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핑계로 집 밖은 커녕 지하실에 있는 작업방에서조차 잘 나오지 않는 아펠리오스였지만 급한 일이 있으니 자신을 대신하여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와달라는 여동생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평소 그녀가 자신을 대신하여 많은 것을 희생하고 도와주는지를 생각해본다면 알룬의 부탁은 거의 명령과 같은 압박감을 주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겠지만, 아펠리오스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추운 날 집에서부터 꽤 거리가 있는 가게에 다녀오라는 심부름을 시킬 리 없으니까.

어깨 위에 대충 얹어져 있는 가디건만으로는 집안에선 느낄 수 없었던 야외의 차가운 바람을 막아낼 수 없었다. 오랜시간 집안에서만 머물러 있었던 탓에 날씨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제와서 집으로 되돌아가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기에는 이미 먼 거리를 나와버린 후였다. 빠르게 물건을 사고 돌아가는 편이 훨씬 나아보였다. 어깨를 잔뜩 웅크리며 아펠리오스는 다짐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물건을 집고, 계산을 하고, 곧바로 집으로 뛰어들어가자고.

완벽해보였던 그의 계획은 첫번째 단계에서부터 막혀버렸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알아낸 알룬이 좋아하는 간식거리까지의 최단거리를 한달음에 걸어갔으나 예상치 못한 문제점에 부딪히고 말았다. 가득 채워져 있어야 할 진열대는 굴러다니는 먼지가 눈에 보일 정도로 텅 비워져 있었다. 이 가게를 이용한 이래로 처음 겪는 일에 아펠리오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상품의 위치가 바뀐 건 아닌지 확인해보기 위해 가게 안을 세 번이나 돌아봤으나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아펠리오스가 원하던 상품은 지금은 비워져버린 그 진열대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한가하게 계산대에 앉아 핸드폰이나 하고 있는 직원에게 새로운 상품을 꺼내어달라고 부탁하거나, 진열대 가장 위쪽에 보일듯 말듯 걸쳐져 있는 딱 하나 남은 상품을 꺼내거나.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대결절로 인한 수술 이후 아펠리오스는 목소리를 잃었다. 속삭이는 정도의 대화는 가능했지만 그 이상의 큰 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속삭이는 대화조차 오랜 시간 지속하지 못하는 아펠리오스에게 그의 사정을 모르는 직원과 말을 섞는 것은 목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고통은 순간적으로 온몸의 감각을 모두 빼앗아갈 정도였기에, 아펠리오스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따라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신장보다 두 뼘은 더 높아보이는 진열대 맨 위칸으로 손을 뻗어야만 했다. 눈대중으로 대충 거리를 가늠해보았다. 까치발을 들고 손을 최대한 길게 뻗는다면 아슬아슬하게 닿을 것 같기도 했다. 시도해볼까? 가디건 주머니 안에 쑤셔넣었던 손을 꺼내며 진열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금방 포기했다. 진열대 받침대의 끝이 조금 튀어나와 있는 형태라 손가락 끝으로 물건을 끌고 온다 해도 끝부분에 걸려 움직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낭패였다. 자주 가는 가게에서 물건을 사오는 일 정도는 간단할 것이라고 알룬도, 아펠리오스도 쉽게 생각해버렸다. 그 누구도 이런 불상사가 생길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진열대 위를 쳐다본 후, 아펠리오스는 고개를 돌렸다. 굳이 애를 써가면서까지 저것을 손에 넣을 이유는 없었다. 알룬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긴 했지만 저걸 사오라고 콕 집어 얘기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찬바람을 맞은 탓인지 몸이 으슬으슬 떨리기 시작했다. 감기에 걸릴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목을 보호해야 하는 아펠리오스에게 강한 기침을 유발하는 감기는 위험했다. 알룬에게는 미안하지만 대충 다른 것들을 사서 빠르게 집으로 돌아가기로 다짐했다.

"저, 저기..!"

다른 진열대로 이동하려는 아펠리오스의 어깨를 누군가가 강하게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거의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아펠리오스가 화들짝 놀라는 것을 느낀 것인지 어깨를 붙잡은 손은 금방 떨어졌지만 튀어나올듯 요동치는 심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본능적인 반응으로 고개를 돌리자 단단한 무언가에 이마를 부딪혔다.

"헉..! 괜찮아..?!"

183cm의 신장은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작은 키는 아니었기에 어딘가에 이마를 부딪히는 경험은 흔치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고통보다는 충격이 더욱 컸다. 이마를 비비며 눈 앞에 있는 것의 정체를 알아내려 빠르게 두 눈을 굴렸다. 평소 봐왔던 것과는 많이 다른, 자신이나 알룬보다는 조금 짙은 색의 피부를 가진 동그랗고 툭 튀어나와 있는 부분이 코와 맞닿기 직전임을 깨닫는 순간 낯선 사람의 체향이 강하게 밀려들어왔다. 약간의 땀냄새와 그것을 가리기 위해 뿌렸을 것이 분명한 향수 냄새.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숨을 멈춘 후에도 이름 모를 과일의 달콤한 향은 코 끝을 맴돌았다.

"미안. 다치진 않았지?"

