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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살아남았다.

 

*

 

‘그 사건’의 결과로 오성욱은 학회장에서 물러났다. 철갑처럼 두르고 있던 지위 또한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 단상 중앙에서 주변부로 비켜선 오성욱은 검은 망토에 얼굴의 반을 덮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박수를 칠 때마다 정말로 박수를 치는 게 아니라, 손목을 지탱할 힘이 없어 손가락끼리 부딪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사건’에는 센터가 비밀리에 개발 중이던 생화학무기가 연관되어있고, 오성욱은 프로젝트가 실패한 탓에 일선에서 물러난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너무 얄팍한 상상이지 않아? 오성욱은 내게 그렇게 속삭이기도 했다. 귓바퀴가 벌레에 물린 것처럼 간지러웠다.

 

말에도 이빨이 있을까. 말로 사람을 물 수 있다면.

 

오성욱은 ‘책임을 지겠다’는 표현을 썼다. 모든 일에서 손을 떼는 대신 나를 제 몫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망가진 내가 무작위로 가이딩을 퍼뜨리는 바람에 센터가 소란스럽던 때였다. 나는 이성을 잃은 전염병 환자처럼 돌아다녔다. 정말로 내 능력을 말살시키고 싶었다. 가이드의 능력은 마르지 않아. 게다가 경수 넌, 알지? 내리꽂는 폭포를 닮았다는 걸.

 

나는 미치광이 예술가의 말투를 흉내 냈다. 좆까. 살다 보면 언제가 반드시 건기가 와. 메말라 부서지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때가. 그때가 오면 꼭 산산조각 날거야. 산산조각 나서 다시는 모이지 않을 거야. 원형을 추측할 수 없는 조각이 될 거야. 누구의 추억도 되지 않을 거야. 시간을 꺾어서 달릴 거야. 아, 차라리 시간 여행자가 될래. 과거에 처박힐 수 있게 해줘.

 

넝마와 같이 퍼질러진 나를 오성욱이 일으켜 세웠다. 그가 나를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겨드랑이에 끼워진 그의 손이 따뜻했다. 주먹으로 그를 밀어냈다. 날개 달린 생물처럼 파닥였다. 괴로운 온기였다. 전 인류가 36.5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착한 사람에 대한 기만이었다. 나쁜 사람은 손도 발도 차가워야 옳았다.

 

-처박힐 과거는 있고?

 

저 오싹한 인두겁을 보라고.

 

오성욱의 선글라스에 내 얼굴이 반사됐다. 축하해, 내 전속 가이드가 된 걸.

 

부직포가 달린 리빙박스에 옷가지와 생필품을 챙겼다. 재난 가방보다 단출한 짐이었다. 움직임이 없는 기둥과, 식탁과, 서랍장과, 카페트와, 정수기와, 방문을…오래도록 응시했다. 가능만 하다면 크레인을 동원해 방 전체를 뜯어내고 싶었다. 테트리스의 한 줄이 사라지는 것처럼 감쪽같이.

 

아, 취소. 사라진다는 말은 금기어였다. 보이지 않는 것과 사라지는 건 달라. 헷갈리는 사람을 모조리 미워하기로 작정한 참이었다.

 

바퀴가 삐걱거리는 끌차 위에 짐을 올렸다. 테이프 찌꺼기가 지저분하게 남은 손잡이가 끈적거렸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플라스틱 데크가 무너질 것처럼 요동쳤다. 뿌리 없이 휘둘리는 삶에서 나는, 볼품없는 소음이었다.

 

볼품없는 귀양길에 김민석이 나타났다. 검은색 잉크가 담긴 양철통을 뒤집어 쓴 양 머리카락과 걸치고 있는 옷이 모두 까맸다. 조의라면 사절이었다. 이런 시발 조의라니. 나는 폭발 직전의 센티넬이나 다름 없었다. 내게 물리적 힘이 있었다면 진작 센터를 부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엔?

