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마음처럼 봄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 이른 아침부터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퍼부었다. 게다가 하늘에서 플래시까지 터트리며 번개같이 사진을 찍길래, 꼭 동의 없이 촬영되고 있는 트루먼 쇼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독일에서 온 이방인을 만난 후 세상이 저를 놀리고 있다.

지민은 재이에게 전화를 해 원룸으로 데리러 와달라고 한 후, 비싼 외제차를 타고 편안하게 세트장으로 출근을 했다.

짐을 넣을 수 있는 라커룸은 회의실 안에 있기에, 회의실 문고리를 열려던 지민은 멈칫했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부스럭거리며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지민은 말없이 문고리에서 손을 뗀 후에 조심히 벽에 기대고 여자 스태프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혹시라도 옷을 갈아입는 중이라면 들어가는 게 큰 실례이기도 하니까. 부품실을 정리해서 남자 대기실을 따로 만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절약도 하고, 다음 사람 눈치 볼 필요도 없게.

 

“맞다. 은주 언니. 어제 어떻게 됐어요?”

 

지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여주인공 고은주와 그녀의 스태프가 회의실 안에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고은주가 지금 이 시각에 회의실에 왜 있지?

아무래도 밖에 비가 와서 차 안에서 옷 갈아입고, 메이크업하기 불편했었나 싶었다. 고의가 아니더라도 여배우의 대화를 뒤에서 몰래 듣는 것은 취미가 없다. 그냥 짐 들고 세트장으로 가려는 순간, 고은주의 목소리로 발음된 이름은 지민의 발길을 잡았다.

 

“정국씨랑? 아, 완전히 망했어.”

 

지민의 몸이 굳었다. 마치 신발 밑창에 접착제가 붙어 있는 것처럼 바닥과 한 몸이 되었다. 머릿속에서는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고 지민의 이성이 지시했다. 하지만 뇌와 몸의 생각은 일치하지 않았다. 몸은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켰다.

 

“왜요? 데이트하러 나간 거 아니었어요?”

“데이트는 무슨…. 큰일 났어. 이제 정국 씨한테 말도 못 걸게 생겼어…. 오늘 촬영은 어떻게 해.”

 

고은주의 목소리는 점점 울상이 되었다. 

오늘 촬영할 장면이 뭐였더라. 지민의 뇌가 빠르게 돌아갔다. 오늘은 테오와 연우의 키스 장면이 있었고, 그 장면을 여자친구인 사라에게 들키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화가 난 사라는 테오에게 돌진하여 연우가 보는 앞에서 키스를 시도하여 테오에게 남은 연우의 자국을 지우려 한다.

 

“에…? 둘이 같이 나갈 때만 해도 괜찮아 보였는데.”

“나갈 때까진 분위기 좋았어. 맞다. 그것도 어떻게 해서 나간 건 줄 알아? 정국씨가 처음엔 안가겠다고 했거든. 별거 아니고 감독님 커피 사러 나간다고 하니까 갑자기 태도 바꾸면서 자기가 사겠다고 따라오더라?”

“어머. 스태프들 챙기네. 자상하기도 해라.”

 

무의식중에 목을 길게 빼고 있던 지민은 갑자기 은주의 입에서 자신이 거론된 충격으로 목이 거북이처럼 뒤로 쑤욱 들어갔다.


“뭐…. 자상한 거는 맞긴 하는데. 아무튼. 커피숍 도착하자마자, 내가 입술 들이댔거든.”

“그럼 성공한 거 아니에요?”

“아니야. 스치기만 했어. 정국 씨가 왜 이러시냐며 나를 확 밀더라고.”

“네…?”

 

꽤나 충격적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둘의 대화에 지민의 동공은 점점 확장되었다. 그렇다면 어제 목격했던 정국의 입술 위 잔여물은 억지로 들이댄 흔적이라는 거지?