머리 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려왔다. 과장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내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언가에 이마를 박은 것도 모자라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목소리를 듣는 날이 오다니. 항상 가득 채워져 있던 진열대가 비워져 있는 것만큼 충격적이었다. 오늘따라 왜이리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인지.. 아펠리오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다름이 아니고.. 이거."

잔뜩 찡그린 얼굴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그 시야 안으로 익숙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어둠의 꽃 정수로 만든 약과. 알룬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그제서야 아펠리오스는 고개를 들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높게 고개를 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과 눈을 마주친 순간 아펠리오스는 세상이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진열대의 상품을 돋보이기 위한 밝은 조명 아래에서 붉은 머리는 거의 불타듯 반짝이고 있었다.  발광체도 아닌데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듯한 모습에 눈이 부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보다 놀라운 점은 그 현란한 머리 색에도 불구하고 남성의 이목구비는 그 빛에 묻혀보이지 않고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는 점이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남자는 아펠리오스가 봐왔던 그 누구보다도 붉은 머리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넋을 놓고 있으니 그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었다. 시선을 피하고 입술을 달싹이며 굳은 침을 삼키는 것을 보고 나서야 너무 오랜 시간동안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펠리오스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너무 무례한 행동이었다며 스스로를 탓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추위에 떨던 온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 후끈거렸다.

"아까 보니까 이거 찾고 있는 것 같길래.."

하며 남자가 다시 한 번 들고 있던 간식을 건네주었다. 아펠리오스는 천천히, 신중하게 손을 뻗었지만 작은 상자에는 성인 남성 둘의 손바닥이 겹치지 않게 모여있을 공간이 없었다.  남자의 손가락과 상자의 감촉을 동시에 느끼며 아펠리오스는 아주 오랜만에 신께 기도를 올렸다. 제발 이 남자가 자신의 손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뜨겁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기를.

"오지랖이었으면 미안. 그.. 부딪힌 것도.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머리 위에 얹어놓았던 헤드셋이 벗겨질 정도로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위해 진열대 위로 손을 뻗어준 은인이 사과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가슴에 (워낙 탄탄하고 거대했기에 어깨일거라 생각했지만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자세로 보아 아펠리오스가 부딪힌 것은 그의 가슴이 분명했다.) 부딪힌 것도 자신이 성급하게 움직인 탓이었다. 고맙다는 말이나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성대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얼굴에 열이 올라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는 아펠리오스를 남자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무언가를 원하는 듯 했지만 아펠리오스는 그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다. 아니, 줄 수 없었다. 수화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상대방이 수화를 모른다면 분위기만 더욱 이상해질 것 같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그렇게 침묵만이 흐르자 결국 붉은 머리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 맛있게 먹어!"

근처에서 느껴지던 누군가의 기척이 사라지고, 발걸음이 점점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나서야 아펠리오스는 고개를 들었다. 남자는 커다란 신장만큼 넓은 발폭으로 빠르게 걸어나갔다. 잠시 망설인 사이에 이미 손으로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소리를 내어 부른다면 돌아봐줄까? 그러나 아펠리오스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작은 속삭임이 전부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알룬조차 이 정도로 먼 거리에서는 그의 속삭임을 들을 수 없었다.

사실 붙잡으려면 붙잡을 수 있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긴 했지만 남자는 아직 시야 안에 들어오는 거리에 있었고, 뛰어가듯 다가가 그를 붙잡는다면..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그냥.. 누굴 좀 도와주고 왔어."

"흐음.. 왜? 누가 또 스토커한테 쫓기고 있었대?"

"하하, 설마 너도 아니고."

건너편에 있던 초록머리의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자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조금 전 자신에게 보여줬던 미소와는 확연히 다른 표정이었다. 편안하고 즐거워보였다. 문득, 아펠리오스는 자신에게 목소리가 없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큰소리를 남자를 불러세우고, 그에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았다면 초록머리의 남자와 어깨동무를 한 채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봐야 했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괜찮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온기를 잃고 차갑게 식어버린 상자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꿈 같은 짧은 인연이라고 생각했던 그 남자와 정확히 30분 뒤 다시 만났다. 실연의 아픔을 정리하기도 전에 찾아온 재회는 반갑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오빠 SNS를 보고 사람들이 찾아왔어. 같이 작업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한 번 얘기라도 해봐."

하며 알룬이 소개시켜준 사람은 방금 전 가게에서 만난 바로 그 남자였다. 눈이 마주치고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아펠리오스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제대로 된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기침을 하는 척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조심스럽게 더듬어보았다. 광대나 입꼬리가 수상할 정도로 올라가 있진 않은지, 불이라도 붙은 것마냥 얼굴이 타오르고 있진 않은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알룬에게조차 한소리를 들을만큼 무덤덤한 표정이 제대로 유지되어 있기를 바랐다.

"이즈리얼이야. 만나서 반가워!"

남자의 뒤에서 튀어나오듯 고개를 내민 사람 또한 가게 안에서 봤던 사람이었다.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초록빛의 머리카락은 한 번 보면 잊기 어려운...

