 그림자처럼 느껴진 것들을 조합해 감으로 맞추자면.
영주의 중얼거림이 길어진다. 아니, 그냥 나는, 날이 추워지고 그래서... 빨리 배고파지니까.. 너도 그럴까봐...뭐, 그래서 물어본 거였지....뭐 꼭 같이 가자는 건 아니었고... 그냥 예의상 물어봤다, 예의상... 나 혼자 갔다와도 되는 거고... 영주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내 옆을 지나쳐간다.

아 양심.
쿡하고 찔러온다. 원래는 내게 없던 것인데, 어느 날을 시점으로 예민해졌다. 가슴팍을 살살 문지르며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말이 심했나. 영주가 상처를 잘 받는 게 아니고? 머리를 헤집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주가 좋아하는 뚱뚱한 바나나우유를 사주러 매점에 갈 생각이었다.

영주는 걸음이 느린 편이었다. 실내화 뒤축을 바닥에 질질 끌며 걷는 버릇. 곰같아 보이는 그 걸음.  영주가 걷는 걸 볼 때면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앞에 영주가 있음에도 나는 빠르게 걷는다거나 뛰던가... 뭐 그런 식으로 서두르지 않았다. 영주는 그런 친구였다. 가까이 걷는 게 불편한 친구 말이다.

유리창으로 문득 내 모습을 봤다. 교복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껄렁껄렁하게 걷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구부정하게 굽힌 허리를 쭉 세운다. 팔자로 놓았던 발 날도 바르게 한다. 천천히, 뼈 마디마디 교정을 하려 비틀고 세우고 다시 조금 굽혀보고. 그래도, 나아지는 게 없다. 좀 더 연습해야하나. 머리를 긁적이곤 창문에서 고갤 돌렸다. 영주는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봤자 걸음이 느리니 금방 따라잡을 거다.
계단을 털레털레 내려가는데, 아래쪽에서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우루루 떼거지로 몰려 올라오는 소리. 벽 쪽으로 붙어 걸었다. 여섯 일곱쯤 되는 남자애들이 와글와글 몰려오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지나치려고 했다. 아니 그러는 게 맞았다. 그 애들은 같은 반 애들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층을 쓰니, 같은 학년이겠거니 한 것이다. 나는 수업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에도 의자에 껌딱지마냥 붙어 앉아 문제집과 씨름하는 게 전부인 애였다. 영주를 제외하곤 반 애들하고 얘길 나누지도 않았다. 가끔가다 누군가 떨어뜨린 지우개를 지워주고 청소 당번임을 듣고, 교무실에서 온 호출을 전달받는 것만 빼면, 반 애들과 나는 완전히 남이었다. 다른 반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하나, 둘, 셋, 다섯. 그쯤의 아이들이 나를 지나쳐 계단을 올랐을 때. 여섯 번째 아이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 애를 그냥 지나치려고 했다. 실은 느끼고 있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를 빤히 보던, 그 시선을 말이다.

“야.”

윽, 숨이 턱에 막힌 소리가 난다. 내 팔을 붙잡은 손. 그 손을 바라봤다.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너, 어디서 나 봤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 나는 얘가 누군지를 몰랐다. 언뜻 본 얼굴, 들리는 목소리 전부 낯선 것이었다.

“...사람 잘못 본 거 같은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계단을 올라가다 만, 이 애의 친구들이 전부 나를 보고 있을 게 빤했다. 주목을 받는 건, 여러모로 위험한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주목을 좋아했고...

그래서 싫어해야만 했다. 내 앞에 서있는 발이 눈에 들어온다. 디즈니 캐릭터들 얼굴이 무늬처럼 그려져 있는 양말이었다. 사내새끼 발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흐리멍덩해진 시야로 불쑥, 얼굴이 들어온다. 허리를 숙여 내 얼굴을 살피는, 저 캐릭터 양말의 주인. 나는 눈을 깜빡였다.

“뭐, 바닥에 돈 떨어졌냐.”

