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아니면 못 들어간대요...끕끕...딱 한번만 우지니형 보게 해줘요. 내가 용서한다고 사랑하다고 그 말만 할 수 있게. 얼마큼 다쳤는지만...볼 수 있게...엉엉...”

 

보는 사람이 다 애처로울 만큼 울어대는 통에 동현은 안절부절 못하며 대휘를 진정시키기에 바빴다. 그러나 낯선 곳에서 믿을 수 있는 건 그나마 아는 사람이라 동현의 팔에 매달려 엉엉 우는 제 팔을 붙들어 동현과 떼어놓는 손에 대휘는 놀라서 뿌리치며 동현의 팔에 더 매달렸다.

 

“딱 한 번만요...딱 한번만!! 제발...이렇게 부탁할게요...제발!!”

“휘야.”

 

대휘는 저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얼떨떨해져 눈만 동그래졌다. 혀엉...우지니형...형이 왜 거기서 나와...?

 

“혀엉...엉엉...크게 다쳤다고...엉엉...뉴스에서...”

 

대휘가 꺼억꺼억 울어댔다. 늘 그렇듯 저는 슬퍼서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우는 걸 텐데 어째 물기 젖어 우는 대휘는 뽀둥한 게 못 견디게 귀여워서 우진은 당장이라도 입안에 넣고 와랄랄라 해버리고 싶은 걸 장소도 장소인데다 상황도 상황인지라 애국가를 불러가며 우는 대휘를 끌어안아 다독이는 걸로 참아야 했다.

 

“근데...왜 형이...엉엉...여기 있어? 혹시 귀신인거야?”

“아니.”

“심장이 사라지는 줄 알았어.”

“사과하면 한 번 더 용서해 줄 거야?”

 

대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 용서해 줘.”

“그럼. 가지 마. 아프지 마. 다치지도 말아.”

“같이 가. 내 곁에 있어. 사랑해.”

 

우진의 말에 대휘가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뽀둥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같이 가면 그냥 사귀는 거 아냐. 영원히 내 반려가 되는 거야.”

“어?”

 

대휘는 다시 벙쪘다. 이런 식으로 프로포즈하는 거야? 우진과 평생 같이 있는 걸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우진의 입으로 직접 들을 줄은 몰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며칠 동안 헤어져 있는 동안 헤어지는 건 죽는 것 만큼 괴로웠고 너무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 어쩌면 그게 사랑 아닐까.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언제나 떨어져 있고 싶지 않은 것. 롱디라도 서로의 마음이 닿아있고 싶고 달려가면 만날 수 있고 마음대로 안고 싶고 입 맞추고 만져보고 싶은 것. 우진이라면...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우진이니까 같이 있고 싶다. 그까짓 꽃다발따위 없으면 어때. 반지따위 없으면 어때. 겨우 멈췄던 눈물을 다시 그렁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대휘를 우진이 다시 끌어 안아 품에 가두었다.

 

 

말리려 했는데, 제발 여기 통합병원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말렸어야 했는데, 우는 대휘를 끌어안으며 절절한 멜로를 보여주는 우진은 10년 지기 친구인 제가 몰랐던 모습이라 부끄러움은 보는 저의 몫이었고 말리지 못한 저의 죄가 크다고 동현은 생각했다. 표정 하나 풀지 않고 부동자세로 선 헌병들은 이제 아예 대놓고 곁눈으로 대휘를 끌어안고 세상의 끝에서 사랑을 외치는 듯한 우진을 흘끔대고 있었다. 안 봐도 헌병들의 머릿속에는 장교만 아니면 당장 검문해서 끌고 갈 기세라는 게 보여 동현은 한숨만 나왔다. 우진이 이렇게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이었던가 싶은. 오래 만나왔던 채령과도 여사친 이상은 아니었던 우진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사고 취재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과 어디서 득달같이 나타났는지 병원 담장으로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들 같은 파파라치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찰칵찰칵...

 

“공작전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동현의 말에 정신이 돌아온 우진은 기자들을 피해 대휘의 손을 붙들고 동현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대로 주차장으로 달렸다. 우진은 눈에 익은 경차 쪽으로 내달리는 대휘의 팔을 잡아 끌어 제 벤츠에 태웠다. 혀엉. 이 차...

 

“그건 김비서 차야.”

