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원했던 대로 나현은 예지를 잡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해주었다. 예지는 이제 나현을 이유로 대서라도 살아갈 것이다. 그게 얼마나 갈지는 몰라도.


P의 몸에서 대부분의 힘이 빠져나간다. 이제 자신은 지현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자력으로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별볼일 없는 존재.


'원래부터 그래왔잖아.'


지현은 P의 기억을 전부 보고 난 후에 다시 현실로 쏟아지는 감각을 느꼈다. 자신은 P인가? 아니면 최지현? 이제 어느쪽이라고 해야하지?


지현은 P일 때와 최지현과의 경계가 흐릿해져 감을 느낀다. 기억이 섞인다. 자신은 지현이기도 했고, P이기도 했다.


***


".. 왜 그래? 말이라도 해봐."


지현은 예지가 걱정스럽게 어깨를 흔들자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의 감각이 아직도 남아있다. 방금 P인 것처럼 말한 것도 자신, 방금 깨어난 것처럼 눈을 뜬 것도 자신. 분명 P도, 지현도 본래는 다른 존재이지만, 이제는 둘 다를 이해한다. 다르지만 같다. 예지를 처음 봤을 때, 사랑에 빠진 것도 어쩌면 그렇게 정해져 있던 거다.


P는 예지를 위해, 예지를 과거로 보내고 싶어하지만, 지현은 예지를 위해, 예지를 붙잡아야 한다. 지현은 예지의 팔목을 세게 붙잡는다. 예지는 바로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쳐낸다. 지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이번만은 어쩔수 없어. 미움받더라도 할 말을 해야할 때야.


"가지마. 가지말라고.. 힘들었잖아. 죽고 싶었잖아. 그냥 모른 척하면 안 돼? 김우연이고 김다연이고, 나도 안타까워. 그런데 네가 희생할 필요는 전혀 없잖아."


"..."


지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을 보는 예지를 응시하며 계속해서 말을 한다. 무슨 말을 내뱉는 지도 자각하지 못한채 되는 대로 입을 움직인다.


"네가 몇 번을 반복하고 힘들어했는지 나도 알아. 옆에서 계속 지켜봤어. 손을 뻗고 싶었어. 나를 저주하고 싶었어. 네가 혼자서 울때마다 나를 죽여버리고 싶었어. 너 같이 마음 약한 애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리가 전혀 없는 데도 죽이라고 하곤 그 굴레에 너를 넣어버린 내가 저주스러웠어."


지현은 말하는 사이 사이에 P였을 때의 기억과, 지현이었을 때의 기억이 불쑥 불쑥 가면을 바꿔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말을 하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우리 그냥 살자. 남은 신경쓰지 말고, 우리만 살아있으면 되는 거야. 내가 널 살리기 위해 얼마나, 얼마나 괴로웠는데. 나 인간이 아니었어도 그 정도 감정은 느낄 수 있었어. 나를 봐서라도 그냥 남아줘. 아직 너랑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아. 우리 성인이 되면 같이 놀러가기로 했었잖아."


예지가 지현에게 손을 뻗어와서 지현은 흠칫하며 물러난다. 그의 손이 얼굴 언저리를 닦는다. 지현은 그제야 자신이 울면서 말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예지는 복잡한 얼굴이다.


"나도 그냥 이기적이더라도 모른척할까 했는데. 난 원래 좀 이기적인 편이잖아? 그치. 네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


"자꾸 이나현의 모습이 떠올라. 이나현이 저렇게 괴로워할때 난 뭘 해줄수 있지? 봐봐, 뭘 해주긴 커녕 상처만 주잖아. 이때까지 이나현은 상처도 안 받는 줄 알았는데. 아, 아니다. 내가 눈을 막고 귀를 막고 있었어.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행해서 이나현은 그런 나를 봐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지금도 마음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어. 그냥 빨리 잊고 평소처럼 돌아와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나현이 얼마나 날 싫어하던 같이 붙어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예지야.."


예지도 괴로운지 눈을 감고 서툴게 말을 한다. 전혀 정리되지 않은 말을 두서 없이 내뱉는 모습을 지현은 가만히 보기만 한다. 예지가 이렇게 속마음을 말하는 건 처음이라고 느껴서 지현은 잠자코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경청한다.


"이 세상에 그 애와 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는데.. 그런데 자꾸 김우연이 마음에 걸려. 쓸쓸하게, 어쩌면 그게 나였을 수도 있는 모습으로 혼자서 죽어갔을 걔가 걸려."


지현은 더이상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예지에게 있어서 우연은 어떤 존재였을까. 그저 다연의 언니일뿐이 아니었던 걸까. 예지는 한참을 망설이다 말을 한다.


"김다연한테 가봐야겠어."


***


예지와 지현은 담임 선생에게 물어서 얻어낸 장소로 향했다. 그곳은 가까운 대형 병원이었다.


예지는 다연의 병실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는다. 지현은 그 마음을 알았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 가시 돋친 말을 내뱉던 상대에게, 심적으로 매우 약해져 있을 지금, 도대체 어떤 말을 꺼내야할지 망설이는 것이다.


보다 못한 지현이 병실문을 열었다.


그곳에 펼쳐진 풍경은 아주 고요했다. 그림 속의 한 풍경처럼 다연은 가만히 노이즈가 나오는 tv 앞에서 허공을 보며 누워 있다. 살이 많이 빠진 것 외에는 평소 같아 보이기도 했다. 다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한다.


"무슨 볼 일 있어?"


그의 목소리가 마치 가늘어져 부러질 것 같은 가지 같아서 지현은 내심 놀랬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숨기고 안부인사를 건냈다.


"네 상태가 어떤가 싶어서.. 그리고 할 말도 있고."


습관적으로 하는 잘 지냈냐는 말은 꺼내려다가 말았다. 괜히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 될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다연은 심기가 상했는지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돌렸다.


"가줄래."


"할 말은 하고 갈게. 김우연이 죽은 건 안타깝게 생각해. 그런,"


예지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다연은 예지의 말을 자르고 소리를 지른다. 골수까지 울리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병실을 가득 채운다. 예지는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한다.


"언니는 안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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