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울어져 쓰인 말들은 영어로 된 문장이라고 해석해주세요.

* 앞선 청게 큰문과는 별개의 내용입니다.




새학년 새학기가 소란스럽다는 건 만국 공통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건 이곳, 샌디에이고에서도 통한다고 박문대는 몸소 경험하고 있다. 서울에서 직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어도 오는데 10시간은 족히 걸리는 이곳에서 박문대는 갑작스럽게 딱히 그립지만도 않은 고향의 향수를 진하게 느끼고 있었다. 한국은 죄다 교복 입고 책상 앞에 앉아서 떠드니까 차라리 나은데 여기는 중구난방한 옷 하며 복도에서 날뛰는 것 하며.. 박문대가 제 뒷통수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 축구공 하나를 느끼며 사물함에서 꺼낸 다음 수업 책들을 가방 안에 쑤셔넣었다.


박문대는 샌디에이고에 오고난 뒤 줄곧 뿔테안경과 후줄근한 후드티 차림을 고수해왔다. 한국에서 쫓겨나듯 혼자 이민 와 갈 곳 없는 박문대를 받아준 엠마 아주머니가 너는 파티도 안 가냐며 용돈을 쥐여줘도 새로운 후드티를 사 입을 뿐이었다. 괜히 주목받는 건 질색이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조용히 학교 생활을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옷차림이 제격이다. 그리고 그게 정말로 통했는지 박문대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조용한 학교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박문대의 하루는 매우 간결했다. 자전거 타고 학교 갔다가, 자전거 타고 하교. 집으로 돌아와선 엠마 아주머니의 채소 농장에서 일손 거들기. 그러다가 토마토 하나 주워먹기. 끝나면 다락방에 올라가 배운 내용을 정리하고, 가끔 별을 구경하다 죽은듯 자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박문대가 항상 똑같은 일과를 보내고 있든 말든 박문대의 주변 상황은 계속해서 변화했다. 다음 수업으로 이동하다 얼떨결에 보게 된 학교 미식축구 팀이 대표적인 예였다. 저번에 쟤네가 다른 학교 팀이랑 붙어서 압승을 했대나 뭐래나.. 내 알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며 박문대가 시선을 거두려고 할 때 선수 한 명이 종료 휘슬 직전에 터치다운을 성공시켰다. 아무리 주변 상황에 관심없는 박문대라도 쟤는 안다. 우리 학교 쿼터백. 뛰어난 전략과 빠른 달리기로 쟤가 학교 팀에 합류하고나서 맨날 우승만 했다 그랬나. 박문대가 선수의 등 뒤에 있는 이름을 한 번 훑는다. 'EUGENE CHA'. 성이 차씨였어? 한국곈가? 박문대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자기랑은 엮일 일 없는 사람이니까. 더 생각해봤자 그냥 시간낭비다.





  Love Affair!

차유진 × 박문대






앞에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5분간 페달을 밟으면 제임스네 식료품 가게, 그 옆에 멍청한 제임스와는 달리 혼자 채소농장까지 찾아올 수도 있는 강아지 맥스한테 인사 한 번 해주고. 천천히 페달을 밟고 7분 정도 지나면 산책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한 공원 하나. 거기서 우측으로 꺾어 네 블록만 더 가면 박문대가 임의로 정한 자기 전용 자전거 주차장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 하는 동양인은 학교 내에 자기밖에 없기 때문에 괜히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 항상 여기에 세워 두고 남은 거리는 걸어 간다. 그렇게 3분을 더 걸어가면 박문대가 다니는 학교, 유에스 하이스쿨이 나온다.


오늘의 패션은 노란 후드티에 검정색 바지. 사실 노란색같은 튀는 색깔은 최대한 피하려 했지만 엠마 아주머니가 다른 후드들을 모두 세탁기에 넣어버려 어쩔 수가 없었다. 넓은 주차장과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다 미식축구에 강하다고 소문난 학교답게 그쪽으로 최적화된 코트를 잠깐 훑어본다. 이게 다 차유진 오고 난 다음에 후원해줄 사람들 엄청 늘어나서 그렇다고 했나. 그렇게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바로 옆으로 운동복 남학생 무리가 소리 지르며 달려간다. 어제 유진의 미친 플레이 봤어? 소란스러움에 인상을 쓰며 옆으로 돌아가자 이번엔 금발머리 여학생들이 떠들며 지나간다. 어제 유진이 경기 끝나고 미아가 고백한 거 그냥 차버렸대! 여길 가도 차유진. 저길 가도 차유진. 이 학교는 차유진 없으면 안 돌아가냐?


