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분들은 아래에서 순서대로 봐주세요. 


<리차드클레이더만- Mariage d'Amour >



얼마나 해댔는지 모르겠다. 열려진 문 사이로 물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진 지민이 보였다. 어둠 속, 희미한 달빛과 바깥에서 들어온 조명 불빛만 의지해,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국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지독한 금단현상에 눈앞이 혼미했다.

냉장고를 열어 벌컥벌컥 생수를 그대로 들이켰다. 벌어진 입술로 물줄기가 흘러, 목을 타고 맨 가슴에 닿아 떨어졌다. 흡연 욕구가 사라질 때까지,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찬 물을 마시고서, 냉장고 문을 닫았다.

그대로 아무 셔츠나 입은 채, 휴대폰을 챙겨 들고서 테라스로 나갔다. 늦은, 아니 이제는 이른 새벽. 이슬이 머문 공기가 정국의 콧속으로 스스하게 들어온다.

한참을 망설이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정국이 이내 결심을 한듯 누군가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 이른 새벽에 전화하면 욕지거리를 할지도 분명하지만.

정국의 목소리가 낮고 조용히 흘렀다. 한국어가 아닌 영어였다.

테라스 바깥으로 퀴퀴한 담배 냄새와 간간이 들리는 차 소리가 새벽의 기운을 깨웠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정국의 얼굴에서 그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




한번 바닥으로 추락해 나뒹군 새는, 다시 한번 더 비상하기 위해 시간이 뒤따른다. 도약의 설렘. 그 설렘 후 바닥으로 추락할 때의 비참함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한 공포이기 때문이다.

그것처럼 지민 역시도 준비가 필요했다. 의사에게 괜찮다는 답변을 받았으나, 실제로 얼마나 괜찮은지 스스로가 느낄 수 없었기에 지민은 아직 높다란 산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저 산을 오르기 위해 날개를 퍼덕거려본들, 너무나 높고도 높은 산이라 날개를 활짝 펼치는 걸 두려워했다. 병원도 가지 않으니, 지민의 생활반경은, 타투샵과 정국의 집. 단 두 곳뿐이었다. 몇 번이나 전화를 들었다가 꺼버리길 반복했다. 요즘 누가 전화번호를 외운다고…. 하도 누르다 지우길 반복해서 이제 지민은 시립 발레단의 전화번호까지 외울 지경이었다.


"뭘 그렇게 봐요?"


정국이 아니면, 웬만해서 홀로 이 낯선 땅을 걷지 않았다. 지민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였고, 정국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잔뜩 풀어놔 자유롭게 만들었더니, 지민은 어느새 자신의 새장 안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도시락은 지겨워, 오랜만에 식당에 들렀던. 날씨가 제법 더워지는  LA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 따사로운 빛을 머금은 채, 지민은 내도록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정국은 며칠 동안 그에게 언제 시작할 거냐고 입술 안쪽까지 차오른 질문을 꾸역꾸역 참아냈다. 어렸을 때는 춤. 그것이 무너지고 난 후에는 이안의 세상 속에서만 살았으니, 그의 세상이 넓어진다 한들 정국이 만들어준 세상이 고작이었다. 우물 안에 든 개구리의 하늘이 고작 그 우물 안이 전부이듯 그의 세상이 그랬다. 저 작은 머리통이 혼자 얼마나 두려워하고 겁내고 있을지, 부러 표내지 않아도 눈에 선한 거다.

자꾸만 형인 걸 까먹게 될 정도로, 지민의 행동들이 자꾸만 정국의 정의로움을 자극했다.


"아니. 그냥."


수많은 생각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머리를 어지럽혔지만, 정국은 짧게 고개를 저어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포크로 한 움큼 파스타를 떠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볼을 부풀린 채 창밖으로 지나가는 차를 바라본다. 달콤한 팝음악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 정국에 자리한다. 미간에 석삼자가 그려져 깊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뭐지. 깨작거리던 지민의 눈이 팔자로 내려왔다.


"밥 다 먹었어?"

"응. 생각 없어서."

"많이 먹어야 쑥쑥 자라는데."

"다 자랐거든요. 내가 그쪽보다 나이 많아."


