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쾌한 묘사가 있습니다.







#01


깨어나자마자 수연이 가장 먼저 부여잡은 건 목이었다.

의료진의 멱살이 아니라 자신의 목 말이다. 가다듬고, 조심스레 큼큼거리다 뱉어본다. 아, 아. 본디 목소리가 맞았다. 유일한 자산, 본가에서 꾸득꾸득 챙겨온 것 말이다. 목을 풀거나 한 소절을 불러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어차피 팔인실에서 여러 사람 쪽팔릴 일은 하기 싫었다.

뇌수술을 받으며 바이올린을 켜던 오케스트라 단원의 유난이 세상에 있었다지만.

"아 씨발."

더 쪽팔려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었다. 김도연이 왔다는 것 뿐만 아니라 김도연 그 자체.

수연은 욕설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본다. 커튼이 확 걷혔다. 키가 존나 멀대만하고, 더럽게 예쁜 애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환자에게 할 법한 표정은 아녔다.

김도연.

비상 연락망에 있던 번호 주인이다.

병문안 과일 바구니는 커녕 한 마디의 위로도 기대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수연은 눈깔 똑바로 하라는 명령 대신 다른 말을 골랐다.

"뭔데."

도연은 이후론 아무 말 없이 수연을 쏘아봤다. 왼손목에 주렁주렁 달린 수액, 기타 잡것도 휘 쳐다보는 건 마찬가지다. 오물에 눈을 박고 있느니 잡동사니로 눈을 씻고 싶어 보였다. 왜 진작 안 뒤져버렸냐는 힐난 백 마디 보다 더 무게가 크리라. 하지만 수연은 태연하게 눈을 깜빡이고 빈 손을 내밀었다. 계산 후 영수증이라도 받으려는 사람처럼.

"내놔."

"뭐."

"청구서 니 앞으로 떨어졌을 거 아냐." 

"시발, 진짜……."

"내놓으라고."

아무래도 길에서 쓰러진 사람이 제 발로 카드를 긁었을 리 없으니 말이다.

도연은 뭔가, 존나 지긋지긋한 응어리를 단전 부터 끌어올리듯이 한숨을 쉬었다. 한 순간도 이 곳에 있기 싫어 보였다. 가방을 뒤지다 대충 처박아 둔 종이를 가슴팍에 탁 던지며 뱉었다.

"야. 지수연."

"……."

"내 번호 당장 지워. 개좆같으니까."

수연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너 연락처에서 없어진 지 오래라고.

그냥, 이게 도연에게 준 역할이다. 보통은 단축 번호 일 번이 비상 연락망의 주인과 같을 거다. 세간의 상식으론 마땅히 그랬다. 하지만 수연은 새 핸드폰 앞에서 잠깐 고심했고, 손가락이 외워둔 길을 찾아 저절로 움직였다. 새삼 느끼지만 이 선택이 진짜 다행이었다. 수액만 맞으면 끝나는 단순 피로든, 어떤 끔찍한 일이든 그걸 유정이 먼저 알게 만들기는 싫었다.

다만 도연에겐 이래도 됐다.

그러고 싶었다.

"존나 생색은. 얼마 나오지도 않았네."

"됐고, 최유정 지금 오거든?"

"……."

"아가리 단속 잘 해라."

용건을 전한 뒤엔 돌아 나오면 될 일이었다. 도연이 씨근덕대며 걷는 동안, 환자복을 입은 어르신들이 도연을 흘끔거리며 바라봤다. 노인의 미덕이란 건 사실 눈치였다. 저토록 험악한 표정을 짓는 애한테 예쁘다고, 모델 서도 될 것 같다는 말을 건넬 필요는 없는 거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도연은 유정을 마주쳤다.

입원실이 고작 삼 층인데도 유정의 이마는 땀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디서부터 뛰어온 건지 알 법 했다. 도연은 유정 앞으로 다가갔다. 울기 직전의 표정인 쬐끄만 대학 동기. 섣불리 안아주거나, 어깨를 토닥이는 대신 걱정 어린 투로 말했다.

"뛰었어?"

"몇 호야?"

"……너 화장실 좀 들렀다 가자."

"나, 너무 정신 없어서 못 들었거든."

둘의 말은 엇갈렸다. 하지만 도연은 단 하나의 언성도 높이지 않는다. 분명히 대화 상대가 수연이라면 말했을테다. 귓구멍에 좆 박았냐고. 그러나 유정은 대학에서 만난 애다. 도연이 그런 폭언을 구사한다는 걸 모르고, 알 이유가 없다.

"삼백팔호. 가서 표정 좀 보고 들어가."

"……."

"언니 많이 놀래겠다. 응?"

"도연아……."

"응."

"나 진짜 언니 뭐 잘못된 줄 알고……."

유정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도연이 팔을 살짝 벌리자, 유정은 무너지듯 도연의 품 안으로 들어왔다. 땀과 눈물로 엉망진창인 친구가 급하게 숨을 먹는다. 도연은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보며 오히려 얘가 과호흡으로 실려가는 것 아닐지, 얼마나 유정을 더 돌봐야 하는지 고심했다.

그러다가 은은하게 머리 꼭지가 도는 거다.

지수연 이 미친년이 자기를 완충재로 썼다고.

"내가 먼저 봐서 다행이다."

도연은 말을 뱉은 뒤에 아차, 중얼거리듯 손을 유정의 어깨로 올렸다. 그 다음 수습할 것을 황급히 뒤에 덧댄다.

"야. 그래도 미리 들어서 덜 놀랐을 거 아냐. 피곤해서 수액 맞는 거라고."

"응……."

봤다는 말은 물론 거짓이다. 공강이었고, 효정이 알바를 간 날이라 혼자 뒹굴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는 원래 받지 않았는데 느낌이 싸했다. 대학 부속 병원의 의료진이었다. 지금 비상 연락망 등록 된 분한테 연락 드린다고. 소속을 듣자 마자 생각할 겨를 없이 뛰쳐나왔고, 와중에 지갑 핸드폰 다 챙겼고, 최대한 유정이 안 놀라게 완곡어로 전했고.

또 뭐했더라.

대체 뭔 정신으로 왔지.

"김도연."

유정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허리를 꽉 안았다.

"왜."

"고마워, 진짜."

도연은 유정이 아는 친구 중 가장 멋있었다.

예쁘고 옷을 잘 입는 것 뿐만 아녔다. 전반적인 태도가 유정 뿐만 아니라 어떤 또래도 갖지 못한 거였다. 그래서 정글의 암호랑이처럼 슬렁슬렁 걷더라도, 가끔 경박하게 웃어도 오히려 인간미가 있어 보였다. 너는 두 번 더 살다가 온 거 같애. 누가 그렇게 말했고 도연은 뭔 소리냐며 웃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발 되지도 않는 거리를 택시로 탔다가 중간에서 황급히 뛰어 내려온 자신보단, 도연이 훨씬 더 어른처럼 느껴졌다.

도연의 입장으로썬 가슴이 꾹 죄어 왔다.

그건 귀엽고 착한 친구가 자신을 단단히 안고 있기 때문일테다.





#02


사람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곳 밖에 모른다.

수연은 그 마저도 까먹은 것 같다. 

뿌리가 없는 사람처럼 지내도 지울 수 없는 출처가 있다. 버스로 십 분 걸리는 시내에 개업한 스타벅스나, 전문대학 앞의 후진 먹거리 골목에서 모두들 만족하고 지냈다. 분명 그때는 그랬던 것 같다. 시금치 색깔, 또는 황토색 교복. 끝 없는 논밭 또는 공장지대, 혼탁한 개천에서 드나들던 물새. 출사를 오는 외지인이 있었지만 주민들에겐 새삼 이해할 수 없는 촌극이다.

여기는 관짝 같았다. 그러니 사회면에 이 동네가 언급되자 모두 열을 올릴 수 밖에 없다. 우리 동네 병신인 줄은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병신이라고.

걔 우리 학교잖아. 누구? 그 일 학년 때 잠깐 나오고 무단 결석 존나 하는 애, 아 걔? 나 걔 봤는데. 어디서? 다방 오토바이 타고 지나가던데. 미친. 그럼 몸 파는 거야? 개쪽팔려. 심란한 때라 외부 초청 강사를 불러왔어도 강당은 끝없이 웅성거렸다. 꼴통 학교가 다 그런 건지, 아니면 동네 자체가 똥통인 건지. 놀 거리가 하나도 없으니 흉악한 기사 마저도 컨텐츠가 되었다.

수연과 도연의 학교는 여상이었다가 급하게 인문계로 전환 절차를 밟았다. 재단이 부도 난 지 십 수년 만의 일이었다. 여기 개 빡대가리 학교인 거 맞는데 뭐, 하면서도 교사들이 가슴을 쓸어 내릴테다. 열 여덟, 아홉 남짓 먹은 애들을 짜바리 공장이나 콜센터에 내몰아 실적을 채웠다.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지들도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라고 믿고 싶다. 

어쨌든 수연의 학년까진 여상 그대로다. 이미 생긴 취업반과 진학반을 어쩔 수 없으니.

"지수연."

도연이 수연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굳이 팔을 뻗어서 말이다.

수연은 진학반의 맨 끝반, 도연은 취업반 쪽 첫 반이다.

수연은 커다란 개눈깔을 천천히 돌렸다. 느린 동작과 다르게 찰싹 뻗던 손날은 매웠다. 아 씨발 왜 찔러. 그 한 마디면 됐다. 딱히 화가 난 게 아닌데도 모든 애들이 입에 욕을 달고 살았다. 어쩌면 모든 것이 빡치는 걸 수도 있다.

