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당신은 남이다. 당신은 나를 모르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가까이 있어도 마음대로 친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저 얼굴을 볼 수 있는 울타리 너머의 존재들인데, 그 사실을 몰랐다. 오해받기 싫은 만큼 타인을 오해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그게 어려울 때마다 스스로를 탓하고는 했다.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고 싶은 이 욕구는 자기 능력을 증명하려는 인정욕구와는 다르다. 거절 자체가 두려운 것이다.


나는 대체로 부모에게 순종적인 자식이었다. 손이 덜 가는 아이였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게 냉대받은 적도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는 내가 자기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자식이라고 생각했다. 영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옳다고 할 수도 없다. 내가 그를 이해하는 것은 그가 내 아버지여서가 아니다. 애틋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무사히 생존하기 위해 내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인 것뿐.


나는 글을 익힌 지 얼마 안 된 나이부터 사람을 죽이는 상상을 했다. 마론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인형이 다른 인형을 끈으로 묶고 때려죽이는 이야기를 지었다. 머리카락이 뜯긴 채 발가벗고 묶여 있던 마론 인형들의 기억이 가끔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다. 어린시절의 내가 가엾지만은 않고 때론 꺼림칙한 이유가 이것이다. 마치 스릴러 영화에 등장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어린시절 같지 않은가. 어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면 어른들이 걱정했을 법도 한데, 친척들이 말하는 내 어린 시절 일화에 등장하지 않는 걸 보니 그 뒤틀린 속내를 숨기기는 했나 보다. 아니면 어른들이 못본 체 하였거나. 


해소되지 않은 분노를 품고 어른이 되었지만 서른이 다 되어서도 아버지 앞에 대서거나 목소리를 높인 적은 거의 없었다. 속마음이 드러나 흠이라도 잡힐까 전전긍긍, 아침 저녁으로 인사를 하고 예의를 갖추고 식사를 챙기고 인기척을 느끼면 간단한 대화를 건넸다. 회사보다 빡센 사회생활이었다. 엄마에게 화가 미치지 않으려면 아버지에게 친절하게 굴어야 했기에 숨 막히는 벽 안에서 순종적인 자식의 역할을 나는 곧잘 연기하곤 했다.


아버지는 화가 나면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내뱉다가 스스로의 악랄함에 압도되는 듯 했다. 그런 상황이면 나는 겪고 있는 현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감각이 둔해지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실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 누군가 창조한 이야기 속 캐릭터처럼 느껴지곤 했다. 나는 그 상황을 관전하며 가정 안에서 점점 타인이 되는 연습을 했다. 나는 내 불행의 주인이 아니라 충실한 관람자에 가까웠다. 


아버지는 이야기에 써먹기 훌륭한 캐릭터였다. 가정 안에서 그는 용서와 인내가 없는 독재자였지만 밖에 나가면 그럭저럭 평범한 중년 남자였다. 아니, 같은 나이대의 남자들보다 번듯한 데가 있었다. 불특정 타인에게 호의를 사려고 신사적인 체 하거나 예의를 장착하기도 했고, 앞집 할머니에게도 꼬박 인사를 했다. 잘 씻고 잘 차려입었으며(이런 게 장점이라는 게 우습지만) 얕은 지식을 가지고도 어떤 화제에든 끼어들 수 있는 능수능란함을 가졌다. 정력에 좋다며 뱀이나 곰 쓸개, 사슴 피 할 것 없이 찾아먹으면서, 내가 굶주린 동네 강아지를 안쓰러워하자 그는 직접 우유를 가져다 개를 먹였다. 어릴 때 집에서 기르던 개 다복이는 어느 날 보신탕이 되어 그의 뱃속으로 들어갔을 터였다. 그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가 어떤 이중성을 가졌는지 아는 사람은 가족 외엔 없다.


범죄자들의 신상이 밝혀지고 언론이 그 범죄자의 일상을 받아쓰기 할 때마다 극렬한 분노가 치민다.


