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드 오브 히어로즈 요한 테일드x여로드

※ 평화로운 어느 시간선의 이야기

※ 하드 8-16까지 읽고 쓰는 글입니다. 미미한 스포일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른 숨소리를 뒤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제 팔로 감쌌던 자리에 이불 덮어주고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선다. 옷자락에 스민 향은 털어내지 않아도 금세 사라질 테다. 밤새 한 품 가득 안고 있던 온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듯이. 

어느새 푸르게 밝아오는 새벽하늘이 침실 문을 닫고 나선 요한을 맞이한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몸이 무겁다. 은은한 피로감이 온몸을 짓누르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그 속에 든 정신만은 말짱해 괴로웠다. 문을 등지고 선 요한은 왼손으로 제 이마와 관자놀이를 짚었다. 뒤늦게 두통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런 통증보다는,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이 더 난감했다. 그가 손을 내려 제 가슴께를 눌렀다.

로드의 침전을 나서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있었다.

 

[요한로드] Take Me to Church (1)

 

 ‘내가… 불면증이라고?’

루인에게 그렇게 반문한 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왕실 의사가 처방한 약도 먹어보고 프리스트들의 도움을 받아봐도 효과가 없어 슬슬 고민이 되던 차였다. 식사와 수면이 건강의 기본이라고는 하지만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여파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평소처럼 왕좌를 지키는 것조차 고역으로 느껴질 정도라니. 알현이 끝난 틈을 타 로드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척 눈을 감았다.

수면에 문제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 없다. 그녀는 종종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반인 수준의 무력’을 가진 군주라고 악의 없는 평가절하를 당하고는 했지만, 그 ‘일반인’으로서는 매우 건강해서 지금껏 수면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머리만 대면 바로 잠드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단 자기로 마음먹으면 잠들기까지 10분을 넘기지 않았다. 그런데 불면증이라니.

 ‘나도 모르는 스트레스를 받았나?’

 ‘그럴지도 모릅니다. 로드께서는 대체로 그런 부분에 무감각하신 편이니까요.’

 ‘루인 경이 그걸 어떻게 알지?’

루인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건 그의 말에 따라 하루 정도 정무를 쉰 적도 있었다. 그러나 불면에는 별 효과가 없기에 약도 먹어보고, 바네사의 연주도 들어보고, 샬롯의 정령들 곁에서 잠도 청해보았건만…… 결국은 혼자 뒤척거리다 늦게 잠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잠들어도 기상 시각은 정해져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칼같이 지켰다. 수면 상태가 나빠도 일과는 똑같이 진행하는 게 당연했다. 그렇게 피로가 누적되면 조만간 쓰러져 자겠거니 생각도 했고. 그러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불필요한 걱정은 끼치고 싶지 않아 루인과 샬롯, 바네사만 조용히 불러 입단속까지 부탁했지만 슬슬 로드의 눈 밑에 생긴 검은 자국을 눈치채는 기사들이 늘어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헬가가 약수와 약초를 가져다주었는데 너무 써서 기절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라도 잠들라는 의미였다면 성공했지만. 종일 속에서 시릴 정도로 청량한 풀냄새가 올라와 그날 낮에는 피로를 느낄 정신도 없었다. 그마저도 딱 하루였지마는.

이제 어떤 방법을 써봐야 할까. 일주일간 불면에 시달린 로드는 잠자기에 최적의 조건으로 맞춰진 온도, 습도, 조명 속에서도 눈만 깜빡이며 누워있었다. 어차피 잠이 안 온다면 이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써보겠다며 책을 붙든 적도 있었으나, 루인이 손수 방 안의 책을 모조리 거둬간 덕분에 가만히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현명한 행정관이 아닌가.

 -로드, 샬롯이에요. 들어가도 될까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 불면을 치료하기 위해 몇 번 오간 방을 기억해뒀던 모양이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었지만 로드는 허락의 답을 돌려주었고, 가벼운 차림으로 쟁반에 뭔가를 받쳐 든 샬롯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수면용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여전히 소녀 같았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꿀우유예요, 로드. 제가 자기 싫어할 때 엄마가 만들어주시던 건데, 이것만 마시면 저도 모르게 잠들어버렸거든요. 로드도 꿀잠을 주무시게 될 거예요.”

 “풋… 그것도 린이 알려준 말인가?”

 “맞아요. 린은 유용한 말을 참 많이 알고 있다니까요? 아무튼 어서 마셔보세요. 맛있기까지 하다구요.”

