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잔혹한 묘사가 있습니다.








사는 게 꽃
Written by. Maria







그대를 사랑한다.
그대가 어떤 모습이어도 나는 알아 볼 수 있다.
아는가? 그대여. 나는 그대를 정말로 사랑한다.




* * *




향불 냄새가 난다. 꿇어앉은 다리가 저렸다. 발끝은 이미 감각이 없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참을성이 많은 아이였지만, 이미 한 시간째였다. 6살의 인내는 여기가 한계였다. 하얀 전통 복을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막대기를 탁탁, 두드렸다. 그가 물었다. 케이지, 여기엔 모두 몇 명이 있느냐? 아카아시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와, 그 둘 뿐이다. 잠시 고민하다 조심스레 대답했다.

-두 사람, 뿐입니다.
-정말 그리 생각하느냐?
-…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아카아시를 빤히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구나. 네가 이번 대의 ‘그 분’의 정인이구나. 정인…? 어려운 말이었다. 무슨 의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아카아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게선 희미하게 낙엽 냄새와 함께 정체 모를 향 태우는 냄새가 났다.

-이 방엔 모두 네 명이 있다.
-…네?
-너와 나, 그리고 네 뒤에 한명, 그리고 네 옆에 한명. 이렇게 총 네 명이 있지.

아카아시는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곧 입을 꾹 다물고 의연한 얼굴을 했다. 제 큰아버지에게 실례를 범할까 걱정되어서였다. 그는 이내 방을 나가 보라 하였다. 아카아시는 인사를 꾸벅 하고 밖으로 나갔다. 건너편 작은 방에는 제 부모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카아시의 손을 잡았다. 정원에 나가서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으라 말 하자, 몇 번 다리를 툭툭 두드리던 아카아시가 방긋 웃으며 힘차게 뛰어나갔다. 장지문이 열렸다. 커다란 손만 삐죽 나와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들은 한참 아카아시를 바라보다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혔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낭랑한 목소리가 조용한 정원에 울려 퍼졌다. 아카아시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하나, 둘, 셋. 어디에 숨어야 들키지 않을까? 승부욕이 발동했다. 정원은 넓었지만 탁 트여 있어 어디에 숨던 금방 보일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후다닥 뛰어 대문을 넘었다. 숫자를 세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달려 좁게 꺾인 길목 틈으로 몸을 쏙 숨겼다. 심장이 콩, 콩 뛴다. 여기라면 누구도 못 찾을 거야.
아카아시는 쪼그리고 앉아 킥킥 장난스럽게 웃었다. 술래가 저를 못 찾아서, 꾀꼬리를 외칠 생각을 하니 벌써 짜릿함이 밀려들었다. 언제 나를 찾아 주려나….

-케이지!

그러다 깜빡 졸았다. 아카아시가 고개를 퍼뜩 들었다. 주변이 어둑어둑했다. 술래잡기…하던 중이었는데. 아무도 저를 찾으러 오지 않은 거였다. 누가 이름을 불렀는데. 아카아시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하도 앉아있어서 다리가 저리고 몸이 차갑다. 집에 가야지…. 배고파…. 아카아시가 눈을 비비며 발을 한 걸음 뗀 순간이었다. 등 뒤가 싸했다. 찬바람이 부는 곳에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 아카아시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카아시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 쪽에 ‘무언가’가 있다. 영감이 전혀 없는 자신조차 오싹하게 만들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아카아시는 달렸다. 큰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런데 아무리 달려도 대문이 보이질 않는다.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는데. 아카아시는 눈물을 훌쩍거렸다. 무서웠다. 눈을 질끈 감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앗! 다리가 꼬여 결국 넘어지고 말았다. 까져서 피가 흐르는 무릎보다도 제 등 뒤에 느껴지는 차갑고 서늘하고 불온한 시선이 주는 공포가 더 컸다. 아카아시는 몸을 웅크렸다. 한기가 점점 더 강해진다. 그것이 저를 덮친다. 삼켜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지도 모른다.

-거 어디서 시궁창 냄새가 난다 했더니만….

휘영청 커다랗게 떠오른 달 아래, 그보다 더 환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 두 개가 떠있다. 세로로 길쭉한 동공이 더욱 가느다래진다. 커다란 날개. …부엉이?

-이 아이는 말이지.

어둠 속에서 천천히 사람이 걸어 나온다. 모습은 사람인데, 그림자는 새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카아시는 두려움에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었다. 그가 다가올수록 한기는 점점 옅어졌다. 금색 눈의 남자는 웅크리고 있는 제 근처에 가만히 앉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정신을 잃기 전, 언뜻 그런 말을 들었다.