“그 양반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아주 평범하고 점잖은 사람이었지. 가정적이고....”


사람들은 가해자가 자기 영역 안에서 약자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관심 갖지 않는다. 피해자가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가 나쁜 사람을 몰라봤을 리 없다’고,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어쩌다가, 이유가 있어서, 어느 날 갑자기 나쁜 짓을 하게 된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면이 필요한 사람들은 치밀하게 직조한 일상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앞집 할머니가 엄마에게 “그런(가정적인) 남자도 없어. 좀 잘 챙겨줘.”라는 말을 했을 때 우리는 둘 다 입을 꾹 닫았다.


꼭꼭 숨겨진 불행은 말할 수 없이 치욕스럽다. 우리가 당한 일들, 우리가 겪은 고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확신이 들 때 우리는 더 입을 닫는다.


그가 실은 많은 여자를 강간하고, 사람을 때리고, 노동자들을 모욕하고, 조직폭력배를 부리고, 남을 협박해 재산을 뺏고, 피를 나눈 이들에게도 사기를 치는 사람이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닐 수도 없었다. 누구도 믿게 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불행하지 않는 척 할 뿐. 피해자들 역시 평범함의 가면 속에 숨어 치욕을 잊으려 한다. 그것이 유일한 생존의 길이라 믿고, 협박에 길들여지고 만다.


아버지의 이중성에 치를 떨면서도, 그 앞에 납작 엎드려 굴종하는 나 자신이 누구보다 끔찍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자기혐오의 늪에 빠져 있었다.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밧줄이 어딘가 있다는 걸 몰랐다. 누구에게나 이런 늪이 있을 테니까 당연히 내몫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조용히 죽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끝날 수 있다면. 내 삶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계속 반문했다. 나를 낳다가 죽을 뻔 했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라고 누구에게든 소리치고 싶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지만. 


아버지는 나의 감옥이었고, 어쩔 수 없이 나는 아버지를 이해했다. 그가 폭군의 역할에 충실했음에도 나는 종종 그를 약자의 위치로 옮겨보았다. 정말로 강한 사람은 나와 엄마이고, 아버지는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나약한 사람이라고. 사랑을 받은 적이 없어 주는 방법을 모른다고. 그래서 삶에 서투른 거라고. 남을 속이거나 남의 것을 빼앗는 일에 골몰하는 것도 살면서 항상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조금만 운이 좋았다면, 제대로 된 교육이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았더라면 이렇게 잘못된 길에 들어서지는 않았을 거라고.


나는 감히 그를 동정했다. 동정할 수 있었다. 종종 현실을 비현실이라고 느꼈던 것처럼 아버지를 불쌍한 사람이라 생각하면 그가 하는 짓들을 참을 수 있었다. 마치 덜 자란 어린애를 보듯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그를 이해하면 나는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포용하는 사람이 된다. 그런 위선적인 눈가림 속에서 나는 적극적으로 그를 오해했다. 관찰하고 예측하고 대비하면서 두려움을 지워갔다. 그건 마치 내 삶의 통제력을 넘겨받은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은 두렵지 않다. 영화나 드라마의 전개를 지켜보듯 그의 생각과 행동을 넘겨 짚었다. ‘아버지’라는 캐릭터를 분석하고 헤집으면서 하찮은 존재로 강등시킬 때마다 느끼는 희열에 분노를 잠시 잊었다. (항상 분노하기는 힘이 드니까) 혐오하는 자에게 헌신하면서 나의 인내심이나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아버지는 한번도 약자인 적이 없었다. 그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가족 구성원들은 분란이 생길까 두려워 그에 맞서는 이를 함께 다그치면서 절대자인 아버지의 뜻에 따르도록 했다. 오늘의 평안을 위해 서로의 의지를 꺾고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약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아주 고요하고 수동적인 폭력이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느라 서로에게 깊은 관심을 둘 수 없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가족들이 자신을 따돌린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맞대고 마음 놓고 웃어본 적도 없는 우리에게.... 아버지는 자신이야말로 너그러운 피해자이며 가족의 사랑과 존경이 부족하다며 분노하곤 했다. 그의 뿌리 깊은 피해의식은 어처구니없는 망상으로 이어져, 결국은 가족 모두를 영원히 적으로 돌렸다.


