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욕이 앞서면 대개가 일을 망치기 마련이었다. 총 세 번. 약속을 준비하던 윤오가 머리를 감은 횟수였다. 안 쓰던 왁스를 꺼내기도 하고, 룸메의 고데기도 빌려봤지만 결과는 안쓰러울 정도로 별로였다. 그냥 평소대로 하고 가라. 룸메는 단호했다. 옷장을 뒤지던 윤오를 바라보는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도대체 누구길래 천하의 정윤오가 그 난리냐. 그렇게 예뻐? 윤오의 손이 멈칫했다. 저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말에 룸메가 코웃음을 쳤다. 이 광경을 보고도 모르면 등신이지. 널브러져 있는 왁스통과 옷가지들로 주변이 엉망이었다. 머리를 긁적이던 윤오가 다시 옷장을 뒤적거렸다. 야, 예쁘냐고. 끈질긴 질문이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어. 세상에서 제일 예뻐.”

 


잠시 도영을 떠올린 윤오가 미소를 지었다.

 





둘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만났다. 저 멀리 서있는 윤오를 발견한 도영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5분이 남았지만 누군가가 저를 기다리며 시간을 허비하는 게 싫었다. 거의 뛰다시피 걸어온 도영을, 윤오는 싱긋 웃으며 반겨주었다. 형 나 되게 보고 싶었나 봐요. 얘 또 시작이네.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럼 왜 사람 설레게 뛰어와요. 네가 그냥 의미부여를 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 도영이 꽤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을 꼬았다.

 


“원래 짝사랑하면 다 그래요.”

 


늘 그렇듯 덤덤하게 맞받아치는 윤오였다. 쟤는 하여간 돌려 말할 줄을 몰라. 빠르게 고개를 내저은 도영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붐비는 청춘들의 거리에 둘은 자연스레 섞여 들어갔다. 계속해서 닿이는 어깨에 쏠린 신경이, 첫 데이트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윤오는 앞에 놓인 파스타를 신중하게 사진으로 담아냈다. 포크를 들고 기다리던 도영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너도 이런 거 찍어서 인스타 같은 데 올려? 그에 윤오는 저 그런 거 안 하는데요, 하고 폰을 집어넣었다. 그럼 왜 찍는데. 도영의 크림파스타는 이미 돌돌 말리고 있었다. 펄펄 나는 김에 도영이 입김을 후후 불었다. 부풀어 오르는 두 볼이 절로 웃음을 나게 만들었다. 이내 윤오 역시 도영을 따라 포크를 집어 들었다.

 


“형이랑 처음 먹는 밥이라서 찍어봤어요, 한번.”

“너도 참 별나다.”

“이런 거 싫어해요? 그럼 안 할게.”

 


도영의 눈에 비친 정재현은, 오바 조금 보태서 말 한 마디면 별도 따다줄 기세였다. 파스타를 입에 넣은 도영이 신기하다 눈으로 윤오를 바라봤다. 사람을 좋아하면 다들 저러는 걸까. 도영도 좋은 감정으로 누군가를 만나봤지만 저렇게 적극적이었던 적이 없었다. 문득 저를 이렇게 까지나 좋아해주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자꾸 그렇게 보면 나 또 오해해요. 컵에 물을 따르던 윤오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퍼뜩 허공으로 시선을 돌린 도영이 콜라로 목을 축였다. 가게 인테리어나 뜯어보던 눈은 다시 윤오의 정수리로 향했다. 머뭇거리던 도영이 조심히 입을 열었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너는 내가 왜 좋아?”

 


피클에 포크를 꽂아 넣는 손이 멈칫했다. 고개를 들자 의문 가득한 시선이 저에게로 닿아있었다.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자 도영이 다시 한 번 응? 하고 물어왔다. 여전히 피클이 꽂혀있는 포크가 테이블 위로 내려졌다. 예뻐서요. 윤오의 입을 타고 대답이 흘러나왔다. 끔뻑끔뻑 눈을 깜빡이던 도영이 서서히 얼굴을 구겨갔다. 고작 네 글자에 길쭉한 손이 입까지 틀어막았다. 생각치도 못한 낯간지러운 말에 어딘지 모를 곳을 벅벅 긁어내고 싶었다. 정윤오는 이런 말을 자다가도 뱉을 놈이라는 걸 알면서, 자꾸 방심을 하게 됐다. 다시는 이런 대답할 것 같은 질문은 하지도 말아야지. 짧은 심호흡과 함께 얼굴에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핵폭탄을 던져놓고도 덤덤한 윤오는 피클을 아삭아삭 씹어 삼켰다.