 

“표정 완전…. 뭐 묻은 거 같은 표정으로 싸늘하게 말하는데. 나 진짜 무섭더라니까.”

“그렇게까지 밀칠 이유가 있대요? 요즘은 만나는 사람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애인 자주 바뀌었던 파파라치 사진도 다 최소 1년 전 사진이라면서요. 그 후에는 찍힌 것 없다던데….”

“말은 안 해주더라. 근데 누구 있나 봐. 자기는 나한테 사심 일 퍼센트도 없으니까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라고 그러더라고.”

“아….”

 

그녀의 스태프가 안타까움에 탄식의 소리를 냈다.

 

“더 웃긴 건 뭔 줄 알아? 커피숍 앞에서 박 감독님 만났잖아. 정국 씨는 차 안에서 나 뿌리치고 나가려다 박 감독님 발견하고 한숨을 팍 쉬는데…. 진짜 자살 각….”

“…에? 박지민 감독님이요?”

“어.”

 

또 대화의 중심이 된 지민은 숨 쉬는 법을 까먹는 것처럼, 들숨을 마신 채 그대로 있었다. 작은 갈비뼈가 안쪽으로 오그라들며 폐부를 찔렀다.

 

“우리 발견하시고는 둘이 뭐하냐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보시는데…. 나는 이미 거절당한 상태고…. 아…. 나 미치겠네! 진짜.”

“뭐라고 변명했어요?”

“몰라, 하도 경황이 없어서 기억도 안 나.”

 

제 표정이 그렇게 심각했었나? 그냥 확인차 고개를 더 앞으로 들이밀었던 기억뿐이었다. 회의실 안에서는 점점 더 징징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고은주는 전부터 자기와 친분이 있는 여자 스태프들에게 정국에게 관심 있다며 공공연하게 말했고, 잘 어울린다는 말을 꽤 들으며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았다. 결국엔 실패했으니 풀이 죽어있는 건 당연하기도 했다.

 

“어떡해요. 언니….”

“오늘 아침에 촬영장으로 오는데 진짜…. 도망가고 싶더라니까? 설마 정국 씨가 오늘 촬영하면서 나한테 막 모르는 척하고 그렇진 않겠지? 촬영에 지장이 있을까 봐 걱정된다고.”

“에이, 설마요….”

 

지민은 조용히 날숨을 내쉬었다. 잠깐의 말다툼으로 더 엉킨 실마리는 손쉽게 가위로 싹둑 잘려나가 한 번에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바닥으로 실마리의 잔해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제야 이유없이 냉랭하게 굴던 자신 때문에 쫓아와 붙잡고 물어보던 이유를 알았다.

정국도 억울했을 거다. 잘못한 거라고는 고은주 따라간 거밖에 없을 텐데. 심지어 제게 그 흔한 변명하지도 않았다. 저라면 키스 당한 거라고 오히려 노발대발 대들며 화를 낼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왜 마음속에서 따뜻한 물이 퍼지는 것처럼 안도감이 드는지 모를 정도였다. 이상하게 다리가 풀려 후들거렸다.

 

“짜증 나 진짜. 전 정국은 왜 그렇게 키스 연기를 잘 하는 거야? 사람을 홀려놨으면 책임져야지 이 고생을 하게 만들어!”

 

고은주의 외침에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아랫입술을 만지작거렸다. 통통한 입술은 하얀 손가락이 만지는 손길을 따라 부드러운 크림처럼 양옆으로 흔들거렸다.

 

 


*

 

 

세트장엔 적막이 감돌았다. 테오와 연우의 감정씬이라 모두 숨을 죽인 상태였다. 지민은 자신에게 고백한 테오를 보며 혼란스러워하는 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외꺼풀의 하얗고 청순한 미소년의 외형이었다.

 

[난…. 난 네가 무슨 소리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모르겠어?]