이즈리얼? 아펠리오스는 크게 뜬 눈으로 빠르게 그를 위아래로 여러 번 흝어보았다. 갑작스러운 아펠리오스의 행동에 그는 당황한 듯 뒤로 살짝 물러섰지만 화를 내거나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그와 시선을 맞춰주었다. 언뜻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행동 익숙하다는 듯 받아준 그의 배려 덕에 아펠리오스는 눈 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그' 이즈리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U R my muse' 는 아펠리오스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들 중 하나였다. 그 짧은 노래 한 곡이 아펠리오스의 작업에 준 영향은 하루 밤낮을 세워도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만나보고 싶다 염원하던 우상을 눈 앞에 둔 아펠리오스는 거의 기절할 것만 같았다. 사인과 악수 중 무엇을 먼저 부탁할까 고민하려는 순간 문득, 그의 머리카락 색이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많이 놀랐나본데? 너도 말 좀 해봐. 나는 이런거 잘 못한단 말이야."

"..나? 나보다는 너 아니야? '초' 유명인이시잖아."

"제발 조용히 좀 해..! 자기소개라도 해보던가! 지금 분위기 진짜 이상해지고 있잖아."

"아.. 그게..."

자신을 슬쩍 내려다보는 남자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아펠리오스는 여전히 이즈리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시선을 돌리면 헤어진 옛 연인을 바라보듯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을 한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아펠리오스는 충격에 사로잡혀 움직이지 상태였다.

"...세트라이라고 해. 편하게 세트라고 불러줘."

"나, 나도 편하게 이즈라 불러도 돼..!"

아펠리오스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단순히 존경하던 우상을 만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처음 보는 남자에게 첫눈에 반하고, 그 남자와 가까워보이는 누군가에게 질투를 했는데, 그 질투의 대상이 알고보니 자신이 존경하던 우상이었다는, B급 로맨스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상황을, 자신이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밀려오는 부끄러움으로 인해 얼굴이 달아올랐다. 목소리를 잃어버린 이후 지하실에서 음악 작업만 해오던 아펠리오스는 사랑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사랑에 영감을 받아 음악을 만들었다는 사람을 볼 땐 약간 흥미가 생기긴 했으나,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조차 없었다. 알룬과 함께 본 각종 드라마와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사랑의 이미지는 복잡하고, 난잡하고, 추잡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남몰래 다짐하기까지 했는데.. 아펠리오스는 처음 겪은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우상을 질투하고 시기해버렸다.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인지 몰랐다. 스스로 깨달아버린 추태를 견디지 못한 아펠리오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치듯 지하 작업실 안으로 달려 들어가 문을 잠갔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모르는 척 대답하지 않았다. 무서운 것을 본 어린아이처럼 침대 위에 엎드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부끄러웠다. 눈을 감았다 뜨면 이 모든 일이 꿈이었기를 기도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도망쳐나온 자신의 행동은 분명 무례했으며,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것이 분명했다. 최악의 첫인상을 보였으니 함께 작업을 해보자는 제안은 없었던 일이 되겠지. 아펠리오스는 아주 오랜만에 세상이 끝나버린 듯한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 절망감의 가장 큰 원인이 세트라는 붉은 머리의 남자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오랜만에 휘몰아치는 감정을 그대로 놔주긴 아까웠기에 이왕 이렇게 된 거 새로운 작업을 시작해야겠다며 컴퓨터 앞에 앉은 순간 어둠의 꽃 정수로 만든 약과를 가득 담은 접시를 든 알룬이 지하실에 찾아왔다.

"벌써 작업하는거야? 생각보다 빠르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알룬 또한 표정을 구겼다.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만 갸웃거리다 언제나 그렇듯, 알룬이 상황을 정리해주었다.

"지하실에서 올라온 후에 나한테 그랬거든, 아무래도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 같으니 조금 더 준비한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아직 곡의 방향도 안 정해졌겠구나. 싶었는데 작업을 시작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놀랐어."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다고?]

"응. 언제가 괜찮은지 시간까지 물어보고 갔으니까 조만간 다시 올 것 같은데?"

이런 무례한 사람과는 같이 작업할 수 없다며 화를 내고 갔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반응을 보이고 갔다고하니 아펠리오스는 멍한 표정으로 여동생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알룬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고... 꿈이라도 꾸고 있는건가 싶어 두 손으로 뺨을 가볍게 꼬집어보았다. 아팠다. 그것도 엄청.

"그나저나 이즈리얼을 실제로 보니까 어때? 오빠, 그 사람 엄청 좋아하잖아! 존경하던 사람과 같이 작업할 수 있는 날이 오다니..! 내 말 듣고 SNS에 작업 영상 올리길 잘했지?" 

작업실 한 쪽 벽에 붙어있는 이즈리얼의 포스터를 보며 알룬이 말했다.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방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이즈리얼에 대한 칭찬과 기대를 잔뜩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핑계를 대긴 했지만 알룬 또한 이즈리얼의 팬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래.. 저게 당연한 반응인데.. 알룬은 서랍 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이즈리얼의 앨범을 꺼내며 다음에 다시 만나면 싸인을 받아야겠다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즈리얼의 두 번째 방문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펠리오스는 그런 알룬을 보며 더욱 강한 확신을 얻었다. 그의 심장이 뛰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이유는 알룬과 달랐다. 그녀가 자신이 열심히 모아둔 이즈리얼 굿즈들을 한아름 들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도 화가 나지 않는 것이 그 이유의 증거였다.