 


“그냥 다른 얘기하자. 내가 괜한 걸 물었네.”

“그래요, 그럼.”

“과 사람들이랑은 많이 친해졌지?”

 


크게 당황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생각해낸 질문이 이렇게까지 뜬금이 없을 일인가. 그런 모습까지 퍽이나 귀엽던 윤오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저 친한 사람 별로 없어요. 어느새 바닥을 보인 그릇에 포크를 내려놓았다. 도영은 한 입 가득 파스타를 넣은 채로 입을 우물거렸다. 다 친한 거 아니었어? 김민철이랑도 친하잖아, 너. 말을 끝마친 도영이 입을 살짝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웠다. 평소에도 묻어나오는 작은 배려 같은 것들이 사람 마음을 세차게 흔들어댔다. 여전히 빵빵한 볼따구에 시선이 팔린 채로 입을 열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요. 저 그 형 싫어해요.”

 


도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꽤 친한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싫어한단다. 급하게 입을 비운 도영이 이유를 물었다. 당연히 이런 이유까지 저와 관련돼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형 힘들게 하는 거 같아서요.”

 


라고 대답했다, 정윤오가.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물을 내뿜을 뻔 했다. 켁켁거리던 도영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툭하면 놀리고 귀찮게 하고 함부로 대하잖아요. 목소리가 꽤 단단했다. 말을 할수록 굳는 얼굴에 도영은 말을 아꼈다. 따지고 보면 윤오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말을 짓궂게 하는 것도 맞았고, 엠티 와인쟁탈전에서 다짜고짜 도영의 이름을 외친 것도 민철이었다. 도영은 그걸 알면서도 그러려니 했다. 원래 성격이 그런 애니까. 굳이 인간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형은 그 새끼랑 왜 친하게 지내요?”

 


민철은 어느새 그 새끼로 전락해있었다. 윤오가 얼마만큼의 깊이로 저를 생각하고 있는 건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하나 분명한 게 있다면 그 마음이 결코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는 것. 기분이 묘해진 도영이 뒷목을 쓸었다. 윤오는 어쩌면 도영보다도 더 도영을 생각하고, 또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고마웠다. 그 마음이. 기특한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나도 친한 건 아니고 그냥 동기로서, 딱 그만큼만 거리를 지키는 거야. 그리고 괜히 인간관계 망치고 싶지도 않고. 내가 좀 단순하거든.”

 


도영이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그런 놈이랑은 굳이 인간관계를 쌓을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요. 마음 같아서는 이렇게 받아치고 싶었지만 말을 아꼈다. 더 이상은 도영의 영역을 침범하는 게 오지랖일까 봐서. 결국 도영을 따라 웃은 윤오가 꼬리를 내렸다. 이런 참견은 연애를 시작하고 해도 늦지 않다. 굳이 속도를 빠르게 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그건 자신의 통제 능력 밖에 있는 것이었다.

 


“재현아. 우리 술이나 한 잔 할래?”

 


예를 들면 애써 밟고 있는 브레이크를 엑셀로 옮기고 싶게 만드는 김도영이라든가, 뭐 그런 거 말이다.

 




도심뽀까 :
도영이 형.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요?

w. 잳잳





사람은 들뜨면 눈앞에 놓인 것만 보게 된다. 조금만 더 생각을 하면 실수 따위는 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학교 주변에서 만난 게 문제였다. 그냥 아주 저 멀리 바닷가로 갔어야 하는 건데. 윤오가 맞은편에 앉아있는 은선을 보며 과자를 씹어댔다. 이 형은 왜 하필 안주로 여기 라볶이가 먹고 싶어졌는지, 나는 왜 냉큼 좋다고 여길 왔는지.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딱 한 시간만 앞으로 돌리고 싶었다.