 

“오성욱이 뭘 할 줄 알고 거길 가.”

“신경 쓰지 마세요.”

 

건물을 무너뜨리고 잡초를 뽑고 제멋대로 자란 가지를 모두 잘라내도,

 

“나 이럴 자격 없는 거 알아.”

“알면 하지 마세요.”

“경수 씨 지금 변백현 죽인…”


“아.”

“…”

“닥쳐요, 제발.”

 

네가 없으면 어떡하지.

 

“…민석 씨가 저를 죽여주실래요.”

“…”

“오성욱은 괴팍하고 성질이 불같아서 저를 홧김에 죽여버릴지도 몰라요. 목 졸라 죽일 수도 있겠고 비밀리에 유통되는 극약을 제게 먹일 수도 있겠죠. 가능한 방법이야 많아요. 바깥은 살인보다 자살이 쉬운데, 여기는 왜 이렇게 혼자 죽는 게 어려울까요. 도와줄 사람이 오성욱밖에 없어서 가는 거예요.”

“…”
“그러니까 도와줄 게 아니면 비켜.”

 

죽으러 가는 사람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뿐이었다. 가본 적 없는 곳을 가지 말라고 회유하는 말에 힘이 없듯이.

 

달그락 달그락.

 

밀리듯이 걸었다. 사방이 낭떠러지였으면 좋았을 것을.


온종일 오성욱과 함께였다. 그는 나보다 일찍 일어났고 나보다 늦게 잠들었다. 처음엔 그를 속이기 위해 잠든 척을 했으나 몸을 바짝 숙이고 내가 잠들 때까지 코밑에 손가락을 대고 있는 그에게서 도망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옅은 잠에서 허우적대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일어났을 때도 오성욱은 깨어 있었다. 어디 가려고? 캐묻는 말투가 서늘했다.

 

나는 시시때때로 그의 화를 돋궜다. 교정이 불가능한 문제아처럼 행동했다. 이 애가 이렇게 된 원인을 모르겠어요. 이 반항아를 어쩌면 좋담. 내가 익힌 난폭함을 그에게 썼다.

 

그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내가 베개를 집어 던지면 베개 싸움을 거는 거냐며 신을 냈다. 내가 식탁의 음식을 모조리 바닥으로 떨구고 의자를 내팽개치면 생각보다 근력이 세다며 감탄했다. 나를 처치가 곤란한 소동물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보살폈다.

 

“손을 좀 더 구부리지 그래.”

“전 원래 뻣뻣합니다.”

“익숙하지. 말랑한 나무토막인 거.”

“…”

“그래도 좀 정성스럽게 해 봐. 하는 일이라곤 이것뿐이잖아.”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그가 요구하는 가이딩은 간단했다. 하루에 한 시간, 다섯 손가락을 맞대고만 있으면 되었다. ET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ET가 종을 넘나드는 교류라면 나와 오성욱은? 하기야 원수와 교감하는 것보다 기적이 있겠냐만은.

 

그가 화를 내는 경우는 딱 한가지였다.

내가 죽음을 꾀했을 때.

 

사람을 잘못 찾아왔다. 그가 센터에서 제일로 악독한 사람임을 간과했다. 그는 몇 번이고 지독한 생의 구렁텅이로 나를 집어 던졌다. 그것이 나에게 가장 큰 형벌임을 아는 사람처럼.

 


*

 


오성욱이 정자를 짓겠다고 말했다. 너와지붕을 얹은 원두막 형태가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마루는 우물마루로 해.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이라면 어차피 장마루가 아니라 우물마루였는데 굳이 강조를 했다. 해박해 보이고 싶었던 걸까? 그렇지만 아무도 오성욱을 높이 쳐주지 않았다. 끗발 약해진 감투에 고리짝 적 건물이라니. 어디 뭐 전원일기라도 찍으려나 봐. 비아냥이 난무했다.