세트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아펠리오스를 설레게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스럽게 했다. 되돌려 주지 않을 상대에게 무한정 사랑을 줄 자신이 없었다.






"얘기 들었어. 목소리가 잘 안 나온다며?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하... 미안."

처음 봤을 때보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풀이 죽은 듯 기운이 없어보였다. 180cm가 넘는 아펠리오스조차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올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거구의 남성이 어깨를 잔뜩 움추린 채로 시무룩해져 있는 모습은 문장으로만 묘사한다면 어색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꽤나 귀여워보였다. 작게 움찔거리는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도, 중력에 따라 잔뜩 흘러내려와 있는 두 귀도, 힐끔거리며 자신을 쳐다보는 두 눈동자도 전부 사랑스러웠다. 모니터에 비추어진 세트의 모습을 본 아펠리오스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괜찮다고 위로를 건네고 싶어졌다.

안돼! 그에게 휘둘리지 않겠다고 다짐했잖아!!

세트는 보지 못할 각도에서 허벅지를 세게 꼬집어댔다. 생각보다 큰 고통에 눈물이 핑 돌았지만 최대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사용하지도 않으면서 일부러 잔뜩 띄워둔 프로그램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작업에 집중하는 척 연기했다. 시야 끝에서 붉은 머리카락이 연신 찰랑거리는 것이 보였다.

아니.. 머리카락이 아니라 귀인가.. 자신의 것과 다른, 동물의 귀처럼 복실한 털을 가진 세트의 두 귀는 단순히 소리를 듣기 위한 기관이 아닌 것 같았다. 쉼없이 움직이면서 현재 그의 기분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중력에 따라 잔뜩 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지금은 기분이 그닥 좋지 않은 듯 했다. 표정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까지 꺼내 쓴 자신과는 정반대였다.

"그래도 난 다른 사람들보다 청각이 좋은 편이니까!"

하는 문장과 동시에 세트의 두 귀가 쫑긋거리며 움직였다. 만져보라는 듯한 움직임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튀어나갈 뻔한 두 팔을 막기 위해선 온몸이 경직될만큼의 힘을 주어야만 했다. 턱에도 힘이 들어가 어금니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마스크를 끼고 있길 정말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해주었다.

"너가 속삭이는 소리도 잘 들을 수 있을거야. 뭐, 네 여동생만큼은 아니겠지만."

세트의 얼굴은 쳐다도 보지 않겠다는 아펠리오스의 각오는 그렇게 무너져내렸다. 자신감을 잔뜩 담아낸 미소는 더 이상 그에게 흔들리지 않겠다며 밤을 새도록 다짐하고, 계획한 아펠리오스를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고작 미소였다. 마음을 가득 담은 고백도 아니고, 화려하고 비싼 반지도 아닌, 사람 좋은 그가 숨쉬듯이 달고 다니는 미소 하나에 아펠리오스의 모든 각오가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거라지만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세트의 미소에 홀려버린 아펠리오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로 쿡쿡거리다 그 사실을 깨달았다.

수업시간에 장난을 치다 걸린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았다. 커다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트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 말도 없이 두 눈만 껌뻑이고 있는 것이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어쩌면 자신의 웃음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비웃을 생각이 아니었다는 변명을 하고 싶었으나 마스크로 입모양을 가리고 있던 탓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다급하게 책상 위를 뒤적거렸으나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알아주는 알룬과 함께 사는 집에 필기구는 오히려 짐이었다. 온갖 잡동사니들로 가득한 책상은 언제나 자리가 부족했다. 결국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세트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피할 때까지 작은 연필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급한 마음에 입모양이라도 봐주길 바라며 마스크까지 내렸지만 세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 두 번째 방문인 세트가 이 집의 화장실 위치를 알고 있을 리 없었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말은 핑계가 분명했다.

기분 나빴겠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대를 위해 배려해주었는데, 곧바로 비웃음을 당해버리면 그 누구라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처음 가게에서 만났을 때, 함께 작업을 하자며 찾아왔을 때, 그리고 지금. 실수라며 넘어갈 수 있는 세 번의 기회를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이제는 진짜로 그와의 관계를 그만둬야만 할 때가 온 것이다.












오랜만에 저녁이나 먹자는 연락을 받고 서둘러 운동을 마쳤다. 그와의 저녁식사가 기대된다기보단 쓸쓸하게 혼자 대충 때울 예정이었던 차에 약속이 생긴 것이 반가웠다. 녀석은 워낙 기분파에, 주변에 아는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시간을 오래 끌어버리면 금방 또 사라져버릴 것이 분명했다.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겠다는 문자에 재빨리 답장을 보내며 헬스장을 빠져나왔다.

"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너 때문에 마무리 런닝도 못하고 나왔으니까 책임져라. 그래서, 뭐 먹을건데?"

급하게 달려온 탓에 조금 흐트러진 숨을 정리하며 이즈리얼 앞에 놓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음료도 시키지 않고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조금 양심에 찔렸지만 금방 나갈테니까 괜찮겠지. 생각했다. 그러니 이건 절대, '주문도 하지 않고 가게 자리를 차지하는 건 예의없는 행동이니 조심하렴.' 이라는 어머니의 말을 거스른 것이 아니었다.