 

동현의 경차보다 배나 큰 벤츠에 타고 겨우 눈물을 닦아내고 보니 공군 장교 정복을 입은 우진은 평상 시 체크셔츠나 청바지, 흰셔츠에 슬랙스만 입고도 시크했지만, 역시 남자는 제복이라고 제복을 입은 우진은 태생이 귀족이라는 게 느껴질 정도로 귀티나고 멋있었다. 시동을 걸다 말고 제 옆에 앉아 눈물만 닦아내 눈가며 코가 빨개진 채 뽀둥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대휘를 보던 우진이 몸을 조수석으로 기울여 대휘의 두 볼을 그러쥔 채 그대로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맞춤. 지난 며칠 동안 못 했다고 참을 수가 없었다. 대휘의 두 볼이 얼마나 동그랗고 말랑말랑한데, 대휘 입술이 얼마나 말랑하고 보드랍고 따뜻한데...우진의 입맞춤이 끝나고 아쉬움에 한번 더 쪼옥 버드키스를 하자 대휘가 발그레해진 얼굴로 웅얼댔다.

 

“아닝...뽀뽀해달라고 쳐다본 거 아닌뎅...”

“난 뽀뽀하고 싶어서 쳐다본 건데?”

“혀엉 다쳤다고 해서...웅웅...대휘 막 놀랬쪄.”

 

바로 아침까지만 해도 다시는 안 볼 것 같이 차갑고 멀게만 느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 절로 제 혀가 반토막이 될 정도로 좋아 어쩔 줄 몰랐다. 제가 아는 저가 이렇게 본능에 충실하고 감정에 좌우되는 사람인 줄 몰랐다. 사랑을 하니 몰랐던 자신의 모습에 대휘 자신도 낯설었다. 그런데 어떡하나. 보고 있기만 해도 옆에만 있어도 좋아 죽겠는걸.

 

“은근 내 이름이 흔한 이름이라. 아버지가 귀한 자식일수록 무던한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구.”

“왜 형 이름이 무던해? 징짜 멋진데. 난 박우진이란 이름 처음 들어본다. 뭐.”

 

뾰룽하게 표정을 짓는 대휘에 우진의 눈이 다시 휘어져 대휘의 두 볼을 잡고 다시 입을 맞췄다. 아 좋다. 형아랑 하는 건 왜 다 좋아?

 

“우리 휘야는 말도 이쁘게 해.”

“근데...혀엉...밖에...”

 

여전히 입술은 우진에게 맡긴 채 대휘가 차창 밖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기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이번엔 진짜 엄마한테 한소리 듣겠다. 우진은 아쉽지만 고개를 저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성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저택이었다. 학교도 아닌데 집안으로 차가 들어가...조수석 창문에 매달린 대휘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대휘가 귀여운 우진은 대리석으로 마감한 본채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집사 앞으로 차를 멈추었다. 역시 정장 차림의 인자한 백발의 최집사가 조수석으로 다가와 대휘가 내릴 수 있게 차문을 잡아주자 대휘는 저도 모르게 90도로 배꼽 인사를 했다.

 

사진보다 훨씬 귀여우시네요. 예쁘시구요.

 

낮게 말하는 최집사의 말에 살짝 얼었던 긴장감이 풀리면서 대휘가 눈꼬리를 휘게 사르르 웃으며 말했다.

 

아저씨도 멋지세요.

 

우진은 의대 본관만큼이나 고풍스런 집안 외관에 신기해하는 대휘의 손을 붙잡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우진이 도착하기 전 이미 포털사이트에는 새로운 기사가 도배되어 있었다.

 

<우진 공작 결혼 임박!>

<우진 공작의 어린 연인>

<우진 공작 열애 인정?>

<공작과 신데렐라 – 세기의 커플 탄생>

 

공군 정찰기 추락 사건 취재를 위해 통합병원 입구에 포진하고 있던 각 언론사의 기자들은 본관 앞에서 보란 듯이 우는 대휘를 껴안고 있는 우진의 사랑을 속보로 내놨고 발 빠르게 대휘가 보육원 출신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도전 골든벨 우승과 EBS장학퀴즈에 나가 기장원을 해 장학금으로 대학을 진학한 것, 국립대 의대 본과 2년생이라는 것, 과탑을 놓치지 않아 4년 동안 장학금을 받는데도 학내 카페에서 알바를 한다는 것 등등 시시콜콜한 대휘의 신상을 내놓으며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왕족이자 젊은 귀족과 고아 의대생의 만남은 세상을 찢어놓았다.