내 시선을 따라 같이 바닥을 보다가 만다.

“얼굴 보니까 맞네. 너 중학교 때 나랑 한 번 봤는데.”
 “...잘못 본 것 같다니까.”

난 여전히 이 애가 누군지 기억나질 않았다. 얼굴을 봤는데도.

“왜 너 청호중 나왔잖아. D시에 있는.”
 “........”
 “건오 친구. 아니야 너?”

청호중학교. 송건오. 익숙한 이름들이 나온다. 믿기지 않았다. 그것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 학교에 지망한 것이었다. 이모네 집으로 주소까지 이전해가면서 쌩쇼를 해댔는데. 이곳에서 청호중이 있는 D시로 가려면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을 달려야만 했다. 슬그머니 목에 건 명찰을 뒤집었다.  이름이 보이지 않게.

“아, 이름이 되게... 시골 같았는데.”

팔을 빼고 싶은데, 집요하게도 다시 잡아온다. 눈썹을 모으고선 심각하게 고민을 해댄다. 나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이다. 잘생긴 얼굴. 저 얼굴을 내가 봤다면, 기억이 안 날 수 없는데 정말로 누군지를 모르겠다. 오해라고 치자니 나의 과거를 기억한다.  

“...순돌이였나?”

?

“순돌이 맞지?”

할 말이 없어졌다.

“맞아. 순돌이였어. 그, 듣자마자 되게 시골집에 있는 강아지 이름 같다고 생각했거든. 왜 있잖아. 누렁이같이.”

환하게 웃으며 반가워한다. 나는 그 틀린 것을 정정해줘야 하나, 말아야하나, 그런 걸 고민하고 있었다.

“진짜 기억 안나? 그날 진짜 우리 장난 아니었는데. 막 취해가지고 길 위에서 나루토 흉내 내고...”
 “........”
 “나 이석민인데.”

아.



 *



 " 권순영."

야자가 끝나고 가방을 챙기는데, 영주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집에 가서까지 문제집을 펴놓을 정도로 공부에 열성적인 건 아니라 가방은 거의 빈 것이나 다름없었다. 든 게 없어 짜부가 된 가방을 둘러매며 눈썹을 움직였다. 들었으니 말하라는 뜻이었다. 영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왜 저래.

“나 봤어.”
 “뭘.”
 “이석민이 너 붙잡고 있는 거.”

아 씨팔.

“........”
 “........”

영주는 한동안 말을 삼켰다. 그러자 초조해진 건 나였다. 친밀해 보였을까. 서로 아는 사이 같아 보였을까. 혹시 예전에 만나서 놀았다는 것을 들은 건 아닐까.

“야 그건.”
 “선생님들한테 말하는 게 직방이야.”
 “...뭐?”
 “이석민, 그 새끼 좀 유명해. 고등학교 올라와서 잠잠해지긴 했는데,”
 “........”
 “양아치 중에 상양아치야. 걔.”
 “........”
 “우리 학원에 걔랑 같은 중학교 나왔던 애가 있어. 그러니까, 이석민이 괴롭히면 선생님들한테 말해.”

영주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 애의 심각한 표정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보면 반가운 오해였으니 부정하지 않았다.
난 그렇게 많이 말하는 영주는 처음이었다. 교실을 나서면서 복도를 걷고 층층이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에도 영주는 입을 쉬지 않았다. 그저 이석민 같은 애들이 얼마나 나쁜지, 그런 애들은 대체적으로 부모님이 바쁘고 그 애들을 돌봐주지 않기 때문이라든지, 만약 괴롭힘을 당한다면 어떤 표정, 어떤 태도를 취해야하는지 등등에 대해 떠들어댈 뿐이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영주는 실수로라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아차렸다. 누구한테 들은 것처럼, 혹은 제 주변이 겪는 것처럼 말하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영주라는 것을.