어제 차유진한테 차였다고 동네방네 소문나고 있는 미아는 프롬퀸으로도 뽑힌 적 있는, 소위 말하는 퀸카였다. 치어리더로 오래 활동하며 차유진과 꽤 친해졌다고 생각했는지 냅다 공개고백을 했나보다. 박문대가 학교에서 떠도는 가십거리에 대해 생각하기 보단 쓸데없이 보는 눈 많은 곳에서 공개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이상한 심리 상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시간은 빠르게 흘러 금세 점심시간이 됐다.


유에스 하이스쿨은 기본적으로 카페테리아에서 밥을 먹는 걸 원칙으로 하지만, 다른 곳에서 먹길 원한다면 어디서 먹든 신경쓰지 않는다. 카페테리아에 가봤자 늘 혼자 테이블을 쓰는 꼴이 되는 박문대는 오늘도 미식축구 경기장 옆 벤치에 자리 잡았다. 사람 하나 안 다니는 구석진 곳은 자신 역시 부담되기도 하고, 여기서 먹으면 가끔 경기 구경도 할 수 있고.  쟤네한테 방해될까봐 너무 시끄럽게 구는 애들도 없고. 혼밥하기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박문대는 늘 한결같은 점심 메뉴인 샌드위치를 주섬주섬 꺼냈다. 오늘도 쟤는 날아다니네. 박문대의 시선이 언제나 가장 튀는 차유진의 등번호를 스쳐지나갔다. 확실히 잘하는 놈은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니까. 룰도 잘 모르지만 항상 차유진을 지켜보는 이유였다. 아무것도 몰라도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티가 난다. 샌드위치를 씹어먹으며 잠깐 밀린 연락을 확인할 때, 무언가 쎄한 느낌이 고개를 팍 숙였다.


박문대의 머리 옆으로 풋볼이 휙 스쳐지나갔다. 어떤 미친 놈이 공을 이렇게 무식하게 바깥으로 날려.. 선수 자격 박탈해야 하는 거 아니냐? 박문대가 소중한 샌드위치를 흘릴 뻔 하게 만든 주범을 찾아 고개를 들었을 때, 눈이 마주쳤다. 공을 날린 주범이랑. ...쟤가 날렸다고? 연습때마저 실수라곤 한적이 없어 우스갯소리로 머신이라고까지 불렸던 애가 지금 자기한테 공을 날렸다는게 믿기지가 않아 박문대가 드물게 눈을 크게 뜨고 차유진을 쳐다봤다. 그러자 자기도 꽤나 당황한 듯 한동안 멈춰있던 차유진이 갑자기 헬멧을 벗어던지고 펜스를 뛰어넘어 박문대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니, 미안해서 오는거야? 사과는 됐고 그냥 관심이나 꺼줬으면 좋겠는데. 박문대가 속으로 제발 자기한테 오는 거만 아니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차유진의 시선이 너무나 뚜렷하게 박문대를 향하고 있어 부정할 수도 없었다. 모르는 척 하려고 최대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던 박문대도 얼굴을 뚫을 듯한 그 시선에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게 된다. 그러자 보이는 건, 태양을 닮은 빨간 머리에 바다를 닮은 푸른 눈. 방금까지 경기하다 왔으면서 지치지도 않는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은 호흡과 가까이서는 처음 보는 미식축구 유니폼. 눈 밑에 붙인 아이블랙. 이런 모습을 한 쿼터백 차유진을 보고 있으면 이곳 캘리포니아에 별 감흥 없던 박문대마저도 온 몸으로 이곳이 캘리포니아임을 느끼게 된다.


새삼스럽게 유에스 하이스쿨에서 항상 차유진의 이야기만 나오는 이유를 깨달은 박문대가 잠깐 차유진을 쳐다보고 있을 때, 차유진 역시 두꺼운 뿔테 안경 너머의 박문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한참을 쳐다보다 씨익 웃더니, 말한다. 박문대의 평범한 고등학교 생활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폭탄발언을.



"안녕! 나랑 사귈래요?"