 

“전하는 마마께서 먼저 보자 하십니다.”

 

대휘와 함께 으리으리한 궁궗같은 집안으로 들어서던 우진은 최집사가 붙잡자 다정스런 눈빛으로 대휘를 바라봤다. 잠깐이라도 혼자 두기가 싫어 그새 또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가는 우진을 대휘가 괜찮다는 듯 생긋 웃어주었다. 우진이 위층으로 올라가는 걸 확인한 후 최집사는 안쪽의 다른 방으로 안내해 대휘가 들어 갈 수 있게 묵직한 나무문을 열어주고 불을 켜주더니 대휘가 들어가자 문을 닫아주었다. 예상보다 넓은 방으로 들어선 대휘는 제 등 뒤에서 닫히는 문소리에 살짝 긴장을 해서 심호흡을 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저 혼자 남자 비로소 방 안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햇빛에 책이 바래는 걸 막기 위해 두꺼운 커튼을 치고 부분조명도 책에게 직접 닿지 않게 설치해 누군가의 서재였던 듯 마치 도서관 서가같이 차분한 컬러의 책장마다 전문 서적들이 빽빽하게 꽂혀있었다. 우진의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도 긴장을 풀지 못했던 대휘는 앉지도 못하고 눈을 또르르 굴려 방 안의 인문고전부터, 영어로 된 원전, 군사관련 서적까지 잘 정리된 책장을 둘러보았다. 어맛...이 책도 있네. 와 초판본...대박. 딱딱한 인문고전이나 군사학 책만 있는 줄 알았더니 세익스피어에, 서머셋 모옴, 헤밍웨이 등 영미권 문학작품의 원서에 구하기 힘든 서적도 여럿 보였다.

 

독서의 폭이 상당히 넓네. 다방면으로 관심도 많고 수준도 높네. 형은 좋겠당. 책 많은 거 짱 부러운데.

 

원서로 된 인문고전인 <군주론>이며 <국부론>, 명작인 <달과 6펜스>등을 꺼내 몇 장 읽으며 혼잣말을 하곤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책장 구경을 하고 나니 고풍스런 책상 뒤편의 한쪽 벽면에는 황실정복을 한 우진과 천사 날개같은 드레스를 입은 기품있고 아름다운 젊은 여자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묘하게 이 방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사진 속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

 

공작이라더니 공군 장교복을 입을 때보다 좀 나이 들어 보이네. 그래두 역시 형은 제복 입고 있을 때가 멋져.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지? 진짜 예쁘다. 동화 속 공주님 같아...우와 대박! 피부 봐. 티 하나 없는 게 뽀얀 찹쌀떡 같아. 만지면 퐁퐁 소리가 날 것만 같아. 부럽다.

 

낮게 한숨을 내쉬며 막 뒤를 돌아섰을 때 언제 들어왔는지 제 앞에 선 하얀 실크블라우스와 살구빛 플레어스커트를 입은 혜경을 보고 대휘는 눈이 동그래졌다. 헉!!

대휘는 얼른 제 뒤에 걸려 있는 사진을 보았다. 지금 당장 사진을 찢고 나온 듯 기품있고 아름다운 혜경의 모습에 대휘는 얼른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부터 했다.

 

“아...안녕하세요?”

“왜 놀라죠?”

“아...사진 속에서 방금 나오신 것 같아서...죄송해요. 누님이 오신 줄 몰랐어요.”

“누님?”

 

혜경은 기가 막혀서 되물었다.

 

“네. 형이 가족 이야기는 안 해서 누님이 계신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예쁜 누님이 계시면 진작 말 좀 해주지. 하하.”

“우진이가 가족 이야기는 안했단 말야? 그래도 좋아했다고?”

“처음엔 오해해서 싸우기도 했는데...형에 대해서는 공군 장교라는 것 외엔 몰랐거든요.”

“포털사이트 뉴스도 안 봤단 말야?”

“형도 누님이랑 똑같이 물었어요. 포털사이트 뉴스도 안봤냐고. 정말 자기를 본 적 없냐고. 제가 학술지나 의학논문 볼 시간도 모자라서...죄송해요.”

“그래서 우진이를 처음 보니 어땠어?”