그래, 금방 일어나기만 한다면... 눈이 마주쳐버린 카페 직원에서 가벼운 눈인사를 한 뒤 금방이라도 나갈 것처럼 엉덩이를 들썩였다. 지금 당장 나가도 눈치가 보이는 상황임에도 이즈리얼은 여전히 핸드폰만을 바라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얼른 일어나자는 뜻을 담은 헛기침을 해보았지만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의미 없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대체 뭘 하고 있는데? 빨리 나가자. 카페 직원이랑 눈싸움하기 직전이라고..!"

"잠깐만 기다려봐. 이제 곧 넘어올 것 같으니까."

넘어온다니? 바쁜 사람을 불러들인 주제에 자기는 연애질이나 하고 있는 건가 싶어 허락도 없이 그의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즈리얼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손놀림으로 누군가와 문자를 하고 있었고, 그 상대는 바로..

"아펠리오스???"

"응. 같이 저녁 먹자고 꼬시는 중이야. 귀찮아서 안 나온다는데 어림도 없지!"

하며 이즈리얼은 이모티콘과 우는 얼굴을 닮은 초성으로 가득한 문자를 한 번에 다섯 개씩 보내고 있었다. 답장도 없을 사람한테 너무 심한 거 아니냐며 한마디 하려는 순간 이즈리얼의 문자가 잔뜩 쌓여져 있는 반대쪽에서 문장 하나가 튀어나왔다.

[지금 출발하기엔 너무 늦은 것 같은데...]

본인을 나타내라고 만들어둔 공간이 비어있어 쉽게 믿을 수 없었다. 이름만 같은 사람일 수도 있잖아. 스스로 생각해보기에도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세트는 차라리 이 헛소리가 진실이길 바랐다.

"진짜 아펠리오스야?"

"그럼 가짜 아펠리오스도 있나?"

이즈리얼에게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뭐하는 짓이냐며 소리치며 팔을 휘젓는 이즈리얼을 가볍게 피한 뒤 두 사람이 주고 받은 문자 내역들을 쭉 흝어보았다. 손가락을 아무리 움직여도 스크롤은 끝 없이 이어졌다.

"줘봐! 조금만 더 꼬시면 넘어올 것 같단 말이야!!"

온 몸이 굳어버릴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았기에 이번에는 이즈리얼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얌전히 그에게 핸드폰을 돌려준 뒤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으며 카페 탁자 위로 쓰러지듯 엎드렸다.

밝고 깨발랄한 성격으로 누구에게든 쉽게 사랑받을 녀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성격이 세상에서 제일 덤덤해보이는 아펠리오스에게도 통할 줄은 몰랐다. 팀의 리더로서 멤버들끼리 사이가 좋아지길 바라긴 했는데.. 자신이 없는 곳에서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특히 아펠리오스는..

"너도 있다고 하면 바로 나오지 않을까? 마무리 런닝도 못하고 나왔으니 책임지라고 해봐야겠다."

"뭐?! 안돼!! 내가 있다는 말 절대 하지마!!"

"왜..? 어차피 오면 알게 될텐데.."

"그래도 말하지마! 진짜! 절대로!"

다급한 마음에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치자 주변에 있는 모든 시선이 세트에게 향했다. 당연하게도 카페 직원도 포함이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린 눈과 마주친 세트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즈리얼의 팔을 잡아당겼다. 대체 왜 그러냐는 이즈리얼을 거의 들쳐매듯 끌고 나오며 배가 고파 단 1초도 못 기다리겠다는 핑계를 댔다.

"와! 아펠리오스도 온대! 30분 정도 걸릴 것 같다는데?"

"잘됐네. 먼저 가서 간단히 뭐라도 먹고 있겠다고 해. 이러다 쓰러지겠어."

그러나 동네 사람들만 안다는 숨겨진 맛집 가장 구석진 자리를 차지한 세트가 가장 먼저 주문한 것은 간단한 주전부리가 아닌, 빈 속에 먹으면 다음날 영혼까지 털린다는 독한 술이었다.






따라서 급하게 달려온 티를 내듯 살짝 부스스한 머리로 나타난 아펠리오스와 눈이 마주쳤을 때 세트는 반쯤 취한 상태였다. 기분이 좋다 못해 살짝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였는데, 아펠리오스의 얼굴을 보자마자 뺨이라도 맞은 것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와~ 아펠이다!"

이미 잔뜩 빨개진 얼굴로 헤벌쭉 웃고 있는 이즈리얼을 보는 아펠리오스의 표정은 언뜻 보기에는 평소와 다름 없었지만 세트는 그가 작게 내뱉은 한숨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실, 실망했겠지? 문자에서는 팀 운영과 관련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암시를 잔뜩 던져놨기에 아펠리오스가 그들을 거짓말쟁이라 손가락질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세트는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조차 감추었으니 더욱 찔리는 점이 많았다. 죄책감을 가리기 위해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독한 술부터 들이마셨지만 전부 소용이 없었다. 술기운은 그의 얼굴을 본 순간 힘을 잃어버렸다.