박문대는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갑자기 웬 한국말? 아니 그런데, 내용은 또 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 예상치 못한 언어로 예상치 못한 내용의 말을 들은 박문대는 너무 놀라 항상 빠르게 돌아가던 두뇌마저 잠시 작동을 멈췄다. 자연스러운 한국어 발음때문에 차유진이 당연히 한국어를 할 줄 안다고 판단한 박문대가 한국어로 물었다. 너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냐? 그랬더니 차유진이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갸웃거리며 말한다. 왓? 나 한국말 못해요. 우리 영어로 대화해요. 이 새끼 진짜 뭐하는 새낀데.. 박문대의 표정이 바닥으로 떨어진 먹다 남은 엠마 아주머니의 샌드위치보다 빠른 속도로 더러워졌다.



"그러니까 너,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말하는 거냐고."

"당연하죠! 형한테 말하고 싶어서 이 말만 몇 번을 연습했는걸요."

"형은 또 어떻게 알고 쓰는....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그 말 영어로 말해봐."

"오, 당연히 말할 순 있죠. 하지만 여기서요? 형 관심 받는 거 싫어하는거 아니었어요?"



여기서? 박문대가 그제서야 주변을 둘러봤다.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미식축구 팀 선수들은 물론 다른 일반 학생들까지 몰려들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서 이걸 이제 알아차렸다는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차유진이 이런 돌발 행동을 한 건 한두번 있는 일은 아니지만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싸움이라도 난 줄 알았는지 실시간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거 가장 싫어하는게 박문대긴 한데, 아니 그런데 얘 내가 관심 받는 거 싫어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있는거지?


더 사람이 몰리기 전에 당장 이 자리를 떠야 한다. 박문대가 판단을 완료하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차유진이 한 발 앞서 박문대를 슬쩍 붙잡았다. 대답은요? 너는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꼭 그게 알고싶니. 박문대는 아까 잠시 생각했지만 끝내 결론은 내리지 못했던 쓸데없이 보는 눈 많은 곳에서 공개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이상한 심리 상태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부끄러움도 없는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했는데, 여기 하나 더있네. 멍청이.





그래서 박문대의 대답이 뭐였냐면, 당연히 NO였다. 차유진의 손을 떨쳐내고 자기는 아메리카 마인드가 아니라 유교 마인드라 이런거 못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돌아온 차유진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유교 마인드가 뭔데요? 여기 캘리포니아예요. 아메리카 마인드를 가져요! 너는 그게 마음대로 되냐고. 박문대는 언젠가 차유진을 꼭 한국으로 데려가야겠다고 다짐을 한다. 네가 한국의 상하 관계 수직 서열 분명한 곳에서 눈칫밥 먹고 살면서도 유교 마인드를 버리고 아메리카 마인드를 가지겠다고 소리칠 수 있나 한번 보자.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차유진이 한국 사회에서 눈칫밥 먹다 엉엉 우는 장면까지 간다. 저런 애를 울게 만드는 사람은 그거도 그거대로 대단한 사람이겠는데, 같은 생각을 하다 고개를 휘휘 젓는다. 내가 갑자기 왜 얘 생각을 하고 있지. 아까 잠깐 같이 있었다고 벌써 그 대책없던 모습이 전염됐나보다. 잡생각을 없애는 데엔 운동이 최고라고 문대가 설렁설렁 밟던 자전거 페달을 미친듯이 밟기 시작한다. 매일 인사하며 지나가는 제임스네 강아지 맥스까지 무시한 채로, 평소에는 12분이 걸리는 거리를 5분만에 도착하는 미친 짓을 성공해낸다.