건물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여름엔 이 바람이 어떤 형태, 어떤 냄새, 어떤 온도를 띄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로 앞에 있던 계절임에도. 이제, 바람이 차기만 한 다음 계절. 일 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무사히도. 다행이다.
허리를 굽혀 신발을 신는다. 힐끗 보니, 영주의 손엔 신발주머니가 들려있다. 초등학교 이후로 저런 것을 가지고 다니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거, 귀찮지 않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걸을 때마다 다리에 걸리적거리는 그걸, 왜 갖고 다니는지.

“최영주.”
 “순돌아.”

영주를 부르는 내 목소리 위로 낯선 목소리가 겹친다. 영주의 시선이 한 곳에 박혔다. 나는 혀로 볼 안쪽을 꾹꾹 밀어내며 뒤를 돌아봤다. 손을 붕붕 흔들고 있는, 이석민이라는 애. 가로등이 훤해 아까 본 그 얼굴이 그대로 보였다. 그대로 외면했다. 괜한 반가운 척에 어이가 없었다. 이석민의 말대로 한 번 본 사이라면, 친한 척이 너무 과한 것이다. 나는 D시에 있는 중학생들 중 질이 안 좋은 애들은 다 만나봤으니까. 이석민과의 그 만남이 특별난 것도 아니었다.

영주의 얼굴이 하얗게 얼어붙어있다. 그 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대체 왜?

“나,나는 학원 늦어서 먼저 간다.”

그 애는 쏟아내듯 말했다. 내가 만류고 나발이고 채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어깨를 한 번 툭 친 영주가 서둘러 나에게서 멀어진다. 정문은 저쪽인데. 후문은 닫혔는데. 엉뚱한 길로. 영주는, 그러니까, 이석민이 무서운 거다. 이석민을 잘 알아서 그런 게 아니라. 일종의 경험에서 우러나와서. 난 그런 영주가 불쌍했다. 동시에 비굴함이 동시에 느껴져 꼴 보기 싫기도 했다. 나는 영주와 함께 다니면 항상 모순된 감정에 시달린다. 여러 개의 자명종 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것 같은 혼란스러움에, 어쩔 줄 모르는 바보가 된 기분.

교정에 남은 애들은 몇 없었다. 한 명, 두 명. 드문드문 건물 밖으로 나와 빠르게 사라질 뿐. 나에게, 이석민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아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늦은 밤이었다.

“..너 왜...”

이석민에게 다가갔다. 묻고 싶었다. 너, 나한테 왜 이러냐고. 다시 입을 다문다. 그 애를 지나쳐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알고 있다. 엮이기 시작하면 끝이다. 저 부류들은. 이석민은 내 뒤를 설렁설렁 쫓아 걷기 시작했다. 그런 것들이 기억난다. 한 번 봤다던 그날, 이석민은 나를 꽤 좋아했었다. 그리고 나도 실없는 소리를 웃기게 해대는 이석민을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다. 나루토라고 해서 생각난 건데, 이석민과 나는 기본적으로 코드가 잘 맞았다. 만난지 5분도 안 돼서 5년은 알고 지낸 것처럼 낄낄거릴 정도로. 그건, 영주와 나 사이엔 없는 것이었다.

“건오랑 아까 통화했다.”

그 말에, 주먹이 나간 건, 나도 어쩌지 못한, 청각적 반사행동이었다.
이석민의 얼굴이 비틀렸고 욱신거리는 주먹은 다음이었다. 저린 손을 접었다, 폈다하며 당혹감을 떨치려 애를 쓰는 와중에 구겨지는 이석민의 얼굴이 보였다. 그 구겨진 얼굴이, 곧 웃기 시작한다. 황당하게도.

 "아. 아프네."
 "...일단 미안하다. 이건."

내 사과에 웃는 입이 더 커진다. 그 덕에 터진 입술의 상처가 더 벌어진다. 얘 좀 이상한 것 같다.

 "둘 사이 틀어졌나봐. 건오도 네 이름 말하자마자 전화 끊더라."
 "........"
 "다음에 전화 오면, 너 여기 다니는 거 얘기 안 할 게."
 "........"
 "그런 의미잖아. 방금 때린 거."