"여, 여기 앉아..!"

위장에 남아 있는, 곧 사라질 술기운을 모두 끌어모아 용기를 내어보았다. 이즈리얼과 세트를 반갈아 쳐다보며 주춤거리고 있는 아펠리오스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평균보다 커다란 탓에 이미 의자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벽 쪽으로 몸을 웅크리며 억지로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공간은 누가봐도 좁아보였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세트가 가리킨 자리를 내려다보던 아펠리오스는 다시 한 번 이즈리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발! 제발, 가만히 있어! 술에 취해 헤롱거리는 이즈리얼을 노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로로 길게 뻗어있는 2인용 의자는 이즈리얼과 아펠리오스가 동시에 앉아도 넉넉할만큼 넓었으나 어디까지나 공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술에 취해 판단력이 흐려진 이즈리얼은 아펠리오스를 두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자리를 옮겨주지 않았다. 세트보다 얇다고는 하지만 아펠리오스 또한 180cm가 넘는 성인 남성이었다. 이즈리얼이 정중앙을 차지해버린 의자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수 없었다.

결국 아펠리오스는 세트의 옆자리를 택했다. 차마 금방이라도 창문 밖으로 튀어나갈 듯한 자세를 취하며 자신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준 세트의 배려를 거절하고, 테이블 위에 엎드린 채로 웅얼거리는 이즈리얼에게 자리를 내어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메뉴판을 찾아보는 척 쭈뼛거리며 천천히 세트 옆에 자리를 잡았다.

"...뭐 먹고 싶은거 있어? 아, 참고로 오뎅탕은 이미 주문했으니까 되도록이면 국물이 없는 걸로 시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친절하게 메뉴판을 쥐어주는 척 아펠리오스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평소보다 짙은 샴푸 향기가 났다. 자세히 보니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머리카락도 꽤나 많았다. 이제 막 씻고 나왔구나. 하긴 워낙 갑작스럽게 생긴 약속이었으니까.. 생각한 순간 고개를 돌린 아펠리오스와 눈이 마주쳤다. 엄한 짓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버렸다.

"아,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머리도 안 말리고 돌아다니면 감기 걸린다..!"

가만히 있었으면 반이라도 갔을텐데. 괜히 혼자 찔려 아무 말이나 내뱉은 탓에 허락도 없이 젖은 머리를 관찰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실이었지만, 모르는 척 넘어갈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 부끄러웠다. 아펠리오스는 보지 못할 각도에서 허벅지를 세게 꼬집어댔다. 세트의 말을 들은 아펠리오스가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기자 차가운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올랐고, 그 중에 일부는 세트의 얼굴에 닿았다.

이런 미친. 하마터면 욕을 할 뻔 했다. 아펠리오스의 머리카락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은 그의 향기를 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마자 온몸이 굳어버려 물방울들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펠리오스의 물방울. 사전적인 의미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의미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자제가 안되는 놈이었나? 수 십번을 찔러댄 허벅지에서 피가 나올 것 같았다.

창문 밖 차가운 공기를 마시면 정신이 돌아올까 싶어 고개를 돌리고 무게중심을 살짝 뒤로 물렸다.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는 이유는 분명 아펠리오스의 샴푸향이 원인일테니 그 향기를 멀리하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뭐, 뭐, 뭐야?!"

그런 세트의 마음도 모르고, 아펠리오스가 성큼 다가왔다. 자신의 팔뚝을 슬쩍 건들이는 조심스러운 손길에 두 귀를 천장을 향해 높게 세운 세트가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마음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식의 스킨쉽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아펠리오스를 바라보자 무덤덤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 아, 아..! 그, 그게 먹고 싶다고? 하.. 난 또..."

그럴 리 없다 생각했었음에도 자신도 모르게 기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가게 직원을 불러세우는 목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헛기침을 하고 찬물을 들이마셔보았지만 떨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기에, 세트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술병을 들어올렸다. 먼저 자신의 잔을 가득 채운 후 아펠리오스에게 흔들어보였다.

"마실 줄 아냐?"

그는 대답 없이 빈 잔을 손에 쥐어 세트에게 내밀었다. 온갖 술자리에 참여하는 이즈리얼조차 한 잔에 보내버릴 정도로 독한 술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마시겠다고 하는건가? 딱 봐도 호리호리하고 연약해보이는데 (적어도 세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한 입 먹고 뻗는거 아니야? 온갖 생각이 들었지만 아펠리오스의 잔을 채우는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보기보다 술에 약한 이즈리얼을 대신하여 자신의 술친구가 되어줘도 좋았고, 한 입 먹고 뻗어버린다면... 끊임없이 이어지는 엄한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그 독한 술을 한 입에 털어넣었다. 