박문대가 엠마 아주머니의 집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이 저주받은 노란 후드티를 벗어던지는 거였다. 아침부터 마음에 안 든다 했어. 하지만 다행인 건, 이 저주받은 노란 후드티의 인상이 강렬할 거기 때문에 내일 스타일을 바꿔서 간다면 오늘 차유진과 있었던 그 옐로 후드 보이를 아무도 찾지 못할 거란 점이다. 박문대가 때아닌 반팔티 차림으로 엠마 아주머니에게 얘기한다. 내일부터는 스타일을 좀 바꿔볼까해요. 그러자 엠마 아주머니가 근래 본 것 중 가장 하이톤으로 소리친다. 오, 문대! 드디어 그 구질구질한 너드 차림새를 벗어던지기로 결정한 거야? 내 후드티 차림이 저렇게 소리 지를 정도로 별로였나. 당장 옷을 사러나가라며 쥐여준 돈을 받으면서도 문대는 뭔가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박문대의 스타일은 확 변했다. 후드티 차림에서 체크 셔츠 차림으로. 이런 옷은 정말 소위 말하는 너드같이 보여서 애써 피하고 있었는데 후드티 이미지만 탈피할 수 있으면 뭐든 좋았다. 드디어 문대의 진정한 얼굴과 스타일을 보여줄 수 있다며 기뻐하던 엠마 아주머니의 절망하는 모습은 조금 마음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문대는 학교에서 유진과 싸움 날 뻔한 옐로 후드 보이로 소문날 바에야 그냥 동양인 너드로 취급받는게 훨씬 나았다. 이미지가 강렬하게 남는 두꺼운 뿔테 안경은 한국에서 가져온 동그란테 안경으로 바꿨다. 박문대가 지나갈 때면 늘 열심히 꼬리를 흔들던 맥스마저 못 알아봤는지 컹컹 짖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박문대가 가까이 다가가자 냄새를 맡고 누군지 알아차리고 꼬리를 핑핑 흔드는게 퍽 귀여웠다. 그래, 네가 인간보다 낫다. 네 멍청한 주인 제임스보다도, 인간이면서 대형견처럼 행동하는 우리 학교 쿼터백보다도.


그렇게 철저하게 스타일을 바꿔서 간 박문대의 노력은 학교에 도착한 지 불과 20분 만에 모두 헛된 일이 되었다. 수강 신청률이 가장 낮아 듣는 인원이라곤 박문대 포함 6명 밖에 없는 서체 수업에 뜬금없는 얼굴이 하나 나타났기 때문이다. 방금 막 씻고 왔는지 축축한 머리에 회색 후드티의 모자를 덮어 쓴 차유진이 늘 박문대가 앉는 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박문대가 무시하고 차유진이 앉아있는 자리와 가장 먼 곳에 앉자, 차유진이 슬금슬금 걸어와 박문대의 옆에 앉았다. 아 이 새끼를 어떻게 치워야 하지.. 박문대는 이제 관심을 받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고 직감했다. 박문대를 제외한 수업의 모두가 차유진과 박문대를 보며 수군대고 있었다. 아마 점심 먹을 때쯤 되면 체크 셔츠 보이로 소문이 나겠지. 그럼 난 이제 뭘 입어야 하나.. 박문대가 영혼이 하나도 담기지 않는 표정으로 신세 한탄을 하고 있을 때 차유진이 박문대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형, 사귈래요? 너는 한국어론 이 말밖에 할 줄 모르니. 한국어로 질문을 받았으니, 박문대도 한국어로 대답을 한다. 싫어. 한국말도 모르면서 거절을 당한 건 어떻게 알았는지 차유진이 슬퍼하며 심장을 부여잡는 오버액션을 한다. 진짜 왜 저러는 건지..