 “그래, 고마워. 샬롯.”

한 컵 가득 가져온 우유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적당한 온도로 데워 따뜻한 컵을 한동안 감싸 쥐고 있던 로드는 자신이 마시는 걸 지켜볼 모양인 샬롯에 얼른 컵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우유는 생각보다 더 달고 부드러웠다. 아마도 샬롯은 그녀의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것보다 꿀을 더 많이 섞었을 거다.

 “사실 잠이 안 올 때는 누가 재워주는 게 제일인데, 저는 그런 데는 소질이 없어서 말이에요. 어쨌든 잘 자요, 로드!”

컵을 도로 받아든 샬롯이 웃었다. 방을 나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여 로드도 작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퍽 상냥한 이들을 동료로 둔 것 같다.

샬롯이 나간 뒤 로드는 부쩍 짧아진 양초를 불어 끄고 침대 깊숙이 몸을 묻었다. 달고 따뜻한 우유를 마셔 몸이 살짝 노곤해졌다. 이번에는 효과가 있으면 좋겠는데. 깃털을 잔뜩 넣은 베개는 푹신했고, 매끄러운 이불은 적당한 무게감으로 몸을 감싸주었다. 이대로 잠든다면 좋은 꿈을 꿀 것 같았다. 그러면 꿈속에서도 잠을 자야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샬롯의 우유는 기분은 조금 풀어줄지언정 로드를 잠들게 하지는 못했다. 몸은 여전히 노곤했지만 역시나 잠은 오지 않았다. 눈꺼풀은 무거운데,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에 뭔가 가득 채워지는 것처럼 아팠다. 몸과 머리는 무겁게 짓누르면서 눈은 감겨주지 않는 묘한 피로감이 온몸을 맴돌았다. 그녀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머릿속이 윙윙 울렸다. 대체 뭘까. 원인만 알면 해결할 수 있을 텐데, 약도 뭣도 듣지 않는 불면은 밤마다 머릿속의 뭔가를 부풀렸다. 알 수 없는 불쾌함과 부채감이 그녀를 각성시켰다. 오늘 밤도 수십 번은 뒤척이겠구나 싶었다.

*



다음날, 마지막 지방관의 알현을 끝낸 로드는 언제나처럼 왕좌에 팔을 걸치고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수면의 질과는 별개로 일과는 무사히 마쳤지만, 오늘 밤에도 잠이 오지 않을 거란 생각에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생각 이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이런 것에 ‘무감각’하다는 스스로조차 이를 자각할 정도라면 사안이 가볍지는 않았다. 아발론의 군주로서 그녀가 내건 기치는 전통적인 군주의 것과는 달랐지만, 여느 국가든 지도자의 건강은 중대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샬롯이 우유까지 타줬는데, 미안하게 돼버렸군. 그런 생각을 하며 로드의 시선은 자연스레 샬롯을 향했다. 샬롯은 로드의 가장 충직한 기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드문드문 들리는 내용에 로드는 저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금발 머리의 기사가 고심하듯 턱을 매만졌다.

 -당분간 달콤한 간식거리는 가져가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아이들의 치아 건강을 위해서요. 

 -너무 제가 좋아하는 것만 가져갔나 봐요. 단체로 이가 썩었다니… 정령들에게 도움을 청해볼까요?

 -샬롯 경의 잘못이 아닙니다. 바르게 양치하는 법을 가르쳐 주면 될 일이죠. 그러니 이번에는 먹을 것 대신 새 칫솔을 가져갈까요?

아이들에게 양치질을 가르치는 요한이라. 로드는 설핏 올라간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언젠가 샬롯이 요한과 함께 종종 고아원에 봉사활동을 간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한 번은 같이 가겠다고 생각했는데 바빠서 미루다 보니 이렇게 됐군. 이번 방문에는 무엇을 가져갈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두 기사를 보며 로드는 그들이 고아원 아이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옷자락이 삐져나온 지도 모른 채 아이들과 테이블 밑에 몸을 숨긴 샬롯, 그걸 알고도 모르는 척 ‘으음… 다들 도통 어디로 숨어버린 건지 모르겠군요.’ 하며 그 옆을 지나치는 요한……

 “요한 경.”

조용한 상상의 나래 끝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로드는 곧장 요한을 불렀다. 성실한 기사는 바로 제 주군을 돌아보았다.

 “샬롯 경, 잠시… 네, 로드. 부르셨습니까?”