[사실 난….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머리를 마구 흔든 뒤, 애절한 표정의 연우가 고개를 든다. 그리고 한참 방황 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테오의 얼굴을 간절하게 쳐다본다.

집중하던 지민에게 재이가 다가와 속삭였다.

 

“야. 저 안절부절못한 얼굴 봐봐. 눈썹 내려간 거 하며. 너랑 진짜 똑같이 생겼다. 우리 스태프들 다 그 소리 중이야.”

“…뭐?”

 

지민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며 인상을 썼다. 완벽하게 집중한 상태였는데 재이가 깨트린 것이었다.

 

“도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거야….”

“하 지수 씨도 동감하는데 이쯤 되면 너도 이젠 인정해라.”

 

속으로는 뜨끔했다. 솔직히 제가 봐도 비슷했다. 하지만 겉으로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연우야. 내가 네 맘 알아차릴 수 있게 해줄게.]

[…]

[무르는 건 없어.]

 

지민은 다시 정국의 연기에 집중했다.

단호하게 말한 테오는 대뜸 입술을 붙여오며 키스한다. 연우는 입맞춤을 거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테오의 어깨에 두 팔을 휘감는다. 연우가 자신을 받아주고 있는 걸 깨달은 테오는 연우의 뒤통수에 손을 대고는 좀 더 과격하게 혀를 놀린다.

 

“…”

 

지민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카메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촉촉한 두 입술이 부딪히며 젖은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정국의 새빨간 혀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모두 보일 정도였다.

문득 오늘 아침에 들었던 고은주가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게 전 정국은 왜 그렇게 키스 연기를 잘하는 거야?’

촉촉한 두 혀가 얽혔다. 뾰족했던 혀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입안을 훑고 지나갔다. 키스신을 지켜보던 지민이 은연중에 침을 삼켜 목울대가 울렸다.

뱃속에서 얌전히 잠자고 있던 물길이 파도를 일으킨다. 하얀 거품을 내며 거대한 모양을 만든 파도로 인해 점점 지민의 이성이 먹히고 있었다.

 

“…지민아?”

“어?”

 

물속에 잠식될 뻔했는데 갑자기 물길이 사라졌다. 현실 속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지민이 고개를 돌렸다. 재이였다.

 

“정국 씨가 너 부르잖아.”

 

지민은 허겁지겁 목을 빼고 카메라 위로 정국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키스한 티가 난 입술이었다. 번들번들한 입술을 가진 정국이 입을 열었다.

 

“컷 안 하실 거예요? 저희 키스 너무 오래 했는데….”

 

정국은 멀뚱멀뚱 쳐다보며 물었다.

 

“어…?”

 

바보같이 정국의 키스신에 빠져버려 적당한 장면이 나왔을 때 컷이라고 말하는 것도 잊은 상태였다. 머릿속에서 다음 장면까지 계산했었어야 했는데 혼자 망상 속에 빠져버렸다.

 

“언제까지 해야 해요?”

“아, 미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겁지겁 사과 했다. 결국엔 키스신을 다시 찍어야 했다. 보고 싶지 않은데 또 보고 싶기도 한 그 장면을 다시 봐야 했다.

 

“다시 찍을게.”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두 볼을 친 후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눈을 감고 집중하며 키스를 해야 하는 정국이 키스는커녕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 그 눈으로 지민이 든 카메라를 당당하게 쳐다봤다. 치켜뜬 눈은 안광을 만들었고 카메라를 뚫고 나왔다. 카메라 렌즈로 대신하고 있는 지민의 눈과 정국의 눈이 마주쳤다.

 

“뭐야…. 정국 씨 왜 저래.”

 

정국의 반항기 어린 모습에 스태프들이 수군댔다.

지민은 아까처럼 다시 수심이 깊은 호수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높은 수압이 자신의 배를 압박하여 토기를 일으켰다. 재빠르게 NG를 외치며 눈을 옆으로 돌렸다. 정국의 시선을 피해야만 했다. 감당할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지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국에게 홀린 듯이 걸어갔다. 충분히 서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앞으로 나아갔다. 상대역인 연우에게 잠시만 자리를 피해달라고 눈짓했다. 둘은 정면으로 대치했다.