-너 같은 놈이 악귀가 되기 훨씬 전부터 내가 지켜오던 사람이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큰아버지가 곁에 있었다. 저…. 아카아시가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큰아버지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나쁜 꿈을 꾼 모양이구나. 괜찮다. 아카아시라면 한번쯤은 그런 꿈을 꾸고는 하지. 꿈…. 아카아시는 그렇군요, 조용히 대답했다. 꿈이었나. 그 생생한 감각들이. 향 타는 냄새와, 시시오도시 소리. 멀리서 우는 부엉이 소리. 다시금 졸렸다. 아카아시는 잠들기 전, 제 큰아버지에게 자신이 꿈에서 본 장면을 말 해주려고 했다.

-금색 눈을 가진 사람을 봤어요.
-…그러니?
-네…. 사람이었는데, 그림자가 커다란 새였어요.
-그렇구나.

괜찮다. 케이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것이, 아카아시 케이지가 겪은 처음이자 마지막 ‘기괴한’일이었다.
‘아카아시’. 그들은 대대로 신을 모셨다. 큰 신을 모셨고, 그 신이 ‘아카아시’를 어여삐 여긴 탓에 능력을 주었다. 어느 집에나 아카아시의 성씨를 달고 있는 사람이라면 작은 방에 신을 모신 위패와 향불을 피워놓았다. 매일 아침 신에게 인사를 올리고, 매일 저녁 기도를 드린다.
신의 가호를 받아서일까. 아카아시 가의 사람은 모두 영 능력이 뛰어났다. 또한 대에서 가장 영 능력이 뛰어난 자는 가주가 된다. 아카아시의 주인이 된 자는 대대로 전대에 이어 퇴마사가 된다. 영감(靈感)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비슷한 나이대의 또래 사촌들은 언제나 귀신을 보거나 가위에 눌리거나, 혹은 크고 작은 사건에 휘말리곤 했다. ‘아카아시’라는 이름을 단 모두는 한번 쯤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 단 한사람. 아카아시 케이지를 제외하고.
아카아시는 영감이 전혀 없었다. 정말. 전혀. 귀신을 본 적도 없고, 가위에 눌린다거나 하물며 악몽을 꾼 적도 없다. 세상에선 이걸 정상으로 여기겠지만, 가문의 모든 사람이 능력이 있는데 자신만 없으면 그것 역시 나름대로 이상한 일이다. 아주 어린 시절 큰아버지가 저에게 ‘그분의 정인’이라는 뜻 모를 말을 했지만 그 이후론 큰아버지와 독대할 일도 없었을 뿐더러 부모님 역시 아카아시에게 ‘정인’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어렸을 적엔 왜 혼자 다를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17살이 정도 나이를 먹자 역시 평범한 삶이 제일 좋은 거였다. 귀신같은 거 절대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
그 이후로도 어쩐지 종종, 꿈에서 그 금색 눈의 남자를 만난 듯 했지만, 기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아, 시험공부 정말 싫어!”
“보쿠토 씨, 조용히 하세요.”
“췌에….”

아카아시는 형광펜으로 밑줄 친 부분을 꼼꼼히 정리하며 제 앞에 앉은 보쿠토에게 톡 쏘아붙였다. 후쿠로다니 사립 학원은 명문 학교다. 스포츠는 물론이고 학업에서도 명문 중의 명문이라 손꼽히는 만큼, 시험 기간에는 모든 부활동이 잠시 중지된다. 고작 일주일뿐이지만 보쿠토에겐 조금도 견디기 힘든 인고의 시간인 모양이다. 죽어도 독서실이나 도서관엔 못 가겠다고 해서 이렇게 텅 빈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그 마저도 좀이 쑤시나 보다.

“배구 하고 싶다….”
“이제 3일 남았습니다. 시험 끝나면 지겨울 만큼 할 수 있잖아요.”
“으, 아카아시 너 배구가 지겨운 적 있었어?!”

하여간. 말이 안 통한다. 입을 쭈욱 내밀고 그 위에 펜을 올리곤, 양 팔로 뒤통수를 감싸 깍지를 끼고 의자를 까딱 까딱 움직인다. 온 몸에서 지겨움이 뿜뿜 뿜어져 나온다.

“책이 한 장도 안 넘어갔잖습니까.”
“역사 재미없어.”

