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XX 일. 마루 고등학교 개학식 당일. 한없이 조용하고 고요했던 마루 고등학교가 활기를 되찾았다.

교무실 안에 많은 교사가 살갑게 웃으며 화담을 나누고 있다. 새로운 신학기. 설레는 긍정 에너지로 가득한 교무실에 홀로 부정 에너지를 뿜어내는 인물이 있었다. 보기 드문 잿빛 머리칼이 인상적인 그녀의 이름은 디오르 니소스. 캘리포니아 주에서 태어난 혼혈인 여교사였다. 열네 살 때까지 캘리포니아에서 살다 온 그녀는 영어 실력이 출중했다. 하지만 정작 맡고 있는 과목은 국어였다.


“ 하아……. ”


디오르 니소스는 땅이 꺼질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철제 책상에 얼굴을 묻은 그녀의 손에 종이 쪼가리가 쥐어져 있었다. 구겨진 종이에 적혀 있는 것은 신학기 반 배정표였다. 작년까지 과목 교사였던 그녀는 올해 처음으로 담임 선생을 맡게 됐다. 디오르 니소스는 퀭한 눈으로 배정표를 훑었다. 시선이 머무는 곳엔 신하로의 이름이 적혀 있다. 글자를 빤히 쳐다보던 디올(디오르 니소스의 줄임말)은 검지 손톱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손톱 끝이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뭉툭하게 깨져 있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표정이 퀭한 디올의 뒤로 작은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 디올아, 뭐해? ”


활기차게 웃으며 말을 걸어온 백발 교사의 이름은 김계란. 디올의 오랜 지기 친구이자, 이학년 수학 과목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였다. 계란이 말을 걸어도 디올은 미동하지 않았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옅은 숨을 내쉴 뿐이었다. 계란은 금색 눈을 끔뻑이며 디올의 대답을 기다렸다. 미동조차 없는 디올의 대답을 기다리는 게 지루할 법도 한데 입가의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디올은 뭔가에 홀린 듯 등을 돌렸다. 


“ 계란아, 나대신 교사할래? ”

“ 싫어! ”


밝고 명랑한 거절의사가 디올을 다시 쓰러지게 만들었다. 계란은 주변에 있던 플라스틱 의자를 끌고 왔다. 철제 책상 위로 널브러진 디올의 손에서 반 배정표를 빼앗았다. 배정표를 유심히 살펴보던 계란은 웃으며 말했다.


“ 너희 반 되게 재밌겠다. ”

“ 하하. ”


계란의 솔직한 감상평에 감동한 디올은 웃지만 울었다. 그녀가 이토록 침울했던 이유는 특정 학생탓이 아니었다. 그저 담임 선생님이라는 직책이 너무나도 귀찮았기 때문이다. 


“ 혹시 긴장돼서 그런 거야? ”

“ 내가 그깟 꼬맹이들 앞에서 긴장할 것 같아? ”

“ 응. ”

“ 넌 나를 너무 잘 알아. ”


계란은 고개를 도리 저으며 디올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디올은 슬픈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하늘은 구름 하나 없이 맑았고, 선명한 햇빛이 그녀의 시력을 빼앗았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이래선 담임 선생님을 할 수 없어! ”

“ 포기해 디올아. ”

“ 자기 일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니? ”

“ 내 일 아니니까 쉽게 말하는 거지. ”

“ 그것도 맞네. 네가 국어 선생님 해라. ”


얼토당토않는 소리에 계란의 어깨가 들썩였다. 아직까지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디올을 보며 계란은 앙증맞게 팔짱을 꼈다. 그녀가 넌지시 말했다.


“ 그래, 내가 국어 선생님도 할 테니까 디올이는 담임 선생님 해. ”


별거 아닌 계란의 말은 비수가 되어 디올의 뇌를 꿰뚫었다. 그녀는 정녕 어찌할 도리가 없는 자신의 인생을 한탄했다. 아침조회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내에 울려 퍼졌다. 교무실에서 화담을 나누던 교사들이 하나둘씩 배정받은 교실로 이동했다. 그러나 디올은 아직까지 책상에 널브러져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계란은 동료 교사를 복돋아 주기 위해 귓가에 다가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 오늘 밥 사줄게. ”


그 말이 디올의 퀭한 눈동자를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말라죽어가는 식물 같던 디올의 피부가 탱탱해졌다. 자리를 벅차고 일어난 그녀는 키가 2센티 정도 커진 것처럼 보였다.