 

“….”

“….”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언어가 아닌 눈과 눈의 감정으로 대화하는 것 같았다. 감히 침범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분명 다른 스태프들은 일부러 실수한 정국에게 지민이 혼내는 거라고 걱정하는 게 분명했다.

 

“정국 씨.”

“네.”

“카메라를 그렇게 쳐다보면 어떻게 해.”

 

스태프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나무라는 목소리는 조용했다. 오히려 조곤조곤하다는 말이 더 맞았다.

 

“다른 사람이랑 또 키스해야 하잖아요.”

“뭐?”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가 잘 못 했어요.”

 

해탈한 것처럼 심드렁한 표정과 하나도 죄송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지민은 기분이 상한 정국이 일부러 저항한 걸 모르지 않았다.

 

“그래. 그냥…. 좀 거슬려서 한 말이야.”

“뭐가 그렇게 거슬리세요?”

 

지민의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막혔다.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속을 꿰뚫어 보는 눈은 거짓말을 할 걸 알아차릴 게 분명했다. 지민의 눈빛이 갈 길을 잃었다. 허술함을 발견한 듯한 정국이 바로 되물었다.

 

“제가 거슬리시는 거죠?”

“…정국 씨가 거슬린다는 건 아니고.”

“저만 보면 이유 없이 화를 내시는 것 같아서 좀 억울해요.”

 

말관 다르게 상처받은 눈빛이었다. 정국에겐 전신에서 풍기는 무언의 분위기가 있다. 지민은 단둘이 계속 마주하고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예민함이 알려주는 위험신호였다.

 

“아닌데. 오해 있으면 풀어.”

 

힘없이 말한 지민은 세트장에서 벗어났다. 지민의 마른 등을 정국은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다.

 

 

 

*

 

 

 

이른 아침부터 재이에게 면박당한 지민은 조수석에 달린 거울로 얼굴을 확인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미리미리 말을 하라는 잔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유는 지민이 사는 건물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겨우 닦은 지민은 또 재이를 불렀다. 만나자마자 꼬락서니가 그게 뭐냐고 욕을 먹었을 때, 집에 있던 생수로 세수와 양치질 겨우 한 게 어디냐며 반박했다.

 

“그래서 집주인이 오늘 고쳐준대?”

 

운전하던 재이가 물었다.

 

“몰라. 상황 보고 이따 연락 준댔어.”

“앞으론 장 볼 때 물도 좀 많이 사다 놓고 그래라.”

“왜?”

“왜긴 왜야. 오늘같이 물 안 나오는 날 또 대비해야 할 거 아냐. 한동안 깔끔하게 하고 다녀서 웬일인가 싶었더니 오늘 다시 예전의 박지민으로 돌아왔네.”

“내가 깔끔하게 하고 다녔다고?”

 

지민은 캡모자를 눌러쓰며 답했다.

 

“응. 한동안 너 멋있다는 스태프들 엄청 많았는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며 흉보겠군.”

 

재이의 핀잔에 다시 한번 거울을 흘끔 쳐다보았다.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지민의 기준에선 충분히 양호한 편이었다.

세트장에 도착한 후, 재이는 1층에 있는 카페로 아침을 사러 내려갔고 지민은 옆에 붙어 있는 회의실로 들어왔다. 더 자고 싶다. 빈둥빈둥하던 지민은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는 잡지, 지큐 코리아를 발견했다. 정국의 시계 화보가 들어있는 잡지였다.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서 괜히 눈치를 보는 것처럼 잡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제우스가 선물로 주면서 절대로 열어보지 말라고 했지만, 호기심에 다가선 판도라처럼 무언의 힘으로 이끌리고 있었다.