 

별안간 저택 주변으로 정자를 만들겠다고 한 까닭은 간단했다. 여기 기운이 너무 약해. 높은 건물이 삥 둘러싸고 있어서 그런거지. 센티넬이니 가이드니 어차피 바깥에서 보면 허무맹랑한 소리겠지만 그래도 그것들에겐 실체가 있었다. 위압감을 주는 건물과 갇힌 사람들이 있었다. 까무룩한 시간이 있었다.

 

센터에서 웬 풍수지리? 각종 징크스-출정 전에 담당 가이드의 세 번째 손가락을 주무르고 나가야 한다, 형광 팬티를 입고 능력을 써야 한다 등등-를 목숨처럼 사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냉랭한 반응이 이어졌다.

 

그래도 감투는 감투였다.

 

그럼 그걸 누가 짓는데?

 

센터엔 기술자가 없다. 센터엔 요리사가 없다. 바깥보다 ‘뛰어남’이 판명돼 이곳으로 끌려왔지만 바깥의 원조없인 어떠한 생활도 영위할 수 없다. 이것은 분리보단 격리에 가깝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여기 있는 이들 모두 실은 아주 우둔한 변이를 겪게 된 병자가 아닐까. 집단으로 과대 망상증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모든 게 어쩌면 환상은 아닐까. 허무맹랑한 가정은 습관이 됐다. 어디로 보나 온전한 정신은 아니다.

 

할 일 없는 녀석을 부릴 거다.

듣고 있나. 도경수?

 

오성욱은 대뜸 내게 밀가루를 쥐여 주었다. 이것으로 정자의 외곽선을 그리라고 지시했다. 하라고 해서 뿌리기는 했으나 공간의 범위를 특정했다기보다는 그냥…봉지에 구멍이 뚫려 여기저기 밀가루를 흘린 꼴이었다. 오성욱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밀가루가 수북했다. 오성욱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멋진 시작이군 그래. 받은 밀가루의 반도 쓰지 못했다. 발로 밀가루를 짓이긴 오성욱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잘 한번 해보라고.

 

널따란 부지를 지켰다. 두툼한 광목천 가방에 담긴 밀가루를 한 움큼 쥐었다. 입안으로 마구 쑤셔 넣었다. 밀가루의 고운 입자가 원망스러웠다. 불순한 약물을 흡입한 것처럼 입가가 엉망이 됐다. 자연스러운 기침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생리 작용. 사는 것만큼이나 죽는 것도 힘들었다. 때로는 두 말이 동의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미 여러 방법으로 죽는 데 실패한 후였다. 제대 후 바로 발현이 돼 까까머리로 센터에 입소했던 센티넬 중 한 명이 바깥에서는 나 같은 종자를 관심사병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싫었다.

 

관심 가지지 마. 나를 어떤 것으로도 여기지 마.

 

“밀가루를 쑤셔 넣어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진작에 밀가루 센티넬 같은 게 있었을 텐데.”

“…”

“면박을 줘도 가만히 있네. 거슬리게.”

 

가까이서 본 오성욱은 생각보다 더 괴짜였다. ‘그 사건’ 이후로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말도 있었다. 사건이 사람을 만들 수 있을까. 많은 범죄자들이 그 말을 격언처럼 썼다. 추레한 변명에 손을 들어주기 싫었다. 나 역시 겪은 일로는 녹록지 않은 생애였다. 그러나 나는 뽐내지 않았다. 다만 차분히 죽을 길을 찾았다. 어떤 경험은 사람을 고장나게 만든다. 다른 길로 돌아가도 결국 그 지점을 서성거릴 운명. 해결책을 찾는 것은 우스운 전략이다. 빨리 인정하는 것이 도리어 편하다.

 

“밀가루 양을 확 줄였어. 어차피 포대자루로 갖다 줘도 죽지는 못 하겠지만.”

“이걸로 뭘 할 수 있는데요.”

“글쎄. 산타할아버지 분장?”

“정자를 지으려면 자재와 공구가 필요합니다.”

