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요, 막 부인 댁 따님이 그렇게 돌아와서요?”

“그래요. 그 말괄량이가 저 애를 끌고 들어와선 왜 싸웠는지를 토로하는데…… 저들 나름대로는 거의 치정극이었지. 하나는 기억도 못 하는 것 치고는 과격하게 싸운 모양인데, 영 어이가 없으면서도 퍽 깜찍하길래.”

“깜찍하길래?”

“막 부인, 몰랐는데 사람 애태우는 재주가 있으시네요.”

반쯤 타들어간 연초가 재떨이 위에 오른다. 천 부인이 너스레를 떨고 웃음 어린 뺨을 소파 등받이에 기댄다. 무관심 속에 버려진 마작 패 더미가 무너지며 잘각이는 소리를 낸다. 세 번째 손가락을 움직여 재를 털어내며 살로메가 반만 남은 다트판에 열몇 번째 다트가 박히는 모습을 관망한다. “재주까지야.”

“사실 이렇게 길게 말씀하시는 걸 처음 보기도 해요.”

“나 스스로 맺힌 게 많았던 모양이지. 저 애가 괘씸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시작했는데, 아직도 만났을 적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그래요, 그래서 깜찍하길래? 그다음 이야기가 뭐예요.”

“그래서 재워 주기 시작했을 뿐이에요. 우리 집 아이들한테 흠씬 두들겨 맞고 온 것도 가련하고, 오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그것도 막 부인이니까 하실 수 있는 일인 거죠.”

“그럼요! 나라면, 세상에…….”

그는 약간 되바라진 방식으로 움직이는 청년의 어깨를 놓치지 않는다. 긴 갈색 손가락이 새 연초를 찾아 은제 담뱃갑을 더듬는다. 시선을 느낀 청년이 히죽 웃는 얼굴로 손을 들어 모자의 챙을 한 번 아래로 누른다. 숄로 덮인 어깨 옆에서 양 부인이 얕고 연극적인 한숨을 내쉰다.

“난 3캐럿짜리 반지를 들고 오는 게 아닌 이상, 내 남편에게도 방 한 칸 내 주기 싫으니까요!”

다만 한 차례 번지는 장난스러운 웃음과 양 부인에게 조금 무관심한 채로 살로메가 금빛 눈을 부드럽게 내리뜬다. 불현듯 그는 작은 무료함에 사로잡힌다. 테이블 위로 상앗빛 패들이 옷자락을 따라 무너진다. 웃음소리.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귓가 먼 곳 어디에서 클럽의 문이 열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웃음소리. 앉은 자리 그대로 그는 벌어진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발소리와 벽 뒤편의 골목에 흩어지는 고함 따위를 느낀다. “이것 보세요, 부인!” 대화의 흐름을 놓친 잠깐, 저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과는 완전히 무관한 부인들은 알 수 없는 일로 결백하고 순진한 웃음을 터트리고 있다. 무심코 살로메가 고개를 돌린다. 이어지던 대화에는 아랑곳없이 이제 창밖을 내다보던 청년의 낯에는 노골적인 쾌재의 기색이 어린다. 마지못해 그가 흘러내린 숄의 끝자락을 찾는다. 청년이 반 바퀴 몸을 돌려 선다. “아쉽지만.”

“가세요, 부인?”

천 부인이 느슨하게 기댔던 몸을 조금 일으킨다. 살로메가 옅게 입꼬리를 올려 보이고 놓는다. “이만 일어나야겠어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시간 나실 때 꼭 들러 주세요.”

“다음엔 식사라도 해요, 막 부인.”

“오늘처럼 부인들께서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약속만 해주신다면야, 물론이에요.”

웃음소리 사이로 기다렸다는 듯 세 개의 다트가 정확히 중앙이었던 자리에 연달아 꽂힌다. 그 모습을 외면하며 문간으로 다가간 살로메가 클럽의 주인에게 작은 패를 건넨다. “번번이 사과드려요.” 점잖은 얼굴의 주인은 드물게 미소를 보이고, 문간에서 작은 종이 열렬하고 경쾌한 소리를 울린다.

 


 

“이제 끝난 겁니까?”

“세워 둔 시간이 모자랐니?”

“아니, 한 명만 살려두라고 했었잖습니까?”

“‘한 명은’ 살려두랬지, 말을 전할 수 있게…….”

구두를 신은 발에 나뭇조각 하나가 채인다. 어렵지 않게 살로메는 그것과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온통 널려 있던 지난밤의 몸들을 떠올린다. 얕게 습한 공기가 드러난 뺨에 들러붙는다. 느리게 발끝으로 조각을 치우며 그가 고개를 돌린다. “정말 한 명만, 곧이곧대로, 그것도 간신히 숨만 붙여 놓을 줄은.”

눈앞에서 방만하게 청년이 웃는다. “아, 그런 뜻이었습니까? 진작 말을 하시지.”

“아주 괘씸해…….” 문득 살로메는 아주 새삼스럽게 열화의 흔적이 없는 그 젊은 낯을 바라본다.

지나치게 다른 것을 마주할 때만 느껴지는 안정감이 있다. 늘 어느 정도는 웃는 얼굴을 한 채 청년은 즐거운 것들을 향해 눈길을 돌린다. 의무감이나 미련할 만큼의 인내심, 책임과 정착은 청년과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그는 두고 온 어떤 것들에도 큰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크지 않은 감정의 낙폭, 무신경함은 그의 성질이고, 그는 언제나 걸려 오는 싸움을 피하는 법이 없다. “에이, 그래도 깔끔했잖습니까?” 살로메는 그런 것들이 청년의 삶을 이곳에 두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그 기질적인 것 같은 태만함; 그것을 유지하는 본능들, 어떤 재능. 울타리 위에서 놀되 떨어지지는 않을 만큼만, 저도 모르게 암묵적인 선을 가늠해내는 동물적인 감각들. 뜻없이 금빛 시선이 청년의 속모를 자색 눈과 마주친다.

“왜요.”

편안하게 살로메가 날숨을 뱉는다. "그리고 건방져……."

"아니, 참. 제가 언제 또…… 시선을 받아보겠습니까."

“간단히 식사나 하자. 가까운 김에…… 들어가서 주인께 늘 앉던 2층의 방을 부탁드린다고 전해라.”

“그냥 가서 앉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뭘 부탁씩이나.”

“그러니 네가 고기만두인 거지.”

말을 잇던 청년이 항의하듯 멈춰선다. 부쩍 낡은 듯한 골목의 한켠에서 문이 열린다.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갑자기 좁은 틈에 인파가 가득해진다. 얼결에 무언가 말라붙은 벽에 밀쳐진 남자가 욕설을 내뱉는다. 고함이 들리고 반사적으로 청년의 시선이 휙 채인다.

“가.” 살로메가 성가시다는 듯 가볍게 손끝을 한 번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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