 


들어서자마자 놀란 눈으로 저를 보는 은선과 지연에 당황한 내색을 숨기지 못했다. 딱 하나 남은 테이블이 하필 저 둘의 옆자리였다. 민망할 정도로 잘 들리는 건너편의 대화소리에, 결국 자리를 합쳤다. 그 사실이 정윤오는 미치도록 싫었다. 단 둘이 꽁냥거려도 모자랄 시간이었다. 아직 도영에게 전하지 못 한 말이 태산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말해줄 걸 그랬다. 아끼다가 똥된다더니 옛말에는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생맥주 네 잔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몇 모금을 들이킨 뒤 시원하다는 소리를 내는 셋과 달리, 윤오는 단번에 한 잔을 다 비워버렸다. 모두가 희한하다는 듯 쳐다봤지만 딱히 알 바가 아니었다. 답답한 속에 술이라도 퍼부어야 그나마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한대? 도영의 말에 윤오만 웃지 못했다. 하나도 안 웃기다. 정말 단 하나도.

 


도영은 저녁을 그렇게 먹고도 안주를 계속해서 집어먹었다. 은선과 지연이 먼저 시켜놓았던 안주는 금방 동이 났다. 젓가락을 내려놓은 도영이 지나가는 알바생을 붙잡고 라볶이와 맥주 네 잔을 더 시켰다. 그 말을 하면서도 싱글벙글. 뭐가 좋다고 헤벌레 웃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심히 귀여운 모습이 마음에 쏙 들긴 했다. 이 귀여운 걸 모두가 본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저희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순식간에 맞은편 자리가 텅 비었다. 이때다 싶어 윤오가 도영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잠시 폰을 보던 도영이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아까보다 한 뼘 더 가까워져 있는 얼굴에 슬쩍 목을 뒤로 내뺐다. 뭔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형 자꾸 그렇게 웃지 마요.”

“나 지금 웃고 있어?”

“아니, 아까처럼 막 귀엽게 웃지 말라구요.”

 


도영이 세상 미친놈을 보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또 시작이다. 후진 없이 들이박는 저 돌직구. 형 지금 속으로 내 욕하고 있죠. 뜨끔한 도영이 살짝 입을 틀어막았다. 너 독심술도 할 줄 알아? 그 말에 윤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난다는 걸 스스로는 모르는 듯 했다. 잠시 윤오를 흘겨보던 도영은 너는 좀 웃지 그래, 하고 잔소리를 해왔다. 아까부터 뚱~해가지고는 뭔 일 있는 사람처럼…. 도영의 핀잔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형 같으면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 첫 데이트에 누가 끼어들었는데 웃음이 나오겠어요?”

 


단번에 도영의 입이 다물렸다. 저는 생각치도 못 한 이유였다. 또 직구를 날리는 탓에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웃기기도 했다. 나이 스물이나 먹은 성인이 고작 그런 이유로 토라졌다는 게. 사탕을 빼앗긴 유치원생마냥 뾰로통한 얼굴이었다. 심각한 저쪽 동네의 표정에 겨우 웃음을 참았다. 암튼 형 웃지 마요. 약속했어. 윤오의 당부와 함께 둘만의 시간이 끝이 났다.

 


다행히 분위기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라볶이보다 더 흥미로운 안주거리가 즐비했다. 교수님 얘기, 시험 얘기, 그리고 엠티 얘기. 그러다보니 윤오가 노래를 불렀던 얘기 역시 자연스레 나오게 되었다. 은선과 지연은 입을 모아 가수를 해도 되겠다며 칭찬을 쌓아올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도영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문득 저를 향해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고맙다고 꼭 전하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러버렸다. 꼬여버린 혀로 횡설수설 전한 말을 꿈에도 기억하지 못하는 도영이었다.

 


“아참. 윤오 너는 축제 때 서빙 언제 해?”

“모르겠는데.”

“단톡에 공지 떴는데 못 봤어?”

 


툭하면 톡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씹어버리는 탓에 공지가 올라온 줄도 몰랐다. 고개를 내저은 윤오가 술을 들이켰다. 얼른 확인해보라는 지연의 말에 은선이 입을 열었다. 윤오 아마 첫째 날일 거야. 처음부터 입소문 제대로 나야 그 뒤로도 사람 많이 온다고 하도 난리를 쳐서. 부과대인 은선은 혹시 기분 나빴으면 미안, 하고 말을 끝맺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윤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인데 그게 왜 미안해. 넌 시킨 대로 한 게 다잖아. 별 거 아닌 말에 은선이 얼굴을 붉혔다.

 


“그래. 뭣 하러 사과까지 해. 그리고 그나마 첫째 날이 제일 나아.”