보쿠토 씨가 재밌는 과목이 있으셨습니까? 아카아시가 놀리듯 말하자 보쿠토는 더욱 입술을 부루퉁 내밀었다. 아카아시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펜을 고쳐 쥐었다. 거 참, 저런 모습도 귀여워 보이니. 콩깍지가 껴도 단단히 꼈다. 보쿠토는 턱을 괸다. 한 손으론 펜을 휙, 휙 돌렸다. 바람이 살랑살랑 분다. 가을로 막 들어선 하늘은 파랗고 맑다. 이젠 책 귀퉁이에 낙서를 시작하는 보쿠토를 보며 아카아시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첫 시험이 역사라면서요.

“책 같은 거 안 봐도 돼.”
“그건 또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십니까?”
“진짜야. 책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리 말 하는 보쿠토의 얼굴엔 거짓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쿠토 코타로. 그는 참 신기한 사람이었다. 처음 만났던 날 때부터 그랬다. 분명, 첫 만남이었을 텐데. 이상하게 기시감이 들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처럼. 참 묘했다. 그의 얼굴도, 그의 이름도 지금 이 순간 처음 들어 봤는데. 아카아시는 그에게 그리움을 느꼈다.
그게 원인이었을까. 아니면 보쿠토가 늘 말하곤 했던 것처럼 저와 그가 ‘운명의 상대’였을까. 배구부 선후배로 시작한 관계는 딱 1년이 지났을 즈음 연인으로 발전했다. 마치 그래야 했던 듯, 전혀 어색하지도 낯설지도 않았다. 태어나 그 어떤 사람도 진심으로 사랑 해 본 적 없었다. 사람에게 너무 관심이 없어서 이러다 평생 사랑이 뭔지 모르고 죽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느꼈는데. 그런 생각을 했던 옛날이 우스울 정도로 아카아시는 보쿠토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손도 많이 가고, 귀찮고. 어린애처럼 떼도 쓰고 감정 기복도 심하고. 처음엔 좀 귀찮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허나 아카아시는 안다. 그가 얼마나 어른스러운지, 어찌나 단단하고 강한지. 그리고, 누구나 화려하다 생각하는 그 금빛 아래 쓸쓸함과 외로움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걸.

“역사 드라마라도 보셨습니까?”

아카아시가 웃으며 말하자, 보쿠토가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웃었다. 알려줄까? 나, 엄청 옛날이야기도 잘 아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고 있자, 쪽. 가볍게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진다. 장난스럽게 헤헤 웃던 보쿠토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집중이 전혀 안 된다며 잠깐 산책이라도 다녀오겠단다. 아카아시가 저도 같이 가자며 뒤 따르려 했지만, 보쿠토가 양 어깨를 붙잡고 자리에 앉혔다. 같이 나가면 내내 공부 못 하게 붙잡을 거 같다나. 그 말에 담긴 묘한 끈적끈적함을 눈치 못 챌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던지라 아카아시는 볼을 붉히며 다시 펜을 쥐었다.

“….”

기분 탓인가? 어깨가 묘하게 무겁다. 정확히는 등 위가 무거워. 누군가 누르는 느낌이다. 계속 같은 자세로 공부를 해서인가? 아카아시는 목이며 어깨를 손으로 주무르며 목을 크게 돌렸다. 뻐근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보쿠토가 있을 때도 좀 무겁긴 했지만 괜찮았는데. 아카아시는 눈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그가 나간 지 얼마나 됐다고 제 집중력도 흐트러진다. 역시, 같이 나갔어야 했나. 같이 산책 하자며 메시지를 보내려 했지만 역사책 아래 삐죽 튀어나온 보쿠토의 휴대폰에 가볍게 혀를 찼다. 또 하품이 나온다. 피곤한가? 그럴 만도 하다. 어제도 늦게까지 수학공부에 매달렸다. 최근 수학 성적이 좀 떨어졌기 때문에 전보다 더 신경 쓰는 탓이었다. 보쿠토가 오면 깨워주겠지. 조금만 엎드려 자야겠다.