“나무야 많지.”

 

오성욱의 답변에 한숨이 나왔다. 당신에게 가장 익숙한 단어가 있다면 ‘적재적소’일 텐데. 원두막을 짓는 데 사용되는 나무는 따로 있다고.


“아무거나 쓰는 게 아닐 겁니다.”

“그럼 쓰지 마.”

“네?”

“설마 정말로 지으려고 한 거야?”

 

그렇지. 그는 ‘적재적소’를 아는 남자다.

 

“머리 굴리지 말라고 주는 거야.”

“…”

“경수 군 대가리엔 못된 생각만 가득 하잖아.”

 

온종일 거무튀튀한 음영 속에서 산다. 배터리가 나간 LED 전지 같다. 빨간색 주황색 초록색 노란색 파란색 누르는 대로 번쩍거리던 나는 없다. 뭉툭한 젓가락으로 마구 찔러도 영영 익지 않는 닭고기인 양 미동 하나 없이 버틸 자신이 있다. 이런 종류의 자신감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산 사람들은 찾을 수 없는 단어일 것이란 예감만 든다.

 

이래서야 경수 군 한테 가이딩 받겠어?

찝찝하잖아.

 

내 일상은 여전히 심플했다. 오성욱의 가택에서 기상한다. 멀쩡하게 기상하는 것이 나의 첫 번째 숙제다. 방에 있는 모든 가재도구는 나를 다치게 할 수 없도록 크기가 작고 소재가 부드럽다. 방 앞으로 배식된 식사를 마치고 나면 구석의 라탄 바구니에 손이 간다. 그 안에는 내게 허용된 몇 가지의 사물이 들어있다. 내가 루머에게 선물했던 책 또한.

 

뾰족한 모서리를 가진 것들은 모조리 빼앗기던 때에도 그 책만큼은 지켜 내었다. 오성욱이 나를 윽박질렀다. 나는 처음으로 오성욱에게 두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저는 책으로 무언갈 죽이지 않아요. 그게 저라도요.

 

몇 시간 정도 모래밭에 밀가루를 뿌리고.

 

“오늘 보니까 자세가 능숙하던데.”

“…”

“그거 뭐더라. 씨 뿌리는 명화 있잖아.”

“씨 뿌리는 사람이요?”

“그래, 그거.”

“절 보고 명화를 떠올리시다니. 영광이네요.”

“그런 말은 좀 다정하게 해.”

“저는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어요.”

“가이딩도 야매로 배워놓고 잘만 하면서.”

 

저녁을 해결하고 나면 오성욱의 방으로 간다. 오성욱의 방에는 늘 이끼색 벨벳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그 앞에는 아무것도 올려두지 않은 스테인리스 콘솔이 있고. 내 자리는 침대 근처의 스툴이다. 내가 N극이고 스툴이 S극인 것처럼 빠르고 신속하게 앉는다. C자형 모양의 스툴은 오성욱이 직접 골랐다고 했다. 나는 그런 얘기를 듣는 것이 버거웠다. 오성욱을 가이딩 하기위해 손을 내미는 것보다 더욱.

 

“경수 군은 내가 정말 끔찍한가 봐.”

“…”

“가이딩이 매번 따갑네.”

“…”

“따가운 경수 군을 위해 준비했어.”

 

오성욱이 건넨 것은 미니 태블릿이었다.

 

“이제 여기에 일기를 쓰는 거야.”

 

저번에는 연필과 종이였다. 내가 틈만 나면 연필로 손목을 내리찍으려고 하는 바람에 압수 당했고.

 

그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굳은 얼굴로 엄포를 놓았다. 알지? 난 돈이 많아. 그리고 이것으론 몸에 흠집 하나 내기도 어려울 테지. 제일 가볍고 둥근 모델로 골랐거든. 화면을 켜보니 적색의 사막이 배경에 깔려 있었고 설치된 앱이라곤 다섯 종류의 메모장이 다였다.