모두가 수연에게 말을 놓았고, 수연은 그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괜히 후까시 잡을 때 쾌락을 느끼는 애들은 썩어 넘쳤다. 아무리 시궁창으로 살아도 한 살, 또 한 살 먹을 수록 서열이 올라가니까. 하지만 수연으로썬 일 년 차이 따위 접어두고 장난치며 노는 게 훨씬 재밌었다. 다른 애들도 수연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았다. 내년에 담배 좀 사달라고 선을 넘는 애도 있는데, 그냥 텅 빈 눈으로 싸하게 쳐다봐주면 끝났다.

그 묘한 눈은 마력이자 최소한의 선이었다. 

건들지 말라는 표지판인 거다.  

어쨌든 학교라도 꾸역꾸역 기어 오는 꼴통과 아닌 꼴통은 천지 차이다. 달방을 끊고 배달이나 더 험한 일을 하던 애들은 애초에 입밖에 오르지도 않았다. 가출팸이니 뭐니 형성해서 살긴 했지만, 어찌 됐건 불가촉천민 취급이다.

수연은 대견한 꼴통과 인생 조진 애의 딱 중간에 있었다. 유급을 한 번 했고. 그게 가족 노릇을 모르던 애비가 안 찔러준 촌지 때문인지 진짜 무단결석과 음주, 흡연 누적 때문인진 알 길이 없다. 민증은 내년이면 쓸모가 있겠지만 좁아터진 동네에서 담배를 파는 인간이 다 빤했다. 느그 애비가 단 외상이 월 매출이라고 쫓겨나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아무튼 수연은 나이든 뭐든 어중간했다. 그런 수연의 옆구리가 한 번 더 찔렸고, 이번엔 내용물이 있었다.

"뭔데."

"눈깔 장식이냐?"

도연이 빈정거렸다. 하지만 너무 평범한 대답이었다. 방금 마이쮸 샀는데 언니 드세요. 라고 말하면 오히려 수연 쪽에서 기겁하며 물을테다. 니 약 처먹었냐고. 수연은 받아 들어 껍질을 까고, 입 안에서 굴렸다. 손에 쥐고 있던 건지 미적지근했다. 곧 등허리에 체육복이 쩍쩍 달라붙는 여름일테다.

쩌덕쩌덕 씹으며 수연은 강연자를 바라본다. 곤란한 낯빛이었다. 세미 정장은 몸에 꼭 맞았고 텁텁한 검은색이 더워 보였다. 아마 집에 가서 씨발 진짜 빡대가리 애새끼들, 하고 소주를 깔 지도 모른다. 어른이면 더 비싼 거 먹으려나. 

모교 졸업생과의 만남. 보통은 교실에 뭔 폰팔이나 공장 반장을 밀어 넣는 게 끝이다. 제법 괜찮은 대학으로 갔다더니 저런 무대가 생겼다. 쩔쩔 매는 걸 보니 고딩 때 어땠는지 알 만 했다. 하지만 찐따가 계속 찐따로 살리란 법은 없으니.

수연은 옆얼굴에서 시선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도연이 자신을 빤히 보고 있었다. 뭔가 싶었다. 묻는 대신 수연도 도연을 한참 바라봤다. 그러다가 왜, 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도연은 왼쪽 눈을 찡긋대는 걸로 답했다. 수연은 잠깐 얼이 빠졌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괜히 오바스럽게.

"아, 미친년."

중얼거리면서.

하지만 도연에겐 아직 용건이 남았나 보다.

"너 대학 가?"

"뭐래."

"진학반이잖아."

"그럼 김도연 니 취업하게?"

"미쳤냐?"

"걍 보는 거지. 존나 할 거 없으니까."

인권 조례가 생긴지 언제인데 학교는 늘 폰을 걷어갔다. 어차피 공기계를 내면 될 일이지만, 여기서 보란듯이 켰다간 담임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게 뻔하다. 눈에만 띄지 마라. 이게 교사들을 포함한 주변 어른들의 원칙이다. 체육복 바지에 네모지게 자리 잡은 것 까지 뒤지면 서로 존나 피곤해지니까.

하지만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액정을 켜봤다. 

아직 한참 남았다. 수연은 불만에 찬 신음을 삼켰다. 짜증을 끝내자마자 도연은 쉴 틈도 없이 말을 붙였다.

"니 오늘 야자 해?"

"하지."

"공부 하여튼 존나 열심히 해요."

"왜 지랄인데. 또."

"째. 노래방 가자."

"아, 싫어."

"그럼 새탈이라도 하라고."

"꺼져라."

"인성 진짜."

"아니, 오늘 왜 앵기고 지랄인데."

"나 생일."

수연은 무료하게 흔들대던 왼손을 멈췄다. 알고 있었다. 원래 수연은 숫자를 외우는 것에 능했다. 

산수 머리는 제법 돌아가서 일 년 꿇은 것도 그럭저럭 내신으론 무마할 수 있다. 이런 쓰레기 학교에서 내신이 뭔 의미가 있겠냐만. 수연은 강연자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말했다.

"애들은 어쩌고."

"그 지랄 하고 또 하면 빡대가리지. 서른 명 뚫리는 술집 찾는다고 좆뺑이 쳤잖아."

"븅신들."

"노래방 가자. 응?"

"니 씨발 사기죄로 잡혀 가야 돼. 음력 생일도 아니면서."

"출생 신고 내가 늦게 했냐?"

"알 바야?"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 대화를 끝으로 약속이 잡힌 게 맞다.

청소 시간 때 수연은 화장실에 걸어 둔 가방을 들고 몰래 빠져 나왔다. 뒷문을 두 번 꺾으면 도연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교복도 벗지 않은 채로, 당당하게 전봇대를 등진 채 담배를 뻑뻑 피워 올릴 거다. 그러다 수연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웃을테다. 야살맞게, 의도는 아니지만 눈을 휘면서.

담배는 노래방에서 다 털릴 예정이다. 존나 맛대가리도 없는 거 왜 피냐면서 꼭 수연의 담배만 쏙쏙 뽑아갔다.

수연은 가방 속 안주머니를 연다. 꽉 찬 두 갑이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03


수연에게 도연은 날파리처럼 느껴졌다. 덩칫값을 못한다는 것과 다른 얘기다. 건들건들 걸어오거나 불시에 툭툭 치고, 가끔은 눈을 손바닥으로 확 덮어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안경을 썼을 때도 말이다. 진짜 죽여버린다고 했는데 도저히 안 고쳐졌다. 천성일 거다.

얼쩡거리면서 별 쓰잘데기 없는 말을 걸었다. 그러더니 참고서를 휙 뺏어 들어 괜히 이리 저리 넘겨보고 말하는 거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굳이 그런 말을 덧붙이면서 되돌려주는데, 도연은 재미도 없고 뭔 말인지 모를 공부를 하던 수연의 옆을 늘 지켰다.

금붕어 급의 집중력. 타고 나길 변덕스럽고, 신경질적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개지랄을 떨고 마는 성정. 그럼에도 둘은 어찌저찌 잘 붙어 다녔다. 수연의 행방이 궁금하면 도연에게 묻고, 도연이 어디 처박혀 있는지 알아내려면 수연에게 묻는 게 편하다. 한 세트 취급 받는단 소리다.

애들은 그 둘을 꽤나 어울린다고 느꼈다. 잘 받아 주다가 결정적일 때 선 긋던 꼰대, 성질 개 더러운 미인. 호감을 사는 것과 별개로 둘은 사람들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았다. 웃고 떠들 수 있지만 딱 그 뿐. 둘 사이엔 다른 게 있는 것 같았다.

다른 거 맞다. 

친구끼리 노래방에서 갑자기 꼴렸다고 입술 부벼 대진 않으니까.

마이크를 꺼둔 채 한 차례 해치웠고, 화면에선 노래를 선곡 해 달라는 알림이 깜빡댔다. 열중하기 위해선 마이크를 꺼둬야 했으며, 침묵을 지킨 것 같다. 주인 할매가 문 밖에서 눈치를 주지 않은 걸 보면 말이다. 

수연이 손에서 너절한 콘돔을 툭 벗겨낸다. 재떨이 위에 얹혔고, 어지간히 꼴초인 둘은 그것을 담뱃재와 꽁초로 숨겨둘 것이다.

옷을 추스르던 수연은 마이크를 도연에게 팍 건네며 말했다.

"니 먼저 해."

"물 좀."

"그렇겠지. 방금 존나 뺐으니까."

"말 진짜 또 개좆같이 하지?"

툴툴대면서 도연은 목을 축였다. 입가를 닦고 나선 검지로 꾹꾹 리모콘을 눌러댔다.

그건 수연이 섹스만큼 기다리던 순간이다. 

시내 폰 가게에서 지겹도록 틀어대던 아이돌 노래. 수연은 리모콘을 넘겨 받은 채로 담배를 뻑뻑 피운다. 옆에서 누가 연초를 피워대든 말든, 도연은 목을 풀 필요도 없이 미성을 뽑아낼 수 있었다. 가끔 삘 오르면 앉은 채로 안무도 했다. 솔직히 걔가 찍는 좆같은 틱톡보단 나았고, 훨씬 빛났다. 

수연은 그 때 만큼은 나댄다며 키득대지 않았다. 내버려두면 눈요기를 할 수 있으니까.

사실 눈요기 정도가 아녔다. 얘는 갈수록 물이 오른다. 수연이 그렇게 혼자 판단했다. 연습생 첫 전령기가 초등학교 때라는 건 애석한 일이다. 어차피 여기선 도연에게 명함을 찔러줄 스카우터를 기대할 수 없고 가로수길은 개뿔, 경리단길을 흉내낸 짭이 조성되려는 중이다. 원래는 기차역 앞의 빨간집 거리였다.

심란한 생각을 접어두듯 점수 제거를 눌렀다.

수연이 가만히 말했다.