아이를 놀리는 듯한 어조에 지민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고작 한 살 가지고 유세는. 팔짱을 끼우고 정국은 피식 웃는 걸로 대화를 종결했다. 그러며 눈으로는 하염없이 그의 행동을 훑었다. 반쯤 남은 파스타는 놔두고 쪼옥쪼옥 오렌지 주스를 맛있게도 먹었다. 바닥이 드러나는 오렌지 주스를 보니, 집에 돌아가는 길에 오렌지주스도 사 가자 싶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요. 어디 좀 가게."

"어디?"

"그냥. 가 보면 알아."


정국의 접시는 거의 손 대지 않은 식은 파스타가 말라가고 있었다. 음료도 파스타도 손을 대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는 지민을 놔두고 정국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뒤에 걸쳐두었던 옷을 챙겨,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서둘러 뒤따르던 지민의 고개가 연신 기울여진다. 밥 되게 잘먹어서 복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좀 이상했다. 진짜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정국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이동을 하는 내내 거리가 놀랍도록 변화했다. 낮고 낡은 건물들이 사라지고 어느덧 높다랗고 화려한 전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요상하고 기괴한 그래피티가 아닌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과 조명들, 높다란 나무가 지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창밖을 한참 구경하던 지민이, 운전하는 정국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할 말을 하려다가 멈추고, 또 입을 동그랗게 벌리길 반복한다. 이렇게 막연히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물어도 되나 망설이는 눈치였다. 정면만 보고 있는 정국은 무표정함을 일관했다. 부드럽게 핸들을 꺾으며 지민을 향해 슬쩍 입꼬리를 올린다. 보지 않아도 그 얼굴에 수많은 물음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쇼핑하러 가요."

"쇼핑?"

"응. 옷 좀 사게."


정국은 여전히 정면을 응시한 채로 무던한 목소리를 흘렸다. 이내 궁금증이 해소되었지만, 또 지민은 궁금한 게 생긴다. 무슨 쇼핑. 여름옷이라도 사러 가나. 커다란 쇼핑몰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질문하려는 걸 그대로 속에 감추었다. 뭐 어쨌든. 가보면 알겠지. 두려우면 도망치면 되고 함께 달려줄 사람이 있으니 무서워하지 않을 것이다.

안전벨트를 꼭 쥐고서 지민이 녹음이 펼쳐진 창밖을 바라보며 가뿐한 얼굴을 했다.



가뿐한 얼굴은 이내 당도한 가게 앞에서 어둠이 깃들렷다. 꼭 지옥문을 앞에 둔 것처럼 눈이 하염없이 떨렸다. 이건 정국도 예상 밖이었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게 없잖아."

"아."


겨우 찾아낸 숍은 무용하는 사람들이 특히나 좋아하는 브랜드였다. 알지도 못하는 정국이 며칠을 찾아 고심해서 데리고 온 곳이다. 지민이 고개를 숙이고 물끄러미 발아래를 바라보았다. 한 걸음만 나아가면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입구였는데 어쩐지 쉽지가 않았다.


"조금 더 있다가요."

"언제..?"


정국은 조금 조바심이 났다. 이러다가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될까 봐 걱정이 됐다. 제품에 가둬놓으려고 데리고 온 게 애초에 아니었다.


"지민씨."

"돌아가죠."


결국 지민이 먼저 발을 돌렸다. 맨 크로스 백 끈을 안전벨트처럼 꾹 참은 채였다. 뚜벅뚜벅 앞서 걸어가는 두 다 다리게 길고 곧았다. 어쩐지 정국은 저 다리가 곧 부서질 것만 같은 불안함이 맴돌았다. 움직이지 않으면 점점 더 무뎌지고 말 것이다. 이렇게나 오래 쉰다면, 아무리 잘하는 사람도 결국에는 도태되고 만다.


"같이 가."


손가락만큼 작아진 지민을 잡기 위해, 정국이 빠르게 걸었다.

날이 좋은 6월인데, 어쩐지 그의 등이 쓸쓸하기만 했다.




**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말도 못했다. 슬픔에 빠져서 남의 감정을 돌아볼 시간조차도 없었다.

한심하고 화가 났다. 거기서 왜 도망을 쳤지? 스스로에게 되물어도 이해를 할 수 없는 도망이었다. 그렇게나 추고 싶었던 춤을 이제는 출 수 있다고 하는데 어쩐지 두려워졌다. 정말 할 수 있을까. 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나. 고민과 번뇌가 머릿속을 들끓어 지민은 내도록 움츠린 상태였다.