 “잠시 이리로.”

금발의 기사가 왕좌에 앉은 로드 곁에 섰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드가 몸을 숙여달라 손짓하자, 그는 금세 허리를 굽혔다. 로드가 몸을 움직여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듯 진지한 목소리다.

 “괜찮다면 오늘 밤 열 한 시쯤……내 침실로 와줄 수 있겠어?”

 “네, 알겠습니다.”

즉답이었다. 이유조차 묻지 않는 것이 실로 담백한 충신이라, 로드는 순간 부연 설명을 해야 했던 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도로 자세를 바로 하고 밤에 뵙겠노라, 고개를 숙이는 요한의 얼굴이 산뜻했다. 그러고는 곧장 샬롯에게 돌아가는 그를 보며 로드는 어딘가 마음이 무거웠다.

*


열 한 시 정각, 요한 테일드는 로드의 침실 앞에 서 있었다. 주군의 부름에 바로 응하기는 했지만, 야심한 시각에 침실로 불려온 건 처음이라 조금 긴장됐다. 그러나 단 일 분이라도 늦을 수는 없어 요한은 가볍게 문을 두드렸고, 곧바로 ‘들어와도 좋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조심스레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책상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요한은 로드가 침상에 들었음을 알아차렸다. 하얀 캐노피 너머로 로드의 모습이 언뜻 비치자 그는 즉시 고개를 돌렸다. 로드의 성실한 기사는 그제야 ‘야심한 시각에 군주의 침실로 불려가는 가신’의 도식에서 일말의 불충함을 읽어냈다. 그러나 이는 분명 제 부족함에서 비롯된 불충일 것이므로, 요한은 고개를 똑바로 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요한?”

로드가 문 앞에 꼼짝 않고 서 있는 요한을 불렀다. 주저하며 고개를 든 그의 눈에 흰 침의를 입고 머리를 풀어 내린 로드가 들어왔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한 요한은 조금 전 당치도 않은 생각을 한 것이 부끄러워졌다.

 “서 있지만 말고 이리 가까이 와주겠어?”

하지만 로드의 명을 따르는데 익숙해진 몸은 마음과 다르게 곧장 움직였다. 긴장으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으나 요한은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로드가 앉아있는 침대의 캐노피를 걷었다.

 “…….”

최소한의 격의도 없이 마주하게 된 제 왕의 모습에 요한은 순간 인사를 하거나 용무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잊어버렸다. 잠자리에 들기 직전 로드의 모습에는 왕좌에 앉아있을 때의 위엄도, 일부러 힘을 준 듯한 딱딱한 눈매도 없었다. 그 언젠가 그림으로만 보았던 공주 시절의 얼굴이 요한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동시에 새로운 도식이 한 가지 더 떠올랐다. 이는 마침내 레이디의 침실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은 기사와 같지 않은가.

 “괜찮다면 앉지.”

 “예?”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얼굴을 붉힐 새도 없었다. 요한은 침대 위를 두드리는 로드를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의 이성은 무장까지 다 갖춘 신하에게 제 침대에 앉으라 명하는 로드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 침대 위에. 사양하지 말고.”

그러나 요한의 속 깊은 로드는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침대 위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이 희었다. 늘 검은 장갑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그 맨손을 보는 것만으로도 귓가가 뜨거워져 요한은 속으로 곱지 못한 말들을 주워섬겼다. 침대 위의 로드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양의 문제가 아닙니다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말을 삼킨 요한은 결국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대어 앉은 로드의 곁에 조심스레 자리를 잡았다. 도저히 대면을 피할 수 없는 거리였다. 요한은 어째서 이렇게 귓가가 뜨겁고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려 하지 않고 저를 부른 주군과 가만히 눈을 맞추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 나른한 얼굴에 피곤함이 엿보여 얼른 나가야 하는 게 아닌가, 했지만 마찬가지로 그를 찬찬히 보고 있던 로드가 입을 열었다.

 “경이 아이들을 잘 재운다고 들었는데.”

 “…예?”

아까부터 멍청하게 되묻기만 하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로드가 저를 부른 상황, 전혀 예상치 못한 맥락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요한을 당황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나를 좀 재워줘야겠어.”

 “……예?”

벌써 세 번째다. 그러나 여기서는 광명의 기사는커녕 아발론의 그 어떤 기사가 와도 다른 반응은 할 수 없었을 거다.