예상 외로 승자는 아펠리오스였다. 시뻘개진 얼굴로 딸꾹질까지 해대는 세트와 다르게 아펠리오스는 몸에 열이 오른 듯 겉옷을 벗어던진 것 외에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아펠리오스가 오기 전부터 몇 잔 마셨고, 심란한 마음 탓에 평소보다 급하게 들이붓긴 했지만 이러한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3대 300도 못 칠 것 같이 생긴 녀석에게 주량으로 밀릴 줄이야. 술기운에 무거워진 머리를 그대로 테이블 위에 박으며, 세트는 절망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우리들끼리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보자 말이 나온 후부터 함께 작품 활동을 할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디지털보다는 아날로그가 편했기에 말 그대로 이리저리 발로 뛰어다니던 세트가 SNS에 올라온 영상을 본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짧게 보고 넘겨버린 그 영상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버렸고, 충동적으로 그 영상을 올린 계정에 연락처를 남겼다. 최근 헬스장에서 만난 크산테라는 녀석에게 합류를 권하던 중이었기에 답장이 오지 않아도 크게 손해 볼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외로 계정의 주인에게서 친절한 답장이 왔고, 영상 속 음악을 만든 사람은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직접 만나서 얘기하는 편이 빠를 것이라 했기에, 그 다음날 곧바로 그에게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빈 손으로 가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다는 이즈리얼의 말에 급하게 들어간 동네 가게에서 아펠리오스를 만났다.

처음에는 복도 한 가운데에 서서 길을 가로막고 있는 이상한 녀석이라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니 비키라고 한 마디 할까 고민했지만 자신의 동네도 아니니 적당히 무시하고 지나가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어느새 저 멀리 나아가버린 이즈리얼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무언가를 다짐한 표정으로 진열대 가까이 다가갔다가 이내 곧 한숨을 쉬며 돌아서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가 서 있던 곳 앞 진열대는 텅 비어 있었다. 호기심이 들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진열대 가장 위에 작은 상자가 하나 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자신보다 두 뼘은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저 상자를 원하는 것이 분명했다. 콧노래를 부르며 오른쪽 팔에 끼워둔 장바구니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즈리얼을 슬쩍 쳐다본 후 발걸음을 옮겼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움을 줘야 한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특히 너처럼 덩치가 크고 힘도 센 사람은 더더욱 남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까지 하셨다. 지금이야말로 남들보다 뛰어난 신장을 활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머니께 칭찬을 받는 상상을 하며 세트는 손쉽게 진열대 위에 놓인 상자를 집어내렸다.

"저, 저기..!"

다만 생각보다 남자의 발걸음이 생각보다 빨랐다. 기껏 그를 위해 가져왔는데 전해주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그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당겨버렸다.

"헉..! 괜찮아..?!"

아니나 다를까 세트가 끌어당기는 힘을 이기지 못한 남자는 크게 휘청이다 자신과 부딪히고 말았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리기 위해 두 손을 빠르게 어깨 옆으로 들어올렸다. 살짝 고개를 숙이자 파란 머리카락들이 자신의 가슴 앞에서 찰랑이고 있었다.

"미안. 다치진 않았지? 다름이 아니고.. 이거."

 그가 뭐하는 짓이냐며 화를 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재빨리 진열대 위에서 가져온 상자를 들이밀었다. 절대 시비를 걸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아주길 바랐다. 다행히 남자는 화를 내거나 세트의 멱살을 잡아올리는 대신 눈 앞에 나타난 상자에 관심을 주었다. 조금씩 움직이는 남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안심을 하는 순간 갑작스럽게 고개를 든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도 모르게 험한 말이 튀어나올 뻔 했다.

이마를 세게 부딪힌 탓인지 자신을 올려다보는 붉은 눈동자는 약간의 물기를 품고 있었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는 두 눈동자는 보석이라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눈동자만 아름다웠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남자의 얼굴 중 아름답지 않은 것은 없었다. 중력에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도, 오똑하게 솟은 코도, 자신보다 도톰해보이는 입술도... 본능적으로 입술을 달싹이며 굳은 침을 삼킨 세트는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이 무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심호흡을 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키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까 보니까 이거 찾고 있는 것 같길래.."

말하자 남자의 시선은 다시 아래로 향했다. 그 아름다운 붉은 빛이 사라지자 변태로 오해받지 않았다는 안심보다는 조금 더 쳐다보고 싶었다는 아쉬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진짜 미쳐버린건가 싶을 정도로 스스로의 감정이 당황스러웠다.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는 상대에게 이 정도의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말이나 되나 싶었다.

"오지랖이었으면 미안. 그.. 부딪힌 것도.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상자를 건네받는 과정에서 손가락 몇개가 스치듯 부딪혔다. 체온이 낮은 편인지 그의 손은 살짝 서늘했다. 안 그래도 평균보다 높은 체온에, 흥분까지 해버려 거의 불타고 있는 자신의 손으로 그의 차가운 손을 녹여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처음 마주치자마자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녀석이 (물론 상대는 전혀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손까지 낚아챈다면 정말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를 받을테니, 아쉬운 마음을 꾹꾹 누르며 남자의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남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심 고맙다는 인사를 기대하고 있었던 세트는 흘러나오는 실망감을 숨기지 못했다.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그에게 아름답지 않은 부분은 단 한 곳도 없었으니 분명 목소리도 기가 막힐 것이라 생각했다. 한참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세트는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가볼게..! 맛있게 먹어!"

그리곤 그대로 뒤를 돌아 남자에게서 멀어졌다. 그도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면 자신을 붙잡든, 소리를 지르든 할 것이라 생각했다. 운명을 느낀 것은 자신뿐일지도 모르니 기대하지 말자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은 자꾸만 느려졌다.