"니 진짜 그거 해보지."

"뭐."

"아이돌."

"지랄."

도연이 웃어 넘길 때 수연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지랄이 아녔고, 아무렇게나 하는 빈 말도 아니다.

예쁜 애들은 사실 존나 흔하긴 하다. 하지만 도연은 흔하다고 하긴 어려웠다. 솔직히, 다른 데에서 태어났으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 같다. 뭐 과거 논란이니 이런 건 뜰 수도 있겠지만 알 바 아녔다. 그냥 가끔은 도연의 얼굴이 아깝다고 느꼈다. 하지만 수연은 더 덧붙이지 않았다.

내가 얘 인생 책임 져줄 것도 아니고.

"지수연 닌 안 해?"

"기다려봐."

멜론 플리를 뒤지길 잠깐, 그러다 고심해서 하나 고르긴 했다.

"없네."

"뭔데. 여기 금영 아냐? 태진인가."

"금영 망한 지가 언젠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되돌아가서 다시 골랐다. 도연은 수연의 멜론 화면을 힐끔 쳐다봤다. 뭔 헐벗은 외국인이나 그래픽 아트 천지인 재생 목록이다. 한글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도연은 그런 장르에 대해 아는 게 전무하다. 수연이 이게 진짜 노래라며 이어폰을 귀에 쑤셔 박던 애가 아니기 때문이다.

깡촌에 처박혀 있던 둘은 자각하지 못했다.

미의식은 본능이다.

기교, 성량. 그런 거 하나도 몰랐다. 하지만 도연은 첫 소절이 시작되자 마자 알 수 있었다. 수연의 발음은 꿀처럼 매끄러웠고 목소리는 단단했다. 그 경도는 스텐 그릇이나 악기에 비할 수 있는 게 아녔다. 풍부한 음성으로 방 안이 꽉 찼고, 랜덤으로 맞춰둔 화면은 태연하게 설산과 절벽을 비췄다. 흐르다가도 솟구치고 스며들듯이 넘쳤다. 왕수로 녹인 황금이 귀에 들어차는 것 같다. 개뜨겁겠지만, 차라리 이 이후로 귀를 틀어 막는 게 남은 생에선 낫지 싶다. 

진짜로 좋은 건 누구나 눈치챌 수 밖에 없었다. 수연이 노래를 할 땐 도연도 그 누군가의 일부였다. 

대성당 안에 처넣은 것 처럼 도연은 마음이 켕겼다. 그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존나 좋아야 하는데 조바심이 든다. 뭐지, 하고 말아버렸다. 그럼에도 끝나지 않길 바랬다. 감정의 정체를 아직 알 필요가 없는 시기였다. 그 동안 수연의 손이 간주를 넘기고, 후크가 이어졌다.

도연의 손등이 수연의 허벅지에 닿아 있다. 그 뿐이다. 

도연은 이 순간 만큼은 수연을 건드리지 않았다.

한 곡이 끝나고 나서 도연이 눈을 반짝였다. 아무래도 탄성을 지를 만큼 솔직한 성격은 아녔다. 그 또래가 그렇듯 칭찬하면 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가장해 말했다.

"요즘 그런 거 많지 않나?"

"뭐."

"유튜브. 커버곡 부르는 거."

"에바야. 장비 좆빠지게 비싸던데."

"야. 나 전에 홍대 놀러 갔잖아. 애들이랑."

"근데?"

"버스킹 하는 새끼들 존나 많거든? 다 촌년 아니랄까봐 구경하는데 개병신 같애. 진심."

"……."

"코노 처가서 연습 좀 하라고 소리 지를 뻔 했다니까."

"하여간 김도연 인성 진짜."

"아니, 니도 봤어야 돼. 저 새끼들 내가 바른다고 마이크 뺏을 듯."

수연이 질색하듯 웃어댔다. 그러고 경찰서 가라는 악담처럼 들렸을 것 같다.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도연으로썬 하고픈 말을 다다다 쏟아내면 그만이었다. 영 거슬리던 귀밑머리를 넘겨준 뒤 도연이 말했다.

"그거 또 해줘."

"또?"

"빨리."

"싫어. 딴 거."

수연은 그렇게 받아치며 영한 검색으로 바꾼 뒤 꾹꾹 눌렀다. 나 생일인데, 하는 볼멘 소리가 들렸지만 알 바 아녔다. 어차피 막상 시작하면 또 얌전해지니까 말이다. 둘은 이러고 지냈다. 서로가 서로의 주크박스였던 것 같다. 계속 지르다가 허기가 느껴지면 서비스 시간을 남겨두고 훌쩍 떠났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밥집보단 새피가 익숙했던거다.

그래도 되는 시기라고 여겼다.





#04


수연이 땀에 젖은 등을 벌떡 일으켰다.

옆에선 유정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애인이 이불을 확 걷고 거실로 향하는 걸 모를 만큼 말이다. 투룸 방문이 조심스레 닫혔다. 숨죽여 움직이는 것, 방금 꿈의 내용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 그게 수연이 연인으로써 할 수 있는 배려였다.

잠깐 서성대다가 드럼 세탁기 앞에 섰다. 화장실에 갈까 싶었지만 몽정한 애새끼도 아니고 그럴 필요는 없다 생각한다. 방금까지 입었던 팬티를 버리듯 던져 넣고, 허전한 아래를 오버핏 티셔츠가 덮었다. 시발. 수연은 들릴락말락 욕을 뱉었다. 걸을 때 마다 허벅지 사이가 미끄러웠다. 방금까지 꿈에서 김도연에게 빨린 곳이었다. 존나 다 말도 안됐고, 무의식에서 도연이 예쁘고 나쁜 년으로 남아있는 건 더 개같은 사실이었다.

년 단위로 심란한 꿈을 꿨다. 하필 옛날 얼굴과 옷 그대로 나온다. 왜 나는 나를 괴롭힐까. 그렇게 자책 할 필요도 없다. 그딴 시기를 지나 왔지만 수연은 밥 잘 먹고 과제도 곧잘 냈다. 

내일을 위해 담배나 한대 피우고 다시 자빠져 자면 될 일이다.

베란다로 향하자 밤 공기가 미적지근했다. 윗집도, 유정도 담배 연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보통이면 뭐라도 걸쳐 입고 현관으로 향했다.

수연이 연기를 뱉으며 생각했다. 유정이 알 필요가 없다고. 왜냐면 수연 본인이 그렇게 정했다. 과거에서 자랑스러운 부분은 하나도 없고, 명절엔 애매하게 웃으며 과제 개밀렸다고 말하면 끝이다. 유정은 다행히 둔감했고, 어쩌면 수연의 본가가 김치 한 쪽도 배송 시키지 않는 집이란 걸 눈치챘을 테다. 그래서 동그랑땡이니 뭐니 부랴부랴 싸오면 수연의 입에 넣기 바빴다.

수연은 한탄하는 대신 잘 받아먹었다. 

약점에 대해 말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나았다.

복잡한 머리로도 유정을 정말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게 단 하나의 진실이었다. 얘한테 무슨 일 생기면 다 찔러 죽이고 자기도 죽을 거다. 모든 좆같은 것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보듬고, 귓가에 속삭이고, 매번 표현하는 게 수연의 연애다. 이게 진짜 사랑이었다. 

쪽지 붙은 음료수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애정은 자연스럽게 치솟아 올랐고 무르익었을 때 서로 확인했다. 한 이불을 덮고 잘 때 행복했으며 침대에서 키득거리고, 툭툭 건들다가 껴안았다. 대부분은 섹스였으며 그 단계까지 안 넘어가도 좋았다. 모든 게 충만했다.

그럼 김도연은 뭔가? 

정하기 싫었다. 그냥, 걔는 진짜 그냥 무언가였다.

그딴 게 사랑일 리가 없다.

나는 잘 도망쳤다고. 도연으로부터. 그래서 저열한 애새끼들과 인생 망한 동창과 온갖 병신 짓거리들이 남 일이 되었다고 믿었다. 분명 그랬던 것 같다. 죽도록 벌고 원하는 과로 왔다. 비교내신이 적용되어 모교로 들러야 했을 땐 가슴이 철렁했지만, 배움에 늦은 때가 어딨냐며 스스로를 달랬다. 교정에 아는 얼굴은 아무도 없었으며 옛날 담임마저도 전근 간 지 오래였다.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 생각했다. 진짜 끝이라고. 본가에 발길을 끊은지는 오래다. 그래도 수연은 학교 우편물 주소마저 제 자취방으로 돌렸다. 이제 다시는 그 모든 것과 관련이 없다. 살다 보면 누구든 만날 일이 있겠지만 필사적으로 모른 척 할 거다. 사람 잘못 보셨다고.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안 돌려본 건 아니다. 냉장고 바지를 입고 추레한 꼴로 편의점에 향할 때, 고깃집 서빙 따위의 허드렛일을 할 때, 울고 있을 때, 바쁠 때. 도연은 항상 그 상상의 더미 인형이었다. 징그럽게 큰 키로 수연을 내려다보며 웃는 거다. 아직도 그렇게 사냐는 듯. 그래서 알바도 아득바득 교내 근로나 과외에서 머물렀다.

그러다 도연을 맞닥뜨렸을 때 실감했다.

옷은 멀쩡했고, 캠퍼스 언덕길이었으며, 지각은 커녕 삼십 분의 여유가 있었다. 분명 모든 게 최고의 컨디션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최악의 날로 떨어질 수 있는 거다. 

도연의 눈이 흔들렸다. 아마 수연도 그랬을 것이다. 도연은 노트북 가방을 메고 있었다. 교직원이나 산책 나온 주민일리가 없는 차림이다.

알 반가 싶어서 비공식 흡연구역인 벤치로 부리나케 내뺐다.