로드는 입만 벌리고 굳어있는 요한을 보고 부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밤에 뵙겠노라 고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머뭇거리며 당황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슬슬 불면 증상이 시작되는 게 느껴져 얼른 용건을 해결하고 싶었다. 그녀는 나른하고 피곤하나 정신은 꺼지지 않아 괴로운 기분을 꾹 눌렀다.

 “실은 요즘 불면증이 조금 있어. 그런데 누군가 ‘재워줄 사람’을 구하는 방법은 쓴 적이 없어서 경을 불러본 거야.”

 “…왜 진작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경이 이런 표정을 했을 테니까.”

로드는 요한의 미간이 금세 걱정의 빛으로 찌푸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 표정은 언뜻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로드는 왜 요한이 안경을 고집했는지를 이런 때마다 이해하고는 했다. 때로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이 걱정으로 찌푸려지면 상대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도 하는 법이다. 물론 로드는 안경으로 가리지 않는 그대로의 얼굴이 더 좋았다.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샬롯에게 들으니 경이 고아원 아이들을 그렇게 잘 재운다던데. 그러니 나도 한번은 재워줄 수 있겠지?”

 “아, 저는…… 어린아이들만 재워보아서…”

 “음. 그래?”

요한의 얼굴에 곤란함이 떠올랐지만 미간은 펴지지 않았다. 로드는 문득 그 미간을 꾹꾹 눌러서 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제야 호출의 이유를 깨달은 제 기사를 조금 놀려주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조슈아 경을 불러와야 하나. 항상 나른하니 곁에 두면 절로 눈이 감길 것 같-”

 “…제가 하겠습니다.”

언뜻 그 얼굴에 스친 거부감이 어떤 연유에서 나온 건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로드는 모르는 척 손을 내밀기를 택했다. 오늘은 일단 잠들어야 했다. 그녀는 이 순간 저와 똑바로 눈을 맞춘 요한에게 잠잠히 웃어주었다. 이유야 어쨌든 참으로 다정한 기사다. 왕의 위를 가진 자라도 저 역시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누군가의 다정함에 기대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는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요한일 때가 잦았다. 그 다정함의 원류에 있는 감정을 헤아리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겠지만.

요한의 승낙 아닌 승낙에 로드는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재울 생각이지? 어떤 방법이든 좋아.”

 “책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그건 루인이 시도해봤지만 소용없더군.”

 “……아.”

아까 전 조슈아의 이름을 꺼냈을 때와 같은 감정이 요한의 얼굴을 스쳤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또 잘못된 농담을 했나 보군. 로드는 곧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흠흠, 아이들은 어떻게 재웠지? 요령이 있지 않나?”

 “특별한 요령은 없습니다. 품에 안아주면 대부분 잠이 들어서…… 하지만 로드께도 같은 방법을 쓸 수는 없습니다.”

 “왜지?”

 “예?”

요한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이렇게 되묻는 것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불가항력이었다. 지금, 어째서 당신을 안아서 재우면 안 되냐고 물으시는 건가? 대답이 필요한 물음이란 말인가? 요한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대답을 종용하며 바라보는 눈빛에 그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는 로드의 기사이고 로드께서는 저의 주군이시니… 기사 된 자로서 주군을 품에 안는, 아니… 재우는 것부터가 군신의 도리에 어긋나는……”

 “그러니까 내가 군신의 도리에 어긋나는 명을 했기 때문에 따를 수 없다?”

 “예? 아니, 그게…”

군신의 도리를 따지는 분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그런 말을 꺼낸 자신이 우스웠다. 하지만 이것 외에 할 수 있는 대답에 일말의 불경함도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없어서, 요한은 제대로 해명할 수 없었다. 만일 하문하시면 그마저도 대답해야 할 테지만, 묻지 않으시길 바랐다. 아직은 그랬다. 

 “요한.”

침대 위에 놓인 요한의 손 위로 로드가 살며시 손을 겹쳤다. 움찔하는 손을 가벼이 누른다.

 “군신의 도리에 어긋난다면 오랜 친구로서 부탁하지. 내가 잠들 수 있게 도와줘.”

 “…로드.”

 “그대가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나를 재워보도록 해. 잠들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아.”