 

사진과 글을 함께 적을 수 있는 것. 글만 적을 수 있는 것. 600자의 제한이 있는 것. 폰트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것. 나는 손가락으로 모래 구덩이 가운데를 문질렀다. 사막이 진동했다. 금세 흥미를 잃었다. 나로서는 이해가 가질 않는 명령이었다.

 

센터의 모든 정보는 오성욱을 거쳤다. 개중에서도 가치가 있는 학술자료라면 더더욱. 내가 어깨너머로 배운 센티넬과 가이드에 대한 지식은 오성욱이 이미 익힌 것에 비하면 갓난아기 수준일 텐데.

 

뻣뻣하고 무뚝뚝한 내게 그가 탐낼 만한 것이 있나? 그가 지금 내 옷을 벗기고 강제적인 가이딩을 꾀한다고 한들 내게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건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그가 틀어쥔 폭권이 어째서 나만은 비껴가는가.

 

“어떻게 하면 써주겠어?”

 

오성욱이 나와 무려 ‘협상’을 시도했다. 말꼬리를 떠는 게 꼭 애원하는 것처럼 들렸다. 바깥이나 센터나 높으신 분들이 연기에 소질이 있는 건 매한가지구나. 조소를 참았다. 기득권이 목소리를 내리깔 때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저 밑바닥의 너절한 욕망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돈이라면 푼돈을 꽂아주고 혁명이라면 목을 치기 위해서. 그러나 나는 둘 다에 뜻이 없었다.

 

“변백현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세요.”

“…”

“왜곡돼있어도 괜찮아요. 험담도 상관없습니다. 가급적이면 제가 모르는 이야기였으면 좋겠어요.”

“…”

“그 애가 보고싶어요.”

 

클론같은 경비원들이 들이닥치리라 예상했다. 내 머리칼을 쥐어 뜯고 내 얼굴에 침을 뱉을 줄 알았다. 변백현이 오성욱의 역린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오성욱은 대답 없이 제 소맷단을 돌돌 말아 접었다. 미동 없는 선글라스를 눈두덩이로 밀어 넣었다. 나를 지나쳐 침구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바짝 붙은 협탁을 열었다. 인도의 노점에서 샀을 법한 현란한 패턴의 보자기를 풀었다. 촘촘하게 꿰인 매듭에 작은 은색 물고기가 달린 팔찌가 들어있었다. 오성욱이 팔찌를 흔들었다. 아이를 달래려 딸랑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움직임이었다.

 

“꼬박꼬박 쓰면 이 팔찌에 얽힌 얘기를 해주지.”

“거짓말을 하시는 거라면요.”

“거짓말이라도 듣고 싶은 거 아니었어?”

“…”

“얼른 켜.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내가 고른 것은 무지 노트 형태의, 준비된 것 중 가장 간단한 앱이었다. 비읍. 한 글자를 누르고 멈췄다. 오성욱은 여태 나를 몰아세웠던 것과 다르게 침착한 자세로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모습이 꼭 벼락을 맞은 수도승 같았다.


무엇을 적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하루를 기록하는 데 그쳤다. 깨어난 시각과 먹은 것을 적었다.


“일기를 적으라고 했더니 레포트를 제출하고 있네.”

“양식도 정해주시는 건가요.”

“아니야, 하던대로 해.”

 

팔찌에 관한 얘기가 빚으로 남아 있다.



*

 


“구멍을 파야 합니다.”

 

밀가루를 뿌리는 일이 지겨워졌다. 아무리 밀가루를 뿌려도 평평한 바닥은 그대로였다. 이 시간에 씨앗을 뿌렸으면 새싹이라도 났을 텐데. 일한 만큼의 수확을 얻어야겠다는 지극히 건강한 욕구는 아니었고. 밀가루를 뿌리는 것 말고 다른 일을 해봐도 좋을 것 같았다.

 

“왜, 이번엔 그 안으로 빠져 죽으려고?”