 


나름 1년 선배인 도영이 작년의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허접한 구조 탓에 테이블 번호를 외우기가 어렵다는 말도, 주문이 거지같이 꼬인다는 말도 도영은 신나게 해댔다. 작년에 김민철 서빙하다가 어떤 사람 번호 땄거든? 근데 완전 칼차단 당했어. 진짜 웃겼는데. 도영이 또 빙그레 웃었다. 귀엽게. 턱을 괴고 도영의 얘기를 듣던 윤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약속까지 해놓고 김도영은 지킬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래서 윤오는 테이블 밑으로 놓여있는 도영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빠르게 목석이 되어가는 몸이 그대로 느껴졌다. 빼내려고 애쓰는 손이 무색하게 두 개의 손바닥은 틈 없이 밀착했다.

 


꽤 오랫동안 둘의 온기가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렀다.

 




/





밤공기가 산뜻했다. 은선과 나란히 걸으며 도영이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공기 좋다. 도영은 꽤 취기가 올라있었다. 헤벌쭉대는 얼굴에 은선이 못 말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폰을 꼭 쥐고 있던 도영이 다시금 화면을 확인했다. 술집에서 나와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내내 도영은 툭하면 폰을 들여다봤다. 그러곤 텅 빈 화면에 실망을 하기 일쑤였다. 안 그런 척 애를 쓰는 듯 했지만 금방 눈치를 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삐죽 튀어나온 입술에 은선이 슬쩍 말을 꺼냈다. 뭐 기다리는 연락이라도 있어요? 그에 도영은 화들짝 놀라며 절대 아닌데? 하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연락 할게요. 술집 앞에서 헤어지기 전에 윤오가 속삭인 말이었다. 순간 가까워진 얼굴에 내내 잡혀있던 왼손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괜히 목을 가다듬은 도영은 대수롭지 않은 척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윤오는 기숙사로 향했고, 도영은 방향이 같은 은선과 함께 자취방으로 향했다. 연락한다더니 도대체 언제 한다는 거야. 어느새 자취방이 모여 있는 구름공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빠. 나 잠시 할 얘기 있는데 저기 좀 앉았다가 가요.”

 


은선이 공원 주변에 있는 벤치에 몸을 붙였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 옆에 자리를 하는 와중에도 도영은 폰을 확인해댔다. 나쁜 자식. 아예 주머니로 폰을 넣은 도영이 벤치에 등을 기댔다. 할 말이 뭔데? 잠시 머뭇거리던 은선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좀 뜬금없긴 한데 오빠 윤오랑 친하죠?”

 


정말로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이제는 마냥 듣고 흘려버릴 수만은 없는 이름에 도영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재현이랑 내가 친했던가. 걔가 나를 좋아하는 거랑 친한 건 엄연히 다른 거겠지? 별로 어렵지도 않은 질문임에도 답을 찾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래서 결국 그건 왜? 하고 되묻는 쪽을 선택했다. 은선의 얼굴이 불그스름해졌다. 수줍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이상하리만큼 불안했다.

 


"윤오랑 친해지고 싶은데 쉽지가 않아서요."

 


돌려 말하긴 했지만 무슨 의도로 꺼낸 말인지 단박에 이해가 됐다. 애써 웃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듯 근육이 아파왔다. 윤오가 특별히 좋아하는 거라도 있어요? 취미 같은 거. 은선의 얼굴에는 설렘이 한 가득이었다. 저를 향하는 똘망한 시선이 아주 조금 미워졌다. 주머니 속에서 짧게 울리는 진동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





불을 켜지 않은 방은 사방이 깜깜했다. 침대에 엎드려 누워서 눈만 깜빡이기를 계속했다. 자꾸만 은선의 말이 귀를 맴돌았다. 이게 무슨 구시대적인 접근 방법이야. 그런 못된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은선에게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겨우 꺼낸 말이 그 정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거였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던 와중에 그 사이를 비집고 나타난 건 민철이었다. 술에 취한 건지 게걸스럽게 웃으며 도영의 이름을 크게 불러왔다. 니들 이 묘한 분위기 뭐냐? 혹시 둘이 뭐 있는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개소리만 늘어놓긴 했지만 덕분에 도영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중요한 건 그때부터 멍한 정신이 여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한숨을 길게 내쉰 도영이 몸을 돌려 천장을 보고 누웠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지 않은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정재현이 인기가 많다는 건 만인이 다 아는 사실이고, 저도 아는 사실이었다. 놀랄 것 하나 없어야 정상인 일인데 도대체 왜. 답답한 속에 도영이 허공에 발길질을 해댔다. 격한 몸부림에 침대에 있던 폰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맞다, 정재현 연락. 울려대던 진동까지 잊고 있던 도영이 급하게 폰을 집어 들었다.