순돌이, 이름은 안 그럴 것 같은데. 너 쎄다. 하긴... 유명 했지 너. 한 번 꼭지 돌면 미치는 걸로. 어두운 골목길. 그러니까, 평소라면 나 혼자 걸었던 이 길에 이석민의 목소리가 청량하게 울린다. 순돌이. 순돌이. 해대는 것도 같이.

 "야. 나 순돌이 아니야."

참다 못한 내가 말한다.

 "...진짜?"
 "어."
 "헐."

그리고선 침묵. 다시 입을 연 건 이석민.

 "그럼 뭔데."
 "넌."
 "........"
 "왜 내가 좋은 거냐? 한 번 봤는데?"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한 번 뿐이었다. 언제인지 정확한 날짜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의 술자리 그 기억 파편들만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만나서 어울렸던 친구들이 많았다. D시에 있는 웬만한 양아치놈들하곤 한 번씩 시간을 섞었다. 그건 이석민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나에게 살갑게 구는 이석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신호였다. 친구를 하자는. 일종의 들이댐이었다.
자연스럽게 친해지거나, 아니면 친해지고 싶다고 온몸으로 외치거나. 이석민은 후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왤까. 보통은 돈이 많거나, 잘생겼거나, 양아치들 중에서도 잘 나가는 애가 있으면 양아치들은 저런 행동을 취했다. 일종의 간택인 셈이었다. 이석민은 나를 간택하고 싶은 거다.

 "그때 애들이 한, 열다섯 명 넘게 있었는데. 솔직히 진짜 잘생기거나 진짜 웃기거나 진짜 희한하거나 하지 않는 한은 이름도 모르고 지나가는 거였는데. 원래 그렇잖아. 그런 자리는 그냥 마시려고 만나는 거지.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이름을 말하는데, 네가 그랬어."
 "........"
 "눈이 열시 십분. 순돌이라고."

 ...내 자기소개 레퍼토리다. 시계 보는 법은 깨우친 나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십 년을 해오던 걸, 이곳에 전학 온 날 하지 않았다. 나는 이석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부로 풀어 헤진 넥타이와, 하얀 교복와이셔츠. 골목길의 가로등 불빛이 이석민의 와이셔츠를 주홍으로 물들인다.

“그게 뭐라고. 솔직히 그날 너랑 잘 놀긴 했지. 그렇다고 특별한 것도 아니었어.”
 “........”
 “근데 생각나더라.”
 “........”
 “열시 십분 될 때마다 눈이 열시 십분이라던 유치한 자기소개가 생각났다고.”
 “........”
 “야. 그거 아냐? 하루에 열시 십분이 두 번 있는 거? 여자도 아니고 사내새끼를 하루에 두 번씩 생각했다고.”

이석민의 눈이 움직인다. 옆선을 보이던 선도.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보는 거다. 그래서, 나는 정면을 바라봤다. 이석민을 안 본 척.

“징그러.”
 “하하. 좀 그렇지?”
 “...이름도 기억 못하면서 뻥치고 있어.”

열시 십분마다 나를 생각했다는 이석민은 거짓말쟁이 같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는데. 하필이면 시커먼 남자새끼가 나를 열시 십분마다 생각했다고 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너무 로맨틱하게. 그래서 거짓말 같았다. 이상하게 부끄러워지는 기분도, 이석민에 대한 경계가 누그러지는 것 같은 느낌도 죄다 싫었다. 이석민은 송건오를 알고 있는 애였고 중학교 때의 나를 알고 있는 애였다. 그건 내가 버리고 싶은 과거가 이석민에겐 현재라는 걸 의미했다. 섞이고 싶지 않은 부류들.

한동안 조용했던 이석민이 그런다. 이름 알려달라고 하면 또 싫다고 할 거지. 그래서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또 다시 침묵. 그러자 이석민은 손을 뻗었다. 목에 걸린 채 교복 와이셔츠 주머니에 꽂혀 있던 내 명찰을 빼내는, 이석민의 손. 와락, 줄을 잡았으나 이석민은 플라스틱 명찰을 꽉 쥔 채 가로등 불빛에 명찰을 비추고 있다.