 

저를 빤히 바라보는 혜경의 눈치를 보다 대휘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죄송한데...형 어머니한테 말하진 마세요. 처음엔 오메가라고 무시하는 줄 알고 좀 싸웠거든요. 그런데 제가 오해한 거더라구요. 형은 잘 생기고 착한데다 편견도 없고 예의바르고 순하고 소탈하고 성격도 좋은데 절 많이 좋아해줘서 의지도 많이 했어요. 연애는 처음이라 망설이는 절 붙잡아 준 사람도 형이구요. 꿈에서 상상만 했던 착하고 멋진 남자가 딱 형이었어요.”

“그래서, 우리 우진이는 계속 만날 생각이야?”

 

어느새 빨개져 있는 대휘의 얼굴을 혜경은 물끄러미 바라봤다. 대휘는 옆머리를 두 손으로 꾹꾹 누르고 눈만 깜빡이다 말을 이었다.

 

“만나고 싶어요. 안되나요?”

“...우진이는 나이도 있고 가문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야. 권리보다...”

“의무가 많은 신분이죠.”

“........”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어요. 물론 그때는 그 말뜻을 잘 몰랐지만.”

“........”

“형이랑 만나고 짧은 시간 많은 일이 있었어요. 형이 자기의 반려가 되 달래요. 반려가 된다는 건 아직 자신없지만 어쨌든 지금은 형이랑 같이 있고 싶어요.”

 

말을 할수록 대휘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차 흔들림이 없었다. 혜경은 생각 많은 눈빛으로 대휘를 바라봤다. 할 말을 다하고 혜경을 바라보던 대휘가 가만히 물었다.

 

“그런데...형 어머니한테는 뭐라고 불러야 돼요? 저 귀족은 처음 만나는 거라...”

“마마라고 부르면 적당해. 선대 왕의 외동딸이라 공주마마라고 부르면 더 좋아하고.”

“헉!! 공주마마?”

“뭐지?”

“그럼 형이 말하던 공주마마가 어머니였어요?”

 

대휘가 믿기지않는다는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동그래진 눈으로 혜경을 바라봤다. 저런 꾸밈없이 솔직하고 귀여운 모습에 우진이 반할 걸까...혜경은 이 방으로 들어온 이후로 대휘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전 그런 줄도 모르고...”

 

혜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휘군은 너무 자의적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네요.”

 

혜경의 말에 대휘는 한숨을 내쉬며 수긍했다.

 

“네. 그래서 고치려구요...”

“아마 연애를 처음 해봐서 그런 것 같아요.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한테 다 물어보자니 괜히 나 혼자 좋아하는 것 같고, 내가 더 좋아하는 걸 상대가 알아챌까 봐 혼자 해석하다보면 그렇게 되죠.”

“어?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사랑을 해 봤으니까...”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아련한 눈빛으로 대휘의 어깨 너머 한 곳을 응시하는 혜경의 얼굴은 행복해보였다. 혜경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 대휘는 사진 속 우진이라고 생각했던 남자를 다시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우진과 거의 흡사하지만 어딘지 더 위엄이 있는 모습과 남매 사이라고 하기엔 더 가까운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으로 묶인 듯한 두 사람에 잠시 멍해졌다.

 

“이 사진은...”

 

설마 아니겠지...우진이 맞는데...그때였다.

 

“어머니. 여기 계셨어요?”

 

방문이 열리더니 우진이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문 앞에서 불렀다. 어머니라고...누나가 아니고...?

우진을 보더니 혜경이 리모컨을 작동시켰다. 귀한 사진이어서인지 천정에서부터 블라인드가 천천히 내려와 근엄하고 깊이 있는 얼굴부터 가려나갔다. 힝구. 더 보고 싶었는데. 대휘는 아쉬움에 살짝 한숨을 내쉬곤 웃어보였다.

 

“맞아. 우진이의 아버지와 약혼했을 때 사진이야.”

 

아. 이대휘...진짜 그 혼자 지레짐작하는 나쁜 버릇. 대휘는 당장이라도 제 머리를 벽에 쳐박고 싶었다. 차가 준비됐습니다. 최집사의 말에 몸을 돌려 나가는 혜경의 등에 대고 대휘가 얼른 사과했다.

 

“아 죄송해요...”

 

이 집에 들어와서 왜 이렇게 죄송할 일이 많은지...대휘는 마치 자신이 사과봇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전 너무 젊으셔서 당연히 누님인 줄 알고....”