 


만나서 얘기해주고 싶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돼서 그냥 카톡으로 보내요. 형이 예뻐서 좋은 건 맞는데 따지고 보면 노래하던 모습이 예뻐서 좋아하게 된 거예요. 특히 형 노래 부르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이 진짜 예쁘거든요. 이건 콩깍지가 아니라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김도영이 세상에서 노래 제일 잘 부르거든. 그리고 아직 하나도 안 늦었으니까 하고 싶은 거해요. 내가 옆에 꼭 붙어서 계속 칭찬해줄 테니까.

 


자꾸만 흐릿해지는 시야에 눈을 깜빡였다. 타이밍 진짜 그지 같네. 폰을 아무렇게나 던진 도영이 눈을 감았다. 눈가를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이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났다. 내가 취하긴 취했나보다. 별 것도 아닌 거에 눈물이 다 나네. 분명히 누군가에게는 꼭 듣고 싶은 말이었다. 괜찮은 척, 미련이 없는 척 살아왔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그래서 누군가는 저에게 용기를 줬으면 했다. 입에 발린 말이라도 좋으니까 바닥을 쳐버린 자존감을 일으켜줬으면 했다.

 


문제는 하필 그 대상이 정윤오라는 거였다. 그것도 하필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되지도 않는 거지같은 말을 듣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심란함에 빠져있는 하필 지금.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온 진심을 담아서 저를 응원하고 있었다. 팔을 올린 도영이 아예 눈앞을 가려버렸다. 고맙다고 전해줘야 하는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온통 뒤엉켜버린 머릿속을 헤집기만을 반복했다.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코 다른 후배들과 같은 범주에 둘 수 없는 정재현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더 이상은 외면할 수가 없었다.

 




/





도영은 아침이 되고 나서야 윤오에게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 받은 내용에 비해 턱 없이 짧은 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윤오 덕에 숨어있던 용기가 스믈스믈 자라나는 느낌이 들었다. 중요한 건 윤오에게 느끼는 감정이 고마움만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 사실이 도영을 꽤나 괴롭혔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이 뭔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어서 더 답답했다. 이상하게 열이 오르고 가슴께를 문지르게 됐다. 게다가 툭하면 윤오가 나타나 주변에 둥둥 떠다녔다. 잊고 지내던 키스도 떠올랐고 저를 보며 개구지게 웃던 얼굴도 떠올랐다. 조금만 멍을 때려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윤오 생각에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의도치 않게 윤오의 연락도 피하게 됐다. 그냥 조금이라도 덜 생각하려고 그런 건데. 쌓여가는 연락에 마음이 불편해져갔다. 어떻게 윤오를 대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딱히 달라진 게 없는데도 자연스럽게 행동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윤오가 저를 좋아하는 걸 알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던 시간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법을 아예 까먹은 도영이었다.

 


도영은 저 멀리 윤오가 보인다 싶으면 일단 방향부터 틀고 봤다. 난데없는 새로운 길 개척에 민철이 소리를 지른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외침을 분명 윤오도 들었을 터였다. 저를 아니꼽다는 듯 쳐다보고 있을 얼굴을 생각하니 가슴이 갑갑해졌다. 분명 도영이 원하는 시나리오는 이게 아니다. 어떤 걸 바라는지는 저 스스로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툭하면 피하기나 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레이더망에 정윤오의 머리카락이 걸리기라도 하면 도영은 그 자리를 뜨기에 급급했다.

 


문제는 도영이 피하는 만큼 윤오도 필사적이라는 거였다. 구름공원 벤치에 떡하니 앉아있던 윤오는 도영의 등장에 몸을 일으켰다. 정통으로 마주치는 바람에 도망은커녕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쟤가 왜 여기 있지. 뻔한 상황임에도 도영이 굳이 이유를 찾았다. 윤오가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이 크게 울렸다. 오죽하면 머리통 안에 뇌가 아니라 심장이 들어있나 싶었다.