“권순영.”

내 이름을 읽는다.

“열시 십분, 권순영. 맞다. 너 순돌이 아니다.”

그리곤 또 웃는다. 골목길, 온 가로등의 빛을 다 먹은 듯.



 *



B는 어느 건물이든 잠겨 있는 옥상을 열 수 있는 애였다. 송건오에게 잘 보이고 싶어 설설 기던 애. 나는 그런 부류들을 혐오했다. 형편없이 비굴한 애들 말이다. 그래도 그 애는 송건우 무리에 끼어서 잘만 다녔다. 물론 나도 송건우의 무리였다.
송건우의 무리는 이렇게 정의된다. 선생들 사이에선 답도 없는 비행청소년 무리, 부모들 사이에선 강제전학을 보내야할 방탕한 악의 축, 일부분의 학생들은 혐오스러운 양아치, 그 다음 일부분은 까리하고 멋있으나 같이 하고 싶지 않은 무리, 라고.

내가 그 무리에 편승하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송건오의 친구들 몇몇과 같은 반이 돼 친해진 것이 먼저였고, 그 친구들이 송건오에게 나를 소개한 것이 다음이었으며 송건오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한 게 마지막이었다. 송건오가 평범한 애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애는 나에게 유독 다정스러웠고 유독 나를 재밌어했다. 사람이 사람 마음에 든다는 게, 그렇게 신나는 일인 줄 그때 처음 알았다. 학교 애들을 내가 직접 손찌검하거나 삥 뜯은 적은 없었지만, 반 애들과도 제법 잘 지내는 나였지만, 송건오의 무리는 학교 애들에게 폭력을 썼고, 돈을 뜯었고 위협했다. 그래서 나도 별 수 없는 양아치였다. 그때 당시엔 그런 마음이 있었다. 나는, 그래도, 성격 좋고 착한 양아치라고.

B가 무리를 헤치고 앞으로 나선다. 송건오는 계단에서 곰팡이 냄새가 난다며 욕지거리를 뱉었고, 나는 누군가의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B는 손쉽게 닫힌 옥상 문을 따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학교 주변의 어느 아파트 단지였다. 술과 안주를 들고 있던 애들이 옥상 위로 사들고 온 그것들을 주섬주섬 꺼냈고, 송건오는 담배를 피웠으며, 나는 난간에 기대 게임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때였을까. 기름칠을 하지 않고 녹이 슬어 심한 소음이 나는 옥상문이, 소름끼치는 소릴 내며 열렸다. 술자리를 만들던 애들이 그대로 굳어 문 쪽을 바라봤고 송건오가 저건 뭐야 씨발.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핸드폰 화면에서 어렵게 시선을 떼 문을 바라봤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내 또래의 애가 그곳에 서 있었다. 다시 술자리를 만드느라 분주해진다. 송건오가 그 애를 향해 걸어간다. 안 꺼져? 좆밥새꺄. 킥킥 거리던 송건오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
그리고 그 애는 뛰었다. 얼굴이 안 보이는 애. 문에서 곧장 뛰어, 날 듯 난간 위로 올라 그대로 허공에 몸을 뉘였다.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진다. 살면서 사람이 아래로 꺼지는 장면을 본적이 없었다. 아마 평생 못 본 사람도 있을 거다. 그 애는 그렇게 사라졌다. 나뭇가지에 몸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씨발 이게 뭐야! 애들이 욕을 소리친다.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옆으로 내려두고 몸을 돌려 옥상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깬다.
꿈이다.

귀에서 허상의 소리가 들린다. 찢어질 듯한 이명. 지직거리는 소리. 주파수가 엉망으로 뒤섞여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영 직후 물을 털어내듯 고개를 기울인 채 제자리에서 통통 뛰었다.

오랜만에 다시 꾸는 꿈.
이석민 때문이다.




signal46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