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손잡고 팔짱 끼고, 게다가 서로 먹여주고. 그게 커플이 아니라는 건가?"

"말했잖아. 네가 인간계에 소환된 지 얼마 안 돼서 모르나 본데, 동성끼리 이 정도는 우정의 표현이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깍지 낀 손은 풀 생각 없이 더욱 몸을 밀착해오는 여성과, 그 모습을 매우 불만인 듯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또 다른 여성.

"그럼 나도 팔짱 끼고 끌어안고 해도 되는 거겠지. 그저 우정의 표시라면."

"아니. 넌 안 돼."

"왜, 역시 둘이 특별한 관계니까 그런 건가?"

"그건 아닌데, 그냥 넌 안 돼."

거리 한복판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티격태격하는 그녀들.

덕분에 혼자 얼굴이 새빨개진 나는, 지금 악마와 천사에게 노려지고 있다.


계기는 보도블록 사이에 아무도 모르고 지나치는 개미굴 구멍처럼 사소했다. 같이 일하는 선배에 대한 연심이 점점 커져만 가던 와중에 생각 없이 튼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흘러나온 오컬트 방송은 악마 소환 마법진을 그리는 법을 알려주었고 마침 집에 재료가 다 있었기에 그려보았더니 진짜로 악마가 나와버렸다.

"그래, 인간. 나를 부른 것은 너인가?"

마법진에서 검은 안개와 함께 나온 악마는 옛날 동화책에서 본 모습과는 달리 산양의 뿔, 염소의 머리, 꼬리에는 머리 달린 뱀과 말발굽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먹빛의 긴 생머리는 은하수를 품은 새벽의 강물과 같이 흐르듯 반짝였고, 두 번 돌아보기는커녕 스치기만 해도 나라가 무너질 듯한 미모와 가냘프고 부드러운 손과 매끄러운 피부, 육감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어 지성이 없는 존재들을 매력으로 휘어잡아 복종시키며, 지성이 있는 존재들은 내면의 충동과 이성의 모순에 비명 지르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렇게 매력적인 악마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서…, 서큐버스…이신가요?"

"오, 인간. 날 알고 있나."

질문에 답하듯 악마는 먹색과 선홍색의 날개를 허리에서 돋아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듯 부드럽게 허공을 한 바퀴 선회했다.

"그래서 무슨 소원을 빌기 위해 나를 불렀지? 어떤 소원이든 이뤄주지. 다만 악마와의 계약금은 계약자, 그대 인간의 영혼이다."

"제가 일하는 곳의 선배와 이어지고 싶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악마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잘 되었구나. 마침 내 전문분야라니."

악마는 양손을 좌우로 뻗어 손바닥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연기로 각양각색의 연령, 키, 외모를 가진 다양한 남성상을 그리며 즐거운 듯이 물었다.

"그래,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 누구든지 내가 너의 소원을 이뤄주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만, 인간들 각각의 취향을 알아가는 것이 그래도 즐겁더구나."

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나에게는 곤란할 뿐이고, 악마의 여유로운 표정도 오래가지 못했다.

"저…… 악마님. 제가 말하는 상대는, 여성입니다."

악마의 주변에 떠돌던 수 명의 남성이 다시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둘 다 한동안 말이 없고 골똘히 생각에 빠진 악마가 이따금 펄럭이는 날개 소리만 감돌았다.

"여, 역시 서큐버스께는 어려운 일일까요……?"

"아니다! 물론 할 수 있다. 성별이 다르다 해도 어차피 인간. 위대한 악마인 나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전의 위엄은 사라지고 어딘가 위태로움만 남은 모습이 불안하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흠, 그럼 그대의 소원을 바로 이루어주고 계약을 완수하도록 하지."


선배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가 외곽의 한적한 편의점. 내 주변을 동동 떠다니는 악마와 함께 짤랑거리는 문을 밀고 들어와 바로 스태프 룸에서 유니폼을 꺼내왔다. 카운터로 가니 포스기에서 동전을 꺼내 늘어놓은 것을 보아 선배는 시재점검을 하고 있는 듯했다.

"안녕하세요, 선배."

"아직 교대시간 아닌데 일찍 왔네. 무슨 일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선배한테 할 말 있어서요."

"응? 뭐 대타 부탁이라도 하려고?"

'네 부탁이야 뭐든 들어줄 수 있지'라 말하며 선배는 늘어놓은 동전을 한 움큼씩 다시 집어넣기 시작했다.

"저, 선배 좋아해요. …사귀고 싶다는 의미로."