“ 좋아. 그럼 가볼까. ”

“ 응, 힘내. ”


계란은 교무실을 성큼성큼 걸어나간 디올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홀로 남은 계란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조심스레 펼쳤다. 지폐가 단 한 장도 없었다. 그제서야 계란은 새 태블릿에 눈이 먼 어젯밤 쌈짓돈을 다 써버렸다는 걸 떠올렸다. 그녀는 자연스레 집 안 냉장고에 있던 반찬 재료를 되짚었다. 탐색을 끝낸 그녀는 밥 사준다는 말을, 직접 해준다는 말이었다고 우기자며 자신과 타협했다.


디올은 본관 건물 2층에 있는 교무실에서 빠져나왔다. 당찬 걸음으로 3층 계단을 오른 그녀의 머릿속은 고기로 가득 찼다. 양념갈비부터 시작해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까지. 꿈만 같은 상상에 빠져 있던 그녀는 어느새 교실 앞에 도착했다. 구운내 가득한 상상에서 빠져나온 디올은 극심한 울렁증과 같은 것을 느꼈다. 나무 재질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거북하게 느껴졌다. 디올은 차려 입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작은 유리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케이스 안에는 새끼손톱만 한 동그란 알갱이가 가득 차 있었다. 디올은 재빠르게 뚜껑을 열고, 알갱이 세 개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잘 녹지 않는 알갱이를 으적으적 씹어 먹은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다들 잘 알 테지만, 그녀가 씹어삼킨 것은 청심환이 아니다. 당도 강한 초콜릿 알이었다.


초콜릿의 힘을 얻은 디올은 교실 앞문을 세차게 열어젖혔다.


“ 나기이이이! 제발 나랑 앉자아아아아! ”


당찬 호걸의 포효같은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분홍색 눈동자가 혼란으로 물들었다. 디올은 서둘러 교실 안을 살폈다. 혹여 학생끼리 싸우고 있는 게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포효의 주인공인 하로가 두 손으로 책상을 지탱한 채 서 있었다. 나기의 주변에는 열댓 명 정도 돼 보이는 여학생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나기의 시선 또한 하로를 향해 있었다.  디올은 뒷목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 탈주 마렵네. ”


물론 어림없는 소리였다.



===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이른 시간. 곧 개학식을 맞이할 하로와 초록은 아직까지 눈을 감지 않았다. 모니터를 노려보는 초록의 눈 밑에 진한 다크서클이 내려앉았다. 헤드셋을 오랫동안 쓰고 있던 하로는 귀가 아팠는지 표정을 찡그렸다. 음성 채팅을 하고 있단걸 잠시 잊은 초록이 길게 하품했다. 음성 채팅을 하고 있던 상대방의 귓가에 초록의 하품 소리가 닿았다.


“ 졸리냐 김초록? ”


비웃고 있다는 게 훤히 느껴지는 하로의 말이 초록색 눈썹을 꿈틀거리게 했다.


“ 들렸어? ”

“ 들으라고 한 거 아니야? ”

“ 그럴 리가. ”


둘은 방학 동안 게임을 즐기며 밤을 새우곤 했다. 하지만 오늘이 개학 날인 걸 알면서도 밤을 새울 정도로 무모한 플레이어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밤을 새운 이유는 단 하나이자, 한 명의 이유뿐이었다.


“ 나기랑 짝이 되기 위해서지. ”


초록이 알고 있다는 듯이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하로는 분홍색 머리카락을 퍼덕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전날, 나기와 짱친이 되기로 다짐했던 하로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와 짝꿍이 되고 싶었다. 하로는 배정표를 받은 순간부터 나기와 짝꿍이 되기 위한 허무맹랑한 계획을 세웠다. 그 수많은 계획 중 선발된 것이 밤을 새우고 등교하는 것이었다. 작년에 나기와 같은 반이었던 하로는 그녀가 일찍 등교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로는 아침잠에 유독 약했다. 그녀는 평소처럼 자고 일어났다간 분명, 다른 학생에게 나기의 짝꿍 자리를 뺏길 거라 판단했다. 그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밤을 새우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하지만 초록은 밤을 새울 생각이 없었다. 아침잠이 하로보다 약한 초록은 열시에 누워 잠을 청하려 했지만, 하로가 그것을 저지했다. 홀로 밤을 새우는 건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초록은 그런 부탁에 순순히 응해줄 정도로 착한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부재중 전화 102통에 달하는 하로의 끈덕진 노력 덕에 마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잠 자는걸 포기하고 불을 켠 초록은 그녀와 친구가 된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 초록아, 이제 슬슬 나갈 준비해야 돼. ”

“ 벌써 그렇게 됐어? ”