 


“형 요즘 왜 그래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늘 저를 꼬아내던 그 목소리. 이젠 그저 평범한 질문도 저 잘난 목소리 덕에 평범하게 들리지 않았다. 진짜 내가 제정신이 아닌 건가. 도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저와 엇비슷한 높이에 있는 짙은 눈동자를 빤히 주시했다. 정말 어이없게도, 도영은 지금 윤오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는 중이었다. 꼭 뭐에 홀린 사람처럼 말이다. 마지막 종착역인 입술로 시선이 닿자마자 열이 확 올랐다. 누가 토치를 들이밀어도 이처럼 뜨겁진 않을 것 같았다. 빠르게 눈을 돌린 도영이 먼 산을 바라봤다. 당장 심장이 터져버려도 이상할 게 없을 듯 했다.

 


“그 날 내가 쓸 데 없이 오지랖 부려서 화났어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자꾸 나 피하는데.”

 


전혀 오지랖이 아니었다. 분명 고맙다고 답장까지 보냈는데 윤오는 그 진심을 느끼지 못한 듯 했다. 그 뒤로 이어진 도영의 행동을 보면 윤오가 착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뻑하면 피하고 연락도 받지 않으니 오해하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분명하게 말을 하고 풀어야하는 오해였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도영이었지만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차게 뛰어대는 심장이 그대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봐 입을 꾹 다문 채였다. 도저히 윤오를 제대로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고개 좀 들…”

“으악!”

 


어깨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도영이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꽤 커다란 몸부림에 윤오가 뒤로 밀려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벙 찐 건 도영뿐만이 아니었다. 윤오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누구라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싫어서 밀어낸 거 아닌데. 그냥 심장이 진짜 터질 거 같아서 그런 건데. 그런 게 아닌데. 뒤죽박죽 섞여버린 변명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도영의 외침은 당연하게도 상대에게 닿지 못했다. 정윤오가 상처를 받았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표정이 도영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기 재현아.”

“미안해요.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나 봐요.”

 


울컥했다. 나보다도 더 내 생각 많이 해주면서. 그 누구보다도 나를 인정해주면서. 그러면서 정재현은 자기 생각만 했다고 그랬다. 목울대를 누군가가 꾹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메어오는 목이 생각보다 더 많이 아파왔다. 이렇게까지 아플 줄은 몰랐는데.

 


“저 가볼게요.”

 


윤오가 도영을 지나쳐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윤오가 있던 자리가 텅 비어버렸다. 혼자 남겨진 도영이 결국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어린 애처럼 끅끅대며 소매에 두 눈을 파묻었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늘 단순하게 살던 도영에게는 한없이 낯선 감정이었다. 남자에게 받은 고백도, 주변을 채우고 있던 윤오도,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도. 그리고 방금 윤오가 내보였던 차가운 표정까지. 모든 게 낯선 것들 투성이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서툴렀다. 저의 서툶이 윤오에게 상처를 남긴 것일까 덜컥 겁이 났다. 도영이 이미 축축해진 소매로 아무렇게나 얼굴을 비볐다. 뒤를 돌자 윤오는 이미 저만치나 멀어져있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기분은, 살면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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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시작됐다. 온갖 핑계로 강의를 내팽겨 치는 학생이 한둘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모든 강의에 휴강공지가 내려졌다. 모두가 주점 오픈준비에 한창이었다. 커다란 운동장부터 뒤편 주차장까지 천막으로 가득했다. 분주한 와중에 도영은 힐끗힐끗 눈치를 봐댔다. 그 대상은 저 멀리서 서빙 준비를 하고 있는 윤오였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데도 오늘따라 더 훤칠해보였다. 정윤오 오늘 번호 겁나게 따이겠다. 기본 안주로 나가는 과자를 한 움큼 입에 넣은 지훈이 부러운 소리를 냈다. 도영의 기분이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따이긴 뭘 따여. 입을 삐죽이면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도가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이긴 했다. 번호를 백 번 따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얼굴. 관건은 정윤오가 그 백 번을 어떻게 대처 하는가였다. 도영의 표정이 갈수록 어두워져갔다.

 


그 날 이후로 윤오와 도영은 꽤나 서먹한 사이가 됐다. 지나가다 마주치면 인사는 했지만 그게 다였다. 윤오는 더 이상 도영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없었다면 느끼지도 못했을 공허함이 도영을 휘감았다. 하루에 열댓 번은 오던 연락이 끊겨버린 것에 대해서 도영은 심히 마음앓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황을 따지자면 저가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 게 맞았다. 풀어야 할 오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알면서도 고작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신 뒤로 미루기만 했다. 그와 동시에 돌변해버린 윤오의 태도에 심술이 나기도 했다. 좋다고 매달릴 땐 언제고 이렇게 변하기 있어? 저가 생각해도 얼척도 양심도 없는 투정이었다. 윤오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가끔 가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본심이었다. 그렇게 도영은 이전보다 배로 윤오 생각을 하곤 했다.

