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로드 엔터테인먼트 회장실.

 

새까만 세미 정장을 차려입은 은영은 회장 앞에 섰다.

 

평소에 자세가 뻣뻣한 은영이었지만 회장 앞에서는 달랐다. 어릴 때부터 자신을 키워준 부모같은 숙부이자 일하고 있는 회사의 보스였다.

 

“그래서....... 헤디를 영입할 수 있을 것 같아?”

 

머리가 새하얀 회장은 전통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물었다.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앞으로는?”

“구체적인 가능성으로 정의내리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르겠지요. 다만 아직까지는 헤디 쪽이 현재 일인 기획사를 선호하고 있는 게 명백한 사실입니다.”

“어린 친구가 고집이 세구만.”

 

회장은 부채를 접고는 의자에 앉아 숨을 거칠게 내쉬며 말했다.

 

“내가 내년이면 정년이다. 은영아. 나는 정년 넘어서까지 일할 생각은 없어. 능력 있는 사람한테 자리 넘기고 편하게 여생을 살 생각이다. 만약 헤디를 데리고 올 수 있다면 말이야. 그것보다 더 좋은 능력 증명은 없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은영은 두 손을 앞으로 공손하게 모으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회장은 다시 부채를 펼치고는 물었다.

 

“에바가 재계약 조건으로 데려온 애 말이야. 그 애가 헤디 애인이라고 했었지?”

“맞습니다. 헤디는 커밍아웃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비밀이 밝혀지는 것도 전혀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건을 이용한 협박이나 겁박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헤디 본인도 그런 방법을 다 예상하고 있더군요.”

“그렇다면야...... 조금 신선한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을까?”

“네?”

 

회장은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며 은영에게 다시 물었다.

 

“그 애랑 헤디랑 많이 끈끈해 보여?”

“네. 아주 많이요.”

“에바랑은 어떤 사이인 것 같아?”

“아직까지는 사이좋은 회사 선후배로 보입니다만....... 에바가 재계약까지 걸고 데려온 걸 보니 분명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성연애든 동성연애든 서로가 불안해지면 더 만나고 싶어하는 건 똑같지. 에바랑 그 애를 붙여두는 건 위험부담이 커. 에바는 우리 회사에서 앞으로 죽죽 커야 되니까. 스캔들이 되면 곤란하지. 에바가 요즘 이상하게 사춘기 소녀처럼 굴더니 그게 그 애 때문이었구만. 그 애 이름이 뭐라고 했지?”

“구여름입니다.”

“은영이 너도 구여름 만나봤지?”

“네.”

“어떤 애인 것 같아?”

 

은영은 잠시 표현을 생각하다가 역시 차분하게 대답했다.

 

“너무 순진해서 속여먹기도 미안한 아이입니다. 가수로서 포텐셜은 높지 않아 보이고요.”

“은영이 너답지 않은 표현이네. 속여먹기도 미안한 성격이라.......”

 

그러자 은영의 얼굴은 조금 발갛게 상기되었다.

 

회장은 말했다.

 

“헤디가 안 들어오겠다면 제발로 들어오게 만들어야지. 은영아. 너 지금 남자친구 있냐?”

“없습니다. 연애할 시간도 마음도 없고요.”

“그러면 혹시 은영이 너가 헤디를 꼬실 수 있겠냐? 아니면 구여름을 꼬셔서 헤디가 따라 들어오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계적으로 회장 앞에서 대답을 하던 은영은 이번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은영의 낯빛을 살피던 회장은 살랑살랑 부채질을 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이런 부탁은 역시 말도 안 돼.”

 

농담 같지 않은 농담에 은영은 잠시 표정관리를 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회장에게 대면보고를 바친 은영은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했다.

 

휴지로 얼굴에 물기를 닦아낸 은영은 거울을 바라보며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능력의 증명이라.......

 

은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약간 서글픈 눈빛을 지었다.

 

 

***

 

가벼운 보컬 트레이닝을 마친 여름은 회사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일찍 밖으로 나섰다.

 

헤디는 미국으로 공연을 떠났고 에바는 영화 현지 촬영 때문에 대만으로 떠났다.

 

정혜는 트레이닝을 받느라 바쁜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요즘 불현듯 적적함을 느낀 여름은 지희네 카페로 가려고 했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가 옆에서 따라붙었다.

 

“안녕하세요. 여름 씨. 집에 가세요?”

“누구세요?”

 

여름은 얼른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십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서글서글하게 대답했다.

 

“스타헤븐스 우성진 기자라고 하는데요.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여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얼른 지하철역을 향해 달려갔다.

 

“잠깐만요. 여름 씨! 잠깐만 하나만 물어볼게요.......”

 

성진을 손을 뻗어서 여름을 잡으려고 했지만 어느새 여름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아이고...... 한마디만 해주면 어디가 덧나냐.......”