요한의 마음속에서 동시에 두 가지 감정이 솟구쳤다. 더없이 신뢰받고 있다는 기쁨과 그렇기에 더욱 확실해진 제 로드와의 거리에 관한 감정이었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이름도 붙이기 전에 정의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요한은 실핏줄이 불거진 로드의 눈을 조용히 바라보며, 확연히 다가오는 그녀의 피로감에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떠오르는 질문과 감정 따위는 정도를 모르는 제 충정의 일부일 것이라 되뇌며, 검으로서뿐만 아니라 이리도 저를 불러주신 로드의 필요를 충족시켜 드리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잠시 캐노피를 걷고 나간 요한이 무거운 무장을 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대로 로드의 침상에 들 수는 없었으므로. 다시 휘장 안으로 들어오자 로드는 이미 침대에 누워있었다. 요한은 처음 캐노피를 걷을 때 망설였던 것과 달리,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민첩한 동작으로 그 곁에 몸을 누였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그대로 로드를 가슴팍에 끌어안는다. 사방에 그녀의 향기가 가득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지, 제 기사인 남자의 품에 안겨 아무런 움직임도, 말도 없었다.

 “…요한”

 “네, 로드.”

 “정말 이렇게만 했는데 아이들이 잠들었단 말이야?”

 “…작은 아이들은 안아 들고, 조금 큰 아이들은 함께 침대에 누워 토닥여주고는 했습니다.”

 “그럼 나도 토닥여주지 그래.”

 “그…… 예.”

대답은 했지만 차마 토닥일 수는 없었다. 감히 로드의 침대 위에서 그녀를 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군신의 예는 물론 기사도까지 깡그리 무시한 기사가 된 것이니까. 비록 로드께서 그걸 원하셨다고는 해도 말이다. 그래서 요한은 주문대로 토닥여드리는 대신 그녀의 머리 위에서부터 뒷머리까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손에 감기는 머리카락이 비단실처럼 고왔으나, 그 감촉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숨을 쉬느라 작게 오르내리는 몸, 거친 손바닥에 닿는 매끄러운 감촉, 작지만 분명한 온기가 점점 요한의 숨을 잦아들게 했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노곤해지려던 참이야.”

 “…예.”

한참을 말없이 로드의 머리를 쓰다듬던 요한은 촛불을 끄지 않은 걸 깨닫고는 이만 불을 끄고 방을 나서려고 했다. 정적의 의미를 로드께서 잠드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아주 살짝 몸을 움직이자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한은 손을 멈추고 로드의 등을 가볍게 안았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로드는 아직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흠. 정말 칭얼거리는 아이가 된 기분이군.”

 “…그래서 고아원 원장님께서도 자꾸 안아 재우는 버릇을 하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은 기꺼이 로드의 말씀에 답을 이어주었다. 로드는 그게 나쁘지 않은 듯, 떠오르는 대로 말을 꺼냈다.

 “안겨 잠드는 데 익숙해지면 혼자 자기 싫어져서 그런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고아원에 자주 가지는 못하는 편이라… 그때만이라도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안겨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재계를 하고 왔는지 은은한 비누 냄새, 머리에 살짝 닿는 가슴팍의 온기와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는 손길, 그리고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머릿속을 따끈하고 나른하게 풀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이 왜 요한에게 안겨 자고 싶어 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지만, 로드는 요한의 목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었다.

 “아이를 재울 때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눴나?”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지만 저는 그런데 소질이 없어서… 주로 꿈에서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고는 했습니다. 잠들면 꿈을 꿀 수 있고, 꿈에서는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러니 자는 건 좋은 거라고요.”

 “재미있는 답을 꽤 들었겠는데.”

 “테이블만 한 케이크를 먹고 싶다는 아이도 있었고, 움직이는 인형과 소꿉놀이를 하고 싶다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음… 가장 기억에 남는 대답은 따로 있었지만요.”

 “오, 뭐였지?”

 “‘꿈에서는 엄마가 이렇게 안아줬으면 좋겠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아……”

 “그런 말을 들으니 더 안아줄 수밖에 없어서요. 원장님도 언젠가부터는 제게 주의를 주지 않으십니다.”

로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모른 채로 요한은 잠잠히 말을 이었다. 평이한 어조였다.

 “저도 그 아이와 같은 꿈을 바란 적이 있었으니까요. 누군가에게 안겨 잠든 기억은 없지만… 그런 아이가 되도록 적었으면 좋겠습니다.”

 “…….”

 “아이들이야말로 아발론의 미래니까요.”

송구하게도 대화를 이어가 주시던 로드가 말이 없자, 요한은 그제야 자기가 말을 너무 많이 했나 싶어 잠시 고개를 내려 그녀를 보았다. 마주치는 눈동자에 졸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분명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어 그는 움찔 몸을 떨었다.