허겁지겁 바로 정국이 나온 페이지를 찾아서 펼쳤다. 재이와 봤을 때보다 더 자연스레 사진을 훑었다. 정국의 솜털까지 다 찍힌 클로즈업 사진에서 시선이 멈췄다. 촉촉한 립밤을 바른 건지 붉은 물을 통통하게 머금은 듯한 예쁜 입술에 짙고 남자다운 눈썹이 대비되었다. 예술이었다.

지민은 다 읽지 못했던 인터뷰를 마저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성스레 답변한 정국의 답을 읽던 지민의 시선은 한 질문에서 멈추었다.

 

 

 

에디터: 한국 영화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특히나 좋아하는 영화가 있다면?

JK: 어릴 때부터 한국 영화를 많이 봤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우연히 ‘자연식당’이란 영화를 봤다. 박지민이라는 젊은 감독님이 찍으신 거다.

에디터: 전혀 들어보지 못한 영화다.

JK: 사실 그리 유명한 영화는 아니다. (웃음) 저예산의 독립 영화인 거로 알고 있다. 가족 없이 산속에서 혼자 사는 할머니가 자연의 재료로 자급자족하며 잔잔하게 먹고 사는 내용이고, 이 영화를 보면서 돌아가신 할머니가 계속 생각이 났다. 주어진 환경에서 이것저것 개척하는 모습이 우리 할머니 같았다. 할머니는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나를 키워주셨다. 혹시 삼겹살이랑 같이 먹는 명이나물이라고, 그거 아나?

에디터: 명이나물 모르는 한국인이 있나.

JK: 한국인 앞에서 내가 실수했다. (웃음) 어릴 때 할머니와 뮌헨 외곽 숲에 가서 명이나물을 캔 적이 있었다. 교포들은 다 아는 사실이긴 한데 유럽 숲에는 잘 찾으면 야생 명이나물도 있고 냉이도 찾을 수 있다. 그걸 알아낸 사람은 이민 1세대 할머니들이다. 독일 슈퍼에 있는 재료들로는 부족해서 찾으신 것 같다. 지금이야 한국 슈퍼가 크게 들어와 있지만 내가 어릴 땐 그랬다. 최대한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노력하셨던 할머니가 생각나서 되게 행복하게 봤던 영화였다. 어릴 적 추억이 투사가 되어 더 감명받은 것 같다.

에디터: 그렇다면 만약 박지민 감독님이 나중에 JK 에게 영화 출연 제의를 한다면 촬영할 생각이 있나?

JK: 당연하다. 날 출연시키지 않으신다고 하면 찾아가서 오디션이라도 볼 의향이 있다.

에디터: 안 그래도 항간에 지큐 코리아 화보 찍으러 한국 온 거 아니고 박지민 감독 찾아오려고 왔다는 소문이 있다. 박 감독이 그렇게 좋나?

JK: 하하. (여기서 JK는 부끄러운 듯 웃었다) 관련해서는 노코멘트 하겠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일단은 박지민 감독님 영화에 감동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에디터: 혹시라도 이 인터뷰를 보게 될 박지민 감독에게 한마디라도 남긴다면?

JK: 안녕하세요? 전정국이라고 합니다. 제가 많이 좋아합니다. 팬이에요. (JK의 눈은 촬영 때보다 더 반짝였다.)

 

 

“뭐야….”


내 영화 오디션 보러 한국에 왔다는 소문이 있었어…?

지민은 또다시 말을 잃었다. 정국의 성실한 인터뷰 속에서는 저를 향한 깊은 애정과 존경심이 있었다. 박지민이란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처음부터 티를 내지 않았다. 만났을 때 영화 좋아한다고 언질도 안 해줬잖아. 심지어 억울하기까지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짐작이 갈 만한 일이 있긴 하다. 첫 만남에서 ‘기 싸움’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정국의 눈빛에서 흘러나오던 전류는 사실 관심이었던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만약 진짜 관심이었다면, 제게 호감을 사기 위해 진심을 담은 눈빛이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참된 마음을 오해했던 걸까. 머리 꼭대기에 앉아서 제압하려 하는 눈빛이라며 색안경을 썼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와 창피해졌다.