도연은 쫓아오지 않았다.

아 씨발, 대체 왜? 그렇게 부르짖어도 할 말이 없는 감정이었다. 한국이 쥐좆만한 나라라는 걸 새삼 느꼈다. 하지만 같은 하늘 아래서 살아 있겠거니 싶었다. 그것 뿐,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김도연은 기어코 기억의 무덤에서 기어 나왔다. 옛날 그 얼굴이랑 크게 달라진 것 없이.

수연은 담배를 비벼 껐다. 거의 필터 직전이라 떫은 맛으로 텁텁했다. 멍 때리고 있으면 죽도록 타들어 가는 건 감정이나 꽁초나 비슷했다.





#05


계획이란 건 원래 엎으라고 있는 거다.

수연은 한참 잡동사니 서랍들을 뒤졌다. 꼭 찾아야 할 물건이 있었다. 싸구려 미러급 지갑이라던가 기타 가치 없는 선물 말이다. 마음 같아선 불싸지르고 싶었으며 불연소 쓰레기라도 기어코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말 것이다. 마땅히 그래야 했다.

그게 어딨더라.

중얼거리며 찾던 마른 손이 간절해 보였다. 뭔가의 부품, 물티슈 묶음과 유통기한 지난 샘플들이 끝없이 나왔다. 손끝은 자꾸 뭔지 모를 모서리에 찍히거나 긁혔다. 하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뒤져내고 말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사를 거듭하며 진작 다 갖다 버린지 오래였다. 이사가 아니라도 청소든 뭐든, 핑계를 잡아서 부득불 치우고 말았다. 책상 앞엔 아메리카노 빈 컵이 쌓여 있지만 그런 것들은 지독할만큼 잘 없앴다. 뻔히 아는 데도 뒤질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 서랍을 열 때 쯤엔 무력감을 느꼈고, 수연은 온당히 견뎠다. 자신의 감정이라면 자신에게 책임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리만큼 마음 한 켠이 울컥거렸다. 슬픈 것도 아녔고 화나는 건 더 아니였다. 수연은 뭔가를 자꾸 유예하고 있었다. 시간을 써서 뒤적거리면서도 결정적인 건 말로 정리해두지 않았다. 일기는 원래도, 앞으로도 쓸 성격이 아녔으며 캠퍼스에서 마주친 그 날에 메세지 하나를 자꾸 쓰다 지웠다. 외워둔 번호 자리는 비워 놨고.

도연아

여기까지 쓴 임시 저장 하나.

김도연 그 때 너 왜 좆같이 굴었어

그게 임시 저장 두 번째였다. 결국 안 보냈다.

보낼 생각은 앞으로도 없다.

벽 너머에서 희미한 음악이 들려왔다. 신축의 좆같은 점은 벽간소음이다. 더 꼴받는 건 현관 앞에서 도연을 마주쳤을 때다.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잠들었다가 유정과 함께 뛰쳐 나가기 직전이었다. 동시에 도어락을 닫던 김도연을 봤을 때, 유정이 반가운 낯빛으로 도연이 너 여기 사냐고 물었을 때, 달갑지 않은 등굣길에서 유정이 도연과 같은 과인 걸 알게 되었을 땐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한국이 좁다고 치부할 게 아니라 인생이 수연을 엿 먹이던 느낌이었다.

아, 이 언니 내 룸메이트. 하고 간략하게 유정이 소개를 했을 때 도연은 사무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친구의 친구와 통성명을 하는 문화는 미드에만 있는 게 다행이었다.

그 이후론 옆집의 모든 동태가 거슬렸다. 야 유정아. 니 친구 유튜브 너무 크게 튼다. 라고 입 밖에 낼까 싶었다. 아니면 몰래 다른집인 척 포스트잇이라도 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수연은 온 힘 다해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그 집에서 새벽 세 시 까지 음악이 들리든, 단정하게 생긴 여자애가 옆집 도어락 비번을 치든, 언니이. 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옆집에 쏙 들어가든.

오히려 신경 쓰는 쪽은 유정이었다. 수연의 집과 도연의 집이 맞닿은 부분은 거실 뿐이다. 그럼에도 유정은 소리를 꾹 죽였다. 그럴 때 마다 괜히 신경질이 나 끈질기게 괴롭혔다. 더 울도록, 언니 그만. 하고 이마를 꾹꾹 밀도록 말이다. 그러고 나면 은은한 좌절감이 들었다. 토라져서 돌아 누웠던 유정의 맨 등에 눌러 썼다. 미안. 하고 말이다. 그건 진심이었다. 

살결에 고양이처럼 뺨을 꾹꾹 부비고 나면 유정은 화를 풀었다. 그럴 때 마다 다시금 느끼는 거다. 이딴 짓 절대 두 번은 안 할 거라고. 내가 사랑하는 게 최유정 밖에 없다고. 그래서 수연은 유정을 세상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도 지키기로 마음 먹었다.






#06


이불을 덮고 들어오자 유정이 덜 트인 목소리로 말했다.

"화장실?"

"응."

대명사 하나 뱉어낸 것도 힘겹다는 듯 유정은 눈두덩을 꾹 감았다. 퉁퉁 부어 있었고, 살이 오른 입술이 몹시 사랑스러웠다. 곤히 자서 체열이 오른 육체는 막 꺼낸 빵 같았다. 덥혀진 체향으로 방 안이 향긋했고, 수연은 지체할 것 없이 팔을 잡아 제 어깨에 얹었다.

수연은 키가 커다란 사람이 폭 안기는 방법을 안다. 명치께에 자리를 잡았다. 한참 얼굴을 묻다가 숨이 갑갑하면 고개를 들었다. 아마 유정에겐 본가에 있는 망또 정도로 느껴지리라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유정은 감은 눈으로도 알고 있었다. 이 언니는 가끔 간절한 눈으로 올려다 본다고. 왜 그러냐고 물어봤자 대답 안 해줄 것 같다고. 

유정은 이미 안다. 등 뒤에 십자가 진 수염 아저씨든 수녀든 심지어 애인이든, 마음이 무너지는 날엔 옆에 있는 사람은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집밥 만큼의 사랑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요령 있게 넘길 수 있었다.

그냥 가만히 머리통을 쓸어주는 것 만으로 괜찮았다.

그러길 바래야 했다.






#07


"야. 색 나왔냐?"

"시간 존나 얼마나 지났다고."

"빨리. 두피 개따가워 진짜."

"지수연 특징. 맨날 남 탓 함."

"닥쳐라."

"지가 염색약 사와 놓고 지랄은."

도연은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났다. 수연의 머리통 뿐만이 아니라 도연의 코도 따가웠다. 환기가 필요했고, 창문을 탕 열자 눈높이와 거의 비슷한 길이 보였다. 시점이 퍽 특이해서 도로에 방이 잠긴 것 같았다. 아마 밖에서 보기엔 끽해야 머리통과 어깨밖에 안 보일테다.

그 때 보단 훨씬 나았고,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어느 날 둘은 새끼손가락 걸 필요도 없이 약속했다. 진지하게 같이 살래? 달방 끊자. 둘은 말이 험했을 뿐 빈말이 오가는 사이는 아녔다. 아마 그 때 부터 죽도록 모았던 것 같다. 가끔은 안방 지갑에서 뜯어내기도 했다.

가출팸은 가봤자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문신한 돼지새끼들은 여자애들을 단란주점으로 돌렸고, 둘 다 그딴 일을 하기엔 비위가 약했다. 목표 금액이 모이자 전봇대를 부지런히 뒤졌다. 보증금 없이 갈 수 있는 곳이 다섯 군데였다. 그 중 둘은 계약 직전에 빠그러졌다. 나머지 두 집은 빤히 쳐다보다 월세를 눈 앞에서 오 만원 올렸다. 그렇게 추려낸 게 여기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이 집주인에게서 걸러진 것이지만.

둘은 창문을 열면 돌가루가 쏟아지던 지하에서 산 적도 있다. 

그 때 보단 호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취객들은 여기가 소변기인 줄 알았다. 그럴 때 수연은 라면을 삼키다가도 소리쳤다. 아이 씨발 밥 먹는데. 그러면 도연도 맞서듯이 일어나 창을 탕탕 두드리며 소리쳤다. 개새끼야 니 꼬추 짤라 버린다! 그러면서 핸드폰까지 꺼내 들면 바지를 추키고 후다닥 도망갔다. 보복은 없었다. 방 안이 너저분한게 딱 봐도 인생 놓은 애들 둘 살아 보여서 그런 건지 뭔지.

방학 직전이었다. 둘의 출석표엔 무단결근이 죽죽 그어지고 있을테다. 아마 교실에서 담임이 한숨 쉬며 외쳤을 것이다. 너네 중에서 지수연, 김도연 둘이랑 친한 애 있으면 교무실 오라고. 교실은 잠깐 수런거렸을 거다. 뭔데. 가출? 잠깐 씹어대다가 잊혀질 것이다. 공교롭게도 팔 월이나 일 월이 생일인 애들 처럼 말이다.

수연과 도연은 그런 애들을 내버려 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라면과 냄비밥으로만 때우면 월세는 내고도 조금 남았다. 옷은 집에서 가져온 게 전부다. 세제와 생필품은 천냥 마트에서 조달했다. 구질구질하더라도 자유 비슷한 걸 맛보면 다시는 본가로 돌아갈 이유가 없을 것이다.

수연은 비닐캡을 뒤집어쓰고 삼십 분 버텼다. 유튜브를 보거나 담배를 물면 견딜만한 시간이었다. 탈색도 두 세트 했으니 거의 막바지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잽싸게 화장실로 향했다. 여관에서도 안 쓸 목돌림형 플라스틱 꼭지를 움켰다. 시간을 들인 뒤 온수가 쏟아져 나왔고, 동봉된 헤어 팩까지 죄다 쓴 다음에 머리를 말렸다.