초록은 핸드폰을 두드려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7시라고 적힌 타이머를 보며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하로는 마이크를 끄고, 침대에 고스란히 내려놨던 교복을 갈아입었다. 넥타이까지 말끔히 맨 하로는 컴퓨터 본체 버튼을 발가락으로 눌렀다. 쉴 새 없이 돌아가던 쿨러가 작동을 멈추며 컴퓨터 전원이 꺼졌다. 그 상황을 모르고 있던 초록은 갑자기 사라진 하로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로가 빨간 코트를 걸쳐 입고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고양이 걸음으로 집을 빠져나왔다. 어머니에게 이른 시간에 등교하는 걸 들켰다간, 또 밤을 새운거냐며 잔소리 폭격이 쏟아질 게 뻔했다.

집을 빠져오자 눈부신 아침해가 하로를 반겼다. 밤을 새우고 나온 그녀에게 있어 아침해란, 그저 저릿한 통각에 지나지 않았다. 깊게 숨을 내쉬자 뿌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가시지 않은 추위에 몸을 떤 그녀는 코트 단추를 단단히 채웠다.

하로는 뒤늦게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삭막하기만 했던 2층짜리 주택 집이 새벽녘엔 다르게 보인단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른 시간에 등교해본 적 없던 하로에게 새벽녘 동네는 하나같이 새롭고 다채로웠다.

이색적인 풍경에 잠이 달아난 하로의 발걸음에 흥이 돋았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등굣길을 나아갔다. 통통 튀어 오르듯 걷다 보니 몸을 짓누르던 추위가 금세 가셨다. 교문 앞까지 도착한 하로는 주변을 둘러봤다. 현재 교내에 있는 사람은 문을 열기 위해 찾아오신 경비 아저씨와 하로 단둘뿐이었다. 

경비 아저씨가 손수 교실문을 따준 덕에 하로는 가장 먼저 교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히터를 틀지 않아 싸늘한 공기가 가득했다. 최고의 명당이라 불리는 창가 뒷자리에 앉은 그녀는 열심히 손을 비볐다. 연거푸 열띤 숨을 내쉰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팽창했다. 하로는 단추를 풀어 코트 안주머니를 열심히 뒤적였다. 코트 안주머니에서 다섯 개의 손난로가 나왔다.

양손에 쥔 손난로를 열심히 흔들자 금세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열기 오른 손난로를 이곳저곳에 붙인 하로의 몸이 코트가 필요 없을 정도로 따듯해졌다.

놀랍게도, 하로는 이때까지 자신을 기다리는 초록을 생각하지 못했다. 머나먼 생각의 저편에서 초록은 왜 등교를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르긴 했으나, 그 생각은 뇌신경계까지 닿지 못했다.

미리 챙겨둔 손난로로 추위를 해결하니 지루함이 그녀를 찾아왔다. 어둑한 교실에 홀로 있는 하로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지루함을 떨쳐내기 위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이미 나기와 짝꿍이 된 것을 전제로 한 내용의 상상이었다. 웅크리고 있던 하로는 오른팔을 움직여 가방에서 노트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그곳에 나기와 주고받기 좋은 대화문을 적었다. 재치 있는 농담에 웃어줄 나기의 웃음소리를 상상하기 위해 하로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성냥팔이 소녀가 그리운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듯 나기의 얼굴을 상상하며 하로는 서서히 잠에 들었다.

하로는 꿈 속 나라에서 나기와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다. 해바라기가 이무기만 한 꽃밭을 나뒹굴고, 사람 한 명 없는 놀이공원 투어를 즐겼다. 둘은 커다란 노을이 떨어지는 절벽 위에서 서로 마주 봤다. 현실이었다면 하로는 진작 정신을 잃었어야 했지만, 꿈속 세상의 하로는 나기와 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애잔한 시선을 보내오던 나기가 어여쁘게 미소 지었다.


“ 하로와 친구가 돼서 나기는 너무너무 행복해용. ”

“ 오와앙! 나도 마찬가지양! ”


둘은 우정의 눈물을 흘리며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뜨거운 포옹과 함께 노을이 떨어지고, 이후 귀 아픈 폭발음이 세상을 덮었다. 꿈속 나라는 멸망을 맞이해 다시금 자욱한 어둠이 눈앞을 가렸다.

눈 사이를 파고드는 빛에 못 이겨 하로가 눈을 떴을 때, 주변 풍경은 이전과 모습을 달리하고 있었다. 사람 한 명 없던 한적한 교실이 어느새 사람으로 가득 찼다. 고개를 든 하로의 볼에 아직 따끈한 손난로가 붙어 있다. 몽롱함을 떨쳐내지 못한 그녀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때 교실 뒷문으로 나기가 들어왔다.