 


오늘도 변함없는 도영은 윤오에게 미안함 반, 심술 반을 부리는 중이었다. 대충 테이블 정렬을 끝낸 후 의자에 털썩 앉았다. 폰을 보는 척 윤오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오늘은 진짜 말해야 하는데. 눈치를 살피던 도영이 미간을 구겼다. 틈이 보여야 가서 말을 붙일 텐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윤오에게 꼭 전해야하는 말이 있었다. 물론 사과도 해야 했고 오해도 풀어야 했지만, 그보다 먼저인 게 생겨났다. 다시 용기내서 노래를 불러보겠다는 말. 모든 게 덕분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이건 윤오에게만 할 수 있는 말이고, 또 윤오에게만 하고 싶은 말이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서 하나 둘씩 전등이 켜졌다. 사람들은 점점 늘어갔고 덕분에 주점은 쉴 새 없이 바빴다. 도영은 동기들과 함께 자리를 잡고 술을 마셨다. 무용학과 주점에 가자고 떼를 쓰는 민철을 겨우 말리고 잡은 테이블이었다. 새내기 벗어나니까 이런 건 좋네. 솔직히 이건 바쁜 것도 아니지 않냐? 고작 한 살 차이로 거들먹대는 목소리가 탑을 이뤘다. 주문한 술과 안주가 나올 때마다 도영은 고개를 내밀고 주방 쪽을 봤다. 혹시나 윤오가 올까봐서 기대를 했지만 우연인 건지 의도한 건지, 정윤오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청하는 마지막 날에 온댔나? 어. 오늘은 다듀 온대. 전혀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들이 테이블 사이를 오갔다.

 


“야 대박. 정윤오 번호 따인다.”

 


소주를 들이부은 지훈이 눈에 불을 켰다. 불닭게티나 질겅질겅 씹어대던 도영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멀뚱히 서있는 정윤오와 그 앞에 앉아있는 여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똑단발을 한 뒷모습은 딱 봐도 한 귀여움을 할 것 같았다. 설마 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이렇게 마음이 졸이고 있나 싶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고, 행여나 윤오가 번호를 준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윤오의 시선이 정확히 도영에게로 향했다. 못 볼 걸 훔쳐보다 걸린 느낌이었다. 갑작스런 아이컨택에 눈을 피하지도 못했다. 고작 몇 초 마주한 게 다인데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 했다.

 


“뭐야. 안 주네?”

“내가 저 얼굴이었음 문어마냥 여기저기 다리 걸치고 다녔을 텐데.”

 


모두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속에 미소를 짓는 건 도영뿐이었다. 도영은 저가 왜 웃는지도 몰랐다. 한껏 솟아오른 광대를 누른 도영이 기분 좋은 술을 한 잔 쭉 들이켰다.

 




다듀의 등장과 동시에 절반 이상이 무대 쪽으로 뛰어갔다. 한 때 즐겨듣던 가수이긴 했지만 굳이 달려가서까지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도 매한가지일터였다. 게다가 노랫소리는 여기까지 충분히 들리기 때문에 생생한 라디오를 듣는 거라 생각하기로 했다. 바쁘던 서빙팀과 주방팀도 한숨을 돌렸다. 하나 둘씩 비어있는 자리에 앉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비어있던 테이블은 도영의 옆 테이블이었고, 어쩌다보니 무역학과만 모인 과 술자리가 되었다. 멀리서는 쿵쿵거리는 비트와 함께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좀 먹어. 무대 끝나면 또 바쁠 텐데 힘내라.”

 


지훈이 아직 따뜻한 안주를 1학년들 쪽으로 건넸다. 안주를 전해주면서 도영은 대각선으로 앉아있는 윤오를 또 힐끔 흘겼다. 도무지 말 할 틈이 나지 않아 애가 탔다. 저희 이거 안 먹고 다듀 보러가도 돼요? 1학년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 중에는 은선과 지연도 함께였다. 하필 눈을 마주친 게 도영이었고, 도영은 당연히 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과 동시에 무대 쪽으로 뛰쳐가는 발걸음이 분주했다. 고작 그 짧은 교류에 민철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테이블을 쳤다. 들썩이는 테이블에 모두가 민철에게 아니꼬운 시선을 던졌다.