"끝났다."

명료한 말에 도연은 돌아봤다.

보송보송한 황금먼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빤히 보다가 결국은 웃어 제꼈다. 수연은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왜 비웃고 난린데."

"니 진심 그거 같애."

"뭐."

"피카츄 색깔 고양이."

"또라이냐?"

"아니, 이거 보라고."

도연이 한참 포털을 두드려 출처를 찾아낸다. 멍청한 표정으로 칫솔 가득 강황을 발리던 고양이가 있었다. 수연은 턱을 꽉 당기며 웃음을 참았다. 하지만 누가 피카츄 줄무늬까지 합성한 결과물에선 푸학 소리를 내며 터졌다.

"귀엽네."

"으, 자화자찬 한대요."

"씨발아, 니가 쟤 닮았다매."

"닮았다 했지 니랬냐?"

"지가 말빨 딸리는 걸 왜 억진데, 또."

수연이 몸을 일으켜 비닐 봉지를 뒤졌다. 방금까지 수연 몫의 탈색과 염색약이 가득 담겨 있던 것이었다. 뭔 뻘건 색깔 패키지가 있었다. 원래는 이게 수연의 머리색이 됐을지도 모르던 여분이다. 아 싫다고, 소리를 꽥 지르며 도연은 좁은 원룸을 우당탕 뛰어다녔다. 힘에선 안 밀리던 수연도 기어코 도연을 잡아 눌렀다.

결국 염색을 하기 전에 둘은 담배맛이 가득 남아있던 입술을 부볐다. 도연은 상의를 잡아 올리며 말했다. 니 햇빛 받으니까 좀 꼴리긴 한다고. 수연이 마른 어깨를 으쓱 올리다가 목덜미로 파고 들었다. 

몸싸움과 섹스가 크게 안 달랐다.






#08


수연은 교환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있었다.

한참 데스크탑에 눈을 박고서 담배를 뻐끔뻐끔 빨아댔다. 거실을 작업 공간 비슷한 걸로 쓰는 게 다행이었고, 커다란 베란다는 활짝 열려 있었다. 맞바람이 죽도록 들이쳐 팔월 한 복판이 아닌 이상 에어컨 없이도 개길 수 있었다. 쫌스러운 시절이 배겨 있어 관리비를 조금이라도 덜 수 있으면 좋았다. 컴퓨터 책상은 아래 위 두 칸인데, 아래엔 76건 짜리 신디가 있었다. 둘 다 중고 시장에서 업어왔다. 가끔 응답 없음이 떴지만 꾸역꾸역 작업을 해냈다.

컵라면으로 때워가며 산 장비들을 앞에 두고 골몰하고 있는 거다. 

여덟 마디 쌓았으면 대충 오늘 할 일 끝이지 않냐고 생각하며.

"에바지, 이건."

그게 수연이 교환학생 공지에 전하는 코멘트였다.

급선무는 어찌 됐든 졸업하는 거다. 시작이 늦었으니 최대한 빠르게 때려치워야 했다. 어차피 캠퍼스 생활에 대한 낭만은 과제와 합주로 개박살 난지 오래다. 유정은 그 때 쯤이면 졸업반일 것이고, 공백기 동안 일 다운 일을 하며 먹여 살려야 할 수도 있을테다.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니 속이 켕겼다. 마지막 모금을 쭉 빤 뒤에 뱉고, 바닥을 드러낸 플라스틱 컵에 꽁초를 집어넣었다. 수연은 늘 커피를 조금 남겼다. 저번엔 컵 바닥이 녹아서 책상을 그슬려 먹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저런 이유들 때문에라도 공고를 오래 쳐다볼 필요가 없었다. 내가 많이 지쳤긴 했나 보다. 수연은 그렇게 간주했다. 어딜 가든 도연과 안 겹치려고 신경을 썼다. 아예 피하라고 판을 깔아줬는데 그 판 마저 피하게 되는 이유는 모르겠다. 거기까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곧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진동으로 핸드폰이 저 혼자 부부부 움직였다. 수연은 흘끗 내려다 본 뒤 전화를 받았다.

"어. 왜."

남자 후배의 용건은 다음과 같았다. 축제 때 서기로 한 교내 밴드 보컬이 튀었댄다. 최근에 잘 되던 여자애가 있는데 까였고, 아예 군휴학 각이 선 건지 잠수를 타는 중이랜다. 자취방엔 고지서만 쌓여 있고 아무도 보컬의 본가를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 어쩌라고 싶은 얘기였다. 어차피 교내 밴드라는 건 초청 가수 부르기 직전에 흥 올리는 역할이니까. 그렇다고 가라오케 사운드만 들려준 뒤 내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미 핸드릭스의 관을 깨고 기타를 씌워줘도 관객들 반응은 싸늘할 것이니. 그럴 거면 노래방 반주나 듣고 말지.

폰 너머의 다급한 음성을 들은 뒤, 수연은 명료하게 말했다.

"니네 좆됐네."

- 그쵸?

"어떡하게?"

- 누나가 서주면 안돼요?

"미쳤나 봐."

- 아니 저 진짜, 진심 다 걸고 진지해요. 네? 누나 존나 잘하잖아요.

"야. 딴 애 찾아라."

- 일당 드릴게요.

그럴 땐 터치펜을 휙휙 돌리던 수연의 손길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핸드폰 요금 제출이 내일이었다. 진작에 알뜰폰으로 바꿨어야 하지만 통신비 내역으로도 빌릴 수 있는 대출 상품의 존재를 알았고, 혹시 사람 일은 모른다 싶었다. 게다가 이것도 신용 등급에 보탬이 되니까.

"얼만데."

금액을 듣고 나선 저도 모르게 끄덕였다. 진짜 존나 급하거나 돈이 썩어 넘치나 보다.

"나 교양만 내고 바로 합주실 갈게."

- 진짜 고마워요. 누나.

"어."

수연은 통화를 끊었다. 

기지개를 켠 뒤, 그 손을 내려 그대로 자신의 머리채를 쥐었다. 돌았나 보다. 방금까지 김도연과 죽어도 안 겹치니 뭐니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대에서 얼굴 깐다고? 수연은 이미 알고 있다. 수많은 실음과 졸업생들이 왜 보컬 학원으로 사라지는지. 노래를 잘 하는 것과 무대 체질이라는 건 완전 다른 얘기다. 수연 본인은 적어도 그 자질이 없다고 느꼈고, 가끔 데이트 중 버스킹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본인이 마이크를 뺏어 들 생각은 없었다.

이제 밴드는 좆됨에서 벗어났고, 그건 수연이 떠안게 되었다. 일당의 댓가다. 돗대만 남았으니 관두려 했는데 다시 빼어 물 수 밖에 없었다. 라이터가 손 안에서 칙 울었다. 길게 내뿜은 뒤에 생각했다. 지 연애 조졌다고 주변에 개지랄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이후론 일주일 내내 혼신을 다해 합을 맞췄다. 피크와 드럼 채를 쥔 남자애들이 엄지를 척척 세우건 말건 알 바가 아녔다. 

죽도록 부른 끝에 대충 사람 꼴을 갖췄고, 수연은 축제 당일 관중석을 샅샅이 흩었다. 아무 생각 없이 눈 돌렸는데 김도연이 팔짱 끼고 있는 거 보면 혀라도 깨물까 봐. 하지만 꽤나 앞자리에 있던 유정을 발견했고, 수연은 방긋 웃으며 부를 수 있었다. 언니 진짜 멋있더라. 로 시작된 야간 데이트는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피날레는 역시 자취방이었고, 어깨를 움직이며 생각했다. 하나도 안 피곤하다고.

비슷한 때 도연은 갱신 된 축제 출연자 목록을 확인했다. 

턱을 괴고 바라본 뒤, 그 날은 축제는 커녕 캠퍼스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09


도연과 수연의 밀월은 여름 두 달을 채 못 넘겼다.

동네 횟집에서 느리게 춤추던 광어를 볼 때, 알바 없는 날 싹싹 긁어 모아 놀러 갔을 때, 좆도 맛 없는 츄러스를 씹으며 줄을 섰을 때, 모든 피로와 구질구질함이 둘을 성실하게 좀먹고 있었다. 둘은 빈말을 할 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등을 돌린 채 자는 날이 많아졌다.

"에어컨 끄자."

수연이 그렇게 말하며 벽 구석으로 손을 뻗었을 때, 도연은 저도 모르게 울컥 화가 치밀었다. 닫아 놓은 창과 패디큐어의 독한 냄새 때문이라 생각했다. 쟤는 진짜 배려라곤 쥐좆도 없구나. 늘 느꼈다. 샤워 중에도 쌓아둔 설거지를 하느라 찬물만 쏟아지도록 만들었다. 도연은 짜증 섞인 소리를 질렀다.

"씨발 진짜, 덥다고. 물어보고 꺼."

"물어보면 끄지 말라고 지랄하잖아."

"더운데 어쩌라고?"

"야. 김도연."

"뭐."

"그럴거면 관리비 엔빵 왜 하는데? 니 혼자 다 내던가."

그딴 말로 서로의 속을 후비고야 마는 것이다.

싸운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거, 칼로 물 베기라는 시쳇말. 최소한 둘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애초에 둘 다 머리가 식어도 사과를 안 하는 성격이었다. 수연은 도연이 마냥 헤프다 생각했고 도연은 수연이 쫌스러운 주제에 존나 뒷손이 없다고 여겼다. 전기세 까지 쪼일 정도의 처지인 것도 짜증 났고, 그렇게 궁상 떨며 너저분한 밥상과 쌓인 재떨이를 방치하는 서로가 싫다. 