지민이 자신의 태도를 떠올리며 후회를 하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문 쪽을 바라보니 똑같이 놀라 동그래진 눈의 정국이 서 있었다.

 

“어? 감독님,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어? 어어. 안녕.”

 

후다닥 읽던 잡지를 덮고 밀었다. 완전 범죄를 위한 것이었다.

지민은 눈을 흘낏 던졌다. 수염도 깨끗하게 밀고, 로션까지 싹싹 잘 바른 듯한 말간 민낯의 정국을 발견했다. 자신과 완벽하게 대조된 모습에 괜히 부끄러워져 쓰고 있던 캡모자를 더욱 깊숙이 눌렀다. 잘 차려진 모습이 아니라서 오늘은 더욱 특히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감추려는 행동에 정국이 이상함을 감지했다.

 

“얼굴에 뭐 났어요?”

“어? 아니야.”

 

피부는 좋은 편인데…. 지민은 괜히 후드를 목까지 최대한 끌어올렸다. 그러자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해온다.

 

“어제 혹시 집에 안 들어가셨어요…?”

“…아냐. 집에서 잤어.”

 

절망스럽기도 했고 부끄러웠다. 망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꼭 밖에서 밤을 새운 것 같고 같은 낯을 하고 있었나 보다.

지민은 창피함에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피부를 뚫고 살짝 고개를 내민 아래턱 수염을 무의식적으로 가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쓸데없이 이렇게 하얘서. 얼마 없지만, 피부색과 대조되어 더욱 티가 날 것이다.

지민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국 씨 평소에 내 영화 좋아했어?”

“네.”

 

정국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가방을 넣었는지 라커룸이 탁, 하며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박지민 너는 그것도 몰랐냐고 정신 차리라는 소리 같아 정신이 번쩍 깼다.

 

“말하지, 그랬어.”

 

지민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저한테 말할 기회 안 주셨잖아요.”

“그…. 랬네.”

 

정국은 지민의 맞은편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적막 속이라 쌔액쌔액 아기 같은 숨소리는 점점 더 진해졌다. 까만 눈으로 요리조리 얼굴을 살피고 있는 것 같기에 지민은 턱을 가리고 있던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정국의 시선이 닿은 손등은 불길이라도 생긴 것처럼 화끈해졌다.

 

“저 감독님 영화 좋아한다고 여기저기 인터뷰 꽤 했어요.”

“그랬구나…. 난 못 들어봤어.”

“왜 소문이 안 났지. 그래서 일부러 지큐 잡지도 보내드렸는데.”

 

정국은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왜 직접 말 안 하고?”

“그건….”

 

정국은 망설이며 말한다.

 

“감독님이 호모 새끼 부담스러워하실까 봐요.”

 

제가 비꼰 말로 해학 하는 느낌이었다. 심하게 순수한 건지 성인군자처럼 성격이 착해빠진 건지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

그 순간 정국의 손이 쓱 코앞으로 왔다. 거리낌 없이 지민의 손을 붙잡았다. 당황해진 지민은 회의실에서 무슨 짓인가 싶었다. 하지만 오해완 달랐다. 정국은 그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뗀 것이었다.

 

“괜찮은데. 얼굴 굳이 가리지 마세요.”

 

왜 손 잡는 거라고 상상을 한 거야.

 

“왜….”

“가리시면 충무로에서 예쁘고 가난한 감독으로 유명하신 분 얼굴 구경할 수 없잖아요.”

 

재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는 능청스러움에 확 부끄러움이 끼쳤다. 눈을 마주칠 자신 따위는 없었다.