아버지는 나를 이해한 적 있을까? 그럴 필요가 있기는 했을까? 모르겠다. 나는 주인이 있는 개였고, 그는 개를 24시간 마당에 묶어두는 주인이었다. 굶기지 않아서, 내쫓지 않아줘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에는 묶여 있는 줄이 너무 짧았다. 함께 있지 않아도 숨이 막혔다.


이제 나는 이해되지 않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만두기로 했다.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을 동정하는 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그가 나를 구슬리고, 착취하고, 버젓이 이용해 왔음을 인정하기로 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가장 진실된 것은 오랜 생각이 아니라 빠른 직관이 아닐까? 나는 상대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하는 것을 넘어 여러 관계를 끌고가기 위해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는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것과 수용하기 위한 이해는 다르다. 전자는 나의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고, 후자는 상식에 반하는 일들을 포장하여 앞으로도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확인하는 일이다.


‘나에게 하는 말과 태도’가 그 사람이 가진 나에 대한 마음의 전부다. 그 이상의 생각은 내 망상이나 기대일지도 모른다. 정말로 존중하는 사람들끼리는 이해가 어렵지 않다.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관심과 사랑이다. 일방적인 것은 이해가 아니며, 이해는 서로를 향해 함께 기울어지는 마음이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가정 안에서 그래왔던 버릇 때문이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면, 그의 말이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도 일단 우리는 노력해본다. ‘알고 보면 나쁜 사람 없다’는 말을 되새김질하면서. 그러나 ‘알고 보면’이라는 단서를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더 상처받고 고민해야 하는가? 정말 나에게 좋은 사람이라면, 견디고 참아내는 시간이 꼭 필요할까?


물론 이러한 의문에 도달하기까지 겪은 시간을 무엇과 바꿀 수는 없다. 타인의 인생을 들여다 보고 헤아리고자 애쓰는 일이 가치없다고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와 가까이 있고, 나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라면 ‘들여다보기’를 피할 수는 없다. 실제로 그 사람을 이해하고 대화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대화를 위한 게 아니라면, 그저 위안받고 안심하기 위함이라면, 견디는 감각을 무디게 할 뿐 극복을 위한 해결책이 되어주지는 않는다. 아버지를 이해한다는 망상에 빠져 있지 않았다면 그 시간을 견딜 수 없었겠지만 이제 그런 식으로 나를 소모하고 싶지 않다. 내 인생이 너무 아까워서다.


‘그냥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은 그냥 나쁜 사람이다. 설령 가족이라도 그것만은 인정해야 한다. 사람을 흑백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지만 그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말로 나를 존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꼭 흑백으로 나누지 말라는 법도 없다.


결국 나와 당신은 ‘남’이다. 우리는 그저 얼굴을 볼 수 있는 울타리 너머의 존재들이다. 피를 나누었다고 내가 당신의 소유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 나뿐이라면 내가 당신에게 손내밀 이유는 없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이해하지 않는다. 수용하지 않는다. 잘못된 상황을 참고 견디지 않는다. 돌아보고, 기억하고, 기록하면서 기다린다. 당신의 진짜 모습이 당신을 아는 모두에게 드러날 때까지. 









조립/분해/망가뜨리기/고치기/만들기 등을 일상으로 하는 탐구생활러. 책 <반려물건>, <반려공구> 등을 썼습니다. 일상적인 창작을 위한 뉴스레터 ‘일간 매일마감’을 만들고 글을 연재했습니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mohoyeon

모호연 mohoyeon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