정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를 달래어주지도 채근하지도 않았다. 동거하는 고양이처럼, 지민의 곁에 말없이 머물렀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웅크려 누워 있으면 뒤에서 말없이 안아주었고, 밥을 먹지 않으면 억지로 손에 수저를 쥐어주고 함께 나란히 밥을 먹는 것. 그것이 정국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위로였다.

그리고, 그 위로의 종착지. 지민은 왜 저가 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른 저녁에 집으로 온 정국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보면서 깨달았다.

그는 그 누군가처럼 새장의 달콤함을 유혹하지 않았다. 오히려 광활하고 너른 대지에 서서 날아갈수 있도록 했다. 여기가 더 멋짓 새장이라고 알려주듯, 망설이는 지민에게 펄럭펄럭 날개를 흔드는 법을 알려준다. 


"안 받고 뭐 해요."


문 앞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지민을 향해 정국은 무심하게 툭툭 쇼핑백을 털었다. 커다란 브랜드 로고가 박혀 있어 지민은 그게 무언지 단숨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날 제가 도망쳤던 가게. 그 가게의 제품일 것이다.


"..괜찮다니까."

"확인해봐요. 맞게 샀는지 몰라."


대충 신발을 벗어 들어오며, 정국이 얇은 재킷을 벗어 식탁 의자에 툭 올려놓았다. 하얀 반소매 티 아래로 흉흉한 위용을 뽐내는 뱀의 몸통이 무섭게 지민의 눈을 사로잡았다. 몇 달을 봤는데도 적응할 수 없는 팔이었다. 그것뿐인가. 정국의 등에도 커다란 호랑이가 한 마리 그려져 있었다. 저 예쁘고 순하디순한 얼굴이랑 너무나 어울리지 않게. 저 몸으로, 이걸 사려고 거기까지 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했을 걸 생각하니 어쩐지 눈물이 나려고 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정국은 지민의 손에 들린 꾸러미가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까만 눈은 침묵을 지키면서도 집요했다.

지민이 한숨을 내쉬고 결국 그의 곁에 앉았다. 부스럭 소리가 요란할 정도로 조용한 거실 안에, 지민이 그가 건넨 선물을 풀어내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아.."

"뭐 생각보다 별거 많이 필요하더만. 필요하다는 거 죄다 샀는데 이 정도면 될지 모르겠어요."


한아름 비닐 포장을 풀자 그곳에는 지민이 꼭 필요한 것들이 알짜배기로 가득 들어 있었다. 땀 배출이 잘 되는 기능성 셔츠와 타이즈. 발 사이즈에 꼭 맞을 발레슈즈. 발레리노라면 필수인 서포트까지. 무용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모를만한 물건들까지 가득 있어 지민은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이제껏 갇혀서 받는 사랑이 전부라 생각했던 지민이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자유였다.


"여긴 방음도 안 되고. 좁기도 하고."

"......"

"혹시 몰라서 길 건너에 연습할 수 있는 공간도 빌려놨어요.

씨발, 쓰지도 않는 창고면서 존나 비싸더라."


펼쳐 놓은 선물들만 멍하니 바라보는 지민은 주절주절 토해내는 말에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탓에 그의 눈동자를 볼 수가 없어 답답했다. 

정국이 그 머리카락을 슥 치워 내며,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조용히 조근거렸다.


"해요. 다시."


나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하고 싶은 거 맘껏 해요. 그렇게 하라고 풀어준 거잖아요. 내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치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무대에서 처음, 에뜨왈로 높게 비상했던 그때보다 더 날아오르고 있었다. 눈앞에 놓인 커다란 산. 그것을 보며 막막했는데, 이젠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다.


"또 그렇게 갇혀서 살 거예요?

매력 없어. 그럼. 박지민씨."


지민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정국을 끌어안았다. 두 팔 가득 그의 몸을 옥죌 정도로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하얀 셔츠가 눈물로 축축해질 정도로 울었다. 

자유에게 구속당하고 싶을 정도로 그가 좋았다.


"나보다 형이라면서 계속 우네. 울보야?"


그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고서 들썩이는 흉곽이 잔잔하게 떨렸다. 웃는 듯 우는 듯 떠는 몸을 정국은 말 없이 쓸어주기만 했다.

훨훨 날 수 있는 자유를 줘놓고, 홀로 날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해 주는 그의 전부가 좋아서, 지민은 영원히 그의 곁에서 벗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

성인되시고 나셔서 완전판을 보시는걸 추천드립니다. 쩌업a 


코이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