선배가 나를 홱 돌아보고 나는 무심코 눈을 피했다. 그때 고막을 찢을 듯이 울리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살펴보니, 선배가 떨어뜨렸는지 바닥에 동전이 한가득 뒹굴고 있어 서둘러 쪼그리고 앉아 하나씩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진심이야?"

열 몇 개쯤 줍자 선배가 물어보기에 말없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주운 동전을 카운터에 올려두고 세차게 고동치는 심장과 함께 선배를 바라보자, 선배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갑자기 우는 선배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 기뻐서 우는 거라며 선배는 눈물을 닦았고, 그제서야 안심한 나는 악마의 능력에 대한 경외심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며 악마를 쳐다보니 악마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난 아직 아무것도 안 했다만.'

"네?"

악마는 연관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모습이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도 잊고서 무심코 소리를 내서 대답하고 말았다.

'여성은 처음인지라 방법을 물색하던 찰나에 네놈이 그렇게 질러버렸으니. 하지만 결과가 좋으니 어찌 됐든 잘 된 것 아니냐.'

이 악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역시 아까 인큐버스로 바꿔달라 했어야 한다는 생각과 선배가 고백을 받아준 건 어떻게 된 일인지에 대한 혼란 속에 머리가 복잡할 때, 눈시울이 붉게 달아오른 선배가 물었다.

"그런데, 옆에 그건 혹시 악마야?"

"네? 네……. 네? 선배 이게 보여요?"

선배와 악마를 번갈아 쳐다보니 선배는 본래 보이지 않아야 했던 존재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고, 악마도 세차게 퍼덕이는 날개가 나만큼이나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인간, 어떻게 내가 보이는 거지?"

"그야 내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

그렇게 말하는 선배는 어느새 입고 있던 옷은 순백의 드레스로, 약간의 갈색이 감도는 검은색이던 머리카락은 백금색으로 변해 누구나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천사 그대로의 차림으로 변해있었다. 그럼에도 이전의 용모는 그대로인 것이, 역시 같은 여자도 반할 정도로 이쁘려면 천사쯤은 되어야 하는구나라고 무심결에 생각해버렸다.

"천사가 왜 인간의 모습으로 이딴 곳에!"

"뭐 그런 시시한 일은 됐고. 그것보다 후배님, 설마 이 악마 따위와 계약해 버린 걸까?"

왠지 모르게 추궁당하는 분위기에 험악함을 느껴 속으로 떨고 있자니 악마가 소리쳤다.

"하! 그래! 이 인간은 너와 사귀게 해달라고 나에게 빌었고 방금 그것으로 계약은 성사되었다! 굳이 너와 내가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이 인간의 여생은 너와 행복하게 보내고 마지막에 내가 영혼을 거두러 오면 되는 간단한 이야기다."

그렇게 선언한 악마는 계약 완수의 징표로 나의 손등에 징표를 새기고 원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려 하자, 선배가 악마의 손에서 나의 손을 잡아채며 저지했다.

"잠깐. 사귄다고 한 적은 없는걸?"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네가 저 인간을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이제 와서 계약을 파기하려 해도 이미 수행된 이상 헛수고다."

"나는 '기뻐'라고 했지, 알겠다라고는 안 했어."

"무슨 그런 억지를……!"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과 함께 악마의 날개가 세차게 펄럭였다.

"하! 좋아. 이게 얼마 만의 계약인데. 이대로 물러나진 못하니 인정하게 할 수밖에 없지."

편의점 내부가 일순간 어둠에 휩싸이고, 처음 악마를 소환했던 것과 유사한 마법진이 발아래 깔리더니 검보라색 연기가 차올라 사방을 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는 사라지고 형광등의 빛도 돌아오고 보니, 악마의 허리춤에서 돋아난 날개는 사라지고 두 발로 땅을 딛고 선 모습이 마치 인간과도 같았다.

"내가 이 인간을 유혹하여 네 입에서 연인 사이임을 자백하게 하겠다."

"어……, 어째서 저를 유혹……?"

"내가 네놈을 유혹하는 것이 싫다면 저 천사가 서로 연인임을 인정하고 나를 돌려보내면 될 것. 끝내 인정하지 않고 네가 나에게 반해버린다면 그대로 영혼을 취하면 되는 일이니, 얼마나 확실한 해결 방법인가. 물론 나에게 빠지지 않을 인간은 결코 없을 것이다만."

"우리 후배님은 나에게 푹 빠져서 악마 따위는 눈에 들어올 겨를도 없을걸?"

그렇게, 인간인 나를 사이에 둔 악마와 천사의 유혹 대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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