 “이제 이야기는 그만해도 좋아.”

 “…예.”

 “대신 여기, 허리랑 등을 감싸 안도록.”

 “예?”

 “나를 경이 재우는 아이라고 생각해. 그러면 오늘은 정말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예, 로드.”

요한이 조심스레 팔을 들었다. 가녀린 어깨를 거쳐 등을 가로지르듯 팔로 감싸 안았다. 다시 심장이 뛴다. 좀 더 가까워진 몸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지나치게 맑아진 머릿속으로 충정이라 매듭 지었던 감정이 비어져 나온다. 그러나 넓고 흰 소매에 숨겨진 팔이 제 등을 마주 끌어안자, 요한은 그만 몸을 뒤로 물리고 말았다. 침대가 작게 출렁거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로, 로드…!”

 “재워주는 대가로 내가 경을 안아주도록 하지. 싫은가?”

 “싫은 게 아니라…”

 “그럼 어서 협조해. 이젠 정말 졸리는데, 경이 없으면 깨버릴 것 같아.”

요한이 멀어진 만큼 로드가 몸을 붙였다. 달리 둘 데가 없어 요한이 베고 있던 팔을 빼 자신이 베고는, 요한의 팔 위와 머리 아래로 팔을 넣어 그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두 다리가 겹쳐져 얽혔다. 요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로드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 그녀가 눈을 감고 편안한 듯 웃는다.

 “안겨 자려는 이유를 알 것 같군…”

 “그, 로드… 이 자세는 좀…”

 “내가 잠들 때까지만 참아줘. 그다음엔 얼마든지 나가도 좋으니…….” 

중얼거리듯 말하는 목소리가 작아진다. 요한은 붉어진 얼굴로 숨소리를 죽이려 애쓰며 로드를 바라본다.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것조차 예가 아닌 것 같아 얼른 나가고 싶지만, 그녀의 머리 아래 제 팔이 깔려 있어 잘못 움직였다가는 로드가 깰 것이다. 요한은 어쩔 수 없이 로드를 본다. 단 한 번도 이토록 가까이서 본 적이 없는 얼굴.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을 걷어드리고 싶은데, 무례할 만큼 밀착한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다. 제 목을 감싸 안은 팔이 참으로 가늘다. 

그러고 보면 누군가에게 이렇게 안긴 것은 처음이다. 동료들과의 포옹과는 매우 달랐다. 저를 구원한 사람이다. 자신이 신으로 여기는 이였다. 저 자신의 존재보다 우선하는, 그저 그녀의 도구로만 사용되어도 좋을 것 같은. 그러나 그런 사람이 아니기에 더 앙망하고, 갈망하고, 너무나 다양한 의미로 원하게 된다. 늘 이만큼의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고.

 “으음….”

잠깐 찌푸려졌던 미간이 곧 펴진다. 팔을 풀어주시면 좋으련만, 이리 얽혀있는 것이 불편하지 않은지 오히려 더 품 안으로 파고든다. 요한은 숨을 참았다가, 터져 나올 숨이 로드를 방해할까 봐 천천히 내쉰다. 방 안을 어스름히 비추던 초가 꺼졌다. 미처 새 걸로 갈지 못한 초가 다 타버린 모양이었다. 자세를 바꾸어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로드의 숨이 제 가슴을 간지럽히는 것 같다.

혹여 이대로 눈을 뜨시면 연소한 초와 같이, 볼품없는 몸뚱이를 가리던 자그마한 빛마저 잃어버린 그것과 같이 주제를 모르는 못난 제 마음이 그녀의 눈에 띄게 될까 두렵다. 충정의 면사를 걷어낸 뒤에 드러날 그것이. 빛이 없는 밤이 오히려 본질을 더 잘 드러낸다. 어둠을 밝히는 광명의 기사는 그 뿌리가 그늘진 곳에 있어, 종종 밤이 두렵다. 어두운 가운데 울리는 제 심장 소리는 가당찮은 연정이요, 명멸하는 충심일 것이다.



 

요한은 새벽녘에야 로드의 침실을 나섰다. 한잠도 자지 못한 채였다.

장래희망: 로드의 만년필, 요한의 안경닦이, 크롬의 장갑, 아이메리크의 고양이, 정대만의 왼쪽 무릎... etc. (계속 늘어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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