아무래도 도망치기엔 너무 좁은 방이었다. 언쟁 뒤에 쾅, 문을 닫고 틀어박히는 게 둘에겐 사치였다. 그런 장소라면 화장실 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도연은 자꾸만 수연을 살살 긁었다. 대학 요강이나 캠퍼스 사진 같은 걸 보고 있으면 옆에서 비웃었다. 야. 거기도 지잡대 취급 받지 않냐? 돈이나 버는 게 낫지. 라던 시비를 수연은 묵살했다. 어차피 고졸 조차도 사치라고 생각하면서 왜 그 지랄을 떠는지 이해가 안 갔다. 병신에게 먹이 금지. 수연이 늘 지켜 오던 것이었지만 도연은 악을 지르듯 건드렸다. 청소 습관부터 피로로 정오까지 안 깨어나던 모습까지도.

결정적인 사건은 기름때 묻은 설거지에서 시작 된 싸움이었다. 씨발 이딴 것도 못 하면서 유식한 척 말꼬리 잡지 말라고, 집에서 뭐 배워 먹었는지 알만 하다. 그렇게 고함 지르며 컵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그야말로 눈깔이 돌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반응이다. 

그런 충격이면 다이소 천원짜리 컵이 아니라도 박살이 날 수 밖에 없는 거다.

파편이 수연의 발등을 핏 긁고 지나갔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아 씨발, 하고 수연이 작게 읊조렸다. 핏방울이 가늘게 맺힌 발등을 바라보다 슬리퍼를 꿰어 신었다. 피를 봐서 머리가 희게 질렸지만 대형 밴드보다 소형 얼기설기 붙이는 게 싸다는 거, 소독약 따위를 살 돈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다시 돌아왔을 땐 바닥에 파편만 남아 있었다.

수연은 한숨을 쉬고 파편을 하나하나 치웠다. 편의점 봉투에 툭툭 집어넣고, 거의 물티슈 한 통을 다 써가며 바닥을 닦았다. 핸디 청소기라도 사자던 도연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자고 할 걸 싶었다. 혹시나 뭐가 안 밟히는지 한참 방 안을 서성였다.

하지만 도연은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에 도연이 여벌 열쇠로 문을 따고, 캐리어에 지 짐들을 부시럭대며 챙기는 걸 수연은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다. 다만 잠든 척 등을 돌리고 있을 뿐이다. 작별 인사도 없이 현관문은 닫혔다. 수연은 울지 않았다.

그러니까 김도연의 성격이 좆같아서 찢어졌다고 생각하는 게 편했다. 

둘은 밑바닥을 이미 들켰고, 어쩌면 서로가 서로의 진창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부턴 수연이 모르는 얘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본인이 서비스직 팔자는 아니라는 거, 손놈들은 자신의 탁한 동공이 환멸스러운 표정으로 보인다는 거, 그 개눈깔을 귀여워 해준 건 도연 밖에 없었다는 거, 집주인 할배가 계약이라는 건 꼭 지켜야 한다고 이죽대며 하던 말을 도연에게도 똑같이 했다는 거, 남은 월세를 십 개월 간 깨작깨작 집주인이 양쪽에서 받아 처먹었다는 거.

아직 같이 살던 어느 날 수연이 좆같은 핑계로 알바를 짤렸을 때.

수연은 새 알바 공고를 도연에게 보여준 적 있었다. 외곽의 주유소였다. 도연은 잠깐 말이 없다가 다다다 쏘아붙였다. 여기 버스 한 시간에 한 대 밖에 안 온다고. 니 담배 피려면 존나 멀리 돌아서 가야 한다고. 땡볕에서 석유 냄새 배겨 가면서 일 하는 건 쉽겠냐고. 당시 수연은 도연의 표정을 보면서도 몰랐다. 눈 안에 담겨 있던 참담함에 대해.

그리고 그제서야 도연이 노래방에서 느꼈던 감정의 정체를 안 것도 모른다.

도연은 그 때 분명히 자각했다.

이렇게 살다간 인생 망한다고. 그리고 얘 인생 내가 조지고 있다고.

그런데 도저히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거다. 학점 은행제, 야간 대학. 이런 것도 하나 몰랐다. 모르는 것에 대해 조언해 줄 수는 없었다. 너는 존나 열심히 하면 뭐라도 될 것 같은데, 나중에 우리 전문대라도 꼭 가자고 말할 줄을 몰랐다. 본디 성격 때문 만은 아녔다.

수연에게선 보기 싫은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근데도 동시에 질책 받는 것 같았다. 너 얼굴 껍질 잘 타고 났으면 써먹을 생각을 하라고, 노력 좀 해라. 이렇게 비웃는 것 같단 말이다. 지겨운 촌구석에서 인생 망하기 싫으면 응당 그래야 했다. 그런데 얘나 나나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게 너무 빡쳤다.

그러니까 왜, 씨발 대체 왜 타고난 대가리를 가졌는데도 얘한테 고졸 마저 사치인지 이해가 안 갔다. 꾸역꾸역 다시 교복을 꺼내 입어야 하나 싶다. 하지만 그냥 다 찢어 발기고 싶었다. 그 무념무상의 낯빛으로 허드렛일을 척척 하는 것도, 기념일 따위 없는데도 어디서 주말 알바 일당으로 선물을 툭 던져주는 것도 짜증났다.

그 응어리도 과거의 일이 되었다.

다음 학기 쯤엔 수연의 발등에 앉아 있던 딱지도 떨어졌다. 

쭉 그어진 흉은 점점 희미해지더니 흔적 조차도 사라졌다. 둘은 어디서 마주쳐도 인사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거나, 또는 눈을 빛내며 물어보던 애들이 있었다. 혹시 싸웠냐고. 수연은 대답하지 않았고 도연 쪽에선 아 몰라 씨발, 라는 한 마디로 묵살했다. 다 들으라는 듯 쩌렁쩌렁 외쳤다.

졸업식 때 도연은 친구들과 꽃다발 사진 하나 남긴 뒤 시내로 도망갔다. 

수연은 취업계를 낸지 오래고, 참석하지 않았다. 둘의 본가와 새 자취방에서도 졸업 앨범은 찾을 수 없었다. 

다음엔 고졸 안 써야겠다, 차장이 이죽댈 때도 그러려니 싶었다. 그런데 도저히 그러려니 못 하겠는 건 그 외의 전부였다. 목표 금액을 모았을 땐 문제지를 파헤쳤다. 회식에다 야근에 좆같은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퇴사하고 파트 알바로 바꾸었을 땐 오히려 동기 부여가 됐다. 절대 다시는 숯불 나르고 손때 가득한 지폐 만지지 않을 거라고. 남아있는 코인은 올해 한 번만 쓸 수 있었다. 

도저히 그 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수연은 담배 연기 자욱하던 룸 노래방을 기억하지 않았다. 도연이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던 골목도 기억하지 않았다. 새탈 후에 같이 피씨방에서 먹던 라면도 기억하지 않았다. 곰팡내가 나던 반지하 육 평 짜리 원룸과 그 안에서 나눈 말과 도연의 표정과 같이 웃던 날은 정말 하나도 기억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견딜 수 있던 때였다.






#10


"옆집 사시는 분 맞죠."

나긋한 목소리를 들었을 때 수연은 생각했다.

여자 취향, 안목. 김도연이 둘 중 하나는 달라진 것 같다고. 어쩌면 둘 다.

수연은 오랜만에 번화가를 걷고 있었다. 집에만 처박혀서 작업하는 것 보단 바람을 쐬는 게 나았다. 다 떠나서 커피 정도 사 먹을 여윳돈은 있었다. 간판을 탐색하며 다음에 유정과 갈 곳을 생각하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도연과 그 애인으로 추정되는 애를 마주치는 거, 그 하나는 정말 안 좋았다. 

수연이 저도 모르게 흘끔 명치께를 내려다봤다. 덮밥 먹다가 한 번 흘렸는데 눈에 안 띄어서 다행인 것 같다.

"네."

"저번에 수박 잡아주셔서 고마웠어요. 언니, 그 때 있잖아. 나 화채 해준 날."

여자는 도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러다가 통성명이라도 시킬 기세였다. 도연은 뻣뻣하게 끄덕이다가 말했다.

"근데 효정아." 

"응?"

"우리 영화 시간 얼마 안 남았어."

도연은 그렇게 말하며 끼고 있던 팔짱을 끌고 휙 지나쳤다. 언니이. 하고 칭얼대던 목소리가 들렸다. 인파 많은 대로변에 수연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수연은 멀거니 서있다가 가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효정. 성이 뭔지는 몰라도 얼굴만큼 반듯한 이름이었다. 

또한 그 효정이란 애는 끌려가며 생각하고 있었다. 이 언니 은근 질투심 있구나. 제대로 짚은 헛다리 때문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속을 알 수 없던 예쁜 언니가 애인이란 사실은 늘 안 믿겼기 때문에.

수연은 흥이 식지 않았다. 수액 좀 맞았다고 컨디션은 반짝반짝 최상의 상태였다. 그러니까 김도연 면상 봤다고 집으로 처박힐 이유는 없는 것이다. 또 다시 아무 카페나 들어가서 처박혔다. 회전율에만 골몰하던 딱딱한 의자에서 미디고 지랄이고 작업이 될 리가 없었다. 유튜브 쇼츠를 보며 낄낄거리다 해가 질 때 까지, 그 태양마저 건물 너머로 쏙 사라졌을 때에도 앉아 있었다. 저희 곧 마감해서요. 그 말을 듣고서야 수연은 뻐근한 몸을 일으켰다. 특이사항이랄게 없는 하루였다. 돌아가는 길에 발신자 표시제한으로 전화가 하나 오긴 했다. 백 퍼 보이스피싱 이겠거니 싶어서 씹었지만.