 


“나 완전 까먹고 있었네. 김도영 너 은선이랑 뭐냐? 너네 사귀어?”

 


순식간에 모든 이목이 도영에게로 집중됐다. 개중에는 윤오의 시선도 섞여있었다. 뜬금없는 개소리에 도영이 눈을 크게 떴다. 뭔 개소리야. 취했냐?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민철이 팔짱을 끼며 거들먹거렸다. 저번에 내가 술 마시고 구름 공원 지나가는데 벤치에 둘이 앉아있는 거야. 근데 딱 보면 알잖냐. 분위기가 존나 이상했어. 솔직히 불어봐. 니네 사귀지? 민철이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 호탕하게 웃어재꼈다. 구경꾼들이 헐, 대박 따위의 감탄사를 뱉어냈다. 소설 작작 써. 얼굴을 구긴 도영이 아랫입술을 씹었다.

 


“그럼 무슨 얘기했는데? 말해 봐.”

“김민철 좀 닥치라고. 너 때문에 분위기 이상해졌잖아.”

“이것 봐. 대답 못 하네.”

 


박은선이 정재현을 좋아한다고, 정재현이 궁금하댔다고 어떻게 말을 하냔 말이다. 그만하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제 말이 우스운지 민철은 계속해서 말을 덧붙였다. 누가 먼저 고백했냐? 어쩌다 둘이 엮였지. 도영은 슬슬 짜증이 났다.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정재현이 또 오해를 할까봐 겁이 났다. 생각해보면 저가 윤오를 피하기 시작한 게 하필 딱 그 날부터였다. 타이밍이 어떻게 이렇게 거지같을 수가 있지. 차마 윤오 쪽을 쳐다보기가 무서웠다. 또 그 때 그 표정을 짓고 있을까봐서.

 


“와 씨발. 너네 엠티 때 왕게임 벌칙 했었잖아. 그때부터였냐? 어쩐지 존나 자연스럽다고 했어. 이 새끼 또 왕게임 핑계로 여자 꼬셨네.”

 


민철이 정도를 모르고 선을 넘어댔다. 도영의 눈치를 살피던 몇몇이 그만하라며 말렸지만 당사자는 그럴 생각이 없어보였다. 살벌한 분위기에 주변이 싸해졌다. 도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저가 단순하게 넘기면서 살아왔다지만, 이건 도를 넘어섰다. 계속해서 나불대는 주둥이를 한 대 패야겠다 싶었다.

 


“씨발 뭐야. 야 미쳤냐? 이거 안 놔?”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민철이 언성을 높였다. 윤오가 민철의 멱살을 쥐고 끌어올렸다. 갑작스런 상황에 주변이 술렁였다. 도영이 꽉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풀었다. 앉아있던 여럿이 용수철마냥 튀어 올라 윤오를 말렸다. 그 난리통에도 도영은 그저 멍하니 윤오를 올려다봤다. 주제를 모르고 빡친 민철이 윤오의 멱살을 따라 잡았다. 둘 다 그만해. 너네 이거부터 좀 놓고 말하자. 날뛰는 민철과 둘을 말리는 여러 개의 손들로 주점은 개판 오 분 전이 되었다. 씨발. 니가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꼴 받았냐? 은선을 두고 한 말일 터였다. 그에 윤오가 작은 실소를 터트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면서 왜 건드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민철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여기저기서 놀란 티를 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절반은 주먹질을 하는 정윤오의 행동에 놀랐으며, 나머지 절반은 은선을 향한 공개고백 쯤으로 해석되는 정윤오의 말에 놀랐다. 씨발 정윤오! 엎어져있던 민철이 세상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모두의 시선이 눈깔이 돌아버린 민철에게로 향했을 때였다.

 


“형 미안해요.”

“…….”

“내가 형 인간관계 좀 망쳐야겠어.”

 


윤오가 도영을 향해 작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정재현 진짜 못 말린다.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냐고. 유일하게 윤오의 주먹질에 담긴 뜻을 알고 있는 도영이었다. 다른 오해 없이 단번에 저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게 해주는 윤오가 좋았다. 도영이 웃음을 터트림과 동시에 주점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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