불러주겠지? 불러세우겠지? 나를 뭐라고 부르려나? 저기? 이봐요? 만약 '앞에 가는 잘생기신 분' 이러면 어떡하지?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난리였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운명의 사랑을 느낀 파란머리의 남자가 자신을 붙잡고 돌려세워 갑작스러운, 그러나 부드러운 키스를 해주는 상상까지 해버린 세트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솟아오른 광대를 느꼈다. 다른 사람이 보면 수상해보이진 않을까 싶은 찰나 보이지 않는 시야의 아래쪽에서부터 불쑥 튀어나온 이즈리얼이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 있어?"

톡 튀어나와 있는 토끼 같은 앞니가 보일 정도로 환한 이즈리얼의 미소가 어쩐지 얄미웠다. 마치 너가 무슨 일을 겪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이것저것 떠벌리기 좋아하는 녀석에게 첫눈에 반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들켜버린다면 순식간에 이상한 소문이 돌지도 몰랐다.

"아, 아니 그냥.. 누굴 좀 도와주고 왔어."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대충 둘러댔다.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한 청각으로 점점 멀어지는 남자의 발소리를 들었지만 차마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미련 없이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모습을 봐버린다면 이성을 잃고 그를 쫓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사랑은 생각보다 질긴 인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본래 계획대로 이즈리얼과 함께 SNS 영상의 주인공을 만나러 간 곳에서 다시 한 번 그를 마주했을 때, 세트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어머니의 말씀이 맞았다. 성실하고 착하게 살다보면 언젠가 그 보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오늘이 바로 그 보답을 받는 날이라며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가 계실 방향으로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서로의 이름을 밝히고 자기소개가 끝나면 아까 가게에서 마주치지 않았냐며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다. 어쩌면 이건 운명인 것 같다는 농담으로 위장한 진심을 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다 보일 정도로 두 눈을 크게 뜨며 이즈리얼을 빤히 쳐다보더니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날 이후 아펠리오스와 제대로 눈을 마주쳐본 적이 없었다. 처음 몇 번은 우연일 것이라 넘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강한 확신이 들었다. 그는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요즘따라 운동에 집중을 못한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하루종일 그 이유에 대해 고민해보았지만 영 짚이는 곳이 없었다. 사적인 대화도 해본 적 없는데 말실수를 했을 리는 없었고.. 땀냄새가 나나 싶어 이즈리얼에게 부탁해 향수라는 것도 뿌려봤지만 여전히 그는 의식적으로 눈을 피했다. 심지어 향수를 뿌린 날에는 슬쩍 멀어지기까지 했기에 이즈리얼이 큰 맘 먹고 샀다는 그 향수는 이제 쓰레기통 안에 들어있었다. 목소리를 잃은 이후로 세상과 단절되다 싶이 살아왔다고 하길래 원래 숫기가 없고 조용한 편인가 생각했다. 그런거라면 자신이 이해해줘야지. 부담스럽지 않게 천천히 다가가자. 생각하며 바닥을 기어다닐 때조차 없었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는데 이즈리얼이랑은 사적인 문자까지 주고 받는 사이란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순식간에 우울해졌다. 다시 한 번, 술기운에 무거워진 머리를 테이블 위에 내리꽂았다. 그릇과 식기들이 튀어오를 정도로 강하게 내려쳤지만 생각보다 아프진 않았다. 이마보다 더욱 쓰라린 곳이 있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쉽게 고개를 들지 못했다. 술김에 쓰러진 척이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조심스럽게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길이 느껴졌다. 흐린 시야로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손을 따라 올라갔다. 답지 않게 잔뜩 찡그린 미간이 마지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취하긴 취했나보다. 이런 착각을 할 정도라니. 스스로가 안쓰러워 실 없는 웃음만 자꾸 흘러나왔다.

"...좋아해."

고백은, 특히 운명의 상대에게 하는 고백은 가장 로맨틱한 공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로 할 예정이었는데. 술과 감성에 취해버린 입은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였다. 안그래도 미움 받는 와중에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다시는 보지말자며 뺨을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말도 안되는 변명이라도 했을테지만 어쩐지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만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서히 붉어지는 모습이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졌다.

세트는 청력만큼이나 감이 좋은 편이었다. 비록 지금은 술에 취해 헤롱거리고 있긴 했지만 오랜 시간동안 쌓아온 그의 직감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부드럽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이, 걱정스럽다는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빛이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

"너는?"

그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확신을.












진짜 개 진지하게 고민해봤는데 원작에서는 침착, 덤덤한 아펠이 하트스틸에서는 앙큼한 질투쟁이가 된 이유는 세트가 먼저 꼬셔놓고 모르는 척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개자식 날 꼬셔놓고 모른 척해? 하고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고 있는 것임..

근데 아펠리오스는 몰랐다.. 세트는 이미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음을............

여기까지가 사귀기 전이고, 사귄 이후에도 아펠이 눈에 쌍심지를 켜는 이유는.. 여전히 세트는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굴어대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런 세트에게 한눈에 반할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





관심이 필요합니다.

호두 R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