천만다행인 건지 아니면 둘만의 시간을 발행하는 불청객인지,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정국 씨 왔네?”

 

재이와 스태프들 그리고 정국의 눈치를 보는 듯한 여배우 고은주까지 들어왔다. 둘만 있어서 조용했던 회의실에서 각종 지방 라디오를 틀어놓은 것처럼 시끄러워졌다.

스태프와 배우들은 재이가 사 온 샌드위치와 커피를 전달받았다. 정국은 먼저 샌드위치 하나를 까서 지민에게 전달해주었다.

 

“고…. 고마워.”

 

또다시 슬금슬금 지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고은주는 정국을 한번 쳐다봤다가 지민을 한 번 쳐다보며 눈치를 보았다. 그 후 웃으며 지민에게 말을 걸었다.

 

“감독님. 오늘에서야 좀 감독님 같아요.”

 

대화를 밝게 바꿔보려는 시도였다.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양상추를 천천히 씹던 지민은 고은주에게 되물었다.

 

“저 박 감독님 평소에 되게 연예인 같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

“지금이 이상하다는 말은 아니고, 한동안은 엄청 깔끔하게 하고 다니셔서 그런가? 오늘 수염 남기신 모습이 좀 색달라요. 터프하게 하고 오신 것 같아서.”

 

뭔가를 깨달았다는 생각에 지민은 씹던 행위를 멈추었다. 그리고는 눈을 두 번 끔뻑거렸다.

웬일로 제가 매일매일 면도를 하고 다녔었구나.

지금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자동으로 정국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훨씬 깔끔하고 보기 좋으세요.’

포스터 촬영 날 매끈한 지민의 턱을 쳐다보던 정국이 던졌던 말이었다.

한동안 말이 없으니 재이가 고은주의 옆구리를 툭 쳤다.

 

“박 감독 외모 칭찬 별로 안 좋아해.”

 

씹는 게 느려진 지민의 기분을 눈치 보는 것처럼 고은주에게 소곤댔다. 하지만 이상하게 오늘은 외모 칭찬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 내내 정국이 제 얼굴을 못생기게 볼까 봐 눈치 본 상태였던지라, 기분이 좋아졌다.

지민은 괜히 물티슈를 찾아 입 주위를 깨끗이 닦았다. 도중에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은 오랫동안 시선을 잡아끄는 완력이 있었다.

 

 

*

 

 

스탠바이 들어가기 10분 전인데, 집주인의 전화를 받은 지민은 멘붕상태였다. 일주일 동안 잘 곳 없는 노숙자가 되게 생겼다. 수도배관공사가 잘못되어 일주일은 걸릴 거라고 했다. 잔뜩 미안한 목소리의 집주인은 그냥 다음 달 월세를 반값만 받을 테니 친구 집에서 못 자면 싸구려 호텔에서라도 자는 게 낫겠다고 덧붙였다.

지민은 간이의자에 앉아 촬영장 근처 싼 호텔을 열심히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싸도 1박에 5만 원이고 일주일이면 35만 원이다. 누워서 잠만 잘 곳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그냥 모텔로 갈까.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지민은 눈앞에 재이를 포착했다. 수도공사 때문에 일주일 동안 다른 곳에서 자야 한다고 설명한 지민은 바로 요점으로 들어갔다.

 

“나 일주일만 너희 집에서 자면 안 되냐? 내가 형한테 따로 연락해보면 되잖아. 형도 나 예뻐하고.”

 

하지만 재이는 기겁을 하며 답하는 것이다.

 

“어디 커플 사는 집에 오려고 그래?”

“너희 집 방 많아서 남잖아.”

“우리 아직 신혼이야. 맨날 신음소리를 들을 자신 있으면 와서 자던가.”