수강 신청을 하지 않은 학생이 여기에 앉아있다는 건 신경도 쓰지 않는지, 차유진의 존재 여부와는 관계없이 수업은 진행됐다. 도강을 해놓고 수업은 자기랑 맞지 않아 옆에서 꾸벅거리는 차유진의 고개가 보였다. 쟤 결국은 저렇게 될 줄 알았다, 하곤 무시하고 수업 듣고 있는데 수업이 거의 끝나갈 때 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갑자기 교재로 차유진의 손 하나가 불쑥 들어온다. 무슨 짓을 하려나 싶어 냅뒀더니 삐뚤빼뚤 박문대의 교재에 글씨를 적기 시작한다. 조 아 해요 :) 그리고 옆에 웬 호랑이 그림. 계속 사귀자 타령하더니 이번엔 갑자기 좋아한다고? 박문대도 펜을 들어 그 밑에 글씨를 적는다. 조 밑에 빨간 펜으로 ㅎ 추가. 그리고 한국어로 맞춤법 틀림. 한국어는 몰라도 자기가 저 글씨에 틀린 점이 있었다는 건 본능적으로 깨달았는지 황급히 영어로 추가해서 적는다. 나 한국어 다른 말 못 써요 그런데 이것도 잘못 썼어요 또 연습해서 다시 적을래요 :( 얘는 말로는 사귈래요 밖에 못하고 글로는 조아해요 밖에 못해? 너무 속 보이는 한국어 실력에 박문대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아주 조그맣게 웃었는데도 바로 옆에 있으니까 다 들렸는지 차유진이 또 오버액션으로 놀라는 척 하다 교재에 적었던 이모지를 고쳐 적는다. : D 내가 잠깐 웃었다고 웃음 표시로 바꿔놓는 거냐고. 박문대가 계속해서 튀어나올 것 같은 웃음을 몇번의 헛기침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박문대가 예상했던 옐로 후드 보이는 어제 하루동안 계속해서 쓰였던 모양이지만, 아침 시간 내내 걱정했던 체크 셔츠 보이라는 별명은 생기지도 않았다. 대신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그냥 코리안 보이. 박문대가 차유진 손에 이끌려 들어가던 카페테리아의 안에서 모두가 박문대를 그렇게 불렀다. 저 체크 셔츠가 그 코리안 보이야! 쟤가? 그냥 너드잖아. 저 동그란 안경은 좀 귀여운데? 코리안 보이들은 왜 모두 저렇게 머리를 내리고 다니는 거야? 박문대는 아침 시간동안 잠깐 마음이 누그러워져 차유진을 따라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바로 발을 돌려 가까스로 인파를 뚫고 빠져나왔다. 코리안 보이? 옐로 후드 보이나 체크 셔츠 보이는 괜찮았다. 스타일만 바꾸면 언제든지 존재감을 지워버릴 수 있는, 오히려 연막작전 같아 괜찮은 별명이다. 하지만 코리안 보이라고 하면 이 학교에 코리안이라고는 나밖에 없는데 이건 뭐 국적을 바꿔버릴 수도 없고.. 박문대가 매번 가는 그 벤치에 앉아 혼자 절망하고 있을 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얘는 또 언제 인파를 뚫고 나왔는지. 역시나 차유진이었다.



"밥 안 먹어?"

"오늘 밥 맛 없어요.."

".. 경기는 안해?"

"나말고 다 밥 먹어요!"

"너도 그럼 그냥 먹지 왜 여깄는데."

"형이 나왔잖아요?"

 


정말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차유진에 박문대가 잠깐 머리를 짚었다가 뗐다. 박문대가 아는 차유진은 밥친놈이었다. 밥에 미친놈. 가뜩이나 칼로리 소모가 심한 운동선수인데다 그냥 뭔가 먹는 걸 좋아하는지 항상 입에 뭔갈 달고 다녔다. 그런 애가 맛없다고 밥을 안먹는다고? 괜히 쓸데없는 죄책감이 밀려 들어왔다. 당장 몇 분 후면 연습 경기 뛰어야 할 애한테 밥을 뺏은 느낌. 박문대가 원래 자기 점심이었던 샌드위치를 주섬주섬 꺼내 3분의 2정도로 갈라 차유진에게 줬다.


와우! 나 이거 먹어보고 싶었어요! 형이 맨날 먹잖아요! 원래도 신나있었지만 더 신났는지 차유진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래.. 너 많이 먹어라. 그런데 내가 이거 맨날 먹는건 또 어떻게, 아니. 됐다. 알면 알수록 자기 미간에 주름만 느는 거 같아 박문대는 끝내 차유진이 어떻게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는 걸 포기했다. 박문대가 자기 가방 속에 더 먹을 건 없나 마구 손을 뻗어가며 뒤져보니, 옛날에 먹으려고 사뒀다가 처박아둔 초코바들이 우수수 나오기 시작했다. 먹을래? 라고 물어보려 잠깐 옆을 쳐다보니 차유진이 꽤나 커다란 사이즈의 샌드위치를 이미 다 입에 쑤셔넣고 눈을 반짝이며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어이없네 저래놓고 밥을 굶긴 뭘 굶어. 박문대가 가방에서 초코바가 나오는 대로 차유진의 손 위에 얹어주었다. 단 걸 갑자기 이렇게 많이 먹어도 되나? 싶었지만 박문대는 일단 당이 들어가야 사람이 힘을 쓴다 주의기 때문에, 결국 차유진의 손 위에 초코바만 8개를 쥐여줬다. 