동거를 시작한 뒤로 유정의 카톡방은 텀이 길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메세지를 엄청나게 주고 받았다. 유정이 본가로 잠깐 내려갔기 때문이다. 망또 사진에 수연은 웃으며 대답했다. 귀엽네. 하고 말이다. 너 닮았느니 언니 닮았느니 귀엽게 투닥거리기도 했다. 

심란할 땐 책갈피를 눌러 썸 타던 당시의 카톡을 몇 번이고 읽어봤다. 당시의 둘은 아직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혹시 저녁 드셨냐고, 안 바쁘시면 같이 먹자던 빤한 개수작도 있었다. 유정은 의도적으로 사이를 둔 뒤 대답했다. 좋다고. 한참의 탐색과 표현으로 이뤄낸 관계다. 수연이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하고 빛났다.

그렇게 희석되어야 할 기분이었다.

하지만 분리수거장 앞에서 담배를 피던 도연을 목격하게 된다.

수연은 흘긋 쳐다보고, 평소 같은 걸음으로 건물로 들어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도연이 담뱃재를 털더니 말했다.

"야. 지수연."

"뭔데."

"니 뭐냐?"

용건 없이 바로 지르고 보는 건 예전과 달라진 것 없는 말본새다. 지가 도깨비라도 된 것 처럼 눈을 형형하게 뜨고 있었고, 쥔 주먹에서 담배가 타들어가고 있다. 수연은 그 쪽으로 흘긋 눈을 내리다 들어 올렸다. 저거 한 번 손 데여야 정신 차리겠거니 싶어서.

니 뭐냐는 말. 대충 뭔 의민지 알 것 같다. 하지만 수연은 도연이 뱉어낼 때 까지 발뺌하기로 했다. 어차피 쟤한테 곱게 대답해 줄 사이도 아녔다.

"뭐, 씨발."

"눈치 처 없냐고."

"돌리지 말고 용건만 말해."

"알아서 지나가던가. 걔 인사 왜 받아주는데?"

"걔가 먼저 했는데 왜 나한테 지랄이냐고."

도연의 미간이 우그러졌다. 하지만 수연에겐 빤히 보였다. 저 새끼 머리에 버퍼링 걸렸다는 뜻이다. 도연은 늘 그랬다. 지가 말문 막힌다 싶으면 뇌 용량을 언변에 쓰긴 커녕, 어떻게 해야 더 상처 줄 말을 고를지 골몰하는 거다. 그게 수연이 끔찍하게도 싫어하던 점이었다.

수연은 한껏 빈정거리기로 했다. 저번 비상 연락망 사건 같은 건 불상사다. 인생에서 다시 일어날 리 없는 거. 안 볼 사이니까 뱉어낼 말도 거리낌 없이 쏟아낼 수 있었다.

"뭐, 어떡할까. 눈 감고 다니라고?"

"……."

"니나 최유정한테 거리 두던가. 양심 있으면."

물론 그딴 거 김도연 마음 속엔 없겠지만. 

도연의 어깨가 천천히 씨근덕거리며 올랐다. 눈망울이 젖어 있다. 뭐가 됐든 눈물보다 고함이 먼저 터지는 새끼였다. 무선 이어폰을 하루 종일 꽂고 있던 터라 더 이상 귀 따갑기 싫었다. 수연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담배를 빼물었고, 같은 타이밍에 도연이 본인의 담배를 패대기 쳤다. 시멘트 바닥으로 불꽃이 탁 튀었다. 그 방향은 수연 쪽이 아녔지만 괜히 수연이 인상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떠오르는 게 있었기 때문에.

"아, 손버릇 진짜."

"너 한 번만 더 노효정한테 인사하면 죽여버릴 거야."

죽이게? 니가? 미친년이 허세를 다 부리네. 수연은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경멸스럽다는 표정 때문이 아니고, 다음 순간에 도연이 휙 등을 보이고 떠났기 때문도 아녔다. 어렴풋이 깨달았다. 도연에게 죽어도 없을 양심이 수연에게 희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효정이란 애는 존나 사랑 받고 있다는 얘기다. 지수연이 최유정에게 그러는 것 처럼. 수연과의 개지랄같은 시절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진짜 사랑. 김도연이 훔쳐왔든 배웠든 후천적으로 일궈낸 다정함 말이다. 수연에겐 때려 죽이는 한이 있어도 안 베풀어 준 거. 때 안 묻었던 마음, 머릿속에 떡과 혈기밖에 없던 수연을 잔뜩 헤집어 놓고 지 좆만한 마음은 내놓느니 혀 깨물고 뒤져버릴 것 처럼 굴었던, 도저히 알 수 없던 도연은 작은 대갈통 뿐만 아니라 온 힘을 다해 효정을 아끼고 있었다.

문득 수연은 효정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걔 그냥 예쁘고 나쁜 년인데 어디가 좋아서 코 꿰인 거지. 과거 세탁 엄청 잘 했나 보다. 그러다 알 반가 싶어서 마지막 연기를 뱉고.

꽁초를 버리려던 손이 공중에 멎는다.

수연은 땅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인생 최악의 집주인이라면 물론 그 반지하 주인이겠지만, 여기도 만만치 않았다. 지는 가진 건물이 열 채 넘어서 태평한데 성질 더러운 관리인을 들였다. 택배를 조금만 늦게 들여놔도 지랄을 떨던 아저씨였다. 그러니까 그런 관리인이 방치할 리 없는 모습을 본 거다.

도연이 서 있던 곳에 어림잡아 꽁초가 무수하게 흩어져 있었다.

어림잡아 한 갑은 넘을 것 같다. 

필터엔 립이 묻어 있었으나 점점 희미해졌다.

수연은 천천히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거나,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은 함부로 쓰지 않았다. 아마 전세금 정도는 날려야 적당한 용례일 것 같다. 그런데, 진짜로 잘 모르겠다. 그건 수연이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이다. 평생을 피하려고 애써왔기 때문이다.

지수연은 김도연을 평생 궁금해 했다. 

대체 뭐 하는 년인지.

그런데 차라리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첫 자취를 끝낸 수연이 실컷 도연을 속으로 씹어 댈 수 있던 거, 없는 사람인 척 살아온 거, 머리를 들어내서 잊고 싶던 거, 그게 전부 김도연의 마음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부턴 착각했다. 사실 숨기는 데에 능한 게 아니라 골이 비어서 생각이 없던 거 아닐까 하고.

그런데 이런 걸 봐 버리면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언쟁 때 마다, 방금도 참아온 말이 있다. 차라리 방금은 솔직하게 말했던 걸로 쳐야 할 만큼 삼킨 게 많았다. 닌 씨발, 됐다. 그렇게 뱉고 눈을 옆으로 돌리면 그만이었다. 늘 도연이 바락바락 밑바닥을 보여주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한 건 덕목이 아녔다. 특히 도연처럼 면상과 인성이 반비례 하는 경우엔 말이다.

왜 나한테만 보여준 건지 생각이 미치자 입술을 질끈 물었다.

둘 사이에 주고 받은 마음이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수연도 도연에게서 뜯어낸 게 있었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수연은 도연에게 욕을 속 시원히 할 기회를 영영 잃었다.






#11


그 반지하의 에어컨은 수연보다 나이가 많았다. 에너지 효율 오 등급을 자랑하던 고물은 집주인 이빨만큼 싯누랬다. 털털털 미지근한 바람만 뿜어내더니 결국 꺼져 버렸고, 수리 기사가 두 번이나 다녀갔다. 냉매 가스가 새는데 당장은 고치기 힘들다며 이죽대다가 출장비는 출장비대로 처먹었다. 집주인과의 통화 이십 분 끝에 결국 해결된 건 없었다. 북향이라 가만히 있으면 안 덥다. 선풍기라도 어디서 얻어라. 들으나마나 한 조언이었지만 그것도 집주인이라고 전화를 끊은 뒤에야 욕을 씹을 수 있었다.

도연의 성질머리는 땀과 함께 빨려나갔다. 창을 닫으면 찜통이고 열면 그나마 노인네 입김 같은 바람이 불어왔다. 찬물 샤워를 죽도록 했다. 피서는 통장 때문에 포기했지만 물줄기 아래서 입을 맞추고 있으면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빗물 구멍은 모기의 대문이었다. 얼룩이 짓눌린 벽을 닦을 때 도연이 땡고함을 질렀다.

"모기 새끼들 진짜, 왜 멸종을 안 하는데."

"그거 살까?"

"뭐."

"홈매트."

"싫어. 존나 시골 할매집 냄새 나잖아."

사실 환기에 신경 쓰던 이유는 더운 쪽방 때문만이 아녔다. 도연이 알바 하다가 점장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 있댄다. 너랑 니 집 냄새 안 어울린다고. 그러니까 반지하 냄새 난다며 꼽을 준거나 다름 없었다. 빨래를 열심히 하는데도 그랬다.

수연이 잠깐 골몰하다가 답을 내렸다.

"나 잠깐 편의점 좀."

슬리퍼 차림으로 다녀온 수연이 들고온 건 모기향 무더기와 담배 한 보루다. 둘 다 여러 의미로 생필품이었다.

도연은 긴가민가한 표정이다. 골 깨지는 홈매트 냄새보단 운치 있었지만 모기향도 촌스러운 냄새인 건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더 이상 선택권이 없었다. 여름 밤 일주일 중은 엿새는 쪄 죽기 직전이고 그나마 하루는 살 만 했다. 마침 오늘이 그 하루다. 창을 닫고 모기향을 두 개 켰다. 실타래처럼 돌돌 말려있던 꼬리가 타들어 갔다.

수연이 담배를 두 개비 뽑아내고 말했다.