 

하아…. 지민은 마른세수했다. 재이와 동거하고 있는 형은 심지어 제가 소개해준 사람이었다. 둘의 사랑을 연결해준 까치인데도 은혜도 모르고 내쳐버리다니. 그 일주일 동안 그냥 35만 원 낭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해진 지민은 더욱더 저렴한 걸 찾아보겠다는 집념으로 폰을 다시 꽉 쥐었다.

그때, 누군가가 지민의 등을 톡톡 쳤다.

 

“감독님.”

 

익숙한 목소리에 지민이 고개를 돌렸다. 정국이 쭈그려 앉아있었다. 언제 또 슬금슬금 다가와 뒤에 앉아있는 거지….

정국은 오늘의 촬영을 위해 머리에 오일을 잔뜩 발라 젖은 머리를 연출해놓은 상태였다. 평소처럼 건방지고 반항적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지각하지 못한 끌림에 가까웠다.

 

“응?”

“저 지금 사는 성수동 아파트에 방 많이 남는데 오실래요?”

“엉?”

 

재이와의 대화를 들었는지, 일주일 동안 자신의 집으로 오라며 아무렇지 않게 제안한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부분이라 지민은 당황하여 대답하는 법을 잃어버렸다.

 

“우리 집 엄청 커요. 방음도 잘 돼요.”

 

지민은 정국이 무슨 의도로 방음을 운운하는지 몰랐다. 잠만 자면 돼서 굳이…. 방음이 잘되는 방은 필요가 없는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지민에게 정국이 청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에서 탄산과 같은 기포가 터지는 것 같았다.

 

“농담이에요. 재이누나가 신음소리 얘기해서 그냥 놀려봤어요.”

 

농담할 기분 아니라며 지민은 긴 눈매를 더 길게 늘였다. 매섭게 쳐다보겠다는 의도였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귀여운 애교로 보일 수도 있는 표정이었다. 활짝 웃은 정국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오세요. 저 혼자에요.”

“정국 씨네서 자도 된다고…?”

“그럼요. 저야 환영이죠.”

“왜? 나랑 있으면 불편하지 않아?”

“왜 불편해요? 저는 감독님이랑 대화하는 상상만 해도 너무 재밌을 것 같아요. 감독님한테 연기지도도 받으면서 이참에 친해지면 제가 영광이죠.”

 

정국의 입에서 그럴듯한 이유가 술술 나왔다. 원래도 한국말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청산유수가 따로 없었다.

지민은 다시 한번 정국의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삼겹살 식당에서 보았던 주황색 격렬함을 사라지고 순수한 반짝임만 남은 상태였다.

지금까지 제가 오해를 했던 사람인데 같이 지내면 조금 힘들지 않을까….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끄는 관성에 의해 생각이 바뀌었다. 가끔 짙은 눈빛에 의해 울렁거려 심장박동수를 비정상으로 만들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니 신세 져도 괜찮을 것 같다.

또 쿨한 마인드의 이방인은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것 같으니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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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독일 교포로 설정한 이유

A: 제 글을 이미 많이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은근 유럽 au 로 많이 씁니다. 그건 제가 유럽에서 사는 교민이라서 유럽 배경이 더 쉽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백조의 재도약으로 이미 프랑스 교포 한 번 썼고, (다잉 스완에서도 지민이가 독일에서 활동하는 발레리노로 나옵니다.) 이번에는 독일 교포 vs 이탈리아교포에서 고민했는데 곧 나오는 정국이의 순정과 설정된 성격으로 인하여 독일로 선택했습니다. 독일 교포들은 대한민국 경제사에 기반하여(해외 인력수출) 자수성가한 분들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이미지나 성격이 좀 순수하고, 우직하며 바릅니다. 2006년 하이델베르그에 놀러 갔다가 서점에서 파독 간호사 출신이셨던 주부를 우연히 만났는데, 한국인인 제가 너무 반가웠던지 어눌한 한국어로 연락 달라며 이메일을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제게 이탈리아교포들은 양아치 같다는 편견이 좀 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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