그렇게 박문대는 샌드위치를, 차유진은 초코바를 먹는 시간이 잠깐 흐르자 박문대는 새삼스럽게 자기가 이러고 있는게 참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벽이 매우 높다는 건 문대 자기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친한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고 그나마 알고 지내는 엠마 아주머니나 바보같은 제임스와는 절대 이러고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제 만난, 심지어 고백까지 받은 차유진이랑 이러고 있는게 어이가 없는데. 이게 다 차유진의 답도 없는 거리감 때문이다. 가까워서 2발 물러나면 5발 다가오고, 5발 다가오는게 부담스러워 안 물러나고 가만히 있으면 신나서 6발 온다. 박문대는 잠깐 아침마다 인사하는 강아지 맥스를 생각했다가 고개를 휘 저었다. 차유진과 맥스의 공통점이 많긴 하다. 일단 크고, 자기만 보면 꼬리를 흔들 것 마냥 구는 거. 그리고 둘다 나를 좋아한다고 하는 거. 그러고보니, 얘 대체 날 어떻게 알고 갑자기 고백한 거야?


박문대가 신나게 초코바 까먹는 차유진을 잠시 노려보자 차유진이 얼른 먹던 초코바를 삼키고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너 나한테 갑자기 왜 사귀자고 한거야?"



무슨 일이든지 말해줄 것마냥 신나게 들이대던 차유진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리고 답지 않게 턱을 매만지며 흠.. 같은 소리따위를 낸다. 뭐야 이 새끼. 갑자기 왜 이래? 차유진의 뜬금없는 기행동에 박문대의 인내심이 슬슬 바닥날 때 쯔음 차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내 생일 파티에 와주면 말해줄게요!"



뭐? 생일파티? 언젠데. 이번주 토요일! 박문대가 잠깐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고민했다. 오늘이 금요일이고 이번주 토요일이 생일파티면. ...내일이잖아? 하루 뒤에 있을 생일파티에 지금 초대했다는 게 말이 되냐? 박문대가 이 답도 없는 갑작스러운 초대에 점점 열이 오르고 있을 때 타이밍도 좋게 차유진의 미식축구 팀원들이 밥을 다 먹었는지 우루루 몰려오기 시작했다. 지금 박문대 옆에서 벗어나야 하는 타이밍이라는건 귀신같이 알아채린 차유진이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와줘서 고마워요! 주소는 보내줄게요! 아직 가지도 않았는데 뭔 와줘서 고마워요야. 그리고 내 폰 번호도 모르면서 어떻게 보내게.. 아, 쟤라면 알려나. 박문대가 이젠 그냥 차유진과 관련된 생각은 포기하기로 다시금 다짐한다.





요즘 엠마 아주머니에게 용돈을 너무 자주 받는 거 같은데. 이번엔 파티를 갈 생각이라고 하자 엠마 아주머니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오, 문대.. 드디어 친구들이 너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하는 거니? 체크 셔츠가 아닌 깔끔한 옷에 왁스까지 사오자 엠마 아주머니는 기절이라도 할 듯 했다. 박문대는 휴대폰을 켜 아까 차유진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Eugene

자전거 타고 10분도 안 걸릴걸요! 심심하면 언제든 놀러와도 돼요 :D


네가 여기서 10분도 안 걸릴 거는 어떻게 아는건데. 아니, 내가 자전거 타고 갈 건 어떻게 알지? 차유진은 얘에 대한 생각을 버리자고 다짐해도 계속해서 의구심이 들게 만드는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차유진의 말대로 엠마 아주머니네 집에서 차유진네 집까진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운 데서 살고 있었다고? 차유진의 집은 이미 파티를 시작한 지 좀 됐는지 사람들로 버글버글했다. 저기 사이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박문대는 벌써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되돌아갈 수도 없는 법이다. 박문대가 눈 딱 한 번 감고 미친 짓을 하기로 결정하고 미친 인파 속으로 제발로 걸어들어갔다.


차유진 집에는 온갖 게 다 있었다. 각종 술, 과자. 안줏거리, 학교에서 자주 보던 학생들, 차유진네 미식축구 팀원들, 심지어는 공개고백하고 차였던 미아까지. 정말 물건부터 사람까지 온갖 게 다 있었다. 딱 하나만 없었다. 차유진만.