* * *



종종, 과거의 그 날을 떠올린다. 잊으려야 잊히지 않는 장면들. 묻어놓고 봉해두려 해도 어느덧 튀어나와 저를 괴롭히는 날카로운 조각들. 당신을 사랑한다 말 하는 얼굴은 꽃처럼 어여뻤다. 신으로 태어나 한 가문과 연을 맺고 그들에게 지혜와 힘을 나눠줬다. 그러나 그게 화가 될 줄은 생각지도 못 했다. 흉년이 든 게 네 탓이 아니거늘. 전염병이 도는 게 네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거늘. 우매한 인간은 모든 걸 짊어지고 책임이라는 굴레를 덮어씌울 희생을 필요로 했다.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사당 앞에서 죽창에 심장이 꿰뚫려 죽은 네 시체가 널브러져 있을 때. 이것이 인간을 사랑한 신에게 내리는 벌인가 어찌나 괴로워했는지 모른다.
하늘로 돌아가지 못해도 좋다. 평생 속세를 떠돌아도 좋다. 언젠가 힘이 다 해 이 세상에서 한낱 미물처럼 쓰러져 죽어도 좋다. 그래도 괜찮다. 너를 다시 만나 사랑할 수 있다면. 네가, 다시 웃을 수 있다면. 너의 사랑을, 다시 가질 수 있다면.

그 무엇도 상관없다.

“하아….”

역사책은 이래서 싫다. 몇 번이고 들여다 본 장면이지만 역시나 역겹다. 보쿠토는 인상을 확 찡그렸다. 교과서에 콩알만큼 실린 작은 지문이지만 그걸 읽을 때 마다 구역질이 난다. 기억의 한 단면들이 한꺼번에 되풀이 되는 순간은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잘못 했다간 아카아시 앞에서 ‘정체’가 드러날 뻔 했다. 찬 물로 연신 세수를 하고 거울을 바라본다. 금안의 동공이 세로로 가느다랗게 찢어졌다. 어딜 봐도 인간이 아닌 존재의 눈이었다. 몇 번 눈을 깜박인다. 맹수의 눈이다.
화장실을 나와 심호흡을 크게 한다. 긴 복도로 난 창문 틈 사이로 노을로 변한 햇살이 기우뚱 넘어간다. 발아래 작은 혼령이 치인다. 이 녀석은…. 학교 터를 지키는 놈이다. 터를 수호하는 녀석 중 하나인데 도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거지. 보쿠토의 발걸음이 급해진다. 아까까지 아카아시와 함께 공부를 하던 2학년 6반 교실 앞까지 한달음에 달려간다.

“….”

살그머니 열린 틈 사이로 요기가 흘러나온다. 검붉은 연기가 자욱하다. 보쿠토가 크게 발을 구르자 펑! 소리와 함께 흩어진다. 보쿠토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것’이 매서운 눈으로 보쿠토를 쏘아보았다. 콧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콧구멍 두 개가 뻥 뚫려있는 허연 얼굴엔 주먹이 들어갈 정도로 큰 눈구멍이 보인다. 입은 귀까지 찢어져있다. 보쿠토가 혀를 쯧쯧 차며 다가온다. ‘그것’은 보쿠토를 위협하려는 듯 뻥 뚫린 구멍 같은 눈에서 핏물을 콸콸 쏟아냈다.

“하하…. 재롱이라니, 귀엽기도 하지.”

그것은 책상 위에 엎드려 있는 아카아시의 양 어깨와 등을 커다랗고 허연 발로 꾹꾹 짓누르고 있었다. 보쿠토는 아카아시 가문에게 퇴마의 힘을 주었다. 가장 그 힘을 강력하게 타고 나는 자에게 가주의 역할을 주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였던가. 가문에 속한 모두는 영적 능력을 타고 났지만 단 한사람만은 아무런 능력이 없다. 그게 바로. 보쿠토가 사랑하던 ‘그’의 환생. 그를 잃고 어찌나 후회했던가. 그가 능력이 없었다면. 이런 일에 휘말리지도 않았을 텐데. 그 후회가 환생의 표시를 만들었다.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도 보쿠토 만은 알아 볼 수 있는 표시.

“잡귀 주제에….”

보쿠토의 금색 눈이 번쩍 빛난다. 온 몸에서 금빛 안개가 피어올랐다. 귀신이 찢어질 듯 커다란 비명을 지른다. 기괴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악을 쓴다. 네 놈, 신이냐?! 신이 한낱 인간에게…!? 저벅 저벅, 다가온 보쿠토가 귀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네놈 따위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귀신이 발버둥 치며 피를 왈칵 토했다. 보쿠토가 빙그레 웃으며 천천히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엄지가 귀신의 뭉툭한 목뼈를 파고든다. 안타깝기도 하지. 네가 이 아이에게 해코지를 하려 하지만 않았더라도 네 영혼에 자비는 주었을 텐데. 귀신이 꺼이꺼이 울기 시작한다. 신이시여. 자비를.

“사라져라.”