“ 헉…! ”

“ 왔다…! ”


갑작스러운 나기의 등장에 반이 술렁거렸다. 얇은 코트와 가벼운 머플러를 두른 나기의 존안은 학생들의 이목을 손쉽게 갈취했다. 몽롱했던 하로의 정신이 나기의 등장에 금세 맑아졌다.


 소란스러웠던 교실이 찬물을 끼얹은 양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교실에 도착한 나기는 의아한 표정이었다. 문을 열기 전만 해도 왁자지껄했던 교실이 갑작스레 고요해졌다. 혹시 모두가 자신을 따돌리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나기의 코끝이 찡해졌다. 머플러를 코까지 끌어올린 그녀는 황급히 자리를 살폈다. 시선이 되도록 닿지 않을 자리가 필요했다. 코트 자락이 펄럭일 정도로 주변을 살피던 나기는 하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전날 인사를 나눈 하로의 얼굴이 퍽 반가웠다. 나기의 몸이 자연스럽게 창가 자리 방향으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 나기야 안녕! ”


내딘 발이 교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누군가 나기에게 말을 걸었다. 면식 없던 단발머리 여학생이었다. 수년간 동급생에게 먼저 인사를 받아본 적 없던 나기는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허상의 것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단발머리 여학생을 시작으로, 많은 여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먹잇감을 발견한 늑대 무리처럼 몰려든 그들은 언성을 높여가며 나기에게 말을 걸었다.


“ 안녕, 나기야 이번에도 같은 반이네? ”

“ 안 본 사이에 더 이뻐진 것 같아! ”

“ 저기, 나 기억해? 우리 지난번에도 같은 반이었는데! ”


물론, 나기는 그 어떠한 대답조차 내놓질 못했다.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은 꿈속에서조차 상상해본 적 없었다. 쏟아지는 질문 공세에 어찌할 바 몰라 하던 나기는 우선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레 고개를 숙이자 몰려든 동급생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혹시 선을 넘은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잠잠한 침묵 사이 불안감이 증폭되어 가는 가운데 나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 모두 반가워요. ”


공손한 아침 인사가 주변 여학생의 근심을 안심시켰다. 귀까지 달아오른 나기의 모습은 누가봐도 부끄러워 하고 있다는 게 티가 났다.


“ 나기! 나 기억해? ”

“ 그럼요, 기억하고 있어요. 같은 반이었죠? ”

“ 내 이름은 알아? ”

“ 어어…김장미 씨였죠? ”


나기는 정신이 산만했지만, 쏟아져 오는 질문 공세가 내심 기뻤다. 혹시 꿈이 아닌가 싶어 몰래 귓불을 꼬집기도 했다. 하로는 피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뛰쳐나가 나기를 품에 안고 싶었다. 하지만 두 다리가 구부정한 자세로 잠들었던 탓에 쥐가 나있는 상태였다. 하로는 콧등에 침을 발라 보기도 하고, 발이 저려와도 열심히 돌렸다. 그럼에도 쥐가 풀리지 않았다. 양발을 있는 힘껏 비틀자 저릿한 통각이 신경을 짓눌렀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 움직여…움직이라고! ”


하로는 애꿎은 허벅지를 주먹으로 퍽퍽 두드렸다. 하로에게 양발을 짓누르는 통각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녀의 신경은 나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수많은 군중에 쏠려 있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나기와 친해지려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학생으로 구성된 군중이 한마음으로 움직인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지난 일 년간, 수많은 동급생은 나기와 친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언젠가는 말을 걸어보겠노라며 다짐을 거듭했던 그들에게 개학식인 오늘은 자연스럽게 말걸기에 최적화된 순간이었다. 

하로는 나기와 관련된 대국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이대로 있다간 나기의 짝꿍 자리를 빼앗기는 건 시간문제였다. 억지로라도 일어나려 했으나 다리가 꼼짝하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같이 앉자는 제안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하로는 최후의 수를 두기로 했다.