“구멍 안에 빠진다고 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내가 밖에서 먹이고 달랠 거니까.”

 

오성욱은 종종 저런 투로 말한다. 겁 많은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처럼. 약점이 많은 애인을 지키는 것처럼.

 

‘그 사건’으로 오성욱이 변했다고 말할 때 대개 그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권력자의 몰락을 모두 즐겁게 관람했다. 수족처럼 부리던 인력은 주인이 더는 주인 행세를 할 수 없게 되자 자취를 감췄다. 나는 군중의 마지막 열에 서 있었다. 혼란한 눈빛으로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었다. 때리는 대로 맞았다. 솜방망이 같은 주먹. 기어코 아무는 상처들. 끈 떨어진 오성욱에게 끌려 오면서 했던 생각은 딱 하나였다. 오성욱이 단번에 내 숨을 끊어주기를.

 

“구멍을 파면. 그 다음엔 뭐야.”

“나무를 꽂아야겠죠.”

“꽂을 나무는 있고?”

“…구해다 주시는 거 아니었나요.”


그러나 그는 나를 살뜰히 보살폈다. 욕을 하면 웃었다. 욕을 하지 않아도 웃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던지면 벌겋게 달아오른 제 피부는 안중에도 없이 내 손톱과 발톱이 깨지지 않았는지를 확인했다.

 

“너야? 미스 오가 물고 빠는 녀석이.”

 

나무를 세워 넣을 구덩이의 높이를 가늠하고 있을 때 웬 녀석이 말을 걸었다. 품에 딱 맞는 슬랙스를 입고 머리를 터는 모습에서 바깥의 기운을 느꼈다. 녀석은 내 눈동자를 거울로 쓰려는 것처럼 얼굴을 들이밀었다. 개구진 웃음이 잘 어울렸다. 뭐야, 겁먹은 거야?

 

물고 빤다니. 오성욱과 내게는 어울리지 않는 친밀한 수사였다.

 

“너 맞는 거 같은데. 미스 오가 입술 부르트도록 얘기한.”

“…”

“근데. 생각보다 멀쩡하다. 미스 오가 걱정 많이 했거든. 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

“하긴. 나라도 돌지. 내 애인이 죽었…”

 

발로 바닥을 힘주어 긁었다. 모래 알갱이가 튀며 녀석의 바지를 더럽혔다. 삭일 수 없는 슬픔으로 손끝까지 저릿해졌다. 이 주제에 관해서, 눈물은 불가항력이었다. 이 주제에 관해선, 아무도 나를 타이를 수 없었다. 단 한 명을 빼고.

 

아, 변백현.

 

한마디라도 해. 아니, 한 음절이라도. 아니, 숨소리라도. 내게 안 들려도 돼. 안 들려도 좋으니까 네가 말을 하고 있다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면.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들고 있다면.

 

이것은 전부 거짓말.

 

나도 너의 일기가 간절해. 기상 시간과 취침 시간만 적혀 있어도 만족할 수 있어.

 

“…너 먼저 들어가.”

 

오성욱이 나를 끌어안았다. 이래서야 센터 사람들에게 여우 같은 끄나풀이란 비방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오성욱은 나를 살뜰히 보살폈다. 욕을 하면 웃었다. 욕을 하지 않아도 웃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 던지면 벌겋게 달아오른 제 피부는 안중에도 없이 내 손톱과 발톱이 깨지지 않았는지를 확인했다. 뒤척이는 내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멀쩡하게 눈을 뜨고 있다는 사실이 버거워 거꾸로 몸을 돌려 누우면 내 손목에 손을 대고 맥박을 확인했다. 젖은 베개를 빨아 주었다. 밀가루가 허옇게 뭉친 내 입가를 닦아 주었다. 더는 내게 누구도 꺼내지 않는 변백현 얘기를…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경수 군. 방금 얘긴 못 들은걸로.”

 

내게 한 번도 변백현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허술한 희망에 기대어,

자주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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