우두둑. 보쿠토가 귀신의 목을 꺾어버렸다. 젖은 천처럼 축 처진 귀신을 바닥에 집어 던진다. 바닥에 자욱하던 요기가 흩어진다. 콰앙. 보쿠토가 다시 한 번 귀신을 향해 발을 굴렀다. 굉음이 들리더니 귀신이 산산조각 나 사라졌다. 멀리서 까마귀가 울었다. 스산한 노을이 교실 안을 붉게 물들였다.

“…보쿠토 씨?”
“일어났어? 무슨 잠을 그렇게 곤하게 자.”

아카아시가 어깨를 주물렀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몸이 뻐근해지더니 너무 졸려서…. 보쿠토가 다정하게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뜨거운 손바닥이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 쥔다. 가볍고 상냥한 손길로 앞머리를 쓸어 넘긴다. 이마에 금빛으로 새겨진 자국. ‘木’.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제 눈에만 보이는 표시. 엄지로 그 자국을 조심스레 문지르다, 곱게 빛나는 청록빛 눈을 지나 그 아래 여린 살을 조심스레 쓸어 올렸다.

“아카아시.”
“네?”

보쿠토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네 전생도, 그리고 그 전생도 널 사랑했어.”
“…하하. 사랑 했을 거야가 아니라 사랑 했어, 입니까?”

고개를 끄덕인다. 보쿠토가 이마를 마주 대었다. 아카아시는 물러나지 않았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진다.

“그리고, 네 환생도. 그리고 그 환생의 환생도 나는 다 알아 볼 수 있어.”
“그렇습니까?”

오늘 굉장히 간지러우신데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아카아시가 장난기 가득하게 웃었지만, 보쿠토는 마주 웃지 않았다. 평소라면 이런 나의 로맨틱함을 보라 운운하며 더욱 난리를 피웠을 텐데. 차분히 가라앉아있다. 쪽.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다.

“동물로 태어나도 알아보실 수 있으신가요?”
“그럼.”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겪어 봤어. 동물로 태어난 아카아시도 귀엽더라고. 여우였지. 네가 태어나 죽을 때 까지 내가 데리고 다녔어. 그 다음은 고양이였던가. 사람이던 사람이 아니던 상관없다. 네가 돌이던, 꽃이던. 나무든. 나는 다 알아 볼 거니까. 아카아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눈빛이 진지하다. 사랑을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느낌이 어딘가 조금 다르다.

“보쿠토 씨. 오늘 어쩐지 평소랑 좀 다르신데요.”
“…그래?”
“네.”

어른스럽다고 해야 할지…. 뭐, 저보다 연상이시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정말 까마득히 연상처럼 느껴져서요. 거 참. 그런 말을 이리 진지하게 하시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카아시가 웃으며 보쿠토의 목을 껴안아 다시 입을 맞췄다. 평소라면 수줍어 내뺐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환생이든 전생이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지금이 중요 한 거죠.

“…그러네.”

지금이 중요 하지.

“공부는 이미 틀린 거 같은데. 해 더 지기 전에 체육관 잠깐 갈까요?”
“체육관?”
“네. 몸도 뻐근한데. 배구 하다가 가요.”

와! 보쿠토가 뛸 듯 기뻐하며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역시. 평소의 보쿠토다. 둘 다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을 맸다. 교실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간다. 모두 하교 하고 난 건물엔 둘 뿐이었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갈아 신고, 체육관으로 향한다. 깜빡 깜빡, 먼 곳에서부터 가로등이 켜진다. 앞서 걷던 보쿠토가 뒤를 돌아 아카아시를 바라보며 웃었다.

“손잡고 가자.”
“….”

다정하고 따뜻한 금빛. 그보다 더욱 뜨거운 보쿠토의 손. 아카아시는 천천히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는 알까. 수십, 수백의 환생을 거쳤다. 하지만 매번 그는 저를 사랑했다. 그리 되도록 운명을 뒤틀기도 했지만 아무리 신이라 하더라도 사랑의 감정을 떡 주무르듯 하진 못 한다. 분명, 너도 나와 같을 테지.

“아카아시.”
“네.”
“나, 정말 네가 좋아.”
“그렇습니까?”

아카아시는? 아카아시는 어때? 쉽사리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애를 태우려는 듯 한 모습도 귀엽다. 그를 조르고 채근하면서도 웃음이 멈추질 않아 결국 다시 배시시 웃어버렸다.

“보쿠토 씨.”
“응?”
“다음 생에도 만나요.”

그가 웃었다. 보쿠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한 말이었을 테지만 이보다 더 기쁠 수가 없다. 아카아시, 그거 알아? 네가 있어서 이번 생도 나는 꽃이다.

필시, 다음 생도 꽃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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