맨날 후드티 혹은 체크셔츠 차림에 커다란 안경으로 눈을 가리고 다녔던 박문대가 깔끔한 셔츠에다 왁스로 머리까지 반정도 까고 오자 박문대가 지나갈 때마다 주위에서 수군거리는게 느껴졌다. 이래서 일부러 그렇게 입고 다닌건데. 박문대는 자기 객관화가 매우 잘된다. 자기도 자기 잘생긴거 잘 안다는 뜻이다. 관심받기 싫어 일부러 그런 차림새로 다녔지만 남의 생일파티까지 칙칙한 후드티를 입고 올 순 없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입고 왔는데, 생일 파티 주인은 보이지도 않고.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박문대가 옆에서 뭐라 하든말든 혼자 벽에 기대어 샴페인을 홀짝거리고 있을 때, 웬 빨간 머리통 하나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괘씸해서 아는 척하지 않고 있자 차유진이 다가와서 괜히 깜짝 놀란 척을 한다. 그런데 하는 짓을 보자하니, 척이 아니라 그냥 진짜 깜짝 놀란 건가? 뭔가 입을 벌리고 뭐라뭐라 말을 하긴 하는데 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주변의 소리에 묻혀 하나도 들리지 않자 박문대가 먼저 소리 높여 말했다.



"뭐라고?"

"여기 재미없지 않아요??"

"뭐? 여기 네 생일파틴데!"

"알아요! 그런데 재미없어요!"

"그럼 뭐 어떡하게!"

"같이 나가요!"



차유진은 그 말을 끝으로 박문대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박문대의 손목을 잡아 끌고 인파 속을 헤쳐 나왔다. 얘는 왜 자기가 생일파티 열어놓고 자기가 재미없대? 알면 알수록 웃기는 애다.


그렇게 박문대를 잡아 끌고 차유진이 간 곳은 집과는 조금 떨어져 덩그러니 있는 그네다. 여긴 조용해요! 그러게, 조용하네.. 바다가 근처에 있어 간간이 파도 소리도 들렸다. 박문대는 차유진과 나란히 그네에 앉아 차유진이 주절거리는 말들을 들었다. 사람 너무 많아요! 형 찾으려고 했는데 계속 붙잡혀서 술만 몇번 마셨어요. 사람들이 코리안 보이라고 얘기하길래 형 온 거 알았어요. 그런데 옷 뭐예요? 형 아닌 줄 알았어요. 너무 멋져요! 다른 사람들도 멋진 거 알아서 형 칭찬해요. 그건 좀 슬퍼요.. 박문대가 그 말을 끝으로 시무룩해진 차유진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얘 좀 취했나? 원래도 워낙 말이 많은터라 지금 이렇게 말이 많은게 취해서 그런건지 아니면 신나서 그런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건 그렇고, 여기 온 이유는 들어야지.



"그래서 너 나 왜 좋아하는데?"



박문대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무룩하던 차유진이 번쩍 고개를 든다. 형이 자꾸 우리 앞에 와서 밥 먹었잖아요! 그거야 거기가 편하니까. 차유진이 억울한 목소리로 한번 박문대 탓을 했다가 순식간에 반박 당했다. 형이 항상 거기서 밥 먹고 있으니까 저도 계속 쳐다봤어요. 처음엔 신경 안썼는데 나중엔 멋있어 보이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형이 한 번 휴대폰 보고 웃었는데, 거기에 정신 팔려서 풋볼이 내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너무 아팠는데 형이 못 봐서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차유진이 신나서 주절주절 거리는 걸 듣던 박문대가 조금 놀랐다. 그런 일이 있었어? 경기 구경할 때보다 거기 앉아서 휴대폰 볼 때가 더 많긴해서 충분히 자기가 못 봤을만 하긴 했다. 그런데 얘는 그거만 가지고 날 좋아한다고 갑자기 계속 따라다닌건가. 박문대가 어떻게 그거 가지고만 사람을 좋아한다고 판단할 수 있냐 물었다. 그러자 차유진이 답지 않게 몇번 우물쭈물 대다가, 씨익 웃더니 말했다.



"형한테는 몇번이고 터치다운 당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참나.. 박문대가 잠깐 차유진을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제 고백 어땠어요? 사귈래요? 나 아직 유교 마인드라고. 여기 우리 집이에요! 우리 집 마인드 가지라고요! 옆에서 차유진이 뭐라하든 말든 무시한 박문대가 조용히 방금 말을 곱씹었다. 차유진이 자기 앞에선 단 하나의 실점도 허용하지 않는 실력이 뛰어난 쿼터백이라는 점도 떠올렸다. 미식축구 선수다운 고백이네. 그리고 놀랍게도, 박문대는 이 고백이 꽤나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럽어페어는 사실 문대른 청게 시리즈였습니다! 미국 청게는 하이틴이죠 하이틴윶문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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