 

대휘의 말에 어느새 방 앞에 서있던 우진이 잠시 벙쪘다가 현웃이 터졌다. 큭큭큭큭...누나라고? 우리 엄마보고...남은 쪽팔려 죽겠어서 그만 웃으라고 원망의 눈치를 보내는 대휘와 분위기 파악 못하는 아들이 한심스러운 혜경의 눈치를 봐가며 웃음을 참느라 눈물까지 찔끔거리는 우진은 사래가 들릴 지경이었다.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품위 없이.”

 

곱지않게 눈을 흘기는 와중에도 아름다운을 잃지 않는 혜경이 차가 준비되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최집사가 안내해 준 방에 들어선 대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진의 오피스텔보다 더 넓은 방 한 가운데에 있는 커다란 바로크풍의 침대는 위에서부터 고급 레이스 캐노피가 드리워져 있고 부드럽고 고집진 실크침구가 준비돼 있었다. 한쪽에 있는 비단을 쒸운 소파와 옷장이며 햇빛 잘 드는 큰 창가에 있는 티테이블도 모두 바로크풍 아름다운 가구들이었다. 포근하고 아름다운 꽃무늬 벽지를 손으로 만져보고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을 열어 발코니로 나가보고 이런 고급스런 가구를 본 적 없어 신기해하며 동그래진 눈을 반짝이던 대휘가 살풋 웃으며 제 손을 잡고 저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는 우진을 보며 말했다.

 

“형 방 예쁘다.”

“이 방이 대휘님이 지내실 곳입니다.”

 

최집사의 말의 영문을 몰라 대휘는 우진의 손을 더 꼭 쥐었다. 학교 기숙사는 물론, 보육원의 게스트룸과는 비교도 안 되는 방이었다. 지금껏 대휘에게 주어진 거라고는 2층 침대 아랫칸 정도의 공간이었으니까.

 

“전, 기숙사로 돌아가야 해요.”

“지금 저 문밖에 누가 있을 것 같아? 기숙사 앞에는?”

 

언제 왔는지 혜경이 방 가운데 놓인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대휘군이 나가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기자들의 플레시 세례를 받아야 할 걸.”

“제 오피스텔에서 지내면 돼요.”

 

우진이 마뜩찮다는 듯 말했다.

 

“얘 혼자? 넌 부대로 들어가고 맹수들 입안에 소동물 혼자 던져두겠다고?”

 

우진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여기 데려온 건 정식으로 어머니께 인사드리러 온 거예요.”

 

혜경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그러니까 여기 있으라는 거야. 우리 집안 사람이니까.”

 

혜경의 말에 우진도 대휘도 눈이 동그래졌다. 이렇게 빨리 허락을 받았다니...놀람이 기쁨으로 번지는 걸 본 혜경이 덧붙였다.

 

“니가 본가에 오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

“어머니.”

“그래도 여기가 제일 안전하다는 건 부인하지 않겠지?”

 

싸우는 건 아니었지만 두 모자만이 아는 무엇인가를 애써 다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와 그 무엇에서 애써 벗어나보려는 두 사람의 애틋한 마음이 팽팽한 긴장감으로 대휘에게도 느껴졌다. 이런 게 아마도 가족이라는 거겠지. 대휘로서는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혀엉. 여기 있을게. 나.”

“휘야.”

 

두 사람의 팽팽한 신경전을 끝맺음한 건 대휘였다.

 

“형 기다릴게. 공주님이랑 같이.”

 

기숙사로도 자기 오피스텔로도 보낼 수 없는 상황이라 이제 대휘가 안전해졌다는 생각에 우진의 눈빛은 다시 부드러워졌다.

 

“나의 공주님.”

“응?”

“응?”

 

우진의 말에 대휘와 혜경이 동시에 대답하곤 서로 벙찐 표정이 되었다. 금세기 유일한 공주는 혜경뿐이었지만 이제 아들 우진의 입에서 나오는 공주는 자신이 아니라는 걸 혜경이 모를 리 없었다. 이래서 아들 키워봤자 하나 소용없다니까.

 

“아무튼 내일부터 바쁠 거야. 귀족의 예법도 배워야하고. 나랑 갈 데도 있고.”

“귀족의 예법이요?”

“어쩌니? 가르칠 게 한 두 가지가 아니구나.”

 

혜경이 나가자 대휘가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우진의 손을 쥐고 말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 여기서 기다릴게.”