"니 펴라."

"왜?"

"모기 새끼들 담배 피면 다 뒤진대."

"뒤지긴 개뿔."

"밖에서 기어 들어오는 애들 밖에 없잖아. 우리 그 동안 담배 냄새 다 빠졌나 봐. 환기 존나 해서."

담배를 받아 든 뒤는 거의 화생방 훈련 비슷했다.

마른 기침을 캑캑 뱉어냈지만 오기로 또 빼물었다. 야, 이거 소독차 느낌 아냐? 나 애기 때 쫓아 다녔는데. 라고 말하자 수연이 소리를 낮춰 웃었다. 하여간 김도연 촌년인 거 존나 티 낸다고 말이다. 웃고 떠들 때 창으로 또 취객이 다가왔다. 바지를 까려고 할 때 도연이 창을 두드리더니 말했다. 니 부랄에 담배빵 놔버린다. 그러자 기겁하며 도망을 가는 거다. 수연은 그 황망한 뒷모습과 도연의 자랑스러운 표정에 배를 잡고 굴렀다.

야매 소독을 끝내자 방이 뿌얬다. 한참이 지나서야 공기가 걷혔다. 도연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벽지 좀 누래진 거 같은데?"

"알 바야. 씨발 집주인 새끼."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원래 이랬던 거 같애."

"그렇겠지. 에어컨도 안 고쳐주는 새끼가 벽지는 갈았겠냐."

도연이 모기향과 담배의 잔향을 들이쉬며 생각했다. 그러다 떠오른 게 있어 냉장고를 뒤졌다. 어제 마감 때 들고 온 컵수박이다. 아침으로 먹고 나가려 했는데 바빠서 그만 잊었다. 수연이 눈을 반짝 빛냈고, 둘은 이쑤시개를 꺼내 수박 조각을 콕콕 찍었다.

"맛있지."

"괜찮네."

별 다를 것 없는 수박 맛이었다. 도연의 알바가 카페라는 게 새삼 장점으로 느껴졌다. 가끔은 폐기 기한이 약 십 초 정도 남았을 마카롱이나 케잌 따위도 들고 왔다. 기념일도 아닌데 초를 꽂고 먹었었다.

입 안이 달았다.

수연은 가로등 빛을 받던 도연의 뺨을 바라봤다.

샤워를 또 한 차례 끝낸 뒤엔 침대로 향했다. 담배 연기 윗집으로 다 올라갔을 텐데 욕실에서 소리까지 낸다는 건 제발 저희 쫓아내 주세요, 로 들릴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날 만큼은 호흡이 달랐다. 바로 맨몸을 얽는 게 아녔다. 소독 냄새가 성욕을 죽이는지, 아니면 그냥 서로가 그러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도연이 허벅지 위에 올라타 한참 수연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지수연."

"응."

"너 눈 존나 징그러."

"알아."

"진심 개눈깔 같애."

"안다고."

역광을 받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도연은 굳이 저런 말을 했다. 구겨진 미간을 키득대며 쭉쭉 펴 주더니 가만히 눈썹을 쓸었다. 올바른 방향으로.

쓰다듬을 받는 내내 수연은 도연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도연의 입술이 망설이듯 살짝 열렸다.

"그니까 눈 뜨지 말아 봐."

수연에겐 실낱 만큼의 순진함이 남아 있었다. 코끝에 숨이 닿을 때, 혀가 밀려올 때, 도연의 말에 따르느라 어떤 표정을 하고 있던 건지 보지 못했다. 본다고 해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도연의 마음 속에 뭐가 들어 있었는지. 






#12


수연은 빈 침대에서 눈을 썼다.

새벽 세 시 삼십 분. 유정은 내일 점심에 고속버스를 타고 오기로 예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습관적으로 옆자리를 더듬다가 한껏 인상을 우그렸다. 대화방을 켜서 들어갔다. 잘 자라는 이모티콘이 열두 시에 남겨져 있던 게 끝이다. 못 자고 있었다. 이런 꿈을 꾼 날엔 몇 시가 됐건 숨을 들이키며 깼다. 물 속에 처박아 둔 얼굴이 빠져나온 것 처럼.

베란다에서 수연은 담배조차 피지 못했다. 담배갑을 계속 쥐었다 놓는다. 입술을 물어 뜯는 버릇보단 이게 나았다. 멍한 눈까지 어우러지니 누가 봐도 빈껍데기 인간으로 보일테다. 계절은 바뀌긴 커녕 더 무더워질텐데 한기가 느껴졌다. 등에서 식던 차가운 땀이 수연의 온기를 뺏었다. 몸살 기운의 초입이었다. 결국 수연은 베란다 문을 닫고 방 안에 처박힌다.

대체 뭔 좆같은 꿈이 수연을 이렇게 만들었냐면.

꿈에서 도연이 언니, 하며 따랐다. 예쁘게 존댓말도 했다. 해가 들이치는 예쁜 카페와 밥집에서 데이트도 했다. 도연은 자주 웃었고 욕 따위는 할 줄 몰랐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툭툭 만지면 볼이 붉어졌다. 그러다 눈 앞이 팟 어두워졌다. 그건 수연이 현실에서 눈을 떴기 때문이다.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 수연을 괴롭혔다.

수연은 아직까지 모른다. 걔 성깔이나 내 성격이 좆같지 않았다면, 둘 다 집에 돈이 많았다면, 웃으면서 대해줬다면 서로가 서로를 잊어야 할 리가 없는지 말이다. 또한 수연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서로가 더 이상 고유의 지수연이나 김도연이 맞긴 하냐고. 우리가 우리로만 평생 살아왔는데 대체 나 아닌 나를 어떻게 아냐고.

오한은 갈 수록 심해졌다. 빈 속이지만 해열제를 우겨 넣을 수 밖에 없었다. 쓰린 속 보다 약효가 뒤늦게 치밀었다. 밤 중에 아픈 게 제일 좆같았다. 위경련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갔다가 한 달치 월세가 날아간 적 있다. 수연이 가장 잘 하는 것은 버티기다. 이번에도 자신을 이겨내야 했다.

감기 초반에 늘 따르던 민간 요법이 있었다. 가벼운 외출 겸 편의점 들르기, 쌍화탕과 포카리 사 오기, 심해질 각이 보이면 즉석 죽도 산다. 모든 걸 뱃속에 때려 넣고 온수로 샤워한 뒤 잠들면 개운했다.

지갑이 도통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져지 안에 넣어 둔 게 생각났다. 옷장을 뒤적이다가 더 이상 안 입는 외투 주머니에 손등이 닿았다. 그건 제법 크고 네모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갑의 질감은 아녔다.

수연은 무심결에 그것을 꺼냈다.

모서리에 금이 간 구형 핸드폰이다.

지금이야 중고 시장에 내놔도 안 팔리겠지만, 당시 폰팔이가 눈독 들였던 물건이었다. 예전 기기 반납하시겠냐고 물어봤을 때 수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여기에 처박혀 있었다. 

수연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 이후론 속전속결이다. 서랍을 무작정 열어 옛날 충전기를 찾아냈다. 충전이 될 때 까지 담배를 피우며 기다렸다. 플라스틱 컵에 꽁초를 던져 넣을 때 마다 퍼센트를 확인했다. 거의 반 갑을 비웠을 때 핸드폰을 켜고, 이전과 달라진 것 없던 패턴을 그었다. 갤러리와 대화방이 싹 빈 걸 보고 인상을 구겼다. 그것도 과거의 수연이 이미 해낸 일이다.

수연은 정말 많이 버렸는데도 뭔가가 자꾸 굴러 나왔다. 예쁘고 반듯하게 추억 상자에 넣어두다가 잊고 살았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아무데나 구깃구깃 처박아둬서 가끔 저절로 펴져 발치에 닿았다. 보내지 않을 임시메세지 함 처럼, 불쑥 수연을 옭아매던 악몽과 선잠처럼, 그리고 지금 녹음 파일함에 있던 제목 없음_001번 처럼.

수연이 조심스레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옷장에서 먼지라도 처먹은 건지, 고물이 다 그런 건지 음질이 쓰레기였다. 노래방의 때 묻은 쿠션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금은 거의 듣지 않게 된 노래였고, 가사 사이로 도연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수연도 마이크에 대고 뭐라 말했다. 꼬인 발음을 보니 엄청 취한 것 같았다. 그러다 간주가 흘러나가고 한참 말이 없었다. 그 뿐이다.

그 가치 없는 녹음 파일을 수연은 몇 번이나 반복 재생했다.

누가 자신의 뺨을 후려 갈겨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차라리 처맞는 게 나은 질문을 해줬으면 싶다. 그거 진짜 사랑 맞았어? 라고 하면 욕을 쏟아 뱉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씨발 그딴 말을 하냐고. 대가리가 처 돌지 않은 이상 그걸 누가 사랑이라 하냐고. 도연에게 똑같은 질문을 할 때 뭐라 대답할지 궁금해졌다가, 오늘 꽁초 무더기를 본 덕분에 알았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응, 이라고 대답 해버릴까 봐 무서웠다. 이게 수연이 도연을 무서워 하게 된 모든 이유이자 죽어도 알기 싫던 것이었다.

이렇게 김도연은 자신과 닮았지만 전혀 다른 면이 있었다. 

도연의 폰엔 비밀번호까지 쳐야 들어갈 수 있는 비밀 파일함이 있었다. 그 곳엔 단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효정이 본 적 있던 눈 큰 여자애가 교복을 입고 있었고,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웃는 채로 찍혔다. 그럼에도 도연은 굳게 믿을 것이다. 자신은 아무 것도 간직하지 않는다고. 또한 생애 최악의 병신새끼였던 지수연도 마땅히 그럴 것이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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