“ 우오옷…!! ”


나기를 쳐다보던 몇몇 시선이 하로의 자리로 움직였다. 가만히 앉아 있던 그녀는 갑작스레 살기를 내뿜었다. 그녀는 벌크업을 앞둔 3 대 500 헬스 괴물처럼 어깨를 풀었다. 양손을 쭉 펼쳐 마디 관절을 풀자 두둑 두둑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압도적인 퍼포먼스에 지켜보던 관중을 침을 꿀꺽 삼켰다. 만전의 태세를 갖춘 하로는 두 손바닥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여학생 무리는 좀 전보다 누그러진 태도로 나기와 대화하고 있었다. 그 훈훈한 장면에 하로의 이가 갈렸다. 양 팔 가동 범위 체크를 끝낸 하로는 때를 기다렸다. 나기 방향으로 귀를 곤두세운 그녀는 지긋이 눈을 감고 담담히 때를 기다렸다.


“ 나기, 혹시 누구랑 앉을 거야? ”

“ 그건…아직 정해두지 않았어요. ”

“ 어, 그럼 나랑 앉을래? ”

“ 아니, 나랑 앉자! ”


하로의 검은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그녀가 기다리던 때가 바로 이 순간이었다. 나기의 옆자리 쟁탈전이 개시되는 이 순간을 기다려온 하로는 두 손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하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이 부서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요란한 굉음이 군중의 시선을 돌렸다. 나기도 얼떨떨한 표정으로 하로를 바라봤다. 놀랍게도 하로는 두발이 공중에 떠있는 채 서 있었다. 오로지 팔 힘으로만 몸무게를 지탱한 것이다. 그 놀라운 괴력에 지켜보는 모든이가 할 말을 잃었다. 짧은 침묵 속에서 하로는 귀청이 터져 나갈 정도로 크게 외쳤다.


“ 나기이이이! 제발 나랑 앉자아아아아! ”


쩌렁쩌렁한 외침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교실 앞 문을 열고 들어온 디올도 포함된 말이었다. 나기는 푸른 눈을 끔뻑였다. 할 말을 잃은 건 그녀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하로는 숨을 헐떡이다 힘이 풀려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숨죽인채 지켜보던 남학생들은 하로의 괴력에 존경심을 느꼈다. 의자에 주저앉은 하로는 나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기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제서야 하로는 본인의 방식이 너무 과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속도로 무안해진 하로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뒤늦은 수치심에 얼굴이 뜨겁게 타올랐다.


푸른 눈을 연신 끔뻑이던 나기는 기쁜 듯 웃었다. 오늘 처음 보이는 모성애 가득한 미소가 군중을 놀라게 했다. 약속된 침묵 속에 그들은 직감했다. 나기가 하로를 짝꿍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걸.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길을 터줬다. 나기는 고개를 숙이며 하로를 향해 한 발자국씩 다가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군중들은 하로를 향해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물론, 하로는 여전히 손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연달아 죽고 싶다며 중얼거리는 하로의 옆자리에 나기가 도착했다. 머플러를 벗어 책상에 내려둔 나기는 연거푸 자조의 말을 뱉는 향해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 좋은 아침이에요, 하로 씨. ”


하로는 그제서야 눈에서 손을 뗐다. 그토록 바라던 나기가 코앞에서 모성애 가득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로는 서둘러 양 볼을 꼬집었다. 이견의 여지없는 현실 속 광경이었다. 하로는 다시 한번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어쩐지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나기는 이런 그녀의 심정을 알 리 없었다. 하로는 새어 나오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기운차게 웃었다.


“ 좋은 아침이야, 나기! ”



청춘의 한 페이지를 감상하고 있던 디올의 입가에도 그제서야 미소가 번졌다. 교사들 사이에서 나기는 유명 인사였지만, 동시에 안타까운 학생이기도 했다. 디올은 출중한 집안 내력 탓에 늘 고립되어 있던 나기를 걱정했었다. 그런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익살맞게 웃는 하로덕에 조금은 근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디올은 좀 전에 일어난 소동은 못 본척해주자며 교탁 앞으로 발을 옮겼다.



===



암막 커튼으로 가려진 탓에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는 방이었다. 빛이라곤 모니터에서 나오는 희멀건 빛이 전부였다. 컴퓨터 책상 앞에 가련히 잠든 초록의 어깨가 움찔했다. 초록은 졸린 눈을 열심히 비볐다. 떠진 금색 눈이 자연스레 컴퓨터 시계로 향했다. 전자시계가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초록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바로 옷장에서 교복을 꺼냈다. 말끔하게 다려진 교복이 구겨질 세랴 신중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옷을 갈아입은 초록은 망설임 없이 커튼을 젖혔다. 커튼이 걷힌 창틀 발코니 너머에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얼빠진 초록의 손에서 넥타이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는 손으로 미간을 가린 체 중얼거렸다.


“ 시발……. ”


초록은 개학 첫날 무단결석이라는 불량아 업적을 쌓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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