“옆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

“짧은 시간 공주마마와 이야기하면서 느낀 게 있어. 형이랑 만나려면 더 이상 아이처럼 나약한 모습 보여서는 안되겠다는 거. 권리보다 의무가 더 많은 삶을 살아야 하는 형한테 내가 형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되잖아. 나 형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

 

우진이 감동받은 얼굴로 대휘를 바라봤다. 휘야...

 

“언제 이렇게 어른스러워졌대?”

“말해줘? 누가 날 어른으로 만들었는지?”

 

대휘의 말에 우진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동그란 대휘의 두 볼을 부드럽게 그러쥐고 대휘의 코 끝에 제 코가 닿을락말락할 만큼 가까이 다가가 말했다.

 

“이젠 부끄러워하지도 않네.”

“사랑이 왜 부끄러워?”

“딱 기다려. 돌아와서 숨도 못 쉴 만큼 사랑해줄게.”

“기대할게.”

 

다시 부대로 복귀한 우진이 없는 우진의 집에서 도우미가 챙겨놓은 잠옷과 가운을 걸치고 혼자 눕기엔 너무 넓은, 푹신한 침대에 누운 대휘는 요 며칠 우진과 헤어진 후 제대로 잠들지 못했던 잠을 채우기라도 할 것처럼 모처럼 푹 잠이 들었다. 우진은 없었지만 온 방에서 우진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영특하고 예쁜 분이세요.”

 

최집사가 테이블 위의 물건들을 정리하다 대휘의 기사가 뜬 태블릿화면을 흘끔 보았다. 보육원 출신, 도전 골든벨 우승 당시 사진, EBS장학퀴즈 기장원 사진,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사진...모든 사진 속 대휘는 입술을 앙다물고 야무지게 목표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오래전 공주마마와 장관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전 좋았습니다.”

“아직 각인은 안 한 것 같지?”

“전하가 대휘군을 아주 많이 아끼시던데요. 대휘군도 신데렐라를 꿈 꿀만큼 자존감이 없는 분은 아니었구요. 좋은 것만 보세요.”

 

혜경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메가라면 그것도 우성 오메가라면 형질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선호하는 반려였다. 대를 잇기에도 알파와 오메가의 궁합은 남자와 여자의 궁합보다 더 대를 잇기에 최적이었다. 게다가 국립대학 의대를 다니는 우수한 우성 오메가라면 더 할 나위 없었다. 다만...너무 한미한 가문이 마음에 걸렸다. 귀족계급과 평민계급의 혼사에서 어떤 명분으로 포장을 해야 예의과 법도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가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전하가 저렇게 행복해 하는 모습은 장관님 서거하시고 처음인 것 같아요.”

“그래. 친정 위세 등에 업고 오만한 것보다 낫지. 모르는 거야 내식으로 가르치면 되고. 그래도 안되면...파혼한대도 귀족과 파혼한 거니 저도 아쉬울 건 없지”

 

혜경의 말에도 최집사는 조카바보 삼촌의 미소로 혜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너무 치졸한 걸까?”

“그럴리가요. 공주님은 늘 영특하시죠. 아름답고. 대휘군이 있으니 이제 전하도 본가로 돌아오시겠죠.”

 

혜경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진의 아버지였던 국방장관이 급서를 한 후 제 속내를 말하진 않았지만 우진은 이 집에 있는 걸 힘들어 하더니 공군사관학교 입교를 기회로 독립을 한 사실을. 혜경이 찾지 않으면 자의로는 오지 않는 본가인지라 혜경 혼자 이 넓은 집을 지키고 있었다. 이 생각에 이르자 혜경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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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황실 예법도 황실 용어도 잘 몰라요. 컨셉만 입헌군주제이고 대한제국의 정통을 이어받아 왕이 아니라 황제라고 설정했습니다.

 

대휘는 우진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우진이 귀족이라는 사실이었어요. 평범한 공군 장교라고 생각했을 때는 대휘도 평범한 사랑을 꿈꿀 수 있었지만 국왕의 조카이고 귀족이라는 걸 아는 순간 계급과 출신과 형질이 제 발목을 붙든 거죠. 어차피 저와는 안 될거라는 생각에 덜 상처받으려는 대휘의 방어기제가 튀어나왔지만 우진을 밀어낼수록 힘든 건 자신이었어요. 그러다 우진이 사고당했다는 소식에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우진을 사랑하는지 알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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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휘라서 가능했습니다.



그대의 놀라운 힘이 나의 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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