 

성진은 그 자리에서 멀거니 서 있다가 폰을 꺼내들었다. 성진은 주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누님. 구여름이 원래 어떤 회사에 있었지?”

“체스터 엔터. 지금은 화이트로드에 흡수되서 없어졌어.”

“화이트로드에서 체스터 엔터 사람들 다 데려간 거야?”

“너도 연예부 기자 짬밥이 있으면 그건 말도 안 된다는 거 잘 알 거 아니야? 당연히 데려갈 사람만 데려갔지. 체스터 대표하고 연그레이 레몬, 구여름만 화이트로드로 갔어.”

“흐음. 그래? 뭔가 상황이 재밌네. 연습생은 딱 구여름만 찍어서 데려갔다는 거지? 누님. 체스터 대표였던 사람 연락처 알아?”

“지금은 몰라. 너가 능력껏 알아내봐.”

“누님. 또 구라치는 거 아니지?”

“정말이야. 나 지금 화이트로드 신인 걸그룹 취재 때문에 공항에 가고 있으니까 끊어.”

 

통화는 그렇게 끊겼다.

 

성진은 폰 연락처를 한참 뒤졌다. 그러다가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최 기자님. 오랜만이네. 최 기자님 옛날에 체스터 엔터 대표하고 한번 인터뷰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네. 그 사람이요. 혹시 연락처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

 

영화 촬영을 마친 에바는 호텔로 돌아왔다.

 

고된 촬영이었다. 게다가 대만의 습한 날씨가 몸에 맞지 않아서 많이 피곤했다.

 

샤워를 마치고 잠시 티비를 보던 에바는 여름이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폰을 찾았다.

 

여름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 전화가 왔다.

 

에바는 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은영이었다.

 

“에바 씨. 영화 촬영은 잘 하고 있어요?”

 

여전히 차가운 말투.

 

에바 역시 차갑게 대답했다.

 

“잘 안 하고 있을 이유도 없죠. 무슨 일인데요?”

“다행이네요. 에바 씨. 제가 어제 회장님을 만났어요. 그런데 회장님이 에바 씨 염려가 크더라고.”

“무슨 염려요?”

“회장님이 에바 씨 많이 예뻐하는 거 아시죠? 회장님도 다 에바 씨가 잘 되라고 하는 소리에요. 제가 하는 말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시고요.”

“......”

“회장님도 최근에 여름 씨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됐어요. 회장님은 에바 씨랑 여름 씨 사이가 스캔들이 될까봐 염려를 하고 계세요. 만나지 말라고는 말 안 할게요. 다만 회사에서는 이제 전처럼 같이 식사하고 노닥거리는 거 자제해 주시고요.”

“그리고요?”

“기자들한테 엉뚱한 오해 안 사게 조심을 해 주세요. 에바 씨가 요즘 바빠서 모르겠지만 지금 여름 씨 관련해서 살얼음판이거든요. 헤디 씨랑 관련해서 보도 터질 뻔한 거 억지로 막았어요.”

 

처음에 짜증이 났던 에바는 그 말을 듣고 감정이 조금 가라앉았다.

 

김은영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알았어요. 그러시겠죠.”

 

은영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에바는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대답을 했다.

 

침묵을 지키던 은영은 잠시 뒤에 입을 열었다.

 

“에바 씨. 많이 변했네요. 처음에 우리 회사 올 때는 참 밝고 착하디착한 아이였는데.”

“그래서요? 지금은 안 착하다는 걸까요?”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나는 지금의 에바 씨도 맘에 들어요. 조금 더 솔직해진 인간이 된 느낌이랄까. 에바 씨. 개인적인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뭔데요?”

“에바 씨는 여름 씨를 사랑하시나요?”

 

폰을 꽉 쥐고 있던 에바는 한숨을 내쉬고는 대답했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특히 이사님한테는.”

“알았어요. 그러면 하나 다른 질문을 할게요. 에바 씨가 보기에 헤디 씨하고 여름 씨는 가까운 시일 내에 헤어질 수 있을 것 같나요?”

“그렇게 될 거예요.”

“개인적인 바람인가요? 객관적인 추측인가요?”

 

에바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솔직히 전자에요.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거죠?”

“중요한 문제에요. 헤디 씨를 영입하는데 아무래도 여름 씨가 키가 될 것 같거든요. 에바 씨 재계약에 여름 씨가 큰 역할을 한 것처럼 말이죠.”

“헤디가 올까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워낙 고집도 쎄고 자존심 콧대 하나로 사는 사람이라.”

“혹시 모르죠. 여름 씨가 흔들려서 여름 씨를 붙잡고 싶다면.”

“그건 말도 안 돼요. 무슨 생각하는 거예요? 이사님?”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은영은 대답했다.

 

“제 짧은 식견으로는 여름 씨가 헤디 씨를 향한 마음보다 헤디 씨가 여름 씨를 향한 마음이 더 커요. 저하고 만남에서 헤디 씨는 감정 기복을 숨기지를 못했거든요. 반면 여름 씨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이게 뭘 의미하는 것 같아요?”

“글쎄요?”

“헤디 씨 여름 씨 커플은 애정 관계가 지극히 불균형하다는 뜻이에요. 그건 에바 씨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개소리.

 

에바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어쨌든 은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에바 씨가 재계약으로 여름 씨를 불러온 것처럼, 여름 씨를 붙잡으려는 마음이 헤디의 계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뜻이에요.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지만요. 이렇게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절대적이죠. 하나는 여름 씨가 우리 회사에서 떠나지 않을 것. 이 문제는 걱정 없어요. 벌써 우리 회사에서 여름 씨를 강력한 계약 조항으로 묶어놨으니까요. 나머지 하나는 여름 씨가 헤디 씨를 끌어들일 정도로 흔들릴 수 있을 것. 그것도 미묘하게.”

“그래서요? 설마 저보고 그 역할을 하라는 건 아니겠죠?”

“당연히 아니죠. 에바 씨는 지금 여름 씨하고 거리를 둬야 해요.”

“그럼......?”

“제가 하면 어떨 것 같아요?”

“네?”

 

에바는 놀라서 외쳤다.

 

은영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놀랄 것 없어요. 저도 여름 씨가 마음에 들어요. 지금까지는 그냥 인간적인 호감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다면 여름 씨가 저를 동경하고 사랑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마음만 먹으면 어떤 연예인 못지않게 멋있어 질 수 있거든요.”

“말도 안 돼요. 이사님. 사람 마음을 수단으로 이용해서 헤디를 데리고 오고 싶은 거예요?”

“못할 것도 없죠. 저희 회장님 숙원 중 하나가 헤디 씨를 데리고 오는 거였어요. 저도 꼭 헤디 씨를 데리고 오고 싶고요. 에바 씨가 재계약 때 했던 도박하고 비슷한 거잖아요? 어때요? 다른 방법은 없잖아요?”

“그게 가능할 것 같아요?”

“제가 말했잖아요. 어디까지나 가능성 문제라고. 우리 회사가 다른 방법으로 헤디 씨를 영입할 가능성은 제로에요. 헤디 씨가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명성이 부족한 것도 아니니까요. 다만 헤디 씨에게 여름 씨는 유일한 약점처럼 보여요. 헤디 씨는 지금 여름 씨 말고는 어떠한 약점도 없는 사람이에요. 사람은 그런 약점에 질질 끌려 다니기 마련이거든요.”

“......”

“지난번에 제가 가볍게 여름 씨 이야기를 던졌을 뿐인데 헤디 씨는 감정적으로 변했거든요. 현실이 이렇다면 약점을 건드려서 변수를 만들어야죠. 어차피 잃을 거 없는 도박이에요. 합리적으로 따져 봐도 잃을 거 없는 게임이구요.”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던 에바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어요? 에바 씨?”

 

은영이 묻자 에바는 한참을 웃은 뒤에 대답했다.

 

“한번 해 보세요. 여름이 걔가 얼마나 사람 마음에 민감한 앤데요? 여름이는 어수룩해 보여도 다른 사람이 진심을 다하는지 안 하는지 잘 아는 애에요. 이사님. 제 생각에 이사님은 바로 여름이한테 차일 것 같은데요?”

“어쨌든 그건 확실해요. 헤디 씨가 저희 회사로 올 수 있는 경우는 딱 한 가지에요. 여름 씨 곁에 더 있고 싶을 때. 그러니까 여름 씨가 흔들리고 자신한테 소홀해져서 여름 씨에 대한 소유욕이 병적으로 강해졌을 때. 그런 상황이 되면 헤디 씨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을 수밖에 없죠.”

“이사님. 제가 하나 충고해도 되죠?”

“뭔가요?”

“세상일은 그렇게 계산적으로 돌아가지 않아요.”

 

은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차가 제일 적은 방법은 여러모로 봐도 손해가 적어요.”

“제가 지금 들은 거 여름이한테 말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거예요? 말해도 돼요?”

“당연히 말하면 안 되죠. 에바 씨. 에바 씨도 여름 씨랑 헤디 씨 헤어지는 거 바라죠?”

 

그러자 에바는 입을 다물었다.

 

은영은 차갑게 말했다.

 

“이 플랜이 성공하면 여름 씨하고 헤디 씨는 오래 못 가요. 그때 되면 에바 씨가 여름 씨 데려가도 돼요. 헤디 씨 영입 성공하면 제가 회장직 물려받는 건 확실해지거든요. 언론에 안 들키게 잘 사귈 수 있다면야. 재주껏 해보세요.”

“그걸 어떻게 아시는데요?”

“이별의 징조는 의심이죠. 결국 헤디 씨는 여름 씨를 믿지 못해서 우리 회사에 오게 될 거예요. 이 플랜이 성공한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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